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보이는 것 뒤에 보이지 않는 것들이
이영숙(시인ㆍ문학평론가)
불교의 개념인 이(理)와 사(事)를 오늘날에는 본체와 현상으로 풀어쓴다. 칸트 역시 세계의 구성 원리를 물자체와 현상으로 파악하였다. 『장자』는 내ㆍ외ㆍ잡편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내편을 이본(理本)으로, 외편을 사적(事迹)으로 보거나(성현영), 도(道)와 외물(外物)로 보는 관점 등이 시사하는 것은 천지 사물의 근본에 대한 성찰이 동서양을 관류할 수 있다는 점이다. 그런데 칸트 철학이나 불교 경전, 『장자』를 배워 익히지 않았어도, 혹은 개념어가 조금씩 다를지라도 그것이 우리 정서에 부합하거나 삶의 지혜라는 측면에서 자연스레 활용되는 경우를 왕왕 접한다. 보편적 가치가 이런 것일 텐데, 마음과 환경, 형체와 그림자로도 일컬어지는 그 관계가 김완 시인에게서는 ‘보이는 것 뒤에 보이지 않는 것’으로 나타난다. 이때 전자가 현상이고, 후자가 본질이다.
간발의 차이로 대선 승부가 갈리고 촛불을 들었던 우리는 모두 우울증에 빠졌다 이기고 지는 역사에 대해 생각하다가 선암사 선암매에게 물어보기로 했다 오랜 가뭄과 강원도 울진 산불에 비가 억수처럼 내리면 좋을 텐데 두 계절이 공존하는 가로수 나무들 가지가지마다 물방울 꽃 달고 서 있다
어느새 어린나무들은 요 며칠 따뜻한 기온에 꽃을 활짝 피웠다 육백 살 허리 굽은 선암매, 한번 피면 하룻밤 비바람에 곧 져야 함을 아는 청매 홍매는 꽃망울에 물방울 꽃을 매달고 아직 제 꽃의 시간을 기다리고 있다 나무마다 생각이 다르고 꽃이 피는 시간이 다르고 역사에 대한 답도 다르구나
야생 찻집으로 넘어가는 산길이 호젓하다 환한 대나무 숲을 지나니 어두운 편백나무 숲이 나온다 인적 드문 외진 산모퉁이 복수초, 할미꽃 피어 있다 어둠은 가까이 있고 빛은 멀리 있다 모든 것은 부조리하다 보이는 것에 너무 집착하지 말라 눈에 보이는 것 뒤에는 보이지 않는 더 아름다운 것들이 숨어 있다
-「선암사, 꽃의 시간」 전문
세속의 삶은 정치에 예속되어 있다. 정치의 사전적 의미가 국가권력을 획득ㆍ유지ㆍ조정ㆍ행사하는 활동이라고 했을 때, 세속은 권력의 토대인 동시에 통치의 대상이기 때문이다. 국민 개개인의 행복을 최대치로 충족시키는 것이 국가의 의무이지만, 어떤 이유로 도리어 “우울증”을 유발하는 일도 비일비재한 것이 현실정치의 실제 내막이다. 시 속에서 “간발의 차이로 대선 승부가 갈”렸으니 “촛불을 들었던 우리”는 현재 패배를 곱씹으며 실의에 잠겨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기고 지는 역사에 대해” “선암사 선암매에게 물어보기로 했다”는 대목에서 시인은 세속의 시간을 가볍게 따돌린다. 마치 선문답처럼 선암매의 ‘대답’은 선명하지 않다. “요 며칠 따뜻한 기온에 꽃을 활짝 피”운 “어린나무들”에 비해 “육백 살 허리 굽은 선암매”는 대답 대신 “꽃망울에 물방울 꽃을 매달고 아직 제 꽃의 시간을 기다리고 있”는 모습을 보여줬을 뿐이다. 마치 팔만대중 앞에서 석가모니가 연꽃을 든 것처럼. 이때 가섭의 ‘염화미소’는 시인의 몫이 된다. ‘꽃의 시간’을 무어라 읽어낼 것인가.
