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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지하철 역명의 유래
1호선 역명유래 (해설)
101)신평(新平) : 신평동(新平洞)은 신평동(新坪洞)이라고 기록된 적도 있으며 북쪽에 강한 강바람을
막아주는 산이 병풍처럼 둘러지고 앞에는 낙동강이 만입(灣入) 되었던 곳에 간척지가 전개되어 있는
밝고 따뜻한 마을이다. 신평동은 망후촌이라 불리기도 한다. 그 유래의 하나는 조선중기 임경업 장군
의 조카가 이곳으로 피신해 와서 살았다는 구전때문에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임경업 장군이 영의정
김자점 일파에 의해 역적으로 몰려 9촌까지 몰살당했을 때 그의 조카 절충장군(折衝將軍) 임중생이
의주에서 신평까지 피난을 와서 살게 되었는데, 누가 자기를 잡으려고 올까 봐 뒤를 돌아 보았다고 한
다. 그래서 망후촌이라는 이름이 생겼다고 전한다. 다른 하나는 신평동의 지리적 위치에 따라 마우란
이름이 붙여진 것으로 해석된다. 그 위치로 보아 다대진(多大鎭)의 후망소(侯望所)였던 까닭에 망후촌
(望後村)이라고 불리기도 하였다. 이곳은 원래 모래 등이 많아 어패류가 많이 잡힌 곳이나, 1939년 이
곳에서 장림까지 제방을 쌓아 강의 만입부(灣入部)가 농지로 변했다. 신평은 '새로운 평지'라는 뜻으
로 지어진 이름으로 새마을, 신촌 , 새벌, 새마 등과 통하는 지명으로 파악된다.
신평동은『동래부지(1740)』 에는 보이지 않고,『경상도 동래군가호안(1904)』에 신평동이란 행정지
명이 처음으로 기록이 보인다. 1992년 9월 시조례에 의해 신평1,2동으로 분동되었다.
102)하단(동아대앞)(下端) : 하단동(下端洞)의 옛 마을 이름은 평림리(平林里)라고 불린 일이 있으며 하
단리라고 불리기도 했다.동래부지(1740)에 의하면, 동래군 사천면을 다시 상단과 하단으로 나누
는데 上端을 사상지역이고 下端은 사하지역이다 그런데 당리·괴정리·감천리· 구평리·신평리·장림리·다
대리를 모두 사천면 즉 하단이라 하였다. 동명의 유래에 대하여서는 구덕산이 용호몰리(용호머리)이
고 거기에서 강을 향하여 괴정 뒷 산줄기를 이루어 뻗은 곳이 아래몰리(아래머리)이니 아래몰리의 끝
이 아래치로 불려졌다는 설이다. 또는 낙동강류의 맨 아래쪽이라는 뜻에서 아래치 혹은 끝이라는 데
서 하단이라는 이름이 생겨날 수도 있었다고 보아진다. 또 한가지는 사천면(沙川面) 하단중에서 인구
가 가장 번창하는 대표적인 지역이라 사천면 하단의 지명이 이곳에 붙게 되었다는 설이다. 일설에는
동래부지(1740)에 기록된 구초량을 하단을 이른 것이라는 말도 있다. 그러나 이 설은 '구초량리는
관문에서 32리에 있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다른 하단 지역들이 관아와의 거리가 '40리' 이상인 점을
고려할 때 거리 차이가 너무 많이 나기 때문에ㅜ아닌 것으로 생각된다. 1914년 하단동이라 하여 동래
군 사하면에 편입되었다가 1942년 부산부에 편입되었다. 1975년 사하출장소에 1983년 사하구에 속
하게 되었다. 1992년 9월 인구의 증가로 인하여 하단 1,2동으로 분동되었다.
103)당리(사하구청)(堂里) : 당리동(堂里洞)에는 제석골(帝釋谷)이라고 불리는 계곡이 있다. 이 계곡에
제석단을 쌓고 기우제를 드린데서 붙여진 듯하며 일설에는 제석골에 사당을 짓고 여신을 모신데서 온
것이라는 속설도 있다. 지금도 이곳에는 제석사라는 사찰이 있고 기우제(祈雨祭)를 위해 찾아오는 사
람이 많다고 한다. 이 절 부근에서는 고려시대의 목엽문와편(木葉文瓦片)이 발견되었으며 그 밖에는
별다른 유적이나 유물이 발견된 바 없다. 그러나 누석단(壘石壇)도 있어 민속학적인 면에서 매우 중요
시되고 있다. 이 마을 뒷산까지 괴정의 목마장이 뻗어 있는데 이 부근에서는 성이 잘 보존되고 있다.
제석이란 불교용어로 제석곡이란 이름이 붙은 곳도 상당히 많은 편이며 이런 곳에는 대개 기우제단이
있다.가까이에는 아치섬을 제석곶이라고 하며 여기에도 역시 기우소가 있었던 것이다. 그 제석곡에
사당이 있어 지난날에는 여신을 모셨다고 한다. 그래서 신주를 모신 당집의 곳이라 하여 당리가 되었
다는 것이다. 당리동은 1914년 동래군 사하면에 편입되었다가 1942년 부산부 구역확장에 따라 부산
부에 편입되었다. 1957년 서구 사하출장소가 설치되었다가, 1983년 사하구의 승격으로 오늘에 이르
고 있다.
104)사하(沙下) : 동래부지(1740)에 의하면, 동래군 사천면을 다시 상단과 하단으로 나누는데 上
端을 사상지역이고 下端은 사하지역이다. 사천면의 ‘사’와 하단의 ‘하’를 따서 사하라고 하였다.
105)괴정(槐亭) : 괴정동(괴정동)은 사람들이 살기좋은 조건을 갖추고 있어서 조선시대부터 사람들이
취락을 이루고 살아온 곳이다. 괴정동의 뒷 줄기인 속칭 '아래머리' 구덕산을 '용호부리'라고 부르는
데, 그 이유는 낙동강쪽으로 뻗어내린 줄기를 이렇게 부르며 풍수지리설에서 온 이름인 듯하다. 구덕
산의 강안(江岸)에 뻗 은 말맥(末脈)이 병풍처럼 둘러져서 세찬 폭풍과 낙동강을 불어 내려온 강풍을
막아주고, 동쪽에는 시약산이 솟고, 남쪽에는 금티산이 솟아 그 줄기가 서쪽으로 나지막한 구릉을 이
루어 해풍을 막아주는 방파제 구실을 하고 있다. 지금의 괴정동을 옛날에는 목장리라 했다. 이 괴정동
주위는 조선시대에는 국 마(國馬)를 기르는 목장이었는데 이 괴정동의 목장이 가장 규모가 크고 목장
으로서 중심지가 되었다. 특히 다대진 관하의 목장으로는 괴정동의 목장이 가장 규모가 컸던 모양이
니 괴정동을 목장리라고 부르게까지 되었고, 지금의 희망촌 일대를 마꼴 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그때
다대포첨사가 목장을 감독하는 감목관이었는데 어느 감독관 때 감목행위가 너무 지나치게 가혹해서
마을사람들이 팔정자나무 아래서 그 감목관을 성토하다가 비참한 죽음을 입었다고 한다. 그 팔정자나
무의 하나가 지금 부산시 보호수로 지정된 회화나무인데 이 나무가 있는 정자를 괴정이라 했고, 이 괴
정으로 괴정동이란 마을 이름이 바뀌었다고 한다. 1914년 대티동 일부를 편입하였으며, 그때 부산부
에서 동래군 사하면으로 편입되었다. 1942년 부산부의 확장에 따라 부산부에 편입되었으며, 1959년
괴정1,2동으로 1965년 시조례에 의해 괴정1동을 괴정1,3동으로 분동하였다. 1979년 8월 괴정1동이
괴정1,4동으로 분동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106)대티(동주대학)(大峙) : 大峙(대치)의 .峙(치)원음이 「디」라 해도 「지」「치」로 구개음화 된지
오래다. 그런데 구개음화 버릇되기가 심한 영남지방에서 구개음화 이전의 「대티」의 「대티고개」로
지금도 남아있다. 이에 대해서는 국어학자 박자흥교수가 실제 답사를 한 바에 의하면「대티」 이전은
「한티」었다는 것을 조사 당시의 古老들의 말에서 확인되었다고 한다. 큰 고개로서의 「한」과 峙의
원음 「디」가 「티」로 소리나서 「한티」였는데 그 「한」이 「大」로 쓰게 되면서도 「티」는 본디
나던 소리인 구개음화 이전의 상태를 지속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로 미루어 보아 「대치고개」는 「
한티」고개에서 나온 것이 사실인 것 같다고 「한티고개」가 「대티고개」가 되어서도 종전에 일컬어
지던 「티」소리를 지키고 있는 것으로 보아진다.
