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닷가에서 키운 제자
글 德田 이응철(강원수필고문)
요즘 만남이 늘어나면서 부쩍 커피를 마신다. 커피맛도 모르고 대중적인 아메리카노를 즐겨 든다. 우선 아메리카노는 값이 저렴하고 당분과 프림이 없으므로 당뇨를 예방할 수가 있다. 커피 때문에 즐거운 일이 꽃피운 날이었다. 문인들끼리 매달 돌아가면서 점심을 초대하다 보니 2차로 찻집을 여기저기 전전한다. 결론부터 말하면 어제 구수한 커피 맛을 처음 느낀 카페에서, 뜻하지도 않던 제자와 상봉으로 모처럼 옹골찬 하루였다.
후석로 민 씨 묘가 지키고 있는 봄내 뒤뜰 노루목 고갯길을 오르다 보면 왼편에 대형 창고 카페가 우뚝 서 반긴다. 수필회원 초청으로 지난해 겨울 이 카페에서 종일 쏟아지는 눈송이를 보면서 마신 커피는 평생 크게 느낀 잔칫집 같은 추억이 손짓해 찾았다.
불볕더위가 여름내 지구를 괴롭히던 여름 팔월은 말복도 입추도 불볕더위 앞에서는 속수무책이다. 계속 불볕더위의 횡포는 대단하다. 서민의 계절이란 여름이 올해는 절대 서민을 위하지 않았다. 온열 환자,냉병 환자,일사병 환자들이 속출한다.
그런 와중에서 찾아간 창고 카페에서 뜻하지도 않던 기쁨이 도사리고 있어 신에게 감사한 날이었다.
2009년 동해안 최북단 바닷가에서 가르친 제자가 느닷없이 창고 2층 카페에서 마스크를 벗고 인사를 하는 게 아닌가? 14년 전에 찰랑이는 화진포에 발을 담근 대진고에서 가르친 녀석이다. 하송은-. 담임은 아니었지만, 키가 작고 예의 바르고 예쁜 얼굴이라 작은 학교에서 웃음꽃을 피우던 착한 녀석이다.
기억의 꼬투리는 할머니와 아버지와 동생이 어렵게 사는 불우한 조손가족이라 더욱 진하다. 부모가 일찍 헤어지면서 할머니 품에서 거친 일들을 하면서 동생을 보살펴야 했다. 체구는 작지만 어른스러워 많은 교사들의 추천으로 선행 학생 표창도 받곤 했다.
아침에 지각이 잦았다. 그때마다 항상 얼굴에 눈물 자국이 말라 있었다. 남의 배를 타는 아빠는 항상 술에 젖어 있고, 등굽은 할머니는 손녀와 종일 부둣가에서 고기를 그물에서 벗겨 손이 온통 생채기 투성이시다.
엄마 없이 동생을 살피며 저녁이면 할머니를 마중 나와 그물 추리는 곳에서 끝날 때까지 기다린다. 어둑해야 고무대야에 상처가 난 고기 몇 마리 담아와 저녁밥을 지어야 한다. 야산에서 할머니랑 자루를 메고 가서 검불을 긁어 온다.
14년이란 세월이 물처럼 흘렀다. 그 후 나는 춘천에 와서 퇴직하고 야인이 되어 글쟁이로 고전의 이랑을 서성이고 문학인들과 행사를 따라다니고, 녀석은 88년생이니 35세의 아리따운 여성이 되어 내 앞에서 마스크를 벗고 반색을 하다니. 고생을 빗물처럼 마시며 성장하는 나무처럼 대학도 마다하고 이날 이때까지 오로지 돈을 모아 본향을 반듯이 세우고, 아버지께 작은 통통배라도 사드리기 위해 그 뜻을 이루어간다고 귀띔하니 얼마나 기특한가!
송은이 삶은 참으로 녹록지 않았다. 엄마가 집을 나가면서 할머니 품에서 온갖 부러움도 참아내야 했다. 술에 취해 집안을 뒤엎는 아빠의 주사酒邪 때문에 할머니와 새우잠을 자곤 했다.
