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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병출 展
seeing_227.3x145.5cm_oil on canvas_2020
seeing_193.9x122cm_oil on canvas_2020
붓질의 파편과 본다는 것의 의미
1. 작가 우병출의 풍경은 낯익다. 국내외 어딘가를 옮긴 도시와 시원한 바람이 부는 듯한 강가, 저 멀리 바다의 끝자락에 놓인 빌딩 무리를 비롯한 한적한 숲, 여유로운 어촌과 한 폭의 수묵처럼 자리 잡은 바닷가 풍경 등이 그렇다. 모두 기차나 버스를 타고 가다 혹은 거리를 걷다 발견할 수 있는 장면들이다. 상상되거나 가공되어 초현실적이지 않은, 누구나 한번쯤은 동일한 공간 안에서 접해봤음직한 광경이며, 현실에 기반 한 ‘일상의 풍경’이다.
일상의 풍경은 익숙함과 더불어 정겨움을 동반한다. 과거 자연주의 화파의 그림이 그랬고 낭만적 경향의 작품들이 그랬다. 일부 상징주의 작품에서도 정겨움과 익숙함은 도태된 단어가 아니다. 다만 우병출의 풍경은 유독 서정적이고 시적이며 따뜻하다. 병풍처럼 둘러쳐진 빼곡한 건물과 인적 없이 차량으로 가득한 거리조차 도시인의 복잡한 삶의 단면을 보는 것 같아 타인의 그것 같지가 않다.
인식 가능한데다 심리적 거리감마저 좁은 우병출의 풍경은 그저 우리가 삶을 지탱하는 공간을 화폭에 전사한 것이 아니라, 예민한 시각으로 포착하여 섬세한 필법으로 직조되어 있다. 어찌나 세밀한지 흡사 사진처럼 다가오기까지 한다. 때문에 작품을 제작하는 데 있어 많은 시간과 공을 들였음을 읽을 수 있다. 하지만 꼼꼼하게 표현된 형상들은 작가 스스로 칭한 ‘검은 눈동자로 세상 보기’의 결과이다. 즉, ‘본다는 것’에 관한 나름의 답인 것이다.
타동사로써 본다는 것은 ‘시각화’의 다른 말이다. 구체적으론 3차원의 목적물을 2차원의 평면으로 압축하여 다시 공간으로 불러들이는 것으로, 흔히 이미지라는 이름으로 불린다. 이때 이미지화 된 목적물은 일차적으로 ‘모방’의 산물이다. 플라톤(Plato)의 말을 빌리자면 현실의 모방인 예술은 ‘모방의 모방’인 시뮬라크르(Simulacre)이므로 더 낮은 차원의 실재이다.
하지만 우병출의 그림들은 단지 망막에 맺히는 상에 국한되지 않는다. 인터뷰 당시 작가는 언급하지 않았으나 그에게 본다는 건 ‘나’ 아닌 다른 객관적인 대상을 해석하는 방식으로, 목적물과 다른 목적물과의 관계를 제대로 파악하기 위한 방법이다. 그렇기에 그가 말한 ‘본다는 것’은 눈으로 대상의 존재나 형태적 특징을 이해하려는 노력을 비껴간다.
상에 대한 이탈임을 설명할 수 있는 또 하나는 이미지 뒤에 감춰진 행위에 대한 관심이다. 여기서의 행위는 붓을 사용하여 화면을 운용하는 것이거나 짧고 긴, 뭉툭하거나 예리한 선의 흔적들을 탐구하려는 집요함을 가리킨다. 어쩌면 우병출의 작업은 이미지보다는 그 뒤에 배회하는 행위에 보다 초점을 두는 게 옳은지도 모른다.