107)서대신동(西大新洞) : 서대신동(西大新洞)의 옛 지명은「닥밭골(楮田)」또는 고분도리」이다. 딱
박골 또는 딱밭골 등은 닥밭골을 말하며 닥나무가 많이 나는 골이라는 뜻이다. 또 전하는 바로는 보수
천가에 버드나무가 많았다 고도 한다. 고분도리란 마을 이름은「고불」·「드르」에서 온 이름이 아닌
가 생각된다. 「고블」은 고리짝을 말하며,「드르」는 들을 말하므로「고블드르」는 고리짝을 만드는
들이 된다. 닥나무와 버드나무 그리고 고리짝 들판을 미루어 생각해보면 이 일대에 부곡(部曲)이 존재
했을 가능성이 있다. 대신동이란 마을 이름이 처음 생긴 것은 1914년으로 추정되며, 보수천의 호안공
사 이후 일본인이 대거 밀려와 서 생긴 새로운 시가지를 한새벌이라 부른 데서 비롯되었다. 한새벌의
「한」은 큰길을 한길이라 하듯이 큰대(大) 또는 태(太), 새는 새로운이라는 뜻의 신(新), 벌은 넓은 땅
이라는 뜻을 가진 동(洞)이므로, 대신동은 한새벌의 한자식 표현이라 할 수 있다. 일본인 주거지가 되
기 이전까지는 부민포에 속하기도 하고, 대치리의 일부에 속하기도 하던 곳이 대신리라는 새로운 지
명을 얻게 되었다. 서대신동은 1926년서대신정과 동대신정으로 구분되었고, 광복이후 1947년 일제식
명칭만 바꾸어 서대신동 1,2,3가로 부르게 되었다가, 1959년 동명개정 때 서대신1,2,3동으로 바꾸어
부르게 되었다. 1970년 서대신3동을 3,4동으로 분동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108)동대신동(東大新洞) : 동대신동(東大新洞)의 옛 지명은「닥밭골(楮田)」또는「고분도리」이다. 딱
박골 또는 딱밭골 등은 닥밭골을 말하며 닥나무가 많이 나는 골이라는 뜻이다. 또 전하는 바로는 보수
천가에 버드나무가 많았다고도 한다. 고분도리란 마을 이름은 「고불」·「드르」에서 온 이름이 아닌
가 생각된다. 「고블」은 고리짝을 말하며,「드르」는 들을 말하므로「고블드르」는 고리짝을 만드는
들이 된다. 닥나무와 버드나무 그리고 고리짝 들판을 미루어 생각해보면 이 일대에 부곡(部曲)」이 존
재했을 가능성이 있다. 대신동이란 마을 이름이 처음 생긴 것은 1914년으로 추정되며, 보수천의 호안
공사 이후 일본인이 대거 밀려와서 생긴 새로운 시가지를 한새벌이라 부른 데서 비롯되었다. 한새벌
의「한」은 큰길을 한길이라 하듯이 큰대(大) 또는 태(太), 새는 새로운이라는 뜻의 신(新), 벌은 넓은
땅이라는 뜻을 가진 동(洞)이 므로, 대신동은 한새벌의 한자식 표현이라 할 수 있다. 일본인 주거지가
되기 이전까지는 부민포에 속하기도 하고, 대치리의 일부에 속하기도 하던 곳이 대신리라는 새로운
지명을 얻게 되었다. 동대신동은 1926년 동대신정과 서대신정으로 구분하게 되었고, 광복 이후 1947
년 일제식 명칭만 바꾼 동대신동 1,2,3가로 불리우게 되었고, 1959년 1월 동명개정 때 동대신1,2,3동
으로 바꾸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109)토성동(부산대학병원)(土城洞) : 토성동(土城洞)이란 동명은 이곳에 토성이 있었다는 데서 붙여진
것이다. 이 토성은 아미동 구 화장장 부근을 중심으로 아미골 아래쪽에 반월형으로 축조된 성으로서
현 토성중학교 부근을 통과하며, 성내 면적이 3∼4천평 되는 반월성이다. 성의 높이는 4∼5척이 되었
다는 기록이 있다. 그런데 성의 모양이 반월형이라는 사실이 주목된다. 이 성은 1906년 일본거류민단
에 의해 설립된 부산고등여학교(현 부산여고 전신)를 현 토성중학교 자리에 신축할 때부터 파괴되기
시작하여 토성초등학교 건물을 비롯한 건물이 차례로 들어서서 현재는 거의 흔적을 찾기 어렵지만,
단편적으로 토성지임을 확인할 수 있는 부분도 있다. 아미동 중턱에 올라서서 이 부근지대를 관찰하
면 토성이 둘러졌던 높은 지대를 헤아릴 수 있는 것이다. 대마도 문서인『초량화집』에 보면, 이곳에
토축성(土築城)이 있다고 하나, 이 성의 양식이 일본성의 축조방식과는 판이하게 다른 반월성이므로,
옛부터 전하여 오는 토성을 일본군이 진소(鎭所)로 이용한 것에 불과할 것이라고 생각된다. 토성동이
란 이름은 바로 이 토성에서 비롯된 것이 명확하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부민동 일부를 분할하
여 토성정 1,2,3정목이라 하였다. 1947년 7월 일제식동명 개정 때 일제식 명칭이 아니라 하여 토성동
1,2,3가로 고쳤다가, 1959년 1월 시조례에 의해 초장동1,2가를 병합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110)자갈치 : 충무동 해안통 주변의 생선상인들이 1946년 10월에 생어상조합(임의단체)을 결성하게
된 것이 오늘날 자갈치 시장이 생기게 된 효시이며. 원래 남항 일대의 용두산쪽 자갈돌이 많아 자갈치
로 불리웠으며, 일제시대에는 남민정으로 지칭되다가 해방이후 영도의 남항동에 대하여 남포동이라
고쳐부르게 되었다. '자갈치'란 지명은 자갈해안에서 비롯되었다는 설과 '활어'만 거래되는 자갈치란
어종의 명칭에서 유래되었다는 두 가지 설이 있다.
111)남포동(南浦洞) : 용두산에서 내려다보이는 남포(南浦) 일대의 바닷가를 자갈치라 한다. 이 자갈
치는 부산을 대표하는 명물중 하나이다. 남포동 바닷가 쪽에 시장과 횟집이 들어서 있어 '자갈치'라는
이름에 걸맞은 모습은 어디에도 찾아볼 수 없다. '자갈치'는 본래 '자갈+치로' 구성된 지명이다. 이 지
명은 이 해안이 매립되기 전에 이미 명명된 것으로 본래 주먹만한 크기의 옥돌자갈들로 이루어진 수
려한 자갈해안이었기 때문에 명명된 것이다. '치'는 '언저리, 언덕빼기'라는 뜻이니 이에 '자갈치'는 '
자갈언저리'라는 지형적 특성으로 말미암아 명명된 지명이다. 지금은 그 아름다운 바닷가의 경치는
볼 수 없고 이름만 남아 과거의 아름다움을 상상해 볼 수 있게 한다. '남포동'은 '남포'에서 유래한 것
이다. 남포는 영도대교 (일명 영도다리)로부터 보수천 하구를 지나 부산공동어시장에 이르는 남항의
해안에 해당하는데 본래 이곳은 자갈치였다. 그런데 이곳이 매립되면서 일본식 지명인 '남빈'으로 불
리다가 광복 이후인 1947년 우리식의 한자 지명인 '남포'로 바뀌어 지금의 동명으로 되었다. 1977년
시조례에 따라 중앙동과 동광동 일부가 편입되었고, 1982년 법정동인 대교동 3가와 동광동 1가가 편
입되었다. 또한 1982년 충무동1,2,3가를 남포동4,5,6가로 편입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112)중앙동(中央洞) : 영선산 아래 골짜기의 맞은편 산봉우리가 해면(海面)에 돌출해 있었다. 이 두 개
의 봉우리는 용두산의 좌청룡등(左靑龍嶝)에 해당된다고 한다. 두 봉우리의 사이에는 논이 있었는데
그 곳을 논치라고 불렀으며, 산 아래의 좌우에는 논치어장이 있었다. 이 논치어장은 현재의 중부경찰
서 남쪽에 있는 중앙동 지역내의 유일한 고유지명으로 알려진 것이다. 개항 이후 중앙동 거리 바로 아
래지역은 바닷가였으므로 당시에는 시가지의 발전은 어려웠다. 당시 초량왜관은 11만평이라 하지만
그 중앙에 용두산(龍頭山)이 자리하고 있어 실제 사용 가능한 면적은 7만평 정도 밖에 되지 않았다.
