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렐루야! 주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믿음의 이유” 信仰の理由 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오늘 본문에 대해서는 조금 깊게 들어가면 지리적인 위치나 기타 사항에 대해서도 말씀 드릴 수도 있겠습니다만, 오늘은 가급적 간략하게
필요한 핵심내용만 추려서 말씀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로 전날에 말씀을 전하시고는 거기서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많은 사람들을 먹이셨던 이른바 오병이어의 기적을
행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다음에 거기서 가버나움으로 가시게 되는데, 오병이어의 현장에 있었던 무리들이 예수님을 찾아 나서게 됩니다.
그리고 다음 날에 간신히 배를 타고 와서 예수님을 발견하게 됩니다.
이처럼 간절하게 예수님을 찾는 모습은 참으로 놀랍기까지 합니다. 이 모습을 본 예수님께서는, 그래, 너희가 나를 이토록 간절하게
찾으니, 너희 믿음이 크도다……뭐 이런 식으로 칭찬을 하실 만도 한데, 오히려 예수님께서는 칭찬은커녕 그 무리들을 꾸짖고 계십니다.
그 꾸짖는 이유가 바로 오늘 말씀 중에 요한복음 6장 26절입니다.
요한복음 6장 26절
“26.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요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로다”
イエスは彼らに答えられた。「まことに、まことに、あなたがたに言います。あなたがたがわたしを捜しているのは、しるしを見たからではなく、パンを食べて満腹したからです。
즉, 이 말씀은 너희들이 나를 찾은 이유가 오병이어의 기적을 보았기 때문이 아니라, 떡을 배불리 먹었기 때문에 나를 찾은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바로 이것이 잘못되었다고 말씀하고 계신 것이지요.
얼핏 보기에는 좀 이상합니다. 아니,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기적을 행하신 것을 보고 놀랍게 여겨서 예수님을 다시 찾아온 것 아니겠어요?
이게 그렇게 혼이 나야 할만한 일인가요?
이 시점에서 우리는 분명히 확인을 하고 넘어가야 할 부분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예수님께서 표적을 행하신 이유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공생애 기간 동안에 병든 자를 고치시고, 죽은 자를 살리시고, 그 외에도 물을 포도주로 만드시고, 파도를 잔잔하게 하시는
등 수많은 기적을 행하셨습니다.
하지만 그처럼 기적을 행하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이를 알아보기 위해서는 예수님께서 행하신 기적 내용을 자세히 살펴보시면 알 수가
있습니다.
자, 예수님께서 병자를 많이 고치셨습니다. 혈루병이 있는 여인도 고치셨고 앞을 보지 못하는 사람, 걷지 못하는 사람도 고치셨습니다.
그러면 그 사람들은 이제 그 인생에서 두 번 다시 병에 걸리지 않나요? 물론 그럴 수도 있었겠지만, 구체적으로 그런 말씀은 없습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서 예수님께서는 죽은 사람을 살리기도 했습니다. 그렇다면 그 사람들은 이제 두 번 다시 죽지 않았나요? 아니에요.
역시 수명이 다 하면 모두가 다 죽어갔습니다. 지금까지 살아있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한 번 물을 포도주로 만들어놓으셨기 때문에 이제 우리는 포도주가 떨어지면 언제든지 물을 포도주로 만들 수가 있게 되었나요?
폭풍이 불어올 때 이를 잔잔하게 하셨으면, 이제 두 번 다시 갈릴리에는 폭풍이 치지 않나요?
아닙니다. 포도주는 예수님께서 기적을 행하신 이후에는 그 누구도 순식간에 물을 포도주로 만들 수도 없었고, 여전히 갈릴리 바다에는
폭풍이 불어올 때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는 왜 이와 같은 기적을 행하신 것일까요.
그것은 두 가지로 생각해볼 수가 있습니다.
첫째는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는 것을 나타내시기 위함이었고, 둘째는 천국이 임하면 어떻게 되는지를 우리에게 보여주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여러분, 천국, 하나님의 나라가 어디입니까. 그것은 바로 예수님이 계신 곳이 천국입니다. 아무리 초라한 곳이라 하더라도 예수님께서
계시다면 그 곳이 바로 천국이고, 예수님께서 우리 마음 안에 오시면, 우리 마음이 바로 천국이 되는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 때까지 사람들은 천국, 하나님의 나라를 구체적으로 본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가시면 어떻게 되었습니까. 맹인이 보며 못 걷는 사람이 걸으며 나병환자가 깨끗함을 받으며 귀먹은 사람이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게 되었습니다.