김완은 “나무마다 생각이 다르고 꽃이 피는 시간이 다르고 역사에 대한 답도 다르”다는 인식을 넘어 “눈에 보이는 것 뒤에는 보이지 않는 더 아름다운 것들이 숨어 있다”는 현상과 본질의 문제로까지 나아간다. 그리하여 “어둠은 가까이 있고 빛은 멀리 있”는 “부조리”한 상황에 “너무 집착”할 필요가 없다는 깨달음을 통해 ‘우울증’보다 ‘촛불’ 쪽으로 ‘우리’의 정신을 일으켜 세운다. 추상의 시공간이 아닌 세속에서 ‘선암매’와 같은 ‘꽃의 시간’을 ‘우리’는 살아내야 하는 것이다.
함양 우전마을에서 출발하여 황석산을 오른다
수많은 아녀자가 황석산성에서 몸을 던져
피바위에 피를 뿌리며 산화했다는데
가는 비 뿌리는 계곡에 피 내음이 스며 있다
죽은 자들은 죽지 않고 절대로 떠나지 않았다
쉬이 잠들지 못한 자들의 영혼 부릅뜬 눈들
아직도 친일파들이 득세하고 있는 이 나라의 산천
의암의 논개가 된 수많은 아녀자 죽은 자들은
죽지 않았다 행동하지 않은 민족에게 조국이란
친일파 청산이란 존재하지 않은 세이런의 노래다
참나무 육 형제를 세어보다가 산성에 올라가니
다람쥐 형제들이 눈을 반짝이며 반겨준다
배가 홀쭉한 두꺼비도 느린 걸음으로 제 길을 간다
가진 자들 더 가지려고 뻔히 보이는 잘못된 미래를
선택한 사람들에게 사랑이나 통일을 논하지 말자
아름다운 산하 골골마다 숨죽인 피 울음소리 사무친다
정유재란 때 함양 군수 조종도와 안의 현감 곽준 등이
인근 7개 마을 주민들과 힘을 합쳐 왜구와 맞서 싸우다가
오백여 의병들이 전몰한 곳 기억해야 할 역사의 현장이다
죽은 자들은 땅속에 있지 않고 결코 숲을 떠나지 않았다
 ̄「황석산을 오르며」 전문
‘꽃의 시간’이 ‘선암매’의 육백 년을 담보하여 ‘보이지 않는 더 아름다운 것들’에 대한 경구를 들려주는 것처럼, “역사의 현장”은 선조들의 죽음을 담보하여 “행동하지 않는 민족”에 대한 강력한 경고의 말씀을 들려준다. 정유재란 때 함양 지역의 남정네들은 군수를 포함하여 “왜구와 맞서 싸우다 오백여 의병들이 전몰”했으며, 수치를 당하지 않으려고 “수많은 아녀자”는 “황석산성에서 몸을 던져” “피뿌리며 산화”했다. “쉬이 잠들지 못한 자들의 영혼 부릅뜬 눈들”이 지켜보고 있는 것은 “아직도 친일파들이 득세하고 있는 이 나라”에서 “가진 자들 더 가지려고 뻔히 보이는 잘못된 미래를 선택한 사람들”이다. ‘왜구’가 과거의 적이었다면, ‘친일파’는 우리가 ‘맞서 싸’워야 할 현재의 적이다. 한국의 현대정치사가 실타래처럼 얽히고설킨 것은 악의 근원이 된 ‘친일파 청산’을 제대로 하지 않았기 때문으로, 이제라도 ‘친일파 청산’을 위해 ‘행동하지 않’는다면 “세이런의 노래”를 들은 자들처럼 파멸할 것이라는 엄중한 인식이 이 시에는 들어있다.
