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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을 각오로 왔다 윤석열 대통령의 비상계엄 선포에 항거한 한국 시민, 배경에 민주주의 역사 / 12/4(수) /서태교 서울 거주 언론인. 코리아 포커스 편집장
3일 22시가 넘어 야당을 반국가세력으로 간주하는 윤석열 대통령의 갑작스러운 '선포'로 시작된 45년 만의 한국 '비상계엄' 사태.
다음 날 오전 1시경 국회를 통과한 비상계엄 해제 요구안을 윤 대통령이 받아들여 이날 오전 5시경 국무회의에서 비상계엄 해제를 의결하는 것으로 마무리됐다.
● 키워드는 '국회'
이 기사를 쓰고 있는 지금 한국에는 여느 때와 다름없는 아침이 오고 있다. 오늘 아침 배달된 조간에도 전날 마감 후 일어난 일이라 계엄 두 글자는 보이지 않는다(각 신문별로 호외를 내고 있다). 책상 밑에서는 개가 코를 골며 자고 있다. 긴 밤이 지나고 모든 것은 환상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이런 편안한 글을 쓸 수 있을 정도로 비상계엄이 일찍 종식된 것은 운이 좋아서가 아니다. 시민들의, 그리고 국회의원들의 노력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것을 써서 일단 긴 밤의 마무리로 하고 싶다.
윤 대통령의 선포 직후 계엄사령부가 설치됐고 사령관에는 육군참모총장인 박안수 대장이 올랐다. 사령부는 3일 23시자로 다음과 같은 포고령을 발표했다.
[전역] 계엄사령부 포고령 (제1호)
자유대한민국 내부에서 암약하고 있는 반국가 세력에 의한 대한민국의 체제 전복 위협으로부터 자유민주주의를 지키고 국민의 안전을 지키기 위해 2024년 12월 3일 23:00부로 대한민국 전역에 다음 사항을 선포합니다.
1. 국회와 지방의회, 정당의 활동과 정치적 결사, 집회, 시위 등 일체의 정치활동을 금지한다.
2.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부정하거나 전복을 기도하는 일체의 행위를 금지하고 가짜뉴스, 여론조작, 허위선동을 금지한다.
3. 모든 언론과 출판은 계엄사령부에 의해 통제된다.
4. 사회 혼란을 조장하는 파업, 태업, 집회 행위를 금한다.
5. 전공의(역주: 레지던트)를 비롯해 파업 중이거나 의료현장을 이탈한 모든 의료인은 48시간 이내에 본업에 복귀해 충실히 근무하고 위반 시 계엄법에 따라 처단한다.
6. 반국가세력 등 체제 전복세력을 제외한 선량한 일반 국민은 일상생활의 지장을 최소화하도록 조치한다.
이상의 포고령 위반자에 대하여는 대한민국 계엄법 제9조(계엄사령관 특별조치권)에 따라 영장 없이 체포, 구금, 강제수색을 할 수 있으며, 계엄법 제14조(벌칙)에 따라 처단한다.
이번에 중요했던 것은 1, 3, 4였다.
이들은 사회를 통제하기 위한 수단이며, 특히 1은 비상계엄을 해제하기 위한 열쇠를 쥔 국회를 봉쇄하는 것으로 이어진다. 우리 헌법 77조는 계엄에 대해 이렇게 규정하고 있다.
◇ 제77조
(1)대통령은 전시·사변 또는 이에 준하는 국가비상사태에서 병력으로써 군사상의 필요에 따라 또는 공공의 안전질서를 유지할 필요가 있을 때에는 법률이 정하는 바에 따라 계엄을 선포할 수 있다.
(2)계엄은 비상계엄과 경비계엄으로 한다.
(3)비상계엄이 선포된 때에는 법률이 정하는 바에 따라 영장제도, 언론출판집회결사의 자유, 정부나 법원의 권한에 관하여 특별한 조치를 할 수 있다.
