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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명(南冥 조식(曺植) 선생
2012.5. 17.(목) 나는 합천 황매산 모산재로 가는 길에 합천군 삼가면 외토라를 지나가면서 이 곳이 남명 조식 선생 외가이며, 선생이 이 마을 외가에서 태어났으므로, 이곳은 조식 선생 탄생지임을 알게 되었다. 선생을 기리기 위해 탄생지 생가 복원 기초공사를 하고 있는 중이었다. 얼마 후에는 번듯한 조식 선생 생가 유적이 탄생하겠다. 이 마을의 안내를 중심으로 조식선생을 알아본다.
이곳 합천군 삼가면 외토리 토동 마을은 조선중기 대학자 남명 선생(1501~1572)이 태어난 곳이다. 연산군 7년 6월 26일 이곳 외가에서 태어났다. 본가는 인접 삼가면의 하판리 지동마을이다.
경상우도를 대표하는 남명 조식 선생은 경상좌도를 대표했던 퇴계 이황선생과 함께 영남 유림의 양대 거목이었다. 선생은 특히 경(敬)과 의(義)를 존중하고 배운 것을 실천하는 선비정신을 강조하였다. 선생이 타계한지 20년 후 임진왜란이 발발했을 때 정인홍 곽재우를 비롯한 선생의 제자들이 의병장이 되어 전쟁에 참여했던 것도 이러한 선생의 경의사상을 실천에 옮긴 사례다.
현재 생가는 복원중에 있다. 탄생지 외토리 토동과 본가인 하판리 지동 사이 도로를 남명로라고 명명하였다.
청소년 시절엔 벼슬하던 아버지를 따라 주로 서울에서 살았다. 26세 때 아버지가 별세하자 산소를 고향에 모시고 3년 여묘살이를 하고, 30세 부터는 처향인 김해 탄동에 산해정을 지어 놓고 학문에 전념하였다.
38세 때 회재 이언적 선생의 추천으로 헌릉참봉에 제수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45세때 모친이 별세하자 역시 고향 하판리 지동마을 아버지 묘역에 장사지낸 뒤 또 3년 여묘를 했다.
48세 이후로는 이곳 삼가면 토동으로 돌아와 뇌룡사와 계부당을 짓고 학문을 체계화하며 후진을 양성하였다. 한편 현실문제에도 적극적인 관심을 가지면서 우국애민의 사상을 견지하였다.
이 시기에 전생서와 종부시의 주부 벼슬을 내린적이 있었고, 55세 때에는 단성현감에 제수되기도 하였으나, 모두 나아가지 않았다. 단성현감을 사양하면서 올린 이른바 단성소는 조정에 대한 재야 지식인의 목숨을 건 매서운 질타였다. 당시에 전국을 뒤 흔들었던 이 상소 사건으로 인해 남명의 이름이 더욱 알려져 문인들의 분포가 전국적으로 확산하게 되었다.
61세 이후로 운명할 때까지는 지리산 자락인 산청군 시천면 덕산으로 옮겨가서 살았다. 이 때에 조지서 사지, 상서원 판관, 종친부 전첨 등의 벼슬이 내렸으나 모두 나아가지 않았다.
죽음에 임하여 “벽에 써둔 저 敬義 두 글자는 지극히 절실하고 중요하다. 선현의 천언 만어가 이 두글자를 벗어나지 아니한다.” 라고 하였다. 광해군때 영의정에 추정되고 문정의 시호가 내렸다. 이러한 선생의 발자취가 곳곳에 묻어 있는 여기 본가와 외가를 잇는 삼가면 주변 도로를 향토문화 유적 탐방 코스로 활용코자 남명로로 지정하였다. 토동에는 선생의 태생지와 뇌룡정이 있고, 지동에는 부모를 위시한 선대의 묘소가 있다.
여전주부윤(전주부윤에게 보내는 글)은 남명 조식 선생이 1554년(명종9)에 현재의 합천군 삼가면 하판리 옛집에 살면서, 당시 종2품 전주부윤에 재직하고 있던 이윤경에게 쓴 편지로 남명의 안빈낙도(安貧樂道) 사상이 잘 나타나 있다.
이 편지를 보면, 남명이 시류(時流)에 편성하지 않고 변화와 개혁을 실천하고, 청렴결백(淸廉潔白) 및 강직함과 함께, 왜 실사구시(實事求是)와 문무겸전(文武兼全), 민본(民本)이 남명의 핵심적인 사상으로 자리매김하게 됐는가를 알 수 있을 것이다.
(2011년 3월, 남명 선생 선양회 세움, 조각 충북대 교수 류경원)
-합천군 삼가면 외토리 토동 생가와 복원작업
-토동의 뇌룡정의 안내석물
-토동의 뇌룡정에 새긴 비석 : 단성현감 사양 상소문
-단성현감 벼슬을 내렸는데, 안받는 이유를 밝힌 불가사의한 상소다.