마지막으로 우병출의 그림들은 인식으로써 ‘알다’와 일맥상통한다. 안다는 것은 사물의 속성을 파악한다는 것이지만 동시에 이치를 제대로 깨닫는 것과 맥락이 같다. 하지만 외형과 내면의 상은 다르며, 생물학적 시각과 마음의 시각은 천지차이이다. 형태, 색깔, 모양마저 동일하지 않기 일쑤다. 그렇기에 눈이 있는 사람이면 모두 다 볼 수 있지만, 역설적이게도 본다고 해서 모두가 아는 것은 아니다.
우병출의 작업은 그 관계를 관통한다. 현실의 세계가 드리워지는 무대이자, 가시적 환기를 뛰어 넘는 공감각적인 상황을 촉발하는 사이를 지난다는 것이다. 물론 언뜻 보면 흔한 풍경에 그친다. 허나 마음을 비우면 감각과 사고의 대상은 사라지고, 그때에 이를 경우 모든 대상은 실제 하지 않게 되며 또 다른 시각의 존재를 깨닫게 된다. 여기서 비로소 시각의 한계가 나타난다. 본다는 것과 안다는 것, 안다는 것과 이해한다는 것, 이해한다는 것과 깨달음은 서로 같은 듯 다름을 말이다.
이처럼 우병출의 작업에서 본다는 것은 행위의 종착지이면서 대상에 대해 더 구체적으로 알아 가는 것, 자신 또한 자신에 의해 규정된 수많은 타자들 중의 하나가 되어버리는 것이라 해도 무리는 없다. 다시 말해 망막에 비치는 모든 것이면서 ‘어떠한 사실에 대해 의식이나 감각으로 깨닫거나 느끼다’는 의미도 포함된다는 것이다.
seeing_193.9x122cm_oil on canvas_2020
2. 눈과 다른 시각의 체험은 그의 높은 빌딩과 현란한 거리, 고즈넉한 해안가 풍경이 눈에 비친 어떤 목적물의 모방에 그치지 않는 이유를 적절히 설명한다. 예술의 재현적 국면을 거부하지 않는 현실을 그렸음에도 현실을 기반으로 한 감정에 무게를 두는 작가의 미적 태도(이 글 아래에도 언급된다)를 보게 된다. 그런데 앞서 거론된 것들을 제대로 파악하기 위해선 조형적 관점을 배척할 수 없다. 작가에게 조형은 곧 언어이며, 언어는 작가적 변별력을 가중시키는 단어와 숙어이다.
대체로 부감법을 띠는 우병출의 작업은 구체적으론 ‘선’과 ‘선’의 조합이다. 색은 최소한으로 존재한 채 툭툭 내던지듯, 붓질의 자유로움이 녹아 있는 촘촘한 선들이 이어져 형상을 구축하는 구조이다. 그 선들은 바실리 칸딘스키(Wassily Kandinsky)가 말한 물결 같은 선이면서 기하학을 곁들인 선이다. 이 선이 캔버스 위에서 구성되는 대상과 내재적 시각의 대상화된 구성을 만든다.
이를 다른 말로 표현하면, 선 자체의 리듬을 느낄 수 있는 선율적 구성과 형태 및 묘사에 의한 복합화된 구성, 그리고 선율적 구성과 복합화된 구성을 조화롭게 담아낸 교향악적 구성이라고 할 수 있다.(교향악적 구성을 좀 더 자세히 말하자면, 그것은 외적 자연의 인상을 즉각적으로 기록한 인상, 내면의 과정을 담은 즉흥, 마지막이 의식적이고 의도적인 구성이다.)
교향악적 구성은 그의 모든 작품의 근간을 이룬다. 나무로 빼곡한 숲에선 직선과 사선이 교차하고, 그 속으론 바람과 옅은 빛이 호응한다. 한 바닷가 풍경 내 위치한 섬과 바다는 서로에게 조응하듯 균형감 있는 형세를 보여주면서 넓고 포근한 미감을 휘장처럼 두른 형국을 내보인다.