(4)계엄을 선포할 때에는 지체 없이 국회에 통고해야 한다.
(5)국회가 재적의원 과반수의 찬성으로 계엄 해제를 요구할 때는 대통령은 이를 해제해야 한다
이 중에서는 (5)가 중요하다.
계엄의 이유가 되는 국가비상사태가 회복되지 않을 경우(대통령이 자의적으로 그렇게 판단하는 경우도 포함) 대통령 이외에 계엄을 해제할 수 있는 곳은 사실상 국회밖에 없다.
● '서울의 봄' 그리고 '광주 5.18 민주화운동'
그렇기 때문에 한국에서는 계엄령과 국회 봉쇄가 한 세트가 된다.
45년 전인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 당시 대통령이 암살됐을 때 대통령 대행인 최규하 국무총리가 다음 날인 27일 제주도 이외 지역에 비상계엄령을 내리고 전두환 소장이 계엄사령관이 돼 실권을 잡았다.
그리고 그는 영화 '서울의 봄'에서 그려진 그해 12월 12일 쿠데타를 거쳐 신군부의 최고 실력자가 됐고, 이듬해인 1980년 5월 18일 0시 비상계엄령을 전국으로 확대한다.
이 과정에서 가장 먼저 한 것이 국회 봉쇄였다. 국회 앞을 탱크로 막고 의원들을 못 들어오게 해 계엄 해제 가능성을 무너뜨렸다.
이처럼 신군부가 국정을 완전히 장악한 가운데 광주에서 현대사 최대의 비극 중 하나인 광주 5.18 민주화운동이 벌어진다. 고립된 광주 시민들은 계엄군에게 짓밟혔다.
이 역사를 알기 때문에 윤 대통령이 비상계엄을 선포한 이날 국회의원과 시민들은 가장 먼저 국회로 향했다.
이미 많은 영상과 사진이 나왔듯이 국회의원은 시민의 도움을 받아 벽을 넘어 창문을 통해 회의장으로 들어갔고 보좌관과 비서진들은 바리케이드를 치고 회의장에 군의 침입을 막았다.
이번에 국회에 투입된 것은 한국에 있는 정병·특수전사령부의 제1공수부대였다. 이 점도 사람들의 머리에 공수부대가 시민을 학살했던 '광주'를 상기시킨 것은 아닐까.
● 시민의 소리
국회의원의 일은 계엄 해제 요구를 가결하는 것임이 분명하다. 그렇다면 시민에게는 어떤 역할이 있는가?
3일 밤부터 4일 새벽까지 수천 명의 시민이 경찰에 의해 봉쇄된 국회 앞에 모였다. 그 몇 사람에게 이야기를 들었어. 왜 국회에 왔느냐는 물음에 대한 답을 대충 나열해 본다.
"국회의원들을 응원하기 위해, 그들의 말을 뒷받침하기 위해 왔습니다. 뉴스를 듣고 바로 차로 1시간 넘게 달려왔습니다" (김태현 경기도) 수원시(45세 남성)
"국회의원을 지키기 위해 왔습니다. 우리 시민이 나와서 우리의 힘을 보여줘야 국회의원들이 우리 국민을 믿고 정의의 길을 가는 것 아닙니까" (김소연 서울시 56세 여성)
"의원들도 무서웠을 겁니다. 주위를 무장 군인들이 에워싸고 있으니까요" (강 씨 [가명서울시 50대여성)
"죽을 각오로 왔습니다. 마지막에는 군인들과 맞서 싸울 각오였습니다" (강모 씨 경기 고양시 64세 여성)
"목숨을 내던질 각오였어요. 우리 후세대를 위해, 아이들을 위해" (강모 씨 경기 고양시 60세 여성)
"먼저 국회를 봉쇄하겠다고 생각하고 국회에 왔습니다. 이렇게 국민이 저항하지 않았다면, 그리고 국회의원이나 기자가 저항하지 않았다면 이곳(국회 앞)은 이미 탱크나 장갑차, 공정부대가 장악했을지도 모릅니다.