1. 남명 조식 선생의 정신
이재익 정리
지난달 소답자한 43호(2012.5)에 남명(南冥) 조식(曺植) 선생을 소개하였다. 합천 황매산으로 가는 도중에 합천 삼가면 외토리 토동마을을 지나가면서 우연히 발견한 생가지(외가)가 복원 공사중이었고, 본가는 그리 멀지 않은 삼가면 하판리 지동마을임을 알고, 평소에 남명에 대하여 관심이 많던 본인은 기쁜 마음으로 자료글을 썼는데, 미진하여 여기에 다시 보충 정리해 보았다.
1) 탄생과 생애
- 생애 연대는 1501(연산군 7년)~1572(선조 4년), 조선 중기의 학자. 본관 창녕(昌寧). 자 건중(楗仲). 호 남명(南冥). 시호 문정(文貞). 저서에 문집 《남명집》과 그가 독서 중 차기(箚記) 형식으로 남긴 《학기유편(學記類編)》이 있고, 작품으로 《남명가》 《권선지로가(勸善指路歌)》 등이 있다.
- 남명은 퇴계와 같은 해 1501년에 삼가현(三嘉縣 :지금의 합천) 토골[兎洞] 외가에서 태어났다. 20대 중반까지는 대체로 서울에 살면서 성수침(成守琛). 성운(成運) 등과 교제하며 학문에 열중하였다.
- 25세 때 《성리대전(性理大全)》을 읽고 "이윤(은나라 시조 탕왕을 도운 명재상)이 뜻한 바를 뜻으로 삼고, 안연(공자 제자)이 배운 바를 배워, 나아가 벼슬하면 공업을 이루고, 초야에 있으면 도를 지킨다. 그래야만 장부라 할 수 있다."는 중국 송나라 허로재의 글에 크게 감명 받아 학문에 정진하였다.
- 30세 때 처가가 있는 김해 탄동(炭洞)으로 이사하여 산해정(山海亭)을 짖고 살면서 학문에 정진하였다. 만년(1561년)에 지리산 기슭 진주 덕천동[德山洞 : 지금의 산청군 시천면]으로 이거하여 산천재(山天齋)를 지어 별세할 때까지 그곳에 머물며 강학(講學)에 힘썼다. 그의 사후인 1576년 그의 제자들이 덕천의 산천재 부근에 덕천서원을 건립하였고, 고향 삼가현에 회현서원(晦峴書院→ 龍巖書院)을, 1578년에는 김해에 신산서원(新山書院)을 세웠다. 광해군대에 대북(大北) 세력이 집권하자 그를 봉사하는 서원들이 모두 사액(조정이 서원의 이름을 하사하고 지원함)되었고, 조식은 영의정으로 추증되었다.
2) 벼슬을 사양하고 처사로서 살다.
- 1538년 유일로 헌릉참봉(獻陵參奉)에 임명되었지만 관직에 나아가지 않았고, 45세 때 고향 삼가현에 돌아온 후 계복당(鷄伏堂)과 뇌룡정(雷龍亭)을 지어 살면서 제자 교육에 힘썼다. 그는 성년기에 두 차례의 사화( 1519년 기묘사화, 1545년 을사사화)를 경험하면서 훈척정치의 폐해를 직접 목격한 탓에 출사를 포기하고 평생을 산림처사(山林處士)로 자처하며 오로지 학문과 제자들 교육에만 힘썼다.
[ 참 고 ]
* 1519년 기묘사화 : 중종이 등용한 조광조 일파가 지나치게 혁신적인 정치를 추구하다가 몰락함.
* 1545년 을사사화 : 인종 외척 윤임이 명종 외척 윤원형 일파에게 제거된 사화.
- 그가 명종에게 올린 상소(을묘사직소)에서는 조정의 신하들에 대한 준엄한 비판과 함께 명종과 대비(大妃) 문정왕후(文貞王后)에 대한 직선적인 표현으로 큰 파문을 일으켰다.
- 유일(遺逸 ; 덕망이 높은 인재, 과거 없이 특별 등용)로 여러 차례 벼슬이 내려졌으나 그는 끝내 벼슬을 사양하고, 학문보다는 기개와 절조로 이름이 높았다.
자신의 시에서 “천석들이 큰 종을 보라! 큰 방망이로 치지 않으면 소리 나지 않는다” 라고 한 것을 보면 드러내지 않은 그의 자부심이 대단하였음을 엿볼 수 있다. 그는 너무 높고 큰 곳에 뜻을 두었기에 세상에 직접 쓰이지 못하고 사표로서만 영향을 끼친 인물이었다. 오건(吳健), 정인홍(鄭仁弘), 하항(河沆), 김우옹, 최영경(崔永慶), 정구(鄭逑) 등 많은 학자들이 찾아와 학문을 배웠다.
