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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보좌로부터흐르는생명수 원문보기 글쓴이: 하늘산소
마23:13-39.
오늘 말씀은 존경받는다는 율법사들, 바리새인들에게 저주가 선포되어 지고 있습니다. 산상수훈에서 복을 여덟가지를 선포했다면 바리새인들에게 저주도 여덟개로 선포되어지고 있습니다. 이는 동전의 양면이 있듯이 복음의 양면성을 말씀하고 있다고 보겠습니다. 마태는 공생에 시작에서 팔복을 소개하고 공생애 끝나는 시점에서 팔화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왜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에게 화를 선포했을까요?
문제는 바리새인들이 하나님나라의 백성으로서 삶을 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본다면 바리새인들은 하나님을 진정으로 알지 못하였고 말씀으로서도 변화를 받지 못하고 또한 겸손과 사랑이 없고 자신이 가르치는 말씀대로 살지도 않은언행이 불일치 했습니다. 그런가하면 자신들이 행하는 모든 일엔 들어내서 사람들의 관심을 받고 칭찬받기를 좋아하고 상석에 앉아 가르치며 선생이라 칭함받기를 좋아 했습니다. 이런 자들을 향해 예수님은 화를 선포하셨습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예수님의 복음을 받아 들이는 자에게는 복이지만 배척하는 자들에게는 심판과 저주가 된다는 것을 가르치시고 있습니다. 오늘 주신 이말씀들을 살펴보고 또한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이 복이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첫번째 화의 근거는 구원의 문을 막고 있는 것입니다.
개역성경은 번역하지 않은 '데 휘민'그러나 너희들에게 예수님은 '우아이'화 있을진저, 이 단어는 슬픔이나 분노나 절망감을 나타내는 감탄사입니다. 무슨 의미일까요? 예수님은 '화 있을진저'라는 단어에 예수님의 고통과 분노를 표현한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바리새인들을 향한 슬픔과 애통의 감정도 함께 있음을 단어속에서 말하고 있습니다.
'외식''휘포크리타이'하는 서기관과 바리새인이여, '휘포크리타이'의 원형'휘포크리테스'는 '배우, 연기자'라는 본래의미와 함께 '가장하는 자, 위선적인 자'로 부정적 의미로 발전되어 쓰였던 단어입니다. 이단어를 바리새인들에게 적용해서 사용했다는 의미가 무엇일까요? 경건한 것처럼 가장했다는 것입니다. 겉과 속이 다르다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사람들의 눈을 속인 것입니다. 모세의 자리에 앉아서 하나님의 법을 그릇되게 가르치고 예수그리스도를 영접하여 구원의 자리에 이끄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기들도 안들어가고 백성들도 못 들어가게 막고 있는 그들을 향해 화있을진저.
우리에게 무엇을 알아 들으라고 하시는걸까요?
영적 지도자의 타락은 심각한 결과를 가져 온다는 것입니다. 성도 한사람이 타락하면 그와 주변의 몇사람이지만 목사의 타락은 그보다 훨씬 큰 영향을 미칩니다. 그래서 제사장의 속죄제물과 성도의 속죄제물은 다릅니다. " 기름 부음을 받은 제사장이 범죄하여 백성의 허물이 되었으면 그가 범한 죄로 말미암아 흠 없는 수송아지로 속죄제물을 삼아 여호와께 드릴지니"(레4:2), 그러나 평민이 죄를 범했을 때에 제물은 "평민의 한 사람이 여호와의 계명 중 하나라도 부지중에 범하여 허물이 있었는데 그가 범한 죄를 누가 그에게 깨우쳐 주면 그는 흠 없는 암염소를 끌고 와서 그 범한 죄로 말미암아 그것을 예물로 삼아"(레4:27-28), 이것이 무얼 말하는 걸까요? 죄의 파급의 무게입니다.
그러므로 영적인 지도자의 위치에 있는 자는 늘 자신을 살펴서 말씀에서 벗어나지 않았는지 혹은 말씀을 자신에게 맞도록 합리화 시키지는 않는지 점검하고 바로 서야 하는 것입니다. 지도자든 성도이든 모두다 언행을 조심하고 그리스도 향기가 되어야 합니다(고후2:15).그렇게 우리는 부름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행실을 보고 불신자들이 예수를 믿는다면 그들을 구원에 이르는 통로의 역할을 잘 한 것입니다. 이것은 성도들에게 천국 열쇠를 맡기신 주의 뜻이기도 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구원에 이르게 할지언정 구원의 문을 막고 있다면 자신도 천국에 못들어가고 주변에 있는자들도 못 들어가게 막고 있는 것이므로 주께로부터 화 있을진저 라는 심판을 받을 것입니다.