여기 오면서 최악의 상황이 벌어질 거라고도 생각했어요. 하지만 그것을 알고 나서 국민들이 움직였습니다. 실제로 병사들의 국회 진입을 막은 시민도 있습니다" (박건영, 경기 안양, 55세 남성)
"부산에서 있었던 제사를 지내고 서울에 도착한 길로 왔습니다. 헬기에서 병사가 내려오는 장면을 본 것이 계기입니다. 독재는 쉽게 되는 게 아니지만 큰일 날 줄 알았어요" (임경택 서울시 66세 남자)
"국회의원을 불법으로 체포할까 봐 차로 왔습니다. 군이나 경찰을 생각하면 무서웠지만 남에게 맡기는 것이 아니라 한 사람의 시민으로서 할 수 있는 일을 하려고요.
한국 시민들은 박근혜 대통령 탄핵 때 스스로 움직이는 법을 배우고 있습니다. 술을 마시다가 뛰쳐나왔다는 젊은이, 잠옷 차림으로 나온 사람도 여기서 봤어요.(장준영 경기 38세 남자)
"역사적인 일이라고 생각해요. 촛불시위(편주8년 전 박근혜 탄핵시위) 때는 초등학생이라 참가할 수 없었기 때문에 (참여할 수 있어) 너무 좋았어요" (문광한 경기 오산시 21세 남자)
시민들이 분명한 목적과 의지를 갖고 국회 앞 '현장'에 왔음을 잘 알 수 있다.
이날 국회 앞 도로에는 즉석 무대가 마련돼 시민들이 쉴 새 없이 연설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 중 몇몇은 특히 젊은이들이 광주라는 단어를 입에 달고 다녔는데 큰 인상을 받았다.
나는 이전에 많은 희생을 치름으로써 민주화운동에 조리가 섰던 80년의 광주 5.18민주화운동을 사회혁신의 끝없는 샘물에 비유한 적이 있다.
시민의 모습은 44년 전 계엄군에 맞선 정신이 지금도 맥맥히 이어져 오고 있다는 증좌라고 할 수 있다.
● 기적이었던 것 아닌가
솔직히 고백하자면 저는 지금 이렇게 기사를 쓰고 있는 것에 대한 현실감이 별로 없다. 밤을 새워서가 아니라 비상계엄이 끝났다는 것, 아무 일 없이 아침을 맞이했다는 것이 믿기지 않기 때문이다.
일일 쿠데타로 끝날지도. 나는 윤 대통령의 비상계엄 선포 직후 X(옛 트위터)에 이렇게 썼다.
확실히 지금의 한국은 정부·여당과 야당이 지나친 대립 속에 있지만, 계엄령이 필요할 정도라고 인식하고 있는 사람은 거의 없다. 마지막에는 윤 대통령의 자폭에 그칠 것이라는 느낌이 널리 들었을 것이다.
그러나 만약 국회 안에서 한 발이라도 발포가 있었다면, 경찰이 시민을 때리면, 시민이 견디다 못해 경찰이나 군에 먼저 손을 댄다면, 우리 군 지휘관들이 냉정한 판단을 할 수 없는 상황이 되면 등 큰 혼란으로 이어지는 도화선은 곳곳에 존재했다.
그것을 막고 거의 완벽한 형태로 윤 대통령의 폭거를 봉쇄한 것은 기적이다. 국회 안팎에서 시민과 의원, 군이 제 역할을 자각하고 제대로 해냈다. 진짜, 진짜 다행이다.
나는 이번 일련의 취재를 통해 민주주의를 지키려는 우리 사회의 체력과 순발력이 피로 쟁취해 온 민주주의 역사에 의해 만들어지고 뒷받침되고 있음을 다시 한번 확인했다.