- 1567년 즉위한 선조가 여러 차례 불렀으나 나아가지 않았으며, 올바른 정치의 도리를 논한 상소문 <무진봉사(戊辰封事)>를 올렸는데, 여기에서 논한 '서리망국론(胥吏亡國論)'은 당시 서리의 폐단을 극렬히 지적한 것으로 유명하다.
3) 학문과 사상
- 그의 사상은 노장적(老莊的) 요소도 엿보이지만 기본적으로는 수기치인(修己治人)의 성리학적 토대 위에서 실천궁행을 강조했으며, 실천적 의미를 더욱 부여하기 위해 경(敬)과 아울러 의(義)를 강조하였다. 성성자(惺惺子) 라는 금방울을 늘 차고 행동거지를 스스로 경계하였다.
칼에 새기기를 “안으로 밝은 것은 敬이요 밖으로 날카로운 것은 義이다. 문 닫고 들어 앉아 있음이 오래니 온갖 욕심을 말끔히 씻어 내었네” “敬과 義, 이 두 글자는 해와 달 같아서 한 가지도 버려서는 안 된다” 고하였다. 여기서 경은 마음을 통일하고 가지런하게 함이요, 의는 행동의 올바름을 뜻하는 것이다. 학문하는 태도는 실용, 실천을 우선으로 삼았다.
그는 선부후교(先富後敎)를 주장하였다.
맹자는 "항산(恒産)이 있어야 항심(恒心)이 있다" (생활이 안정되어야, 바른 마음을 가질 수 있다)고 했고, 공자 또한 "먼저 민중을 부유하게 한 다음에 가르쳐야 한다. 의(道義)가 있는 세상에서 가난하고 천한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도의가 없는 세상에서 부귀한 것은 더욱 부끄러운 일이다" 라고 하였다. 조식도 '민중을 부유하게 한 다음에 가르쳐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 그는 출사(出仕)를 거부하고 평생을 처사로 지냈지만 결코 현실을 외면한 것은 아니었다.
그러한 영향으로 정인홍.곽재우.김면 등 제자들은 임진왜란에 의병을 창의하여 국난 극복에 크게 기여하였고, 실천.실용적인 학문사상으로 선조(宣祖) 말년과 광해군 시대 개혁정치를 주도하였다. 이처럼 조식과 그 제자들이 견지했던 실천적 학문사상은 바로 조선 후기 실학사상의 연원이 되었고 서양철학으로 보면 프래그머티즘이다.
-학문이란 무릇 그것이 이론적인 사상체계일지라도 사람을 실질적으로 이롭게 하는 사상인 실학일 때 의의가 있을 것이다. 다시 말해서 학문사상은 보다 실질. 실용적인 것에 중점을 두어야 된다는 것을 의미 한다. 유학도 사람에게 필요한 학문(人+需)으로서 실학을 뜻하기도 한다.
조선 후기 실학사상과 조식의 연결고리는 조식의 제자인 정구(鄭逑)로, 정구의 제자인 허목(許穆)에게로 이어졌다. 정구는 조식과 퇴계의 학통을 이어받았고, 허목은 이러한 정구의 학통을 상속했다. 그뿐 아니라 조식의 실학적 학풍을 근기지방으로 가져와 조선 후기 근기 실학파를 형성시켰다. 실학파의 거두인 이익(李瀷)과 그 집대성자인 정약용(丁若鏞)은 허목을 통해 조식의 경세사상에서 실학적 요소를 이어받았다. (조식→ 정구→ 허목→ 이익→ 정약용)
조식과 조선 후기 실학의 내용상 유사점의 특징은, 사회경제 문제에서 공물의 폐해와 이에 관련된 조식과 정인홍의 「서리망국론」(胥吏亡國論)과 이익의 「장리론」(贓吏論) 그리고 정약용의 「향리론」(鄕吏論)이 일맥상통한다. 이들은 모두 법도 오래 가면 폐해가 생기기 때문에 개정해야 한다는 일종의 ‘변법사상’ 이었다.
- 일상생활에서는 철저한 절제로 일관하여 불의와 타협하지 않았으며, 당시의 사회현실과 정치적 모순에 대해서는 적극적인 비판의 자세를 견지하였다. 학문방법론에 있어서도 초학자에게 심경(心經), 태극도설 등 성리학의 본원과 심성(心性)에 관한 내용을 먼저 가르치는 퇴계 이황(李滉)의 교육방법을 비판하고, 소학, 대학 등 성리학적 기초 수양적인 내용을 우선 가르쳐야 한다고 주장했다.
