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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패한 거사 ⌜철혈광복단⌟의 15만원 탈취사건
무기를 위하여!
전쟁은 무기이고 무기는 총알이다.
갑오농민군이 우금치에서 대패를 한 것도 무기의 부족과 화력의 차이 때문이었다.
1908년 3차 거병을 하고 삼수와 갑산 그리고 함흥 등지에서 일본군과 싸워 연전 대승을 거두었던 홍범도가 그 해 가을에 압록강을 건너 중국으로 망명을 하게 된 구체적인 이유도 탄환 부족 때문이었다. 탄환이 부족해서 총을 버려야 할 절박한 상황에 이르자 그는 “약철(총알)이 없어 일병과 쌈도 못하고 일본이 온다면 도망하여 매 본 꿩 숨듯이 죽을 지경으로 고생하다가 할 수 없서 외국 중국 땅 탕해로 10월 9일에 암녹강(압록강)을 건너”1) 망명을 결정하였다고 그의 일지에 쓰고 있다.
1920년 10월 하순 봉오동전투와 청산리전투에서 대승을 거둔 후에 홍범도와 독립군들이 1921년 초에 러시아영토로 이주를 하게 된 것은 일본군과 싸우고 있는 러시아혁명군과 협동하여 일본군과 싸우려는 일말의 희망도 없지 않았지만 무엇보다 가장 큰 이유는 탄약이 거의 사진(射盡) 되었고 중국내에서는 보충할 가능성이 전혀 없는 절망적인 상황 때문이었다. 그와 김좌진이 공동명의로 발표한 흩어진 군사들의 집결을 촉구하는 포고문의 내용에 “노농정부와 약정하여 군수충분하게 또 무기탄약은 제한 없이 무료로 공급받을 것”2)이라는 표현에서 당시 독립군이 처한 곤궁한 상황과 러시아행의 이유를 알 수 있다.
홍범도는 전쟁이 곧 무기라는 사실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1908년 중국을 거쳐 러시아로 망명한 후에 무기 마련을 위해 블라디보스토크 부두에서 짐꾼으로, 아무르강 유역 암군의 금광 땅꾼으로 일하였으며 추풍 당어재골에서 아편농사를 짓기도 하였다. 45세에는 니항의 어장에서 1년간 노동하였으며 1차 세계대전이 일어난 시기에는 크로바트, 퉁구스크, 비얀코, 얀드리스크 등지의 금광에서 노동하며 모은 돈으로 이만으로 나와 오연발총(17개)과 탄환(17,000개) 등 무기를 구입하고 의병을 모집하여 제 1차 세계대전의 발발이라는 국제적 상황에 대응하여 향후의 무장투쟁을 준비하였다.3)
홍범도장군의 40대 10년의 행보는 그야말로 독립전쟁에 필요한 무기 마련을 위한 고뇌와 피눈물로 점철되어 있다.
홍범도처럼 무기 없이 전쟁 없고 전쟁 없이 독립이 없다는 사실을 일찍이 깨달은 열혈청년들이 있었다. 그들은 무저항 비폭력의 만세 시위로 친구들이 죽고 부상을 당하는 피비린내 나는 죽음의 현실을 목도하였으며, 파리강화회의에 제출하고자 했던 독립청원이 강대국들의 힘의 논리에 짓밟히는 약소국 국민의 비애와 절망을 깊이 맛보았다.
게다가 3•1운동의 결과로 민족의 염원 속에서 출범한 상해 임시정부가 개조파와 창조파로 분열하고 연해주에서 대한국민의회가 재출범을 선언하는 등의 일로 북간도와 연해주의 독립운동이 표류하고 있었다. 이 때 조국의 독립을 원하는 청년들의 가슴은 화산처럼 뜨거웠고 의기는 하늘을 찔렀지만 그들에게는 전쟁을 수행할 능력이 없었다. 그들은 파리강화회의의 종료와 함께 독립의 문이 영원히 닫혀진 것 같은 상황에서 한없이 절망하며 분노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젊음을 독립운동의 제단에 받치기로 결의하고 전쟁 수행에 필요한 자금을 만들기 위해 거사를 도모하기로 하였다.
와룡동 그리고 와룡동교회와 창동(昌東)학교
북간도의 독립운동 유적지 중에 연길에서 시내버스를 타고 갈 수 있는 곳은 연길 중심지에서 애단로를 따라 동쪽으로 십리 남짓 떨어진 곳에 있는 소영자의 길동기독학당의 후신인 광성학교 옛터와 연길시에서 서북쪽으로 십여 리 남짓에 있는 와룡동의 옛 창동학교 터와 15만원 탈취의 거사의 도모지인 최봉설의 집이 있다.
독립운동 유적지를 혼자 찾아다니는 일은 거의 불가능하므로 조선족 형제들의 도움을 자주 받았다. 그 분들의 도움으로 조금 익숙해지면 혼자서 탐방을 시도하였고 그런 덕분에 머무는 곳에서 가장 가까이에 있는 와룡동에 여러 번 다녀왔다. 와룡동을 자주 찾아다닌 것은 그곳에 1907년에 세워진 와룡동교회와 창동학교 그리고 최봉설의 생가 유지가 있기 때문이었다.
와룡동은 지금도 그다지 개발되지 않은 산 아래에 길게 늘어진 마을이다. 상발원에서 하차하여 북쪽으로 개울을 따라 20여분 걸으며 민흥촌 제3,4촌민소조마을을 지나게 되고 마지막에 길이 하얀 고층 건물에 의하여 막히는 곳이 나오는데 그곳이 바로 원래의 와룡동 터이다.
와룡동은 1860년대 북간도(연변)는 북관에 연이어 있었던 자연재해로 말미암은 대기근과 조선 관료의 가혹한 수탈을 피해 두만강을 건너 도망쳐 나온 조선 상민과 천민들의 피난처였다. 그들은 엄한 봉금령에도 불구하고 살기 위하여 무인지대, 원시림이 무성한 간도의 산골짜기로 숨어들어와 화전을 일구었다. 그 시기에 함경북도 회령의 농민인 최종석은 아버지의 손을 잡고 와룡동 골짜기에 들어와 터를 잡고 살기 시작한 최초의 개척자가 되었다.4) 그는 15만원 탈취사건으로 알려진 최봉설의 할아버지이기도 하다. 5) 1869년 기사년에 대흉년으로 이주민들이 무리를 지어 들어왔고 사람들은 마을 서쪽 산이 마치 용이 누워있는 것처럼 보인다하여 와룡동이라고 이름을 지었다.6)1883년에 이르러 와룡동은 80여세대가 사는 마을이 되었다.
1902년에 캐나다장로교의 선교사 그리어슨와 조사 홍순국이 북간도에 다녀간 뒤, 1906년에 용정시교회를 세웠고 이어서 양무정자교회와 광제암교회를 설립하였다. 1907년에는 남감리회의 선교사 하디와 이화춘이 와룡동교회를, 이응현과 이병춘이 모아산 교회를 세웠다. 그러나 두 교회는 1909년 장로교와 감리교의 선교지역 분할에 의하여 캐나다장로교로 소속으로 이전되었다. 그리고 북간도 최초의 용정 상주 전도사인 김계안의 보살핌을 받았을 것으로 추측된다. 1912년 용정에 선교부를 세우기로 결정한 이후로 와룡동교회는 선교사 부두일(W. R. Footel)과 목사 김영제의 섬김과 지도를 받았다.7)
교회의 처음 위치는 마을 초입 서쪽 기슭에 있는 1935년 9월 12일에 졸업생 200여 명이 선생님들을 기념하여 세운 ⌜사은기념비⌟에서 멀리 마주 보는 언덕에 있었으나 경신대학살 후에 ⌜사은기념비⌟ 아래 마을 길 앞 평지에 길게 자리 잡은 창동학교 뒤편 북쪽 평지로 이전하여 재건축 되었다.8)
와룡동교회는 3.13용정 만세시위에 참여한 것과 와룡동출신 최익선이 순국한 것, 일제가 조사한 항일 선인 마을에 포함된 점, 경신년에 토벌을 당한 점9) 국민회 지회가 세워진 점,10) 그리고 창동학교 교사 면면을 보면 캐나다장로교의 지도급 인사들과 국민회 회원들이 적지 않은 것으로 보아 한 손엔 성경을 들고 한 손엔 조국독립의 기치를 높이든 교회였음이 분명하다. 정기영, 정기선, 오상근, 이병휘, 남성우, 신홍남, 김종만, 홍우만, 이진호, 김이택, 송창희, 서성권, 문경이 그러하였고 ⌜철혈광복단⌟의 최봉설, 한상호, 임국정이 그러하였다.