이대로 8년 전 탄핵 때는 이루지 못했던 사회의 전진을 꼭 이뤄냈으면 한다.
https://news.yahoo.co.jp/expert/articles/eb4ac57368e90261e03fedde2fb1a9b3a65f6562
「死ぬ覚悟で来た」…尹錫悦大統領の‘非常戒厳宣布’に抗った韓国市民、背景に民主主義の歴史
徐台教ソウル在住ジャーナリスト。『コリア・フォーカス』編集長
12/4(水) 11:06
「非常戒厳」の一報を聞きつけ国会前に駆けつけた市民たち。4日、筆者撮影
3日22時過ぎ、野党を「反国家勢力」と見なす尹錫悦大統領による突然の‘宣布’で始まった、45年ぶりの韓国「非常戒厳」事態。
明くる4日午前1時頃に国会で可決された「非常戒厳解除要求案」を尹大統領が受け入れ、同午前5時頃の国務会議(閣議)で非常戒厳解除を議決することで終わった。
●キーワードは「国会」
この記事を書いている今、韓国にはいつもと変わらない朝が来ている。今朝配達された朝刊にも、前日の締め切り後に起きたため「戒厳」の二文字は見当たらない(各紙別途の号外を出している)。机の下では犬がいびきをかいて寝ている。長い夜が明け、全ては幻だったかのようにも思える。
しかしこんなお気楽な文章を書けるほどに非常戒厳が早くに終息したのは、運が良かったからではない。市民の、そして国会議員の踏ん張りがあったからだ。これを書いていったん、長い夜の締めくくりとしたい。
尹大統領の「非常戒厳宣布」を受け、国会前に集結した市民たち。当初は集団を動く左派系政党や労組の旗が目立ったが次第に個別に来る市民が増えてきた印象だ。4日、筆者撮影。
尹大統領の宣布直後、戒厳司令部が設置され、司令官には陸軍参謀総長の朴安洙(パク・アンス)大将が就いた。司令部は3日23時付で以下のような布告令を発表した。
[全訳] 戒厳司令部布告令(第1号)
自由大韓民国内部で暗躍している反国家勢力による大韓民国の体制転覆の脅威から自由民主主義を守り、国民の安全を守るために、2024年12月3日23:00付で大韓民国全域に次の事項を布告します。
1. 国会と地方議会、政党の活動と政治的結社、集会、デモなど一切の政治活動を禁じる。
2. 自由民主主義体制を否定したり、転覆を企てる一切の行為を禁じ、フェイクニュース、世論操作、虚偽扇動を禁じる。
3. すべてのメディアと出版は戒厳司令部によって統制される。
4. 社会混乱を助長するストライキ、怠業、集会行為を禁じる。
5. 専攻医(訳注:レジデント)をはじめ、ストライキ中あるいは医療現場を離脱したすべての医療関係者は、48時間以内に本業に復帰し、忠実に勤務し、違反時は戒厳法によって処断する。
6. 反国家勢力など体制転覆勢力を除いた善良な一般国民は、日常生活の支障を最小化するよう措置する。
以上の布告令違反者に対しては大韓民国戒厳法第9条(戒厳司令官特別措置権)により、令状なしに逮捕、拘禁、強制捜索ができ、戒厳法第14条(罰則)により処断する。
今回重要だったのは、1,3,4だった。
これらは社会をコントロールするための手段であり、特に1は非常戒厳を解除するためのカギを握る国会を封鎖することにつながる。韓国の憲法77条は戒厳についてこう規定している。
国会の入口を封鎖する韓国警察。3日、筆者撮影。
第77条
(1)大統領は戦時・事変またはこれに準ずる国家非常事態において、兵力をもって軍事上の必要に応じまたは公共の安全秩序を維持する必要がある時には、法律が定めるところにより戒厳を宣布できる。
(2)戒厳は非常戒厳と警備戒厳とする。
(3)非常戒厳が宣布された時には、法律が定めるところにより、令状制度、言論・出版・集会・結社の自由、政府や裁判所の権限に関し特別な措置を行える。
