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년 만에 이룬 소원 / 박선애
우리 형제자매의 카톡방에 어머니의 문해 학교 졸업식이 있다는 소식이 올라왔다. 시간 맞춰 가자고 했다. 동생은 전에 졸업식에 가 본 적이 있는데 가족은 오지 않더라고, 우리만 가는 것은 다른 분들에게 상처가 될 수 있다고 조금 꺼린다. 주최하는 곳에 연락해서 자녀들 참석하라고 알리라고 제안했다. 어머니에게 특별한 날 같이하고 싶었다.
어머니는 5년 전부터 주간 보호 시설에 다닌다. 그 무렵 방에서 일어나다 주저앉으면서 두 번이나 척추뼈가 망가져 콘크리트 시술(경피적 척추 성형술)을 했다. 또 교회 가다가 넘어졌는데 팔이 부러져 수술하고 꽤 오래 집에 오지 못했다. 얼마 후에는 경로당에서 놀다가 집에 오는 길에 고꾸라져서 골반 뼈에 금이 가 몇 주 동안 병원에 누워서만 지냈다. 그러자 걷지를 못했다. 밖에 나가지 못해 창밖만 내다보면서 이렇게 살아서 뭐 하겠느냐는 푸념을 하셨다. 정신은 총총한데 몸을 마음대로 움직이지 못해 가족에게 짐이 되는 것을 견디기 힘들어했다. 치매도 필요할 수 있겠다는 어처구니없는 생각을 잠시 해 봤다. 우울감이 심해 병원 진료를 받았지만 약은 부작용 때문에 계속 먹을 수가 없었다. 주간 보호 시설을 소개받았다. 어머니의 성격이 소심해서 낯선 곳에서 모르는 사람들과 잘 어울려 지낼 수 있을까 걱정했다. 우리의 염려가 무색하게 어머니는 적응을 잘했다. 가 보니 옆 동네 친구, 오일장에서 장사하던 사람, 우리 동네가 친정인 분, 또 누구네 친척 등 같은 면에서 70여 년을 살다 보니 한 다리 건너 다 알 만한 사람들이더라고 하면서 갈 시간을 기다렸다.
어머니는 1929년에 태어났다. 위로 한 분, 아래로 세 분의 외삼촌이 있었다. 외할머니는 외동딸을 귀하게 여기고, 일 많은 우리 집에 와서 고생한다고 늘 안타까워했다. 그래도 딸이라 학교는 보내 주지는 않았다. 외가가 있는 면 소재지에는 그 당시 6년제 공립보통학교와 2년제 간이 학교가 있었다. 어머니는 어린 마음에도 보통학교는 못 오를 나무로 여겨, 간이 학교라도 보내 달라고 할머니께 졸랐지만 들어주지 않았다. 외할머니는 그것이 평생 마음에 걸렸던지 병석에 누워 계시면서 미안하다고 하셨다. 어머니는 그 이야기를 내게 하면서 소작농이나 겨우 면한 가난한 살림에 어떻게 딸까지 학교에 보내겠냐고 쓸쓸히 웃으셨다.
어머니는 야학에서 일본 글을 조금 배웠다. 열일곱 살에 해방이 되고 나서는 그마저도 공부할 곳을 찾지 못하고 보내다 열아홉 살에 결혼했다. 그 후에 우리 동네에도 한글을 가르치는 야학이 생겼지만 새벽부터 방아 찧어 밥하고, 낮에는 들일하고, 밤에는 바느질해야 하는 며느리로서는 가기 힘들었다. 그래도 틈이 나면 가끔 기웃거렸다. 설,추석에만 갈 수 있는 친정에서 며칠이라도 다녀 보지만 다시 시집으로 와야해서 지속적으로 할 수가 없었다. 일본 글도 우리 글도 어중간하게 배우다 말아 제대로 쓸 수 없는 것을 안타까워했다. 쓰는 것은 고사하고 읽는 것도 여의치 않으니 그것을 늘 부끄러워했다.
주간 보호 시설 다니시는 것을 학교 가는 것처럼 좋아한다. 똑똑한 할머니, 강한 아버지 아래서 목소리 없이 살았다. 아버지까지 돌아가시고 나니 이제야 진정한 해방을 맞았다. 때아닌 황금독신여성이 되었다. 어지르는 사람 없어 원하는 대로 깨끗하게 치운 집에서 처음으로 어머니의 취향과 시간에 맞춰 살았다. 아침이면 미리 준비하고 통학차를 기다린다. 더없이 착실해서 시간 약속뿐만 아니라 마스크 쓰는 것 한 번 잊어버리는 일 없을 만큼 규칙을 잘 지켜 모범생으로 칭찬을 받으니 더 기가 살았다. 인생 최고의 시간을 보내며 ‘나는 행복한 사람이다.’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살았다.