창동(昌東)학교는 1908년 4월11)에 남성우, 이병희, 오상근 등이 와룡동 주민 최병균(최봉설 부친), 최종환, 최병규, 오상인, 김성옥, 정지형, 지병학, 라시영, 전윤민, 정종현, 오관준, 한영운(한상호 부친) 등 12명의 학교후원회원과 함께 소학교로 세웠다. 창동(昌東)에는 동쪽 조선의 창성을 염원하는 의미가 담겨있으며 1912년에는 중학부를 증설하고 이름을 창동(昌東)학원으로 개칭하였다. 당시 원장은 오상근, 부원장은 이병휘와 남성우가 맡았고 교사로는 신홍남을 비롯한 7명이 있었으며 중학부 학생은 80여 명에 이르렀다. 북간도 각지와 남, 북만과 연해주에서 유학 온 학생들도 있었으며 학생들은 다 기숙사에 입사하였고 일체 학비는 학교후원회에서 부담하였다.12)
당시 학교에 설치한 학과목은 성경, 수신, 국어, 한문, 내외역사, 내외지리, 외국어, 산술, 대수, 기하, 생리, 식물, 동물, 물리, 화학, 법제, 경제, 창가, 체조 등 28개 과목들이 있었다. 13) 창동학원의 지도자들과 교사들은 민족문화와 역사를 가르쳤으며 항일정신을 고취시켰다. 중학부에서는 항일무장투쟁을 위하여 군사훈련과를 설치하여 항일투사들을 양성하였으며 1925년에는 중학부를 졸업한 학생들이 200여 명이 훨씬 넘었다. 학생들 가운데는 1915년과 16년에 왕청현 라자구 동림무관학교 (라자구사관학교)에 가서 계속 군사 훈련을 받은 자들이 있었고 14) 최봉설도 그런 분위기 속에서 1916년에 라자구에 가서 8개월 동안 군사훈련을 받았다.15)
1919년 3월 13일, 19년 동안 숨죽이고 살았던 3만여 북간도 간민들이 용정 서전대야에 모여서 만세시위를 통하여 독립에의 열기를 마음껏 발산하였다. 와룡동에서도 교인들과 창동학교 전체 교사들과 학생들이 대대적으로 참여하였다. 시위행진의 대오를 앞장서서 지휘하는 중에 총탄에 맞아 순국한 박문호는 창동학교에서 교편을 잡았던 전임 교사였고16) 역시 순국한 최익선은 와룡동 출신으로 창동학원의 현직 교사였다.17) 최봉설 등 많은 창동학교의 교원과 학생 및 졸업생들은 ⌜철혈광복단⌟에 혈서를 쓰고 가입하여 3.13 만세시위에 앞장을 섰으나 일제와 맹부덕 부대의 발포로 말미암아 유혈사태가 발생하여 19명18)이 순식간에 희생당하고 40여명이 중경상을 입으며 94명이 체포를 당하는 피비린내 나는 현실을 목도하였다.
만세시위가 끝나고 간도 조선인 사회는 공포와 흥분, 절망과 비탄에 잠겼다. 모두들 행동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위기의식을 가지게 되었고 변화를 갈망하였다. 자유와 독립을 위하여 무력은 무력으로 싸워 이겨야 한다는 사실을 인식한 것이다. 독립 운동가들과 청년들은 독립전쟁을 염두에 두고 미친 듯이 무장독립운동단체들을 결성하기 시작하였으며 전쟁을 수행에 필요한 군자금 모금에 의논이 분분하였다. 그리하여 3월 13일 직후부터 30여개나 되는 많은 무장독립우동단체들이 우후죽순으로 만들어졌다. 창동학원에❰간도국민회❱의 외곽단체인 창동학교 교사인 서성권을 회장으로 하는 ❰간도대한청년회❱는 본부가 세워졌고19) 와룡동교회가 국민회 지회가 됨으로 신도들은 자연스럽게 국민회 지회 회원이 되었으며 정기영과 정기선은 연락부의 주요성원이 되었다.
독립전쟁을 위하여 일어서는 북간도의 무장독립운동단체들
3.13만세 시위 후 북간도의 조선인들은 비분강개로 몸서리쳤으며 화산처럼 부글부글 끓어올랐다. 교회지도자들과 망명 지사들은 말할 것도 없고 학생들, 청년들 할 것 없이 독립을 위하여 복수를 위하여 총칼을 들고 일어서는 무장독립운동 단체를 만들기에 정신이 없었다. 순전히 학생들로 이루어진 무장단체만 해도 충렬대, 암살대, 자위단, 맹호단을 비롯하여 10개의 단체들이 있었고20) 각 종교단체들의 지도자들이나 독립 운동가들의 주도로 설립된 단체만 해도 30여개에 이르렀다.21) 그 중에 간도국민회, 북로군정서, 대한독립군, 군무도독부, 훈춘한민회, 의군부등이 대표적인 단체들이다.
간도국민회는 구춘선을 회장으로, 강구우를 부회장으로 하여 간민교육회와 간민회의 전통과 역사를 이어받은 단체이다. 시위 후에 당시 3.13만세시위를 위해 만들었던 협의체인 독립운동의사부를 해체하고 사상자 피해 대책을 위해 조선독립기성회를 결성한 것이 3월 25일에 간도국민회로 재창립 되었다.22) 본부는 연길현 하마탕의 교회에 두었으며 중요한 일과 사무는 용정의 치외법권지역에 있는 용정 제창병원 지하실에서 처리하였다. 국민회는 본부 아래 5개 지방총회와 13개의 지방회와 70여개의 지회로 구성되었다.
이는 캐나다장로교 지교회에 근거한 것으로 간도 북시찰회는 하마탕 중심의 북부총회와 국자가 중심의 중부총회가 되었고, 간도 서시찰회는 명월구 중심의 서부총회로, 간도 동시찰회는 용정무산간도 중심의 남부총회와 남양촌, 종성간도 중심의 동부총회가 되었고 시찰 아래 지역교회들이 묶여져 13개 지방회가 되었으며 72개의 교회는 그대로 국민회 지회가 되었다.23) 1920년에는 지회가 133개로 크게 증가하였다. 그리고 관할영역도 전 연변지역으로 크게 확장되었으며 지방총회와 지방회의 회장이 30여명이나 되었다. 이외에도 국민회는 대동단, 충렬대, 철혈광복단, 대한간도청년회를 외곽조직으로 가지고 있었다.
특별히 간도청년회는 1919년 11월 1일 국자가에서 간도 청년들의 정신과 의지를 통일하여 비상한 수단과 위대한 능력을 훈련시켜 독립역량을 집결하려는 목적으로 서성권, 강백규, 김정, 조경환 등 22명에 의해 발기되었고 본부는 와룡동에 있는 창동학교에 두었다. 발기인에는 15만원 탈취사건의 주동자인 임국정과 신한촌에서 체포된 나일도 포함되었다.(강덕상, ⌜현대사자료⌟27권, 8,9쪽)24)
국민회는 무장투쟁을 위하여 군무위원회를 설립하였다. 군무위원회에서는 무장부대를 조직하기 위하여 징병제를 실시하였는데 매 가정에서 18세 이상, 40세 이하의 장정 1명씩 모집하여 지방총회에 보내 훈련을 받게 하였다. 이 기초 위에 1920년 초에 경호대와 국민회군이 결성되었으며 경호대 총사령은 이용이 국민회군의 사령관은 안무가 맡았다. 경호대는 각 지방총회와 지방회에 분산되어 지역의 안전을 돌보았고 국민회군은 항일무장투쟁을 준비하고 결사대를 조직하여 훈련시킨 후 군대에 편입시켰다.25) 그해 6월에 국민회군은 450명의 군인, 보총 40자루, 권총 150자루, 탄약 7,000발, 수류탄 120개 소유한 막강한 무장부대로 발전하였다. 국민회는 군사인재를 양성하기 위해 연길현 숭례향 이청배에 사관훈련소와 국민회 기지를 건립하기에 힘썼다. 그 결과로 국민회군은 봉오동전투와 청산리전투에 참여하여 독립전쟁의 서두를 승리로 크게 장식하였다.
국민회는 각종 무장부대의 연합을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였으며 봉오동전투 전에 4단 연합을 이루어서 북로독군부를 결성시켰으며 청산리전투에서는 7단 연합의 홍범도연합군을 결성하여 청산리전투를 승리로 이끄는 결정적인 영향을 주었다.
북로군정서는 대한군정서로도 알려져 있으며 1911년 3월에 대종교 신도들이 덕원리에서 만든 중광단을 모체로 하여 만들었다. 서일은 1911년 초에 경성에서 왕청현 덕원리로 망명하여 대종교를 포교하며 무장독립운동을 지향하였다. 그러나 무기가 없었으므로 민족교육과 항일의식을 고취시키는 일에 전념하였다. 그는 3.13용정만세시위 후에 중광단을 기초로 하여 공교회(유림)등 다른 종교인들과 연합하여 대한정의단을 설립하였다. 정의단은 5개 분단과 70여개 지단으로 확대되어 대한군정회로 조직되었다가 다시 대한군정부로 개편하고 독립군사정부임을 자처하였다. 그러나 12월에 임시정부의 요청으로 대한군정부는 이름을 대한군정서로 되돌리었다. 대한군정서는 총재부와 사령부로 나뉘었으며 총재부는 단체내부의 민정 및 민사를 담당하였고 사령부는 군사를 전담하였다. 대한군정서의 총재는 서일. 부총재는 현천묵, 사령부의 사령관은 김좌진이었다.
대한군정서는 1920년 7월에 본부를 덕원리에서 서대파 십리평으로 옮겨 사관연성소를 설립하였으며 30호를 1구로 하고 18세부터 35세까지의 장정 중에서 15~25명을 선발하여 무장부대에 편입시키고 건강한 사람들을 뽑아 사관연성소에 입학시켰다. 1920년 8월 북로군정서는 군인 1,200명, 소총 1,200정, 탄약 24만 발, 권총 150정, 수류탄 780발, 기관총 7문을 보유한 26) 북간도의 최대 무장부대가 되었다. 그들은 9월 9일 그들은 사관연성소 1기생의 졸업식과 함께 일제의 토벌에 효과적으로 대응하기 위해 동전선과 서부전선으로 군대가 나뉘어 십리평에서 떠났다. 사령관 김죄진과 교성대장 라중소, 중대장 이범석이 이끈 부대는 서쪽으로 와서 청산리전투에 참여하여 승리의 기쁜 소식을 조선인들에게 희망으로 안겨주었다.
