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시대(페.톡Cell)회원에게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은혜와 평강있기를 원하노라💖 9월(秋夕).사랑으로 이웃과 가족 전도하는 달
✫이방인이 제사하는 것은 귀신에게 하는 것이요. 하나님께 제사하는 것이 아니니. 나는 너희가 귀신과 교제하는 자가 되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라(고전10:20)
고전10:14-33절) 가능한 것과 유익한 것
본문에서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에게 우상(偶像)의 제물(祭物)을 먹는 문제에 대하여 말씀하고 있습니다. 즉 그(바울)는 같은 우상(偶像)의 제물(祭物)을 먹는다 해도, 다 같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는 이방(異邦) 신전(神殿)에서 다른 사람들과 함께 우상(偶像)의 제물(祭物)을 먹는 것은 죄라고 결론을 내립니다.
왜냐하면, 이것은 아무리 *자기는 아니라'고 해도 우상(偶像)의 신전(神殿)에 참예하는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시장에서 고기를 사거나, 혹 다른 집에 초대되어 알지 못하는 중에 우상(偶像)의 제물(祭物)을 먹게 될 경우는, 그것을 먹어도 죄가 되질 않는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당시 고기들은 모두 우상(偶像)의 신전(神殿)에 드린 것이었는데, 그런 것까지 따져가면서 먹으면, 아무것도 먹을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물론 그런 추측까지 해가면서 고기를 가려서 먹거나 혹 일일이 *이것이 어디서 온 것이냐?'고 물어 본 후, 먹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일단 우상(偶像)의 신전(神殿)에서 먹지 않고, 다른 곳에 초대되거나, 시장에서 사온 경우는 죄가 아니라, 문화적(文化的)인 접촉(接觸)이며, 죄(罪)가 되지 않는 다는 것입니다.
Ⅰ.우상(偶像) 신전(神殿)에서 제물(祭物)을 먹는 경우(상)
고린도의 그리스도인들 중에는 우상(偶像)숭배자(崇拜者)들과 함께 앉아 음식을 먹는 자들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물론 그리스도와 우상(偶像)은 결코 어울리지 않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상(偶像) 신전(神殿)을 찾는 자들이 있었다면, 다음과 같은 경우일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여행을 갈 때, 불국사(佛國寺)를 가고, 그 다음은 석굴암(石窟庵)을 둘러보게 될 경우입니다. 이렇게 불국사(佛國寺)나 석굴암(石窟庵)을 찾아가는 것은 하나님을 버리고 우상(偶像)을 숭배(崇拜)하기 위해 가는 것이 아니라, *옛날 조상들의 문화(文化)를 찾아가는 것'입니다.
그런 것을 보면서 물론 *조상들의 지혜와 감탄(感歎)하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우리 조상들이 왜 쓸데없는 것에 열심히 매달렸는가?'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입니다.
어떤 분은 아침에 등산을 가면, 꼭 내려오는 길에 절간에 들러서 쪽박으로 샘물을 떠먹는 분도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가 하나님을 버렸거나, 혹은 귀신(鬼神)이 그에게 붙었다고 말할 순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만일 그리스도인이 고시공부를 위해서 장기간 절간에 체류한다면, 어떻게 될까? 물론 그가 절에서 생활한다고 해서 예불(禮佛)에 참석하거나, 불교(佛敎)로 개종(改宗)했다는 뜻은 아닙니다.
단지 도시에서 하숙을 하듯, 절간에서 하숙을 하고, 조용한 곳에서 공부를 하고 있을 뿐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가 장기간 절간에 체류할 경우, 아무리 공부의 목적이라 해도 그의 신앙(信仰)이 온전할 순 없습니다.
물론 고린도에는 문화(文化)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문화(文化)라는 것이 다 이방신(異邦 神)의 문화(文化)였고, 이교적(異敎的)이었습니다. 그리고 아무리 문화(文化)라고는 하지만, 한번 씩 가서 보는 것과, 실제로 그 안에서 사람들과 함께 음식을 먹는 것은 의미가 다른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간단한 논리(論理)를 가지고 이렇게 설명합니다.
10:14-15절)그런즉 내 사랑하는 자들아 우상 숭배하는 일을 피하라. 나는 지혜 있는 자들에게 말함과 같이 하노니. 너희는 내가 이르는 말을 스스로 판단하라. 우리가 축복하는바 축복의 잔은 그리스도의 피에 참예함이 아니며. 우리가 떼는 떡은 그리스도의 몸에 참예함이 아니냐.”