당시 이황과 기대승(奇大升)을 둘러싸고 일어난 이기심성(理氣心性) 논쟁에 대해서도 비판적인 시각에서 이를 '하학인사(下學人事)'를 거치지 않은 '상달천리(上達天理)'로 규정하고, 자신은 '하학이상달(下學而上達)'의 단계적 실천적인 학문방법을 주장하였다.
- 당시 선조가 왕위에 즉위하여 당대의 두 쌍벽이며 국가원로인 조식과 이황에게 조언을 구했다. 두 학자가 거의 같은 시기에 올린 두 상소에서 조식과 이황의 입장차이를 확연하게 엿볼 수 있다.
조식은 그의 상소문 (戊辰封事)에서 중앙조정과 지방관리의 부정부패나 공물의 폐해와 함께 서리의 횡포를 날카롭게 지적. 비판하여 이를 제대로 개혁하지 않으면 나라가 망하는 지경이라고 경고했다.
이황의 상소문(戊辰六條疏)은 현실에 대한 진단과 비판은 가벼웠고, "이전의 법과 제도를 함부로 고쳐서는 안 되고 개혁적인 신진인사의 등용이 혼란을 초래한다"고 비판하고, 성리학의 도심과 인효(仁孝) 등 전통예교와 윤리강상에 대한 이야기와 왕의 마음가짐 그리고 이단(異端) 배척에 강한 관심과 주장을 하였다.
4) 선비 정신과 계승
- 그가 말한 ‘출처’라는 개념은 이렇다. 세상에 나아가 벼슬을 하며 경세제민(經世濟民)의 정치에 참여하는 것과 물러나 재야에 머물면서도 정신적 지조를 지키고 후학을 가르쳐 올바른 세상이 오기를 바라는 실천론이다. 성리학의 이기심성론(理氣心性論)보다는 유교의 민본정치사상에 의한 실천적 정치개혁과 출처대의(出處大義. 관리에 나아감과 물러남의 명분)에 확고했다.
“정치가는 나라가 망해가는 데도 태평세월이라 하고, 학자란 나라가 태평세월일지라도 걱정하고 문제를 제기하는 사람”이라는 것과 “나라를 생각하며 분노하거나 슬퍼하지 않는다면, 이미 그는 나라를 사랑하고 있지 않다”라고 갈파했다.
- 조식이 출처라는 개념으로 인물들을 평한 것은 이러하다.
김굉필과 조광조에 대해서는, 학문과 그 실천적인 사림의 모습에는 존경을 보이면서도 출처문제에 대해서는 선견지명의 부족과 경험미숙을 비판하였다.
제갈량에 대해서는, 대업을 이루기 불가능한 시절에 출사하여 민중을 어육(魚肉.짓밟혀 결단나게 됨)이 되게 했다고 평가했다.
-정몽주에 대해서는, 이성계의 쿠데타로 인해 왕이 추방되고 시해되는 상황인데도 참가하여, 공신이 되고 끝내 사퇴하지 못하여 죽임을 당한 것으로 비판하였다.
* [보충] 이성계와 정몽주는 고려말 신진사대부측 개혁세력이었다. 두 사람이 거의 보조를 맞춰 가다가 끝에 가서 이성계가 왕이 되려는 마지막 단계의 야심을 보이자, 갈라섰다고 할 수 있다. 조식은 이점을 비판 한 것이다.
- 고려말 선초의 길재(吉再)의 처신에 대해서는, 논전(論傳)을 짓고 그 출처를 인정(길재를 좋게 평가)하고 있다.
- 남명 조식의 선비정신은 '선비란 제왕으로도 신하 삼을 수 없고 제후로도 벗을 삼을 수 없다. 선비는 죽일 수 있으되 그 지조를 뺏을 수는 없다'는 정신을 행동으로 보여주어 임진왜란 때 趙宗道, 곽재우(그의 문인이자 외손녀 사위), 정인홍 등의 의병정신으로 뻗어났고, 근세엔 단재 신채호 선생 등으로 맥락이 이어졌다.
- 그의 사상은 제자들에게도 그대로 이어져, 안동지방을 중심으로 한 이황의 경상좌도 학맥과 더불어 경상우도 특징적인 학풍은 영남 유학의 두 봉우리를 이루었다.
* 서울쪽에서 보아 낙동강 동쪽 안동지방 등을 경상좌도라고 하고, 서부 경남북을 경상우도라고 구분함.
5) 선생에 대한 평가
-조식의 평생 지우였던 성운(成運)은 조식의 묘비문(墓碑文)에서 당시 「조식의 깊은 학문과 높은 의리, 실천적인 유학의 가치를 알아주는 이가 없으며, 오히려 평판이 사실과 다름을 개탄하고 백세 먼 훗날 아는 이가 나와 주기를 기다릴 수밖에 없다」고 안타까움을 토로하였다.
