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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용산구 서빙고로 137 (용산동6가 168-6)
02-2077-9000
관람시간 : [월화목금일] 10:00-18:00 / [수토] 10:00-21:00
관람료 무료 (특별전시는 유료)
기획전시실에서 특별전시 관람을 마치고 맞은편 상설전시실로 가서 본격적인 관람을 시작한다.
상설전시실로 가는 길에 왼쪽을 보면 액자구성으로 남산서울타워를 볼 수 있다.
실제로는 또렷하게 아주 잘 보이는데 막상 사진으로 보니까 아주 작게 보인다.
애국가 2절이 절로 생각나는 순간이다.
[구석기실]
발전되어가는 모습을 컴퓨터, 스마트폰 같은 신문물을 접하면서도 느끼지만...
박물관도 참 많이 세련되어지고 새로운 기술들을 많이 접목해 놓았다.
이제는 정말 카페말고 박물관에서 약속시간을 잡고 만나도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주먹도끼는 끝부분이 뾰족한 타원형 석기로, 뭉툭한 부분을 손으로 쥐고 여러 용도로 사용했던 구석기시대 도구다.
돌의 한쪽을 떼어 낸 뒤 반대편을 다시 떼어 내 지그재그 모양의 양면 날을 만들었다.
구석기인들은 미리 전체적인 모양을 생각하고 계획을 세워 원하는 형태의 주먹도끼를 제작했다.
주먹도끼는 서유럽, 중동, 아프리카, 영국, 인도, 동아시아에 이르는 넓은 지역에서 발견되며,
대략 170만 년 전부터 10만 년 전까지 사용되었다.
주먹도끼를 만든 고인류는 호모 에렉투스(Homo erectus)로 알려져 있다.
이 주먹도끼는 연천 전곡리에서 출토된 것이다.
1940년대 초반 미국 고고학자 모비우스(H. L. Movius)는
구석기문화를 유럽의 주먹도끼 문화권과 아시아의 찍개 문화권으로 분류하고,
동아시아 지역에는 주먹도끼가 없다고 주장했다.
그의 학설은 동아시아 지역이 주먹도끼가 발견되는 유럽・아프리카・중동 지역에 비해
문화적・인종적으로 뒤처졌다는 의미였다.
그러나 1978년 전곡리에서 동아시아 최초로 주먹도끼가 발견되자
세계 고고학계는 크게 놀랐고, 이러한 이분법적 이론은 폐기되었다.
[신석기실]
舊(구)에서 新(신)으로 변화 but 석기라는 한계
채집,수렵에서 밭농사(논농사X 논농사는 청동기)와 목축의 시작
가죽옷에서 섬유옷의 시작 [가락바퀴, 뼈바늘]
동굴,막집 이동생활에서 움집 정착생활
뗀석기[주먹도끼, 슴베찌르게, 찍개]에서 간석기[갈돌, 갈판, 빗살무늬토기, 이른 민무늬토기]
덧무늬토기 이후에 등장한 것으로, 우리나라 신석기시대를 대표하는 유물이다.
점과 선으로 이루어진 여러 기하학적 무늬는
자연을 배경으로 살아간 당시 사람들의 세계관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것으로 여겨진다.
이 토기는 서울시 암사동 집터유적에서 출토된 것으로 겉면을 삼등분하고 각각 다른 무늬로 장식하였다.
토기 아래쪽에 뚫린 두 개의 구멍은 깨진 토기를 임시로 수리하여 사용했던 흔적으로 추정된다.
이를 통해 당시의 토기는 누구나 만들 수 있었던 것이 아니라 만드는 기술자가 따로 있었을 거라는 추측을 할 수 있다.
[청동기실]
돌칼 신석기유물 아이다~ 청동기유물이다~ 엄청 세련되었잖아!
이른 민무늬 토기는 신석기 vs. 민무늬 토기는 청동기
이제 이번 관람에서 제일 만나보고 싶었던 농경문 청동기(農耕文 靑銅器)를 만나볼 차례이다.
대전 괴정동의 한 상인이 고철수집인에게 구입한 것이 서울의 골동품상인을 거쳐서
1969년 국립중앙박물관이 당시 2만여원을 주고 구입, 소장하게 되었다.
워낙 귀한 유물이다 보니 교과서 등을 통해 이미지는 널리 알려졌지만 실제로 보면 크기는 생각보다 아주 작다.
농경문 청동기(農耕文 靑銅器)로 윗부분만 남아있다.
농경문 청동기에 그려져 있는 그림을 통해 농경과 관련된 제사를 지낼 때 사용되었던 의식용(儀式用) 도구로 여겨진다.
농경문 청동기로 불리고 있으나 그 형태상 방패형 동기(防牌刑 銅器)의 일종으로 볼 수 있다.
농경문 청동기(農耕文 靑銅器)는 뒤늦게 2014년 5월 8일 보물 제1823호로 지정되었다.
농경문 청동기는 앞면은 솟대, 뒷면은 농경의례를 표현하여 생산과 풍요를 비는 의식에 사용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두 갈래의 나뭇가지 위에 앉은 새는 마을에 안녕과 풍요를 가져다 주는 솟대를 표현한 것이다.
뒷면에는 깃털을 꽂은 모자를 쓰고 벌거벗은 채 따비로 밭을 일구는 남자와 그 아래에 괭이를 들고 있는 사람,
곡식을 항아리에 담는 모습이 새겨져 있다.
이는 봄부터 가을까지 농사를 시작하여 수확하기 까지의 모습을 순서대로 표현한 것이다.
몸체 가장 윗부분에는 작은 네모난 구멍 여섯 개가 배치되어 있는데
구멍마다 조금씩 닳아 있어 끈으로 매달아 사용했던 것으로 보인다.
양쪽 면에는 정가운데 세로 방향과 가장자리 윤곽을 따라 빗금, 선, 점선을 이용한 무늬띠가 돌아가고
그 안쪽 빈 공간에 그림이 그려져 있다.
농경문 청동기는 인물, 농기구, 경작지 등을 추상적인 선으로 묘사해
청동기시대의 농경과 농경 관련 의례의 실상을 구체적으로 보여주고 있다는 점에서 귀중한 유물이다.
[고조선실]
우리나라의 청동기문화는 기원전 5세기~기원전 4세기경을 전후로
요령식 동검이 만들어진 시기와 한국식 동검이 만들어진 시기의 문화로 나눌 수 있다.
이름에서도 알 수 있듯이 한국식 동검은 한반도 특유의 청동기문화가 형성되었던 시기를 대표하는 유물이다.
이전 시기의 요령식 동검에 비해 날이 좁고 직선 형태를 띠어 세형동검 또는 좁은놋단검이라고도 한다.
자루를 따로 만들어 결합해서 사용하도록 한 점은 요령식 동검과 같으며,
검을 마연磨硏하는 방식이나 모양 등에 따라 제작 지역과 시기를 구분할 수 있다.
초기의 한국식 동검은 허리의 마디가 뚜렷하지 않지만 후기로 갈수록 마디가 뚜렷해진다.
