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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 씀 : 박 찬 덕 선교사
마태복음 3장 10절, 11절, 12절 말씀을 통해서 세 가지 참 제사장인 침례 요한이 준 요단강 물속에서의 침례가 있고,
그리고 그리스도께서 친히 주시는 성령님 안에서의 침례, 그리고 불속에서의 침례라는 것을 여러분들과 말씀을 전시간에
나누었습니다. 3:10 또한 이제 도끼가 나무 뿌리에 놓였으니,
그러므로 좋은 열매를 맺지 못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 속에 던져지리라.3:11 나는 정녕 회개시키기 위하여
너희에게 물로 침례를 주거니와 내 뒤에 오시는 분은 나보다 더 능력이 많으시니, 나는 그 분의 신을 들 만한 자격도 없느니라.
그 분은 성령으로 또 불로 너희에게 침례를 주시리라.3:12 그 분은 손에 키를 들고 자기의 타작마당을 철저히 정결케 하실 것이며, 알곡은 모아서 창고에 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로 태우시리라."고 하니라.
참 제사장으로써 온 이 침례 요한이 침례를 베푸는 것은 회개하는 자마다 장사를 지내서 매장되어짐으로 말미암아 새로운 생명의 시작인 부활을 도래하게 하기 위한 것으로서, 회개하는 자에게 물속에 들어가는 침례를 받게 함으로 말미암아 이 장사되어지고, 매몰되어지고, 수장되어지고, 매장되어짐으로 말미암아 완전히 천연적인 출생으로 인한 옛 사람을 모두 끝냄으로 말미암아,
새로운 생명의 시작을 주시는 생명 주시는 영이시오,발아시키는 영이시오, 싹트게 하시는 영이신 그리스도에 의하여 새로운 생명의 시작인 부활 안에서의 그러한 삶을 실제화 되게 하기 위해서 침례 요한은 회개의 선포를 통하여 물 침례를 받게 하였다는 것을 여러분들에게 말씀을 드립니다.
침례는 바로 이 신약시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과 바로 다시 살아나시는 부활을 상징하고 있는 것이 바로 침례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침례 받음으로 말미암아 죽음 안으로 물속에 들어감으로 말미암아 수장되어져서 보이지 않게 되어짐을 통하여
죽음 안으로 우리 천연적인 출생을 가진 인간이 죽음 안으로 넣어짐으로 말미암아 장사되어지는 것이고, 그리고 물 바깥으로 일으켜짐을 통하여 죽음으로부터 모든 천연적인 출생은 다 마감되어지고, 처리되어지고, 다시 새로운 생명의 시작을 위한 부활됨을 의미하는 것이 바로 이 침례라는 것을 여러분들에게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래서 여호수아서 4장 3절과 8절, 9절 말씀을 통해서, 요단강으로부터 이스라엘의 12지파를 대표하는 바로 다른 12개의 돌들이 부활되어 나오는 것을 통하여 침례를 통하여 부활의 삶을 우리에게 예표로 보여주고 있고, 그리고 이 물속에 수장되어진 또 다른 12개의 돌을 통하여 천연적인 출생을 통한 옛 존재가 장사되어짐으로 말미암아 다시 바깥으로 나와서 가나안 땅에 들어갈 선민 이스라엘을 상징하고 있는 그 12개의 돌을 통하여 새 존재의 부활을 의미하고 있다라고 여러분들에게 이렇게 말씀을 드렸습니다.
4:3 너희는 그들에게 명하여 말하기를 '요단 한 가운데 제사장들의 발이 견고하게 섰던 곳에서 돌 열둘을 취하여 그 돌들을 옮겨 너희가 오늘밤 유숙할 곳에 그 돌들을 두라.' 하라." 하시니라.
4:8 이스라엘의 자손이 여호수아가 명한 대로 행하였으니 주께서 여호수아에게 이르신 그대로, 이스라엘 자손의 지파 수대로 요단 한가운데서 돌 열둘을 취하여 그들이 유숙하는 곳으로 메어다가 내려놓았더라.4:9 여호수아가 요단 한가운데에 돌 열둘을 세웠으니 언약궤를 멘 제사장들의 발이 선 그 자리라. 그 돌들이 오늘까지도 거기 있더라.
