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씨 뿌린 5·16 업보인가…방식만 베낀 전두환에 당했다 (81)
김종필 증언록: 소이부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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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 봄 대학가 학생들은 막혔던 물꼬가 터지듯 아스팔트 위로 쏟아져 나왔다. 3월 말 조선대를 시발로 대학 시위가 전국으로 퍼져나갔다. 처음엔 어용교수 퇴진과 학원 자율화 보장이 쟁점인 교내 시위였다. 그러나 점차 교련 반대 요구를 거쳐 5월이 되자 ‘계엄령 철폐하라’ ‘이원집정부제 개헌음모 철회하라’는 정치적 구호가 터져나오기 시작했다.
일부 대학 시위대는 총장실을 점거해 철야농성을 했고, 급기야 교문 밖으로 뛰쳐나갔다. 가두시위를 막으려는 경찰과 곳곳에서 충돌이 벌어졌다. 학생들이 경찰을 향해 투석을 했고 경찰은 이에 맞서 최루탄을 쐈다.
1979년 5월 16일 청와대에서 박정희 대통령으로부터 5·16민족상 안전보장부문 상을 받고 있는 전두환 보안사령관(왼쪽). 가운데 퍼스트레이디 역할을 하던 박근혜 큰 영애(현 대통령)가 서 있다. 전 보안사령관은 1사단장 시절인 78년 10월 북한의 제3 남침땅굴을 발견했다. 사진 김종필 전 총리 비서실
5월 13일부터 사흘간 전국에서 수만 명의 대학생들이 시가지로 진출해 밤늦게까지 거리를 막고 시위를 벌였다. 수도 서울엔 서울역광장과 남대문 일대 차도가 학생 시위대로 뒤덮였다. 데모가 사흘째 계속되던 15일 경찰 차량 한 대가 불에 탔고 시위대가 파출소를 습격했다. 데모 현장에 있던 전경대원 1명이 숨지는 사고까지 발생했다. 누군가가 시내버스를 탈취해 전경대원들을 향해 돌진한 것이다. 버스를 몬 두 청년이 시위 학생인지 아닌지는 분명히 가려지지 않았다. 시위대의 과격성을 부각시켜 정치 개입의 명분을 확보하기 위해 신군부 세력이 벌인 공작이라는 얘기도 나돌았다.
날이 갈수록 격렬해지는 시위의 양상이 심상찮았다. 아무리 최규하 과도정부가 허약하다 하더라도 헌법 개정과 민주화를 위한 작업이 차근차근 진행돼 나가던 시점이다. 학생들이 거리로 뛰쳐나와 폭력시위를 벌일 만한 상황은 아니었다. 시위가 과열되도록 부추기는 세력이 있는 듯했다. 사태가 악화되면 자칫 민주화 물결을 뒤엎는 구실이 될 수 있었다. 15일 신군부는 주한미군에 군부대 이동을 요청, 서울 근교의 20사단 병력(60연대와 포병단)을 서울 잠실운동장과 효창운동장에 집결시켰다.
대통령 최규하는 이 와중에 10일부터 사우디아라비아와 쿠웨이트를 방문하고 있었다. 대학가 시위로 위기가 고조되고 있을 때 대통령이 자리를 비우다니 안이한 판단이었다. 최규하는 예전에 사우디 국왕을 만난 적도 있고 하니 대통령으로서 만나면 경제적인 성과를 얻을 거라고 기대한 듯하다. 최 대통령은 시국 상황의 급격한 악화에 따라 조기귀국 건의(5월 14일 비상국무회의 결정)를 받아들이는 형식으로 일정을 하루 앞당겨 16일 밤 10시30분 귀국했다.
1980년 5월 15일 서울역 광장에 집결한 학생 시위대. 이날 과격한 시위는 신군부 계엄령 확대의 명분이 됐다. 중앙포토
나는 시국수습 방안을 건의하고 협의하기 위해 17일 청와대를 방문할 계획이었다. 공화당은 긴박감이 감돌던 그 전날 16일 긴급 당무회의를 열었다. 3시간40분에 걸친 난상토론 끝에 최 대통령에게 전달할 위기관리와 수습 대책을 결정했다.
정치일정을 대폭 단축하고 계엄을 해제해야 한다는 내용이었다. 이날 밤늦게까지 당직자들은 나의 청구동 집에 모여 회의를 하고 입장을 정리했다.
사태가 심상찮게 돌아가자 험하게 다투던 김영삼과 김대중 양 진영도 손을 잡았다. 16일 김영삼 총재가 동교동 김대중 자택을 방문해 공동기자회견을 하고, 계엄 해제와 정치 일정 연내 완결 등 시국 수습 9개 항을 발표했다.
5월 17일은 구름 한 점 없이 맑은 토요일이었다. 나는 이날 아침 남산 당사로 출근했다. 전날 당무회의와 당직자회의에서 정리한 시국수습안을 검토하고 대통령 면담 신청에 대한 회신이 오기를 기다렸다.
낮 12시가 지나서 청와대 최광수 비서실장에게서 전화가 왔다. 최 비서실장은 “오늘은 대통령께서 정당 대표와 만나지 않습니다. 사태의 정황을 파악한 뒤 추후 연락하겠습니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