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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흑의 시절 나를 고문당하게 했던 그 후배가 신부전증과 싸우면서 운동을 포기 못하는 이유
지난해 9월 어느날 후배 하나가 전화를 했다. “선배님, 송영수 살립시다. 그놈이 신부전증으로 다 죽게 생겼소. 그런데 81년 5월에 선배가 송영수랑 같이 잡혀서 고문당했을 때, 그놈이 피오줌을 쌌던 걸 선배님이 봤다고 하지 않았소. 우리가 송영수 민주화운동보상신청 해줍시다. 선배가 증인 좀 해주시오.”
그렇다. 그런 일이 있었다. 80년대 암흑의 시절, 말로만 듣던 ‘통닭구이’, ‘비녀꽂기’ 고문을 사흘 밤 동안 당해본 적이 있는데, 나로 하여금 그 고문을 당하게 했던 후배가 바로 송영수(42)다. 며칠 동안 거의 거꾸로 매달려 있다시피 하면서 고문을 당했던 송영수가 “나는 정말 모른다. 그러나 하종강 선배는 알지도 모른다”고 말해버리는 바람에 나는 영문도 모른 채 잡혀가 며칠 동안 곤욕을 치렀던 것이다. 수사가 모두 끝난 며칠 뒤에야 철창을 사이에 두고 만날 수 있었던 송영수에게 “왜 하필이면 내 이름을 말했느냐”고 묻자 송영수는 이렇게 답했다. “하 선배는 이 시점에서 징역에 가는 게 인생에 도움이 될 거라고 봤소. 거꾸로 매달려 며칠 있다보니 그런 생각이 퍼뜩 나는 기라.” 하하… 그때도 우리는 웃었다.
20년 전에 피오줌을 싸도록 고문을 당한 것이 그의 신부전증과 어떤 의학적 관계가 있는지 나는 모른다. 그러나 우리가 그런 일을 당했던 것은 사실이고, 송영수의 오줌에 사흘 동안이나 피가 섞여 나왔던 것도 사실이다. 그래서 나는 실로 오랜만에 담당 형사와 구청 공무원 앞에서 ‘진술’이란 걸 했다.
송영수는 지금 ‘부산지역일반노동조합’의 사무국장이다. ‘일반노조’란 글자 그대로 일반적인 노동자라면 누구나 가입할 수 있는 노동조합이지만, 실제로는 ‘일반적인 노동조합에 가입하기 어려운’ 노동자들이 주로 가입해 있다. 청소대행업체의 환경미화원, 마을버스의 기사, 금융기관이나 호텔의 계약직 노동자, 사회복지시설의 사회복지사, 정화업체 종사자, 용역회사의 파견 노동자, 규모가 아주 작은 공장이나 개인병원에 근무하는 사람 등 800여명이 그 조합원이다. 기업단위 노동조합을 간신히 만들어도 ‘어용이 되어 살아남거나, 맞서 싸우다가 박살나거나 둘 중 하나가 될 수밖에 없는’ 노동자들이 업종과 기업 구별없이 모여 서로 돕고 살자는 것이 바로 ‘부산지역일반노조’다. 그와 같은 형태로는 우리나라에서 처음 지난해 4월1일 설립되었는데, 송영수는 그 준비과정에 잠시 함께했다가 그해 7월1일부터 사무국장으로 일하고 있다.
송영수의 이력은 우리 사회 ‘노동운동가’의 전형적인 과정을 보여준다. 학생운동 이후 자연스럽게 이어진 노동현장 활동, 전위조직 건설 활동 등 비합법 조직 활동 이후, 해고노동자복직투쟁위원회, 국민운동본부, 부산노동자협의회, 부산노동자연합, 병원노동조합연맹, 민주노총을 두루 거쳤고 그 와중에서 두 차례의 징역을 살았다.
그가 지금 ‘일반노조’에 전력을 다하고 있는 것은 그 속에서 ‘무한한 가능성’을 보고 있기 때문이다. 노동운동 단체에서 경험을 쌓는 동안 그는 우리 노동운동이 가지는 문제점을 보았고 그때마다 끊임없이 문제제기를 해대는 통에 ‘운동권 내의 운동권’으로 불리면서 스스로 많이 괴로워하기도 했다.
“지금과 같은 노동운동 조직형태로는 노동자들의 직업별 이기주의나 노동조합의 관료화를 극복할 수가 없어요. 같은 연맹 소속이면서도 대기업 노동자는 한달에 200만원을 받는데 영세기업 노동자는 한달에 50만원밖에 못 받는 이 불평등을 도대체 어떻게 할 거냐구. 그건 누가 해결해 주는 게 아니라, 노동자가 스스로 해결할 수밖에 없는데, 지금 노동조합 형태로는 그게 거의 어렵거든.” 그래서 그가 활동하는 일반노조는 업종지부나 기업별지부 조직을 배제하고 ‘현장위원회’라는 특별한 형태를 갖추고 있다. 업종별 이기주의나 기업별 이기주의의 싹을 근원부터 없애자는 것이다. 실제로 지금 그가 일하는 노조에서는 상대적으로 경제적 여유가 있는 노동자들로부터 나온 돈이 훨씬 더 어려운 형편의 노동자들에게 집중적으로 투여되는 것이 가능하다. 아직까지는 실험단계이지만 “노동자 대중이 실천 과정에서 민주적 사회경영의 경험을 쌓는 단초”를 일반노조에서 마련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그것이야말로 “진정한 노동자들의 동질성과 계급성 회복”이라고 했다.