그래서 좋은 땅, 가나안 땅,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으로 우리가 인도받기 위해서는침례를 받음으로 말미암아 좋은 땅의
실제이신 안식이 있는 그리스도를 상징하고 있는 가나안 땅 곧 그리스도 안으로 인도된다라는 것을 여러분들께 이렇게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래서 바로 이 침례를 통하여 하나님께 인도된 사람은 이 침례 행위를 통하여서 하나님의 임재 앞에서 완전히 천연적인
출생으로 인한 옛 사람과 죄악된 본성을 가진 사람은 하나님 임재 앞에서 완전히 끝나야 하고, 그리고 새로운 생명의 시작을
알리는 부활안의 삶으로 바로 하나님의 임재 안으로 인도되게 하는 것이 침례라는 것을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침례를 통해서 끝나야 되고 그리고 끝장남으로 말미암아 죽임을 당함으로 말미암아 새로운 생명의 시작을
도래케 하는 일이 바로 침례가 주는 영적인 의미라는 것입니다. 침례를 통해서 우리는 반드시 우리 천연적인 출생을 통하여
나타난 죄악된 본성은 모두 끝나고, 매장되어지고, 죽어야 한다라는 것을 레위기 10장 1절, 2절 말씀에 아론의 두 아들 나답과
아비후의 바로 하나님의 임재 안으로 들어갔지만, 바로 하나님의 불 속의 침례인 진노의 심판의 불길에 의하여 죽임을 당했다
라는 것을 여러분에게 예로 말씀을 드렸습니다. 10:1 아론의 아들들인 나답과 아비후가 각자 자기의 향로를 가져다가 그 안에
불을 담고, 그 위에 향을 담아 주께서 그들에게 명령하지 않으신 다른 불을 주 앞에 드렸더니10:2 주께로부터 불이 나와서
그들을 삼키니 그들이 주 앞에서 죽은지라
그렇습니다. 침례는 우리의 모든 것을 끝장내어서 끝냄을 통하여 바로 새로운 생명의 시작을 알리는, 발아를 통하여 싹 트게 되는 부활 안에서 삶을 살게 하기 위해서 우리에게 부활 안에서 새로운 생명의 출발을 주시도록 하는 준비 방법이 참 제사장으로 온
침례 요한을 통해서 선포된 끝냄과 싹틈인 침례 행위라고 여러분들에게 말씀을 드렸습니다.
이 침례를 통한 이 끝냄과 싹틈을 통하여 바로 왕이신 그리스도께서는 침례를 받은 사람들을 얻고 그리고 침례를 받은 자들은
왕이신 그리스도를 영접함으로 말미암아 왕국을 이루게 된다 라는 것을 말씀을 여러분들에게 드렸습니다.
그리고 바로 이어서 마태복음 3장 10절, 11절, 12절에 세 가지 침례에 대한 물속의 침례, 그리고 예수님께서 베푸는 두 가지
침례 중에서 성령님 안의 침례 불 속의 침례가 무엇인지를 우리에게 선포하신 후에 바로 이어서 13절 예수님께서 요한에게
침례를 받으시려고 간 것입니다.
어디로 갔습니까? 존귀와 영화로운 장소인 베들레헴헴으로 갔습니까? 아닙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거룩한 땅의 중심이요 하나님의 거룩한 성전이 있는 예루살렘 성으로 들어갔습니까?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요한에게 침례를 받으시려고 갈릴리에서 요단강으로 들어갔다 라는 이런 아주 의미심장한 일을 우리에게
선포하심으로 말미암아 큰 영적인 비밀들을 우리에게 알려주고 있습니다.
구약 성경 39권의 말씀이나 신약성경 27권 안에 기록되어진 그런 장소나 숫자나 그런 인명들은 반드시 그 안에 영적인
비밀들의 뜻이있기 때문에 여러분들께서 성경을 읽으실 때 그 장소나 숫자나 인명의 뜻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예의주시하며
읽으시기를 말씀드립니다.
그래서 여기 마태복음 3장 13절에 나타난 것처럼 갈릴리 라는 그런 특별한 장소와 요단강이라는 장소를 통한 영적인 비밀을
주님께서 우리에게 나타내 주시고 계시는데요 그것은 바로 십자가와 부활에 대한 말씀을 암시하고 있다는 것을 우리가
이렇게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3:13 그때에 예수께서 갈릴리로부터 요단강에 있는 요한에게 오셔서 그에게 침례를 받으려 하시더라.
예 아주 중요한 메시지입니다. 기름부음을 받으시기 위하여 예수님께서는 요한에게 침례를 받으시려고 가긴 갔는데 베들레헴으로 가신 것도 아니고 그리고 베들레헴을 통하여 또 예루살렘 성으로 들어가신 것도 아닌 전혀 예측하지 못한 갈릴리에서 요단강으로 가셨다 라는 것을 통하여 이 말씀이 주는 영적인 의미가 무엇일까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달려서 죽으시는 십자가
사건과 부활의 사건을 맛보기 위해서는 이러한 부활 안에서의 삶을 소유하기 위해서는 이러한 삶의 길을 이러한 좁은 길을 이렇게 행하여서 가지 않으면 소유할 수 없다는 아주 매우 중요한 정말 말할 수 없이 큰 영적인 비밀을 담고 있는 말씀인 것입니다.
예 바로 여기에서 우리가 예의주시하면서 바라보아야 될 그러한 단어는 다름 아닌 예수님께서 요한에게 침례를 받으시려고 할 때 어떤 장소로 갔는냐 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시작점인 갈릴리에서 바로 목적지인 요단강이라는 것이 여러분 아주 중요한 말씀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거룩하게 되시기 위하여 바로 이 존귀와 환영과 바로 이 메시아의 출생이 계시된 성스러운 장소인
미가서 5장 2절에 말씀하고 있죠 마태복음 2장 5절에서도 이 베들레헴에 대한 얘기를 하고 있습니다.