대한독립군은 1919년 3.13만세시위 후에 러시아의 추풍당어재골에서 조직한 무장독립운동단체이다.27)홍범도는 사령관, 주건은 부사령관, 참모장은 박경철이었다. 홍범도는 독립전쟁을 위하여 병력 3개 중대 300명을 이끌고 1919년 8월에 백두산으로 이동하였다. 그는 혜산진의 일본수비대를 습격하였으며 9월에 갑산군으로 진공하여 동인면 금정주재소 등 일제 식민지 기관을 공격하였다. 10월에는 평안북도 강계와 만포진을 점령하였으며 자성으로 진출하여 일본군 70여 명을 사살하였다. 대한독립군의 눈부신 활동은 망국 백성들에게 희망이 되었으며 항일무장단체들에게 격려와 고무가 되었다. 일본 측 자료에 의하면 1920년 1월부터 3월까지 항일무장부대의 조선 진공작전은 무려 24차례나 되었고 또 다른 통계에 의하면 3월부터 6월까지 항일무장부대의 조선 진입은 32차례였으며 일제 식민기관과 경찰주재소를 파괴한 곳이 34개소나 달했다.28) 그러나 신화와 전설에 가까운 영웅적인 전투력을 발휘하던 대한독립군이 무기와 군량의 부족으로 수세에 몰리기 시작하였다. 홍범도 부대는 러시아에서 조직되었으므로 국민회나 북로군정서처럼 간도에 근거지와 지방조직이 없었기 때문에 지속적인 무기와 군량 보급이 어려웠던 것이다. 국민회는 1919년 겨울 대한독립군을 지원하여 병력을 400명, 소총을 200정 권총 약 30정, 탄약을 매 총마다 1,200정, 기관총과 수류탄들을 증강시켜 주었다. 29) 또한 홍범도로 하여금 무장독립운동단체들이 연합하도록 주선하여 최진동의 도독부, 안무의 국민회군, 김규면의 신민단을 하나로 묶어 정규 일본군과의 최초의 전투인 봉오동전투에서 대승을 거두게 하였다. 홍범도는 청산리전투에서도 북로군정서를 제외한 무장독립단체들과 연합부대를 편성하여 사령관으로서 독립운동사에 길이 남는 전투를 치웠다. 청산리전투는 조선인의 독립에 열망과 기개를 세계에 널리 알려주었다.
훈춘한민회는 1919년 4월 13일 전후에 설립되었는데 훈춘대한국민회 또는 훈춘대한국민의회 또는 대한국민의회 훈춘지회로 알려졌다. 본부는 훈춘현 사도구 소황구 였다. 1920년 훈춘한민회로 개칭하였으며 회장은 이명순이었고 황병길은 교통부장과 경호대장을 맡았다. 훈춘한민회의 전신은 기독교교우회 였으며 캐나다장로교 지회와 교우들이 회원으로 활동하였다. 1919년 7월 황병길은 급진단을 조직하여 강병일의 의사단, 최경천의 포수단은 연합하여 훈춘한민회 군사부를 정식으로 편성하였다. 한민회군은 군인 250여 명, 소총 300정, 기관총 3문이 있었으며 1920년 1월 15일 경원 고건원전투를 비롯하여 온성군 월파도, 미산, 장덕, 심청동, 하탄동 등지의 일본군의 거점을 습격하였다. 1920년 10월 홍범도의 지휘 하에 7단 연합 (국민회군, 의군부군, 신민단, 대한독립군, 광복단, 의민단)에 참여하여 청산리전투 승리에 크게 기여하였다 30)
대한신민단은 1919년 3월 12일 김규면을 단장으로 하여 훈춘현 초모정자에서 기독교 성리교 신도들 위주로 설립되었다. 후기에는 본부를 러시아 연해주 신한촌으로 옮겼다. 군인은 200여 명으로 훈춘현 리수구와 왕청현 장동에 주둔하며 활동하였고 1920년 초에는 두만강남안 국내에 진출하여 군자금을 모금하며 일본군초소를 습격하였다. 5월에는 북로독군부 제4대대에 편입되어 6월 4일, 박승길 등 30여명이 남양군 강양동 일본인 초소를 습격하여 수 명을 사살하여 봉오동전투의 서막을 올렸으며 삼툰자, 후안산, 봉오동전투에 참여하였다. 10월에는 홍범도의 7단연합에 참여하여 청산리전투에 참여하였다.31)
도독부는 1919년 3.13이후 최진동(최명록)이 자신이 거느렸던 자위대를 기초로 하여 왕청현 봉오동에서 조직한 항일무장단체이다. 설립초기에 도독부는 200명밖에 되지 않았으나 조직 기반이 든든하고 보급이 충분하였다. 1920년 5월 4단 연합으로 북로독군부를 편성하여 부장이 되었으며 봉오동전투를 승리로 이끌었다. 1920년 8월 독군부의 병력은 일제 자료에 의하면 최진동부하 약 670명, 홍범도부하 약 550명 도합 1,200명으로서 보총 900자루, 권총 200자루, 기관총 2정, 폭탄 약 100개, 망원경 7개, 탄약 총 한 자루에 150발이라고 하였다.32) 청산리전투 전, 각 무장부대들이 봉오동을 떠나자 최진동의 잔여부대는 동부로 이동하여 라자구를 거쳐 동녕현으로 갔다.
의민단은 1919년 3월 23일, 방우룡을 단장으로 하여 연길현 차조구 천주교교회당에서 천주교 신도들을 위주로 하여 설립되었다. 1920년 8월 300명의 군인, 400자루의 소총, 4만발의 탄약, 50자루의 권총, 480개의 수류탄을 가지고 있었다. 10월에 7단 연합에 가입하여 청산리 전투에 참여하였다.
이외에도 임창세의 야단, 이범윤의 의군부, 김성극의 대한광복단, 이춘범의 대의전의사회 등이 떨치고 일어나서 항일무장투쟁을 위한 기지를 건설하며 군인을 모집하였다. 이 같은 무장단체들의 설립과 유지, 항쟁과 전투에는 거액의 군자금이 뒷받침되어야 하였다. 훈련된 군인 양성과 소모품인 총탄, 수류탄 등의 충족한 보급 없이는 독립전쟁은 가능하지 않기 때문에 각 무장단체들은 군자금 확보에 최선을 다하였다.
1920년 5월, 일제의 정보자료에 의하면 북간도 일대 항일무장단체는 대원은 4,241명, 기관총 18정, 보총 1,871자루, 탄약 271, 800여발, 권총 255자루, 수류탄 265개를 갖춘 병력이었다.33) 이 모든 것들이 위의 방법으로 모금된 군자금으로 세워지고 유지되는 것이나 각 2~3개 부대를 제외하고는 넉넉하지 않았다.
모금을 위하여, 독립을 위하여
191년 초 파리강화회의에 파견할 대표를 위해 시작된 모금의 열망이 무장단체 결성과 함께 북간도 하늘을 덮었다. 모금은 군자금이고 군자금은 전쟁이고 전쟁은 곧 독립을 의미하기 때문이었다. 조선인들의 독립에의 열망이 하늘을 찔렀다.
3.13 시위 직후 국민회 구춘선과 청년회 이익찬, 윤준희, 방원성의 주간으로 제창병원 지하실에서 발간된 ⌜대한독립신문⌟ 6월 5일자 논설에 ❰근고해외동포형제❱라는 제목아래 조국광복을 기원하는 애끓는 기도가 나온다.
“하나님이시여 우리에게도 남과 같은 자유와 행복을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또 이것을 얻을만한 혈성(血誠)을 주시옵소서. 아멘. 정의 인도를 무시하는 저 무도막지한 원수의 총검에 맞고 찔려 목숨을 희생한 이가 기만(幾萬)이며 부상한 이가 기십만(幾十萬)이며 감옥 중에 피수(被囚)된 이가 기백만인지 기수(基數)를 가히 헤아릴 수 없으며 …경술수치(庚戌羞恥)를 …주혈복익(主血伏翼)34) 하나이다.”35)
독립을 열망하는 북간도 조선인들에게 독립전쟁에 필요한 무기를 대량으로 저렴하게 구입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주어졌다. 1차 세계대전에 출전하여 러시아에서 연합군으로 싸웠던 6만여 명이 넘는 체코군인이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자국으로 귀국하게 되어 소장하고 있는 무기를 무더기로 싸게 파는 것이었다. 북간도의 모든 무장단체들은 체코군의 무기구입을 위하여 모금에 열중하였다. 그리하여 무장단체 간에 겹치는 모금지역과 모금 대상으로 인한 갈등과 분쟁이 발생하였다.
1920년 1월 홍범도부대가 군자금부족으로 북간도로 철수하자 국민회는 국민회군과 홍범도부대를 합병하여 행정과 재정은 국민회가 관리하고 군무는 홍범도와 안무가 책임지도록 하였으며 작전 시에는 홍범도가 “정일(征日)제일사령관”으로 전군을 통솔하도록 하였다.36)
1920년 5월 7일, 북간도의 간도국민회, 대한신민단, 북로군정서, 군무도독부, 대한광복단, 대한의군부 등 6개 단체 대표들이 봉오동에 모여 연석회의를 개최하였다. 그들은 북간도 협의회를 조직하기로 하고 그날 연합회에서 결의한 11개의 협의안에 서명을 하였다. 그날 협의된 주된 내용은 모금과 대원 모집과 관리에 관한 것이었다. 그 중 세 가지 사항이 모금에 관련된 것이었다, 첫 번째 협의 사항은 “각 단체는 5월 11일까지 모연대를 취소한다.” 세 번째는 “금후 지방기관(단체의 지회)설립과 인원 모집은 민의 복종해야 한다.” 네 번째는 “각 단체에서 금후 군자금 모집이 필요할 시에는 협의회의 협의에 좇아야 한다.”37) 그러나 연석회의에서 결정한 사항은 준수되지 않고 유야무야 되었다.
그 후, 5월 27일 북로군정서와 대한신민단을 제외한 단체들이 모여서 각 단체들은 군사훈련과 관리만 책임지고 기타 지방행정사무는 국민회가 책임을 지기로 결정하였다. 그러나 여전히 단체들 간에 군자금 모금과 대원 모집은 뜨거운 쟁점이 되었다.