한국식 동검은 대부분 무덤에서 잔무늬 거울과 청동 방울, 옥, 토기 등과 함께 출토된다.
특히 하나의 무덤에서 청동 유물이 다량 출토되는 예가 많은데,
무덤에 묻힐 ’한 사람’을 위해 쉽게 손에 넣을 수 없었던 청동기를 많이 넣은 것에서
당시 사회에 강력한 지배자가 등장했음을 알 수 있다. 이전 시기부터 ‘검’은 단순한 실용기가 아니었다.
청동기시대 무덤에서 출토되는 대형 돌칼〔石劍〕이나 자루가 과장된 돌칼은
자신의 힘을 과시하거나 사악한 기운을 물리치는 물건이자 때로는 숭배의 대상이기도 했다.
한국식 동검 역시 무기 이상의 의미, 즉 당시 사회 지배자의 정치적 권위를 나타내는 상징물이라는 의미를 가졌다.
또한 한국식 동검이 제사장의 권위를 나타내는 잔무늬 거울 및 청동 방울과 함께 묻혔다는 것은
이 시기가 종교와 정치권력이 분리되지 않은 제정일치 사회였음을 보여준다.
잔무늬 거울은 한국식 동검문화를 대표하는 청동 거울이다.
앞 시기의 거친무늬 거울이 중국 동북 지역과 연해주, 한반도, 일본열도에서 확인되는 것과 달리
잔무늬 거울은 대동강 이남에서 발견되어 한반도에서 창안해 제작했음을 알 수 있다.
잔무늬 거울은 거친무늬 거울과 마찬가지로 거울 뒷면〔背面〕 중앙에 2-3개의 고리가 달린 다뉴경(多鈕鏡)이다.
그러나 거친무늬 거울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정교한 무늬가 새겨진 것이 특징이다.
세밀한 무늬를 새기기 위해 가는 모래로 거푸집〔砂型〕을 만들고, 무늬를 새긴 거푸집 안에 녹인 청동을 부어 만들었다.
청동이 굳으면 거푸집을 깨뜨리고 무늬가 없는 거울면〔鏡面〕을 매끈하게 갈아 냈다.
잔무늬 거울은 거친무늬 거울보다 무늬를 새기는 기법이 더욱 발달해 정확한 동심원을 새겼으며, 선의 간격도 매우 좁아졌다.
청동기 제작 기술이 크게 발전한 결과 정밀한 무늬를 새길 수 있게 된 것이다.
이러한 잔무늬 거울은 일상용품이라기보다 태양을 상징하는 의식용 도구 또는 종교적 권위의 상징물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잔무늬 거울은 신을 부르는 도구인 청동 방울, 정치적 권위를 드러내는 한국식 동검과 함께 당시 무덤에 집중적으로 묻히는데,
이로써 묻힌 사람의 사회 문화적 위상을 가늠할 수 있다.
또한 거울을 일부러 깨뜨려 넣은 경우도 종종 발견되어 당시 사람들의 매장 의례도 살펴볼 수 있다.
청동 방울은 한국식 동검문화의 전성기에 한반도 중서부 지역에서 등장하기 시작한다.
장대투겁 방울, 가지 방울 등의 청동 방울이 한국식 동검, 잔무늬 거울과 함께 무덤에서 확인된다.
이후 청동 방울을 비롯한 청동기 제작의 중심지가 한반도 동남부 지역으로 이동하게 되는데,
이 지역에서는 닻 모양 방울, 누에고치 모양 방울, 장대투겁 방울 등이 주로 출토되어
방울의 종류와 제작 기법에 변화가 생긴 것을 알 수 있다.
한국식 동검문화 단계에는 방울을 포함해 특이한 형태의 청동기가 많아진다.
정확한 용도를 확인할 수 없어 이형(異形) 청동기라고 부르기도 하지만,
뛰어난 주조 기술과 무늬, 형태 등으로 볼 때 의례 때 사용하던 의기(儀器)로 추정할 수 있다.
청동 방울은 당시 의례에서 ‘소리’가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특히 장대투겁 방울의 방울 부분이 점차 길어지고 안에 들어가는 방울의 크기도 더 커지는 것으로 보아
‘소리’를 내는 기능이 더욱 강조되었을 것이다.
이렇듯 청동 방울은 형태나 기능 면에서 한반도 청동기의 독자성과 성격을 잘 반영하는 대표 유물이라고 할 수 있다.
[부여삼한실]
1916년에 발굴된 평양 석암리 금제 띠고리(平壤 石巖里 金製 鉸具)는 1962년 12월 20일 국보 제89호로 지정되었다.
금판 위에 수천 개의 금 알갱이들을 붙였고, 큰 용 1마리가 중앙에서 꿈뜰거리고,
그 주위로 6마리의 작은 용이 바짝 붙어 있다.
53.9g(14.3돈)의 순금으로 만든 허리띠 고리이다.
청동기시대에 사용된 민무늬토기로 평안북도 의주군 미송리 동굴에서 많이 발견되어 미송리식 토기라고 한다.
미송리식 토기의 분포를 보면 당시 고조선의 문화범위를 짐작할 수 있다.
삼한 시대에는 종래의 민무늬토기가 계속 사용되는 한편 새로이 연질토기(軟質土器)와 와질토기(瓦質土器)가 등장하여
이 시기의 대표적인 토기가 되었다.
와질토기에 뒤이어 등장한 경질토기(硬質土器)는 밀폐된 굽가마에서 높은 온도로 구워 회청색을 띠며 단단하여 실용적이다.
고대 사람들은 새가 봄철에 곡식의 씨앗을 가져다 주거나 죽은 이의 영혼을 천상(天上)으로 인도한다고 하는 이른바
조령신앙(鳥靈信仰)을 믿었다.
우리나라에서는 청동기시대부터 새를 형상화한 유물이 발견된다.
삼한의 유적에서는 오리 모양 토기와 새 모양 목기, 새 무늬 청동기 등 다양한 형태의 유물이 출토되어
새와 관련된 의례(儀禮)나 제의(祭儀)가 행해졌음을 알 수 있다.
우리나라에 철기가 처음 들어온 것은 기원전 4세기 무렵이지만 전국적으로 철기가 제작, 사용된 것은 기원전 1세기 무렵이다.
철기 사용으로 향상된 생산력은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전반에 커다란 변화를 가져왔으며
고대국가가 발전하는 원동력이 되었다.
초기의 철기는 주조(鑄造)로 만든 농기구가 대부분이었으나 점차 중국 한(漢)의 철기 제작 기술이 보급되어
무기가 다양하게 제작되고 말갖춤이 등장하기도 하였다.
창원 다호리 유적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이른 목관묘군의 하나로 고대국가 형성에 관한 새로운 자료를 제공했다.
다호리 유적 널무덤〔木棺墓〕의 가장 큰 특징은 관 아래 무덤 바닥 한가운데 부장품을 넣기 위한 구덩이〔腰坑〕를 판 것인데,
이는 다호리 유적에서 처음으로 확인되었다.
