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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린도후서 11장 1-4절. 충성스러운 봉사의 자세 ①
1. 지난 시간에는, 바울의 대적자들이 외모와 말재주와 사람의 추천서를 자랑한 데 대해서, 바울은 <자신은 자기가 설립한 교회 안에서 자랑하고, 주 안에서 자랑한다>고 말씀한 내용을 살펴보았습니다.
2. 바울 사도는 <자랑>과 관련하여, 11장부터 12장 18절까지, 부득이 자신이 주안에서 충성한 것을 자랑하고 있습니다.
3. 오늘은 충성스러운 봉사의 자세가 무엇인지를 말씀해주고 있습니다.
4. 내용은 두 부분으로 나누어집니다.
1-4절. 바울 사도는 성도들이 그리스도를 사랑하도록 중매하는 역할을 하는데, 어리석은 고린도 교인들은 바울을 버리고, 마귀가 하와를 유혹하여 하나님을 배반하게 한 것 같은 거짓 사도들을 추종한다고 꼬집습니다.
5-9절. 바울이 지극히 큰 사도들보다 부족한 것이 없고, 복음을 값없이 전하는 잘못 밖에는 없다고 변명했습니다.
5. 오늘 설교의 제목은 <충성스러운 봉사의 자세>입니다.
1-4절. 바울 사도는 고린도교회 성도들이 그리스도를 사랑하도록 중매하는 역할을 하는데, 어리석은 고린도 성도들은 바울을 버리고, 마귀가 하와를 유혹하여 하나님을 배반하게 한 것 같은 거짓 사도들을 추종한다고 꼬집는 내용입니다.
고린도후서 11장은 바울 사도가 거짓 사도와는 달리, 사명을 가지고 사역하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바울 사도는 고린도 교회에서 사례비를 받지 않고 사역을 하지만, 거짓 사도들은 고린도 교회에서 사례비를 받았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바울 사도의 봉사 정신을 배워야 하겠습니다.
물론 사역자가 교회에서 사례비를 받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그러나, 바울 사도는 자비량 전도를 했습니다.
그런데, 오히려 거짓 사도들은 바울의 자비량 전도를 이유로 바울이 참된 사도가 아니기 때문에 사례비를 받지 않는다고 비난했습니다.
1절. 원하건대 너희는 나의 좀 어리석은 것을 용납하라. 청하건대 나를 용납하라.
New American Standard Bible: I wish that you would bear with me in a little foolishness; but indeed you are bearing with me.
원하건대 너희는 나의 좀 어리석은 것을 용납하라
Ὄφελον ἀνείχεσθέ μου μικρόν τι ἀφροσύνης·
I wish you were bearing with me little some in foolishness
직역하면 ‘좀 어리석은 나를 너희가 용납하기를 내가 원한다’는 뜻입니다.
‘너희가 용납하기를’(ἀνείχεσθέ)은 미완료과거로서(you were bearing with) 과거에 용납했는데 계속 용납하는 것을 가리킵니다.
‘내가 원한다’(Ὄφελον)는 현재형으로서(I wish) 지금 원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청하건대 나를 용납하라.
ἀλλὰ καὶ ἀνέχεσθέ μου.
but indeed you do bear with me
직역하면 ‘오직 참으로 너희가 나를 용납하기를 (내가 원한다)’는 뜻입니다.
‘용납하기를’(ἀνέχεσθέ)은 현재형으로서(you do bear with) 지금 용납하는 것을 내가 원한다는 뜻입니다.
1. 엘리콧(Ellicott)은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바울 서신의 이 부분은 두 단어로 특징지을 수 있는데, 하나는 ‘용납하라’는 단어로서 5회 나오고(11:1, 4, 19-20), 다른 하나는 ‘어리석음’이란 단어인데 8회 나옵니다( 11:1, 16-17, 19, 21, 12:6, 11). (There are two catch-words, as it were, which characterise the section of the Epistle on which we are now entering: one is of “bearing with,” or “tolerating,” which occurs five times (2Corinthians 11:1; 2Corinthians 11:4; 2Corinthians 11:19-20), and “folly,” which, with its kindred “fool,” is repeated not less than eight times (2Corinthians 11:1; 2Corinthians 11:16-17; 2Corinthians 11:19; 2Corinthians 11:21; 2Corinthians 12:6; 2Corinthians 12:11). 여기서 우리가 추론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은 이 부분의 말씀은 디도가 고린도 교회에서 대적자들이 한 말을 바울에게 보고한 데 대한 반응이라는 것입니다. 대적자들의 말은 “우리는 더 이상 바울을 용납할 수 없다, 바울의 어리석음을 도저히 용납할 수 없게 되었다”라고 합니다. ( It is impossible to resist the inference that here also we have the echo of something which Titus had reported to him as said by his opponents at Corinth. Their words, we must believe, had taken some such form as this: “We really can bear with him no longer; his folly is becoming altogether intolerable.”)
벤슨(Benson)은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바울이 자신을 추천하는 것은 많은 사람들에게 어리석게 보일 것입니다.( Of commending myself, which to many may appear folly;) 그러므로 나는 여러분에 대해서 거룩한 질투심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자신을 추천하고 있습니다. 질투심이란 사랑하는 사람에 대해서 경쟁자에게 대해 느끼는 감정인 것입니다.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에게 자기가 질투심을 가지고 있다고 말함으로써, 바울 사도가 고린도 교인들을 어떤 사람들보다도 훨씬 더 사랑하는 것을 고린도 교인들이 알게 해주려고 한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어떤 사람들(거짓 사도들)이 고린도 교인들에 대해서 바울보다도 더 관심을 가진 체하는 것을 견딜 수 없었습니다. 더욱이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의 마음이 거짓 사도들의 침투로 인해 바울에게서 떠나가는 것을 두려워했을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에게서 떠나가는 것을 두려워했습니다. 그리고 고린도 교인들이 현재 그리스도에게 불충실해서 장차 그리스도의 배우자로서 부적격하게 될 것을 두려워했습니다. ( I therefore do it because I am jealous over you with a godly jealousy — Jealousy is a passion which renders a person impatient of a rival or partner, with respect to a thing or person beloved. By telling them he was jealous over them, the apostle gives them to know he so exceedingly loved them, that he could not bear that any should pretend to have more regard for them than he had; and withal that he feared lest their affections should be alienated not only from him, but also from Christ, through the insinuations of false teachers among them, and they should be rendered unfaithful to him here, and unfit to be presented to him as his spouse hereafter.)
반스(Barnes)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의 어리석음’이라고 말한 것은 ‘자랑하는 어리석음’을 가리킵니다. 그 의미는 대략 “나는 일반적으로 자랑이 어리석음인 것과 그런 자랑이 용납되지 않는 것을 압니다. 그러나 자랑이 일반적으로 어리석음으로 간주될지라도, 환경이 나를 자랑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이 나를 용납해주시기 바랍니다”. 이것은 바울의 대적자들이 바울이 자신을 자랑하도록 어리석게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In my folly - Folly in boasting. The idea seems to be, "I know that boasting is generally foolish, and that it is not to be indulged in. But though it is to be generally regarded as folly, yet circumstances compel me to it, and I ask your indulgence in it." It is possible also that his opponents accused him of folly in boasting so much of himself.)
제미슨과 파우젯과 브라운(Jamieson-Fausset-Brown)은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고린도후서 11장에는 ‘질투’라는 말이 전반적으로 나타납니다. 이것은 바울 때문이 아니라 거짓 사도들(the False Apostles)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여러 가지 뛰어난 점들을 스스로 제시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Through Jealousy over the Corinthians, Who Made More Account of the False Apostles Than of Him, He Is Obliged to Commend Himself as in Many Respects Superior) 본 문에 나오는 ‘어리석음’( ἀφροσύνη)이란 단어는 고린도전서 3장 19절이나 마태복음 5장 22절과 25장 2절에 나오는 ‘어리석음’(μωρία)과는 달리 ‘신중하지 못한 것’(imprudence)을 의미합니다. 왜냐하면 나쁜 의미에서 ‘어리석음’이란 심술궂고 완악한 것을 가리키기 때문입니다. (folly—The Greek is a milder term than that for "foolishness" in 1Co 3:19; Mt 5:22; 25:2. The Greek for "folly" here implies imprudence; the Greek for "foolishness" includes the idea of perversity and wickedness.)
바울이 ‘나를 용납하라’고 한 것은 지금 너희가 나를 용납한 것같이 앞으로도 더 나를 용납하라는 것입니다. 11장 1-4절에서 자기 자랑을 하면서,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이 거짓 사도들 때문에 그리스도의 순수한 말씀을 떠나 변질되지 않도록, 바울은 원치 않게도 자신을 스스로 추천하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But indeed (I need not wish it, for) ye do bear with me"; still I wish you to bear with me further, while I enter at large into self-commendations.2 Corinthians 11:1-4 Paul unwillingly entereth upon a commendation ofhimself, out of jealousy lest the Corinthians should be perverted by false apostles from the pure doctrine of Christ.)