당시 항일무장단체들의 군자금 확보는 다섯 가지 방법으로 진행되었다. 첫째는 토지 소유에 따라 의무금을 징수하는 것 둘째는 모연대를 편성하여 모금하는 것 셋째는 부호와 기업인들에게 일정금액을 징수하는 것 넷째는 친일파와 일본인들을 협박해서 탈취하는 것 다섯째 지방조직을 통하여 회비를 징수하는 것 등 이었다. 1920년 일제가 수집한 정보에 의하면 이런 방법을 다 동원해서 북간도 항일무장단체들이 모금한 금액은 50만원으로 간도국민회 17만원, 북로군정서 13만원, 군무도독부 6만원, 대한의군단 7만원, 대한신민단 3만원, 대한광복단 4만원이었다.38)
1920년 7월 11일 국민회 회장 구춘선은 동부지방회에 무기 구매에 대한 공문을 발송하였다.
“훈춘지역에 파견된 이광씨의 통신에 의하면 금(金) 만5천원의 총 300정과 탄환 총 매정에 1,200발을 노국인 (露國人)으로부터 직접 매수할 수 있다 하니 동부지방회에서 협의하여 知何(지하)한 일이 있어도 꼭 구입하도록 하라.”39)
일개 독립운동단체의 회장이 군자금을 주지 않고 자체 모금하여 무기를 구입하라고 독려하는 공문이 저항 없이 받아들여지는 것은 당시 북간도사회와 교회가 독립을 지상명령으로 받아들였기 때문이었다. 학생들도 모금에 앞장서 명동학교 학생들은 2만 루블이 넘는 군자금을 모금하였고 국민회 지회(캐나다장로교 소속교회들)와 학교들도 앞을 다투어 참여하였다.
같은 해 7월 23일 국민회 제1중부 지방회는 무기구입을 위해 박호일을 노령 포염지방에 파견하여 장총 100정을 매정 35원씩(총, 혁대, 탄환은 1정 100발 첨부) 구입하였다.40)
도독부의 최진동은 3.13 시위 후 도독부를 창설하고 11명의 대원을 거느리고 직접 대황구, 태평구 등지에서 총기를 구입하였다. 그는 소총 50정. 탄약 1,200발, 기관총 1정을 부하들과 함께 봉오동으로 운반하였다. 그 후에도 그는 그의 동생 최운산, 최명순과 함께 더 많은 무기를 구입하기 위하여 가산을 털어 군자금으로 충당하였다. 도독부가 모금한 6만원의 모금액의 대부분은 평제들의 헌납금이었다. 41)
북로군정서는 3.13 시위 후에 무기 구입을 시작하였다. 1차구입시 총 98자루와 탄알 8상자(1만발)를 구입하였다.42) 서일은 군자금 모금과 함께 무기 확보를 위해 재무담당 계화와 함께 무기운반부대를 거느리고 1920년 6월, 7월, 9월 사이에 수차례 러시아 연해주를 드나들며 많은 무기를 구입하였다.43)일제가 파악한 북로군정서의 무기는 총 1,300자루, 권총 150자루 기관총 7정이었다.
모든 무장독립단체들이 군자금 확보로 몸살을 겪었지만 국민회는 북간도 전역의 중요 도시에 거점을 가지고 있었으므로 다른 단체보다 군자금 모금이 유리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방회의 대부분이 농촌지역이었고 또 약 2/3가 소작농이었으므로 처음부터 모금이 용이한 것만은 아니었다. 도시 실업인과 재산가를 대상으로 모금을 시작하였으나 순순히 납부하지 않으므로 통첩하여 강제 징수를 하게 되는 불편한 경우가 왕왕 발생하였다. 실제로 가슴 아프게도 생활이 어려운 소작농들의 소액 연납이 많았다.
독립운동단체들이 필사적으로 노력하여 모금한 50만원44)은 거액임에도 불구하고 항일무장부대들의 필요를 절대적으로 채워주지 못하였다. 독립전쟁에의 첫 단추인 모금을 하면서 북간도의 청년들은 망국 백성, 북간도 그리고 이주민이라는 한계에 부딪히며 잠을 이루지 못하였다.
철혈광복단과 15만원 탈취사건
국민회 외관단체의 성원으로 모금과 자위활동과 신문발행을 하면서 북간도 이주민이라는 한계를 비상한 방법으로 뛰어넘고자하는 청년들이 있었다. 그들은 단체들의 군자금 난을 해결해주고 싶었고, 모든 간도의 청년들과 함께 무기를 들고 조선에 진공하여 하루아침에 일본군을 몰아내는 해방과 독립에의 꿈을 꾸었다. 그들은 압록강과 두만강 일대에서 진공하여 경찰지소와 관청을 파괴하고 돌아오는 식의 전투가 아니라 탱크를 앞세우고 우르르 쾅쾅 들어가서 영토를 회복하는 꿈을 꾸었다. 마침내 그들은 군자금을 마련하기 위해서 은행을 습격할 계획을 세웠다. 그들은 임국정(1894년생), 한상호(1899년생), 최봉설(1899년생), 윤준희(1892년생), 박웅세, 김준으로 국민회 외곽단체인 ⌜철혈광복단⌟의 단원들이었다.
그러나 철혈광복단은 아직까지 건립 시기와 구체적인 조직기구가 자료상에 나타나지 않고 있어서 일반적으로 말하기 어려운 부분이 있다.
반병률은 그의 논문 ❰간도 (間島)15만원사건에 대한 재해석❱에서 철혈광복단은 1911년 초 이동휘가 간도에 왔을 때 조직한 광복단과 이후 노령지역에서 1917년 혁명이전에 조직된 전투적인 청년비밀결사인 철혈단이 1918년 가을에 통합. 조직된 것으로 폭력, 즉 무장투쟁으로 독립을 달성하려는 청년단체로 간도지역과 노령 연해주지역에서 활동하였다고 한다.45) 그는 철혈광복단의 중심을 노령에 두고 15만원 탈취사건을 파악하고자 하였으며 그 사건이 6명의 애국청년들이 단독으로 추진한 것이 아니라, 블라디보스토크에 본부를 두고 있는 상위조직의 지도에 따른 것이며 그 지도자는 철혈광복단의 핵심간부이자 국민의회의 군무부장 대리이기도 한 김하석이라고 하였다.46)
그러나 연변에서 기록된 글에 의하면 철혈광복단은 1914년에 라자구무관학교 관계자들인 남공선, 김립, 장기영, 김하석, 오영선 등이 설립을 주도하였고 당시 창동학교 중학생인 최봉설, 임국정, 한상호와 임국정 등 수십 명이 가입한 비밀결사단체로 나타난다. 그러나 수년 동안 그 본체가 나타나지 않았다.47)
1919년 2월 18일 간민회 계통의 독립투사들이 박동원의 집에 모여서 조선독립의사회를 건립하고 3.13만세시위를 모의하면서 일제의 무력간섭에 대처하기 위하여 시위운동에서 일본과 중국 군경에게 체포될 경우 희생할 각오를 가진 사람들로 결사대를 조직하였다. 그 때 결사대원들은 혈서로서 사인을 하였고 결사대의 명칭을 광복단이라 칭하였다.48) 이와 같은 광복단은 미국, 북경, 서울 평양, 천진, 러시아 등지에도 그 단원이 수천 명에 달하였으며 북간도 광복단의 경우 캐나다장로교 각 교회의 지도층 인물로 구성되었다. 그 가맹자는 “➀국자가에 이홍준, 이성근, 박동원, 김영학, ➁용정촌의 김정, ➂종성간동 자동 백유정, ➃팔도구 유예균, ➄평강 고동환 ➅그 외로도 박경철, 김순문, 구춘선, 이성호. 고평, 최봉렬, 박정훈, 이동식 등이었다.”49)
여기까지 살펴본 바로는 광복단과 철혈광복단을 직접 대입하여 연결시키는 것이 쉽지 않다.
전자는 이동휘가 지휘하는 청년단체이고 후자는 용정 3•13시위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결사를 각오한 사람들이 가입한 단체로 한인들이 있는 곳마다 세워진 비밀결사단체이기 때문이다. 이에 대하여 최봉설(최이붕, 최계립)의 증언을 들어보기로 한다. 최봉설은 1920년 1월에 와룡동을 떠난 후 30여년이 지난 1956년에 고향에 와서 3개월간 체류하였다. 그 때 그는 맏아들 최동현에게 철혈광복단과 15만원 탈취사건의 전모를 들려주었다.
“나의 부친은 최봉설은 1899년 11월 27일, 와룡동에서 출생했다. 어려서 사숙에 다니다가 창동학원의 소학과 중학을 졸업했다. 창동학원을 다니던 1914년 8월 14일, 조국 광복을 위해 몸 바칠 뜻으로 ”철혈광복단“에 가입하였다. 이 단체의 본부는 명동에 있었고 단장은 김국보였다. 아버지의 입단의식은 우리 집에서 간단히 거행되었는데 아버지는 왼손무명지를 베어 혈서를 쓰고 맹세를 하였다고 한다. 그 후 아버지는 최이붕, 최일륜, 최계랍 등 가명을 두루 썼다.”50)
최봉설(1899-1973)의 회고대로 그가 가입했던 단체 이름이 ⌜철혈광복단⌟이고 본부가 명동에 있었으며 단장이 연해주의 인사들처럼 널리 알려진 독립운동가가 아닌 김국보라는 점 그리고 최봉설과 한상호의 입단 시 나이가 15살인 점을 감안할 때 철혈광복단이 캐나다장로교 산하 지교회 청소년들의 비밀결사였을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최봉설은 1916년 창동학원을 졸업한 이후로 라자구군관학교에서 8개월 학습한 외에는 출생지인 와룡동을 거의 떠나지 않았다. 그는 적안평 기독소학교에서 체육교사로 일하면서 아이들에게 군사훈련을 시키며 독립운동에 참여하였다.