1호 무덤의 구덩이에서 발견한 바구니에서는 옻칠한 칼집이 있는 한국식 동검과
철검・청동 투겁창・쇠 투겁창・화살 같은 무기류와
따비・쇠도끼 등 철로 만든 농공구류, 중국 거울과 허리띠 고리・구슬 같은 장신구,
다양한 칠기와 그 안에 담긴 곡식, 부채, 말방울, 오수전, 붓, 노끈 등 엄청난 유물이 쏟아져 나왔다.
중국 거울과 중국 화폐인 오수전이 나온 것으로 보아 이 무덤은 기원전 1세기 후반에 만들어졌음을 알 수 있다.
역사 기록에는 풍부한 철광산과 제철 기술을 보유한 변한이
낙랑과 왜에도 철을 공급했으며, 철을 화폐처럼 사용하기도 했다고 한다.
실제로 다호리 유적에서는 화폐처럼 사용할 수 있도록 2개씩 묶은 주조철부와
중국계 유물, 야요이 토기 같은 왜계(倭系) 유물도 출토되었다.
즉 당시 변한의 지배 세력들은 철의 생산과 통제, 교역으로 부를 축적하고 이를 토대로 권력을 유지, 확대해 나갔다.
다호리 유적은 이런 변한 사회 지배층의 집단 묘지이며,
그중 가장 다양하고 많은 부장품이 출토된 1호 무덤의 주인공은 변한의 지배자라고 볼 수 있다.
투명한 수정을 여러 면으로 깎아서 만들어 엮은 이 화려한 목걸이는 김해 양동리 유적의 덧널무덤[木槨墓]에서 출토된 것이다.
신체를 아름답게 꾸미고자 하는 사람들의 욕망은 오래전부터 시작되어
신석기시대에는 이미 옥을 가공해 장신구를 만들었다.
옥으로 만든 장신구를 대표하는 목걸이는 거의 전 시기에 걸쳐 나타나는데,
재료나 형태 등으로 시기에 따른 특징을 확인할 수 있다.
신석기시대와 청동기시대에는 벽옥璧玉 같은 녹색 빛을 띠는 자연 광물을 가공해 목걸이를 만들었다.
이후 철기문화를 특징으로 하는 삼한시대가 되면 수정・마노・호박 등 다양한 색을 가진 재료와
중국에서 유입된 유리 제작 기술로 만든 목걸이가 유행한다.
『삼국지』 「위서 동이전」에 따르면, 삼한 사람들은 금은보다 옥과 구슬을 귀하게 여겼다고 한다.
실제로 삼한의 무덤에서는 이 기록을 뒷받침하듯 각종 구슬이 풍부하게 출토되었다.
이른 시기의 수정 구슬은 평양 석암리 219호 무덤 등 기원 전후의 낙랑 무덤에 함께 묻히기 시작한다.
그 뒤 유리 제작 기술은 경주, 김해 등과 같은 진한・변한 지역에서 더욱 발달했으며,
이 목걸이는 삼한 사람들의 뛰어난 수정 가공 기술과 화려한 미적 감각을 잘 보여준다.
이 밖에도 삼한의 유리 제작 기술은 더욱 발전해 거푸집을 사용하거나 잡아 늘이기, 감아 붙이기 기법 등으로
붉은색, 푸른색 등 색색의 유리구슬을 만들었다.
삼한은 한반도를 벗어나 중원, 오르도스, 왜(倭) 등과도 활발하게 교류하였다.
낙동강 하류 지역에서는 변한이 철을 낙랑과 왜로 수출하였고,
실제로 남부 지방의 여러 유적에서 중국 및 일본의 유물이 출토되고 있다.
청동 새발솥, 거울, 동전들은 중국과의 교류 흔적이며, 야요이 토기, 청동 투검창 등은 일본과의 교류를 보여 주는 유물이다.
철기의 등장과 함께 활발해진 교류는 사회 변화를 촉진하고 고대 국가가 발전하는 계기가 되었다.
[구구려실]
고구려의 금동신발은 바닥에 박힌 못의 개수가 많고, 바닥판만 금속으로 만든 점이 특징이다.
지안(集安, 고구려의 옛 수도) 삼실총과 통구 12호분의 벽화에 이러한 신발을 신고 있는 고구려 무사가 묘사되어 있다.
이 신발은 바닥판만이 남아 있는데, 사각추 형태의 금동못 40여개가 촘촘히 박혀 있다.
바닥판 가장자리에 작은 구멍이 짝을 이루어 뚫려 있는 점으로 보아,
신발의 위쪽은 가죽이나 천으로 만들어 연결했던 것으로 생각된다.
이 신발은 실제 사용된 것이라고 보다는 의례용이나 껴묻거리(부장품, 副葬品)로 보인다.
경주 금관총(金冠塚)에서 출토된 청동인 <네 귀 달린 항아리>가 신라실이 아닌 고구려실에 전시되는 이유는
풍만하고 긴 몸체와 어께에 띠모양 손잡이 4개를 붙인 형태가 고구려 토기들과 꼭 닮았기 때문이다.
이 청동 항아리는 금관총의 주인이 사망한 시점에 고구려에서 신라로 보내 온 물품으로 추정된다.
<글자가 새겨진 평양성 성돌(제5석) 탁본>
<금귀걸이>
굵고 둥근 고리에 작은 장식을 달아맨 고구려의 대표적인 귀걸이로 서울 능동에서 출토되었다.
<불꽃 맞새김무늬 관>
<고구려의 금동관>
고구려 금동관의 특징은 세잎무늬를 도려내거나 가장자리를 잘라 새의 깃털처럼 표현한 것이다.
금동관 세움 장식이 새 날개의 모양을 한 이 유물은 고구려 금동관의 특징을 살필 수 있는 귀중한 자료이다.
이와 같은 관 꾸미개의 제작 기법은 신라 황남대총 남분에서 출토된 은관,
의성 탑리 고분에서 출토된 깃털 모양의 금동관 등과 비슷하다.
따라서 신라 초기의 관 꾸미개는 고구려의 영향을 받았다고 추정할 수 있다.
<맞새김무늬 꾸미개>
<봉황모양 꾸미개>
<말 탄 사람을 그린 벽화 조각> 삼국시대[고구려] 5세기, 평남 남포 쌍영총
1913년 평안남도 남포시 쌍영총의 널길에 그려진 벽화의 일부이다.
벽화 속 인물을 '절풍(折風)'이라 부르는 고깔에 새 깃을 꽂아 꾸민 '조우관(鳥羽冠)'을 쓰고 있다.
말을 타고 달리는 사람의 모습에서 당시 고구려인의 옷치장과 말갖춤 등을 엿볼 수 있다.
<반원막새>
<짐승얼굴무늬 수막새>
<연꽃무늬 수막새>
<글자가 새겨진 벽돌>
지린성(吉林省) 지안(集安)의 태왕릉과 천추총에서 출토된 벽돌이다.
이 무덤들은 대형 계단식 돌무지무덤으로, 무덤 위쪽에 기와를 이은 건물을 세웠거나,
무덤을 지키는 사람과 관련된 건물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 벽동은 무너진 돌무지 속에 기와와 함께 섞여 있었으며,
한쪽 면에는 무덤이 오래도록 보존되기를 기원하는 글자가 새겨져 있다.
