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79:9 우리 구원의 하나님이여 주의 이름의 영광스러운 행사를 위하여 우리를 도우시며 주의 이름을 증거하기 위하여 우리를 건지시며 우리 죄를 사하소서 |
* 하나님의 이름(시79:9)
히브리 사회에서는 이름의 의미가 매우 중요하게 간주되었다. 바벨론 군대에게 짓밟힌 나라의 주권과 민족의 자주성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이라고 생각한 것이다(9절). 유다가 패망한 것은 여호와 하나님께 끼친 모독 때문이라는 것이다. 히브리 신앙은 하나님의 이름을 바로 아는 일로부터 시작되었다(출 3:13).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건져내라는 하나님의 강권에 굴복하여 사명을 감당할 때 하나님의 이름이 긴요하게 작용하였다. 바로의 양자였던 모세가 이스라엘의 신망을 얻을 수 있었던 것은 그에게 여호와의 이름이 계시되었기 때문이다. "네가 말하는 신이 누구냐?"(출 3:13)라는 질문을 받았을 때 할 말이 있어야 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미 그에게 ‘나는 스스로 있는 자이며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이라고 계시하신 것이다(출 3:6,14). 이처럼 여호와의 이름은 이스라엘 신앙의 기초요 역사 이해의 중심이었다. 하나님의 이름을 안다는 것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아는 것이다. 솔로몬은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 때문에 성전을 짓는다고 했으며(왕상 3:2; 5:17), 하나님은 성전에 당신의 이름을 두셨다고 말씀하셨다(신 12:5; 14:21; 왕하 21:7).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께서 성전에 거하신다고 믿었다(신 12:11; 14:23; 26:2). 예루살렘에 올라가는 것은 곧 여호와의 이름으로 가는 것이었다(렘 3:17). 본서 기자들이 여호와의 이름을 의지한다고 말했을 때는 여호와의 본질을 의지한다는 것이나 다름없었다(33:21; 사 26:8).
출처: 『톰슨III 성경주석』, 시편79편.
첫댓글 좋은 내용입니다. 신약에서도 그렇지만 특히 구약에서 하나님의 이름에 대한 존숭이 특심한 것 같습니다.
네, 알겠습니다.
<호크마 주석>
시79:9
구원의 하나님 - 하나님께서 당신의 언약 백성 이스라엘을 언약적 차원에서 구원하시고 보호하시는 분이심을 나타내는 언약적 호칭이다(18:46;88:1;사 17:10).
주의 이름의 영광을 위하여 - '이름'이란 단순히 하나님께 대한 외적 호칭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 또는 그분의 신격(神格)을 대변하는 것이다(창 25:19-26강해, '이름 짓기' 참조). 따라서 본문은 하나님 자신의 영광을 위해서라는 뜻이다. 피조된 세상 만물의 존재 목적은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데 있으며, 구속의 역사 역시 마찬가지이다. 이런 측면에서 본문에는 창조주요 구속주이신 하나님께 대한 깊은 신앙심이 표출되어 있다. 아울러 이 간주는 자신들에게는 도움이나 용서받을 만한 자격이나 공로가 없음을 인정하는 것이기도 하다.
사하소서 - 이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카파르'(* )는 '덮다'의 뜻이며, 여기서 '속죄하다'(레 9:7;신 21:8), '용서하다'(65:3;78:38)의 뜻이 유출되었다. 이는 하나님께서 희생 제물에 근거하여 죄를 덮으심으로 사하시는 것을 가리킨다.
좋은 설명을 첨부해주셔서 유용합니다.
<박윤선 주석>
시79:9
우리 구원의 하나님이여..... - 그들은 이 귀절에서 다시 반복하기를 자기들이 당했던 고난은 어떤 것이든지 다 하나님의 진노하심에서 비롯된 것이요, 하나님께서 자기들과 화목을 이루어 주시지 않는 한, 그런 상태에서 도저히 위로를 받을 수 없었다고 한다. 자기들이 많은 죄악을 범함으로 말미암아 용서를 받을 소망에서 멀어졌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느꼈던 그들은 여러 가지 표현을 사용하고 있다. 첫째로 자기들에게 하나님께서 은총을 나타내 보여주시도록 하기 위해서 하나님을 가리켜 "우리 구원희 하나님"이라고 부른다. 둘째로 자기들에게는 하나님께서 긍휼을 베푸실 만한 것이 아무것도 없으므로 오직 하나님께서 영광으로 자기들에게 나타내 주셨다고 말하고 있다. 여기에서 우리는 죄인들이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는 것은 아름다운 행위로 말미암은 공로 또는 만족으로 인한 것이 아니라, 값없이 거저 주시는 공로없는 사죄로 말미암는다
는 것을 알 수 있다. 내가 조금 전에 말한 것과 제 6편에서 보다 자세하게 설명한 것은 여기서도 마음에 필히 간직해야 할 것이다. 즉 하나님께 단순히 외부적인 형벌에서 건짐받기만을 바라지 말고,
채찍을 가지시고 우리에게 찾아오실 때에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바로 해주시기 위한 것으로 알아야 한다. 우리는 어리석은 병자가 자기의 병이 낫기만을 바라고 그 질병의 원인과 근원에서 구원받는 것을 생각하지 못하는 것과 같은 전철을 밟아서는 안된다. 주석가들이 '긍휼' 또는 '호의를 베푸소서'라고 번역한* (카페르)란 단어에 대해서는 다른 곳에서 말한적이 있다. 이 말은 정확히 '깨끗하다' 또는 '속죄하다'라는 의미를 가진 제사에 사용되는 말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은총이 내리기 바랄 때마다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기억하도록 하자. "피 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느니라"(히 9:22).
어찌하여 열방으로 저희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 말하게 하리이까 주의
종들의 피 흘림 당한 보수를 우리 목전에 열방 중에 알리소서
갇힌 자의 탄식으로 주의 앞에 이르게 하시며 죽이기로 정한 자를 주의
크신 능력을 따라 보존하소서
주여 우리 이웃이 주를 훼방한 그 훼방을 저희 품에 칠배나 갚으소서
르러하면 주의 백성 곧 주의 기르시는 양 된 우리는 영원히
@장코뱅 주께 감사
하며 주의 영예를 대대로 전하리이다(10-13).
@장코뱅 아멘!
자식들이 부모의 이름에 먹칠하지 않기 위해 노력하듯이 이스라엘과 하나님의 관계도 마찬가지로 매우 중요했던 것을 알고 있습니다. 운명공동체이니 더 말할 것도 없겠죠.
본문에서 하나님의 이름의 영광을 행사하기 위하여, 그리고 그 이름을 증거할 수 있도록 우리를 도우시고 구원해달라는 간청이 마음을 파고 드네요. 자신들의 위치를 정확히 알고 있음이 느껴지요.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하나님의 이름을 위해서 사는 것의 중대함과 필요성을 인식하고 있다는 거잖아요. 이 기도는 우리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되는 것으로 깊은 감동을 줍니다.
네, 풍성한 믿음의 댓글에 매우 공감합니다.
공감합니다22
하나님의 이름에 대한 정확하고 합당한 설명을 올려 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