특히 위에서 바라본 도시풍경은 답답한 공간에 숨통을 터주는 원근법이 적용되어 시야의 흐름을 유도하고, 그 끄트머리에 다다르면 왠지 모를 청량함까지 전달한다. 이는 그의 그림이 실재와 비실재 간 거리감 혹은 분절의 골을 나타내는 기호로 작동하고 있다는 것을 가리키며, 상당히 이질적이면서도 동화 가능한 구성임을 나타낸다.
작가는 이러한 여러 조형적 알고리즘을 통해 예의 침묵과 침잠된 채 존재하던 시간(이 시간 속엔 정지한 채 부유하는 인간 삶도 녹아 있다)을 보여준다. 작가에 의해 천천히 그러나 숨 가쁘게 거둬들인 낱낱의 장면들은 일상으로 소환된 모든 것들을 익숙함의 생경함으로 전이시킨다. 밀도 높은 형상과 여백으로 상치되는 화면, 자유롭게 꿈틀거리는 선, 본다는 것과 안다는 것 등은 하나의 기록으로 남아 공간과 시간의 영원한 공생을 추구하며, 그렇게 애써 설명도 이해도 필요 없이 자신만의 세계를 환기시킨다.
흥미롭게도 이 환기는 타자에게도 고스란히 전이된다. 전이의 종국은 서두에 밝힌 서정미로 나타난다. 가필 없는 선묘(線描), 간결한 상과 무덤덤한 색채(무채색), 즉흥적이고 감성적인 자유로움이 물씬한 선의 흐름은 작가 특유의 감각을 느끼게 하는 요인이다.
순연하게도 이 요소들은 천천히, 그러면서 질서 있게 조형의 원리를 구축하면서 다시 우병출만의 언어가 된다. 작가의 사변적이고 정서가 배어든 내레이션은 관람자들에게 동질성을 배격하는 주요 원인이다. 왜냐하면 근본적으로 그에게 있어 작품이란 어디까지나 그가 경험하고 사색하며, 깨달은 그만의 법칙과 철리(哲理)를 세상에 전하는 채록의 도구임에는 변함없는 탓이다.
이렇듯 우병출의 작품들은 시공을 텃밭으로 한 무덤덤한 세상의 잔상, 붓이 지나간 흔적들, 격앙되지 않은 감정의 흐름, 일편의 경험 또는 그로부터 빚어진 심상이 갖는 작은 떨림 등으로 인해 대상의 심미적 차용화라는 특징을 지닌다. 그것은 이미지자체보단 수 없이 일일이 쪼개고 다듬은 시간의 파편에 의한 결과이며, 시간의 파편은 ‘붓질의 파편’으로 완성된다. 드러남이 붓질의 파편을 억누르는 형국이긴 해도 붓질의 파편은 언제나 드러남의 기원이다.
3. 한편 우리가 어떤 작품에 대해 공감을 표하거나 소장의 가치를 느끼는 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다. 빼어난 기술로 매우 잘 그린 그림이기에 혹은 장식성이 강해서 등등 헤아릴 수 없이 많다. 쉽게 수용 가능하다는 것, 대상으로 인한 인식의 범주도 그 작품을 선택하는 데 중요한 배경이 된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잘 팔리거나 대중에게 인기가 있다하여 예술적 가치까지 인정받는 건 아니다. 그 둘의 간극은 생각보다 넓고도 깊다. 어느 땐 완전한 극과 극의 위치에 선다. 허나, 그렇다고 어느 것이 더 좋고 나쁨은 없다. 예술의 효용은 하나의 결을 지니지 않은 탓이다.
다만 예술가의 미적 태도는 중요한 가치척도이다. 예술의 조형을 넘어 자연과 사회 및 주체의 세계관을 확인할 수 있는 기준이다. 미래를 예견하는 일종의 나침반이 된다는 것도 부정할 수 없다. 그런 점에서 “붓이 주인공으로 보이도록 노력하는 것은 지루한 작업을 해야 하는 싸움의 연속이었다.”거나 “그 무의미한 무한 반복 작업에, 내가 보여주고 싶은 나의 열망이 숨어 있다.”는 작가의 발언은 작가가 지향하는 ‘붓이 캔버스의 주인공이 될지 모를’ 그 날을 향한 명료함을 예상케 한다.