옛 동해북부 철도 옆에 조그만 난파선 같은 삼 칸집에서 동생과 떨던 추억들이 참으로 아리고 쓰리다. 비가 오면 줄줄 새는 오막살이 판자촌엔 태풍 때 지붕에 올라앉은 폐타이어 덕에 바람을 잠재우던 초도리-. 지금도 오막살이 집에 할머니와 두 손녀가 수평선을 보며 흰 머리칼을 날리시던 모습이 정물처럼 눈에 선하다.
만나서 첫 번째 던진 질문은 무엇인가?
요즘 꼰대라고 젊은이들이 듣기 싫어하는 말이겠지, 웅장한 커피전문점 사장 아들과 혼인이라도 해서 커피점을 운영하게 되었느냐고 ㅎ 제자를 위해 객관식 답을 제시했지만 아뿔싸! 커피 사장님은 기혼자로 커피 판매원 다섯 명 직원 중에 한 명으로 고용되어 열심히 일하는 종업원이라고 자랑한다.
-선생님!점심 드셨어요?
-그럼, 저기 계시는 세 분 모두 문학인이신데 모임을 끝내고 왔지 ㅎ
송은이는 기뻐서 어쩔 줄을 모른다. 작은 학교라 국토 지리,세계 지리,정치경제,사회문화를 가르칠 때 맨 앞자리에서 마른 눈물 자국이 있는 녀석이 아닌가?
칠순이 넘으니 여기저기 신호가 빗발친다. 예전 난리 통에 예기치 않던 홍역바람이 평생 괴롭힌다. 호흡기는 날씨의 바로미터라 고르지 못한 날씨면 늘 나를 괴롭혔는데, 제자를 만나고 오면서 모두 사라지고 힘이 샘솟는다. 느릅나무 부표 같던 제자가 이젠 웬만한 파도도 끄떡 없다. 자신감을 보이며 모두 선생님들이 잘 키워준 덕분이라고 요즘 세간에 떠도는 사제지간과 격세지감을 온몸으로 보여준다.
동행한 무상 시인께서 모든 얘기 듣고 크게 감동해 성큼 제자를 불러 금일봉을 전달한다. 어려움을 나누는 실로 고마운 일이었다. 예전에 찻집에서 일하면 품행이 안 좋다니 근묵자흑近墨者黑이나 근주자적近朱者赤이라고 비아냥했던 선입견도, 시대가 바뀌면서 어엿한 일자리가 아닌가! 어렵게 엄마 없이 조손가정으로 어린 동생 돌보며 눈물 마를 날 없는 하송은-. 청산은 그 무릎 아래 지란을 기르듯이, 세월의 씻김 속에서 해맑은 얼굴로 키워낸 무덥던 여름날이었다. (끝)
첫댓글 물흐르듯이 술술 읽히는 수필! 역시 고문님이십니다
다방에서 일했다고 하면 하찮게 보던 시절도 있었지요. 그런데 요즘은 쉼터가 되었네요. 제 시누이 딸 조카는 대학을 나와 카페한다고 제빵 기술 배우며 카페 알바를 하고 있답니다. 잘 읽고 갑니다.
고맙습니다.지회장님, 이회장님-,삶은 참 녹록치 못하지요.
녀석이 선생님께서 바닷가에서 키워주었다는 말이 어찌나 고마운지 제목으로 올렸습니다.
하루하루 진정 살아가면서 언제까지 이렇게 삶의 시험을 받아야 할런지요. 어제 누군가가 보내온 사자성어 아끼고 아끼면 똥이된다. 좋은 그릇, 좋은 옷, 두고두었다가 신는다고 했지만 예기치 않은 칼부림으로 세상을 떠나 현실이 불안합니다.
하루하루 좋은 글 쓰며 남을 돕고 살다가 가는게 인생이겠지요. 오늘, 오늘 네 오늘입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