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자 : 2017. 2. 28
장소 : 경남하동군청암면묵계리
청학동(靑鶴洞)은 신선이 학을 타고 노닐던 지상선경이라하여 중국의 무릉도원과 같이 천하 명승지라 일컷는 곳이다. 그리하여 우리조상등은 청학동을 꿈에도 있지 못할 이상향으로써 천하만인을 제도하여 지상선경을 건설 할 철학이 비장되어 있다고 전해오고 있다. 이곳 도인촌(道人村)은 강대성(단기 4223~4287)에 의하여 창건된 도(道)로써 유불선 삼도 합일지리 유도를 갱정하여 일심(一心)을 교화 시키는 도(道)이다.
청학동을 처음 찾았을 때는 아주 오래전이다. 교직에 있을 때 학생들과 같이 지리산 청학동을 지나 산을 넘어 쌍계사로 가던중 청학동을 알게 되었다. 특히 작은 서당에서 학동들이 훈장님앞에서 작은 책상을 앞에 놓고 공부하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그것을 계기로 다시 찾아 갈 때는 하동까지 버스를 타고 가서 다시 청학동에 가는 버스를 타고 갔다. 어둠이 깔린 밤에 도인촌에 들어가서 잘곳을 찾으려고 하는데 그 당시 이 도인촌은 사실 외부인의 출입이 금지된 곳이다. 마침 길에서 한사람의 도인(서흥석)을 만났는데 "어떻게 오셨습니까? 이곳에는 주무실 곳이 없습니다" 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지리산을 가다가 길을 잃었는데 어떻하면 좋으냐고 하면서 헛깐이라도 좋다고 하니 걱정을 하다가 결국 자기네 집으로 같이 가게되었다. 방이 둘 있는데 사랑방에는 약초가 가득한 방으로 약초향이 가득했고 문은 많이 찢어져 있었다. 성공했구나 하고 있는데 저녁식사는 하셨습니까 하고 묻기에 하동에서 먹고 왔지만 식사가 궁금하여 아니 괜찮습니다 하니 잠시후 작은 밥상이 들어와 저녁을 잘 먹고 있는데 다시 벌집이 있는 꿀을 한덩이 가져와 어떻게 먹는지 몰라 젓가락으로 벌집에 있는 꿀을 찍어 먹고 있는데 그렇게 먹는 것이 아니고 한 조각 떼어내어 입에 넣고 꾹 짜먹고 나면 밀납이 남는데 뱉으면 된다. 그것이 인연이 되어 계속 20여년간 일년에 몇 차례씩 청학동을 찾았다. 두번째 갈때부터는 엑셀이라는 작은 승용차로 운전하여 갔는데 아무리 빨리가도 6시간 이상 걸렸다. 길이 비포장으로 바퀴가 빠지면 삽으로 파내고 고생을 해야했다.
그때 청학동은 도인촌으로 주경야독(晝耕夜讀)이 딱 맞는 곳이었다. 낮에는 밭일을 하고 밤에는 집집마다 책을 읽는 소리가 낭낭하였다. 당시 23가호에 120여명의 주민들이 살고 있었다. 옷매음새를 단정하게 하고 만나는 사람들 모두에게 인사를 하였다. 그렇다 보니 많은 사람들을 알게 되었고, 나는 이런 제안을 하였다. 앞으로 청학동은 분명히 변하니 지금 역사를 만들자 그리고 청학동에 박물관을 만들자 라는 제안을 하였다. 그런 얘기를 서흥석님을 통하여 청학동의 제일 어른인 촌장을 비롯한 어른들에게 전하였지만 받아들이지 않았다. 사진을 찍으면 혼이 나간다고 했다. 그러나 그렇게 몇년을 조심스럽게 다니다 보니 마침 청학동에서 결혼식이 있는데 "아무한테도 알리지 않았는데 선생님 한테만 알리니 오세요" 하여 학교에 얘기하여 결혼사진을 찍어 커다란 앨범을 만들어 주었다. 그렇게 하여 청학동을 역사를 만들기 시작하였다. 천제당에서 지내는 큰 제사에도 참가할 수 있게 되었다. 