5:2 〔베들레헴에서 다스릴 자가 나오리라〕 베들레헴 에브라다야 너는 유다 족속 중에 작을찌라도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가 네게서 내게로 나올 것이라 그의 근본은 상고에, 태초에니라
만약에 이 메시아의 출생이 예언된 성스러운 장소인 베들레헴 예루살렘 성으로 예수님께서 들어가셨다 라고 한다면
유대 백성들이 예수님을 아주 다른 차원의 모습으로 바라보게 됨으로 말미암아 예수님에 대해서 완전히 다른 시각과
다른 관점을 통해서 대접하고 다르게 대우하였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이 나사렛 출신으로서 갈릴리의 큰 지역인 조그마한 이름도 없는 그러한 비천한 나사렛 출신으로서 이 갈릴리 사람들을 제자로 부르고 또 이 십자가 사건과 바로 부활 사건을 암시하고 있는 요단강에서 침례를 받으시는 일들을 통하여 유대 백성들에게 더욱더 거부 반응을 일으키게 한 바로 보이지 아니하는 사건에 이런 암시된 말씀이 갈릴리에서 요단강으로 오셨다 라는 얘기인 것입니다.
그러면 갈릴리가 무엇이냐라는 것을 우리가 제대로 이해하고 알아야 될 필요가 있겠죠.
이 갈릴리라는 말은 하나의 둥근 원을 상징하고 있는 어떤 땅 따먹기에 의해서 이렇게 원을 그려서 이것은 내가 소유하고 있는
땅이야 라고 가르켜준 것처럼 이 반지라는 뜻 둥근 고리라는 뜻 어떤 둥근 원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는 바로 팔레스타인의 북부
지역의 갈릴리 호수를 끼고 있는 전반적인 산지를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 바로 이 예루살렘에서 아주 많이 떨어져 있는 특별한 산악지대이기 때문에 지리적으로 지형적으로 이방 민족들의 전쟁을
통하여 로마시대 때도 마찬가지로 이 이방 민족들의 전쟁을 통한 또는 로마 세력들이 쳐들어왔을 때 그들의 위협과 공격들을
피하기 위해서 이 산악지대가 있는 이 갈릴리라는 이곳으로 이렇게 숨어서 활동하였다라는 것을 사도행전 5장 37절에 보면
우리가 알수가 있습니다.
원래 이 갈릴리 지방은 이스라엘이 가나안을 정복한 후에 납달리 지파에게 할당된 땅이라고 여호수아서 20장 7절에
기록되어 있죠 20:7 그래서 그들은 요단 강 서쪽 지역에서는 납달리 산간지방에 있는 갈릴리의 게데스와 에브라임
산간지방의 세겜과 유다 산간지방의 기럇아르바 곧 헤브론을 도피성으로 구별하여 지정하였다.
그런데 이 납달리 지파에게 주어진 이 땅이 가나안 땅을 정복한 후에도 수많은 이방 민족들과 특별히 그 일곱 족속들과의
전쟁을 통하여 패배하고 승리하고 패배하고 승리하는 이런 과정들을 통하여 수많은 가나안족속들인 원주민들이 그곳에서
거주하면서 함께 살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이방인들의 침략도 빈번하고 그리고 가나안 족속들과 크고 작은 이런 전쟁을 통하여 바로 이 자신들과 가장 가까이 인접하여 있는 이 갈릴리 지역에서 삶의 터전으로 삼고 그래서 그들과의 어떤 문화와 문명과 혼인을 통해서 연합되어지는 일들을 통하여 이 갈릴리 지방이 이방인들과의 혼혈아들이 많이 생겨짐으로 말미암아 다른 언어도 많이 생기게 되고 여러 유형의 방언들이 나타나지게 됨으로 말미암아 그 당시에 유대 백성들과 유대 지도자들 정통적인 어떤 보수적인 생각들을 가지고 있는 유대인들로부터 완전히 무시당하고 배척당하고 거부당함으로 말미암아 그 똑같은 유대 땅인 갈릴리 지방임에도 불구하고 마치 이 갈릴리 지방은 이방의 갈릴리 라고 불리어진 어떤 둥근 원을 그려놓고 저기는 우리와 상종하지 못할 사마리아 땅들이야 저기는 저들 족속들만 사는 곳이고 우리들은 저 들과는 아주 다른 그러한 순수한 민족들이야 라고 해서
이사야서 9장 1절이나 마태복음 4장 15절에서는 이방의 갈릴리라고 이렇게 얘기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9:1 어둠 속에서 고통받던 백성에게서 어둠이 걷힐 날이 온다. 옛적에는 주님께서 스불론 땅과 납달리 땅으로
멸시를 받게 버려두셨으나, 그 뒤로는 주님께서 서쪽 지중해로부터 요단 강 동쪽 지역에 이르기까지,
그리고 이방 사람이 살고 있는 갈릴리 지역까지, 이 모든 지역을 영화롭게 하실 것이다.