이 때문에 해안을 매축하여 시가지를 형성할 목적으로 1902년에 부산매축주식회사가 설립되어, 이를
중심으로 북빈매축공사가 추진되었다. 이 매축하여 생긴 지역의 이름이 이른바 새마당이며, 새로생긴
넓은 땅이란 뜻이다. 이곳을 일제시기에는 매축허가를 받은 일본인의 이름을 딴 좌등정과 고도정, 부
두에서 하역관계로 큰 창고가 생겼다 하여 붙여진 대창정, 경부선 철도의 시발지라는 데서 경부정이
라는 이름이 붙여지기도 했다. 광복이후 부산역(지금의 본부세관 맞은편 소화물 취급소)을 가진 중앙
부에 위치하여 있다는 뜻에서 1947년 동명개정 때 중앙동으로 개칭하였다. 1982년 5월 시조례에 의
해 법정동인 대교1,2,3가를 중앙동 5,6,7가로 명칭이 바뀌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113)부산역(釜山驛) : 지하철 정거장은 부산철도역의 승객을 연계 수송하기 위하여 철도역 서편에 설
치하고 정거장이름을 부산역이라고 제정하였으며부산철도역은 부산시 중앙에 위치하여 우리나라 제
1의 항구도시의 관문으로서 1905.1.1 초량역으로 영업을 개시하여, 1965.11.1 부산진역으로 통합되
기도 했으나 1969.6.10 현 역사를 준공하여 다시 영업을 개시하였다. 부산의 지명에 대하여『세종실
록지리지』에는 "동래부산포(東萊富山浦)"라 하였고, 신숙주의『해동제국기』에도 "동래지부산포(東
萊之富山浦)"라 하였으며, 또 같은 책『삼포왜관도(三浦倭館圖)』에도 "동래현부산포(東萊縣富山浦)"
라고 기록해 놓고 있다. 이때의 부산포는 '부자부(富)'자를 사용하고 있다. 1481년(성종 12)에 편찬되
고 그후 여러번 증보된『동국여지승람(1481)』산천조에 보면, "부산은 동평현(오늘날 당감동 근처)에
있으며 산이 가마꼴과 같으므로 이같이 이름하였는데 그 밑이 곧 부산포이다. 항거왜호가 있는데 북
쪽 현에서 거리가 21리이다."라고 하여 산 모양이 가마꼴과 같아 부산(釜山)이라고 하였다는 부산이라
는 이름이 나오고, 그후 이를 그대로 인용하여 부산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114)초량동(草梁洞) : 초량동(草梁洞)의 유래는 1678년 초량소산(草梁小山)인 지금의 용두산 주위에
왜관이 설치되기 이전, 지금의 부평동에 어민들이 얼마간 살았을 뿐 초량 이남은 사람이 살지 않은 억
새풀과 띠풀의 초원지대로「샛디」라하여 초량이었다. 지금의 중구· 동구·서구지역도 마찬가지로 모
두가 초원지대였다. 이 초원지대인 풀언덕을 초량이라 했는데 그 초량이란 이름이 맨 먼저 쓰인 곳은
그때의 사천면(沙川面)인 지금의 서구 일대였다. 그뒤 지금의 초량을 신초량이라 하게 되었다. 그러자
니 동래부사 정현덕은 같은 고을에 같은 이름이 둘 있을 수 없다하여 신초량을 초량이라 하고, 구초량
을 부민동이라 하게 했다고 한다. 그때의 부민동은 지금의 부민동에서 남부민동까지를 말했고 신초량
인 초량은 지금의 초량에서 남쪽으로 용두산 끝자리까지를 말했다. 풍수상으로 부산의 지형은 엎드려
있는 소의 모습인 여와우형(如臥牛形)이라 하여 풀밭이 있어야 하기에 초량이란 명칭이 생겨났다는
설도 있다. 한편, 초량동(草梁洞)은 조선후기 해정리(海丁里)라고 하였으며, 이 지역에는 고분이 있었
고 해정리의 해변은 노송이 울창하여 이곳을 일인들이 기석빈(棋石賓)이라 불렀다. 이는 바로 물로 씻
은 깨끗한 돌들이 널려 있어서 흡사 바둑돌과 같았다는데서 불리어진 이름이다. 초량동은 1959년 시
조례에 의해 동개편 때 초량1,2,3,4,5동으로 나누었다가 1970년에는 초량4동을 인구의 증가로 초량4
동과 초량6동으로 분동하였고, 초량5동은 인구감소로 인해 1995년 10월 초량3동에 흡수·통합되어 오
늘에 이르고 있다.
115)부산진(釜山鎭) : 부산진의 명칭은 임진왜란 당시 부산포구의 관문이라고 할 수 있는 부산진성에
서 유래
116)좌천동(佐川洞) : 좌천동(佐川洞)이라는 이름은『동래부지(1740)』에 나오는 좌자천(佐自川) 이라
는 이름의 약칭이다. 좌자천은 가야산 및 감고개에서 시작되어 지금의 수정동의 중앙을 거쳐 부산진
동쪽을 돌아서 바다로 들어가는 작은 개천을 말한다. 이 좌자천의 주변에 있었던 마을이 좌자천리이
며, 이는 각기 1,2리로 나뉘어져 있었다. 좌천동의 해안은 조선말기에 개운포라 불리었다. 이 개운포
란 이름은 부산에 단일 왜관이 설치되었고, 또 임진왜란 이후 부산의 국방을 튼튼히 할 필요에 따라,
울산군 대현면(大峴面)의 개운포를 없애고 지금의 좌천동 해안으로 옮겨 그 이름을 그대로 사용한데
서 비롯된 것이다. 이는 기장현의 두모포를 오늘날 수정동 해안으로 옮기면서 그 이름을 사용하여 두
모포리라고 부른 것과 마찬가지이다. 좌자천 지역에 인가가 광범하게 산재해 있었다. 범천동 일부와
좌자천 일부가 범일동으로 개편되자, 좌자천리는 좌자천이 된 것으로 보인다. 좌자천이란 이름의 유
래에 대해서는 몇가지 설이 있다. 하나는 이곳이 바다의 입구이므로 태풍의 피해가 잦은 데서 붙여진
이름이거나, 물이 깊지 않고 잦은 물이라는 데서 붙여진 이름으로 좌천동(佐川洞)이 되었다고 한다.
1959년 동개편 때 좌천1,2,3동으로 나누었다가, 1970년 좌천2동을 2,4동으로 분동하여 오늘에 이르
고 있다.