1919년 그의 나이 20세에 그는 파리강화회의에 파견할 대표들을 위한 북간도 모금위원인사들
선정 시 정기영과 함께 와룡동 지역의 대표로 뽑혔다. 그리고 그 후로 3.13 만세 시위에 결사
대로 참여를 하였다. 3.13 시위 후 그를 비롯한 철혈광복단의 윤준희, 임국정, 한상호는 일제
와 무장투쟁을 해야 한다는 생각을 공유하게 되었다. 그 중 연해주에 다녀 온 경험이 있는 임
국정은 체코 군인들이 헐값으로 무기를 판매하고 있는 사실을 알리며 그들에게 군자금 마련을
제안하였고 그들은 거사를 위해 자주 모이게 되었다.51)
3.13시위 후, 윤준희(1892-1921)는 용정에서 국민회 회장인 구춘선의 지도로 이익찬, 방원성
과 함께 제창병원 지하실에서 대한독립신문을 발간에 참여하였다.52)
임국정은 캐나다장로교 북간도 기독청년회 일원으로 활동하며 기독동지청년회에 가입하여 청
년회 대표로 노령독립회의에 참여하였다.53) 뿐만 아니라 서성권과 강백규가 만든 간도청년회
발기인 중의한 명으로 활약하였다.
한상호(1899-1921)는 와룡동 창동학교 출신이었으며 최봉설과 연배의 친구였다. 54) 그는 거
사를 위한 권총과 수류탄을 구입하기 위해 윤준희,임국정, 최봉설과 함께 연해주에 다녀왔다.
55)
임국정(1895-1921), 최봉설, 한상호는 와룡동 창동학교 출신이며 최봉설과 한상호의 아버
지는 창동학교 설립발기인이었고 학교 후원 회원이었다. 그들은 모두 창동교회 청년들이었으
며 독립운동에 뜻을 둔 동지들이었다.
박웅세와 김준이 명동출신이고 윤준희는 명동학교 출신으로 언급되는 면면을 살펴 볼 때56)
철혈광복단은 캐나다장로교 산하의 청소년 단체임이 분명하고 1919년 2월 18일 박동원의 집
에서 있었던 광복단의 입단식도 그런 맥락에서 자연스러운 흐름으로 보인다.
15만원 탈취사건을 일으킨 철혈광복단은 1914년에 캐나다장로교 산하의 청소년비밀결사체로
조직되었으나 1919년 2월 18일 조선독립의사회를 건립하고 만세시위를 모의하면서 일제의 무
력 간섭에 대처하기 위하여 시위운동에서 일본과 중국 군경에게 체포될 경우 희생할 각오를
가진 사람들로 결사대로 가입하면서 확대되었다. 결사대원들은 혈서로서 사인을 하였고 결사
대의 명칭을 광복단이라 칭하였다. 이와 같은 광복단은 미국, 북경, 서울 평양, 천진, 러시아
등지에도 그 단원이 수천 명에 달하였으며 북간도 광복단의 경우 캐나다장로교 각 교회의 지
도층 인물과 청년들로 구성되었다. 그러므로 광복단은 간도국민회가 결성되자 자연스럽게
국민회의 외곽 단체가 되었다. 그러나 철혈광복단은 1920년 1월 4일, 열혈청년들에 의한 15
만원 탈취사건이 일어난 후에야 비로소 세상에 알려졌다.
반병률은 그의 논문❰간도 (間島)15만원사건에 대한 재해석❱에서 임국정의 상고문과 조선총
독부 고등법원의 상고기각 판결문과 당시 상해파고려공산당의 핵심간부였던 장도정이 15만원
탈취사건에 대한 비난과 책임을 국민의회 당국자와 김하석에게 한 것으로 보아 사건의 기획자
가 로령 국민의회 김하석 이며 간도의 철혈광복단의 소수의 정예들이 그의 지시를 받아 이행
한 것으로 본다.57)그러나 기록되거나 기록되지 않은 많은 정황들이 국민회 산하의 철혈광단
멤버 소수가 은밀히 기획하고 주도한 사건임을 드러낸다. 그들이 김하석의 편지를 받고 김하
석을 만난 것은 1919년 12월 초와 12월 23일의 일이고58) 그들은 3•13 시위 후부터 무장 투
쟁을 결의하며 거사 계획을 세우고 일정을 만들고 있었으므로 상부 지도자 김하석의 지시에
따라 행동했다고 주장하기에는 많은 무리가 있다.
15만원탈취사건은 1920년 1월 4일에 철혈광복단 단원인 윤준희, 임국정, 한상호, 최봉설, 박
웅세, 김준 등 6명이 승지촌과 동량리 어구에서 조선은행 회령지점에서 용정출장소로 보내는
길회선 철도부설기금 15만원을 탈취한 대사건으로 무려 10개월에 걸쳐서 준비되었다. 3•13
이후, 무장투쟁에 의기투합한 그들은 국민회의 무장화를 위한 군자금 모금에 대하여 협의를
하였다. 59) 일본인 상점을 습격하자는 것과 의연금 모금을 하자는 의견을 있었지만 전자는
너무 위험하고 후자는 가난한 동포들에게 너무 부담을 주어 무리라고 판단을 하였다. 그들은
고심 끝에은행을 털이를 합의를 하고 조선은행 회령지점에 근무하는 전홍섭을 끌어들였다. 그
리고 한상호, 윤준희, 임국정, 최봉설은 은행털이에 필요한 무기를 구입하기 위해 최봉설과 한
상호 아버지에게 송아지 판돈을 받아서 비밀리에 연해주에 다녀왔다. 그들은 권총 6자루와 수
류탄 6개를 구입하였고 9월에 박웅세와 김준을 끌어 들여 부족한 인원을 채웠다.60)
그들은 1월 1일에 전홍섭을 통해 1월 휴가 중(1월 4일과 5일 경)에 회령으로부터 조선은행
용정출장소에 현금수송이 있다는 정보를 받았다. 그들은 거사지점과 행동노선 등에 대하여 치
밀한 계획을 세웠다. 그들은 거사지점을 물색한 끝에 비교적 안전하고 퇴로도 용이한 용정에
서남쪽으로 20 리 정도 되는 재바위골, 승지촌에서 가까운 동량리 입구로 결정하였다.
1월 4일 운명의 날에 그들은 권총과 기타 장비를 휴대하고 습격지점으로 갔다. 그들은 성공적
인 전투를 위해 만전을 기하였다. 우선 역할 분담을 위하여 팀을 매복조와 습격조로 나누었
다. 매복조는 윤준희, 박웅세, 김준이었고 습격조는 임국정, 한상호, 최봉설 이었다.61)그들은
아침부터 나와서 매복하였고 5시경 중국인 식당에서 식사를 마치고 나와서 다시 길옆 버드나
무 방천에 매복하였다. 한 시간 동안 기다리던 윤준희 조가 장재방향으로 정찰을 떠났다. 반
시간 후에 그들은 동량어구에서 수송대를 발견하였다. 윤준희와 박웅세는 수송대를 감시하기
위해 매복하였고 김준은 다른 조에게 전당하기 위하여 달려갔다. 최봉설은 전투태세를 갖추
고 수송대가 있는 방향으로 달려갔다.
현금을 실은 말이 앞서고 우편물을 실은 말이 뒤 따르고 있었다. 수송대원은 용정출장소 직원
인 하루구찌, 회령은행출장소 서기 김용억, 일본인 순사 나가도모, 조선순사 박연흡 그리고 도
중에 합류한 조선상인 진길풍, 일본인 우편수송인 가시하라 이었다.62) 최봉설은 두 사람을
총으로 쓰러뜨리고 말 두 필을 낚아채어 앞으로 달렸다. 윤준희도 두 사람을 쏘아 떨어뜨렸
다. 최봉설은 퇴로 시 1차 모임장소로 정했던 곳으로 가서 일행을 기다렸다. 임국정과 윤준희가 걸어서 왔다. 마지막으로 한상호가 왔다. 박웅세는 며칠 후 결혼식을 올리므로 친구인 김준과 함께 명동으로 돌아갔다. 그들은 소팔포강 동쪽 골짜기에서 15만원을 확인하고 해란강을 건너 백석구를 지나 다음 날 새벽(5일)에 와룡동 최봉설의 집으로 갔다. 최봉설과 한상호의 부친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은 5일 밤에 와룡동을 떠나 왕청현 이판구유채 거점에서 일주일 동안 머물렀다. 63) 최봉설의 기록에 의하면 그들은 5일에 의란구 유채구에서 김하석을 만났으며 블라디보스토크 까지 함께 동행하였다. 64) 12일에 다시 길을 떠나 4일 만에 러시아 국경 너머에 있는 모커우에 이르러 일주일을 보낸 후 23일에 배를 타서 24일에 최종 목적지인 블라디보스토크 신한촌에 도착하였다. 그들은 김하석의 안내로 신한촌의 독립운동가 채성하 집에 머물다가 신한촌 하바롭스까야거리 5호에 있는 박참봉의 집으로 숙소를 옮겼다. 그들은 성공한 거사를 자축하며 독립전쟁을 수행하기 위하여 두만강과 압록강을 건너는 조선청년 독립군의 꿈으로 가슴이 부풀었다.