바울이 여기서 ‘나의 어리석음을 용납하라’는 것은 바울이 자기 자랑 하려는 것을 가리키는데, 이처럼 바울이 자기 자랑(추천)을 하는 것은 거짓 교사들(the false teachers)이 바울의 인격을 비방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바울이 자랑(추천)하게 된 것입니다. (folly, was his speaking so much in his own commendation; which indeed is no better than folly, unless there be a great reason; which was here, for it was the false teachers, vilifying his person and office, that put him upon it)
길(Gill)은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거짓 사도들이 자기들의 재능과 능력과 쓸모를 자랑했기 때문에, 바울 사도는 하나님의 영광과 고린도 교회를 위해서 자기방어를 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The false apostles boasted so much of their gifts, abilities, and usefulness, that the apostle found himself under a necessity of saying some things in his own defence, for the honour of God, and the good of this church)
이처럼 바울이 자기 자랑하는 것은 다른 사람들에게 어리석게 보일 것입니다. (which he saw would be accounted and censured as folly in him by others;)
이처럼 바울이 자기 자랑을 하는 것은 어리석게 보일 것이기 때문에, 바울은 ‘나의 어리석음을 좀 용납하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commendation of himself would look vain and foolish: and therefore says,bear with me a little in my folly,).
만일 바울이 자기 자랑을 하지 않으면, 자기 인격에 큰 손상을 받을 것이고, 고린도 교인들이 거짓 사도들에게 큰 위험을 당하게 될 것이고, 그리스도의 영광이 손상당하게 되기 때문이었습니다. (if he did not do it, he must greatly suffer in his character and usefulness; the members of this church would be in great danger from these false apostles, and the honour and glory of Christ lay greatly at stake;)
‘너희가 나를 용납하라’는 것은 이미 고린도 교인들이 용납해왔기 때문에, 바울은 용기를 내어 앞으로도 더 좀 몇 가지 일에서 자기를 더 용납해주리고 한 것입니다. (ye do bear with me; signifying that they had done so already, and continued to do so, and therefore he could not but encourage himself, that they still would bear with him a little longer, and in a few things more. )
2. 바울은 지금까지 자기를 자랑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라고 말해왔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기서 바울은 자기를 자랑할테니까, 어리석은 일이지만 나를 좀 용납해주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바울 사도가 어리석은 자기 자랑을 하는 것은 바울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고린도 교인들이 올바른 판단을 하기 위해서입니다.
즉 고린도 교인들이 율법주의 거짓 사도들의 자기 자랑을 듣고 잘못된 판단을 하지 않도록, 바울도 어리석은 줄 알면서도 자기 자랑을 늘어놓겠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태도는 잠언에 말씀한 대로 어리석을 자들의 어리석은 것을 따라 말하라는 말씀대로입니다.
잠언 26:5. 미련한 자의 어리석은 것을 따라 그에게 대답하라. 두렵건대 그가 스스로 지혜롭게 여길까 하노라.
3. 단지 바울의 어리석은 자랑과 율법주의 거짓 사도들의 어리석은 자랑이 다른 점은 바울은 자기 자랑이 어리석은 짓임을 알면서도 고린도 교인들의 올바른 판단을 위해서 자랑하는 것이고, 율법주의 거짓 사도들은 자기 자랑이 어리석은 짓임을 모르고 자랑하면서 고린도 교인들을 잘못된 길로 유도했던 것입니다.
즉 바울은 어리석은 자랑을 통해서 고린도 교인들을 올바른 신앙 가운데로 인도하기 위해서 자기 자랑을 했고, 율법주의 거짓 사도들은 고린도 교인들을 잘못된 길로 유인하기 위해서 어리석은 자기 자랑을 했던 것입니다.
이처럼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을 올바른 길로 인도하기 위해서 자기 자랑을 하기 때문에, 고린도 교인들에게 듣기 싫은 자기 자랑이지만 너그럽게 용납해달라고 부탁한 것입니다.
4. 우리들도 자기 자랑을 할 때는 죄송하다고 양해를 구하고 자기 자랑을 합니다.
그런데 어떤 못난 사람들은 이런 용서를 빌지 않고, 무조건 자기 자랑을 늘어놓는 사람이 있습니다.
더구나 터무니없는 자기 자랑을 해서, 역겨운 마음을 갖게 합니다.
어떤 교회에 겨우 초등학교 나온 장로(나**)가 있었는데, 최고의 대학교를 나온 목사(김**) 앞에서, 항상 자기는 서울대 박사 보다 훨씬 더 영리하다고 자랑을 하곤 했습니다.
그 목사님은 그 장로 앞에서 그냥 웃고 말았지만, 속으로는 이 사람의 무례한 자기 자랑은 참기 힘든 무례하고 구토증 나는 일이었습니다.
비록 초등학교만 나왔더라도 겸손하고 덕이 있으면, 모두 존경하고, 누가 초등학교 나왔다고 무시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 사람은 자기 입으로 초등학교 나왔다는 것을 스스로 고백하면서, 서울대 나온 박사를 무시하고 있으니, 천박한 인격을 드러내고 있는 것입니다.
동네 축구 선수가 박지성 선수 같은 국제적인 선수 앞에서 자기가 최고의 선수라고 자기 자랑을 하면 얼마나 역겹겠습니까?
요즘에 아시안 게임을 하는데, 박태환 선수 앞에서 동네 수영 선수가 자기 자랑을 하면서, 자기가 최고의 수영 실력을 가졌다고 자랑을 하면 얼마나 역겹겠습니까?
이처럼 자기 자랑을 하면, 사람들 앞에서 부끄러운 일입니다.
그러나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임을 받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23:12. 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누구든지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그래서 주님은 잔치에 초청을 받았거든 낮은 자리에 앉으라고 했습니다.
그러면 주인이 높은 곳으로 오라고 할 때, 영광이 된다고 했습니다.
누가복음 14:10-11. 청함을 받았을 때 차라리 가서 끝자리에 앉아라. 그러면 너를 청한 자가 와서 너더러 벗이여 올라앉으라 하리니, 그 때에야 함께 앉은 모든 사람 앞에서 영광이 있으리라.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5. 바울 사도는 원래 자기 자랑을 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율법주의 거짓 사도들 때문에, 할 수 없이 자기 자랑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고린도 교인들로 하여금 올바른 판단을 하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즉 바울의 자랑을 통해서 고린도 교인들이 율법주의 거짓 사도들과 바울 중에서 누가 참된 사도인가를 분별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이처럼 바울 사도는 어리석은 자기 자랑을 해서라도 오직 고린도 교인들이 올바른 신앙의 길을 걸어가도록 했습니다.
그러나 율법주의 거짓 사도들은 교인들을 생각지 않고 오직 자기들이 교권을 잡기 위해서 자기 자랑을 했던 것입니다.
이렇게 참 사도인 바울은 교인들의 유익을 위해서 일하지만, 율법주의거짓 사도들은 오직 자기 유익만을 위해서 일했습니다.
이처럼 참 사도인 바울은 사나 죽으나 하나님의 영광만을 위해서 일했고, 오직 자기에게서 주님만이 영화롭게 되는 것을 위해서 살았습니다.
빌립보서 1:20.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아무 일에든지 부끄러워하지 아니하고 지금도 전과 같이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게 하려 하나니
그래서 오늘 고린도후서 11장 22-27절에서 바울은 자기가 복음 전도를 위해서 수고한 고난의 목록 27가지를 쭉 나열한 다음에 마지막으로 고린도후서 11장 28절에서 “이 외의 일은 고사하고, 날마다 내 속에서 눌리는 일이 있으니, 곧 모든 교회를 위하여 염려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처럼 바울은 복음 전도를 위해서 모든 고난을 감수했으며, 자나 깨나 교회를 염려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바울은 어리석은 자기 자랑을 하더라도, 오직 고린도 교인들의 신앙적 유익을 위해서 어리석은 자기 자랑을 했습니다.
6. 그리고 바울은 이런 어리석은 자기 자랑을 한 것은 자기가 원해서 한 것이 아니라, 고린도 교인들이 바울을 버리고 거짓 사도들을 추종했기 때문이라고 말했습니다.
즉 고린도 교인들이 원래 자기들을 예수님 믿게 해준 바울을 버리고, 율법주의 거짓 사도들에게로 미혹되어 갔기 때문에, 바울이 할 수 없이 자기 자랑을 하게 되었다고 했습니다.
다시 말해서 바울이 어리석은 자기 자랑을 한 것은 고린도 교인들이 억지로 시킨 것이라고 했습니다.
고린도후서 12:11. 내가 어리석은 자가 되었으나 너희가 억지로 시킨 것이니 나는 너희에게 칭찬을 받아야 마땅하도다. 내가 아무것도 아니나 지극히 크다는 사도들보다 조금도 부족하지 아니하니라.
이처럼 바울이 자기가 지극히 크다는 사도들보다 조금도 부족하지 않다고 했습니다.
여기서 <지극히 크다는 사도들>이란 율법주의 거짓 사도들이 자기들은 예루살렘 교회의 지극히 큰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에게서 추천서를 받아왔다고 주장한 데 대한 말입니다.
즉 율법주의 거짓 사도들은 자기들은 예루살렘 교회의 사도들에게서 추천서도 받아가지고 왔고, 자기들은 인물도 좋고 설교도 잘하고, 그래서 참된 사도라고 주장했습니다.
그러면서 율법주의 거짓 사도들은 바울은 거짓 사도이고, 예루살렘 교회의 사도들에게서 추천서도 받지 않았고, 예수님 살아생전에 예수님을 따라다니지도 않았고, 예수님의 부활도 보지 못했고, 설교도 잘못하고 생김새도 못생겼고, 자기 병도 못 고치고, 신비적인 환상도 보지 못했다고 비난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바울 사도는 고린도후서 11장 22-28절에서 자신이 복음 전도와 교회를 위해서 얼마나 수고를 했는지 말했고, 고린도후서 12장 1-5절에서 삼층천에 올라갔다가 온 것을 말했습니다.