117)범일동(凡一洞) : 범일동(凡一洞)은 동구 범6동에서 범4동으로 이어진 계곡 주위로 숲이 우거져
있는 그 계곡의 내를 범내라 했다. 범천(凡川)은 계곡 중간을 흐르는 내를 가리키며, 이를 범내라 부른
것은 이곳 냇가에 때때로 범이 나타났기 때문이라 한다. 오늘날은 범천이라 부르고 있는데, 이는 호랑
이를 뜻하는 범이라는 음을 한자에서 빌려 표기하였기 때문이다. 지금의 범내골 시장통에 세워져 있
는 "호천석교비"는 범내가 호랑이 내라는 것을 입증해 주는 근거가 되고 있다. 범일동의 서쪽 산비탈
은 '널박'이라 불렀다. 널박의 뜻은 이 주변에 민가가 밀집해 있는 상태, 즉 인가가 널리 밀집되어 있
다는 뜻에서 붙여진 이름이거나, 이곳이 양지인 데다 앞에 있는 바닷물이 반사하여 낮에도 유달리 늘
밝다는 뜻에서 온 것으로 짐작되기도 한다. 인가가 널리 밀집하여 있다는 뜻으로 보는 것이 옳을 듯하
다. 그 범내 주위로 마을이 형성되자 범천1리 범천2리라 했는데 일제강점 이후 범천1리와 범천2리가
병합될 때 범천1리의 약칭인 범일동(凡一洞)을 동명으로 삼았다. 1959년 시조례에 의해
범일1,2,3,4,5동으로 나누었다가 1970년 범일4동을 4동과 6동으로 분동하였다. 1975년 구역조정으로
범일3동 일부를 남구 문현동에 편입시키는 동시에 일부를 범일2동과 범일5동에 편입시키고 범일3동
을 폐지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118)범내골 : 범일6동 범천시장 서쪽 계곡을 범내골이라 불럿다. 이 계곡 중간을 흐르는 내를 범매라
고 불렀다. 이곳 냇가에 범이 때때로 나타났기 때문에 범내 호천(虎川)이라고 불렀다. 오늘날 범천(凡
川)이라고 부르는 것은 호랑이를 뜻하는 범(虎)의 음을 한에서 빌려 표기한 것이다 이 범내골(범냇골,
호천곡, 범천곡) 일대에 있던 마을이라 하여 범내골 마을이라 불렀다. 범내골 지명은 부산에서 꽤 오
래전부터 불리어 온 이름이다. 1740년에 간행된 <동래부지>를 보면, 동평면 소속에 범천(凡川)1리, 2
리가 있다. 범천1리는 관문에서 20리, 2리는 21리 거리에 있다고 하였다. 1904년 10월 편찬된 <경상
남도 동래군가호안>에 의하면 동평면 아래에 범일동·범이동·범삼동이 있다. 각 동의 호수는 67호, 89
호, 94호이며 김, 이, 박, 최, 정씨가 많이 살고 있다
119)서면(西面) : 서면(西面)은 현재 부산의 중심 상권을 형성하고 있는 교통·산업·유통·금융 등의 중
심지라 할 수 있을 만큼 번화한 곳이다. 이곳은 행정상으로 부산진구 부전동에 속하여 있다. 서면이라
는 명칭은 본래 조선시대 동래군에 속하는 면이었다. 1904년 간행된『경상도동래군가호안』에는 서
면이 서상면과 서하면으로 나누어져 있다. 현재 서면이라 불리는 지역은 서하면의 부전리 일대로서
서상면·서하면의 중심지였던 것으로 보인다. 부전동은 조선시대『동래부지(1740)』에는 동래부 동평
면 부현리(釜峴里)에 속하였다. 부현은 지금의 부암고개로 추정된다. 부전동은 부현리 중에서도 범전
리와 전포리에 인접하였다 하여 붙여진 이름으로 보이며, 1936년 시·군의 구획정리 때 부전동이라는
이름이 사용되었다
120)부전동(釜田洞) : 부전동은 주선시대의 경우 동래부 동펴면 부현리에 속하였다. 그 위치에 대해서
는 여러 가지 설이 있는데 그중에 하나는 부다대현이라는 것이며, 또 다른 하나는 지금의 당감동, 즉,
감물리에서 지금의 부암교차로 밑인 고대리로 난 고개라는 설이있다. 또 다른 하나는 오늘날 하마정
에서 양정동 송상현공 동상까지의 마비현의 별칭이라는 설이다. 이중에서 부다대현은 부산포에서 다
대포로 넘어가기 위해 넘는 고개로 위치상 합당치 못하며, 마비현은 광복 이후까지도 모너머고개 머
나머고개로 불리어 왔다. 따라서 부현리의 지명은 감몰리에서 고대리로 넘어가는 고개인 현 당감동
입구인 부암고개에서 나온 것으로 보인다. 이 고개에는 바위가 있었는데, 이 바위가 마치 가마솥(釜)
을 거꾸로 엎어놓은 것 같은 형상을 하고 있어 부현(가마고개)이란 지명이 붙여진 것 같다. 조선시대
의 동래부는 오늘날의 당감동, 부암동, 가야동, 범천동, 좌천동, 수정동, 초량 등을 포함하는 동평면
과 사직동, 거제동, 초읍동, 양정동, 범전동, 전포동, 만덕동을 포함하는 서면으로 나뉘어져 있었다.
이중 부현고개 아래 범전리·전포리와 인접하는 곳을 부전이라 이름 붙인 것으로 추측된다. 공식적인
명칭으로 사용된 것은 1936년 시·구 명칭 정비에 따라 공식적으로 釜田洞이란 이름이 붙여지고 이 일
대를 통칭 서면이라 부르고 있다. 1938년 부전동을 부전1, 2동으로 분동하였으며, 1954년 부전1동에
서 부전3동이 분동 되었다가, 1959년 부전3동을 부전1동에 통합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121)양정(楊亭) : 양정동은 황령산 아래에서 화지산에 이르는 지역으로 동래부지에서 밝히기를 동래
부는 황령산에서 5리, 양정리는 9리이며, 화지산은 10리로서 황령산 동쪽에서 화지산까지는 넓은 지
역을 지칭하였다 한다. 양정은 양지골에서 비롯되었으며 햇빛이 많이 드는 땅이라는 뜻이다. 우리말
의 양달은 양자의 음이 높아 한자의 양으로 표기되고, 지는 정자골이 정지꼴로 읽히는 것으로 보아 정
으로 된 것이다. 천연기념물 제187호로 지정되었다가 고사한 양정동 이팜나무는 수령이 약 500년으
로 추정되며 정자나무의 역할을 담당하였을 것으로 추측되며 양정이 양지골에서 유래되었다는 설을
더욱 잘 뒷받침 해준다. 1959년 간행된 부산시의 시세일람에도 羊亭洞을 楊亭洞이라 표기하였으며
같은 음의 풍류적 뜻으로 버들 '楊'자로 바뀌어져 사용되었다고 보인다. 1979년 양정1동을 양정1, 3
동으로, 양정2동을 양정2, 4동으로 분동되었으며, 1998년 양정3동을 양정1동에, 양정4동을 양정2동
에 통합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122)시청(연제)(市廳) : 연제구는 구석기 청동기 철기(삼한)시대를 거쳐 거칠산국이나 장산국에 소속되
었다가 통일신라 경덕왕(742∼765) 때 부산지역이 "동래(東萊)"군으로 개명됨에 동래군에 소속된다.
고려시대는 동래현이었고 조선시대는 동래부였다. 동래부 아래의 서면에 대조리 거벌리가 연제구의
전신이 되었다. 이후 조선초 15세기에 일본에게 3포를 개항할 때 항구명은 부산포(富山浦 후에 釜山
浦)였다. 이 부산이란 지명이 부각되다가 1910년 일본이 우리나라 국권을 탈취하면서 부산부란 행정
구역이 동래 대신 부산을 대표하게 되었다. 1942년 10월 1일 부산부 아래 동래출장소가 있었고 대한
민국 제1공화국시대인 1957년 1월 1일 동래구로 승격하여 거제동과 연산동이 동래구에 속하게 된다.
이때 연산리 거제리의 지명이 독립되고 1946년∼1985년까지 거제동의 4개동 연산동의 9개동이 탄생
된다. 1995년 3월 1일로 동래구에서 연제구가 분구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연산동의『연(蓮)』과
거제동의『제(堤)』를 따서 연제구(蓮堤區)라는 구의 명칭이 제정되었다.
123)연산동(蓮山洞) : 연산동(蓮山洞)이란 지명은 낮은 늪지대로 수련이 많고 배산과 황령산쪽은 산지
로 되어 연산이란 이름이 붙여졌다는 설과, 이 동네의 시발은 금련산(金蓮山)이어서 '연산(蓮山)'이라
했다는 설이 있다. 연산동 고분군의 유적으로 보아 삼국시대부터 이 지역에 사람이 살고 있었음이 입
증되며 배산성지 또한 삼한시대 성축으로 추측되고 있다. 지금의 연산동과 거제동의 낮은 지대는 지
난날 저습지로 연(蓮)이 자생했다. 그래서 연이 많아 연산리라 했다는 말이 있지만 실은 그게 아니다.