용정주재 일본영사관에서는 5일 사건이 보고된 첫날에 사건의 가장 유력한 용의자인 회령의 조선은행 직원 전홍섭을 체포하였다. 그리고 윤준희 일행의 이동한 흔적을 추적하여 오도구, 세린하, 조양천 등지를 샅샅이 수색하는 한편 수백 명의 중국과 일본의 경찰을 풀어 평강일대의 조선간민들을 체포하였다. 1월 6일에는 100여 명의 경찰들을 명동에 파견하여 조선 간민들을 사납게 검거하며 체포하였다. 그들은 첩자를 통하여 윤준희와 최봉설이 제창병원에서 몇 차례 접촉했던 사실을 알아냈고 10일에는 중일공동수색대 90명을 와룡동에 파견하여 최봉설의 부친 최병국과 동생 최봉준을 체포하였다. 일제는 심문 끝에 철혈광복단의 거사를 파악하고 하얼빈과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 영사관에 15만원탈취사건을 통보하였다. 그리고 연길도윤에게 혐의자 색출에 협조할 것을 요청하였다. 연길도윤공서에서는 ❰포고 제2호❱를 반포하여 15만원탈취사건의 혐의자를 신고한 자에게 포상을 한다는 현상문을 내걸었으며 상인들에게는 5원과 10원 지폐 사용자를 즉시 관서에 보고할 것을 훈시하였다.65)
그들은 마지막 관문 통과를 앞두고 의견이 분분하였다. 무기를 사자는 의견과 홍범도에게 넘겨주어 무기를 사자는 의견 대립으로 결론을 내리지 못하고 임국정의 의형제인 엄인섭에게 상의하기로 하였다. 엄인섭이 선뜻 무기구매 알선을 해주겠다고 하여 그들은 기꺼운 마음으로 교섭 선불금으로 1만원을 그에게 주었다. 66) 그리고 그들은 엄인섭의 밀고로67) 1월 31일 새벽에 불시의 습격을 당하여 윤준희, 임국정, 한상호는 체포를 당하였고 최봉설 만 뒷문으로 가까스로 도망치는 중에 왼쪽 어깨에 관통상을 입었으나 추격을 피하여 러시아인의 집에 숨어서 치료를 받아 회복하였다. 그러나 그는 그 후로 고향을 영원히 등지고 연해주 그리고 서 만주와 중앙아시아를 떠돌며 사는 인생이 되었다.
그들이 탈취한 15만원 중 군사학교 부지 구입을 위해 지출한 외 나머지 12만 8천여원은 안타깝게도 현장에서 그대로 일경에 압수를 당하였다. 인터넷 사전이나 개인의 글들에 회자되고 있는 ‘탈취한 거금이 북로군정서의 군자금으로 귀속되었다거나 그들이 무기를 사서 북로군정서에 기증했다’는 말은 낭설에 불과할 따름이다.
윤준희, 임국정, 한상호는 살인약탈죄로 사형을 언도받았으나 기개를 굽히지 않고 “조선인으로 정의인도에 근거한 의사발동이므로 범죄가 아니다”고 주장하면서 일제를 규탄하였다.68) 30세 윤준희, 27세 임국정, 22세 한상호는 독립전쟁에의 소명을 받고 조국독립을 화산처럼 뜨겁게 사모한 죄 값으로 1921년 8월 25일 서울 서대문 감옥에서 교수형을 당하였다.69)
최봉설, 박웅세, 김준은 궐석재판으로 사형언도를 받았다. 정보를 전달한 전홍섭은 15년 형을 언도받고 옥고를 치렀다.
15만원탈취사건의 의미를 찾아서
연길에서 처음으로 15만원탈취사건이라는 팩트를 접하며 적지 않은 혼란과 빚진 자 의식과 부담감을 느꼈다. 더 자세히 알고 싶어 여러 책을 뒤졌지만 그 글이 다 그 글이어서 진도를 나갈 수 없었다. 그러나 거사 모의장소 중에 하나였던 최봉설 네 집의 흔적이 가까운 와룡동에 남아 있다는 말을 듣고 유적지 탐방에 일가견이 있는 조선족 형제의 안내를 받아 방문하였다. 집은 나무 울타리로 빙 둘러 담이 쳐졌고 집터 자리에는 마른 옥수수 대가 널려 있었으며 마당에는 김장배추가 심겨져 있었다. 최봉설의 아들이 연길로 이사를 나가며 집을 팔았고 현재 주인은 최봉설의 아들에게 집을 구매한 사람에게 집을 구입하여 집을 헐고 밭으로 만들었다고 하였다. 집터 위에 가까스로 남아있는 주춧돌의 흔적들을 살피며 만져보았다. 마당을 거닐며 앞문과 뒷문으로 나가서 고샅길을 찬찬히 바라보았다. 그리고 최봉설이 9살 되던 해에 세워진 와룡동교회와 창동소학교를 떠올렸다. 또한 1910년에 세워진 창동중학교를 떠올렸다. 몇 차례 다니는 동안에 용정 3.13만세시위와 순국한 최익선, 창동학교 은사로 이름이 남은 분들과 정기영, 정기선이 모자이크조각처럼 떠올랐다. 그러나 조각뿐 큰 그림이 그려지지 않았다. 글을 쓰고 싶었지만 조각으로 글을 쓸 수가 없어서 봉오동전투, 청산리전투, 경신대학살 그리고 자유시참변까지는 글을 썼지만 15만원탈취사건에 대해서는 글을 쓸 엄두를 내지 못하였다.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그들이 간도국민회 외곽단체에서 활동을 하였다는 기록에서 힌트를 받아 큰 그림을 그릴 수가 있었다. 그림을 그리면서 1910년대 북간도사회 무드와 수많은 열혈청년들과 학생들을 만날 수가 있었고 그들의 순수한 에너지가 1910년대와 20년대 만주독립운동의 밑거름이었음을 깨달았다. 그들은 그 많은 무명의 투사들의 열기를 모아 목숨을 걸고 중국 땅에서 독립전쟁의 화살을 쏜 용사들이었다. 그들의 거사는 많은 것을 말해 주었다.
첫째 그들의 거사는 철저히 준비된 거사였다.
그들의 거사는 우발적인 거사가 아니었다. 3.13만세 시위 후에 최봉설, 임국정, 한상호 그리고 윤준희는 독립은 무장투쟁으로만 가능하다는 사실을 깨닫고 의기투합을 하였다. 그들은 일정과 방법을 논의하기 위해 와룡동과 제창병원 지하실에서 자주 만났다. 당시 윤준희는 간도국민회의 신문 중의 하나인 대한독립신문을 구춘선의 지도로 발간하는 책임자로 일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들은 제창병원에서 자연스럽게 만날 수 있었다. 그들은 최봉설과 한상호 부친이 송아지를 팔은 돈으로 1919년 9월에 거사를 위한 무기를 구하기 위해 블라디보스토크에 다녀왔다. 그들은 당시 무기 구입을 했을 뿐만 아니라 반병률이 쓴 홍범도 연보에 의하면 추풍 당어재골로 홍범도를 찾아가 15만원 탈취계획과 무기구입문제를 논의하였다.70) 그들이 회룡지점의 조선은행 직원인 전홍섭을 포섭하는 것도 용의주도하였으며 수개월의 시간이 걸렸다. 전홍섭이 3.13만세시위 때 부상자를 업어서 제창병원에 나른 것을 확인하였고 여러 차례 걸쳐서 설득하여 거사에 참여시킨 것이다. 그들은 거사에 필요한 두 명의 동지를 10월에야 확보하였다. 회령에서 용정에 오는 루트를 잘 아는 명동의 박웅세와 그의 친구 김준을 가담시킨 것이다. 당시 박웅세는 1월 초에 결혼식 일정이 잡힌 청년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거사 계획에 기꺼이 참여하였다. 그들은 만반의 준비를 하고 대기하고 있었지만 성공을 위해서 철도부설자금이 회령에서 용정으로 오는 1920년 1월 4일까지 인내심을 가지고 기다렸다.
둘째 그들의 거사는 범 단체적인 것이 아니었다.
이 말은 그들이 러시아나 간도의 단체들의 권유나 지시와 명령으로 거사를 도모하지 않았다는 뜻이다. 어떤 글에는 그들이 러시아 국민의회 군사부장 김하석의 지시로 거사를 도모하였다고 한다. 만약에 그들이 국민의회 김하석의 사주로 거사를 도모하였다면, 김하석이 거사에 필요한 장비를 공급해야 한다. 그러나 그들은 장비를 구입하러 부친에게 돈을 받아서 블라디보스토크로 직접 다녀오는 수고를 감당하였다. 뿐만 아니라 5일 의란구 유채구에서 보스인 김하석을 만났을 때 그에게 탈취금의 권리를 넘겨주지 않았다. 그들은 일본법정의 판결문과 다르게 실제로 무기구입에 대하여서도 그에게 자문을 구하지 않았다. 단원들 사이에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무기 구입 건으로 의견이 분분하였는데 최봉설의 회고에 의하면 홍범도에게 돈을 넘겨주어 무기를 사자는 의견과 자발적으로 무기구입을 하자는 의견으로 나뉘었다고 한다. 결국 그들은 임국정의 의형제인 엄인섭을 통해 무기를 구입하기로 합의하고 그에게 선불금 까지 주었으나 그의 밀고로 일경에게 붙잡히게 되었던 것이다. 만약에 러시아의 국민의회나 기타 단체의 지시나 배후 협력이나 지원이 있었다면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무기 구입을 위해 엄인섭에게 의뢰하는 일이 발생하지 않았을 것이며 그 지역의 독립투사들의 현황과 일제의 경찰과 군부대 상황에 그렇게 무지하지는 않았을 것이므로 일제 간섭군이 주둔하고 있는 지역에서, 역할을 분담하여 일을 신속하게 처리하지 않고 7,8일이라는 긴 시간을 그 곳에서 죽치고 앉아 있지 않았을 것이다. 이런 사실들로 미루어 짐작하건대 그들이 비록 김하석의 편지와 권면을 받았다할지라도, 거사의 주체가 철혈광복단의 이름으로 알려졌다 할지라도 그들의 거사는 간도국민회 외곽단체인 철혈광복단의 단원인 윤준희를 비롯한 7명 청년들의 거사였다. 그들의 순수한 자발성은 당시 북간도 청년들의 독립전쟁에의 열망과 환상, 순수와 고뇌를 말해준다.