이 땅에서 보여주신 기적은 말하자면 천국의 그림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아직 이 세상에서는 완전하지가 못합니다. 그러나 진정으로 천국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이 모든 것이 영원토록 완전하게 회복된다는 것을 보여주시기 위해서 예수님께서는 수많은 기적을 행하셨던 것이고,
그리고 천국에 들어가기 위해서, 하나님을 믿게 하고 하나님의 아들 독생자 예수님을 믿도록 하는 데에 그 목적이 있으셨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찾던 그 무리들은 어땠습니까. 그들은 하나님의 아들에도 관심이 없었습니다. 구원에도 관심이 없었습니다. 천국에도
관심이 없었습니다. 오로지 떡에만 관심이 있었습니다.
즉, 예수님이 계시다면 그들은 자신들이 필요할 때 언제든지 떡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예수님을 찾아 나섰던 것이었습니다.
이렇게 말씀을 드려도 어떤 분은, 음? 그게 뭐가 잘못됐는데? 라고 생각하실지 모르겠습니다만, 이 생각은 예수님을 우리의 구세주가
아니라, 단지 자신의 욕구를 채워주는 화수분과 같은 打ち出の小槌도구로 생각을 하게 된다는 것에 문제가 있다는 뜻입니다.
이 오병이어의 기적이 어떤 내용입니까. 당시 많은 무리들, 마태복음 14장 21절에 보면 성인 남성만 5천명이었다고 하니, 여성과
아이들을 합하면 최소한 만 명은 훨씬 넘었을 것입니다.
신약성경에는 복음서가 네 권이 있지요? 예, 마태복음, 마가복음, 누가복음, 그리고 요한복음입니다. 이 복음서는 주로 예수님의 행적을
기록한 책들인데 그 내용을 보면 몇몇 내용은 서로 겹치는 부분이 있기도 하고, 경우에 따라서는 각 책에만 기록된 내용이 있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 오병이어에 대한 내용은 사복음서 모두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를 보더라도 이 오병이어의 기적은 다른 기적들보다도 훨씬 더
놀라운 일이었을 것이라고 짐작이 됩니다.
오병이어, 다섯 개의 떡과 두 마리의 생선을 가지고 그 많은 사람들이 먹었다고 하는데, 글쎄요. 이에 대한 그림이나 영화를 보면
떡이나 생선을 꽤 큼지막하게 설정을 해놓는 경우를 볼 수 있습니다만, 실제로는 어땠는지 성경을 한 번 보시면 흥미로운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먼저 이 다섯 개의 떡과 두 마리의 생선에 대해서는 요한복음에 자세히 나옵니다.
요한복음 6장 8절~9절
“8.제자 중 하나 곧 시몬 베드로의 형제 안드레가 예수께 여짜오되
9.여기 한 아이가 있어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고 있나이다 그러나 그것이 이 많은 사람에게 얼마나 되겠사옵나이까”
弟子の一人、シモン・ペテロの兄弟アンデレがイエスに言った。
「ここに、大麦のパン五つと、魚二匹を持っている少年がいます。でも、こんなに大勢の人々では、それが何になるでしょう。」
여기에 보면 떡과 물고기는 제자들이 가지고 오거나 한 것이 아니에요. 그 무리 중 마침 음식, 말하자면 도시락 정도라고 할 수
있겠는데, 그 내용물이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라고 하는 겁니다.