(4)戒厳を宣布する時には、遅滞なく国会に通告しなければならない。
(5)国会が在籍議員過半数の賛成で戒厳の解除を要求する時には、大統領はこれを解除しなければならない
この中では(5)が重要だ。
戒厳の理由となる国家非常事態が回復されない場合(大統領が恣意的にそう判断する場合も含め)、大統領以外に戒厳を解除できるのは事実上、国会しかない。
3日晩、非常戒厳を宣布する尹錫悦大統領。これまで見たことのない焦点の合わない表情だった。YTNをキャプチャ。
●『ソウルの春』そして『光州5.18民主化運動』
だからこそ韓国では戒厳令と国会封鎖はセットとなる。
45年前の1979年10月26日、当時の朴正熙(パク・チョンヒ)大統領が暗殺された際、大統領代行の崔圭夏(チェ・ギュハ)国務総理が翌27日に済州島(チェジュド)以外の地域に非常戒厳令を出し、全斗煥(チョン・ドゥファン)少将が戒厳司令官となり実権を握った。
そして全氏は映画『ソウルの春』で描かれた同年12月12日のクーデターを経て「新軍部(朴正熙以降の軍部ということ)」の最高実力者となり、翌80年5月18日0時に非常戒厳令を全国に拡大する。
この過程で真っ先に行ったのが国会の封鎖だった。国会前を戦車で塞ぎ、議員を入れなくし戒厳解除の可能性をつぶした。
国会敷地内で待機する警察。この日国防部は24度のヘリ輸送を通じ230人の完全武装の戒厳軍を、さらに塀を越えて50人の兵士を国会内に投入した。4日、筆者撮影。
このように新軍部が国政を完全に掌握する中、光州で現代史最大の悲劇の一つ『光州5.18民主化運動』が起きる。孤立させられた光州市民は、戒厳軍に踏みにじられた。
この歴史を知るからこそ、尹大統領が非常戒厳を宣布したこの日、国会議員と市民は真っ先に国会に向かったのだった。
既に多くの映像や写真が出ているように、国会議員は市民の助けを借り壁を越え窓から議場に入り、補佐官や秘書陣たちはバリケードを作り議場への軍の侵入を阻んだ。
なお今回、国会に投入されたのは韓国えりぬきの精兵・特殊戦司令部の第一空輸(空挺)部隊だった。この点も人々の頭に空輸部隊が市民を虐殺した「光州」を想起させたのではないだろうか。
●市民の声
国会議員の仕事は戒厳解除要求を可決することであるのは明らかだ。では市民にはどんな役割があるのか?
3日深夜から4日明け方にかけて、数千人の市民が警察により封鎖された国会前に結集した。その何人かに話を聞いた。「なぜ国会に来たのか?」という問いへの答えをざっと並べてみたい。
キム・テヒョンさん(中央)、キム・ソヨンさん(右端)、カンさん(右から2番目)。みな初対面だが集会を通じ仲良くなったという。4日、徐台教撮影。
「国会議員たちを応援するために、彼らの言葉を支えるために来ました。ニュースを聞いてすぐ車で1時間以上かけて駆けつけました」(キム・テヒョン、京畿道[キョンギド]水原[スウォン]市、45歳男性)
「国会議員を守るために来ました。私たち市民が出てきて私たちの力を見せてこそ、国会議員たちが私たち国民を信じて正義の道を進めるのではないでしょうか」(キム・ソヨン、ソウル市、56歳女性)
「議員たちも怖かったはずです。周囲を武装した軍人が取り囲んでいるのですから」(カンさん[仮名]、ソウル市、50代女性)
カンさんたち。4日、徐台教撮影。
「死ぬ覚悟で来ました。最後の最後には軍人と対峙して戦う覚悟でした」(カン某氏、京畿道高陽[コヤン]市、64歳女性)
「命を投げ出す覚悟でした。私たちの後の世代のために、子供たちのために」(カン某氏、京畿道高陽市、60歳女性)
パク・コニョンさん。4日、徐台教撮影。