셋째 그들의 거사는 가족, 교회, 학교와 와룡동 국민회의 총체적인 신앙고백이었다.
최봉설의 할아버지는 1969년 기사년에 생명을 걸고 자유와 인간다운 삶을 찾아 무인지경인 와룡동 오지로 들어와서 개척을 시작하였다.
최봉설의 아버지는 1907년에 창립소학교 발기인의 한 사람이 되었고 학부모위원회 한 멤버로 후원 회비를 내어 창동학교를 학비가 없어도 공부하고자 하는 학생들을 다 받아 주는 학교로 만들었다. 그는 창동학교 교가 후렴 구절 가사 대로 “참스럽다 착하다 아름다워라 정신은 자유요, 이상은 독립”71)에 뜻을 둔 아들을 키워 독립운동의 제단에 관제처럼 부었다.
1907년에 세워진 와룡동교회는 한 손에 성경을 들고 한 손에 조선독립이라는 시대적 사명을 안고 출범하였고 와룡동 청소년들에게 조선독립에의 꿈을 심어주었다. 3.13만세 시위에 거교회적으로 신도들이 참여하였고 시위 후에는 간도국민회 와룡동지회 거점이 되었다. 신도인 정기영과 정기선 그리고 청년 최봉설이 간도국민회와 간도국민회 외곽단체에서 지도자로 활동하였다. 그리하여 와룡동은 경신대학살에 토벌의 대상이 되었다. 그러므로 거사는 그들의 거사이면서 와룡동을 만든 모든 사람들의 총체적인 신앙고백이며 와룡동 사람들의 거사이다.
넷째 그들의 거사는 중국 영토에서 벌인 일본에 대한 최초의 대담한 선전포고였다.
3.13시위 후에 결성된 독립운동 단체들은 두만강과 압록강을 건너서 조선 땅에 진공하는 일에 심혈을 기울였다. 중국 영토 내에서는 학생들이나 청년들의 자위단과 암살대가 조선인 첩자와 일경에 대한 암살과 습격하는 것이 주를 이루었다. 일제는 독립군의 조선 진입과 암살대의 저격은 예상하고 있는 일로 반격과 추격, 검문과 체포, 구속으로 대응하였다. 그러나 15만원 탈취사건은 무장 호위 군인이 2명, 동행자가 4명이 있는 호송단체의 거금을 목표하고 있었으므로 일제로서는 경악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때까지 조선 독립군은 일제의 군인과 경찰을 상대로 전투를 벌였지만 1920년 정초의 독립군은 그전과 차원이 다르게 거액의 자금을 노렸다는 측면에서 일제의 신경을 건드렸다. 그리하여 일제는 두만강 연안, 전 만주와 연해주에 비상경계망을 펼쳤으며 1월 31일 그들이 잡힐 때까지 삼엄한 경계를 폈다. 그리고 그 사실을 외부에 알리지 않기 위하여 언론보도를 막았으며 아무 일이 없었던 것처럼 위장하였다. 그리고 그들은 재판정에서 투사들이 자신들의 거사가 조선인의 대의이며 일본에 대한 선전포고라고 주장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살인약탈죄로 사형을 언도하였다.
그리하여 15만원탈취사건은 북간도의 독립운동이 평화적인 시위를 종료하고 무력투쟁으로 전환하였다는 선언이 되었다. 그리고 북간도 사회는 열혈청년들의 죽음에 자극을 받아 독립전쟁무드로 들어갔다. 모연대들이 포고문과 군자금청구서약서를 휴대하고 권총으로 무장하고 북간도 어디를 가서든지 모금을 하여도 통하는 사회가 되었다. 일제의 감시와 탄압, 이간질에도 불구하고 군자금 모금이 활성화되어 1920년 각단체가 모금한 금액이 50만원이 모금되었다. 이는 당시 북간도 조선인 1인당 1원 73전을 군자금으로 납부했다는 놀라운 통계이다. 사건 후, 더 많은 청년들이 독립군에 지원을 하였다. 그 당시 북간도 인구가 28만9천여 명이었는데 독립군의 숫자가 4,241명이었으니 69명에 1명꼴로 독립군에 지원했다는 말이 된다. 그들의 실패한 거사는 실로 일제에 대한 선전포고 되었으며 봉오동전투와 청산리전투의 선봉전이 되었다.
그들이 생명을 걸고 탈취한 15만원의 가치를 알고 싶어서 가이드를 해주시는 형제분께 물었다. 그분은 선뜻 당시 그 돈이면 일개 사단을 무장을 시킬 수 있었다고 대답하였다. 사단의 구성인수를 사전에서 찾아보니 사단의 숫자 규모가 나라마다 달랐다. 3천명에서 무려 2만 명까지 편차가 커서 금액을 종잡기가 어려웠다. 어떤 연변의 기록은 그 돈이 ‘3만여 자루의 총을 구입할 수 있는 돈’이라고 하였다. 인터넷 어느 글들에 260여억 원, 150여억 원으로 추산된다는 내용이 있었다. 그들의 주장도 너무 편차가 커서 신뢰하기 어려웠다. 어쨌든 15만원이면 대대적으로 독립전쟁을 일으킬 수 있는 무기를 구입할 수 있는 돈이었음에 분명하다. 만약에 마지막 관문에서 그들이 무기 구입에 성공했으면 우리 민족의 독립이 앞당겨지고 동북아의 운명이 바뀌어 질 수 있었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니 안타깝고 애석하다.
가만히 통 큰 사람들의 이름을 불러본다. 1920년도 북간도 독립운동의 무드를 결정한 순수한 열혈청년 윤준희, 임국정, 한상호, 전홍섭, 최봉설, 박웅세. 김준의 피 묻은 이름! 북간도 하늘에서 별이 된 이름이다.
아! 아! 북간도 하늘에 뜬 검은 구름에 가려진 맑고 아름다운 별을 본 나는 얼마나 복이 많은 사람인가!
2022.2. 19일. 토요일. 새벽
우담초라하니 올리다
미 주
1) 반병률 저⌜홍범도 장군⌟, 117쪽, 한울 아카데미, 2019
2) 같은 책, 174쪽
3) 같은 책, 247쪽
4) 김택, 김해진 주필, ⌜연변문사자료 제 5집 교육사료전집⌟, 24쪽, 연변정협문사자료위원 회, 1988
5) 김철수 저 ⌜연변항일사적지 연구⌟, 51쪽, 연변인민출판사, 2002
6) 김호림 저 ⌜연변 100년 역사의 비밀이 풀린다⌟, 171쪽, 글누림, 2013
7) 차재명 원저, ⌜조선예수교장로회사기 상⌟, 381,382쪽, 한국기독교사연구소, 2018
8) 김호림 저 ⌜연변 100년 역사의 비밀이 풀린다⌟, 175쪽, 글누림, 2013
* 2019년 10월 방문 시, 마을주민 공씨의 증언을 직접 들었다. 그 분이 처음 터와 마지막 터를 알려주었는데 두 번째 교회 터의 위치는 김호림 저⌜연변 100년 역사의 비밀이 풀린 다⌟, 175쪽에 나오는 장소와 일치하였다.
9) 김철수 저 ⌜연변항일사적지 연구⌟, 57쪽, 연변인민출판사,
10) 서굉일 저, ⌜일제하 북간도 기독교 민족운동사⌟, 184쪽, 185쪽, 한신대학교출판부, 2008
11) 허청선, 강영덕 주편 ⌜중국조선민족교육사료집 1⌟, 468쪽, 연변교육출판사, 2000
1907년 4월 설립설도 있다.(김철수 저 ⌜연변항일사적지 연구⌟, 52쪽
12) 김택, 김해진 주필, ⌜연변문사자료 제 5집 교육사료전집⌟, 26쪽, 연변정협문사자료위원 회, 1988
13) 김철수 저, ⌜연변항일사적지 연구⌟, 52쪽, 연변인민출판사, 2002
14) 김택, 김해진 주필, ⌜연변문사자료 제 5집 교육사료전집⌟, 27쪽, 연변정협문사자료위원 회, 198
15) 최삼룡 편 ⌜승리의 기록⌟,54쪽, 연변인민출판사, 2015
16) 김철수 저 ⌜연변항일사적지 연구⌟, 55쪽, 연변인민출판사, 2002
17) 앞의 책, 163쪽
18) 용정기념사업회 외 ⌜룡정3.13반일운동 80돐 기년문집⌟, 94쪽, 연변인민출판사, 1999
현장에서 순국한 분은 10인으로 박상진, 정시익, 공덕흡, 갬태균, 김승록, 현봉률, 리균필, 박문호, 김흥식, 장학관이고 제창병원에서 순국한 분들은 4명으로 최익선, 현상로, 리유 주, 차정룡 이며 장례식 후에 순국하신 분은 5명으로 김병영, 채창헌, 김종묵, 원용서, 허 준언이다.