그리스도인들이 *우상(偶像) 신전(神殿)에서 우상(偶像)의 제물(祭物)을 먹어도 되느냐?' 하는 것은 우리가 축복(祝福)하는 성찬(聖餐)을 가지고 추론(追論)하면 간단하다는 것입니다. 그리스인들은 성찬(聖餐)에 참여하는 것을 아주 복(福)되게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성찬(聖餐)에 참여하는 것도 단지 하나의 *상징(象徵)에 불과하냐?'는 것입니다. 성찬(聖餐)은 단순한 형식(形式)이 아닙니다. 실제로 그리스도의 몸에 참예하는 것이며, 실제로 그리스도의 피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다음 절에서 좀 더 상세하게 설명하고 있습니다.10:17절)떡이 하나요. 많은 우리가 한 몸이니 이는 우리가 다 한 떡에 참여함이라”
많은 사람들이 성례(聖禮)를 형식(形式)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성례(聖禮)는 단순한 형식(形式)이 아닙니다. 우리는 *머리로 모든 것을 다 이해하면 충분하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 그렇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예를 들어서 결혼(結婚)을 한 부부와 결혼(結婚)을 하지 않고 그냥 사는 부부의 경우를 예를 들어보면, 물론 혼인식(婚姻式)을 하지 않고. 그냥 사는 부부도 서로 죽도록 사랑할 것입니다. 서로 *사랑하는 마음이 영원히 변치 않을 것'이라고 수 없이 손가락 걸고 약속도 합니다.
그러나 좋을 때는 상관이 없는데, 관계가 좋지 못할 때는 이들을 묶어 줄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물론 *한때는 좋아했지만, 지금은 좋아지지가 않는다'는 것입니다. 즉 *나는 사랑하고 싶은데, 상대가 사랑하게 되지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헤어질 것'입니다.
사람은 좋을 때만 있는 것이 아니라. 좋지 않을 때가 더 많습니다. 그럴 때도 주관적(主觀的)인 마음의 변덕에 따라 관계가 변하지 않으려면, 여러 사람들 앞에서 객관적(客觀的)으로 인(印)을 쳐야 합니다. 그래야만 상태가 좋든, 나쁘든, 끝까지 책임을 지게 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에게는 *머리로 안 되는 것이 너무나도 많습니다'. 신앙(信仰)은 특히 더욱 그렇습니다. 상태가 좋을 때는 하나님께서 나만 사랑하는 것 같은데, 교회를 몇 주 빠지고 나면, *내가 과연 그리스도인인지?' 조차도 의심하게 될 때가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기가 속한 Cell(공동체)에서 눈으로 보이는 진리의 연결 고리(회비)로 우리 안에 있는 믿음을 인(印)치는 것입니다. 그리고 세례(洗禮)는 주님에 대한 우리의 *연약한 신앙(信仰)을 객관적(客觀的)으로 인(印)치는 행위'입니다.
우리는 예수 믿고 난 후에도 반복적으로 죄를 짓습니다. 그럴 때는 어떻게 합니까? *회개하면 용서가 된 것 같다가도 또 시간이 흐르면, 용서가 안 된 것'같습니다. 그럴 때는 주님의 살과 피에 참예함으로써 즉 실제로 떡(살)을 입으로 씹고, 또 잔(피)을 목구멍 속으로 넘김으로써 정말 주님이 *나와 죄를 위하여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구나' 하는 것을 온 몸으로 느끼는 것입니다.
아마 우상(偶像) 신전(神殿)에서 음식을 먹는 사람들은 *사람의 입으로 들어가는 것이 그 사람을 더럽히지 못한다.'는 말씀을 너무나 직접적으로 적응(適應)한 것 같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손을 씻지 않고, 음식을 먹는 것을 보고 바리새인들이 비아냥 거렸습니다. 왜냐하면, 유대인들은 *접촉으로 사람이 더러워진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위생적인 불결이 아니라, 도덕적인 불결이었습니다. 즉 *죄인들과 손을 잡으면, 부정을 타서 하나님 앞에서 도덕적으로 불결해진다'고 믿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런 접촉이 사람을 더럽히는 것이 아니라, *사람 속에서 나오는 나쁜 생각, 나쁜 의도들이 사람을 더럽힌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물론 우상(偶像) 신전(神殿)에서 음식을 먹는다고 그 음식이 그 사람을 이교도(異敎徒)로 만들지는 못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가 우상(偶像) 신전(神殿)에서 음식을 먹는 그 행위, 즉 그의 몸짓과 언어(言語)는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무엇이 과연 참된 진리(眞理)인지? 혼동(混同)을 겪게 된다'는 뜻입니다.