- 정인홍 : “선생께서는 구차하게 복종하지도, 구차하게 잠잠히 침묵하지도 않았다”
[보충] * 정인홍에 대해서, 단재 신채호(申采浩)는 “우리의 역사 인물 가운데 「세명의 걸출한 인물」(三傑)로 육군의 을지문덕, 해군의 이순신, 정치에서 정인홍이다” 신채호는 정인홍을 이렇게 까지 높이 평가했다. 광해군 때 실용적인 외교노선과 개혁정치에 정인홍이 있다.
- 이익 ; “천길 벽이 우뚝하게 서 있는 기상은 탐욕한 자로 하여금 청렴하게 하고, 나약한 자로 하여금 일어서게 하니 이른바 백세의 스승이라 하겠다”
실학자 이익은 그의 [退溪南冥론] 에서 조식에 대해,
"경서(經書)를 연구함은 장차 치용(致用)하기 위함이다. 경전을 해석하면서 천하만사를 염두에 두지 않는다면, 이것은 한갖 책을 읽는 것일 뿐이다. 이황의 글은 본래의 근원과 윤리와 행실에만 오로지 힘쓰고 정사(政事)에는 미치지 아니하였다. 당시 법령이 해이해지고 폐단이 많아서 변통이 있어야 할 시기였는데, 이기심성의 이론 다음에 시무(時務)의 큰 것만 대략 말하여 효과가 드디게 나타날 수 있는 것이었다.
"라고 했다. 그러므로 북송(北宋) 때 왕안석(王安石)의 "진리란 바로 현실과 정치에 있다.(道在政事)" 는 담론을 주목해 본다면, 남명에게서 실학사상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겠다.
- 남명학파가 그동안 왜 조명을 받지 못했는가?
가장 큰 이유로는 조식의 수제자인 정인홍(鄭仁弘.호는 來庵.1535~1623년)이 인조반정(궁정쿠데타)에 의하여 숙청당함으로써 스승인 조식과 남명학파 전체에 영향을 미쳤음을 지적할 수 있다.
선조대에 정치적으로 북인(조식계)과 남인(이황계)의 정파로 대립되고, 남명의 문인들은 정인홍 등(북인)이 인조반정(仁祖反正)으로 몰락한 뒤, 남명에 대한 폄하(貶下)는 물론, 그 문인들도 크게 위축되어 남명학(南冥學)은 제대로 계승되지 못하였다.
또 조식이 끝내 처사(處士)로서 벼슬에 나가지 않았기 때문에 조정에서 소외되었고, 조식의 상소문 등이 왕가와 중앙의 부패한 조정과 훈척파를 질타하는 데서 많은 정적을 만들게 되었다는 점이다.
6) 남명학파의 역사적 영향
- 남명학파의 학문사상은 정인홍의 몰락 이후에도 경상우도 지역에서 면면이 이어졌다.
- 조식을 사숙하고 정인홍의 제자였던 정온(鄭蘊)이 병자호란 때 의기(인조가 청태종에게 삼전도의 치욕을 당하는 것을 보고 칼로 할복하였다. )를 보여줬다.
- 인조반정 이후 경상우도에 대한 지나친 차별대우, 민중에 대한 탐학 등에 반기를 든 무신란(1728년 이인좌 등)과 임술농민항쟁(진주민란.1862년) 등에는 남명의 사상적 맥이 닿아있다.
- 3.1운동이나 독립만세운동 등 한강 이남에서 일어난 운동들 중에서 가장 많은 인원이 참가한 곳이 바로 이곳 진주와 합천 삼가면이었다.
- 천도교.기독교.불교대표 33인 중심의 3.1 만세운동과 병행하여 유교에서는 유림대표 1백37인이 중심이 되어 당시 제1.2차에 걸친 「유림단 사건」(儒林團 事件.巴里長書 事件)이 일어났는데, 그의 중심지가 이곳 경상우도로서 그 총대표자였던 곽종석(郭鍾錫)과 그 제자였던 김창숙(金昌淑,心山)과 김황(金榥) 등이 중심인물로 활약했다. 독립운동가 김창숙은 13년간 감옥살이와 고문에 의해 앉은뱅이가 되었고, 해방 후 성균관대를 민족전통 대학으로 복구 설립한 것도 남명학파 학문사상의 한 계승이다.