4:15 "스불론과 납달리 땅, 요단 강 건너편, 바다로 가는 길목, 이방 사람들의 갈릴리
그런데 예수님이 태어나시기는 베들레헴의 땅에서 태어나셨지만 애굽에 잠시 피해서 삶을 살고 돌아오셔서 성장한
삶이 베들레헴에 가기 전에 부모가 살고 있었던 그 나사렛이라는 장소에서 예수님께서 성장하셨다라고
마태복음 2장 22절에서 우리가 말씀을 통해서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이 갈릴리 지역 안에 있는 나사렛이란 곧 갈릴리 지역에서 성장하셨고 그리고 이 공생애 3년 반 동안에
복음 전도 사역의 주 무대가 바로 이 갈릴리 지역이었고 그리고 예수님께서 마태복음 4장 18절부터 21절까지 기록된 가롯유다를 제외한 대부분의 제자들을 바로 갈릴리 지역의 어부 출신들 세리들 이러한 자들을 왕이신 그리스도께서 친히 택정하셔서 부르심을 통하여 이곳에서 많은 복음을 선포하셨고 많은 이적들을 베풀므로 말미암아 이곳에서 예수님을 섬기며 따르는 많은 성도들이 배출되었다라고 바로 이 마태복음 27장 55절에서는 이렇게 성경으로 기록하고 있는 장면을 우리가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27:55 거기에는 많은 여자들이 멀찍이 지켜보고 있었는데, 그들은 예수께 시중을 들면서 갈릴리에서 따라온 사람이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박히시고 돌아가실 때 구 주위에 갈릴리에서 따라온 많은 사람들이 있었는데 그중에 특별히 많은
여인이 있었다 라고 얘기함으로 말미암아 56절에 27:56 그들 가운데는 막달라 출신 마리아와 야고보와 요셉의 어머니 마리아와 세베대의 아들들의 어머니가 있었다. 예 이들 모두가 갈릴리 출신의 여인들이라고 성경에서 얘기함으로 말미암아 예수님께서는 부활하신 후에도 7명의 고기 잡는 제자들에게 특별히 찾아오심으로 말미암아 이 갈릴리는 예수님의 생애와 가장 밀접한 관련이 있는 그러한 특별한 장소라는 것을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26:32 그러나 내가 살아난 뒤에,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갈 것이다."
이러한 역사적 배경을 가지고 있는 갈릴리이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갈릴리에서 요단강으로 가셨다 라는 이 말씀 안에는 특별한
영적인 의미가 있다는 것을 여러분들이 깨달아야 이 마태복음 3장 말씀이 전체적으로 이해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왜 예수님께서 이 존귀와 환영의 장소이고 메시아의 그 출생이 예언되고 계시된 성스러운 그 장소로 여겨지는 하나님의 거룩한 성전이 있는 예루살렘으로 간 것이 아니라 갈릴리에서 예루살렘이 아닌 요단강으로 오셨는지를 우리가 이해하는 것이 아주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 당시에 아주 거룩한 하나님의 성전을 돌보고 어떤 종교적으로 외형적으로 백성들에게 존중을 받던 그런 예루살렘
성전에 있는 제사장들이나 또는 대제사장에게 가시지 않고 야만적인 사람이었고 거친 광야에서 삶을 살고 있었던 그러나
참 제사장이었던 침례 요한에게 바로 오시기 위하여 갈릴리에서 요단강으로 가게 된 이러한 배경을 우리가 이 침례받기 위한
왕이신 그리스도께서 거룩해지기 위한 것이 아니라 단순하게 침례를 받고 그 다음에 거룩해지는 일이 나타나기 때문에
왜 침례를 받기 위한 이런 일을 거룩한 하나님의 성전이 있는 그곳이 아니라 갈릴리에서 요단강으로 가셨는가라는 것을
우리가 알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바로 이렇게 천대받고 소외받고 둥근원이라는 똑같은 한 나라 안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손가락질 당하고
배척을 받고 거부를 당하는 이러한 멸시받는 지역인 갈릴리는 바로 다름 아닌 배척 그 자체를 거부한다 거절한다 너희와 우리들은 근본이 다르다 같은 민족임에도 불구하고 혼혈 족속으로 이루어진 그 갈릴리라는 어떤 문화와 역사적 어떤 배경과 어떤 그러한 우상숭배로 인하여 섞여진 종교들로 인하여 바로 갈릴리 사람들이 본의 아니게 아주 거절과 수모와 배척을 당하고 있었던 그 당시의 갈릴리 지방사람들이 처했던 상황이 그러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바로 존귀와 많은 사람들로부터 관심의 대상이 되는 그러한 성스러운 장소인 베들레헴에서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서 예루살렘 성 안에 있는 대제사장들에게 침례를 받은 것이 아니라, 바로 이 모든 사람들에게 호기심과 의아함 속에서
아니! 도대체 레위지파의 가문으로서 제사장인 저는 어떻게 하나님의 그 제사장들이 먹는 음식은 먹지 않고, 입는 옷은 또 입지
않고, 취해야 될 어떤 그런 것들은 취하지 않으며 광야에서 살고 있는 그 침례 요한에게 가신 그 장면을 여러분 한번 가만히 상상을 해보셔요.