옛날은 연이 자생하는 저습지에서는 사람이 살기 마땅찮고 금련산 아래 산기슭에 사람이 살 수 있는
텃자리가 되었을 뿐이었다. 그러니 연산동의 이름은 금련산의 산 이름에서 유래한 동명이 배산의 서
북쪽으로 그리고 연이 피는 거제동의 얼안이었던 늪지대로 퍼져간 것이다. 연산동에는 토곡·안락·후
리(後里)·골리(谷里)·대리(大里)·신리(新里)· 전리(田里) 등의 자연마을이 있었으나 그 흔적은 찾을 수
없을 정도로 변모 발전하였다. 1914년 동래군 읍내면 지역에 속했다가 1942년 10월 부산부 동래출장
소 연산리가 되었다. 1946년 연산1동을 연산1,2동으로 분동, 1966년 1월 연산2동을 연산2,3동으로
분동, 1970년 7월 연산2동에서 연산4동이 분동되었다. 1975년 10월 연산2동에서 연산5동이, 1979년
8월 연산3동에서 연산6동이 연산4동에서 연산7동이 분동되었다. 1982년 9월 연산1동에서 연산8동이
1985년 12월 연산8동에서 연산9동으로 분동되어 부산지역 단일지역의 동으로서는 가장 큰 규모가 되
었다.
124)교대앞(敎大앞) : 부산교육대학교는 연제구 거제1동에 있으며 지하철정거장을 본대학 동편에 설
치함에 따라 지하철정거장이름을 교대앞이라라고 명명하였음 거제동의 지명유래에 대하여는 조선시
대 서면에 속하며 동리명은 거벌리라 하였다. 『동래부지(1740)』에는 "거벌리가 동래부에서 5리 떨
어져 있다"라 하였으며,『동래부읍지(1832)』에는 동래부에서 6리에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거벌(居
伐)은 거벌(巨伐)로도 표기되어 큰벌을 뜻하는 원야(原野)를 의미한다. 이 원야는 오늘날 거제동과 연
산동일대에 펼쳐있는 넓은 들을 말하는 것으로 이 지역이 바로 거벌리였다. 한편, 거제리에 있었던 옛
전차정류소 지역과 그 인근을 "홰바지"라 불렀다. 홰바지는 해받이라고 불리는데 '동래부에서 부산으
로 나들이갔다 돌아오면 하루해가 걸리는 지점이라는 설과 옛날 부산에는 5일마다 열리는 부산장(현
부산진시장)은 매4일과 9일에 열리는데 매우 성시를 이루어 영남에서는 대구장 다음으로 가는 큰 장
시(場市)였다. 동래에서 부산장에 가 물품을 매매하고 나면 해가 지므로 동래나 그 인근 촌락에 사는
사람들은 짐을 싸 짊어지고 집으로 돌아오는데 모두 보행(步行)이어서 가족들이 횃불을 들고 이곳까
지 마중을 나왔다고 한데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하였다는 설이 있다. 그 거벌리에 일제시대 범어천·온
천천·서천 등의 이름을 가지면서 동래로 흘러내려 오는 온천천에 큰 제방을 쌓아 온천천을 수영천과
합류케 했다. 그렇게 온천천에 큰 제방을 쌓고 난 뒤부터 거제리란 이름이 생겨났다. 거제동은 1957
년 구제 실시로 동래구에 편입되었다가 1970년 7월 시조례에 의해 거제1,2,3동으로 분동되었다.
1979년 인구의 급증함에 따라 시조례로 거제3동을 거제3,4동으로 분동되었다.
125)동래(東萊) : 《삼국지(三國志)》위지(魏志) 동이전(東夷傳) 변진(弁辰) 조에는 삼한시대 24개의 국
명 중에 '독로국(瀆盧國)'이 기록되어 있는데 이를 동래라는 설도 있다. 동래지역의 옛 명성은 거칠산
국·장산국·내산국 등으로 달리 불리어졌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동래는 '독로' 음에서 독로 → 동네
→ 동래로 음전되어 불리어지게 되었다고 볼 수 있는데 이는 통일신라 경덕왕 16년(757)에 지방행정
제도를 개편할 때 지방명을 모두 중국식 한자음으로 고침에 따라 동래라는 이름을 가지게 되었다. 그
런데 그중 거칠산군 또는 거칠산국은 '거친뫼', 황령산(荒嶺山)에서 따온 것으로 볼 수 있다. 혹은 동
래라 함은 동쪽(동해)의 내산을 말하는 것으로 이는 신선이 산다는 봉래산(蓬萊山) 또는 삼신산(三神
山)의 약칭이라는 설도 있다. 여하튼 통일신라 이후에는 동래라는 표준명칭이 계속 사용되었다
126)명륜동(明倫洞) : 명륜동(明倫洞)은『동래부지(1740)』의 방리조에 보면, 신향교동(新鄕校洞)이라
하였다. 조선시대는 고을마다 향교가 있어 그 향교가 있는 마을을 교동(校洞) 또는 교리(校里)라 하는
경우가 많았다. 동래도 조선초기 향교가 있는 마을을 교동이라 했는데 향교가 여러차례 자리를 옮겨
앉게 되자 구교동, 신교동이란 이름이 생겨나게 되었다. 한편, 이 일대는 옛부터 대낫들이라 불렀는데
, 이는 옛 명륜동에서 온천장으로 가는 길이다. 옛날에 동래부사가 부임해 올 때나 전임되어 갈 때에
이곳에서 이속, 군졸과 육방관속들이 환송 및 환영식을 거행하였는데, 기지창검의 늠름한 행렬이 자
못 장엄하여 '큰 나들이'라 한 것에서 '큰' 이 '대'로 바뀌어 '대낫들이'로 불린 명칭이다. 이를 일명
개복장이라고도 했다고 한다. 지금의 명륜동은 신향교동이라 하다가 1906년 교동이 되었다. 그 교동
이 구교동과 엇갈려 향교의 중심인 명륜당을 따서 1942년 명륜동이라 이름을 고쳤다. 1978년8월 명
륜1,2로 분동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127)온천장(溫泉場) : 온천동(溫泉洞)의 유래가 된 동래온천장에서 온천이 자연용출 한 시기는 신라시
대부터로 본다. 그러나 산저리(속칭 차밭골)와 장전리 일부를 합하여 행정구역상의 온천동(溫泉洞)으
로 독립시킨 것은 1910년 일제강점 이후가 된다. 그 이전은 금산마을(또는 금정마을)과 온정리 등 자
연마을의 이름으로 불려졌다 . 온정원(溫井院)이라 하여 공용으로 여행하는 관원을 위한 공영의 여관
이 있었을 뿐 집단적인 취락은 형성되지 않았다. 지금은 온천이 나면 위락시설을 갖추어 손님을 받아
돈을 벌어들일 궁리를 할 테지만 그때로서는 고관대작과 병자들이 오가서 민폐만 생길 뿐이었다. 그
래서 조선 말기에는 지금의 온천동 일부가 서면의 산저리에 속하고 일부는 북면의 장전리에 속했다.
조선시대 동래부에서 온천시설을 갖춘 바도 있었지만 대중성이나 영리성을 띄지 못했다. 동래온천이
본격적으로 개발된 것은 일제강점 이후 일본인들이 밀려들어 영리를 목적으로 한 위락시설을 갖추고
부터다. 1942년 부산부 동래출장소설치로 온정리라 하고, 1947년 일제식 동명 개정 때 미남·산저정의
두 마을을 합하여 온천2동으로 개정하였다. 1979년 온천2동을 온천2,3동으로 분동하여 오늘에 이르
고 있다.