천제당에 들어갈 때는 목욕제배하고 들어가야 하며 제사음식을 고는 사람들은 코와 잎을 문종이(화선지)로 둘러 묶고 한다. 청학동 꼬마들이 밭에서 놀고 있기에 어떻하면 좋은방법이 없을까 생각하던중 서울 손기정 기념관에서 낙도에 문고를 만들어 주었다는 신문기사를 보고 바로 서울로 달려가 청학동 상황을 얘기하여 그 꿈이 이루어 졌다. 그래서 승용차로 몇차 실어 청학동에 보낸일이 있다. 그때 청학동에 집을 하나 만들고 싶어 알아보니 땅 한평에 1만원 정도 였다. 서흥석님과 집이 나면 가서 보았는데 사고 쉽은 집은 전망이 좋은 언덕에 뒷편은 대나무 밭으로 둘러쌓인 집인데 마련하질 못했다. 청학동에 가면 사진을 배우러 오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가 누구와 결혼했고, 아이가 생겼고, 그 뒤로 이혼했고, 또 아이가 세상을 떠난 일들 30년 이라는 시간에 기쁜일들과 가슴아푼 많은 일들이 있었다. 청학동에 가면 꼭 만나 보고 쉽었던 사람중의 사람들인데 지금은 모두 청학동에 있지 않았다. 박물관을 만들 때는 땅을 무상으로 내놓은 사람이 있었는데 박물관은 군청지원으로 마련되었다. 그러나 갑자기 청학동이 뜨면서 땅값은 100배 이상 올랐고 그로인해 청학동에는 많은 문제도 생기게 되었다. 청학동이 변하게 되면서 그때부터 나의 청학동 걸음은 끝이었다. 그 세월이 얼마나 되었는지 기억이 나지 않으나 그때 서흥석님의 부인이 임신한 상태였는데 이번 알고 보니 그 아이가 31살 되었다니 31년 전이고 20여년간 계속 다녔는데 뒤로는 중국에 관심을 갖다보니 10년간 가질 않은 것이다. 그 사이 서흥석님은 열심히 성실하게 일을하여 청학동주차장에 있는 3층 건물(청학동 자연산장)을 만들었고, 1만평 부지에 (청학동서당,청소년수련원)을 만들었는데 너무나 잘 만들어 졌다.
지금 막 고로쇠(고로수)가 나오고 있으니 관심있는 회원님은 이번주에 꼭 가시고 청학동주차장에 (청학동회관, 청학동노인회) 맞은편에 있는 3층 건물 (청학동 자연산장 010-3558-4137) 서흥석 수련원장을 만나시면 도움이 되리라 생각됩니다. 밤새 고로수 마시고 PET병의 고로쇠 몇 통 사오시면 좋겠지요.
대전- 하동군 청학동 (검색)- (중부고속도로-대진고속도로 이용)-단성IC-덕산(시천)-청학동(3시간)
돌아 올때는 : 청학동-하동- 박경리 문학관 최판사댁(토지)를 보시고 오면 좋습니다.(4시간)







































첫댓글 아주 즐거운 좋은 여행이었습니다.
근데 청학동의 인상은 별로라 아쉽구요.
한 번은 가 볼만 합니다.
청학동이라면 옛날 산골 정취를 아직도 간직하고 있을 것이라는 생각은 환상이라는 생각이 드는군요.
세상이 이렇게 변했는데 청학동만 옛날처럼 살라는 말도 너무 잔인한 말이겠구요?
청학동이 세상에 오염되기전에는 청학동다운 운치가 있었는데 지금은 많이 변했지요. 저의태생지가 하동화개장터라 90년대에도 가보았습니다. 청학동에 관한 좋은글 잘읽었습니다.
주교수님 고향이 화개장터군요. 가장 아름다운 강하면 섬진강이라 생각됩니다. 아름다운 백사장, 은어, 재첩, 사람들을 포용할 수 있는 화개장터 모든것이 자랑스럽고 선한 곳입니다. 그래서 주교수님을 만난 사람들은 얼굴에 쓰여 있다고 하는 군요.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