″願太王陵安如山固如岳[원하옵건대 태왕릉이 산처럼 안전하고 뫼처럼 튼튼하소서] ″
″千秋萬歲永固[(무덤이) 천추만세토록 영원히 튼튼하소서] ″
″乾坤相畢[(무덤이) 하늘과 땅이 다할 때까지 [튼튼히 보존되소서]] ″
경주의 호우총에서 출토된 고구려 청동 그릇이다.
그릇 바닥에 새겨진 ‘乙卯年國罡上廣開土地好太王壺杅十’(을묘년국강상광개토지호태왕호우십)이라는 글자를 통해
광개토대왕의 장례를 치른 이듬해인 을묘년(415)에 추모 행사가 거행되었고
거기에 참석했던 신라 사신이 고구려에서 이 그릇을 받아 왔을 것이라고 추정할 수 있다.
또한 당시 고구려에서는 이러한 형태의 그릇을 ‘호우’라고 불렀음을 알 수 있다.
고구려에서는 생활 풍속, 장식무늬, 사신도 등 다양한 주제로 벽화를 그린 돌방무덤〔石室墳〕이 발전했다.
벽화무덤은 3세기 중엽부터 7세기 중엽까지 지속적으로 만들어졌으며,
주로 고구려의 옛 수도였던 지안(集安)과 평양 일대에 집중되어 있다.
고구려 고분벽화는 중국의 영향을 받아 그려지기 시작했으나, 고구려만의 문화로 재창조되어 더욱 발전했다.
벽화에는 고구려인들의 생활 모습과 종교, 사상 등이 생생하게 묘사되어
고구려사는 물론 우리 민족의 역사와 문화를 복원하는 데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
강서대묘는 널길과 널방이 지상에 있는 무덤으로, 잘 다듬은 대형 화강암을 사용해 벽과 천장고임을 축조했다.
무덤 안 돌 벽면에 직접 그림을 그린 벽화의 중심 주제는 상상의 동물인 사신(四神)이다.
동쪽의 청룡, 서쪽의 백호, 남쪽의 주작, 북쪽의 현무를 널방 벽면에 가득 차게 그리고,
천장고임에는 연꽃, 비천(飛天), 악기를 연주하는 천인(天人), 기린, 봉황을 비롯한
여러 신성한 존재, 인동당초무늬, 산악 등을 그려 넣어 도교 사상과 불교의 내세를 표현했다.
천장돌 중앙에는 황룡을 그려 넣었다.
기운생동하는 사신과 유려하고 다채롭게 표현된 천장 그림들은 고구려 고분벽화의 절정기 수준을 보여준다.
전시 중인 강서대묘 모사도는 오바 츠네키치[小場恒吉]가 1930년경에 다시 모사한 것이다.
[디지털 실감 영상관3]
정면, 좌우측면, 천장 4면 영상으로 재현한 안악 3호 무덤, 덕흥리 무덤, 강서대묘를 실감 영상으로 만나볼 수 있다.
보고있으면 웅장한 음악과 더불어 감동적이기까지 하다.
비용은 좀 들겠지만... 앞으로 많은 박물관들에서도 이와 같은 기술을 많이 활용했으면 좋겠다.
[백제실]
왕흥사 장식기와 치미는 국내에서 가장 오래된 치미로 일부만 발견돼 현대기술로 나머지 부분을 복원해 붙였다.
1971년, 공주 무령왕릉에서 역사적인 발굴이 이루어졌다.
4,600여 점의 유물이 출토된 무령왕릉은 백제 문화의 보고(寶庫)라고 할 수 있다.
특히 묘지석이 발견되어 무덤 주인을 알 수 있는 삼국시대의 유일한 왕릉이자
동북아시아 고분을 연구하는 데 결정적인 기준이 되었다.
무령왕릉은 묘제墓制와 출토품에서 당시 백제의 국제성을 여실히 보여준다.
중국제 도자기와 진묘수(鎭墓獸), 매지권(買地券)을 비롯해 일본산 금송(金松)으로 만든 목관 등은
6세기 전반 중국 남조(南朝)와 백제, 왜를 연결하는 문화 교류망을 나타낸다.
금제 관 꾸미개[金製冠飾]가 왕과 왕비의 머리 부분에서 2점씩 포개진 상태로 출토되었다.
<무령왕 금제관식[金製冠飾]>
중국 역사책인 『구당서(舊唐書)』에 “왕의 관은 검은 비단으로 만든 모자[烏羅冠]에 금꽃[金花]으로 장식했다.”라는 설명이 있어,
무령왕릉의 금제 관 꾸미개를 역사 기록 속의 금꽃으로 추정할 수 있다. [국보 제154호 국립공주박물관 소장]
<무령왕비 금제관식[金製冠飾]>
왕비의 관 꾸미개는 얇은 금판을 맞새김해 무늬를 좌우 대칭이 되도록 했으며 달개는 붙이지 않았다.
중앙에는 7장의 연꽃잎으로 장식한 대좌 위에 활짝 핀 꽃을 꽂은 꽃병이 있으며, 그 주위로 인동당초무늬와 불꽃무늬 장식을
배치해 불교의 세계관을 사실적으로 보여준다. [국보 제155호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다른 지역에서는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이 관 꾸미개는 백제의 독창적인 문화를 엿볼 수 있는 유물이다.
<백제 산수무늬벽돌(산수문전, 山水文塼)> [보물 제343호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부여 규암면 외리의 사비 시기 절터에서 바닥에 나란히 깔린 상태로 출토된 벽돌이다.
나무로 만든 거푸집〔范〕에 여러 무늬를 새긴 다음 흙을 밀어 넣어 찍고 가마에서 구웠다.
정사각형의 한 변 길이는 당척唐尺인 29㎝ 안팎이며, 네 모서리에는 홈을 파서 벽돌을 서로 연결해 고정할 수 있도록 했다.
무늬 벽돌에는 산수무늬, 연꽃무늬, 봉황무늬 등 모두 8종류의 무늬가 새겨져 있다.
이상적인 세계, 상서로운 동물과 기운을 형상화하거나 사악한 것을 물리치는 벽사辟邪의 의미 등을 담아내
백제 사람들의 정신세계를 엿볼 수 있다. 조화와 비례, 우아함을 적절히 갖춘 백제의 아름다움을 잘 보여준다.
산수무늬 벽돌에는 아래쪽으로 시냇물이 흐르고 그 뒤로 봉우리가 3개인 산이 펼쳐지며, 좌우로 기암절벽이 있다.
또한 가운데 가장 높은 산봉우리 위에는 큰 봉황이 날아오르려는 듯 양 날개를 활짝 펴고 있으며,
봉황 좌우에는 상서로운 구름들이 감돌고 있다.
신선들이 산다는 삼신산(三神山)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데서 백제인의 도교적 세계관을 엿볼 수 있다.
보고 싶은 유물들을 보지 못한 아쉬움이 많았지만...