이처럼 바울이 어리석은 자기 자랑을 하게 된 것은 율법주의 거짓 사도들 때문이기도 했지만, 또한 거짓 사도들을 추종하는 고린도 교인들 때문이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아무리 율법주의 거짓 사도들이 자기들이 참된 사도라고 자랑을 하고 바울을 거짓 사도라고 모함을 했더라도, 고린도 교인들이 율법주의 거짓 사도들의 말을 받아들이지 않았더라면, 바울이 이처럼 어리석은 자기 자랑을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고린도 교인들이 율법주의 거짓 사도들을 추종했기 때문에 바울이 이처럼 어리석은 자기 자랑을 하게 되었다는 말씀입니다.
6. 그렇습니다.
저도 고대 법대 졸업했다는 것을 한 번도 자랑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김*환)이 거짓말이라고 중직자들에게 문자를 살포해서 할 수 없이 고대 법대 나온 것을 입증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35년간 고대 법대 나온 것을 한 번도 밝히지 않았으나, 이제는 할 수 없이 고대 법대 동창회에 가입하고, 동창들을 35년 만에 찾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동창들을 찾다 보니, 변호사들도 알게 되었고, 고등법원장도 알게 되었고, 고등검사장도 알게 되었고, 법무부 장관(이*남)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을 믿고, 괴로운 일이 많아도 겸손히 주를 섬겨 가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크게 사용하시고, 복된 삶을 살아가시기를 축원합니다!
2절. 내가 하나님의 열심으로 너희를 위하여 열심을 내노니 내가 너희를 정결한 처녀로 한 남편인 그리스도께 드리려고 중매함이로다. 그러나 나는
New American Standard Bible: For I am jealous for you with a godly jealousy; for I betrothed you to one husband, so that to Christ I might present you as a pure virgin.
내가 하나님의 열심으로 너희를 위하여 열심을 내노니
ζηλῶ γὰρ ὑμᾶς Θεοῦ ζήλῳ,
I am jealous for you of God with jealousy
직역하면 ‘왜냐하면 하나님의 열심으로 너희를 위하여 내가 열심을 내고 있고 있기 때문이다’는 뜻입니다.
‘열심을 내노니’(ζηλῶ)는 현재형으로서(I am jealous) 현재 열심을 내고 있는 것을 가리킵니다.
내가 너희를--한 남편인-- 중매함이로다.
ἡρμοσάμην γὰρ ὑμᾶς ἑνὶ ἀνδρὶ
I betrothed for you to one husband
직역하면 ‘왜냐하면 너희를 한 남편에게 내가 중매했기 때문이다’는 뜻입니다.
‘중매함이로다’(ἡρμοσάμην)는 부정과거로서(I betrothed) 과거에 확실히 중매한 사실을 가리킵니다.
정결한 처녀로-- 그리스도께 드리려고
παρθένον ἁγνὴν παραστῆσαι τῷ Χριστῷ·
virgin pure to present to the Christ
‘드리려고’(παραστῆσαι)는 부정과거 부정사형 동사로서(to present) 단호하고 확실하게 드리는 것을 가리킵니다.
<그러나 나는>
‘그러나 나는’이라는 부분이 헬라어 사본들과 영역본들에나 다른 한글역본들에는 다음절에 나와 있고(δὲ:but), 본 절에는 나와 있지 않는데, 웬일인지 한글 개역 개정에만 여기에 나와 있습니다.
<내가 하나님의 열심으로 너희를 위하여 열심을 내노니>
1. 엘리콧(Ellicott)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열심낸다’는 말은 갈라디아서 4장 17절(그들이 너희에게 대하여 열심 내는 것은 좋은 뜻이 아니요 오직 너희를 이간시켜 너희로 그들에게 대하여 열심을 내게 하려 함이라)에 나오는 낱말과 동일한 것입니다. (The word is used with the same sense as in the nearly contemporary passage of Galatians 4:17,)
‘중매하다’(ἁρμόζω)는 단어는 신약성경에서는 여기에만 나오는데, 칠십인역에는 잠언 19장 14절(집과 재물은 조상에게서 상속하거니와 슬기로운 아내는 여호와께로서 말미암느니라)에 이런 의미가 나옵니다. 엄격히 말해서 이 단어는 딸을 결혼시키는 아버지의 행동에 대해서 쓰였습니다. 바울은 이런 의미에서 고린도 교회의 아버지라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고전 4:15: 그리스도 안에서 일만 스승이 있으되 아버지는 많지 아니하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내가 복음으로써 너희를 낳았음이라) (The word is not found elsewhere in the New Testament. It appears in this sense in the LXX. version of Proverbs 19:14 : “A man’s wife is espoused to him from the Lord.” Strictly speaking, it is used of the act of the father who gives his daughter in marriage; and this, He claims the office as the “father” of the Corinthian Church (1Corinthians 4:15).
고린도 교회는 그리스도의 신부입니다. (마 22:2, 15:1, 요 3:29, 엡 5:25-32, 계 19:7-9). 이런 의미에서 바울은 자기가 낳은 고린도 교회가 그리스도의 신부로서 정결하게 되는 것을 위하여 열심낸다는 것입니다. 마치 아버지가 시집보낼 딸의 순결을 위해서 열심내는 것과 같습니다. 즉 고린도 교회는 아버지인 바울이 그리스도에게 정결한 처녀로 준비하도록 열심을 내고 있다는 뜻입니다. (The underlying idea of the comparison is that the Church at large, and every separate portion of it, is as the bride of Christ. On the earlier appearances of this thought, see Notes on Matthew 22:2; Matthew 25:1; John 3:29; and, for its more elaborated forms, on Ephesians 5:25-32; Revelation 19:7-9; Revelation 21:2; Revelation 21:9). What the Apostle now urges is that it is as natural for him to be jealous for the purity of the Church which owes its birth to him, as it is for a father to be jealous over the chastity of the daughter whom he has betrothed as to a kingly bridegroom.)
반스(Barnes)는 이렇게 말합니다: 바울이 열심내는 것(질투하는 것)은 고린도 교인들을 사랑하기 때문이고, 그래서 고린도 교인들이 율법주의 거짓 사도들의 유혹으로 인해 복음의 순수성에서 떠날까 두려워했기 때문입니다. (It was because he loved them, and because he feared that they were in danger of being seduced from the simplicity of the gospel.)
‘내가 열심낸다’(혹은 내가 질투한다)는 말은 ‘내가 열렬히 너를 사랑하고 있다. 나는 너에 대한 간절한 애착으로 가득차 있다’는 뜻입니다. 이 ‘열심낸다’((Ζηλῶ)는 헬라어는 ‘끓고 있다, 열정적이다, 열렬하다’는 뜻의 단어(ζέω)에서 나온 말로서 ‘열렬한 애정’을 가리킵니다. (The phrase "I am jealous" (Ζηλῶ Zēlō) means properly, I ardently love you; I am full of tender attachment to you. The word was usual among the Greeks to denote an ardent affection of any kind (from ζέω zeō, to boil, to be fervid or fervent).
이 말은 사랑하는 사람이 신뢰를 저버리고 떠날 때 느끼는 그런 마음입니다. 혹은 뜨거운 집착을 가리키기도 합니다. 그래서 여기서의 의미는 바울이 고린도교인들에 대해서 강한 애착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The word may denote the jealousy which is felt by an apprehension of departure from fidelity on the part of those whom we love; or it may denote a fervid and glowing attachment. The meaning here probably is, that Paul had a strong attachment to them. )
바울의 책임 아래 고린도 교인들은 마치 신부가 신랑을 위해서 준비하는 것처럼 그리스도를 위해서 순결을 지켜야 한다는 것입니다. 즉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이 그리스도의 순전한 신부로서 잘 자라서 장차 흠없는 그리스도의 신부로 드리기를 간절히 소원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교회와 그리스도와의 관계는 종종 결혼 관계로 묘사되고 있습니다. (엡 5:23-33. 계 9:7, 21:9) ( Under him they had been brought into a relation to the Saviour similar to that sustained by the bride to her husband; and he felt all the interest in them which naturally grew out of that fact and from a desire to present them blameless to the pure Redeemer. The relation of the Church to Christ is often represented by marriage; see Ephesians 5:23-33; Revelation 19:7; Revelation 21:9.)
재미슨과 파우젯과 브라운(Jamieson-Fausset-Brown)은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내가 열심낸다’는 말은 바울이 ‘신랑의 친구’로서(요 3:29) 신부된 고린도 교인들이 신랑 되신 그리스도에게서 떨어지지 않도록 열심을 낸다는 말로써 자기 자랑(자기 추천)을 정당화하는 말입니다. (2. For I am jealous—The justification of his self-commendations lies in his zealous care lest they should fall from Christ, to whom he, as "the friend of the Bridegroom" (Joh 3:29), has espoused them;)
즉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을 거짓 사도들로부터 돌아와서 그리스도께 인도하기 위해서, 바울은 그리스도의 사도로서 자랑하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자기 자랑을 한 어리석은 길을 택한 것입니다. ( in order to lead them back from the false apostles to Christ, he is obliged to boast as an apostle of Christ, in a way which, but for the motive, would be "folly.")
어떤 주석가들은 ‘열심’이란 단어를 바울에게 적용해서 바울이 남편이 아내를 위해서 질투하듯이, 바울은 자기를 그리스도와 동일시 해서, 고린도 교인들이 남편인 바울과 그리스도를 버리고, 거짓 사도들에게 간 것을 질투한다는 것입니다. (he ascribes to himself "jealousy," a feeling properly belonging to the husband; so entirely does he identify himself with Christ.)