- 조식의 의기사상이 전수된 진주에서 이후 일제시대 때 백정들의 신분타파운동이었던 형평사 운동이 있고, 4.19혁명이 마산의 3.15의거에서 시작 됐음도, 이 지역 남명학파의 불의에 타협 없는 불굴의 의리정신에서 그 연원을 찾아 볼 수 있다. ●
* 다음 쪽에 있는 조식의 을묘사직소 (전문)은 소답자한 제43호에 이미 합천 삼가면의 뇌룡정에 새겨진 조식 선생의 상소문(을묘사직소) 비석의 내용을 찍어서 4p에 걸쳐서 게재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찍은 사진이 검고, 글씨가 작아 읽기 불편한데, 누가 읽어 보겠나 싶어서 여기에 다시 타이핑해서 쉽게 읽을 수 있도록 재게재합니다. 이렇게 친절?해도 되나 싶지만, 제 스스로 두고두고 쉽게 읽어 보려고 하는 노력입니다.
2. [자료] 남명 조식 선생 을묘사직소 (전문)
선무랑(宣務郞)*으로서 단성현감(丹城縣監)에 새로 제수된 신(臣) 조식(曺植)은 참으로 황공하여 머리를 조아리고 주상전하께 상소하옵니다. 엎드려 생각하옵건대 선왕(先王, 중종)께서 신이 보잘것없는 줄을 모르시고 처음으로 참봉(參奉)에 제수하셨고,(1538년임) 전하께서 왕위를 이어받으셔서 두 차례 주부(主簿)에 제수하셨고, 이번에 또 현감에 제수하시니, 두렵고 불안하여 마치 산을 짊어진 듯합니다.
그럼에도 감히 한번 대궐에 나아가 전하의 은혜에 사은숙배(謝恩肅拜)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군주가 인재를 등용함은 목수가 목재를 가져다 쓰는 것과 같아, 깊은 산과 큰 늪의 재목을 모두 이용해서 큰 집을 완공할 적에, 도목수가 알맞은 재목을 가져다 쓸 뿐이지 목재가 스스로 참여하지 못하는 것과 같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전하께서 인재를 등용하심은 나라를 가진 군주로서의 책임이지만 신은 맡은 일을 감당치 못할까 걱정됩니다. 이 때문에 감히 그 큰 은혜를 사사로이 받지 못 하겠습니다. 그러나 신이 머뭇거리며 나아가기 어려워하는 뜻을, 어진이를 갈망하시는 전하께 감히 아뢰지 않을 수 없습니다.
신이 벼슬에 나아가기 어려워하는 까닭은 두 가지입니다. 지금 신은 나이가 예순에 가깝지만 학술은 거칠고 어두우며, 문장은 과거에 겨우 합격하기에도 부족하며, 행실은 물뿌리고 비질하는 일을 감당하기에도 부족합니다. 과거에 급제하려고 노력한 10여 년 동안 세 차례나 실패하고 물러났으니, 애초 과거를 일삼지 않았던 사람이 아닙니다. 설사 과거를 탐탁하게 여기지 않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발끈하여 과거를 당장 집어치운 평범한 백성에 불과할 뿐, 큰일을 해낼 수 있는 능력을 두루 갖춘 인재가 아닙니다.
하물며 사람됨의 선악은 결코 과거 응시 여부에 달려 있지 않음에야 더 말할 나위가 있겠습니까? 미천한 신이 헛된 명망을 훔쳐서 담당 관원(추천관원)에게 잘못 알려졌고, 담당 관원은 신의 헛된 명망만을 듣고서 전하를 그르쳤습니다.
전하께서는 과연 신을 어떠한 사람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도(道)가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문장에 능하다고 생각하십니까? 문장에 능한 자라고 해서 꼭 도가 있지는 않으며, 도가 있는 사람은 반드시 신과 같지는 않을 것입니다.
전하께서만 신을 모르시는 것이 아니고, 재상들도 신을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 사람의 됨됨이를 알지 못하고 등용했다가 훗날 국가의 치욕이 된다면, 그 죄가 어찌 미천한 신에게 만 있겠습니까?
헛된 명망을 바쳐 몸을 파느니보다는 실제로 곡식을 바쳐서 관직을 사는 것이 더 나을 것입니다. 신은 차라리 제 한 몸을 저버릴지언정 차마 전하를 저버리지는 못하겠습니다. 이점이 나아가기 어려워하는 첫째 이유입니다.
전하의 나랏일은 이미 그릇되었으며, 나라의 근본이 이미 망했으며, 하늘의 뜻도 이미 떠나갔으며, 인심도 이미 떠났습니다. 비유하면 이 나라는 백 년 동안 벌레가 속을 갉아먹어 진액이 이미 말라버린 큰 나무와 같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거센 비바람이 언제 갑자기 닥칠지를 까마득히 모르고 지내온 지 오래 되었습니다. 조정의 인물 가운데 충성스럽고 뜻있는 신하가 없는 것이 아니고, 아침 일찍부터 밤늦게까지 나라 일에 힘쓸 선비가 없는 것도 아닙니다.
그러나 이들도 그 형세가 극도에 달하여 지탱할 수 없이 사방을 둘러보아도 손을 쓸 곳이 없다는 것을 이미 다 알고 있습니다.