작가도 인정하듯 이미지에 가려진 어떤 것(또는 아무런 의도도 없는)을 아예 배제할 수는 없으나 후자에 대한 스스로의 경주가 진행되고 있음을 엿볼 수 있는 것도 사실이다. 작가가 두문불출하며 작업에서 벗어나지 않은 채 그림에만 매달리는 것이나 이 평론의 소실점 역시 궁극적으론 그곳에 있다. 이미지로 보이는 세계보다 그 세계를 이루는 기초에의 열망이 비로소 도달하는 곳, 작가가 온전히 만족할 만한 단계에서의 ‘본다는 것’ 너머에 존재하는 곳 말이다.
홍경한(미술평론가)
seeing_181x91cm_oil on canvas_2020
Fragments of brush stroke and the meaning of 'seeing'
1. The landscape of the artist Byung-chul Woo is familiar. These are like that , the scenes of cities that have been moved from somewhere at home and abroad, riverside that seems to have a cool breeze, the quiet forests, including a group of buildings at the end of the ocean, relaxed fishing villages, and beach scenery that is settled like an ink painting and so on.All of these scenes can be found on going by a train or bus, or walking on a street. It is a sight that everyone would have probably come across in the same space at least once, not surreal because it is imagined or processed. So it is a reality based " The landscape of daily scene"The everyday scenery is accompanied by familiarity and warmth. This was the case with paintings by naturalist painters in the past, and works with romantic tendencies. Even in some symbolic works, friendliness and familiarity are not dead words. However, the scenery of Byung-chul Woo is especially lyrical, poetic and warm. The crowded buildings surrounded like folding screens and even the streets filled with cars without people seem like the complex slice of urban life, which is not like that of others.The landscape of Byung-chul Woo, which is identifiable and has a narrow psychological distance, is not just copied the space where supports our lives into a canvas, but captured from a sensitive perspective and get woven into delicate brush strokes. It is so detailed that even looks like a photograph. Therefore, it can be read that it took a lot of time and effort to produce the work. However, a configuration expressed meticulously are the result of himself-described "viewing the world with black eyes." In other words, it's his own answer to "seeing."Seeing as a transitive verb is another word in 'visualization'. Specifically, a three-dimensional object is compressed into a two-dimensional plane and brought back into space, often called to as an image. The object imaged at this time is primarily a product of imitation. To borrow Plato's words, art, an imitation of reality, is a reality of lower level because it is "simulacre" that is 'an imitation of imitation'. However, Byung-chul Woo's paintings are not limited to images on the retina. He did not mention it at the time of the interview, but for him, 'seeing' is a way of interpreting other objective object rather 'I' which is a way to properly understand the relationship between the object and the object. So "Seeing" that he said about reflects his efforts to understand the existence or morphological characteristics of the object with his eyes. Another thing that can explain the departure from the prize is the interest in the actions hidden behind the images. The act here refers to the use of a brush to operate the screen or to the persistence of exploring short, long, blunt, or sharp traces of lines. Perhaps It might be right that Byung-chul Woo's work should be understood as a that of focusing more on the behavior of hanging around behind rather than images.The work of Byung-chul Woo penetrates the relationship. It is a stage where the world of reality is cast over, and it passes between triggering synesthesia beyond visible ventilation. At first glance, of course, it's just a common scene. However, emptying one's mind will disappear the object of sense and thought, and when that happens, all objects will not actually exist and realize the existence of another perspective. This is where the limits of visual function appear. It's realized that seeing and knowing, knowing and understanding, understanding and recognizing are the same but different.Like this , it is safe to say that " seeing" in the work of Byung-chul Woo is a destination of behavior and is to learn more specifically about the subject and to become one of the numerous objects defined by himself. In other words, it's everything reflected in the retina and also includes the meaning of 'recognizing or feeling any fact through consciousness or sens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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