국립부여박물관에서 소장하고 있는 국보 제287호 백제금동대향로(百濟金銅大香爐)를 만지고 느껴 볼 수 있다.
[가야실]
단지 아래쪽에 사슴 두 마리가 과장 표현되어 있는 공 모양의 단지다.
사슴은 고대 북방아시아에서 여러 민족이 신성시하던 동물로 가야의 애미널리즘을 엿볼 수 있다.
<가야 판갑옷과 투구>
고령 지산동 32호 무덤에서 출토된 갑옷과 투구다.
갑옷은 가로로 긴 조금 넓은 판과 좁은 판을 못으로 고정한 뒤 몸의 곡선에 맞춘 횡장판갑옷이다.
투구는 복숭아씨앗 모양을 닮았는데 목 부분을 가리는 긴 철판이 투구 뒷부분에 붙어 있다.
이와 별도로 어깨를 가리는 갑옷도 출토되었는데, 당시 대가야 지역 판갑옷의 정수를 볼 수 있다.
가야 미늘쇠: 가야 유자이기(有刺利器)
미늘쇠는 길고 네모난 철판 옆면을 도려내 가시 모양으로 만들고, 아래쪽 구멍에 자루를 끼워 사용했던 것이다.
미늘쇠는 대부분 무덤에서 출토되고 있으므로 사람들이 손으로 들고 의식이나 장례 행렬에 사용했던 제사 도구로 추정된다.
가야를 구성했던 여러 정치체에서 미늘쇠가 크게 유행했는데,
그 중 아라가야에서는 가시 모양 대신 철판을 새 모양으로 잘라 붙인 매우 독창적인 것이 제작되어 성행했다.
미늘쇠에 달린 새는 반원 모양의 몸통에 둥근 머리가 달렸으며, 부리가 살짝 돌출되어 있는 모습인데,
가운데 철판을 중심으로 대칭으로 배치되어 있다. 마치 나무에 붙어있는 새를 표현한 것처럼 보인다.
이러한 새가 배치된 미늘쇠는 아직까지 가야 지역 외에서 출토된 적이 없기 때문에 가야만의 독창적인 유물로 생각된다.
한반도에 살았던 고대인들은 새가 영혼을 사후세계로 인도하는 존재로 인식했다.
무덤 안에 새 모양 토기를 만들어 부장하기도 하고 전래 문헌에는 장례 시에 새의 깃털을 부장했다는 기록도 있다.
새가 부착된 미늘쇠 역시 죽은 이의 영혼을 저승으로 운반하기 위해 무덤에 부장된 것으로
가야인들만의 사후세계관을 알려주는 전시품이다.
그릇에 붙어 있는 다리를 '굽다리'라고 한다. 뚜껑이 없는 것을 사용하다가 점차 뚜껑이 있는 것으로 변했다.
사슴과 같은 짐승의 등에 뿔잔을 붙인 형태의 잔이다. 끝부분의 고사리 모양은 아주 독특하다.
뿔잔은 삼국시대 경주 김해 등 많이 확인되는데 가야에서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고령 본관동 36호 무덤에서 출토된 그릇받침으로 대가야 그릇받침의 특징을 잘 보여분다.
원래 금관가야 지역에서 시작된 그릇받침은 원통 모양이지만, 대가야 그릇받침은
아랫부분이 장고 모양처럼 넓고 동체의 중간 부분부터 좁아지며 세로 방향으로 길게 뱀 모양의 장식을 붙인 것이 특징이다.
동체에는 삼각형의 굽구멍(투창)이 뚫려있다.
가야 지배층이 사용했던 금관과 금동관은 고령, 성주 등 대가야 영역을 중심으로 많이 발견된다.
가야의 관은 신라의 관처럼 일정한 형태나 규칙을 가지고 있지 않고 여러 가지 모양으로 제각각 만들어졌다.
신라 관의 상징이 나뭇가지 모양의 세움 장식이라면 가야 관의 특징은 풀꽃 모양의 세움 장식이다.
[신라실]
1978년 12월 7일 황남대총 북분 금관을 국보 제191호로 황남대총 북분 금제 허리띠를 국보 제192호로 각각 지정되었다.
금관은 왕족의 힘과 권위를 상징한다. 이 금관과 금허리띠는 황남대총 북분에서 출토되었다.
금관을 장식하는 나뭇가지 모양 장식은 관테 안쪽에 덧대어져 금못으로 고정되어 있다.
관테의 아래위 가장자리에는 두 줄의 연속 점무늬와 한 줄의 파도무늬가 새겨져 있고 그 사이에 곱은옥들이 매달려 있다.
출토 당시 관테의 앞면에 굵은 고리 귀걸이 여섯 개가 드리워져 있었다.
금허리띠에는 약통, 물고기, 숫돌, 족집게, 곱은옥, 손칼 등이 달려 있다.
숫돌과 족집게는 철기를 만들 때 사용했던 도구이고 약통은 질병 치료와 관련 있다.
또한 곱은옥은 생명을, 물고기는 식량을 상징한다.
<목가리개> 경북 경주 구정동, 1982년 발굴, 삼국시대(신라) 4세기
<판갑옷> 경북 경주 구정동, 1982년 발굴, 삼국시대(신라) 4세기
도기 기마 인물형 명기(陶器 騎馬人物形 明器)는 1962년 12월 20일 국보 제91호로 지정되었다.
기마인물형토기(騎馬人物形土器) 주인상과 하인상 1쌍
금령총에서 출토된 한 쌍의 말을 탄 인물형 토기 가운데 종자(하인상)의 모습이다.
인물은 발목에서 여민 바지를 입고 어깨에는 기다랗고 굵은 자루 같은 것을 둘러메고 있으며
오른손에는 망치를 들고, 머리에는 넓은 띠를 감은 듯한 모자를 쓰고 있는데 정수리에 돌기가 있다.
말은 가슴 앞에 돌출된 주구가 있고 엉덩이 위에 잔이 놓이고 몸체 가운데가 비어 있다.
말은 가슴 앞에 돌출된 주구가 있고 엉덩이 위에 잔이 놓이고 몸체 가운데가 비어 있다.
<금 새날개모양 관꾸미개> 경북 경주 황남대총 남분 1975년 발굴, 삼국시대(신라) 5세기, 보물 제630호
황남대총 남분 금제 관식(皇南大塚南墳 金製冠飾)은
경주시 황남동 미추왕릉 지구에 있는 삼국시대 신라 무덤인 황남대총에서 발견되었다.
황남대총은 2개의 봉분이 남·북으로 표주박 모양으로 붙어 있다.
이 관식은 황남대총 남쪽 무덤에서 발견되었으며, 높이 45㎝, 날개 끝 너비 59㎝의 크기이다.
3매의 금판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가운데 금판은 위에 3개의 돌출된 부분이 있어서 전체가 山자 모양을 하고 있다.
아랫부분은 차츰 좁아져서 V자 형태를 이루고 있으며,
이 가운데 금판 좌우에 새 날개 모양의 금판을 작은 못으로 연결하였다.