‘정결한 처녀로 그리스도에게 드리려고 한다’는 것은 예수님이 재림하실 때, 하늘에서 교회와 그리스도가 혼인하는 것을 가리키는 말입니다(마 25:6, 계 19:7, 9). 즉 바울은 교회를 정결한 처녀로 그리스도께 드리고자 한다는 것입니다. (present you as a chaste virgin to Christ—at His coming, when the heavenly marriage shall take place (Mt 25:6; Re 19:7, 9). What Paul here says he desires to do, namely, "present" the Church as "a chaste virgin" to Christ,)
여기서 ‘정결한 처녀들’이란 그리스도인 각자를 가리키는 말이 아니고, 믿는 성도 전체가 집단적으로 신부가 된다는 뜻입니다. (He does not say "chaste virgins"; for not individual members, but the whole body of believers conjointly constitute the Bride.)
길(Gill)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바울은 자신이 혼인식에서 신랑의 친구 역할을 하는 사람이라고 했는데, 이것은 바울이 고린도 교인들을 그리스도에게 혼인시키는 일을 하는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he considered himself as a friend of the bridegroom, who had been concerned in the betrothing of them to Christ:)
바울이 고린도 교인들을 그리스도께 ‘중매한다’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온 교회의 남편이 되신다는 뜻입니다. (Christ stands in the relation of an husband to the church catholic and universal)
이 교회란 지역 교회들 전체뿐만 아니라, 과거와 현재와 미래에 있을 모든 교회를 가리킵니다. (that ever were, are, or shall be).
이처럼 그리스도께서 온 교회의 남편이라는 뜻은 고린도 교회의 남편이 되신다는 뜻이기도 하고, 또 각 개인 신자들의 남편이 되신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to this church at Corinth, and so he does to every individual believer:)
그리스도께서는 교회의 남편으로서 특별한 사랑을 베푸시는데, 고난과 시험과 버림당함 모든 어려움 중에서 동참하시고, 교인들을 먹이시고 사랑하시며, 영적인 양식과 옷으로 먹이시고 입히시고, 친밀하게 교제하시고, 모든 것으로 돌보십니다. 빚을 갚아주시고, 모든 필요를 채워주시고, 오른손으로 붙드시고, 모든 원수들로부터 보호하시고, 이 땅에서도 은혜를 베푸시며 장래에 영광을 주실 것입니다.(by sympathizing with them under all their afflictions, temptations, desertions, and exercises of every kind; by nourishing and cherishing them, which phrases are expressive of the spiritual food and clothing he provides for them, of that intimate communion he admits them to, and of that whole care he takes of them; by paying all their debts, supplying all their wants, supporting them with his right hand, protecting them against all their enemies, giving them grace here, and glory hereafter)
예수님께서는 하나님 아버지가 그랬던 것처럼 교인들을 사랑하셨으며, 자기에게 주신 배우자요 신부인 성도들을 사랑하셨습니다. ( he loved them as his Father did, and desired them for his spouse and bride, which was granted to him)
비록 사람이 아담 안에서 범죄하고 더러워졌을 때라도, 예수님은 자기 교회요 신부로서 그들을 위해서 자신을 내어주셔서 그들을 거룩하게 하시고 깨끗하게 하셨습니다. (though they fell in Adam, and became guilty and filthy, he gave himself for them as his church and bride, to sanctify and cleanse them)
이런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 이후에 성령님께서 복음 사역을 이루셔서, 각 사람의 영혼을 회심하게 하시고, 그들이 주님의 것이 되게 하시고, 예수님을 자신들의 남편으로 완전히 받아들이게 하신 것입니다. (In consequence of this, the Spirit of God attends the ministration of the Gospel, to the conversion of each of these souls, when they become willing to be the Lord's, and give their free and full consent to have him for their husband;)
바울 사도는 성령님의 손안에서 쓰임을 받아 성도들이 중생하게 하고, 그들이 바울 사도를 통해서 예수님을 믿게 되고, 그들의 영혼을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데 도구로 쓰임을 받았습니다. (he was a means, in the hands of the Spirit, of their regeneration, a minister by whom they believed, an instrument in directing their souls to Christ, )
바울이 고린도 교인들을 ‘정결한 처녀로 그리스도께 중매하려 한다’는 것은 고린도 교인들이 예수님께 대해서 일편단심 사랑을 갖게 하고, 예수님께 붙어있게 하고, 오직 예수님과만 관계하게 하고, 믿음의 순수성을 지키게 하고, 신실한 마음으로 예배하고, 생활과 언어에서 거룩한 생활을 하게 하려는 것을 말합니다. (that is, single in their love to, him, strictly adhering to him, and him only, as standing in such a relation to them; pure in the principles of faith, sincere and upright in their worship, and holy in their lives and conversations;)
그래서 바울은 최후의 시간에 고린도 교인들을 그리스도에게 드리려는 것이고, 그 때 바울의 노력이 주님 앞에서 헛되지 않게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that he might thus present them to Christ at the great day; whereby it would appear, that his labour was not in vain in the Lord:)
그래서 고린도 교인들이 거짓 사도들로 인해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과 믿음에서 조금도 빗나가게 하지 않게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lest the false apostles should draw them aside in any degree from their love to Christ, and faith in him.)
2. 여기서 <하나님의 열심>이라는 말은 민수기 25장 11절에서 비롯된 말씀입니다.
즉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압 여자들과 음행할 때, 비느하스가 하나님의 질투심을 가지고 음행 중인 이스라엘 족장 시므리와 고스비를 창으로 찔러 죽인 사건에서 비롯된 말씀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질투>라는 말이나 <하나님의 열심>이라는 단어가 모두 <젤로>(ζηλῶ)라는 단어로 동일합니다.
좀 더 자세히 말씀드리자면, 발람 선지자의 악한 꾀로 말미암아 모압왕 발락이 싯딤 광야에서 몰렉 우상에게 제사를 드리고, 이스라엘 자손들을 초청했습니다.
그런데, 모압 나라의 우상 제사는 단순히 우상에게 제사하고, 고기를 먹을 뿐만 아니라 예쁜 여자 사제들이 춤을 추면서, 종교 순서로 음행을 했습니다.
그래서 모압 나라가 이스라엘 지도자들을 초청해서 술과 고기를 먹게 하고, 또한 모압 여자들과 음행을 하게 했습니다.
그런데 이런 초청에 이스라엘 지도자들이 모압 우상 제사에 가서 술과 고기를 먹고, 모압 여자들과 음행을 했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지도자들 중에 ‘시므리’라는 족장이 모압 여인 고스비와 함께 이스라엘 진영에 들어와서 장막에 들어가 음행을 시작했습니다.
그 광경을 목격한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두 모압 나라의 음행과 우상숭배에 마음이 물들게 되었습니다.
바로 그때 대제사장 엘르아살의 아들인 비느하스가 창을 들고, 시므리의 장막에 들어가서 음행하고 있는 남녀를 창으로 단번에 찔러 죽였습니다.
그러자 음행으로 시작되었던 염병이 그쳤습니다.
민수기 25:7-8. 제사장 아론의 손자 엘르아살의 아들 비느하스가 보고 회중 가운데에서 일어나 손에 창을 들고 그 이스라엘 남자를 따라 그의 막사에 들어가 이스라엘 남자와 그 여인의 배를 꿰뚫어서 두 사람을 죽이니 염병이 이스라엘 자손에게서 그쳤더라.
이때 하나님께서 비느하스를 칭찬하시기를 <비느하스가 나의 질투심으로 질투하여 내 노를 돌이켰다>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비느하스와 후손들에게 영원한 제사장의 직분을 주시기로 언약하셨습니다.
민수기 25:11-13. 제사장 아론의 손자 엘르아살의 아들 비느하스가 내 질투심으로 질투하여 이스라엘 자손 중에서 내 노를 돌이켜서 내 질투심으로 그들을 소멸하지 않게 하였도다. 그러므로 말하라. 내가 그에게 내 평화의 언약을 주리니 그와 그의 후손에게 영원한 제사장 직분의 언약이라...그가 그의 하나님을 위하여 질투하여 이스라엘 자손을 속죄하였음이니라.
이처럼 하나님의 ‘질투’와 하나님의 ‘열심’은 같은 뜻입니다.
3. 그런데 비느하스와 같은 열심과 질투심이 바울 사도에게도 있었다는 것입니다.
바울이 가진 하나님의 열심이란 고린도 교인들을 하나님께 중매하고자 하는 열심이었습니다.
즉 율법주의 거짓 사도들과 율법주의 교사들이 고린도 교인들을 하나님을 떠나 율법주의 이단으로 몰고 가는데, 바울 사도는 하나님의 열심과 질투심을 가지고, 고린도 교인들이 다시 하나님을 사랑하도록 중매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여기에는 은연중 고스비와 같은 거짓 사도들을 척결해야 한다는 뜻도 내표되어 있습니다.
4. 이처럼 성도들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을 남편으로 모시고 살아야 합니다.
그래서 구약성경에도 <호세아> 같은 곳에는 하나님과 성도들을 결혼 관계로 표현했습니다.
호세아 2:16.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그날에 네가 나를 내 남편이라 일컫고 다시는 내 바알이라 일컫지 아니하리라.
호세아 2:19-20. 내가 네게 장가들어 영원히 살되 공의와 정의와 은총과 긍휼히 여김으로 네게 장가들며 진실함으로 네게 장가들리니 네가 여호와를 알리라.
호세아 3:1.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이스라엘 자손이 다른 신을 섬기고 건포도 과자를 즐길지라도 여호와가 그들을 사랑하나니 너는 또 가서 타인의 사랑을 받아 음녀가 된 그 여자를 사랑하라.
5. 그런데 바울이나 비느하스 같은 사람이 하나님께 대한 열심과 질투심을 갖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를 깊이 체험한 사람이 갖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를 깊이 체험하지 못한 사람들은 하나님께 대한 열심이 없습니다.