만약에 예수님께서 베들레헴에서 이 존귀의 장소이며 인정받는 장소, 환영의 장소, 성스러운 장소인 그곳에서부터 대제사장이
있는 거룩한 하나님의 성전을 돌보는 예루살렘 성으로 가셨다면, 그 유대 백성들 모두가 예수님에 대해서 인정을 하고 그분을
대우하고 그렇게 심한 핍박과 거절과 반대와 이러한 배척하는 일들은 아마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그 유대 동족들 모두가 갈릴리 지역에 사는 모든 사람들을 멸시하고 배척하는 그 장소인 갈릴리 지역에서 오심으로 말미암아 모든 유대의 동족들, 유대 민족들, 종교 지도자들, 대제사장들, 서기관들, 바리새인들 할 것 없이 모두에게
배척을 받는 그러한 거절당하는 수모당하는 바로 그런 대상의 사람이 되셨던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과 같이 주님을 쫓는 자들 부활 안에 사는 사람들이 되기 위해서는 존귀의 장소이며 환영의 장소이며 성스러운
장소인 베들레헴에서 거룩한 성전을 상징하고 있는 하나님의 성전이 있는 예루살렘 성으로 들어갈 것이 아니라
배척받는 장소인 갈릴리에서부터 배척받는 또 하나의 사람인 침례 요한이 있는 그 요단강에 감으로 말미암아
주님을 쫓는 자들 부활 안에서 삶을 살고자 하는 자들은 바로 갈릴리에서부터 요단강으로 가는 길인 좁은 길의 삶을 사는
자들이 하나님의 의를 이루는 삶의 길이라는 것을 여러분들께 먼저 말씀을 드립니다.
이 베들레헴은 존귀와 따뜻한 환영의 장소이고 거룩한 이 홀의 지팡이가 유다 족속에게서 한 왕이 나올 것인데 그 가문의
한 왕이 모든 민족들을 통치하고 다스릴 것이다 라는 이러한 환영받는 성스러운 장소로부터 오지 아니하시고 종교적으로
문화적으로 이런 혈통적으로 역사적인 어떤 배경에 따라 어쩔 수 없이 본의 아니게 유대의 모든 민족들로부터 멸시를 받고
배척받은 곳인 갈릴리에서부터 이 길을 시작하였을 때 그 갈릴리에서부터 시작된 발걸음은 침례 요한이 있는 요단강에
도착하게 된다 라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하나님의 의를 이루는 방법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여러분 화려함이 있고 달콤함이 있고 명예와 존귀와 인정을 받는 환영받는 장소로부터 시작된 그 길의 종착역은 쓰디쓴 죽음만을 맛보게 된 것을 우리가 성경을 통해서 볼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배척의 장소이며 멸시 받는 장소인 갈릴리로부터 시작된 이 삶은 비록 거부를 당하고 반대를 당하고 배척을 받는 삶의
길을 가지만 그런 과정의 길을 통해서 끝나는 자신의 천연적인 출생을 통하여 이루어진 천연적인 관념들이 모두 떨어져 나가는 끝나는 삶을 통하여 물속에 들어갔다가 물속에서 나오는 바로 이 일들을 통하여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을 상징하고 있는 그것을 통해서 끝냄과 다시 새로운 생명의 시작인 발아를 위한 싹틈의 인생의 삶의 생명의 시작이 있다 라는 것을 여러분들에게 말씀을 드립니다.
우리는 사람들로부터 환영을 받고 인정받는 그런 베들레헴에서부터 예루살렘으로 가는 그런 넓은 길이 아니라, 배척을 받고 거부를 당하고 멸시받고, 소외를 받고, 손가락질 당하는 갈릴리 지역에서부터 출발하여 그런 쓰디쓴 과정을 하나님의 안배에 따라 우리가 혹독하게 다룸을 통하여 끝내져서 바로 부활의 삶에 들어가는 그러한 생명의 좁은 길을 가는 것이 참으로 중요하다 라는 것을 여러분에게 말씀을 드립니다.
예수님께서 이러한 갈릴리 지역에서의 배척받는 장소인 그곳이 아니라, 만약에 갈릴리가 아닌 성스러운 장소로 나타나진 그러한 베들레헴에서부터 예루살렘 대제사장들이 있는 그 예루살렘으로 들어갔다 라면, 아마 준귀와 환영을 받고 모든 유다 백성들이 그 예수님을 새로운 시각에서 그분을 바라봤을 것이고 대우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예루살렘이 아니라 갈릴리에서 요단강에 이르는 이 노선 안에 있는 삶을 삶으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을 통한 이 새로운 생명의 시작 둘째 주의 첫째 날인 여덟 번째 날 주의 날의 부활의 삶을 살게 하기 위해서 예수님께서는 특별히 하나님의 안배에 따라 정해지신 그 의의 길을 따라 그 합법적인 올바른 길을 따라 갈릴리에서부터 요단강에 이르는 그러한 길의 과정을 걸어가셨다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지금 이 합당한 신앙생활을 통한 교회 안에 있는 성도들의 삶은 베들레헴으로부터 예루살렘이 아닌 갈릴리에서부터
요단강으로 가는 좁은 길의 삶이 하나님의 안배에 따른 합당한 의를 소유하는 지름길이라는 것입니다.
이 합당한 신앙생활을 하는 자들 만왕의 왕이신 그리스도를 쫓는 자들의 삶의 길은 이와 같이 갈릴리에서부터 요단강으로 가는 좁은 길의 삶인 것입니다.
