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중심(편향된)의 이분법
정현수
이젠 나일 먹어 살아가는데 모든 게 그게 그거고 어지간하기만 하다. 하릴없이 살아가면서 내 일상을 되돌아봄은 앞으로 얼마 남지 않은 내 삶이 아무 잡음 없이 이어가길 바랄 뿐이다. 어떤 사실이나 주위에서 일어나는 가지가지의 일, 또는 시간에 무가치하게 헛됨이 아니길 바라기 때문이다. 인생을 살면서 어떤 것(일)에서 간혹 짜증을 내거나 남을 배려하지 못함은 도리와 의무, 책임을 저버리는 일이다. 스스로 아직 많이 부족하다는 걸 모르고 있다. 그러니 잘나지도 않은 누군가는 저쪽에 따로 존재할 수 없으므로 세상 흐름으로 그냥 묻혀 흘러간다. 언젠가 한 번 법정 스님의 이 글을 거론한 적이 있다. 그분이 쓴 책 어느 글귀에서 '세상의 흐름은 근원적으로 각 개인의 동정과 직결되어 있다. 그러므로 그 세계 안에 살고 있는 개인의 사고방식이나 행동은 그 세계를 형성하고 있다.' 했다. 결론은 말이나 행동에 책임을 져야 한다는 말이다. 어느 누구든 살아옴을 돌아본다면 자신을 중심으로 세상은 돌아간다는 생각을 할 수가 있다. 그건 기정사실이고 가장 평범한 세상 이치다. 현실에서 어떤 이는 그저 허다한 사람일 수 있지만 자기 안에 숨어있는 내면을 새로이 뒤집어 본다면 이 세상에서 가치(?) 있는 존재였고 뭔가 이루어 내려는 목마른 사람일 수 있다. 그 존재 의미는 일상의 모든 것에 자신이 중심이 되어 이루어진다는 뜻일 수 있다. 때론 우리가 감히 생각할 수 없는 한계를 넘어설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 삶을 지켜야 할 도리로 생각지만 말고 항상 탐구하며 자신의 꿈과 이상을 위해 지혜롭고 너그러워져야 함이 어떨까?
내가 아는 두 사람이 있다. 북평 남창 살던 때다. 오며 가며 만나면 눈 인사 하며 지내는 사람들이다. 지금으로부터 2 년이 조금 지났나? 거의 같은 시기에 한 사람은 아들을 또 한 사람은 딸을 제금 낸 사람 들이다. A는 아들을 장가보냈고 B는 딸을 출가시켰다. 한참 전국적으로 유행하는 팬데믹 때 일이다. 가서 보진 못했지만 내 작은 표시로 난 그들을 위해 진심으로 축하를 보내며 기쁨을 함께하는 내 작은 성의를 보냈다. 모두가 어려울 때 스며들 듯 조용하게 같이하겠다는 신뢰를 보낸 것이다. 그땔 기억하지만 A는 아무 일 없었다는 듯 흘려보냈지만 B는 따로 식사와 함께 마음에 드는 도자기 접시를 답례로 보내왔다. 그는 자기 마음을 다해 사랑을 전해왔고 고맙게도 큰 기쁨의 선물을 보내온 것이다. 두 사람을 비교하는 이 글을 쓰는 지금 나도 소인배라는 느낌이 든다. 좀 더 생각이 깊은 좋은 감정으로 이끌어 가야 하는데 도통 그게 안되고 흔들리는 분심만이 가득하다. 한 번 더 생각하고 좋게 보려 했지만 냉철하게 판단이 안 선다. 마냥 아쉬움만 느껴질 뿐이다. A와 같이하는 수평적 관계로 이으려 노력해 보지만 자꾸 헛웃음이 난다.(뒤 글에서 이유 밝힘) 인간적인 여유를 가지고 살아가고 싶은데 온기도 없고 탄력도 없는 꼬장꼬장한 사람이 된 듯싶다. 평온한 마음은 온데간데없고 내 진면목은 일차원적 고정관념에 젖어 지엽적인 것에 온갖 신경을 곤두세우는 마음이 좁은 사람 같다. 항상 좋은 마음으로 모든 이와 함께하고 다가가야 하는데 난 겉만 보고 있다.