낮은 벼슬아치는 아랫자리에서 희희덕거리며 주색을 즐기고 있으며, 높은 벼슬아치는 윗자리에서 어물거리며 오직 뇌물로 재산만 불리고 있습니다. 물고기의 배가 썩어가는데도 아무도 치유하려하지 않고 있습니다.
게다가 내직에 있는 신하들은 용이 연못을 차지하고 버티듯 후원 세력을 심고 있으며, 외직에 있는 신하들은 들판에서 이리가 날뛰듯 백성을 수탈하고 있습니다. 이들은 가죽이 없어지면 털이 붙어있을 곳이 없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습니다.
신은 이 때문에 낮에는 깊이 생각하고 길이 탄식하면서 자주 하늘을 우러러 보고, 밤에는 흐느끼며 침울해 하면서 천정을 우러러 본 지 오래 되었습니다.
대비(大妃 ; 문정왕후)께서는 비록 생각이 깊으시다 하나 깊은 궁중의 일개 과부에 지나지 않고, 전하께서는 다만 선왕의 일개 어린 후사(後嗣)이실 뿐입니다. 그러니 온갖 천재(天災)와 억만 갈래의 인심을 어떻게 감당해 내며 어떻게 수습하시겠습니까?
냇물이 마르고 곡식이 하늘에서 내리니 그 조짐이 무엇을 뜻하겠습니까? 노랫가락이 구슬프고 흰옷을 즐겨 입으니, 소리가 형상에서 이미 그 조짐이 나타난 것입니다. 이러한 때에는 주공(周公)*, 소공(召公)*의 재주를 겸한 사람이 정승의 자리에 있다 하더라도 또한 어떻게 할 수 없을 것입니다.
[보충] * 주공(周公) : 주나라 문왕 아들, 무왕 동생, 조카 성왕을 잘 보필한 명신, 장자 백금과 함께 노나라 시조가 됨) * 소공(召公 : 주나라 문왕 아들, 주공 동생, 연나라 시조.
하물며 지푸라기 같은 미천한 신의 재주로써 무엇을 하겠습니까? 위로는 만에 하나도 위태로움을 붙들 수 없고, 아래로는 털끝만큼도 백성을 보호할 수 없을 것이니, 전하의 신하 노릇하기가 또한 어렵지 않겠습니까? 변변찮은 이름을 팔아 전하의 관작을 얻어 그 녹을 먹으면서도 그 녹에 맞는 일을 하지 못한다면 이 역시 신이 원하는 바가 아닙니다. 이점이 둘째 이유입니다.
그리고 신이 보건대, 근래 변방에 왜적의 변란이 있어서 여러 대부들이 제때에 밥을 먹지 못합니다. 그러나 신은 이를 놀랍게 여기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이 사건은 20년 전에 터졌을 것인데 전하의 신성한 무덕에 힘입어 지금에야 비로소 터진 것이지, 하룻저녁에 갑자기 생긴 일이 아니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평소 조정에서 재물을 받고 사람을 임용하였기에 재물은 한 곳에 모였지만 백성은 흩어지게 되었습니다. 마침내 장수로서 적합한 사람이 없고 성(城)에는 군졸이 없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왜적들이 무인지경으로 들어오듯이 쳐들어 온 것이니, 어찌 이상하게 여길 일이겠습니까?
이것은 또한 대마도(對馬島)의 왜놈들이 본토의 왜놈들과 몰래 결탁하여 그 앞잡이가 되어 만고에 남을 치욕을 끼친 것입니다. 왕의 신성한 위엄을 떨치지 못해서 적에게 어이없이 패하고 말았습니다.
어찌 옛 신하를 대우하는 것은 주(周)나라 법보다도 엄격하면서 왜적을 용납하는 은덕은 춘추시대 송(宋)나라* 보다 도리어 더한단 말입니까? 세종대왕께서 남쪽으로 대마도를 정벌하시고 성종대왕께서 북쪽으로 여진족을 정벌하신 일을 보더라도, 어찌 오늘날 같은 일이 있었습니까?
[보충] * 송양지인 : 은의 후예 송나라 양공이 적에게 지나친 동정을 베풀어 큰 화를 입은 어리석음.
그러나 이런 것은 피부에 생긴 병에 불과하고 심장이나 뱃속의 병은 못됩니다. 심장이나 뱃속의 병은 결리고 막혀서 상하가 서로 통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바로 이때가 경대부(卿大夫)들이 목이 마르고 입술이 타도록 수레를 치달리며 분주히 주선을 해야 하는 시점입니다.
근위병을 불러 모으고 국사(國事)를 정돈하는 것은, 자질구레한 정사나 형벌에 달려 있지 않고 오직 전하의 마음 하나에 달려 있습니다. 말이 땀을 흘리듯 마음속으로 노심초사하여, 만 마리의 소가 갈 만한 넓은 땅에서 공을 거두는 것도 그 기틀은 전하 스스로의 마음에 달려 있을 뿐입니다.