바울이 전합니다. "이 사람에게는 사망으로부터 사망에 이르는 냄새요 저 사람에게는 생명으로부터 생명에 이르는 냄새라 누가 이 일을 감당하리요"(고후2:16),
우리 성경에는 14절이 빠져 있는데 시리아사본에는 "과부의 가산을 삼키며 외식으로 길게 기도하니 이러므로 받는 판결이 더욱 중하리라 너희에게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여!" 이 부분을 포함하면 여덟가지 화로 보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막12:40절과 눅20:47절에 나오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KJV는 시리아 사본을 받아서 14절을 만들어 넣었다고 받아 들입니다. 혹 어떤이들은 사탄이 변개 시켰다고 하는데 원본이 없는 가운데서는 그렇게 주장하는 것도 잘못되었다고 생각이 듭니다.
15절에는 이방인 한사람을 유대교로 개종시키기 위하여 열심히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혼신의 힘을 기울였는데 그것이 지옥 자식을 만들었다고 하십니다. 역사가 요세푸스에 의하면 당시에 이방인을 개종시키기 위하여 열심이었다고 증언합니다. 본문에서도 바다와 육지를 두루 돌아 다닌다고 했습니다. 이는 모든 수단과 방법을 동원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그들의 최후가 지옥 자식이라는 것입니다. '지옥'을 살펴볼까요?
'지옥''게엔네스'의 원형은 '게엔나'는 '힌놈의 골짜기'를 의미하는 '게 힌놈'(느11:30)에서 유래된 헬라어로 예루살렘 남부와 남서부사이에 있는 계곡을 가리키는 명칭입니다. 그곳은 우상을 숭배하던 곳인데 제물이 사람을 화제로 몰록신에게 바쳤으며(왕하16:3) 예레미야 선지자는 그곳을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니라 날이 이르면 이 곳을 도벳이라 하거나 힌놈의 아들의 골짜기라 말하지 아니하고 죽임의 골짜기라 말하리니"(렘7:32)라고 심판을 선언했습니다. 세월이 흐르면서 그곳은 온갖 쓰레기와 죽은 동물과 범죄자에 시체가 던져져서 불에 타는 곳으로 변하여 갔습니다.
그곳에는 악취가 났으며 불이 꺼지지 않고 타오르고 불이 없는 한쪽에는 구더기가 생겨나서 죽지 않는 곳, 예수님을 이곳을 바라보시며 지옥을 말씀하셨습니다.(마5:22,10:28, 막9:43, 눅12:5) 예수께서 지옥 자식이란 말이 바로 힌놈의 골짜기에 던져져서 불에 태워지는 사람처럼 최후에 심판때에도 그렇게 불이 꺼지지 않는 지옥불에 떨어져 형벌을 받을 자, 그를 '멸망에 처해질 사람'이라는 의미입니다.
왜그럴까요?
하나님을 믿고 섬기는 곳까지는 잘 갔는데 그런데 그들을 가르치는 자들이 바르게 말씀을 가르치지 않고 또한 유대인의 악덕(15:5-7)을 답습하고 또한 자신들의 관습, 즉 이방인들이 지닌 습성들을 버리지 않고 있어 배나 지옥 자식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에게는 거룩함, 즉 세상과 구별됨이 있어야 하고 경건, 하나님께 예배드림이 있어야 하는데 이 부분이 없고 도리어 그들이 전에 하던 짓을 그대로 행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불교인이 예수를 믿으면 그의 옛 삶을 정리하여야 하는데 여전히 절에가고 불공을 드리고 예수님도 찾고 부처도 찾고 그러면 오히려 더 진노를 사게 된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앞에서 가르치는 자가 얼마나 책임이 무거운 것인지를 경고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16절에는 눈먼 인도자여 화있을진저, 이는 영적으로 무지한 것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17절에서 '우맹이여'즉 '어리석은 백성이여'라는 의미입니다. 이유를 18절에서 유대인들이 가르친 것이 제단으로 맹세하면 아무일 없고 그 위에 제물로 맹세하면 지켜라 했다는 것입니다. 19절에서 소경들아 어떤것이 크냐? 예물이냐? 그예물을 거룩하게 하는 제단이냐? 20절에서 제단으로 맹세하는 자는 제단위에 있는 예물과 함께 맹세하는 것이고 21절에서 성전으로 맹세하는 자는 성전에 계시는 이와 함께 맹세하는 것이며 22절에서 하늘로 맹세하면 하늘보좌와 그위에 앉으신 이로 맹세하는 것이다, 하셨습니다.