「まず国会を封鎖すると考え国会に来ました。こうやって国民が抵抗しなかったら、そして国会議員や記者が抵抗しなかったら、ここ(国会前)は既に戦車や装甲車、空挺部隊が掌握していたかもしれません。
ここに来ながら最悪の状況が起きるとも考えました。だが、それを知った上で国民たちが動きました。実際に兵士の国会進入を防いだ市民もいます」(パク・コニョン、京畿道安陽[アニャン]、55歳男性)
イム・ギョンテクさん。4日、徐台教撮影。
「釜山であった法事からソウルに着いた足で来ました。ヘリから兵士が降りてくる場面を見たのがきっかけです。独裁は簡単にできるものではないですが、大変なことになると思いました」(イム・ギョンテク、ソウル市、66歳男性)
チャン・ジュニョンさん。4日、徐台教撮影。
「国会議員を不法に逮捕するのではないかと思い車で来ました。軍や警察を考えると怖かったですが、人任せにするのではなく、一人の市民としてできることをしようと。
韓国市民は朴槿惠(パク・クネ)大統領の弾劾の時に、自分で動くことを学んでいます。酒を飲んでいたが飛び出してきたという若者、パジャマ姿で出てきた人もここで見ました」(チャン・ジュニョン、京畿道、38歳男性)
ムン・グァンハンさん(右)。4日、徐台教撮影。
「歴史的な出来事だと思います。ろうそくデモ(編注:8年前の朴槿惠弾劾デモ)の時は小学生で参加できなかったので(参加できて)とてもよかったです」(ムン・グァンハン、京畿道烏山(オサン)市、21歳男性)
こうしたコメントからは、市民が明確な目的と意志を持って国会前の「現場」に来ていたことがよく分かる。
この日、国会前の道路には即席の演台が設けられ、市民が絶え間なくスピーチをしていた。そしてその内の何人かが、とりわけ若者たちが「光州(クァンジュ)」という単語を口にしていたが強く印象に残った。
私は以前、多大な犠牲を払う‘ことで’民主化運動に筋道をつけた80年の『光州5.18民主化運動』を社会の革新における「尽きることのない泉」に例えたことがある。
市民の姿は、44年前に戒厳軍に立ち向かった精神が今なお脈々と受け継がれている証左と言えるだろう。
●奇跡的だったのではないか
正直に告白すると、私は今、こうして記事を書いていることに対する現実感があまりない。徹夜明けだからではなく、非常戒厳が終わったこと、何事もなく朝を迎えたことが信じられないからだ。
「一日クーデターで終わるかも」。私は尹大統領の非常戒厳宣布後すぐ、X(旧ツイッター)にこう書いた。
たしかに今の韓国は政府・与党と野党が度を超した対立の中にあるが、戒厳令が必要なほどであると認識している人はほぼいない。最後は尹大統領の自爆に終わるという感覚は広くあったはずだ。
だが、もし国会の中で一発でも発砲があったら、警察が市民を殴ったら、市民が耐えきれず警察や軍に先に手を出したら、韓国軍の各指揮官が冷静な判断をできない状況になったらなど、大きな混乱につながる導火線はあちこちに存在した。
それを防ぎ、ほぼ完璧な形で尹大統領の暴挙を封じ込めたのは奇跡としか言いようがない。国会の内外で市民や議員、軍がそれぞれの役割を自覚し、きっちりとそれを果たした。本当に、本当によかった。
私は今回の一連の取材を通じ、民主主義を守ろうとする韓国社会の体力や瞬発力が、血で勝ち取ってきた民主主義の歴史によって作られ、支えられていることを改めて確認した。
このまま、8年前の弾劾の際には実現できなかった「社会の前進」を、ぜひとも成し遂げてほしいものであ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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