모르겠습니다만, 전하께서 좋아하시는 바는 무슨 일입니까? 학문을 좋아하십니까? 풍류와 여색을 좋아하십니까? 활 쏘기와 말 달리기를 좋아하십니까? 군자를 좋아하십니까? 소인을 좋아하십니까? 좋아하시는 바에 따라 나라의 존망(存亡)이 달려 있습니다.
만약 어느 날 흠칫 놀라 깨달아 분발해 학문에 힘을 쓰시어 홀연히 명덕(明德)과 신민(新民)의 도리를 얻으신다면, 명덕과 신민의 도리 속에 온갖 선(善)이 갖추어지고 온갖 교화(敎化)도 거기서 나오게 될 것입니다. 이것을 들어서 시행하면, 나라를 고루 잘 다스려지게 할 수 있고 백성을 화합하게 할 수 있으며 위태로움을 편안하게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것을 요약하여 내 몸에 간직한다면, 텅 빈 거울이 만물을 비추듯 저울이 물건을 공평하게 달듯 생각에 사특함이 없게 될 것입니다. 불교에서 말하는 선정(禪定)이란 것도 이 마음을 간직하는 데 달려있을 뿐이니, 위로 천리(天理)를 통달하는 측면에서는 유교와 불교가 한 가지입니다.
다만 불교는 인사(人事)에서 시행할 경우, 현실에 발을 붙이지 않기 때문에 우리 유가에서는 배우지 않는 것입니다. 전하께서는 이미 불교를 좋아하십니다. 만약 그 마음을 학문하는 데로 옮기신다면 바로 우리 유가의 일이 될 것입니다.
이렇게만 하신다면 어렸을 때 집을 잃었던 아이가 제집으로 돌아와서 부모 친척 형제 친구를 만나보는 경우가 어찌 아니겠습니까? 더구나 정치를 하는 것은 사람에게 달려 있으니 군주가 사람을 임용할 적에는 자신의 몸으로써 모범을 보여야 하고, 자신의 몸을 닦을 적에는 도(道)로써 해야 하는 것입니다. 전하께서 만약 사람을 등용하실 적에 자신의 몸으로써 하신다면, 조정에 있는 사람이 모두 사직(社稷)을 보위하지 않는 이가 없을 것입니다.
아무 일도 모르는 미천한 신같은 자가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만약 사람을 취할 적에 몸으로써 하지 않으시고 눈으로만 하신다면 가까이서 시종하는 사람 말고는 모두 전하를 속이고 저버리는 무리일 것이니, 앞뒤가 꽉 막힌 고집스런 소신 같은 자가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뒷날 전하께서 왕도정치(王道政治)를 하는 경지로 덕화(德化)를 이룩하신다면 소신도 마부 같은 말직에서나마 채찍을 잡고 마음과 힘을 다하여 신하의 직분을 다할 것이니, 임금님을 섬길 날이 어찌 없겠습니까?
엎드려 원하옵건대, 전하께서는 반드시 정심(正心)으로써 신민(新民)의 요체를 삼으시고, 수신(修身)으로써 사람을 임용하는 근본으로 삼으셔서 왕도의 표준을 세우도록 하소서.
왕도의 표준이 표준 구실을 하지 못하면 나라는 나라로서 구실을 못하게 될 것입니다. 밝게 살펴주기길 엎드려 바라옵니다. 신 조식은 떨리고 두려운 마음을 감당하지 못한 채 죽음을 무릅쓰고 아뢰옵니다. ●
[참고자료 : 宣務郞과 현감]
* 남명 조식 선생의 을묘사직소 상소문 첫머리에 선무랑(宣務郞) 조식은...... 선무랑이란? 조선시대 문산계(문관의 관등)가 정1품~종1품.........정9품~종9품까지 모두 18관등 체계인데, 그 중에 제12 관등은 종6품인데, 종6품을 또 2등급으로 나누어 윗 등급은 宣敎郞이고 아랫 등급이 바로 선무랑입니다.
* 조선 행정구역은 전국을 8도로 나누고, 각도 밑에 부, 목, 군, 현이라는 행정 단위가 있는데, 부윤(부사), 목사, 군수, 현령(현감)을 통틀어 수령이라고 하고 수령 상하 간에는 상하관계가 아니고, 단지 고을이 크기에 따라서 나누어지며, 모두 도의 지방장관인 관찰사(감사)의 행정감독만 받습니다. 현이라도 큰 현에는 현령, 작은 현에는 현감이 배치되었습니다. 조식이 제수 받은 현감의 관등이 종6품 선무랑에 해당되는 것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