경주 대릉원 폭설에 솔가지 부러지는 '죽비 소리' /오태진
열흘 전쯤 겨울 휴가를 경주 안강읍에서 시작했을 때 동해안엔 사흘째 폭설이 쏟아지고 있었다.
경주 북쪽 안강이 포항에서 가깝긴 해도 눈 걱정은 안 했다.
겨울 경주는 갈 때마다 늘 포근했으니까. 아닌 게 아니라 안강에는 부슬부슬 비가 내렸다.
옥산서원 앞 자계천은 겨울 계곡답지 않게 맑은 소리 내 흐른다.
비에 불어 봄 개울처럼 지절댄다. 계곡 따라 선 회화나무 느티나무 이팝나무들도 기운을 차렸다.
거북등처럼 갈라진 소나무 껍질이 촉촉하게 젖어 빛난다. 굴참나무에 낀 이끼가 파랗게 깨어났다.
시리도록 투명한 물 위로 나무 그림자가 춤춘다. 점묘화를 그린다. 금세 봄이 올 것만 같다.
옥산서원은 조선 중기 곧은 선비, 큰 학자 이언적(李彦迪·1491~1553)을 모신다.
자계천 거슬러 간 계곡가에 그가 짓고 살던 독락당(獨樂堂)이 있다.
바른 소리 하다 벼슬에서 쫓겨나 쓸쓸했을 시절이 집 이름에 담겼다.
계곡 건너편 낙엽 쌓인 언덕 대숲이 그의 기개인 듯 푸르다.
이언적이 나고 자라 뜻을 세운 동쪽 양동마을로 갔다. 추적추적 질긴 비에 온 마을이 고요하다.
어두워질 때까지 고샅길을 천천히 걸었다. 돌담 너머 화장기 없이 단아한 옛 집들을 기웃거렸다.
저녁 짓는 연기가 맵싸하게 깔렸다. 600년 이어 온 양반 마을, 거기 밴 세월의 향기를 맡으며 평온했다. 마음에 난 모들이 깎여 나갔다.
칼럼 관련 일러스트
따끈한 초가 민박 방에 묵었다. 아침 방안에 앉은 채로 뜰을 내다본다.
처마 끝 볏짚들이 똑똑 낙숫물을 떨군다. 간짓대로 받친 빨랫줄 따라 쪼르르 빗방울이 달렸다.
먹을 것 찾아 화르르 참새 떼가 날아왔다 날아간다. 바깥주인이 아침밥을 상째 들고 왔다.
한 사람에 5000원 하는 7찬 밥상이 황송하다.
곱게 부친 배추전부터 개운한 황태국까지 안주인 손맛이 여간 얌전한 게 아니다.
잘 익은 석박지는 빈 접시 들고 가 더 얻어먹었다.
잠시 비 그친 아침나절, 어제 못 본 고택(古宅)들을 마저 보고 경주 시내로 갔다.
비가 오락가락하건 말건 경주박물관을 꼼꼼히 구경하고 보문호변 콘도에 들었다.
12층 방 저 아래서 어른 아이들이 까르르 웃는다. 온천수 쓰는 옥외 수영장에서 물놀이가 한창이다.
그 모습에 계절을 잊었더니 정신 차리라는 듯 함박눈이 퍼붓는다. 경주에 폭설이라니.
눈은 이튿날 아침까지 앞이 안 보이게 쏟아졌다. 호숫가 벚나무들이 하얀 겨울꽃을 잔뜩 피웠다.
눈꽃이 버거워 가지가 축 처졌다. 경주 복판 유적들을 걸어서 다니려고 했던 날인데…. 찻길에 나가봤다.
보문호 순환도로를 차가 드문드문 엉금엉금 간다. 어쩌다 다니는 제설차가 감당을 못한다.
버스 지붕에 쌓인 눈을 보니 간밤에 20㎝는 내린 모양이다. 차를 갖고 나갈 엄두가 안 난다.
그래도 콘도에 갇혀 있기는 억울하다. 차려입고 현관에서 서성이다 마침 들어온 택시를 타고 나섰다. 길가 여기저기 눈에 빠지고 사고 난 차들이 서 있다.
시내는 도로 사정이 낫긴 해도 인적이 끊겨 을씨년스럽긴 마찬가지다.
택시 기사에게서 돌아갈 때 연락할 전화번호를 받고 대릉원에 내렸다.
신라 왕과 왕족 무덤 스물셋이 모여 있는 고분군(群)이다.
들어서자마자 관리소 사람들이 전기톱으로 나무를 자르고 있다.
눈 무게를 못 견딘 소나무가 몸통 절반이 부러져 산책로에 드러누웠다. 남은 줄기도 많이 기울어 베어낸다.
전기톱 소리 그치자 사방이 정적에 잠겼다. 이따금 우지끈 솔가지 부러지는 소리만 들려올 뿐이다.
노송(老松)들이 어깨에 얹고 있던 눈을 못내 털어내면서 작은 눈사태가 난다.
꺾인 솔가지가 곳곳에 널렸다. 천마총까지 솔숲 길을 간다.
잔디 덮여 구릉 같던 무덤들은 가까이서도 잘 보이지 않는다. 풍만한 곡선을 눈이 삼켜버려 하얀 하늘과 분간이 안 된다. 흑백 천지에 간혹 오가는 사람들 옷이 원색 점을 찍는다. 담처럼 선 대숲도 눈을 못 이겨 양쪽으로 부채 펴듯 쓰러졌다.
코앞에 봄이 와 있다고 자랑하듯 잔뜩 꽃눈을 부풀렸던 목련은 봄은커녕 설경(雪景) 빛내는 소품이 돼버렸다. 옷도 카메라도 흠뻑 젖는 줄 모르고 눈과 마음을 빼앗긴다.
천마총 보고 돌아 나오는 솔숲에도 가지 꺾이는 소리가 요란했다.
이상국은 그 소리를 시 '대결'에서 '빛나는 자해(自害) 혹은 아름다운 마감'이라고 했다.
"조금씩 조금씩 쌓이는 눈의 무게를 받으며/ 더 이상 견딜 수 없는 시점에 이르기까지
/ 나무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김선우는 중국 고승 혜가의 '입설단비(立雪斷臂)'를 떠올렸다.
혜가는 눈밭에서 팔뚝을 잘라 달마에게 바치며 도(道) 공부를 청했다.
시인은 "나는 무슨 그리 독한 비원(悲願)도 이미 없고/ 단지 조금 고적한 아침의 그림자를 원할 뿐
/ 아름다운 것의 슬픔을 아는 사람을 만나/ …
생나뭇가지 찢어지는 소리를" 듣고 싶다 했다.
꿈꾸듯 대릉원을 걷고 눈보라 속에 홀로 선 첨성대도 마주했다.
보문단지 돌아가려고 콜택시를 불러도 차가 없단다. 보문로가 눈에 폐쇄됐다고 한다.
어쩌다 지나가는 택시를 잡았더니 기사가 "그래도 한번 가보자"고 해 겨우 콘도로 돌아왔다.
눈은 이튿날 낮 경주 떠날 때까지 그치지 않았다.
얼마 안 가 영천 지나자 거짓말처럼 파란 하늘과 보송보송 마른 고속도로를 만났다.
집에 온 뒤로도 한참 실감 나지 않는 경주의 사흘이었다.
그러더니 경주에서 애꿎게 젊음들을 앗아간 참사가 났다.
솔가지 부러뜨린 설해(雪害)는 세상 사람들에게 정신 차리라고 내리치는 죽비였을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