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돈과 종이꽃 / 곽주현
손주들이 우리 집에 들른다 해서 기다리고 있었다. 지네 엄마, 아빠 모임에 따라갔다가 자고 간다고 한다. 밤 10시쯤 들어왔다. 인사를 하는 둥 마는 둥 하고는 무슨 좋은 일이 있는지 깔깔거리며 안방으로 들어간다. 할머니에게 풀, 가위, 색종이 달라고 한다. 잠잘 때가 넘었으니 그만 놀라고 해도 말을 듣지 않는다. 한참 지나도 거실로 나오지 않아 꿈나라로 갔나 싶어 가만히 문을 밀었지만 열리지 않는다. 무어라 속닥거리는 소리가 들려 노크를 하니 잠깐만 기다리라고 한다.
외손녀 도은이가 서재에 있는 나를 부른다. 다른 장난감 찾는 줄 알고 얼른 나와 봤다. 내 손을 잡아끌어 소파에 앉히고는 눈을 감으라고 한다. 이 녀석이 또 무슨 장난하려고 그런가 싶어 시키는 대로 했다. 낄낄대며 웃는 소리에 살짝 실눈을 뜨고 살펴봤다. 꽃을 내 옷깃에 달고 있다. 색종이를 접어 만든 종이꽃이다. 거기다가 목걸이까지 걸어준다. 털실에다 금박지, 은박지로 별, 달, 해 등을 그려서 자른 것을 알록달록하게 붙여 예쁘게 장식했다. 까닭을 몰라 어리둥절하고 있는데 내일이 무슨 날이냐고 묻는다. 특별히 생각나는 것이 없어 ‘일요일이지.’했다. 그것 말고 더 생각해 보라며 꼬막손으로 내 눈을 가린다.
‘내일 5월 15일이 무슨 날이지?’ 아무리 머리 굴려봐도 특별한 일이 없어 뚱한 표정을 지었다. 정말 모르겠냐며 종이꽃을 펼쳐보라 한다. 삐뚤빼뚤 연필로 쓴 글씨라 읽기가 어려워 안경을 찾았다. “곽주현 선생님 사랑합니다. 축하합니다.”라고 쓰여있다. 어제 유치원에서 ‘스승의 날’을 배웠단다. 엄마가 옛날에 할아버지도 선생님이었다고 해서 이렇게 선물을 준비했다고 한다. 거기다 색종이를 더덕더덕 붙여 만든 봉투도 하나 준다. 빼꼼하게 열린 틈으로 누런 지폐가 보인다. 모임에 온 삼촌이 준 것이다. 지켜보고 있던 동생 지원이가 ‘나도 있다.’라며 주머니에서 돈을 꺼내 내 손에 쥐여준다. 이렇게 기특할 수가! 이럴 땐 어떻게 표현해야 할까? 떨리고, 벅차고, 오지고, 뭉클하고…. 적절한 언어가 없다. 그냥 두 놈을 꼭 껴안고 뒹굴었다.
유치원생이 이럴 수 있다니 믿어지지 않는다. 한참 동안 두 아이를 번갈아 가며 보고 또 보았다. 아내는 손자들 때문에 잊힌 젊은 날을 되찾았다며 덩달아 웃는다. 선물을 두고두고 가보로 간직해야겠다고 한술 더 뜬다. 일단 사진을 찍어 저장했다.
스승의 날, 잊고 있었다. 설령 기억하고 있어도 별다른 느낌이 없었을 것이다. 현직에 있을 때 연례행사로 치르는 그날이 오면 별로 기분이 좋지 않았다. 아이들이 꽃을 달아주고 스승의 은혜를 제창하며 축하하지만, 내가 스승인가 하는 생각이 들어 달갑지 않았다. 아이들을 보살피고 가르치는 것을 직업으로 선택해서 맡은 일을 행하고 있을 뿐인데 ‘스승’이라는 말을 들으면 늘 거북했다. 교사-선생님-스승이라는 순서로 등급을 정하고 나는 그냥 직업인으로서의 교사라 여겼다. 그래서 ‘선생님의 날’로 바꾸고 하루를 편히 쉬게 하면 좋겠다는 생각을 줄곧 했다. 그때의 시대상이 그랬기는 했지만, 학생의 인권은 높은 선반에 올려놓고 훈육이라는 말로 포장해서 얼마나 많은 아이에게 상처를 주었는지 헤아리기 어려워 그런 날은 더 부끄러웠다.
최근에 인터넷에서 선생님들이 ‘쉬는 시간에 공부를 가르친다.’라는 현수막을 들고 거리로 나온 사진을 봤다. 나 때도 교사는 가르치는 것이 본업인데 처리해야 행정 업무가 많아 수업은 뒷전으로 미루어야 할 때가 흔하게 있었다. 공문 보고를 정해준 시간에 하지 않으면 불호령이 떨어지지만, 수업은 티가 나지 않기에 그것 먼저 처리한다. 이런 날은 ‘내가 선생인가?’ 하는 의구심을 지을 수 없어 우울했다. 그런데 교직 현장에서 여태껏 그런 일이 개선되지 않는 것 같아 안타깝다.
손주들이 선물한 종이꽃과 오만 원권 지폐 두 장을 넣어 액자 비슷하게 만들어 책상 바로 옆에 걸었다. 의식하지 않아도 하루에도 수십 번씩 보게 된다. 미소가 번진다. 그런 날이 벌써 3년이 다 되어 간다. 그들의 선생님으로 승진해야겠다.
첫댓글 마지막이 좀 아쉽습니다. 선생님을 스승으로 바꾸시면 더 좋을 듯 합니다. 너무 아래로 등급을 매기셨습니다.
유치원생이었던 손자들의 마음씀씀이가 너무나 기특합니다. 그 애들이 잘자라는 것을치켜보는 기쁨이 크실 것 같습니다.
읽는 동안에도 입가에 미소가 어립니다. 손자들은 든든한 스승은 할아버지시네요. 저도 돌아 보면 부끄러움이 많은 교사였답니다.
귀엽고 사랑스러운 손자와 너그러운 할아버지의 단란한 풍경에 덩달아 마음이 푸근해집니다.
곽주현 선생님 누구 못지않은 훌륭한 선생님으로 제자들의 기억 속에 남아 있을 것임에 틀림없습니다.
손자들에게 할아버지이자 진정한 스승이네요. 귀여운 녀석들, 어떻게 그런 앙증맞은 생각을 해서 여러 사람 감탄하게 하는지 옆에 있으면 꼬옥 안아주고 싶어요.
선생님은 글은 정말.
좋아요.
특히
성찰하는 부분이
되게 마음이 아프네요.
뭐라 설명할 순 없지만.
멋진 사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