우리가 온전히 부활의 삶 둘째 주에 첫째 날인 여덟 번째 날 여덟 번째 아들들 왕이신 그리스도의 계보 안에 속한 42대로 오신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에 포함된 그러한 여덟 번째 아들들이 되기 위해서는 우리가 세상 사람들부터 손가락질 당하고,
수모를 당하고, 배척 받고, 거절을 당하는 그러한 삶의 길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바로 교회의 생활이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올바른 생명의 길을 감으로 말미암아 생명의 노선을 따르는 길이라는 것을 여러분들에게 말씀을 드리는 것입니다.
이 베들레헴에서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은 처음에는 좋지만 나중에는 심히 미약한 것입니다.
처음에는 창대한 길로 나타나지만 나중에는 심히 미약한 길로 나타나지지만 갈릴리에서부터 요단강에 이르는 그 길은
바로 이 끝냄과 싹틈을 위한 그런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 안에서의 새로운 생명의 시작을 알리는 생명의 길이기 때문에 처음은
심히 미약하나 나중에는 심히 창대해지는 넓은 탄탄대로의 포장된 고속도로에 안착하는 생명의 노선에 있는 자들이 될 것임을
갈릴리에서부터 요단강에 예수님이 가신 길처럼 그러한 길을 우리가 따라서 좁은 길의 삶을 사는 자들이 되어야 된다 라는
것입니다. 갈릴리는 바로 이러한 배척받는 장소인 것입니다.
여러분 요단은 우리들의 천연적인 출생을 통한 천연적인 모든 것들을 끝내고 수장시키고 완전히 장사 지낸 바 되고
매장시킴으로 말미암아 끝냄과 동시에 부활의 장소가 있는 곳이 요단이라는 것입니다.
요단은 천연적인 출생과 곧 첫 사람 아담에 속한 모든 죄악된 본성을 다 끝내고 둘째 아담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와 접붙임을
당함으로 말미암아 새로운 생명의 시작을 위한 발아를 하기 위한 싹틈이 있는 곳이 요단인 것입니다.
예 요단강은 끝냄과 싹틈이 있는 곳입니다.
십자가의 죽으심과 3일 만에 부활하시는 부활 사건을 의미하고 있는 것이 요단인 것입니다.
그래서 선민 이스라엘 백성들은 40년 동안 광야를 통과한 후에 라암셋이라는 태양의 아들, 우상의 아들, 세상의 아들,
사단의 아들로부터 시작된 이 선민 이스라엘이 모압평원에 이르러서 하나님의 아들, 사람의 아들, 참 자식이라는 뜻을 가진
이 세상의 아들이 하나님의 아들이 되기까지 민수기 33장에 기록되어져 있는 그러한 자가 되기까지는 예수님의 계보와 같은
42대의 계보에 따른 선민 이스라엘의 이 42곳이라는 이 여정의 삶에 마지막 부분에 모압평원에 이르는 그들이 바로 요단강을
건넘으로 말미암아 그동안에 있었던 모든 것들이 아담 안에서 출생되어진 죄악된 본성 천연적인 출생으로 인하여 나타나진
그러한 타락한 모든 본성들이 모두 매장되어지는 것이 요단강인 것입니다.
그래서 선민 이스라엘이 40년 동안 광야를 통과한 후에 모압 평원을 지난 다음에 어디가 보입니까?
바로 젖과꿀이 흐르는 안식의 땅 가나안이 보이는 것입니다.
가나안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신성한 땅이요 거룩한 땅이요 예수 그리스도의 임재를 상징하고 있는 그 거룩한 땅에 들어가서
생명 양식을 풍성하게 공급받고 그 소산물을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와 같은 자로 조성되기 위해서는 이 요단강이라는 최후의
지점에서 다 끝내야 되고 수장되어져야 되는 것입니다.
모두 다 매장되어짐으로 말미암아 옛 사람은 죽어지고 새 사람을 가진 자로서 부활 안에 사는 삶을 소유한 자로서 가나안 땅에
들어갈 수 있는 자격을 가지고 들어가야 된다는 것이 요단강인 것입니다.
요단강은 선민 이스라엘 곧 신약시대에 살고 있는 교회 안에 있는 우리들과 바로 예수님을 믿는 모든 자들의 삶을 다 끝장내는
것이 요단강인 것입니다. 이 요단강은 광야에서의 42곳이라는 이 방랑의 역사를 끝내고 40년 동안 일어난 시험과 환란과 고통과 시련의 이러한 40년 동안 과정의 모든 역사 원망하고 불평하고 배도하고 반역한 그 모든 것을 요단강 안에 들어가 사라지게 함으로 말미암아 매장함으로 끝내는 삶이 요단강에서의 침례인 것입니다.
예 방랑의 시대인 민수기 33장에 기록되어 있는 42곳의 모든 여정의 삶들을 끝내고 바로 그들에게 새로운 생명의 시작을 알리는 가나안 땅 새로운 생명의 시작인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하고 있는 그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 도착하게 하기 위해서 새로운 생명의 시작 새로운 생명의 출발을 주게 하기 위해서 모든 것들을 끝내게 함과 동시에 그들을 다시 일으켜서 바로 발아를 위한 생명의 싹을 트게 하기 위한 새로운 생명의 시대 안으로 인도해 주는 것이 침례인 것입니다.