사실 사람들에게 전달되는 것은 입에서 나오는 언어(言語)보다 몸짓과 언어(言語)인 경우가 더 많습니다. 즉 어떤 사람이 얼굴을 험악(險惡)하게 하고, 이빨을 드러내면서 “사랑 한다”고 말할 때, 우리는 그 사람이 전혀 우리를 사랑하지 않고 있다는 것을 압니다.
불상(佛像)을 뒤에 두고 강설(講說)하는 추기경(樞機卿)의 모습이 보여 주고자 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또 신부들과 수녀들을 앉혀놓고, 강의(講義)하고 있는 법정(法廷) 스님의 모습이 의미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결국 “진리는 하나로 통한다”는 것입니다.
물론 스님과 목사님이 만날 때마다 멱살을 잡고 서로 싸워야 할 필요는 없습니다. 혹 이웃에서 산다면, 주차하거나 눈을 치우는데 협력을 할 수도 있고, 서로 좋은 일이 있을 때는 음식이나 선물 등을 교환 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공식적인 자리에서 서로 진리(眞理)를 교환하는 것' 같은 이런 모습들은 *천주교 (天主敎)가 얼마나 *진정한 그리스도의 복음(福音)에서 멀리 떠나 있는지'를 확인하게 될 것입니다.
요즘 청소년들이 추는 춤은 대단히 몸을 많이 움직이고, 배꼽을 다 내어놓고. 격렬(激烈)합니다. 대개 텔레비전에서 나오는 빅 댄서들이 그런 춤을 출 때가 있습니다. 그런 춤을 기독교식으로 수용하여 추는 것을 본 적이 있습니다. 어떤 제목은“성령이여 임하소서!.”라는 것인데, 전혀 성령님이 오실 것 같지 않은 춤입니다.
물론 중요한 것은“영성" : 스피리트(spirit)입니다. 저는“영성”이라고 표현하는데, 어떤 분은 그런 리듬을 수용하면서도 *영성이 좋은 분이 있는가'하면, 어떤 분은 영성 자체가 세상적인 느낌이 들어서 심한 거부감(拒否感)을 주기도 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좌우간 우상(偶像) 신전(神殿)에서 음식을 먹는 것은 우상(偶像) 숭배(崇拜)라고 결론을 내리고 있습니다.
10:19-22절)그런즉 내가 무엇을 말하느냐 우상의 제물은 무엇이며 우상은 무엇이냐. 무릇 이방인의 제사하는 것은 귀신에게 하는 것이요. 하나님께 제사하는 것이 아니니, 나는 너희가 귀신과 교제하는 자가 되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라. 너희가 주의 잔과 귀신의 잔을 겸하여 마시지 못하고. 주의 식탁과 귀신의 식탁에 겸하여 참예하지 못하리라. 그러면 우리가 주를 노여워하게 하겠느냐. 우리가 주보다 강한 자냐.”
여기서 *주보다 강하다'는 것은 우리가 주님보다 더 똑똑하고, 또 주님보다 더 경건할 수 있느냐?' 는 것입니다. 주님이 우리의 연약함을 아시고“가까이 하지 말라”고 한 것이 있으면, 비록 자기 자신은 이길 수 있을 것 같아도 순종하는 것이 결국 좋다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내가 죽을지라도 주를 버리지 않겠나이다.'라고 했으면서도, 주님은 고민하시고 두려워하시는 밤에 베드로는 기도도 하지 않고, 잠만 쿨쿨 잤습니다. 그 결과가 무엇입니까? 대실패(大失敗)였습니다.
(
이 세상(世上)에서 사탄(詐誕)은 *우는 사자처럼 삼킬 자를 찾아서 돌아다니고'있습니다. 그런데 스스로 목을 사자(獅子)입 안으로 넣으면, 아무리 *주님이 지켜 주신다' 해도 결국 물어뜯기지 않을 순 없습니다.
예를 들어서 여자 혼자 밤에 갈대밭으로 남자를 만나러 가는 것은 결코 잘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위험한 놀이는 하지 않는 것'이 안전합니다.아-멘
찬송가 420장 *너 성결키 위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