그래서 누가복음 7장 47절에는 많이 용서받은 사람이 많이 사랑한다고 했습니다.
누가복음 7:47. 이러므로 내가 네게 말하노니 그의 많은 죄가 사하여졌도다. 이는 그의 사랑함이 많음이라 사함을 받은 일이 적은 자는 적게 사랑하느니라.
그런데 바울은 믿기 전에 예수님을 핍박하고 성도들을 박해했기 때문에, 그만큼 용서받은 후에는 더욱 주님을 사랑하고 헌신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주님의 은혜를 깊이 체험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온전히 주님께 헌신하고, 크게 쓰임 받으시기를 축원합니다!
<정결한 처녀로 중매함이로다>
1. 여기서 <중매했다>(ἡρμοσάμην)는 것은 <약혼시켰다>(I betrothed)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나라에서 <약혼>이란 법적으로 부부와 같은 효력이 있습니다.
그러나 실제로 동거만 하지 않는 상태를 말합니다.
그래서 요셉과 마리아가 혼인하고 동거하기 전에 성령으로 아기 예수님을 잉태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아기 예수님은 법적으로 요셉의 아들이 되지만, 실제적으로는 하나님의 아들이셨습니다.
그런데 정혼 기간에 여자가 다른 남자와 성적 관계를 가지면 그 여자는 간음한 것이 됩니다.
그래서 정혼한 여자가 임신을 하면 돌에 맞아 죽게 되어 있습니다.
이처럼 정혼한 처녀는 순결을 지켜야 합니다.
이것은 우리 성도들이 예수님과 혼인 관계로 부부가 되었지만, 이 세상에서는 정결한 처녀로 순결을 지켜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예수님이 재림하시면, 다시 혼인식을 하고 완전한 부부 생활을 하는 것입니다.
물론 부부 생활이란 천국 생활 하는 것을 가리킵니다.
즉 천국에서는 장가가고 시집가는 것이 없기 때문에(마 22:30), 결혼과 같은 영적인 완전한 연합을 이루어 생활하는 것을 가리킵니다.
2. 그런데 바울 사도는 고린도 교인들을 예수님의 신부로 중매했습니다.
여기서 바울이 고린도 교인들을 예수님께 중매했다는 것은 바울이 복음 전도로 고린도인들을 예수님 믿게 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고린도 교인들은 그리스도의 정결한 신부로 신랑 되신 예수님을 기다리다가, 재림하시는 예수님을 맞아 혼인 잔치에 들어가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에베소서 5장에는 예수님과 성도들의 관계를 남편과 아내와 관계로 묘사했습니다.
에베소서 5:28-30. 이와 같이 남편들도 자기 아내 사랑하기를 제 몸같이 할지니 자기 아내를 사랑하는 자는 자기를 사랑하는 것이라. 누구든지 언제든지 제 육체를 미워하지 않고 오직 양육하여 보호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보양함과 같이 하나니 우리는 그 몸의 지체임이니라.
4. 그리고 중매자가 중매한 부부가 결혼 후에도 잘살고 있는가 늘 관심을 가지고 돌보듯이, 바울 사도는 그리스도께 중매한 고린도 교인들이 순결을 유지하면서 그리스도께 충성을 하는지 늘 관심을 가지고 지도해왔습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들은 좋은 중매쟁이로서 불신자들을 전도해서 그리스도의 신부가 되게 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사랑과 칭찬을 받고, 이 세상에서 복을 받으시고, 내세에서 큰 상 받으시기를 축원합니다!
3절. 뱀이 그 간계로 하와를 미혹한 것 같이 너희 마음이 그리스도를 향하는 진실함과 깨끗함에서 떠나 부패할까 두려워하노라.
New American Standard Bible: But I am afraid that, as the serpent deceived Eve by his craftiness, your minds will be led astray from the simplicity and purity of devotion to Christ.
뱀이 그 간계로 하와를 미혹한 것 같이-- 두려워하노라
φοβοῦμαι δὲ, μή πως, ὡς ὁ ὄφις ἐξηπάτησεν Εὕαν ἐν τῇ πανουργίᾳ αὐτοῦ,
I am afraid but, not how, as the serpent deceived Eve in the craftiness of him
직역하면 ‘그러나 뱀이 그의 간계로 하와를 미혹한 것 같이 (너희 마음이---부패할까) 내가 두려워하노라’란 뜻입니다.
한글 새번역에는 “그러나 내가 두려워하는 것은, 뱀이 그 간사한 꾀로 하와를 속인 것과 같이, 여러분의 생각이 부패해서, 여러분이 그리스도께 대한 진실함[과 순결함]을 저버리게 되지나 않을까 하는 것입니다.”라고 번역되어 있습니다.
‘속인’(ἐξηπάτησεν)은 부정과거로서(deceived) 과거에 확실히 속인 사실을 가리킵니다.
‘두려워하노라’(φοβοῦμαι)는 현재형으로서(I am afraid) 현재 두려워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너희 마음이 그리스도를 향하는 진실함과 깨끗함에서 떠나 부패할까
φθαρῇ τὰ νοήματα ὑμῶν ἀπὸ τῆς ἁπλότητος καὶ τῆς ἁγνότητος τῆς εἰς Χριστόν.
might be corrupted the minds of you from the simplicity and the purity into Christ
‘부패할까’(φθαρῇ)는 부정과거 가정법 수동태로서(might be corrupted) 확 부패되어지는 것을 가정한 말입니다.
1. 바울 사도는 고린도 교인들의 마음이 율법주의 거짓 사도들의 유혹 때문에 그리스도를 떠나 부패해질 것을 걱정했습니다.
그렇습니다.
마치 부모가 자녀들이 불량 학생들의 유혹을 받아서 타락하는 것을 염려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고린도 교인들이 율법주의 거짓 사도들의 유혹을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떠나 부패하는 것을 염려한 것입니다.
2. 그러면서 바울은 알기 쉽게 뱀이 하와를 유혹해서 타락시킨 것과 같이 거짓 사도들이 고린도 교인들을 유혹해서 영적인 남편인 그리스도에게서 떠나 타락하는 것을 염려한 것입니다.
요즘에도 간혹 이단에 속한 사람들이 선량한 교인들을 유혹해서 믿음을 타락시키고 가정을 파괴하는 것을 봅니다.
이와같이 바울은 율법주의 거짓 사도들이 고린도 교인들을 유혹해서 고린도 교인들이 영적인 남편 되신 그리스도를 떠나 타락하는 것을 두려워한 것입니다.
<뱀이 그 간계로 하와를 미혹한 것 같이>
1. 창세기 3장 13절에는 뱀이 하와를 미혹한 장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거기서 뱀은 사단의 대리인이고 사단의 사자였습니다.
그런데 바울 당시에는 이 사단의 대리인이요 사단의 사자가 율법주의 거짓 사도들로 나타난 것입니다.
반면에 바울은 하나님의 사자요 그리스도의 대리인이었습니다.
그리고 하와의 남편이 아담이었던 것처럼, 고린도 교인들의 영적 남편은 그리스도 예수님이었습니다.
2.<미혹한다>(ἐξαπατάω)는 단어는 완전히 속이는 것(deceive thoroughly)을 가리킵니다.
이것은 거짓 사도들이 율법주의 교훈으로 고린도 교인들의 마음을 그리스도에게서 완전히 떠나게 하는 것을 가리킵니다.
그러나 바울은 하나님의 말씀으로써 고린도 교인들의 마음을 그리스도께로 향하게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어떤 사람도 성도들의 마음을 하나님께로 향하게 해야 하지, 인간에게로 향하게 하면 안 됩니다.
간혹 어떤 부흥사나 교회 지도자가 인기 전술을 써서 성도들의 마음을 자기에게 향하게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나 참된 주의 종은 성도들의 마음을 그리스도에게 향하게 만듭니다.
<너희 마음이 그리스도를 향하는 진실함과 깨끗함에서 떠나 부패할까 두려워하노라>
1. 바울 사도는 고린도 교인들의 마음이 그리스도를 향한 진실함과 깨끗함을 잃어버리고 타락할까 봐 걱정이었습니다.
왜냐하면, 바울이 고린도 교인들을 전도해서 고린도 교인들이 구원의 은혜 속에서 주님을 사랑하며 살았는데, 이제 율법주의 거짓 사도들의 유혹으로 고린도 교인들이 복음 신앙을 떠나 율법주의로 타락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만일 이처럼 고린도 교인들이 율법주의로 타락하면, 구원의 은혜를 잃어버리고, 바리새인들처럼 자기 의를 자랑하고, 교만하고, 남을 비판하고 정죄하는 악한 바리새인들이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2. 여기서 <그리스도를 향한 진실함과 깨끗함>이란 결혼한 여인이 남편을 향한 진실과 순결을 지키듯이, 성도들이 영적인 남편이 되시는 예수님께 대한 진실한 신앙과 영적 순결함을 지켜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렇습니다.
결혼한 여인은 남편에 대해서 진실함과 순결을 지켜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 여인이 남편에 대한 진실을 잃고, 다른 남자를 사랑하면서 남편에 대해서는 거짓으로 숨겨서는 안 됩니다.
그리고 여인이 남편에 대해서 순결을 지켜야지 더러워져서는 안 됩니다.
이처럼 순결을 잃으면 아무리 진리의 말씀을 들어도 은혜가 되지 않습니다.
디모데후서 3:6-7. 저희 중에 남의 집에 가만히 들어가 어리석은 여자를 유인하는 자들이 있으니 그 여자는 죄를 중히 지고 여러 가지 욕심에 끌린 바 되어 항상 배우나 마침내 진리의 지식에 이를 수 없느니라.