128)부산대학앞(釜山大學앞) : 부산대학교의 소재지는 금정구 장전동에 있으며 이 대학 동편에 정거
장을 설치함에 따라 정거장이름을 부산대학앞이라고 제정'금정(金井)'과 장전(長箭)의 유래에 대하여
금정이란 이름은 아마도 부산의 진산(鎭山)인 금정산에서 유래했을 것이다. 기록에 의하면 이 산정의
한 바위에 둥근 우물이 패여있어 늘 마르지 않고 금빛으로 빛났는데, 한 마리 금색고기가 오색구름을
열고 하늘에서 내려와 노니 '금정산'이라 했다고 한다. 또한 금정산 산간에는 분지가 넓은 덕분에 공
기가 맑고 물맛이 좋아 옛부터 산성마을에서는 막걸리를 빚는 누룩의 명산지로 잘 알려져 있다. '장전
'이란 말 그대로 하면 '긴 화살'이다. 옛날에는 이 지역에 가늘고 긴 화살처럼 자란 대나무들이 숲을
이루고 있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129)장전동(長箭洞) : 장전동(長箭洞)은『동래부지(1740)』는 물론 이후 모든 읍지에도 북면 장전리(
長箭里)로 기록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동(洞)의 형성은 일찍부터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1952년 上
里인 장전마을과 下里인 소정마을을 합하여 장전동이라 하였다. 장전(長箭) 유래는 긴 화살이라는 뜻
으로 금정산의 선안 죽전마을과 같이 화살대를 만드는 대나무가 많이 생산되어 붙여진 이름이라 한다
. 장전의 전(箭)자는 이대 즉 설대로 이 지방 사투리로는 '서느대'라고 하는데, 우리나라 중부이남과
해안지방에 많은 바구니와 조리 따위를 만들기도 하고 담뱃대나 화살대를 만드는데 쓰이는 것을 말한
다. 즉 장전은『동래부지』의 군 기조(軍器條)의 장전(長箭)·편전(片箭) 등을 만드는 곳이거나, 그 원료
를 공급하는 곳이라 풀이된다. 장전동은『동래부지(1740)』『동래부읍지(1832)』 『동래군지(1937)』
에 모두 북면 장전리로 기록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일찍부터 이루어진 것으로 보인다. 1952년 자연마
을인 장전마을과 소정마을 합하여 장전동이라 하였다. 1970년 7월 행정구역 개편으로 장전1,2,3동으
로 분동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130)구서동(久瑞洞) : 구서동(久瑞洞)은『동래부지(1740)』의 방리조에 보면, 구세리(仇世里)라 기록되
어 있다. 대한제국시기 구세리와 두실리의 두 개 자연마을로 편성되었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구서(九瑞)·두실(斗實)·금단(琴端)의 3개 자연마을을 합하여 구서리라 칭하였고, 동래군 북면에 속하게
되었다.『동래군지(1937)』에는 구서리(九瑞里)란 명칭으로 기록되어 있다. 구서동의 지명유래는 이
지방 토박이들이 전하는 바에 의하면, 구세(仇世)는 구세동거(仇世同居)에서 따온 말로 중국 당나라의
장공예(張公藝)는 9대가 한 집안에서 살았다는 고사(古事)에서 집안이 화목한 것을 이르는데, 이곳이
바로 그러한 고장이라 하여 지어진 이름이라 전한다. 또한『동래부지』의 효자효녀조에 나오는 구주
성(俱周星)의 성씨를 따서 구세(九世)로 되었다 한다. 그러나 이는 실상과는 전혀 맞지 않으며, 구주성
또한 구서동의 인물이 아니고 사상(沙上)에 효자비가 있어 사실이 아니다. 그리고 구서동은 굿을 하는
동네라는 뜻에서 굿판 굿터에서 비롯되었을 것으로 풀이된다. 금정산 번우암이 이 동네 위에 있어 기
우소(祈雨所)로 치성을 드리는 장소였다. 여기에 굿을 자주 벌여 동네 이름이 구세가 되었으며 뒤에
뜻이 좋은 한자음으로 바꾸어 구서동이 되었다고 한다. 1985년 급격한 도시화로 인한 아파트 등의 신
축으로 구서1,2동으로 분동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131)두실(斗實) : 구서동(久瑞洞)은『동래부지(1740)』의 방리조에 보면, 구세리(仇世里)라 기록되어
있다. 대한제국시기 구세리와 두실리의 두 개 자연마을로 편성되었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구서
(九瑞)·두실(斗實)·금단(琴端)의 3개 자연마을을 합하여 구서리라 칭하였고, 동래군 북면에 속하게 되
었다.『동래군지(1937)』에는 구서리(九瑞里)란 명칭으로 기록되어 있다.
132)남산동(南山洞) : 남산동(南山洞)의 명칭은 조선시대부터 오늘날까지 줄곧 쓰여진 이름이다. 『동
래부지(1740)』방리조에도 동래부 북면에 남산리라 하여 '부 관문에서 북으로 18리에 있다'고 하였고
,『동래부읍지(1832)』 『동래군지(1937)』에도 북면의 남산리로 기록하고 있었다. 남산동은 남산·남
중(南中)·신암(新岩)의 3개 자연마을이 있으며, 남산마을 조금 떨어져 작은 마을로 반남산(半南山) 마
을이 있다. 이중 가장 취 락이 먼저 발달한 곳이 남산마을로 지세는 북이 높고 남쪽이 낮아 집을 지으
면 모두 남쪽으로 향하여 남산이라 하였다 한다. 한편, 남산동은 범어사의 사전(寺田)이 많아 범어사
에서 볼 때 남쪽 산등성이라 하여 남산동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신암마을은 이 지방사람들이 '서근덤'
이라 부르는데 썩돌이 많아서 한자식으로 표기한 것이라 한다. 동래에서는 옛부터 이 지방의 물이 좋
은 순서를 말하는데, 일(一) 남산 , 이(二) 초읍, 삼(三) 연지라 하여 남산의 수질이 으뜸이었으나, 청룡
동저수지가 생긴 이후부터는 물이 예전같지 않다고 한다.
133)범어사(梵魚寺) : <범어사 창건사적>에 따르면 이 절은 왜구를 막기 위해 창건되었다고 한다. 835
년(신라 흥덕왕 10년) 동쪽 해안에 왜인이 10만 병선을 거느리고 나타나 신라를 침략하려고 하여 왕
이 근심하고 있을 때 꿈속에 신인(神人)이 나타나서, "태백산맥에 의상(義湘)이라는 스님이 계시는데
항상 성중 1천, 범중 1천, 귀중 1천 해서 모두 3천 명의 대중을 거느리고 화엄의지법문(華嚴義持法門)
을 연설합니다. 동쪽 해변에 금정산이 있고 그 산정에는 높이 50여 척이나 되는 바위가 우뚝 솟아 있
는데 그 바위 위에 금색 우물이 사시사철 가득 차고 마르지 않을뿐더러 그곳에는 범천(梵天)에서 오색
구름을 타고 온 금어(金魚)가 헤엄치며 놀고 있습니다. 대왕께서는 의상스님을 맞이하여 함께 그 산의
금정암 아래로 가셔서 7일 밤낮으로 화엄신중을 독송하면 그 정성에 따라 왜병이 자연히 물러갈 것입
니다. 그리고 금정암 밑에서 화엄정진이 계속 이어지도록 한다면 자손이 끊어지지 않고 전쟁은 영원
히 없을 것입니다."하고는 곧 사라졌다. 놀라 깨어난 왕이 즉시 사신을 보내 의상을 맞아들여 함께
금정산에 올라 독경하자 왜선이 서로 공격하여 모든 병사가 빠져 죽었다고 한다. 이에 왕이 매우 기뻐
하며 의상을 예공대사로 삼고 금정산 아래에 범어사를 창건하였다는 것이다
134)노포동(老圃洞) : 노포동(老圃洞)은『동래부지(1740)』의 기록에 의하면, 북면 작장리(鵲掌里)와
소산리(蘇山里)에 해당하는 지역이다.『동래군지(1937)』에는 작장리와 소산리의 기록은 보이지 않고
대신에 노포리로 기록되어 있다. 노포동은 노포·작장·대룡(大龍)·녹동(鹿洞) 의 4개 자연마을로 구성되
어 있다. 이중 작장마을이 대표적인 마을이었으나, 울산방면으로 도로가 개설되면서 노포마을이 중심
마을로 대두되었다. 노포라는 지명은 농사를 잘 짓는 농부, 또는 농사에 경험이 많은 사람으로 늙은
농부를 뜻하는데, 노포동이란 농사가 잘되는 마을, 다른 곳에 비하여 농토가 풍부한 마을이라는데서
붙여진 이름으로 보인다. 1984년 발굴된 노포동고분군은 부산지방의 고분군 중 가장 앞선 시기의 유
적으로 노포동은 어느 지역보다 앞서 취락이 형성되었다고 볼 수 있다. 어떤이들은 노포동을 말 그대
로 오래된 채밭이라 풀이하기도 한다. 1910년에는 동래부에 속했다가, 1914년 부·군 통폐합에 따라
동래군 북면 노포리로 되었다. 1966년 리제의 폐지로 노포동으로 개칭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2호선 역명유래 (해설)
201)장산(萇山) : 가장 높은 산이란 뜻이며, 현 역세권의 좌동은 장산의 남쪽사면의 평야를 낀 지대로
서 장산의 주인 동네임.