거기서 무얼 했냐고 물으면 신나서 대답했다. 운동을 가르쳐 주면 따라 한다고 했다. 코로나가 생기기 전에는 봉사자들이 공연을 오는지 굿을 잘 보고 왔다고도 했다. 그러면서 조금 나은 사람은 2층으로 공부하러 간다고 했다. 숫자 퍼즐 맞추고, 그림에 색칠하고, 종이접기도 한다면서 그게 무슨 공부라고 할 게 있겠냐고 수줍어했다. 글을 배우는 것만 공부라고 생각하며 문자를 우러러보는 마음이 있다. 학교에서도 여러 과목이 있어서 그런 것이 다 공부라고 해도 그때뿐이고 글공부를 못한 열등감을 벗어나지 못한다.
우리가 가면 가져온 학습 결과물을 넌지시 내놓는다. 어느 명절 무렵에는 색동 한복을 색칠하고 아래에 인쇄되어 있는 ‘( )에게 드립니다.’라는 문장의 ( ) 안에 언니 이름을 써 왔다. 언니는 색 배합을 너무 예쁘게 하고, 테두리 밖으로 나오지도 않게 꼼꼼하게 잘 칠했다고 칭찬했다. 장난으로 왜 언니만 주냐고 하니, 언니 어릴 적에 집에서 짠 명주에 색동으로 물들여 만든 옷을 입혀서 나가면 아기 이쁘다는 소리를 많이 들었던 생각이 나서 그랬다고 한다. 힘들었지만 행복했던 한때를 떠올렸나 보다. 우리의 칭찬에 자신감을 얻었는지 복주머니 그린 것, 색종이를 접어서 만든 꽃 등을 내놓는다. 그러면서 복지관(주간 보호 시설)에 더 많이 걸려 있다고 한다. 우리 어머니가 잘해서 뽑혔는가 보다고 하니, “몰라, 다른 노인네들 것보다는 쬐끔 나슨 것은 같어.”라고 소심하게 잘난 체한다.
일주일에 몇 번씩 간다는 2층 공부방이 문해 학교였던 것인데 그것도 몰랐다. 무심한 딸이다. 한번은 사진관에 가서 사각모 쓰고, 또 어느 날은 2층에 가서 한복 입고 사진을 찍었다고 했다. 그러면서 졸업한다고 했다. 여남은 명이 시작했는데 끝까지 남은 사람은 다섯 명이라고 한다. 4년이 지나면서 학생이 하늘나라로, 또는 요양원에 가느라 중퇴하는 참 슬픈 학교다.
2월 24일 드디어 졸업식 날이 되었다. 처음 가 보는 진도 여성 플라자는 향토 문화 회관 뒤쪽에 있다. 언제 생겼는지 시원하고 넓은 터에 자리잡은 건물은 높고 크다. 우리 남매들과 어머니와 친한 사촌 언니가 꽃다발을 들고 시간 맞춰 갔다. 무대 위에는 ‘제3회 초등 학력 인정 진도군 성인 문해 학교 졸업식’이라는 작은 글씨 아래 더 크게 ‘열정과 도전! 인생의 꿈을 이룬 졸업을 축하드립니다.’라는 문장을 낱말마다 빨강, 노랑, 초록색으로 알록달록하게 쓴 현수막이 높이 걸려 있어 분위기를 돋운다. 앞쪽을 향해 ㄷ자로 배치한 자리에는 몇 개의 문해 학교에서 모인 졸업생 열다섯 명이 사각모에 가운을 입고 앉아 있다. 어머니는 우리를 보고 반색을 한다. 원래도 작은 어머니가 그동안 더 말라서 사각모 끈을 조여도 자꾸 내려와 안타깝다. 축하객들이 많이 와서 어느 학교 졸업식보다도 더 밝고 즐겁다. 식전에 가족에게 미리 받은 축하 동영상을 보여 준다. 우리 집 대표인 오빠는 너무 바르게 찍어서 좀 딱딱하다. 다른 졸업생의 늙수그레한 아들이 진도 사투리로 능청스럽게 말하는 영상이 재미있어 인기다.