전면에 작은 원형 장식을 달았으나 가운데 금판 밑의 관(冠)에 꽂게 된 부분에는 장식이 없다.
관 장식의 가장자리에는 작은 점을 찍어 처리하였다.
가운데 금판은 세로 중심선에서 안으로 약간 접은 상태로서,
밑의 뾰족한 부분을 어느곳에 꽂기 위한 형태라고 생각되지만 평소에 썼던 관의 일부인지 용도는 확실하지 않다.
<고깔모양 관> 경북 경주 금관총 1921년 발굴, 삼국시대(신라) 5세기, 국보 제87호
금관총 금관 및 금제 관식(金冠塚 金冠─金製冠飾)은 1962년 12월 20일 국보 제87호로 지정되었다.
금관총에서 출토된 내관으로 생각되는 관모(冠帽)는 맞새김무늬로 장식된 여러 장의 금판을 결합해서 만들었다.
아래쪽 테두리 부분은 완만한 타원형 곡선으로 들려 있고, 여러 가지 무늬를 정교하게 맞새겨서 매우 아름답게 표현했으며,
관모 윗부분에 역심엽형으로 뚫린 무늬가 특히 눈에 띈다.
1. <유리잔> 경북 경주 황남대총 북분 1974년 발굴, 삼국시대(신라) 5세기, 보물 제624호
황남대총 북분 유리잔(皇南大塚北墳 琉璃盞)은 높이 7㎝, 구연부 지름 10.5㎝로 북쪽 무덤에서 출토되었다.
구연부 부분은 수평이 되도록 넓게 바깥쪽으로 벌어졌고, 몸통 부분은 밥 그릇 모양으로 밑이 약간 넓어진다.
아랫부분에는 우뚝한 받침이 있는데, 짧은 목을 거쳐서 나팔형의 굽이 달렸다.
유리는 투명한 양질이고 갈색으로 전체에 걸쳐 나뭇결 무늬가 있다.
받침 바닥에 약간의 손상이 있는 외에는 완전한 형태로 보존되어 있다.
경주의 신라 무덤에서는 여러가지 종류의 유리제 용기가 발견되었지만, 이러한 작품은 처음 보는 독특한 예이다.
잔의 모양이나 무늬로 보아 신라 제품이 아닌 서방에서 전래된 것으로 추측된다.
2. <봉황머리모양 유리병> 경북 경주 황남대총 남분 1975년 발굴, 삼국시대(신라) 5세기, 국보 제193호
황남대총 남분에서 출토된 연록색 유리병은 입술 부분이 새부리 모양처럼 밖으로 벌어져 있고
입술 부분에서 가는 목 부분까지 코발트색 유리띠가 열 줄 정도 평행하게 돌려져 있다.
특히 손잡이에는 금실이 감겨 있는데 깨진 부분에 금실을 감아 수리한 것으로 보인다.
이 유리병은 로만 글라스로 중앙아시아의 스텝 지대를 통해 우리나라에 전해졌을 것으로 추정된다.
3. 은잔
4. 금팔찌
5. 유리잔
6. 유리잔
7. <유리잔> 경북 경주 황남대총 남분 1975년 발굴, 삼국시대(신라) 5세기, 국보 제193호
경주 98호 남분 유리병 및 잔(국보 제193호)
귀걸이는 중심 고리의 굵기에 따라 굵은고리 귀걸이와 가는고리 귀걸이로 구분된다.
경주 보문동 합장분에서 출토된 굵은고리 금귀걸이는 누금 기법으로 제작되었다.
누금 기법은 금속으로 된 실이나 알갱이를 공예품 표면에 땜질이나 금속의 화학적 성질을 이용해 붙이는 방법이다.
특히 중심 고리에는 수백 개의 금알갱이와 얇은 금실로 거북등과 꽃이 세밀하게 표현되어 있는데,
신라 고분에서 출토된 귀걸이 가운데 가장 정교하고 화려하다.
경주 황오동 금귀걸이(慶州 皇吾洞 金製耳飾)는 2018년 10월 30일 보물 제2001호로 지정되었다.
두껍게 도금한 3매의 금동판으로 만든 이 신발은 피장자의 발 아래쪽에서 겹쳐진 채 출토되었다.
바닥면 테두리에는 두 줄의 연속구슬무늬와 불꽃무늬가 있고 가운데에는 거북등무늬가 표현되어 있으며
일정한 간격으로 8엽 연꽃무늬가 배치되어 있다.
거북등무늬 안에는 귀신과 새를 번갈아 배치하였고
가릉빈가(사람의 머리를 한 상상의 새), 기린, 새, 날개 달린 물고기 등이 좌우에 대칭적으로 표현되어 있다.
뒤꿈치 좌우에는 용 또는 호랑이로 보이는 무늬가 있다.
금반지(금제지환, 金製指環) 경북 경주 황남대총 북분, 1974년 발굴, 삼국시대(신라) 5세기, 보물 제623호
마립간시기 신라에 도입된 최초의 말갖춤은 중무장기병과 관련이 있다.
처음에 실전무구였던 말갖춤은 4세기말 이후 귀금속 장시이 더해져 지위의 상징물이 되었다.
이를 장식마구라 부를 수 있다.
금빛과 비단벌레의 활려함이 어우러진 신라 마립간시기의 말갖춤은 역사상 어디의 것과 비교해도 뒤지지 않는다.
마립간을 위해 만든 화려한 말갖춤은 왕의 권력을 드러내는 최상의 물품이었다.
서로 겹쳐 일렬로 둔 화려한 말갖춤은 요즘 방식으로 최고급 자동차 여러 대를 가지런하게 주차해 둔 것이라 할 수 있다.
신라토기는 일반적으로 한반도의 고대국가 신라에서 생산되어 유통된 토기군을 의미하지만,
구체적으로는 4세기부터 통일신라 이전의 토기를 가리키는 경우가 많다.
그릇의 종류로는 목긴 항아리, 굽다리 접시가 기본이며, 접시나 잔, 그릇받침, 항아리가 추가로 구성된다.
이 그릇들은 주로 무덤에서 출토되는데, 죽은 자를 위한 부장용 용기 또는 제사 그릇으로 판단된다.
고대 사람들은 죽으면 무덤 안에서 살아있을 때와 똑같은 생활을 한다고 믿었기 때문에
그릇과 같은 일상생활 용품들을 그대로 무덤에 묻었다.
고구려, 백제와는 달리 신라에서는 용기를 대량으로 무덤에 묻는 관습이 있었고,
많은 사람들이 토기를 필요로 했기 때문에 토기가 대량으로 생산되었다.
토기의 대량생산은 처음에는 쉽지 않았지만 오랜 시행착오 끝에 마침내 그 방법을 개발하였고,
질이 좋은 토기를 대량으로 생산할 수 있게 되었다.
동아시아에서 중국이 일찍부터 자기를 개발했다면, 신라는 얇고 가볍고 자연유가 흐르는 독특한 토기 전통을 발전시켰다.