‘가진 자들’의 다수가 친일파의 후손이거나 기득권층으로 “뻔히 보이는 잘못된 미래를 선택한 사람들”의 중심축이고 보면, 그들로부터 선택당해 권력을 거머쥔 자들 역시 약자보다는 ‘가진 자들’을 이롭게 하는데 이바지할 여지는 충분하다. 그들과 “사랑이나 통일을 논”할 수 없는 것은 이 덕목이 이익과 관련되는 쪽으로 움직이는 그들의 관심사가 전혀 아니기 때문이다. 물론 표면적으로 ‘사랑’에는 헌신과 희생이, ‘통일’에는 비용과 혼란이 발생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이면적으로 ‘사랑’에는 기쁨, 보람, 행복 등이, ‘통일’에는 적이라는 개념의 와해 한 가지만으로도 삶의 질이나 인권 수준의 고양, 정치의 순화 등이 가능해진다. 문제는 사회를 양분시킴으로써 ‘가진 자들’이 얻었던 이익구조를 그들이 쉽게 포기하지 않는다는 데 있다. 그런데 글을 쓰다 보니 잠시 의아하다. 이 글은 시 평론인가, 시사 평론인가.
정치ㆍ사회적인 이슈를 서정적으로 옮기기가 쉽지 않은 이유는 역설적으로 시의 갈래 중 한 형태가 서정시, 리얼리즘 시, 실험 시로 분류된다는 사실에서 발견된다. 그만큼 갈래의 성격이 독자적이고, 갈래 간 차이가 분명하다. 이는 시인의 세계관의 차이이기도 하다. 이로 인해 시적 대상이나 정서, 어조도 다를 수밖에 없게 된다. 김완은 첨예한 현실 인식을 짙은 서정에 녹여내는 시적 태도를 가지고 있다. 그의 시는 서정시인가, 리얼리즘 시인가. 다음 시도 이 질문의 연장선에 있다.
화엄사 대웅전 앞 한 단 낮은 터에 있는
보제루 나무 마루에 기대어 생각한다
지상의 소란에서 벗어나고자 왔으나
아직 천상의 고요를 얻을 수 없었다고
어김없이 돌아온 사월 무엇인가 하나둘
부서지는 시간을 담으려는 사람들
담으려 할수록 풍경은 빠져나간다
섬진강 육백 리 벚꽃으로 환하다 지금은
벚꽃의 시간 노란 개나리 시샘하듯 섞여 있다
참게탕 나오기를 기다리는 주름진 시간
창밖 노란 산수유 너머 섬진강의 윤슬
쇠오리들 다다다다 물길을 차는 시간
지루한 강의 하루를 거슬러 오르내린다
어제의 시간이 오늘의 시간을 살라고
술잔을 권한다 머리는 어제에 갇혀 있는데
영혼의 기억 속 무늬 줄지어 기다리는
사람들을 위하여 오늘의 심장으로 보낸다
섬진강 육백 리 이 환장할 봄날에도
시간은 아픈 과거의 서사에 갇혀 있다
소란과 고요 사이 그 중간에 피어나는 구름
봄의 색조로부터 물러나 그늘지는 것들과 함께
화두처럼 갇혀 있던 말들이 날아오른다
섬진강 육백 리 모든 건 사라지지만
아직은 아무것도 누구도 사라지지 않았다
나는 아직도 그 하늘을 지나가는 중이다
 ̄「시간의 얼굴」 전문
세속이 차안이라면, 천상은 피안이다. 김완의 “화두”는 “지상의 소란에서 벗어나” “천상의 고요를 얻”는 것이지만, 그것이 여의치 않은 것은 “섬진강 육백 리 이 환장할 봄날에도 시간은 아픈 과거의 서사에 갇혀 있”기 때문이다. “벚꽃으로 환”한 “사월”에 섬진강 부근에서 “참게탕 나오기를 기다리는” 시간은 얼마나 즐거우며, 누군들 그 자리를 즐기고 싶지 않을까. 그러나 그는 이 순간을 “주름진 시간”이라고 규정한다. “어제의 시간이 오늘의 시간을 살라고/ 술잔을 권”하지만, 여전히 “머리는 어제에 갇혀 있”으므로 그는 부자유하다. 한국전쟁의 상흔을 고스란히 담고 있는 섬진강은 휴전되고 나서까지 토벌대와 빨치산이 벌였던 동족상잔의 피를 기억하는 ‘시간의 얼굴’이며, 역사의 거울이기 때문이다.
