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계삼관(法界三觀) -주변함용관(周徧含容觀) ①
셋째는 주변함용관이다. 주변함용은 곧 사사무애이니 고덕을 의지하여 십현문을 드러냄이다.
이 십현문이 다 같이 연기하여 무애원융하여서 그 문 하나에 모든 것을 다 구비한다.
第三周徧含容觀이라 周徧含容은 即事事無碍니 且依古德하여 顯十玄門이라
제삼주변함용관 주변함용 즉사사무애 차의고덕 현십현문
此之十門이 同一緣起하여 無碍圓融하여 隨其一門에 即具一切하니라.
차지십문 동일연기 무애원융 수기일문 즉구일체
[華嚴經疏;大正藏 35, p. 515上]
주변함용관에서 '주변(周徧)'은 두루 퍼진다는 뜻이니 '
천상의 달 하나가 모든 물에 다비치는 것[一月普現一切水]'을 말합니다.
'함용(含容)'이란 그 반대로 '일체의 물에 비친 달이 천상의 한 달에 포섭되어 있다
[一切水月一月攝]'는 뜻입니다.
따라서 주변함용(周徧含用)은 일월보현일체수(一月普現一切水)하고
일체수월일월섭(一切水月一月攝)으로 일즉일체(一即一切)이고
일체즉일(一切即一)인 사사무애(事事無碍)를 말하는 것이며,
주변함용관은 일즉일체(一即一切)이고 일체즉일(一切卽一)인
사사무애의 근본 법계를 바로 보는 것입니다.
하나가 일체가 되고 일체가 하나가 된다는 것은 진공묘유의 체(體)와 용(用)을 따라서
상즉상입(相卽相入)이 성립되기 때문에 가능한 것입니다.
상즉상입(相卽相入)이란 진공묘유의 근본 작용인만큼 일체가 상즉상입하면
사사무애의 도리가 자연히 성립합니다. 이것은 불교에서 자의적으로 만든 것이 아니라
법계(法界)의 본체(本體)가 원래 이러한 까닭입니다.
부처님도 원시경전에서 말씀하시는 것과 같이
대법계연기(大法界緣起), 상주법계(常住法界)라는 것은
부처님이나 중생이 만든 것이 아니라 본래 있는
그대로의 참모습을 부처님이 바로 깨쳐서 중생들에게 소개하였을 뿐입니다.
법계관(法界觀)이라 하니 마음으로 무엇을 만들어 접합하는 것으로 생각하면 그것은 잘못된 오해입니다.
만법 자체를 바로 보면 그 실체에 있어 전체가 쌍차쌍조(雙遮雙照)하고 원융무애(圓融無碍)해서
중도(中道)라고 표현 안 할래야 안 할 수가 없습니다.
중도라는 것도 만법 자체의 근본을 지칭할 뿐이지 불교에서 중도를 만든 것이 아닙니다.
부처님이 중도를 깨쳤다는 것도 만법 자체의 근본 원리인 중도를 깨쳤다는 것이지
중도를 만들어 만법의 자체에다 적용시킨 것이 아닙니다.
'고덕(古德)을 의지하여 십현문(十玄門)을 드러내니'에서
'고덕(古德)'은 현수(賢首)스님을 말하는데,
현수스님은 지엄(智儼)스님의 십현문을 조금 수정하여
「탐현기(探玄記」나「오교장(五敎章)」에서 십현문을 잘 설명해 놓았습니다.
지엄스님의 십현문을 계승한 현수스님의 십현문을'고십현(古十玄)'(五敎章說)이라 하고,
이를 수정한 현수스님의 십현문을 '신십현(新十玄)'(探玄記說)이라 합니다.
여기서는 현수스님의 신십현문을 말합니다.
'이 십현문이 다 같이 연기하여 무애원융하여서 그 문 하나에 모든 것을 다 구비한다'
는 뜻은 십현문을 열어 놓으니 각각 문이 열 개인 줄 알면 오해입니다.
왜냐하면 그 내용에 있어 상즉상입하므로 이 문 저 문이 서로서로 다르다고 볼 수 없으며,
일즉일체이고 일체즉일이기 때문에 한 문에 열 개의 문이 다 구비되어 있고,
열 개의 문 이대로가 다 한 문입니다. 중생의 이해를 돕기 위하여 열 가지로 나누어 놓은 것이지
딴 문이 있는 줄 알면 안 됩니다.
한 문에 일체문이 다 구비되어 있기 때문에 곧 사사무애가 성립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