졸업식이 시작되었다. 중요한 회의에 갔다는 군수를 대신한 부군수의 인사말, 군의원의 축사, 졸업생의 영상 상영, 졸업생 대표의 졸업 소감 낭독 등이 이어졌다. 부군수가 자리에 찾아다니며 진도 군수 명으로 주는 졸업 패, 전라남도교육감 직인이 찍힌 (초등) 학력 인증서, 꽃다발, 선물을 준다. 10대에 그토록 원했던 졸업장을 95세가 되어서야 받는 감격스러운 순간이었다. 이제 중학교 가셔야겠다고 하는 형부의 말에 다 같이 웃었다.
어머니는 다시 공부를 시작했다. 다들 집에 혼자 있을 수 없는 노인들이 모인 곳이다 보니 구관에서는 원하거나 할 만한 사람이 세 명뿐이라고 한다. 신관에 모여 거기에서 함께하는 몇 명과 함께 공부한다. 이제 글자를 배운다고 한다. 이 나이에 무슨 공부가 되겠냐고 하면서도 화, 금요일 두 번 하는데 이번 금요일에는 무슨 사정인지 빼먹었다고 서운해한다. 올해 들어 부쩍 다리 힘이 없어 주저앉을 것 같다고, 죽을 데가 아파야 쓸 것인데 이러다 못 걷게 되면 어쩌냐고 걱정이 많다. 나이가 더 적어도 스스로 움직이지 못하거나 치매에 걸린 사람들에 비해 그나마 정신이 있어서 감사하다고 하면서도 이제는 행복하다고 말하는 횟수도 줄었다. 80년 만에 소원을 이룬 우리 어머니의 마지막 바람은 요양원 거치지 않고 하늘나라로 직행하는 것이다. 어머니를 위한 기도가 서글프다.
첫댓글 와! 어머님이 정말 대단하시네요. 우리 어머니도 몸이 아파 우울해 하시는 날이 많더라고요. 부모님에게 연락이라도 자주 드려야겠어요.
아버지가 돌아가기고 나니 후회되는 것이 많더라고요. 직장과 집을 다니시려면 자주 찾아 뵙기는 힘들 것 같으니, 전화라도 자주 드리세요.
눈물 나요.
읽어 주셔서 고맙습니다.
낱말 사이사이, 행 간에 그림이 그려집니다. 구순 할머니의 인생이 보리밭 향기처럼 전해옵니다. 성실하고 진득하게 사시면서 아이들을 키우신 장한 어머니의 문해학교 졸업을 진심으로 축하합니다. 그런 어머님의 자녀분들도 행복하시겠습니다. 제 고향 진도의 소식을 이리 아름다운 이야기로 전해 듣네요. 고맙습니다.
저번에 댓글에 보배 섬 진도가 고향이라고 하신 걸 보고, 저만큼 진도를 사랑하는 고향 분을 만나서 반가웠습니다. 댓글로 표현할 기회를 놓쳤어요.
감동의 졸업식입니다. 어려운 시대를 살아낸 우리네 엄마 덕분에 지금 우리가 행세하며 행복한 생활을 누립니다. 건강하시기를 빕니다.
고맙습니다.
우리 엄마와 동시대를 살아오셨네요.
지난날 할머니들과 함께 공부하며 지냈던 일이 생각납니다. 문해교실 오는 날이 최고로 행복하다고 너무 좋아했어요.
어머님이 앞으로도 행복하고 건강하게 지내시길 바랍니다.
고맙습니다.
배울 수 있다는 것은 행복한 일인데 그걸 잊고 살아갑니다.
어머니의 졸업 축하 드립니다.
'어머니 만세'를 외쳐야 겠어요. 장한 어머니이네요. 퇴직 후 문해교육을 하려고 자격증까지 땄는데
손주들 때문에 못했어요.
너무 보기 좋네요. 선생님 . 어머님 졸업 축하드립니다.
예전에 문해반 어르신들 글쓰기 전시회에 간 적이 있었어요. 반듯한 글씨체에 예쁜 표현에 깜짝 놀랐던 기억이 납니다. 잘 읽었습니다.
엄마 돌아가시고 문해반 졸업식에 가지 못한 게 큰 한으로 남았습니다.
95세에도 도전을 멈추지 않는 어머니는 참으로 장하고 멋진 분이네요.
따님이 어머니 닮아 아이들에게 정성을 다하는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