즉 성도가 율법주의와 같은 이단 사상을 갖게 되면, 아무리 복음적인 은혜로운 설교를 들어도 감동을 받지 못하고 은혜를 얻지 못합니다.
3. 그런데 육신적으로 아내가 남편에 대해서 진실과 순결을 지켜야 하듯이, 영적으로 성도들은 영적 남편 되시는 예수님께 대해서 진실함과 순결을 지켜야 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는 것이 영적 진실과 순결을 지키는 것입니까.
네, 그것은 성령님을 따르고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면서, 이단을 따르지 않는 것입니다.
그런데 고린도 교인들은 바울 사도를 통해서 주시는 복음 진리를 따르지 않고, 거짓 사도들의 율법주의 이단을 따랐습니다.
이것은 영적으로 성령님을 버리고, 악한 마귀를 따르는 간음과 같습니다.
4. 그래서 구약성경에서도 성도들이 하나님을 버리고 우상 숭배하는 것을 영적 간음이라고 했습니다.
즉 북이스라엘 백성이 영적인 간음인 우상숭배를 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북이스라엘 백성을 앗수르에 포로 되게 하셨습니다.
역대상 5:25-26. 저희가 그 열조의 하나님께 범죄하여 하나님이 저희 앞에서 멸하신 그 땅 백성의 신들을 간음하듯 섬긴지라. 그러므로 이스라엘 하나님이 앗수르 왕 불의 마음을 일으키시며 앗수르 왕 디글랏 빌레셀의 마음을 일으키시매 곧 르우벤과 갓과 므낫세 반 지파를 사로잡아 할라와 하볼과 하라와 고산 하숫가에 옮긴지라. 저희가 오늘날까지 거기 있으니라.
이처럼 북왕국이 우상 숭배하여 앗수르에 포로 되어 간 것을 보고도, 남왕국이 더욱 우상 숭배한다고 하나님께서 선지자들을 통해서 책망하셨습니다.
에스겔 23:11. 그 아우 오홀리바가 이것을 보고도 그 형보다 음욕을 더하며 그 형의 간음함보다 그 간음이 더 심하므로 그 형보다 더 부패하여졌느니라.
5. 이렇게 성도들이 우상 숭배하여 영적 간음을 행한 것 같이, 고린도 교인들은 바울을 통해 주신 복음과 하나님의 말씀을 버리고, 거짓 사도들을 따라 율법주의로 가는 영적 간음을 행한다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의 마음이 그리스도를 향한 진실과 순결에서 떠나는 것을 염려한다는 것입니다.
6. 이처럼 영적인 진실과 순결을 잃어버리면, 부패하고 죽게 됩니다.
즉 우리의 영혼은 성령의 감동과 말씀의 은혜를 통해서 생명을 얻으며 살아가고 있는데, 이단 사설을 받아들이면, 귀신에게 사로잡혀서 이단 교주에게 종노릇하고, 타락하고 부패하게 됩니다.
이처럼 미혹의 영에 사로잡히고 잘못된 사상에 사로잡혀서, 모든 도덕적인 생활도 부패해지고, 가정생활과 직장생활도 부패해집니다.
결국 망하고 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단에 빠진 사람들은 미혹의 영에서 쉽게 벗어나지 못하고, 종노릇하다가 몸과 물질을 잃고 가정을 잃고 패망하게 됩니다.
7. 특히 교회는 진리의 기둥과 터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의 거룩하심이 늘 있어야 참된 교회가 됩니다.
디모데전서 3:15. 만일 내가 지체하면 너로 하나님의 집에서 어떻게 행하여야 할 것을 알게 하려 함이니 이 집은 살아 계신 하나님의 교회요 진리의 기둥과 터이니라.
그런데 고린도 교회가 하나님의 말씀을 떠나고, 성령의 인도를 저버리면, 타락하고 세속적인 집단이 되고 맙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늘 기도하여 성령 충만한 인도를 받으시고, 늘 하나님의 말씀의 은혜 받아서 그리스도를 향한 진실함과 깨끗함을 잘 간직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주님 재림하실 때 반가운 얼굴로 맞이하시기를 축원합니다!
4절. 만일 누가 가서 우리가 전파하지 아니한 다른 예수를 전파하거나 혹은 너희가 받지 아니한 다른 영을 받게 하거나 혹은 너희가 받지 아니한 다른 복음을 받게 할 때에는 너희가 잘 용납하는구나.
New American Standard Bible: For if one comes and preaches another Jesus whom we have not preached, or you receive a different spirit which you have not received, or a different gospel which you have not accepted, you bear this beautifully.
만일 누가 가서 우리가 전파하지 아니한 다른 예수를 전파하거나
εἰ μὲν γὰρ ὁ ἐρχόμενος, ἄλλον Ἰησοῦν κηρύσσει, ὃν οὐκ ἐκηρύξαμεν,
if indeed for the (one) coming, another Jesus proclaims, whom not we did proclaim
직역하면 ‘만일 그가 가서 우리가 전파하지 아니한 다른 예수를 전파하면’이란 뜻입니다.
‘가서’(ἐρχόμενος)는 현재분사로서(coming) 현재 가고 있는 것을 가리키고, ‘전파하거나’(κηρύσσει)는 현재형으로서(proclaims) 현재 전파하는 것을 가리킵니다.
‘우리가 전파하지 아니한’에서 동사(ἐκηρύξαμεν)는 부정과거로서(we did proclaim) 과거에 우리가 확실히 (예수님을) 전파한 사실을 가리킵니다.
혹은 너희가 받지 아니한 다른 영을 받게 하거나
ἢ πνεῦμα ἕτερον λαμβάνετε ὃ οὐκ ἐλάβετε,
or spirit different you receive which not you did receive
직역하면 ‘혹은 너희가 받지 아니한 다른 영을 너희가 받거나’라는 뜻입니다.
‘받지 아니한’에서 동사(ἐλάβετε)는 부정과거로서(you did receive) 과거에 확실히 받지 않은 사실을 가리킵니다.
‘받게 하거나’(λαμβάνετε)는 현재형으로서(you receive) 현재 받고 있는 사실을 가리키는데, 의미상으로는 한글 번역이 좋습니다.
혹은 너희가 받지 아니한 다른 복음을 받게 할 때에는
ἢ εὐαγγέλιον ἕτερον ὃ οὐκ ἐδέξασθε,
or gospel different which not you did accept
직역하면 ‘너희가 받지 아니한 다른 복음을’이고 ‘받게 할 때에는’은 번역상 첨가한 것입니다.
‘너희가 받지 아니한’에서 동사(ἐδέξασθε)는 부정과거로서(you did accept) 과거에 확실히 받지 아니한 사실을 가리킵니다.
너희가 잘 용납하는구나.
καλῶς ἀνέχεσθε.
well you bear with
동사(ἀνέχεσθε)는 현재형으로서(you bear with) 현재 잘 용납하고 있는 상태를 가리킵니다.
<만일 누가 가서 우리가 전파하지 아니한 다른 예수를 전파하거나>
엘리콧(Ellicott)은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고린도 교회에 나타난 율법주의 거짓 교사들은 갈라디아 지방에 나타났던 거짓 교사들(갈 1:7-8)과 동일했습니다. 거짓 교사들이 전하는 예수는 바울이 전하는 예수가 아니었습니다. 그 거짓 교사들은 예수님을 유대 왕국의 우두머리라고 생각해서, 예수님을 믿으려면 할례를 받아야 하고, 모든 율법들을 지켜야 한다고 했습니다. (The false teachers in Galatia and those at Corinth were doing the same thing, Galatians 1:7-8. their Jesus was not his Jesus. they spoke of Him as the head of a Jewish kingdom, requiring circumcision and all the ordinances of the Law as a condition of admission to it.)
그들이 전하는 영은 악령의 영감을 받아서 말하는 영인데, 그들은 예수를 주저할 자라고 선언했습니다. 고전 12:3. (under the inspiration of an evil spirit. “Anathema to Jesus!” (See Note on 1Corinthians 12:3.)
‘너희가 받지 아니한 다른 복음’이란 바울에게서 받은 복음과는 다른 복음을 가리킵니다. 바울이 전한 복음은 믿음으로 죄 용서를 받고, 그 믿음이 사랑으로 역사하는 것을 가리킵니다. 그러나 거짓 교사들이 전하는 다른 복음은 행위들과 의식적이고 도덕적인 규범들이라는 바리새적인 가르침에 근거한 것이었습니다. ( different from that which you did accept from me. His gospel, he seems to say, was one of pardon through faith working by love: theirs was based on the old Pharisaic lines of works, ritual, ceremonial and moral precepts, standing in their teaching on the same footing.)
‘잘도 용납하는구나’라는 말씀은 비꼬는 말인데, 고린도 교인들이 거짓 교사들을 잘도 용납한다고 비꼬는 말입니다. 고린도 교인들은 거짓 복음을 가르치는 거짓 교사들을 관용했던 것입니다. 우리 예수님도 이런 비꼬는 말씀을 하신 적이 있습니다. 막 7:9: 너희가 너희 전통을 지키려고 하나님의 계명을 잘 저버리는도다. (the adverb being emphatic, and intensely ironical, nobly would ye bear with him. He means, of course, that they have done much more than tolerate the preachers of the false gospel, and have paid them an extravagant deference. On a like use of irony in our Lord’s teaching, see Note on Mark 7:9.)