202)중동(中洞) : 해운대 지구의 중심부이며, 좌우에 좌동 및 우동이 있음. 행정동명에 따라 중동이라
명명함
203)해운대(海雲臺) : 유학자인 최치원이 동백섬 일대의 절경에 심취하여 동백섬 남쪽의 암벽에 자신
의 호인 해운을 따서 해운대라는 글자를 새긴 것에서 유래.
204)동백(冬柏) : 동백, 두송, 송삼등이 울창하고 시민의 휴식처인 동백섬에서 유래.
205)시립미술관(市立美術館) : 현 역세권에 가장 뚜렷한 지형지물이고 부산시민의 미술저변확대와 미
술관을 찾는 내․외 관람객들의 교통 편의도모와 미술관의 대외 홍보하기 위해 시립미술관이라고 표
기함
206)센텀시티(Centum City) : 21세기 정보화 사회의 중추적 역할을 담당할 첨단 정보산업단지가 들어
설 예정이고, 역사가 컨벤션센터에 위치하여 역명을 센텀시티라 하게되면 대내외적으로 지대한 홍보
효과를 가져올 수 있음.
207)민락(民樂) : 수영의 진산 앞의 마을로 수영강의 어귀를 접한 놀이터인 까닭에 여러사람이 함께
즐길 수 있는 경치라는 데서 붙임. (여민동락)
208)수영(水營) : 조선시대 경상 좌도수군 절도사영이 있어서 관아명을 줄여 좌수영 이라 하며, 조
선시대 수군제가 확립된 후 주둔하였던 군대명칭으로서 경상 좌도수군 절도사영에서 수자와 영자를
따와서 이미 지명으로 굳어졌으며, 조선조 효종3년(1653)부터 수영으로 좌수영을 옮겨 갑오경장때까
지 좌수영이 있었던 지역임. 현재 법정동, 행정구역 동명이며 수영로, 연산로의 교차지점으로 수영동
의 중심지 역할을 하고 있으며, 3호선과의 환승지역으로서 시민들에게 널리 알려져 있음.
209)광안(廣安) : 해안과 모래벌을 가진 곳으로 넓은 해안이란 뜻의 廣岸이라 이름 짓는 것이 옳으나
풍수상 광안이라 하였음.
210)금련산(金蓮山) : 당초 황령산 야영장의 명칭이 부산시 조례개정으로 청소년 수련소로 개칭되었
고 황령산과는 거리가 멀어 의미가 없으며 정거장이 건설되는 지점이 금련산 자락이며 금련산은 수영
구의 진산임.
211)남천(南川) : 대연동의 석포에서 융기된 산지의 북안쪽을 남천 (동래부지도), 금련산에서 발원하
여 수영만으로 흐르는 시내를 남천이라 부름.
212)경성대ㆍ부경대(慶星大․釜慶大) : 현 역세권에 가장 뚜렷한 지형지물임.
213)대연(大淵) : 황령산의 북서는 준험하고 동남은 밋밋한 연봉이 10여개 남으로 뻗어내려 수많은 浦
와 池를 이름, 특히 이 일대에 큰 연못이 있어서 한자표기로 大淵이라 함.
214)못골 : 황령산의 주봉인 관창봉 아래 큰 못, 작은 못이 있었는데 이런 연유로 못골이라 불렀음.
215)지게골 : 지게는 마루나 바깥에서 방으로 드나드는 곳에 문종이로 안 밖을 두껍게 싸서 바른 외짝
문이란 뜻으로, 이 일대의 지형은 양편이 산으로 에워싸여 있어 마치 집안의 방으로 들어가는 문과 같
기 때문에 옛날로부터 찌게골로 불리워 왔다. (찌게골 → 지게골)
216)문현(門峴) : 지게골의 한문표기로서 지게에서 門을 고개에서 峴을 따옴.
217)문전(門田) : 문현동과 전포동을 합쳐 門田이라 불림.
218)전포(田浦) : 옛날은 황령산 아래 산자락 마을이 있었는데 논밭과 갯가로 되어 있어 밭개로 불리
었고, 이의 한자 표현이 田浦임
219)서면(西面) : 옛 동래군의 서쪽에 위치하는 면.
220)부암(釜岩) : 지금의 부암동과 부전동 사이에 가마솥(釜)을 거꾸로 엎어 놓은 것 같은 형상의 바위
가 있었다는데서 유래
221)가야(伽倻) : 가야는 갑우내를 한자로 표기한 것이며, 갑우는 정중(正中)의 뜻으로 지금의 가운의
원말. 지금의 구관으로부터 감고개(柹嶺), 가모고개, 가마고개를 넘어 가야동으로 왕래하여 이곳(가야
)은 교통의 요충지이며, 가야리란 명칭은 감고개 아래의 마을이란 뜻이 있음.
222)동의대(東義大) : 현 역세권에 가장 뚜렷한 지형지물임.
223)개금(開琴) : 이 마을의 모양이 꼭 거문고와 같이 길게 늘어져 있는 현상이라 개금이라 하였음.
224)냉정(冷井) : 가야에서 주례동으로 넘어오는 고개밑에 천하에 청량미를 자랑하는 맑은 물이 솟는
샘에서 유래하며, 이고개 이름을 냉정치라고 부르고 부락이름도 냉정동 이라함.
225)주례(周禮) : 주례로 기사(記寫)된 말의 어원은 바로 두리에서 왔을 것임.
(두리 → 두례 → 주례)
226)감전(甘田) : 甘東부락 = 신(神)의 마을에서 유래. 농토가 비옥하다는 뜻의 甘田.
227)사상(沙上) : 옛 사천면 상당(沙川面 上端)의 줄임말.
228)덕포(德浦) : 덕포의 옛이름이 덕개였으며 덕개의 위치는 낙동강을 향하여 길게 뻗어 나온 긴 동
산이 있는데, 여기에는 상강선대, 하강선대가 있고 이 강선대의 중간 도로변에 있는 바위언덕이 그것
이다. 이 언덕이 동리의 포구였고 여기에서 동리명인 덕포동이 된 것임.
229)모덕(毛德) : 덕포2동과 모라1동의 경계지점이고, 현재 모덕초등교, 모덕시장 등의 명칭이 통용되
고 있음.
230)모라(毛羅) : 마을(집회소)이라는 우리말의 고대어임.
231)구남(龜南) : 구포 남쪽의 자연부락.
232)구명(��明) : 주변지역 일대가 구명리라는 자연부락으로 주민등록법 시행이전의 기류초본에도
구명동으로 표기되어 있으며, 인근의 구포초등학교 전신인 구포사립구명학교가 1906년 교육계의 선
각자들에 의해 창설되어 이듬해인 1907년 10월 15일에 개교되었음.
233)덕천(德川) : 덕천동의 옛이름인 덕곡촌의 마을에 흐르는 시내로서 금정산에서 발원하여 낙동강
으로 유입하는 천을 덕천이라 불리움.
234)수정(水亭) : 수정마을은 구포 왜성 바로 밑에 위치하므로 이곳에 수정(戍亭)이 설치되어 붙은 이
름일 것임.
235)화명(華明) : 회붉이(日明)에서 온 것으로서 즉 “해”가 “화”가 되고 “붉”이“명”이 되었을 것으로
사료됨.
236)율리(栗里) : 밤, 즉 밝은 곳이란 뜻이니 예를 들면 “밤개울”, “붉개울”은 율포를 말하는 것이고
신하(神河)의 고어이다. 또한 이 마을에 신석기 유적과 당산 그리고 바위에 새겨진 성혈이 모두 신과
관련된 것으로 율리는 그 뜻을 내포함.
237)동원(東院) : 조선 세조때 김해군 생림면에 있던 도요진을 금곡동의 동원동으로 옮겨와 세곡수송
의 수참 및 왜인들과 무역하는 나루로 사용하였으며, 현재도 금곡동 장어마을 일대가 동원부락으로
불려지고 있음.
238)금곡(金谷) : 금정산의 골에서 유래.