신라에서 용기를 대량으로 무덤에 넣는 제사 전통은 토기의 대량 생산을 유도하였고,
신라인들은 대량 생산을 위한 기술 혁신 과정에서 중국의 자기와는 다른 신라만의 독자적인 토기 스타일을 만들어 내었다.
오늘날 신라 토기는 세계사적으로 토기 기술의 최정점에 다다른 문화로 평가되고 있으며,
세계 어디에도 없는 독창적인 토기 문화라고 말할 수 있다.
고대인들은 죽어서 또 다른 세상으로 영혼이 옮겨 간다고 여겼다.
배모양 토기, 수레모양 토기, 새모양 토기등의 상형토기는
이승에서 저승으로 영혼이 잘 운반되기를 바라는 고대 사람들의 바람이 담겨있다.
특히 새모양 토기는 낙동강류 주변에서 많이 발견 되었고, 여러 상형토기 중 가장 많은 수량을 차지한다.
토우를 붙인 항아리[토우장식 장경호(土偶裝飾 長頸壺)]는 1978년 12월 7일에 국보 제195호로 지정되었다.
토우는 ‘흙으로 빚은 인형’이라는 뜻으로 사람·동물·생활용구 등을 흙으로 빚은 것이다.
단순하고 익살스럽게 때로는 과감하게 표현된 인물 토우는
대부분 뚜껑이나 목이 긴 항아리의 목과 어깨 부분에 붙어 있거나 장난감처럼 조그맣게 따로 만들었다.
말이나 배를 타고 있는 사람, 춤추고 노래하는 부부, 악기를 연주하는 사람, 칼을 찬 무사, 괭이를 둘러맨 남자,
얼굴에 천이 덮여 있는 죽은 사람 앞에 꿇어앉아 슬퍼하는 장면 등을 표현한 토우는 일상생활을 보여 주며,
성기가 강조된 남녀 또는 남녀의 성교 장면 등을 묘사한 토우는 다산과 풍요를 기원하는 주술적 의미도 있다.
그 밖에도 여러 가지 가축이나 호랑이·뱀·새 등의 야생동물과 바다생물을 표현한 토우가 많이 있다.
세월이 흐른 금동관의 모습은 금이 비싼 이유를 여실히 보여준다.
월성은 신라가 존속할 때까지 궁성으로 기능한 곳으로,
성의 외곽에는 외부 차단을 위해 인공적으로 조성한 도랑시설인 해자가 존재하였다.
이 해자에는 수백 년 세월 동안 신라인들이 실수로 빠트리거나, 혹은 일부러 버린 여러 가지 물건들이 층층이 쌓였다.
발굴 당시 매몰된 해자의 내부에서는 신라토기를 필두로 목제 배, 방패 등 다양한 유물들이 확인되었는데,
그 속에는 문자기록이 남은 목간도 포함되어 있었다.
신라 진흥왕 12년(551년) 경주 남산에 명활산성을 쌓은 뒤 세운 비석이다. 비석조각이 안압지(월지)에서 출토되었다.
건립 연대는 계미년(癸未年)이라는 간지와 지도로갈문왕(至都盧葛文王)이라는 인명으로 볼 때
443년(눌지마립간 27) 또는 503년(지증왕 4)으로 추정된다.
이 비는 절거리(節居利)라는 인물의 재산 소유와 사후의 재산 상속 문제를 기록해놓은 것으로,
공문서(公文書)의 성격을 지니고 있다.
포항 냉수리 신라비는 1991년 3월 15일 국보 제264호로 지정되었다.
서울 북한산 신라 진흥왕 순수비 (서울 北漢山 新羅 眞興王 巡狩碑)는 신라의 진흥황이
새로 공략한 국경지대를 순시한 다음 세운 비(碑)이다. 북한산 비봉에 자리하고 있었으나
보존하기 위하여 경복궁에 옮겨 놓았다가, 1970년부터 국립중앙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다.
1962년 12월 20일 대한민국의 국보 제3호로 지정되었다.
조선시대에는 무학대사의 비로 알려지기도 하였으나, 1816년에 김정희가 김경연과 함께 비문을 탁본하고,
이듬해에 조인영과 다시 비봉에 올라가 조사한 뒤, 진흥왕의 순수를 기념한 것임을 확인했다.
비의 옆면에 김정희와 조인영이 답사하여 판독한 사실이 새겨져 있다.
시각장애인에 대한 전시관람 배려도 돋보인다.
[역사의길]
고려시대에는 신라시대의 석탑 양식을 이어 평면 사각형의 석탑 또는 새로운 양식으로 다각(多角)석탑이 나타나는데,
이런 것과 달리 특수한 형태를 보이는 것이 개성 경천사지 십층석탑이다.
이 탑은 원래 개성의 경천사지(敬天寺址)에 남아 있었는데 1909년경 일본에 불법 반출되었다가,
서울 경복궁 근정전 회랑에 반환되어 오랫동안 그곳에 있었다.
1959년에 재건에 착수하고 1960년 완공하여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으로 옮겨졌다.
부재(部材) 전체가 회색 대리석으로 되어 있는데 기단부(基壇部) 위에 탑신부(塔身部)와 상륜부(相輪部)를 건조하였다.
평면과 부재의 구조 등에서 각기 특수한 양식을 보여주고 전체의 균형이 아름다워 주목되는 탑이다.
기단 평면은 아자형(亞字形)으로 3단을 이루었으며,
탑신부는 1, 2, 3층이 기단과 같은 평면이나, 위층으로 올라갈수록 좁아지고 있다.
4층부터는 탑신이 사각형을 이루었는데 층마다 옥신(屋身) 밑에는 난간을 돌리고
옥개(屋蓋) 밑에는 다포집 양식의 두공(枓栱) 형태를 조각하였다.
윗면에는 팔작지붕 형태의 모양과 기왓골이 표현되어 있다.
기단과 탑신에는 불, 보살, 인물, 용, 천부(天部) 등이 빈틈없이 조각되어 장식이 풍부하고 조각수법이 정교하다.
경천사 십층석탑은 마치 나무로 만든 건축물처럼 재현되었으며, 층마다 불보살의 모습이 섬세하게 조각되어 있다.
석탑의 아래층 평면은 사면이 돌출되어 원나라에서 유행한 몽골・티베트계 불탑과 모양이 비슷한 점이 특징적이다.
반면 4층부터 10층까지의 평면은 정사각형으로 전통적인 석탑 형태이다.
이와 같은 형태의 석탑을 약120년 뒤 조선시대 초기에 조선왕실에서 재질과 모양이 비슷한 원각사지 십층석탑을
원각사(圓覺寺)에 다시 세우기는 하였으나 유례가 없는 희귀한 작품이다.
이 같은 구성은 중국에서 발견되지 않기 때문에 당시 동아시아에서 유행한 양식을 참고로
고려에서 창안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제1층 옥신 이맛돌에는 조탑명(造塔銘)이 새겨져 있는데 '지정 8년'(至正八年)이라는 기록이 있어
탑의 건립 연대가 고려 충목왕 4년인 1348년임을 알 수 있다.
당시의 정치적 환경으로 보아 중국탑의 새로운 영향이 영향이 탑에 많이 반영되었다고 생각된다.