그래서 십자가의 죽음을 통해서는 옛 창조 안에 속해 있는 모든 것들이 끝장나는 것이고 이 3일 후에 나타나는 부활은 바로 모든 것을 새롭게 하는 싹트게 하는, 발아시키는 그래서 부활 안에 계신 그리스도를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 계신 아버지와 아들과 그 영 하나님을 우리는 생명 주시는 영, 발아시키는 영, 싹트게 하는 영 이렇게 얘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이집트의 삶과 이 40년 동안의 광야에서의 삶은 옛 시대에 속한 것이기 때문에 다 끝장내어져야 되고 새로운 시대에
가나안 땅에서의 그 일곱 족속이 있지만 전쟁을 통하여 정복함으로 말미암아 그 땅을 새로운 자신들의 땅으로 소유하기 위해서 전쟁을 통하여 정복함으로 말미암아 새로운 시대를 도래하기 위해서 요단강에서 새로운 출발을 갖게 하기 위해서 그동안의 모든 삶을 살면서 경험되어졌던 그러한 천연적인 출생을 통하여 옛 아담 안에 속해 있는 그런 죄악된 본성들을 다 매장시키고 그리고 새로운 생명을 싹트게 하고 발아시킴으로 말미암아 십자가의 죽음을 통해서 옛 창조 안에 있는 모든 것들을 끝장내고 그리고
두 번째 아담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와 접붙임 당함으로 말미암아 바로 발아시키는 영 생명 주시는영, 싹트게 하는영, 촉진시키는 영에 의하여 우리가 광야에서 가나안 땅으로 상징 되고 있는 좋은 땅인 곧 그리스도 안으로 인도하게 한 결정적인 것이 요단강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요단강의 의미인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갈릴리에서부터 예수님께서 요단강에 이르는 길로 침례요한에게 오셔서 요단강에서 침례를 받으셨다 라는 얘기는 모든 배척으로부터 다 모든 옛 천연적인 출생으로 인하여 나타나진 그런 첫 사람 아담으로 시작돼서 고착화된 그러한 바로 이 죄악된 본성 모든 것을 끝장냄으로 말미암아 새로운 생명의 시작과 출발을 알리는 부활에 이르게 된다는 것이 바로 갈릴리에서부터 요단강에 이르는 길입니다.
예수님께서 자신의 동족으로부터 얼마나 수모를 당하고 얼마나 손가락질 당하고 배척을 당하셨습니까?
그러나 십자가상에서 모든 것을 끝내시고 부활을 통하여 새로운 시작을 알리는 발아시키는 영이신 그 생명 주신 영에 의하여
싹트게 함으로 말미암아 끝냄과 이 싹틈을 통하여 부활에 이르게 함으로 말미암아 바로 우리들을 새로운 생명을 소유한 자들로 왕이신 그리스도께서 그렇게 만들어 주셨던 것입니다.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에 대한 이야기인 것입니다.
그래서 이 신앙생활을 통해서 우리는 이 갈릴리에서부터 이 요단강으로 가는 말할 수 없는 이 이 좁은 길 배척을 당하고 거절을
당하고 온갖 수모를 당하고 부끄러움과 수치를 당하는 그러한 갈릴리에서부터 삶의 여정을 시작해서 요단강으로 가야 되는 길이 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가는 길이 멀고도 험합니다. 좁은 길이에요. 얼마나 높은 길인지 몰라요.
처음에 이집트에서 모압평원까지 42곳이라는 장소를 통과했습니다.
40년이라는 고통의 시간, 시련의 시간, 유혹의 시간, 시험의 시간들을 거쳤어요.
그러고 나서 또 이러한 요단강에 들어가서 모든 것을 배척받는 삶을 통하여 모든 것을 끝내서 새로운 생명의 시작이 있는 부활의 삶을 갖기 위해서 우리는 지금 좁은 길을 가고 있는 삶의 여정이 신앙생활 교회 생활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런 신앙생활을 통하여서 바로 이 신약시대에 살고 있는 우리 성도들에게는 교회 안에 있는 성도들에게는
바로 이 성도들과의 교제를 통해서 우리가 이러한 분쟁과 다툼과 이러한 미움과 시기, 질투, 원망 이런 것들을 통해서 자꾸
나 자신이 극심하고도 혹독하게 다루어짐으로 말미암아 자꾸 나 자신을 벗겨내어서 나 자신이 천연적인 출생을 완전히
제거되어짐 말미암아 끝남을 갖기 위해서 우리가 신앙생활을 교회 생활을 통해서 하게 되는 것을 알 수가 있는 것입니다.
교제가 그래서 그렇게 중요합니다.
성도들과의 교제 자주 만날 수 있다면 자주 만나시고요자주 전화할 수 있다면 자주 전화하시고요.
어떻게든지 핑계를 대서 빛이 강하게 비추는 성도들을 만남으로 말미암아 여러분에게 더욱더 생명의 길로 인도하는 빛나는
별들을 사역자들을 만나시기를 여러분들에게 권면을 드립니다.