무엇을 지적하고 있나요?
하나님보다 재물에 더 관심이 많은 것을 지적하고 있습니다.(눅16:14), 오늘 우리에게는 무관하신 말씀일까요, 현대는 돈이 중심이 되어 사람을 평가하는 시대입니다. 교회안에도 같습니다. 물질을 초월해서 말씀앞에 바로 서기란 쉬운일이 아닙니다. 면목동 대망교회 최석봉 목사님의 간증인데요, 개척하고 어느날 어느 여자 집사님이 병을 낫게 해달라고 안수기도를 받으러 왔는데 바쁜 일 때문에 10분 정도 기다리라하고 볼일을 보고 있는데 그 교회 집사님이 와서 하는 말, 목사님 병이 나으면 30억을 헌금 한다고 해요, 그래 그 집사님 그냥 가시라고 해, 아니 목사님 기도해 주신다고 했잖아요? 그랬지 그런데 지금은 아니야, 왜냐하면 하나님의 은혜를 돈으로 거래할수는 없어, 그냥 돌려 보내...이러기는 쉬운 일이 아닙니다. 한국 교회에 몇분이나 계실까 들으면서 나 자신도 돌아 보았습니다.
바울은 디모데에게 권합니다. "부하려 하는 자들은 시험과 올무와 여러 가지 어리석고 해로운 욕심에 떨어지나니 곧 사람으로 파멸과 멸망에 빠지게 하는 것이라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탐내는 자들은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딤전6:9-10)
23절에는 십일조를 언급하시면서 거기에 의와 인과 신은 버렸다고 지적하십니다. 더 중한 바, '바뤼테라'는 '무게가 무거운'의 의미지만 여기서는 더중요한 것을 의미합니다. '의''크리신'은 '올바름''정의'를 의미하는데 이웃에게 올바르게 처신하고 말에나 행함에 해를 끼치지 않아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두번째, '인''엘레오스''자비''긍휼'은 나보다 더 약한 자들에게 베푸는 호의를 의미합니다. 세번째, '신''파스틴''믿음''신앙'의 의미입니다. 하나님과 인간 관계에 있어서 하나님의 대한 신뢰, 신실한 믿음을 의미합니다. 얼마나 신뢰합니까? 하나님은 미가 선지자를 통해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나니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은 오직 정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하게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미6:8), 즉 예수님은 이것도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한다고 하십니다. '할지니라''에데이'는 '당연히 해야 한다''마땅히 해야 한다'는 의미의 미완료 과거형으로 지속적으로 행하여야 한다고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하루살이는 걸러내고 약대는 삼키는 것, 사소한 것들은 열심히 지키고 무거운 하나님의 말씀은 아무 가책이 없이 무시해 버리는 것을 지적하십니다. 우리의 삶 가운데 이런 일들이 없는지 살펴 보시기 바랍니다. 그것을 25절에서 설명하고 있는데 잔과 대접의 겉은 깨끗이 하되 속은 탐욕과 방탕으로 가득찼다, 하십니다. '겉'은 깨끗이 하되, 이는 겉으로 보이는 곳에서는 거룩하게, 자비롭게 보이려고 구제도 하면서 외적인 것에는 열심히 한다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사람이 없는 곳에는 '탐욕''하르파게스'원형'하르파게'는 '강제로 빼앗다''약탈''강탈'의 의미가 있습니다. 보이는 곳에서는 과부에게 구제를 하지만 은밀한 곳에서는 과부의 가산을 약탈하는(막12:40)악행자라는 것입니다. 또한 '방탕'은'아크라시아스''자제력의 부족''무절제''방종'이라는 의미로서 내면에서 올라오는 강탈하려는 마음을 절제하지 못하는 것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그들의 모습이 내모습은 아닌지 돌아 보아야 합니다. 얼마던지 보이는 곳에서 교회안에서 천사처럼 가장 할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께서 말씀하십니다. 26절에서 먼저 안, 내면, 자아를 청소하라 하십니다. 그래야 겉사람도 깨끗해 진다고 하십니다. 속 사람이 중요합니다. 내 속사람이 주고 싶어야 겉사람이 움직여서 손을 폅니다. 눅11:41절에 보면 "그러나 그 안에 있는 것으로 구제하라 그리하면 모든 것이 너희에게 깨끗하리라"
깨끗해 진다는 말씀이 구제와 관계가 있음을 암시적으로 25절에서 주고 있습니다. 이는 육적인 것과 아울러 영적인 것도 나누어 주어야 합니다.