그러고 많은 세월이 흘렀고 난 그곳을 떠나 순천으로 이사했다. 며칠 전 A의 늦둥이 아들이 아들을 낳았다 하는 전활 받았다. 얼마나 기쁘고 희한한 일인가 하느님의 축복 속에서 따뜻한 마음으로 기쁘게 받아들인 새로운 생명체는 거리낌 없는 신비가 아닌가. 하느님의 대의적 진실에서 자유롭게 태어난 그의 대를 이을 피붙이는 평온한 마음과 함께한 맑고 예쁜 귀하디 귀한 사랑이었다. 언제부터인가 카톡에 그의 손자 얼굴이 올라와 있고 벌써 첫돌이 됐다 한다. 그리고 이사 온 지 반년이 넘은 나에게 손주 자랑과 함께 어떤(?) 암시를 보내왔다. 그것도 몇 년 만이다. 도저히 내 좁은 인성으로 참지 못할 그의 떳떳지 못한 얌체 머리 없는 통보가 밉다. 처음엔 그냥 상관없이 받아들이고 그런 것마저 흘려보내는 사람이 될까 했는데 생각할수록 미워진다. 부족한 나는 그의 독선적이고 이기적인 사회적 불통에 분함만이 앞설 뿐이다. 사람은 이익이나 욕구에 지배를 받는다 하지만 자기 욕심에 설득이 없는 사람에 어떻게 해야 할지 도대체 감이 안 잡힌다. 그러나, 혹, 어쩌면 난 보려고 애를 쓰지만 보지 못하는, 겉만 그럴듯한 사람일 수도 있다. 그 안에 있는 다양함을 소화 못할 수 있다는 말이 아닌가 싶다. 난 안을 세밀히 들여다보지도 못하고 제대로 판단할 수 없는, 전혀 타협을 모르는 고집불통인가? 하는 일말의 마음의 부담도 함께 한다. 한편 인간적인 여백이 부족한 사람일 수 있다는 말이다.
무릇 사람들은 자기 자신을 헛되이 하지 말고 참다운 지혜와 따뜻한 마음으로 살아가야 한다. 형식 논리에 빠지지 말고 살아감을 배우고 자신을 더 많이 정진케 하는 나아감이 필요하다. 가치에 한정되거나 무가치한 일에 몰입하지 말고 어떤 비전을 위한 매진이 필요할 것 같다. 자기 하는 일, 과정에서 무관심하거나 소홀히 하면 삶이 무의미해질 것 같다. 무의미해지는 때, 거울을 바라보면 거울에 비치는 자기 얼굴이 한참 못난 가증스러움을 느낄 것이다. 그러니 제대로 된 생을 살고 싶으면 자신에게 구차하지 아니하고 있는 그대로의 성의를 다해야 하지 않을까? 그릇된 행동, 말보다는 조용함 속에서 뜻을 일궈내는 마음가짐이 필요하다. 때론 자기가 갖고 있는 물건이나 지혜를 남에게 기꺼이 나눌 수 있는 아량이 필요할 것 같다. 그릇된 자세를 터부시 하고 옳은 본능을 갖추는 건 우리가 살아가야 할 자세다. 구체적 사실에 온 신경을 곤두세워야 한다. 어떤 것이 잘못이라 생각되면 될 대로 돼라 하는 식으로 밀어붙이는 사람이 되지 말고 나를 거두어들이는 겸손함을 가져야 한다. 흐트러진 나를 돌아봐야 하는 나 자신의 책임감이 필요하다. 내 삶을 되돌아봐야 함은 당연하다. 이해가 삼해, 사해를 넘어 오해가 되는 불합리를 만들지 말아야 한다. A와 이 글을 쓰는 난 똑같은 사람이다. 서로 자아를 보지 못하는 어둠에 갇힌듯하다. 요한 1 서에 이런 말이 있다. "하느님을 사랑한다고 하면서 자기 형제를 미워하는 사람은 거짓말쟁이입니다. 보이는 자기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 어떻게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사랑할 수 있겠습니까?"
2024. 3. 29.
이 글을 읽는 사람이 어떤 경각심을 갖길 바라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