19) 김철수 저 ⌜연변항일사적지 연구⌟, 56쪽, 연변인민출판사, 2002
20) 허청선, 강영덕 편저 ⌜중국조선족민족교육사료집 1⌟462,463,464쪽, 연변교육출판사, 2002
21) 용정기념사업회 외 ⌜룡정3.13반일운동 80돐 기념문집⌟, 239,240,241쪽, 연변인민출판 사, 1999
22) 김철수 저, ⌜연변항일사적지 연구⌟, 192쪽, 연변인민출판사, 2002
23) 서굉일 저, ⌜일제하 북간도 기독교 민족운동사⌟, 184쪽, 185쪽, 한신대학교출판부, 2008
24) ⌜1910~ 1930년대 조선민족 반일무장투쟁사 재조명⌟, 반병률 논문❰간도15만원사건에 대한 재해석❱, 109, 110쪽
25) 양소전, 차철구 외 ⌜중국조선족혁명투쟁사⌟, 185쪽, 연변인민출판사, 2009
26) 조영진 외 편저 ⌜항일무장독립투쟁사 1⌟, 228쪽 도서출판 일원, 2000
27) 반병률 저⌜홍범도 장군⌟, 121, 248쪽, 한울 아카데미, 2019
28) 양소전, 차철구 외 ⌜중국조선족혁명투쟁사⌟, 187쪽, 연변인민출판사, 2009
29) 양소전, 차철구 외 ⌜중국조선족혁명투쟁사⌟, 187쪽, 연변인민출판사, 2009
30) 김택, 김인철 주필 외 ⌜홍범도장군⌟, 183쪽, 연변인민출판사, 1991
대한독립군, 국민회군, 의군부군, 한민회군, 광복단군, 의민단, 신민단군 등
31) 김춘선 주필, ⌜항일전쟁과 중국조선족⌟, 70,71쪽, 연변인민출판사, 2015
32). 김철수 저 ⌜연변항일사적지 연구⌟, 282쪽, 연변인민출판사, 2002
33) 김춘선 주필, ⌜항일전쟁과 중국조선족⌟, 98쪽, 연변인민출판사, 2015
34) 주혈복익(主血伏翼) - 주님의 보혈 앞에 엎드리나이다. 독립을 위해서 기도한다는 뜻이다.
35) 서굉일 저, ⌜일제하 북간도 기독교 민족운동사⌟, 229쪽, 한신대학교출판부, 2008
36) 양소전, 차철구 외 ⌜중국조선족혁명투쟁사⌟, 189쪽, 연변인민출판사, 2009
37) 양소전, 차철구 외 ⌜중국조선족혁명투쟁사⌟, 190쪽, 연변인민출판사, 2009
38) 양소전, 차철구 외 ⌜중국조선족혁명투쟁사⌟, 188쪽, 연변인민출판사, 2009
39) 서굉일 저, ⌜일제하 북간도 기독교 민족운동사⌟, 230쪽, 한신대학교출판부, 2008
40) 서굉일 저, ⌜일제하 북간도 기독교 민족운동사⌟, 230쪽, 한신대학교출판부, 2008
41) 김춘선, 안화춘, 허열길 저 ⌜최진동장군⌟, 91,92,93쪽, 흑룡강조선민족출판사, 2006
42) 리광인, 김송죽 저 ⌜백포 서일장군⌟, 278쪽, 민족출판사, 연변인민출판사, 2015
43) 리광인, 김송죽 저 ⌜백포 서일장군⌟, 324쪽, 민족출판사, 연변인민출판사, 2015
44) 당시 길회선 (용정~ 회령의 철도 노선) 총공사비가 15만원이었다고 한다. 50만원은 그 3 배가 넘는 돈으로 1920년 당시 북간도 인구 289,000여명(⌜항일전쟁과 중국조선족⌟, 45 쪽, 김춘선 주필, 연변인민출판사)인 것을 감안할 때 성공적인 모금으로 평가할 수 있다.
45) 박창욱, 반병률 외 ⌜1910~1930년대 조선민족 반일무장투쟁사 재조명⌟, 108,109쪽, 연 변대학민족연구원, 2000년
46) 박창욱, 반병률 외 ⌜1910~1930년대 조선민족 반일무장투쟁사 재조명⌟,109쪽, 연 변대학민족연구원, 2000년
47) 용정기념사업회 외 ⌜룡정3.13반일운동 80돐 기년문집⌟, 241쪽, 연변인민출판사, 1999
48) 서굉일 저, ⌜일제하 북간도 기독교 민족운동사⌟, 208쪽, 한신대학교출판부, 2008
49) 서굉일 저, ⌜일제하 북간도 기독교 민족운동사⌟, 208, 209쪽, 한신대학교출판부, 2008
*용정기념사업회 외 ⌜룡정3.13반일운동 80돐 기념문집⌟, 242쪽에서 김춘선은 광복단을
철혈광복단으로 기록하고 있다.
*⌜중국조선족혁명투쟁사⌟, 163, 164쪽은 광복단으로 기록하고 있다.
50) 최삼룡 편 ⌜승리의 기록⌟,54쪽, 연변인민출판사, 2015
51) 최삼룡 편 ⌜승리의 기록⌟,54쪽, 연변인민출판사, 2015
52) 서굉일 저, ⌜일제하 북간도 기독교 민족운동사⌟, 229쪽, 한신대학교출판부, 2008
53) 서굉일 저, ⌜일제하 북간도 기독교 민족운동사⌟, 209쪽, 한신대학교출판부, 2008
54) 김호림 저 ⌜연변 100년 역사의 비밀이 풀린다⌟, 174쪽, 글누림, 2013
한상호는 1899년생, 교수형을 당한 1922년에 23살이었다.
55) 최삼룡 편 ⌜승리의 기록⌟,55쪽, 연변인민출판사, 2015
56) 김준과 박웅세는 명동 출신이라는 기록이 나오고 윤준희에 대해서는 두루뭉술하게 표현되 었는데 인터넷 사전인 나무위키에는 용정 영신학교 교원이라고 나온다. 그러나 확실하지 않으며 검토가 필요하다. 명동학교 출신일 가능성은 있다. 임국정을 명동학교 출신이라고 하는 책들이 있는데 김철수와 김호림은 임국정이 창동 출신임을 그들이 가지고 있는 자료 로 분명하게 밝히고 있다.
57) 박창욱, 반병률 외 ⌜1910~1930년대 조선민족 반일무장투쟁사 재조명⌟, 110~112쪽, 연 변대학민족연구원, 2000년
58) 박창욱, 반병률 외 ⌜1910~1930년대 조선민족 반일무장투쟁사 재조명⌟, 111쪽, 연 변대학민족연구원, 2000년
59) 김삼룡은 ⌜승리의 기록⌟54, 55쪽에서 최봉설의 회고대로 그들의 거사 행위를 청년들의 무장투쟁의 필요성에 의한 자각 때문이라고 밝히고 있다. 서굉일은 ⌜일제하 북간도 기독 교 민족운동사⌟, 233쪽에서 국민회군의 무장화를 위해서 라고 적고 있다. 그러나 김춘선 은 러시아 국민의회 군사부장 김하석의 사주로 말하고 있다. 김하석이 연변 독립운동단체 들의 부탁으로 무기를 구입해서 배편으로 보냈는데 배가 좌초하여 무기가 수장되어 자신 의 입장이 곤란하게 되자 철혈광복단 후배동료들에게 단기간에 군자금을 만들어 보내라고 하명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그들이 탈취사건을 일으키게 된 것은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일 어난 일련의 사건들과 최봉설의 회고에 의하면 독립을 열망하는 그들의 자발적인 결정으 로 보인다.
60) 최삼룡 편 ⌜승리의 기록⌟, 55쪽, 연변인민출판사, 2015
61) 김철수 저 ⌜연변항일사적지 연구⌟, 311쪽, 연변인민출판사, 2002
62) 중국조선민족발자취총서 편집 ⌜개벽⌟, 김춘선 저❰15만원 탈취기❱, 486, 487쪽, 민족 출판사, 1999
63) 최삼룡 편 ⌜승리의 기록⌟, 56쪽, 연변인민출판사, 2015
64) 박창욱, 반병률 외 ⌜1910~1930년대 조선민족 반일무장투쟁사 재조명⌟, 111쪽, 연 변대학민족연구원, 2000년
65) 용정기념사업회 외 ⌜룡정3.13반일운동 80돐 기념문집⌟,247, 248쪽, 연변인민출판 사, 1999
66) 최삼룡 편 ⌜승리의 기록⌟, 57쪽, 연변인민출판사, 2015
* 탈취한 자금 관리에 대한 다른 주장들이 있다.
반병률은 그의 논문❰간도 15만원사건에 대한 재해석❱112쪽에서 일제의 판결문에 따라 김하석이 관리와 사용을 결정하였다고 주장한다.
그들은 블라디보스토크 신한촌에 도착한 후에 김하석의 주도로 자금 배분을 결정하였다. 김하석이 탈취한 자금을 러시아 돈으로 교환하였고, 윤준희에게 최의수를 소개하여 그에 게 매일 1,2만원을 주라고 명령하였다. 그 후 교환한 금액의 가운데 5만 루블은 임국정이 가져갔고 25만 루블은 김하석이 가져갔으며, 일화 5천 엔 또한 김하석이 가옥비로 가져 갔다. 나머지 강탈금은 윤준희에게 맡기고 떠났다.
최봉설은 그의 회상록에서 다른 주장을 하고 있다.
그들이 신한촌에 도착한 후에 철혈광복단의 단장인 전일을 비롯하여 단원들 30 명 정도 가 모였고 이동휘가 자금 사용을 결정하였다고 했는데 당시 이동휘는 신한촌에 있지 않고 중국에 있었다.
67) 밀고자에 대하여 강덕상의 ⌜현대사자료⌟에는 일본영사관측에 정보를 제공한 인물이 누 구인지 밝히고 있지 않다고 한다. 1920년 4월 10일자 상해의 독립신문은 밀고자를 블라 디보스토크 주재 일본영사관의 사환 김모라고 밝힌바 있다. 최봉설은 그의 책 ⌜독립군의 수기⌟ 엄인섭과 김하석을 밀고자로 지목하고 있다. 엄인섭의 경우 당시 독립운동자 사이 에서 밀정으로 지목되고 있어서 밀고자일 가능성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지만 김하석의 경 우에는 그리 쉽게 단정할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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