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은 일반적으로 고난 받는 것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몸이 아프거나 괴로운 일을 싫어합니다. 쾌락을 좋아합니다. 편하고 좋은 것을 즐겨하지요.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창조하실 때 얼마든지 고통을 느끼지 않게 만들 수도 있었을 텐데 왜 그렇게 하지 않으셨을까요? 왜 언제나 편하고 기분 좋은 일만 느끼도록 만들지 않으셨을까요?
만일 인간이 고통을 느끼지 않는다면 그것은 축복이 아니라 저주일 것입니다. 필립 얀시의 책을 읽어보면 인도에서 나병환자들을 대상으로 의료선교를 했던 브랜드 박사에 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브랜드 박사가 발견한 나환자들의 가장 큰 문제점은 무엇입니까? 자기의 몸이 썩어가도 도무지 고통을 느낄 줄 모른다는 것입니다. 어떤 나환자는 감자를 구워먹다가 뜨거운 숯불 위에 손을 대어도 고통을 못 느낍니다. 정원에서 일하던 또 다른 나환자는 삽으로 인해 손가락을 다쳐 그의 손에서 피가 흘러내려도 그것을 모릅니다. 촛불을 손으로 꺼도 통증을 못 느낍니다. 깨진 유리조각 위를 거닐어도 아픔이 없습니다.
나환자들에게 문제는 나병 자체가 아니라 감각이 마비가 되어서 통증을 느끼지 못하는데 있습니다. 어떤 환자는 한 밤중에 잠을 자는 동안 쥐가 와서 손가락이나 발가락을 물어가도 통증을 못 느낄 정도였습니다. 그래서 브랜드 박사는 자기가 돌보는 나환자들로 하여금 자기 몸을 보호하기 위해 무조건 고양이 한 마리씩을 끼고 잠들게 했습니다.
이와 같은 의학적인 관찰을 통해 브랜드 박사가 도달한 결론은 고통이 하나님께서 주신 선물이라는 사실이었습니다. 나환자가 고침을 받기 위해서 가장 중요한 첫 걸음은 통증을 회복하는 일입니다. 병원에서 큰 수술을 받은 환자가 아무 통증도 느끼지 못하는 것은 위험한 일입니다. 빨리 아픔을 느껴야 합니다. 어딘가 통증을 느끼는 것이야말로 그 부위가 낫기 시작한다는 증거입니다. 그러므로 고통을 느낄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축복입니다. 고통을 느끼지 못하는 것은 저주입니다.
미국의 NBA 프로 농구 대회에서 실제로 일어난 일입니다. 최고의 인기를 누리던 스타플레이어 밥 그로스(Bob Gross)는 발목에 심한 부상을 입었음에도 불구하고 경기를 고집했습니다. 할 수 없이 주치의가 그의 발 세 곳에다가 강력한 진통제인 마카인 주사를 놔주었습니다. 그로스가 게임을 시작하자마자 리바운드를 잡으려고 애쓰는 순간 관중들이 다 들을 수 있을 정도로 “툭” 하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어마어마한 진통제 주사를 맞았기 때문에 통증을 느낄 수 없는 상태였지만 곧바로 발목뼈가 부러진 것이지요. 의사가 통증을 못 느끼도록 한 나머지 아예 그의 발을 영원히 못 쓰도록 만들었을 뿐만 아니라 농구 인생마저 접게 만들었습니다. 통증을 느끼는 것은 예방 신호입니다. 거기에 살 수 있는 길이 있지요!
<고통과 고난, 그 피할 수 없는 숙명>
오늘 봉독한 본문 말씀 71절에서도 고난당하는 것이 유익이라고 했습니다. 분명히 고난은 저주가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축복임에도 불구하고 고난을 당하는 것 자체는 참으로 힘들고 어렵습니다. 교통사고로 몸을 크게 다쳐서 찾아오는 고통, 참기가 쉽지 않습니다. 육체적 질고로 인해 당하는 고통 역시 견디기가 쉽지 않습니다.
하지만 육체적 고통보다 더욱 더 견디기 어려운 것은 정신적인 고통입니다. 마음의 상처가 훨씬 더 견디기 어렵습니다. 우리 몸에 난 상처는 때가 되면 저절로 아물게 됩니다. 하지만 마음 깊은 곳에 새겨진 상처는 좀처럼 낫지 않습니다. 내 의지와 상관없이 저절로 생각나고 우리를 힘들게 합니다. 하지만 오늘 우리가 당하는 고통이 어느 정도이든지 간에 고통과 고난이 결코 저주가 아니라 하나님의 선물이요, 마이너스가 아니라 플러스임을 믿으면서 고난이 주는 유익에 대하여 함께 상고하는 시간이 되길 바랍니다.