정확히 읽어내지는 못했는데, “영혼의 기억 속 무늬 줄지어 기다리는/ 사람들을 위하여 오늘의 심장으로 보낸다”는 대목에 집중하게 된다. 만약 그들이 ‘아픈 과거의 서사에 갇혀 있’는 ‘죽은 이들’이라면 그들이 ‘기다리는’ 것은 종전일 것이며, 현재는 휴전 중이므로 “아직은 아무것도 누구도 사라지지 않았다”는 논리는 시적으로 성립한다. ‘나’ 역시 ‘아픈 과거의 서사에 갇혀 있’으므로, “나는 아직도 그 하늘을 지나가는 중이다”-이 마지막 행은 그래서 그들과 ‘나’의 코러스로 울려 퍼지는 듯하다. 대선이 끝난 후의 심경이 담긴 「선암사, 꽃의 시간」이나, 친일파 청산을 촉구한 「황석산을 오르며」가 현실 인식의 서정적 표출이라면, 이 시는 환상과 현실을 오가는 역사의식의 선적 표출이 아닐까 싶다. 그러나, 설사 그렇다고 하여도 한 개인이 비극적 역사에 대해 갖는 채무 의식, 내지는 공통감각으로서는 너무 과도한 몰입이 아닐까. 더욱이 한국전쟁 때 그는 아직 출생 전이었을 테니 더욱 그렇다.
달마산 호남정맥 암릉으로 솟구쳐 오른 산
해남 미황사 달마고도 가는 길이다
낮달을 찾아 떠나는 구도의 길
이야기에 빠져 길을 놓치기도 한다 그래
인생도 더러 길을 잃고 헤매기도 하는 법
달마산 중턱을 둘러싸는 해발 489미터
길이 17.74킬로미터의 둘레길이다
출가수행 고행 해탈의 길을 걷는다
이 길의 화두처럼 민달팽이를 만나다
달마가 서쪽으로 간 까닭을 곰곰 생각하며
본디 불교였는데 힌두교가 된 역사
인도의 종교에 관해 공부하며 출발한다
쿠스완트 싱의 소설『파키스탄행 열차』의
내용을 양념으로 섞어 장단을 맞추어
듣는 자의 성심을 보이기도 하였다
세 사람이 길을 가면 누군가는 스승이 된다
말 없는 산책은 자연과 끊임없는 대화다
(중략)
바람과 지는 해가 주는 회한과 평안함 물고리재
삼나무 편백나무 숲을 지나면 중생들
자신의 마음을 비워내고 싶을 때 가고 싶은
출가수행 고행 해탈의 길, 끝이며 시작인
어지러운 생각들 절 마당에 번뇌 가득하다
마음을 깨쳐 준다는 꿈속의 보리수는
그 옛날 미황사 해무처럼 형체 없이 흩어졌다
 ̄「달마고도를 걷는다」 부분
그러므로, 시인은 걷고 또 걷는다. “야생 찻집으로 넘어가는” “호젓”한 “산길”과 “환한 대나무 숲을 지나” “어두운 편백나무 숲”(「선암사, 꽃의 시간」)을. “함양 우전마을에서 출발하여 황석산을 오”르고, “수많은 아녀자가” “몸을 던”진 “황석산성”에도 발을 딛는다(「황석산을 오르며」). “해남 미황사”에서 출발하여 “길을 놓치기도” 하면서 “달마산 중턱”의 “둘레길을 걷”고 “물고리재”에서 “삼나무 편백나무 숲을 지나” 다시 “미황사” “절 마당”에 닿는 “달마고도를 걷는다”(「달마고도를 걷는다」). 이 길은 선사들의 “출가수행 고행 해탈의 길”이면서 “중생들/ 자신의 마음을 비워내고 싶을 때 가고 싶은” 길이며, “나”의 “구도의 길”이기도 하다. 서로 “스승”과 제자가 되어 “역사”와 “종교에 관해” 토론하다가도 “말 없는 산책”을 하면서 “자연과 끊임없는 대화”를 하고, 우연히 만난 “민달팽이”가 “이 길의 화두”가 되기도 하는 ‘달마고도’.