우리는 갈릴리로부터 배척받는 삶을 통하여 처음에는 비록 안 좋지만 끝나는 삶이 매우 좋은 부활의 삶을 갖게 되는 것처럼
바로 이 침례를 통해서 매장되어지고 수장되어지고 장사 지낸 바 되어서 바로 이게 드러나 보이지 아니하는 십자가의 죽음을
통한 그러한 끝남은 끝이 아니라 사실은 새로운 생명의 부활을 나타내고자 부활을 도래케 하고자, 부활을 알리고자 부활을
우리에게 소유하게 하고자 끝남은 끝이 아니라 새로운 생명의 시작에 디딤돌이라는 것을
여러분들에게 말씀을 드리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침례를 통하여서 천연적인 출생의 모든 잘못된 죄악된 본성들이 완전히 수장되어져서 매장되어지시는 이 끝남은 항상
우리를 생명의 이 발아를 나타내주는 싹틈으로 우리를 인도해 주시기 때문에 우리는 침례라는 이러한 신앙생활을 통하여 항상
모든 끝남이 싹틈이 된다 라고 이렇게 하는 침례를 통해서 우리의 신앙생활이 이와 같이 갈릴리에서 요단강으로 행해지는 신앙의 삶을 살아야 된다는 것을 여러분들에게 말씀을 드립니다.
예 그렇습니다. 베들레헴에서 예루살렘 성으로 가는 길은 처음에는 밀월의 삶처럼 달콤하게 보입니다.
그러나 그 끝이 심히 나중에는 씁니다. 그러나 갈릴리에서 배척받는 장소요 거절당한 장소요 수모를 당하고 손가락질 당하는
그 갈릴리에서 바로 이 요단강으로 가는 그런 삶의 길은 비록 소외받고 거절당하고 따돌림을 당하고 다른 사람들로부터 멸시를 당한다 할지라도 그 시작은 매우 쓰지만 배척받는 장소로부터 그 요단강까지 가는 행로의 길은 마치 선민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모압평원 42곳이라는 장소를 건너기까지 얼마나 쓰디쓴 시련들과 시험들과 유혹들과 아픔들이 있었습니까? 그렇습니다.
그 시작은 매우 쓰지만 끝이 매우 달콤하고 아주 좋은 부활 안에서의 삶을 살게 함으로 말미암아 우리들은 이와 같은 삶을
통해서 왕이신 그리스도를 만나야 된다는 것을 여러분들에게 말씀을 드립니다.
우리의 주님을 쫓는 삶 왕이신 그리스도를 만나기 위한 교회 생활을 하는 것 교제의 생활을 하는 것은 우리 모두가 침례를 통해서 완전히 갈릴리에서부터 떠나는 삶을 통하여 끝내줘야 되고 그리고 이 요단강에 도착하여서 바로 왕이신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모범이 되어서 침례를 받고 다시 세상 가운데 나오셔서 공생애 사역을 하신 것처럼 우리도 또한 예수님과 같은 그 길을 쫓아 좁은 길로 가는 갈릴리에서부터 요단강으로 가는 삶의 길이 참다운 신앙생활의 길이라는 것을 여러분들에게 말씀을 드리는 것입니다.
처음은 아주 달콤하고 좋으나 나중에는 안 좋은 그러한 길이 갈릴리에서부터 예루살렘 성으로 가는 길이기 때문에 예수님은
그 길이 아니라 하나님의 안배에 따라 하나님의 정하신 하나님의 의로운 그 길을 따라 갈릴리에서부터 요단강으로 가신 것을
우리가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갈릴리에서 배척받고 수모를 당하고 거절당함으로 말미암아 우리 자신이 깎여진 바 되고 제거가 되고 눌러지는
다루어짐을 통하여 끝냄으로 말미암아 이 끝냄이 새로운 생명의 시작을 알리는 싹틈을 가져오기 때문에 이 끝냄을 통하여
우리는 생명 안에 있는부활을 산출한다는 것을 우리가 알 수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한다는 거 주님을 쫓는다 라는 이러한 삶은 우리가 이러한 배척의 삶, 좁은 길을 가면 갈수록 갈릴리에서
수모당하고 거절당하고 배척당하는 삶이 많으면 많을수록 우리는 더욱더 완전하게 끝나져서 매장되어짐으로 말미암아 끝남의
체험이 이 갈릴리 지역을 지날 때 얼마나 많은 유다 동족들로부터 유다 민족들로부터 손가락질 당했습니까? 그러나 이게 환영의 장소, 존귀의 장소, 그리고 이 성스러운 장소인 베들레헴에서 출발한 것이 아니라 갈릴리에서 요단강으로 전혀 다른 방식의 길을 왕이신 그리스도께서 택하심으로 말미암아 이 끝남의 체험은 갈릴리에서 침례 요한에게 이르러서 침례를 받기까지 그 끝남의
체험은 말할 수 없이 쓰지만 그러나 침례를 통해서 수장되고 매장되어졌다가 다시 일어남을 통하여 무슨 말씀이 있습니까?
마태복음 3장 16절에 예수님께서 침례를 받으시고 즉시 물에서 올라오셨다. 보라 하늘 문이 열립니다. 하늘이 그분께 열렸습니다. 이런 달콤함 이런 말할 수 없이 놀라운 위대한 일들이 정말 우주 가운데 두 번도 아닌 처음으로 이러한 일들이 일어나게 됐던 것입니다. 갈릴리에서 요단강으로 가신 예수님 1부 교제 여기서 마칩니다 연이어 2부 올려드리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