반스(barnes)는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너희가 잘 용납하는구나’라는 말은 학자에 따라서 다르게 설명합니다. 한 편은 ‘만일 거짓 교사가 내가 너희에게 전한 예수님보다 더 좋은 예수를 전하고, 거룩하게 하고 구원해주는 더 좋은 영을 추천한다면, 너희들이 그의 교훈들을 용납하는 것이 적절할 것이다’라는 뜻이고, 다른 하나의 해석은 ‘만일 너희 중에 어떤 사람이 거짓 예수를 선포하고, 거짓 영을 선포하고, 거짓 교리를 선포한다면, 그래도 너희가 아무런 곤란을 느끼지 않고, 그를 용납한다면, 너희가 나를 참을 수 없게 하는 것이다’라 해석입니다. ( "If the false teacher could recommend a better Saviour than I have done, or a Spirit better able to sanctify and save, then there would be a propriety in your receiving him and tolerating his doctrines." If the former, then the sense will be, "You cannot well bear with me; but if a man comes among you preaching a false Saviour, and a false Spirit, and a false doctrine. then you bear with him without any difficulty.")
‘다른 예수와 다른 복음을 전해도’란 말씀은 만일 그들이 바울이 가르친 진리들에게서 떠나면 그것은 더 나빠지는 것이란 뜻이고, 바울이 전파한 예수님은 완전하고, 구원하시는 분이시라는 것입니다. 바울이 전파한 영은 완전하고, 사람을 거룩하게 만드시는 분이라는 것입니다. 바울이 전한 복음은 완전한 것이고, 더 이상 진보된 복음이란 있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것들을 변질시키면 아주 나쁜 것이 됩니다. 거짓 교사들은 바울의 가르침을 변질시켰고, 그들의 마음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순수함에서 떠나 부패했습니다. 그러므로 중요한 것은 바울이 전한 복음은 완전한 것이고, 이것을 변질시키는 것은 아주 나쁜 것이 된다는 뜻입니다. 바울이 전한 복음 이외에 추천할 만한 더 좋은 복음은 없습니다. 여기서 ‘누가’ (ὁ ἐρχόμενος: the one coming)라고 단수형으로 말씀한 것은 틀림없이 고린도 교회에 있는 거짓 교사를 가리킵니다. (If therefore they preached any other Saviour or any other gospel; if they departed from the truths which he had taught them, it would be for the worse. It could not be otherwise. The Saviour whom he preached was perfect, and was able to save. The Spirit which he preached was perfect, and able to sanctify. The gospel which he preached was perfect, and there was no hope that it could be improved. Any change must be for the worse; and as the false teachers varied from his instructions, there was every reason to apprehend that their minds would be corrupted from the simplicity that was in Christ. The principal idea, therefore, is, that the gospel which he preached was as perfect as it could be, and that any change would be for the worse. No doctrine which others brought could be recommended because it was better. By the phrase "he that cometh" is meant doubtless the false teacher in Corinth.)
‘다른 예수’란 예수님보다 더 사랑이 많고, 더 구원하실 수 있는 예수를 가정한 말입니다. 만일 여러분이 더 신뢰할 수 있는 다른 예수가 있다면, 나는 너희가 그를 잘 받아들였다고 인정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주 예수님은 인격과 행사가 완벽하신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그보다 더 뛰어난 다른 예수는 없습니다. 그 외에는 아무도 필요 없습니다.( one who is more worthy of your love and more able to save. If he that comes among you and claims your affections can point out another Christ who is more worthy of your confidence, then I admit that you do well to receive him. It is implied here that this could not be done. The Lord Jesus in his character and work is perfect. No Saviour superior to him has been provided; none but he is necessary.)
‘다른 영을 받게 하거나’란 ‘만일 그들이 너희에게 또 다른 성화의 영이나 다른 위로자를 전파한다면’, 혹은 ‘만일 그들의 사역으로 인해 너희가 더 높은 기적들을 행하는 성령의 능력의 증거들을 받거나, 방언의 은사나 죄인들이 새롭게 되는 것이나 너희 마음을 위로해주는 증거들을 받는다면’이란 뜻입니다. 바울은 바로 그러한 성령의 존재와 역사를 이전에 선포했다는 뜻입니다. 바울이 한 전도는 이미 성령의 임재와 능력을 분명히 입증하는 것들이었다는 것입니다. 거짓 사도들은 더 좋은 성화의 영과 더 좋은 구원의 영을 나타낼 수 없습니다. 아무도 바울이 전도할 때 받은 성령의 능력보다 더 강한 능력을 갖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고린도 교인들은 자기들이 받았던 순수한 교리에서 떠나 부패했을 뿐 다른 이유가 없습니다. (Or if ye receive another spirit ... - If they can preach to you another Sanctifier and Comforter; or if under their ministry you have received higher proofs of the power of the Spirit in performing miracles; in the gift of tongues; in renewing sinners and in comforting your hearts. The idea is, that Paul had proclaimed the existence and agency of the same Holy Spirit which they did; that his preaching had been attended with as striking proofs of the presence and power of that Spirit; They could reveal no spirit better able to sanctify and save; none who had more power than the Holy Spirit which they had received under the preaching of Paul, and there was therefore no reason why they should be "corrupted" or seduced from the simple doctrines which they had received and follow others.)
재미슨과 파우젯과 브라운(Jamieson-Fausset-Brown)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다른 복음은 없다. 내가 처음에 너희에게 전한 복음 뿐이다. 거짓 교사들이 나를 대체하려고 시도한 것이다. ( there can be no new Gospel; there is but the one which I first preached; that the false teachers should attempt to supersede me.)
‘오는 자’( ὁ ἐρχόμενος: the One coming: 한글 번역은 ‘누가 와서’)란 거짓 교사들이 주장하는 ‘높은 칭호’였습니다. 이 거짓 교사들은 예수님이 자신에게 붙이신 특별한 호칭을 도용한 것입니다. 마 11:3. ‘오실 그이’(ὁ ἐρχόμενος: the One coming)가 당신이오니이까. 히 10:37. 잠시 잠깐 후면 ‘오실 이’(ὁ ἐρχόμενος: the One coming)가 오시리니. 그러므로 ‘오실 그이’란 호칭은 아마 그리스도파(고후 10:7, 고전 1:12)의 우두머리였을 것입니다. 여기서 그의 호칭이 나왔을 것입니다. (he that cometh—the high-sounding title assumed by the false teachers, who arrogated Christ's own peculiar title (Greek, Mt 11:3, and Heb 10:37), "He that is coming." Perhaps he was leader of the party which assumed peculiarly to be "Christ's" (2Co 10:7; 1Co 1:12); hence his assumption of the title.)
‘다른 예수, 다른 영’에서 ‘다른’(ἄλλος)이란 단어는 같은 종류 중에서 다른 것을 의미하며, 같은 종류지만 다른 것을 의미합니다. (another … another—Greek, "another Jesus … a different Spirit … a different Gospel." Another implies a distinct individual of the same kind; different implies one quite distinct in kind.).
매튜 폴(Matthew Poole)은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너희가 잘 용납하는구나’. 거짓 교사들을 계속 용납한 사람들이 고린도 교회에 있었던 것은 분명합니다. 그들은 바울이 전파한 교리와 다른 교리를 가르쳤습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고린도 교인들이 순수한 복음에서 떠나 부패할까 두려워했습니다. 여기 동사는 가정법 동사보다는 직설법 동사입니다. 즉 그들이 하려는 것보다는 이미 했다는 뜻입니다. 바울 사도는 고린도 교인들이 타락하지 않도록 질투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요한복음 5장 43절에서 하나님의 이름으로 오는 자들을 받아들이지 않고, 하나님께로부터 오지 않고 자기 이름으로 오는 자들을 잘 용납한다고 책망하셨습니다. ( you have well borne, and so are plainly a reflection upon some in this church, who had patiently endured false teachers, who had preached other doctrine than what Paul had preached. And this the apostle giveth as a reason of his fear, lest they should be corrupted and drawn away from the simplicity of the gospel. no pretence to interpret the verb as in the potential mood, it is manifestly the indicative mood; not what they might do, but what they had done; which made the apostle jealous of them, lest they should be perverted. And our Saviour, John 5:43, hath taught us, that those who with the most difficulty receive those who come to them in God’s name, are always most easy to receive those who come in their own name, without any due authority or commission from God.)
길(Gill)은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누가 가서’란 바울 사도가 소식을 통해서 알고 있는 어떤 특정한 사람을 가리키는데, 이 사람은 유대에서 고린도로 온 사람인데, 참된 사도라는 미명하에 온 사람이거나, 또는 어떤 거짓 사도들의 하나를 가리키는데, 그는 그리스도께서 보낸 자도 아니요, 어떤 교회에서 보낸 사람도 아니고, 자발적으로 온 사람이었습니다. (either some particular man, the apostle might have had some information of, who came from Judea to Corinth, under the character of a true apostle; or anyone of the false apostles whatever, who came of their own accord, and was never sent by Christ, or by any of his churches:)
이 거짓 사도가 ‘다른 예수’를 전파했다는 것은 그가 사도들이 전파한 구주와 그리스도와 어떤 다른 구주를 제시했다는 뜻입니다( he proposes and recommends in his ministry, a better Saviour and Redeemer than had been preached by the apostles)
‘다른 영’이란 사도들이 복음 전파를 통해서 받게 한 하나님의 성령과 다른 영이란 뜻입니다. (a better spirit than the Spirit of God, which the had received through the preaching of the Gospel by the apostles;) 그러나 이것은 거꾸로 두렵게 하고 종살이 시키는 악령임에 틀림없습니다. (must be the reverse of this, even a spirit of bondage again to fear)
‘다른 복음’이란 사도들이 전한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에 대한 복음보다, 더 건전해 보이는 교리들과 더 안전해 보이는 진리들과 더 뛰어나 보이는 약속들과 더 좋은 복음인 것같이 조작한 가짜 복음을 가리킵니다. (which contained more wholesome doctrines, more comfortable truths, more excellent promises, better tidings of good things,).