그리고 당시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먹었던 떡은 밀로 만드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는데, 여기서는 보리떡이라고 합니다. 보리는 밀가루보다도
값이 쌌었는데, 그러니까 우리 식으로 말하자면 쌀밥이 아니라 꽁보리밥 정도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값이 싼 떡이었습니다. 그렇다면
물고기는 어땠을까요. 떡 하나를 보더라도 값싼 떡을 가지고 있는 마당에 물고기가 설마 고등어나 잉어만한 고기였겠습니까. 그것도 지금
이 도시락 주인이 누구입니까. 당시에는 사람의 수에도 포함되지 않을 정도인 어린 아이가 가지고 있던 도시락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당시 이 아이가 가지고 있었던 물고기는 큰 생선이 아니라, 기껏해야 멸치? 정도 되는 작은 생선이었다고 신학자들은 보고 있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꽁보리밥 다섯 덩이와 멸치 두 마리. 그러나 이 볼품없는 식량으로 예수님께서는 적게 잡아 만 명 이상이나 되는 사람들을
먹이셨던 것입니다. 참으로 놀라운 광경이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에는 흥미로운 점이 있습니다. 여러분께서 이와 같은 기적이 일어나는 자리에 직접 계셨다고 생각해보세요. 정말 배가 고프고,
내가 가지고 온 식량은 다 떨어졌어요. 사람들은 만 명이 넘는데 먹을 것이라고는 어린 애가 가지고 있는 작은 도시락 하나 밖에
없었습니다. 참으로 절망적인 상황이지요.
바로 그 때 예수님께서 놀라운 기적을 행하셔서 식량을 나누어주셨습니다. 비록 보리떡과 멸치 정도 되는 식사였지만, 지금 배가 고파서
눈이 돌아갈 마당인데 그게 문제인가요? 아주 배부르게 먹을 수가 있었어요.
그렇다면 여러분께서는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매일 같이 집에서 차려주는 밥을 먹을 때에도 잘 먹겠습니다. 잘 먹었습니다. 이렇게
인사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참으로 신기합니다.
이 사건이 기록된 4복음서의 공통점이 무엇인가 하면, 이처럼 놀라운 식사를 한 다음에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는 기록도 없고, 예수님께
정말 잘 먹었습니다 하고 감사를 드렸다는 내용이 어디에도 적혀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이를 보면서 저는 출애굽기의 장면이 떠올랐습니다. 애굽을 탈출한 이스라엘 백성, 이제 홍해를 건너 광야를 행진합니다. 하지만 광야라고
하는 곳은 식량은 고사하고 마실 물조차 없습니다.
그럴 때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물과 만나와 때로는 메추라기까지도 주시면서 먹여 살리셨습니다. 그러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 때마다,
오, 하나님, 우리를 이렇게 먹여 주시오니 감사 드립니다……라는 말을 했었습니까? 아니요. 한 번도 안 했습니다. 왜 안 했을까요.
그렇습니다. 그들은 그와 같은 놀라운 기적을 당연하게 여겼던 것입니다.
여러분, 감사가 사라지면 이를 당연하게 여기게 됩니다. 이렇게 되면 여기에는 심각한 부작용이 발생하게 됩니다.
예를 들어서, 어떤 능력이 참 많은 사람이 있었어요. 그 사람은 돈도 많고 모든 면에서 대단히 능력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이
사랑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 능력이 있는 사람은 자신이 사랑하는 그 사람을 위해서, 그 사람이 원하는 일이라면 무엇이든지 해줄 수
있는 힘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사랑하는 사람은 어떠냐 하면, 그 사람은 자기가 필요할 때만 찾아와요. 뭐를 사달라, 뭐를 해달라, 이렇게 자기한테 필요한
일이 있을 때에만 그 능력 있는 사람을 찾아옵니다.
이 능력 있는 사람은 충분히 들어줄 힘이 있습니다. 그래서 모든 것을 들어주었어요. 그랬더니 처음에는 참 좋아합니다. 하지만 조금
지나면 어떻게 되나요? 이제 나중에는 소원을 들어주면 당연하게 생각하고, 무슨 이유가 있어서 안 들어주면 서운해하게 되고 맙니다.
그리고 그 능력이 있는 사람이 그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려고 해도 자기가 필요하지 않으면 안 만나줘요. 어디 그뿐인가요. 심한 경우에는
그 사람이 아닌 다른 이성 친구들을 만나고 다닙니다. 그러다가 자기가 아쉬울 때가 되면 찾아와서 이걸 해달라 저걸 해 달라 하고,
해주면 당연하게 생각하고, 안 해주면 서운해하고 불평을 하고 화를 내기까지 합니다.
여러분, 이것이 사랑인가요? 아닙니다. 이것은 사랑이 아니에요. 감사가 없으면 사랑 또한 없습니다.
성경에 보면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을 먼저 버린 적이 있나요? 아니에요. 그런 적은 없습니다. 반대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먼저 하나님을
버리고 말았던 것입니다.