239)호포(湖浦) : 옛이름은 호포(狐浦)이며, 낙동강변 포구의 자연부락명임.
3호선 역명유래 (해설)
301)수영(水營) : 조선시대 경상 좌도수군 절도사영이 있어서 관아명을 줄여 좌수영이라 하며, 조선시
대 수군제가 확립된 후 주둔하였던 군대명칭으로서 경상 좌도수군 절도사영에서 수자와 영자를 따와
서 이미 지명으로 굳어졌으며, 조선조 효종3년(1653)부터 수영으로 좌수영을 옮겨 갑오경장때까지 좌
수영이 있었던 지역임. 현재 법정동, 행정구역 동명이며 수영로, 연산로의 교차지점으로 수영동의 중
심지 역할을 하고 있으며, 3호선과의 환승지역으로서 시민들에게 널리 알려져 있음.
302) 망미(병무청)(望美) : 고려시대 충신 정서가 이곳에서 귀양살이 하면서 초하루와 보름날에 북쪽
을 바라보며(望) 임금(美)을 향하여 절을 했다는 뜻에서 망미동이라는 명칭이 유래.
303) 배산(盃山) : 망미1동의 뒷산인 배산에 거칠산국(신라의 변방에 위치한 속국)의 유적으로 추정되
는 배산성지가 있으며, 이 지역이 거칠산국의 중심지로 추정됨
304) 물만골 : 황령산 북쪽자락으로 물이 많은 골짜기라는 뜻으로 옛날 전리(田里)에 속한 작은 마을
지명으로 가뭄에도 물이 마르지 않는다는 뜻이 있고, 지금도 널리 쓰이고 있음. 전리는 밭이 많은 동
네란 뜻으로 금련산 골짜기에서 흘러 내리는 중앙천, 쌍미천, 마곡천의 수자원이 풍부한 지역임
305)연산동(蓮山洞) : 연산동(蓮山洞)이란 지명은 낮은 늪지대로 수련이 많고 배산과 황령산쪽은 산지
로 되어 연산이란 이름이 붙여졌다는 설과, 이 동네의 시발은 금련산(金蓮山)이어서 '연산(蓮山)'이라
했다는 설이 있다. 연산동 고분군의 유적으로 보아 삼국시대부터 이 지역에 사람이 살고 있었음이 입
증되며 배산성지 또한 삼한시대 성축으로 추측되고 있다. 지금의 연산동과 거제동의 낮은 지대는 지
난날 저습지로 연(蓮)이 자생했다. 그래서 연이 많아 연산리라 했다는 말이 있지만 실은 그게 아니다.
옛날은 연이 자생하는 저습지에서는 사람이 살기 마땅찮고 금련산 아래 산기슭에 사람이 살 수 있는
텃자리가 되었을 뿐이었다. 그러니 연산동의 이름은 금련산의 산 이름에서 유래한 동명이 배산의 서
북쪽으로 그리고 연이 피는 거제동의 얼안이었던 늪지대로 퍼져간 것이다. 연산동에는 토곡·안락·후
리(後里)·골리(谷里)·대리(大里)·신리(新里)· 전리(田里) 등의 자연마을이 있었으나 그 흔적은 찾을 수
없을 정도로 변모 발전하였다. 1914년 동래군 읍내면 지역에 속했다가 1942년 10월 부산부 동래출장
소 연산리가 되었다. 1946년 연산1동을 연산1,2동으로 분동, 1966년 1월 연산2동을 연산2,3동으로
분동, 1970년 7월 연산2동에서 연산4동이 분동되었다. 1975년 10월 연산2동에서 연산5동이, 1979년
8월 연산3동에서 연산6동이 연산4동에서 연산7동이 분동되었다. 1982년 9월 연산1동에서 연산8동이
1985년 12월 연산8동에서 연산9동으로 분동되어 부산지역 단일지역의 동으로서는 가장 큰 규모가 되
었다.
306) 거제(법원․경찰청)(巨堤) : 조선시대 서면에 속하며 거벌(巨伐)로 표기되어 연산동 및 거제동 일
대의 넓은 들을 의미하였으나, 일제시대 동래천에 제방을 쌓으면서 큰제방이 있는 마을이라는 뜻에서
거제(巨堤)로 불림.
307) 종합운동장(綜合運動場) : 조선중기 동래부 서면 거벌리로 불리다가 거평동으로 불려졌으며,
2002년 아시안게임 주경기장(종합운동장)이 위치하여 종합운동장으로 명명함
308) 사직(社稷) : 예부터 사직단이 있던 곳으로 社는 토지신이고 稷은 곡물신으로써 임금을 비롯한
지방수령이 토지신과 곡물신에게 제사를 드려 나라와 지방의 풍요와 안녕을 비는 곳이 사직단이며,
1914년 석사동, 거인동을 병합해 여고동이라하여 동래군 동래면에 편입되었는데 1916년 사직단의 이
름을 따라 사직동이라 불림.
309) 미남(渼南) : 예로부터 내려오는 자연마을로 자식이 성년이 되는 날 막걸리 1말을 대접하는 풍습
이 내려옴. 예부터 미남 마을이 존재하였고, 미남교차로 등 여건을 고려하여 미남이라 명명함
310) 만덕(萬德) : 임진왜란때 금정산 기슭인 이곳에 1만여의 피난민이 피난와서 모두 화를 면했었는
데, 이에 따라 1만여명이 덕을 입었다고 하여 마을이름이 만덕동이 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고려사절
요> 권26을 보면 충혜왕의 서자 석기의 머리를 깍고 만덕사에 두었다라고 한다. 이점에 미루어 만덕
사의 절 이름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임.
311) 남산정(부산기능대학)(南山亭) : 덕천동의 본 마을에 해당하는 자연 발생적 마을로서 정확한 유
래는 알 수 없으나 구포왜성(의성)과 관련된 명칭에서 유래한 것으로 추정되며, 정자(당산) 나무가 있
어 붙여진 자연마을 지명에 따라 남산정이라 명명함. 예부터 기비현 또는 사비현이라는 큰 고개를 오
르기 위한 길목으로 고개를 넘는 길동무를 기다려 만나던 곳이라고 기비골이라는 지명도 있음
312) 숙등(淑嶝) : 숙등마을의 유래는 여러 가지 설이 있으나 그 중 대표적인 것은 구포장에서 만덕고
개를 넘어 동래장으로 향하는 길목으로 임진왜란 후 수정(戍亭)이 있었던 곳으로 볼 때 수정이 변하여
숙등으로 되었다고 보는 설이 있음.
313)덕천(德川) : 덕천동의 옛이름인 덕곡촌의 마을에 흐르는 시내로서 금정산에서 발원하여 낙동강
으로 유입하는 천을 덕천이라 부름
314) 구포(구포) : 구포의 구(龜)에 대한 학설중에서 정인보의 설을 보면 구포라는 말은 ‘거뵈개’를 한
자로 적은 말이고, ‘거뵈개’는 낙동강 물 이름인 ‘갑우내’에서 왔다는 것이며, ‘구’를 신(神)으로 해석
하는 설이 있음, 구포를 상징하는 나루터의 원위치이며, 경부선 구포역과 마주보고 있어 구포역이라
명명함
315) 강서구청(江西區廳) 현재 대저 1,2동이 위치하고 있는 대저섬(삼각주)은 동서로 6Km, 남북으로
15Km에 이르는 큰 섬이며. 조선시대 문헌자료에 의하면 노전(蘆田)을 비롯한 전답에 관한 기록과 농
토를 보호하기 위한 제방축조의 기록이 있다. 인근에 강서구청이 있으므로 강서구청이라 명명함
316) 체육공원(體育公園) : 홍수 때마다 강물이 범람하여 물길이 한곳으로 세차게 맴돌며 모래를 쓸어
버려 큰못을 이루었는데 이 못가에 정자를 짓게 되어 연정이라 불리었으며, 정자의 동쪽은 동연정이
라 하고 서쪽은 서연정이라 함. 하키경기장, 양궁경기장 등 종합시설을 이용하는 시민들에게 친숙한 (
강서)체육공원이 있어 명명함
317) 대저(大渚) : 대저섬(삼각주)은 동서로 6Km, 남북으로 15Km에 이르는 큰 섬으로 서낙동강 어귀에
큰 모래톱이 형성되어 대저라는 지명이 유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