그러나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을 통해서 평화와 죄 용서와 칭의와 영생과 구원을 주는 참된 복음에 비해 다른 복음은 거짓되고 인위적인 것이었습니다. (those of peace, pardon, righteousness, life, and salvation, by a crucified Jesus;)
‘잘 용납하는구나’란 말씀은 고린도 교인들이 거짓 사도에게 속아서 참 사도들보다도 거짓 사도가 가르친 교리와 그의 권위를 더 좋아한다는 뜻입니다. (receive his doctrine, submit to his authority, and prefer him to the apostles:)
그러나 나사렛 예수보다 더 나은 다른 구주는 없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구원받은 교리 외에 다른 교리는 없고, 바울 사도를 통해서 그들이 받은 은혜와 진리의 영 외에 다른 영도 없고, 그들이 들은 복음 외에 더 나은 복음이 없습니다. (but since another and a better Saviour than Jesus of Nazareth could not be proposed, or the doctrine of salvation by him be preached in another and better manner than it was; nor had they received, nor could they receive, another and a better spirit, than the spirit of grace and truth, which was communicated to them, through the apostle's ministry; nor was a better and a more excellent Gospel preached to them, than what they had heard;)
그러므로 그들은 마땅히 그런 거짓 사도를 용인하거나 용납해서는 안 되었습니다. 이처럼 고린도 교인들이 그 거짓 사도를 용납한 것이, 바울의 눈물과 질투의 원인이 되었습니다. ( therefore they ought not to connive at, indulge and tolerate, such a false apostle among them, which it seems they did; and was the reason of the apostle's fears and jealousies, before expressed:)
2. 바울 사도는 고린도 교인들을 그리스도 예수님께 정결한 처녀로 중매하려고 하는데, 막상 고린도 교인들은 다른 예수, 다른 영, 다른 복음을 잘 받아들인다는 책망의 말씀입니다.
그렇습니다.
부모님은 자식들이 좋은 음식만 먹게 하고 싶은데, 막상 자식들은 밖에 나가서 불량 식품을 사 먹고 배탈이 난다는 것입니다.
3. 실제로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에게 구원의 주님 <예수님>을 믿도록 소개했습니다.
그러나 율법주의 거짓 사도들은 예수님이 아닌 율법주의 유대교를 전해도, 고린도 교인들은 잘 용납한다고 책망한 것입니다.
4. 그리고 바울은 죄에서 자유케 하시는 <예수님>과 모든 억압에서 자유케 하시는 <성령님>을 전해주었습니다.
그러나, 율법주의 거짓 사도들이 율법으로써 종을 삼는 다른 영을 전해도, 막상 고린도 교인들은 잘 용납한다고 책망한 것입니다.
5. 또한 바울은 예수님의 십자가 피로써 죄를 용서해주시고, 영생 천국에 가게 하는 <복음>을 전해주었습니다.
그러나 율법주의 거짓 사도들은 사람들이 할례받아야 구원받는다는 율법을 전해주어도, 막상 고린도 교인들은 잘 용납한다고 책망한 것입니다.
6. 본문에서 <누가>란 가상의 인물이 아니라, 실제 인물인 율법주의 교사들의 ‘우두머리인 거짓 사도’를 가리킵니다.
7. 그리고 <다른 예수>란 역사적으로 열 두 제자를 데리고 다니셨던 나사렛 예수 외에 다른 예수를 가리키는 것이 아닙니다.
이 <다른 예수>란 역사적인 예수님이 참사람이면서 참 하나님이신 완전한 구원의 주님을 부인하고, 단지 예수님이 절반만 구원하셨고, 완전한 구원을 얻으려면 유대교의 율법을 지키고, 할례를 받고, 유대인의 절기를 지키고, 유대교의 성결법을 지켜야 한다고 율법주의 거짓 사도들이 주장하는 소위 <절반만 구원한 예수>를 가리킵니다.
그 후에 사도 요한 당시에는 예수님이 참된 인간이심을 부인하고, 오직 신성을 지닌 영적인 예수님으로만 인정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이 사람들은 <영지주의>(Gnosticism)라는 이단이었습니다.
이처럼 정통적인 예수님은 참사람이면서 참 하나님이신 예수님이셨습니다.
바울 사도는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서, 예수님이 인간이실 뿐만 아니라, 참 하나님이심을 체험적으로 알았습니다.
그러나 율법주의 거짓 사도들은 예수님이 절반만의 구원을 성취하신 분이라고 생각하고, 완전한 구원은 유대교의 율법과 할례와 절기와 성결법 규정들을 지켜야 온전한 구원을 받는다고 주장했습니다.
한편 사도 요한 당시에는 역사적으로 살아계신 예수님을 보지 못했던 사람들이 예수님을 역사적인 인물로 믿지 않고, 단지 기적을 행하고 신성을 지니신 영적인 예수로만 인정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예수님이 참사람이고 참 하나님이심을 믿었습니다.
빌립보서 2:5-8.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로마서 1:3-4. 이 아들로 말하면 육신으로는 다윗의 혈통에서 나셨고 성결의 영으로는 죽은 가운데서 부활하여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셨으니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시니라.
디도서 2:13. 복스러운 소망과 우리의 크신 하나님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이 나타나심을 기다리게 하셨으니
이처럼 바울 사도는 예수님이 참사람이면서 하나님이심을 전해주었습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구주 예수님이 참사람이시면서 하나님이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지금도 살아계신 예수님의 은혜와 진리 가운데서 살아가시기를 축원합니다!
8. 바울 사도는 고린도 교인들에게 <성령님>을 전해주었습니다.
그런데 고린도 교인들은 바울 사도가 전하는 성령님을 믿지 않고, 율법주의 거짓 사도가 전하는 종삼는 영인 ‘다른 영’을 받아들였습니다.
그래서 바울이 책망했습니다.
그러면 바울이 전하는 영은 어떠하신 영이십니까?
네, 바울이 전하는 영은 바로 예수님의 영이신 성령님이셨습니다.
이 성령님을 받으면 예수님을 구주로 고백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고린도전서 12장 3절에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 하나님의 영으로 말하는 자는 누구든지 예수를 저주할 자라 하지 않고 또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율법주의 거짓 사도들이 전하는 영은 예수님을 구주로 고백하는 영이 아니라, 모세를 주로 고백하는 <다른 영>이었습니다.
그리고 바울이 전한 성령님은 예수님을 증거하는 영이었습니다.
요한복음 15:26. 내가 아버지께로서 너희에게 보낼 보혜사 곧 아버지께로서 나오시는 진리의 성령이 오실 때에 그가 나를 증거하실 것이요
그런데 율법주의 거짓 사도들이 전하는 영은 모세를 증거하는 <다른 영>이었습니다.
그리고 바울이 전하는 성령님은 진리의 말씀을 증거하는 영이었습니다.
요한복음 16:13. 그러하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그가 자의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듣는 것을 말하시며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
그러나 율법주의 거짓 사도들이 전하는 영은 율법을 증거하는 <다른 영>이었습니다.
그리고 바울이 전하는 성령님은 사람을 <자유케 하는 영>이었습니다.
고린도후서 3:17. 주는 영이시니 주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함이 있느니라.
그러나 율법주의 거짓 사도들이 전하는 영은 율법으로써 사람을 억압하고 종삼는 ‘속박의 영’이었습니다.
또한 바울이 전하는 성령님은 예수님의 영이었습니다.
로마서 8:9.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
그런데 오늘날 <신천지 이단>은 불경스럽게도 <이만희>란 사람을 성령님이라고 속이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바울 사도가 성경에서 증거하고 있는 성령님을 따라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성경 말씀 안에서 진리의 성령님 모시고, 참된 자유와 은혜를 누리며 살아가시기를 축원합니다!
8. 바울 사도는 참된 <복음>을 고린도 교인들에게 전해주었습니다.
이 복음은 인간의 율법적인 선한 행위가 아니라, 오직 예수님의 십자가 보혈로 우리가 죄 용서를 받고, 성령님 모시고 영생 천국에 간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율법주의 거짓 사도들은 할례를 받고 율법을 지켜 선한 행실을 가져야 천국 백성이 된다고 주장했습니다.
이것은 바로 <율법주의>였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참된 복음에서 떠나 율법주의로 기울어진 갈라디아 교인들을 향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것은 고린도 교인들도 똑같은 처지였습니다.
갈라디아서 3:1-5. 어리석도다. 갈라디아 사람들아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 너희 눈앞에 밝히 보이거늘 누가 너희를 꾀더냐? 내가 너희에게 다만 이것을 알려 하노니 너희가 성령을 받은 것은 율법의 행위로냐 듣고 믿음으로냐?...너희가 이같이 어리석으냐 성령으로 시작하였다가 이제는 육체로 마치겠느냐? 너희에게 성령을 주시고 너희 가운데서 능력을 행하시는 이의 일이 율법의 행위에서냐 듣고 믿음에서냐?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참된 예수님, 참된 성령님, 참된 복음을 믿고 살아가시고, 다른 예수, 다른 영, 다른 복음을 주의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살아계신 하나님이신 예수님의 은혜를 받고, 자유하게 하시는 성령님을 모시고 살고, 참된 복음 진리의 말씀의 은혜를 받으면서 참된 자유와 은혜를 누리며 살아가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