27절에는 회칠한 무덤같은 자에게 화가 있다고 하십니다.
우리의 장례문화로 본다면 산소를 이쁘게 꾸며 놓았어도 그속에는 썩어서 벌레와 뼈와 더러운 것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바리새인들이 산소를 닮았다고 하십니다. 겉은 아름다워 보일지라도 영적인 상태는 썩어서 냄새가 난다는 것입니다.(막7:1-23), 또한 겉으로는 옳게, 혹은 의롭게 보이는데 속에는 외식과 불법이 가득하다고 하십니다. 29절에서 선지자들의 무덤을 다시 쌓고 비석을 꾸미며 하는 말이 30절에서 선지자들을 죽이는데 바리새인인 자기들은 동참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31절에서 너희가 스스로 선지자를 죽인 자손임을 증거하고 있다 하십니다.
또한 그 조상들이 다 채우지 못한 악행을 마저 채우라 하십니다. 그 남은 악행이 무얼까요? 예수님을 죽이는 일입니다.
33절에서 뱀들아 독사의 새끼들아 너희가 어떻게 지옥의 판결을 피하겠는가? 절대로 도망갈수 없다고 하십니다. 이는 불가능한 일이며 구원을 얻을 수 없는 일이라고 하십니다. 가르치는 지도자로서 진리를 왜곡되게 가르치고 겉과 속이 다르고 속에는 탐욕으로서 방탕한 자들이 어떻게 지옥의 문을 피하여 갈수 있겠는가? 절대로 없다고 하십니다.(뱀은 간교함과 지혜의 상징이다, 고후11:3,창3:1)
34절...그러므로 너희는 예수께서 보내는 종들, 선지자, 지혜있는자, 서기관들을 죽이고 핍박할 것이라고 예언을 하고 계십니다. 여기서 서기관은 이들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복음을 바르게 전수하고 가르치는 그리스도의 제자를 의미합니다. '구박하리라''디옥세테''내쫓는 것을 의미'합니다. 즉 추방당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바울을 통해 경험을 할수 있습니다(행13:50,14:5,6)이예언은 사도들에게 성취되었습니다. 스데반은 돌에 맞아 죽었고 야고보는 칼에 목이 잘려 죽었고 베드로는 전설에 거꾸로 십자가에 달려 죽었습니다.
그러므로 땅위에서 흘린 의로운 피가 다 너희에게 돌아가리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세대에 돌아가리라,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을 믿는 것이 고난이 온다는 것이 이상한 일이 아니라고 하십니다. 히11장에는 "또 어떤 이들은 더 좋은 부활을 얻고자 하여 심한 고문을 받되 구차히 풀려나기를 원하지 아니하였으며 어떤 이들은 조롱과 채찍질뿐 아니라 결박과 옥에 갇히는 시련도 받았으며 돌로 치는 것과 톱으로 켜는 것과 시험과 칼로 죽임을 당하고 양과 염소의 가죽을 입고 유리하여 궁핍과 환난과 학대를 받았으니"
이세상은 사단이 공중 권세를 잡고 있어(엡2:2)성도는 칭찬이 아닌 박해가 뒤따르고 있습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너희를 연단하려고 오는 불 시험을 이상한 일 당하는 것 같이 이상히 여기지 말고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벧전4:12,13) 권면하고 있습니다. 예수님도 이 땅에서 고난을 받을 것이라 하셨습니다.(요15:19) 그러므로 성도가 핍박이 오면 통과하여야지 피해갈수는 없습니다. 고난이 당시에는 견디기 힘들지만 그 고난을 이겨내면 주께서 다시 오실 때에 영광의 면류관을 얻게 되는 방편이 되는 것입니다.
" 마음을 굳게 하여 이 믿음에 머물러 있으라 권하고 또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할 것이라"(행14:22)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하나님을 이용하여 나의 탐욕을 채우려 한다면 준엄한 판결을 피해 갈수 없습니다. 절대로 말씀을 왜곡시켜서 가르치면 자신도 지옥을 피할수 없고 그자를 따라가는 자도 피할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항상 말씀위에 바르게 서있나 확인하여야 합니다. 말씀이 찔림이 있으면 바리새인들처럼 대적하지 말고 기도자리로 들어가셔야 합니다. 반드시 주님은 평강으로 응답하십니다.
우리의 고난에는 유익이 있습니다. 절대로 내맘대로 타협하고 합리화시키지 말고 말씀으로 자신을 비추어 보시기를 바랍니다. 지금은 세상 끝에 서있습니다. 흔들리지 말고 굳게 믿음위에 서시고 승리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아멘..의정부 등대지기 하늘산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