감사가 사라지면 사랑이 사라집니다. 해주면 당연하고 안 해주면 불평불만이에요.
사람 사이에도 마찬가지 아니겠습니까. 부모와 자식 간에도, 아내와 남편 간에도 서로에게 감사가 있으면 불만이 없습니다. 감사할 만한
일을 당연하게 여기게 되면, 그 때부터 불평과 불만이 생기는 것입니다.
여러분, 예수님께서 해주신 것이 하루하루 먹는 문제를 해결해주신 것, 그 뿐인가요?
예수님께서는 무엇보다도 십자가에서 우리를 구원해주셨습니다. 우리의 힘으로는 절대로 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 목숨을
내놓으시고 우리를 구원해주셨다는 것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 사실을 알면 불평이 사라집니다. 불만이 사라지는
것입니다.
잠시 화제를 바꾸어볼까요?
여러분들도 돈이 필요하시지요? 예, 돈이 필요하지 않은 사람은 없습니다. 그렇다면 얼마쯤 있으면 충분하시겠습니까. 1억엔? 2억엔?
좋습니다. 제가 좀 쓰겠습니다. 100억엔 정도면 되겠습니까? 요즘 보면 코로나 때문에 경제적인 어려움을 겪은 분들이 많이 계실
것입니다. 그래서 정부에서도 지원금을 준다고는 하는데, 이 지원금이 고맙기는 합니다만, 그렇다고 충분하다고 생각하시는 분들은 그리
많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데 정부에서 여러분께 100억 엔을 지원하겠다는 연락이 왔습니다. 사기가 아니에요. 정말입니다. 다만 두 가지 조건이 있어요. 첫
번째 조건은 뭐냐 하면, 미안하지만 이 돈을 받으러 동경에 있는 일본은행까지 직접 와달라는 거예요. 그럼 안 가겠어요? 아니, 지금
10만엔 20만엔 정도로도 감지덕지 하고 있는 마당에 100억 엔이라고 생각해보십시오. 동경이 아니라 지구 반대편이라 하더라도 가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두 번째 조건은 뭐냐 하면, 돈을 받으러 오면서 한 번도 화를 내면 안 된대요.
자, 기한은 없어요. 언제라도 좋으니까 동경에 가기만 하면 100억 엔이 생깁니다. 이 돈만 생기면 코로나가 문제예요? 내 평생 동안
편안하게 살고도 남을만한 돈입니다. 나만이 아니라 내 자식, 내 손주까지도 돈 고생 안하고 살 수 있을 정도의 금액이지요. 동경으로
가는 그 발걸음은 참으로 가벼울 것입니다. 마음에는 감사가 넘쳐나겠지요.
자, 이제 다카사키에서 신칸센을 타고 갑니다. 그런데 사이타마까지 가다가 신칸센이 고장이 났어요. 그래서 도중에 내려서 근처 역까지
버스나 택시를 타고 가게 되었습니다.
그러면 여러분은 화가 날까요? 생각해보세요. 조금만 있으면 100억 엔이 생깁니다.
자, 이제 역에서 나와서 버스를 기다리고 있어요. 그런데 누군가가 갑자기 내 앞에 새치기를 해요.
그러면 여러분은 화가 날까요? 생각해보세요. 조금만 있으면 100억 엔이 생깁니다.
지나가는 어떤 어려운 사람이 천 엔만 도와달래요. 여러분, 안 도와주시겠습니까? 조금만 있으면 100억 엔이 생깁니다.
이와 같은 사실을 알고 있다면 우리는 서운한 일이 있더라도 화를 안 낼 수가 있습니다.
여러분, 아무리 볼품없는 물건이라 하더라도 누군가가 100억 엔을 내고 사게 되면 그 물건은 100억 엔의 값어치를 하게 됩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가치는 어느 정도 될까요. 여러분께서는 여러분 스스로가 어느 정도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요한계시록 5장 9절~10절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합니다.