‘지상의 소란’에서 ‘천상의 고요를 얻’는 일과 “낮달을 찾아 떠나는 구도의 길”은 같은 차원으로 묶인다. 깨달음에 머물지 않고 “행동”하는 일도 ‘지상의 소란’을 잠재움으로써 ‘천상의 고요’에 동참하는 ‘구도의 길’이며, 이를 담아내는 시인의 시도 그 자장 안에 속한다. 그랬구나. 김완이 역사에 대한 채무 의식과 현실에 대한 공통감각에 부대끼는 것은 ‘지상’에서 ‘천상’을, 차안에서 피안을 실천하려는 능동적 몸부림이었구나. 시인이 아니었으면 승려나 사제가 되었을지도 모를 그의 슈퍼에고는 그래서 시를 쓸 때마다 매번 아프고 괴로웠구나.
우체국에서 새로 나온 시집을 부친다
시집을 부치며 여러 상념이 교차한다
부친 뒤 한참 만에 반송되어 온 시집들
서울 경기 지역에 사는 분들이 많다
반송된 시집을 보며 다시 주소를 확인한다
여러 경로로 정확한 주소를 찾는 경우도 있다
친한 사이는 전화나 문자로 문의하기도 한다
어려운 사이나 윗사람의 경우는 묻기
망설여진다 어렵게 용기 내어 한 문자에
답도 없는 경우는 마음이 아프기도 하다
(중략)
언젠가는 내가 누구였는지 아는 이도 없으리라
많은 이들은 알려지지 않은 변방의 산에서
미지의 계곡으로 내려온 내 발자국 내 그림자
사랑하는 이들도 그늘 속에 남겨진 나를 잊을 것이다
내 생의 마지막 저녁이 느리게 도착할 무렵
다시 보내지 못한 편지 부치지 못한 시집에 대하여
지상의 그 누구도 바람과 빗방울도 알지 못하리다
 ̄「부치지 못한 시집」 부분
리얼리즘과 서정적 경향을 넘나드는 김완의 시집을 일독한 적이 있다. “우체국에서 새로 나온 시집을” 그가 부쳤을 때, “반송되”지 않고 다행히 제대로 도착한 것이다. 자신이 아니라 남의 일, 첫 단추가 잘못 꿰어진 역사와 사회문제로 인해 아프고 괴로워한 궤적이 절반을 넘었다. “부친 뒤 한참 만에 반송되어 온 시집들” 중에 “서울 경기 지역에 사는 분들이 많”은 것을 보면서 그는 ‘서울 경기 지역에 사는 분들’에게 삶의 부침이 더 많다는 것을 느꼈을 테고, “여러 경로로 정확한 주소를 찾”느라 손품을 팔았을 것이며, “어려운 사이나 윗사람의 경우는 묻기 망설여”지면서 “어렵게 용기 내어 한 문자에/ 답도 없는 경우”엔 실망이나 노여움이 아니라 “마음이 아”파지는 과정들을 겪는다. 그의 아픔의 실체는 “변방의 산에서/ 미지의 계곡으로 내려온 내 발자국 내 그림자”를 전하지 못해서가 아니다. “사랑하는 이들도 그늘 속에 남겨진 나를 잊을 것”이기 때문이다. 인연이 닿았든, 닿지 않았든 간에 생의 유한함에 처한 인간은 누구나 잊고 잊히는 게 오히려 순리다. “부치지 못한 시집”이 환기시켜 주는 이 쓸쓸함을 넘어서는 일은 살아가는 동안 ‘행동’하는 것이라고 그는 누누이 말하고 있다.
어느 만큼 우리는 주관적이어서 누구에게 시간은 직선적으로 흐르고, 또 누구에게는 순환적으로 흐른다. 직선적 시간은 태어남과 죽음이 일직선이어서 한 개인의 탄생은 한 개인의 소멸로 이어지지만, 순환적 시간은 태어남과 죽음이 끊임없이 환원되므로 인간은 죽어도 죽는 것이 아니게 된다. 김완이 ‘꽃의 시간’에서 찾아낸 “보이지 않는 더 아름다운 것들”이나, ‘시간의 얼굴’에서 찾아낸 역사의 시간은 소멸하지 않고 순환 생성한다. 현상 뒤의 본질, 보이는 것 뒤의 보이지 않는 것들을 찾아내기 위한 그의 ‘행동’의 비밀이다.
-월간 《우리시》 2023년 4월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