이제 그의 건강 얘기를 해보자. 그는 요즘 하루에 네 차례씩 혈액투석을 한다. 복막투석이라는 방식인데 한번에 40분쯤 걸린다. 인터뷰를 위해 그를 만났을 때에도 그는 사무실 한쪽 구석에서 피곤에 지친 얼굴로 비닐봉투 두개를 자신의 몸에 달린 파이프에 연결해놓고 투석작업을 하고 있었다. 40분 내내 거의 끊임없이 전화가 왔고 그는 손바닥으로 피곤한 얼굴을 감싼 채 전화기 저쪽의 상대방에게 화를 내기도 하고 껄껄 웃기도 하면서 노동조합과 단체교섭에 대한 설명을 했다.
투석을 마친 그와 얘기를 나누는 중에 아주머니 한 사람이 사무실에 들어왔다. 그를 보자마자 대뜸 “우리 노동조합에서 사람들 다 탈퇴한 거 아시죠? 모두 다 탈퇴하고 지금 나 혼자 남아서 버티고 있어요. 어떻게 해요?”라고 묻는다. 그는 잠시 생각하는 표정이 되더니 입술을 깨물며 말했다. “아주머니, 탈퇴하소. 그게 살길이오.”
아주머니는 놀라서 눈이 동그랗게 되었다. “정말로 탈퇴해요? 나 혼자 남았는데, 나까지 탈퇴하면….” 그러나 잠시 대화 끝에 그 아주머니는 끝까지 버티기로 했고, 탈퇴한 조합원들이 모두 다시 가입하도록 하는 계획을 세우기로 하고 돌아갔다.
의사들이나 동료들이 그에게 신장이식수술을 권유하지 않더냐고 물었을 때, 그는 이렇게 답했다. “이식수술할 수 있지. 그런데 이식수술을 받으면 그뒤에는 억수로 조심하면서 살아야 하거든. 밤샘을 못하거든. 활동을 엄청 제한해야 되거든. 활동 좀더 하다가 이담에 나이 들면 하려고…. 활동 안 하면 나는 건강이 더 안 좋아지고 아마 바로 죽을 거야.”
내가 “혈액투석을 하루에 네번씩이나 하는 지금은 밤샘을 해도 되는 거냐?”고 물으니 그는 “안 하는 게 좋기야 하지만, 대충 할 수는 있다”라고 했다.
첫 번째 징역을 살고 83년 출옥한 뒤, 공장에 취업하기 위해서 건강진단을 받으면서 신장이 안 좋다는 진단을 처음 받았고, 그뒤 현장 활동하랴, 수배기간 동안 도망다니랴, 87년 노동자대투쟁 치르랴…. 이래저래 건강을 챙길 여유가 없었다. 87년 6월 항쟁 무렵부터 부산지역에서 거의 모든 노동자집회의 ‘판을 짠 사람’이 바로 송영수였고 그의 손을 거쳐 만들어진 노동조합이 100여개가 족히 넘는다는 건 자타가 모두 인정하는 사실이다.
부산일반노조 사무실 앞 거리에서.
그렇게 자기 몸 돌볼 여유도 없이 뛰어다니던 그에게 “건강진단이라도 좀 제대로 받아보라”고 채근을 했던 대동병원노동조합 부위원장이 바로 현재 그의 부인 최애심(38)씨다. 89년 그가 두 번째 징역을 살았을 때에는 징역을 산 날짜 수와 그 기간 동안 최애심씨가 보낸 편지의 수가 같았다던가…. 두 사람은 91년에 결혼했고 8년 전에 낳은 아들은 이름을 승혁(勝革)이라고 지었다. “혁명을 계승할 것도 없이, 너는 승리하라”는 뜻이다.
얘기를 끝낼 즈음 그가 나에게 물었다. “나는 하 선배나 나나 모두 비슷한 종류의 인간이라고 보는데, 하 선배는 그 일을 계속하고 있는 이유가 뭐요?” 나는 조금 생각해보고 진지하게 답했다. “세계관이 아직 바뀌지 않았거든.” 그는 잠시 시간을 두고 이렇게 말했다. “나는… 하 선배에 대한 미안함 때문이에요. 그거 알아요? 나 때문에 고문당하게 했던 사람들, 나 때문에 징역 산 사람들… 그 사람들과의 인연이 나를 이 일에서 떠나지 못하게 한다는 것… 그만두고 싶을 때마다 그런 사람들의 얼굴이 자꾸 나를 붙드는 기라. 내가 만났던 노동자들의 얼굴이 나를 이 일에서 떠나지 못하게 자꾸 붙드는 기라.”
앞으로는 송영수와의 인연이 나를 이 바닥에서 떠나지 못하게 할 것이다. 우리 모두 이 일에서 떠나지 말자.
글·사진 - 하종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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