요한계시록 5장 9절~10절
9.그들이 새 노래를 불러 이르되 두루마리를 가지시고 그 인봉을 떼기에 합당하시도다 일찍이 죽임을 당하사 각 족속과 방언과 백성과
나라 가운데에서 사람들을 피로 사서 하나님께 드리시고
10.그들로 우리 하나님 앞에서 나라와 제사장들을 삼으셨으니 그들이 땅에서 왕 노릇 하리로다 하더라
彼らは新しい歌を歌った。「あなたは、巻物
を受け取り、封印を解くのにふさわしい方です。あなたは屠られて、すべての部族、言語、民族、国民の中から、あなたの血によって人々を神のために贖い、
私たちの神のために、彼らを王国とし、祭司とされました。彼らは地を治めるのです。」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피로 우리를 사셨다고 성경은 기록합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가치는 무엇과 같습니까. 그렇습니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의 가치는 바로 예수님의 피의 가치와 동일하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예수님의 보혈의 가치가 어느 정도 됩니까. 100억이요? 200억이요? 이는 전세계가 아니라 전 우주를 합친다 하더라도 예수님의
보혈의 가치에는 미치지 못한다고 하겠습니다. 이것이 무엇입니까. 그렇습니다. 이 예수님의 보혈의 가치가 바로 우리 자신의 가치,
우리를 구원해주시기 위해 예수님께서 지불하신 값어치라는 뜻입니다.
이를 위해서 우리가 한 것은 무엇입니까. 우리가 한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이 귀한 선물을 하나님께서는 아무런 대가 없이,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사랑인 것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동안에 때로는 부족할 때가 있다 하더라도, 때로는 화가 날 때가 있다 하더라도 이 주님의 은혜를 생각하면 감사가
넘쳐날 수밖에 없지 않겠습니까. 우리가 하나님을 믿고 예수님을 믿는 이유, 바로 이 감사, 십자가에서 주신 하나님의 사랑, 예수님의
사랑에 대한 감사라고 하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가 세상 것을 구하는 것이 잘못은 아닙니다. 하지만 필요할 때만 주님을 찾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주시면 곧바로 잊어버리는 것도
옳지 않습니다. 그리고 안 주신다고 실망하거나 불평하는 것도 옳지 않다고 하겠습니다.
주시면 감사, 그리고 안 주신다 하더라도 더욱 좋은 것으로 채워주실 줄 믿고 감사를 드려야 합니다. 생각해보십시오. 우리를
구원해주시기 위해 그렇게 비싼 값을 치르셨는데, 우리가 고통을 당하거나 어려움을 당하는 것을 기뻐하실 리가 있겠습니까.
시편 103편 3절~5절
3.그가 네 모든 죄악을 사하시며 네 모든 병을 고치시며
4.네 생명을 파멸에서 속량하시고 인자와 긍휼로 관을 씌우시며
5.좋은 것으로 네 소원을 만족하게 하사 네 청춘을 독수리 같이 새롭게 하시는도다
主は あなたのすべての咎を赦し あなたのすべての病を癒やし
あなたのいのちを穴から贖われる。 主は あなたに恵みとあわれみの冠をかぶらせ
あなたの一生を 良いもので満ち足らせる。 あなたの若さは 鷲のように新しくなる。
단순히 떡 몇 개, 물고기 몇 개가 문제가 아닙니다.
우리가 넉넉할 때에 감사를 드리고, 우리가 부족할 때에는 넉넉하게 채워주실 것이기에 감사를 드려야 합니다.
시편 50편 14절~15절
14.감사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며 지존하신 이에게 네 서원을 갚으며
15.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니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로다
感謝のいけにえを神に献げよ。 あなたの誓いをいと高き神に果たせ。
苦難の日に わたしを呼び求めよ。 わたしはあなたを助け出し あなたはわたしをあがめる。」
시편 50편 23절
“감사로 제사를 드리는 자가 나를 영화롭게 하나니 그의 행위를 옳게 하는 자에게 내가 하나님의 구원을 보이리라”
感謝のいけにえを献げる者は わたしをあがめる。 自分の道を正しくする人に わたしは神の救いを見せる。」
잠언 4장 8절
“그를 높이라 그리하면 그가 너를 높이 들리라 만일 그를 품으면 그가 너를 영화롭게 하리라”
それを尊べ。それはあなたを高める。それを抱きしめると、それはあなたに誉れを与える。
우리 모두 감사로 주님께 제사를 드리면서 기쁨과 찬양으로 우리 주님을 높임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주님을 영화롭게 하고, 주님으로부터
영화롭게 여김을 받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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