개성 경천사지 십층석탑은 1962년 12월 20일 국보 제86호로 지정되었다.
[통일신라실]
충남 서산의 보원사에 있던 것으로, 우리나라에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철불이다.
민머리에 생동감 넘치는 얼굴, 곱고 아름다운 눈과 눈썹 선, 당당한 양어깨와 풍만한 가슴,
결가부좌한 다리의 풍성한 입체감 등 석굴암 본존불에서 느낄 수 있는 것과 같은 사실감이 잘 드러난다.
오른쪽 어깨를 드러내는 옷매무새, 왼손은 무릎 위에 두고 오른손은 내려 땅을 가리키는 항마촉지인[降魔觸地印],
결가부좌한 다리 사이로 펼쳐진 부채꼴의 옷 주름은 석굴암 본존불과 거의 같다.
왼쪽 팔뚝에 표현한 유려한 옷 주름은 오히려 석굴암 본존불을 능가할 정도다.
우리나라 역사에서 불상을 만드는 데 철을 적극적으로 사용한 것은
통일신라 말에서 고려 초에 이르는 비교적 짧은 기간이다.
이는 이 시기에 동(銅)을 원활하게 공급하지 못했던 사회 환경 때문인 것으로 파악된다.
철은 동(銅)에 비해 굳는 속도가 빠르고 표면이 거칠어 불상을 제작하는 데 여러 어려움이 있었다.
특히 불상의 완성도를 좌우하는 얼굴 표정과 손 모양, 옷 주름 등을 세밀하게 표현하기 위해서는
상당한 공을 들였을 것으로 짐작된다.
철이 이러한 단점을 지녔음에도 석굴암 본존불에 버금가는 불상을 제작한 것은
당시 사람들의 뛰어난 주조 기술이 뒷받침되었기 때문이다.
지구 반대편 유럽에서는 14-16세기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수준 높은 주조 기술을 선보이기 시작한다.
불법을 수호하는 여덟 신인 천天, 용龍, 야차, 건달바, 아수라, 가루라, 긴나라, 마후라가를
팔부중 또는 팔부신중(八部神衆)이라고 한다.
여기에 전시된 팔부중은 아수라와 건달바인데, 석탑의 기단부 상대석 면석에 새겨진 것이다.
아수라는 원래 싸움의 신이었으나 부처에게 감화되어 불법을 지키는 신이 되었는데, 얼굴은 셋, 손과 팔은 여섯 개로 표현된다.
건달바는 부처가 설법하는 자리에서 노래와 춤으로써 불법을 찬탄하는 신으로, 사자 머리 같은 관을 쓰고 있다.
십이지는 육십 갑자의 단위를 이루는 12개의 요소를 제각기의 동물로 표현한 것으로,
12방위에서 국토와 중생을 지키는 수호신이다. 십이지를 무덤에 부장하는 풍습은 중국 당에서 통일신라로 들어왔다.
통일신라의 왕과 귀족은 십이지상을 능묘 주위에 묻거나 호석에 배치하였다.
이 십이지상은 김유신 묘라고 전해지는 무덤 주위에서 출토되었는데, 갑옷을 입고 칼을 든 신장의 모습이다.
신장은 화려한 장식의 갑옷이 사실적이며, 펄럭이는 천의(天衣)가 생동감이 넘치는 것이 특징이다.
김유신 묘는 평복 차림의 십이지상을 봉분의 둘레돌(호석)에 배치하였고, 무덤 주변에도 이같은 십이지상을 묻었는데,
매우 독특한 사례이다.
이는 김유신이 사후에 흥무대왕興武大王에 추존된 것과 연관해 무덤을 개축하면서 있었던 일로 추정하기도 한다.
주머니 형태의 발걸이 호등(壺鐙)
말을 올라 타거나 달릴 때 발로 디디는 부분을 등자(鐙子)라고 한다.
그 중에서 호등이란 발 딛는 부분을 넓게하여 쉽게 발을 넣거나 뺄 수 있게 한 것으로,
둥근 테만 있었던 삼국시대의 윤등이 발전된 것이다.
정병(淨甁)은 목이 긴 형태의 물병으로 물 가운데서도 가장 깨끗한 물을 넣는 병을 이른다.
정병에 넣는 정수(淨水)는 또한 중생들의 고통과 목마름을 해소해 주는 감로수(甘露水)와도 서로 통하여,
감로병 또는 보병(寶甁)이라고도 일컫는다.
원래 용머리꾸미개는 다 돌로 만들지 않나? 중국도 다 건물이나 다리에 용머리돌로 되어있던데... 역시 황금의 나라 신라~~
[발해실]
<녹유치미> 발해 상경성 출토, 발해 8-9세기, 복제품 (용도: 용마루 양 끝에 세우는 궁전 지붕 장식물)
<용머리상> 발해 상경성 제1궁 전지, 발해 8-9세기, 일본 도쿄대학 복제품
670년 신라와 당의 전쟁 이후 한반도는 대동강 이남 지역을 통합한 통일신라와 고구려를 계승하는 발해가 공존하는
남북국시대가 되었다.
발해는 698년 건국하여 926년까지 존속했으며, 당시 주변 국가인 당, 통일신라, 일본과 활발히 교류하면서
독자적인 문화를 발전시켜 해동성국으로 불렸다.
건국 이후 중앙의 3성 6부 조직을 완비하고, 전국을 5경 15부 62주로 정비하여
중앙집권화를 추진하고 지방 사회를 효율적으로 통합, 재편해 갔다.
발해는 왕실의 위상을 높이기 위해 유교 정치 이념을 수용하고 불교를 통해
왕권의 정당성을 강화하면서 대내적으로는 황제국을 표방했다.
발해 지배층은 건국 당시부터 고구려를 계승하였다고 생각하였으며,
동아시아 주변 국가들 역시 발해를 고구려 부흥 국가 또는 후계 국가로 인식하고 있었다.
발해는 이렇듯 고구려의 전통을 기반으로 세워진 나라였으며,
당을 비롯한 동아시아 주변 국가들과 본격적인 관계를 맺으면서 발전해 갔다.
[고려실]
청자 인물형 주전자(靑磁 人物形 注子)는 1974년 7월 9일 국보 제167호로 지정되었다.
이 주전자는 머리에 모자(관)를 쓰고 도포를 입은 사람이 복숭아를 얹은 그릇을 들고 있는 모습이다.
모자 앞 부분에 구멍을 뚫어 물을 넣을 수 있게 하였고,
받쳐든 복숭아 앞 부분에 또다른 구멍을 내어 물을 따를 수 있도록 만들었다.
사람의 등 뒤에 손잡이를 붙였으며, 그 꼭대기에 작은 고리를 만들어 붙였다.
모자에 새 모양을 만들어 장식했고 모자, 옷깃, 옷고름, 복숭아에 흰색 점을 찍어 장식효과를 냈다.
맑고 광택이 나는 담록의 청자 유약을 전면에 두껍게 발랐다.
용산 국립중앙박물관 상설전시 실내전시(2) 2022년 5월 19일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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