먼저 우리의 고통과 고난은 보편적인 것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누구나 다 고통과 고난을 피할 수 없습니다. 숙명적인 인간 조건이지요. 그래서 불교에서는 인생을 고해(苦海), 즉 고난의 바다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가난한 이들은 자기들만 고난을 당하는 것 같이 생각하지만 부자들에게도 그들이 알지 못하는 고난이 있습니다. 실패한 사람들 역시 그들만이 고난당한다고 믿지만 성공한 이들에게도 비슷한 고난이 있기 마련입니다. 병든 이들 역시 고난은 자기들의 전유물인 것처럼 생각할 수 있지만 건강한 이들에게도 나름대로의 아픔과 슬픔이 있습니다. 문제는 우리가 극심한 고난을 당할 때 그 고난의 크기가 다른 사람의 것보다 훨씬 더 크다고 느끼는데, 실상 인류가 당하는 고난의 크기는 거의 다 비슷비슷합니다. 이처럼 중요한 것은 인간으로 태어난 이상 누구도 고난을 피할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인간의 고난에는 크게 세 가지 종류가 있습니다. 첫째로, 자신의 잘못으로 인하여 당하는 고난입니다. 예컨대 음주운전을 하다가 사고를 내서 교도소에 간다고 했을 때 이 경우의 고난은 순전히 자기의 잘못 때문이지요. 그러므로 이로 인해 당하는 고난은 자기가 책임을 져야하며 하나님이나 사람이나 누구도 비난할 수 없습니다. 그저 잘못한 것에 합당한 고통을 달게 받아야 할 뿐입니다.
둘째로, 자신의 잘못과 상관없이 당하는 애매한 고난이 있습니다. 정당한 이유 없이 부당하게 당하는 고난이지요. 아무 잘못 없이 다른 사람이 저지른 사고의 희생자가 나올 수 있습니다. 총기 사고나 교통사고 등등, 좋은 사람들에게도 나쁜 사고들이 종종 일어날 때가 있습니다. 구약 성경에 보면 욥이 당했던 고난이 바로 이 두 번째 경우입니다.
셋째로, 자발적으로 기꺼이 당하는 고난이 있습니다. 이것은 이웃의 구원과 행복을 위해서 기꺼이 자진해서 당하는 고난이지요. 19세기 벨기에의 가톨릭 선교사 조셉 다미엔(Joseph Damien)은 나병 환자들만 집단으로 수용되어 있는 하와이의 몰로카이(Molokai) 섬에 가서 선교활동을 했습니다. 다미엔 신부는 나환자들과 똑같은 처지가 되기 위하여 자진해서 나병에 걸렸습니다. 알베르트 슈바이처 박사나 테레사 수녀 같은 이들이 당했던 고난이 모두 이 두 번째 경우입니다. 무엇보다 한 점이 흠이 없으신 예수께서 우리를 죄와 죽음에서 구속하시고자 십자가 위에서 당하신 고난이야말로 이와 같은 자발적이고 희생적인 고난의 대표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지금까지 말씀드린 세 가지 종류의 고난 중에서 가장 바람직한 것은 세 번째의 이웃을 위해서 즐거운 마음으로 기꺼이 당하는 고난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어떤 이유와 어떤 동기로 고난을 받는다고 할지라도 모든 고난은 우리에게 유익합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당하는 고난은 우리의 삶에 어떻게 유익이 됩니까?
<고난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첫째로, 고난은 우리가 하나님께 나아가도록 만드는 출발점이 되기에 유익합니다.
사람은 고난당하기 전까지 자기가 최고인줄 압니다. 그리하여 자신의 학력과 경험과 재주와 재산을 의지하지요. 하지만 그러다가 인간은 자신이 해결할 수 없는 고난을 만나게 될 때 비로소 하나님을 의지하기 시작합니다. 고난을 받는 동안 우리가 끝까지 자신의 의를 고집하면 고난을 극복할 수 없습니다. 먼저 우리의 죄를 하나님께 자복하고 회개해야 합니다. 하나님께 자복하고 회개하면 아무리 끝날 것 같지 않던 고난의 터널도 반드시 끝이 나고 광명한 세계가 밝아옵니다.
어느 주일 아침 한 남자가 침대 안에서 뒤척거리며 일어나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러면서 아내에게 볼멘소리로 불평합니다. “여보, 나 오늘 교회 가기 싫어요. 정말로 피곤해요. 교인들이 나를 좋아하지도 않아요. 게다가 설교는 언제나 지루하고 재미가 없단 말이오!” 아내가 남편을 침대에서 밀어내면서 소리칩니다. “당신은 무슨 일이 있어도 교회에 가야만 해요! 왜냐하면 첫째, 우리의 기분이 어떻든지 간에 우리의 처지와 상관없이 주일예배는 무조건 드려야 해요. 둘째, 교인들이 당신을 좋아하든 싫어하든 간에 그것은 우리가 예배당에 가는 것과 아무 상관이 없어요. 셋째, 당신이 목사이기 때문이에요.”
누가 만들어 낸 조크인지 모르지만 목사에게도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지요. 하지만 목사가 당하는 고난도 오히려 사람을 의지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만 의지하게 만드는 방편이 됩니다. 실제로 이스라엘을 비롯한 중동 지방에 가면 양들 중간 중간에 반드시 한두 마리의 염소가 들어가 있는 것을 흔히 볼 수 있습니다. 이유를 들어보니 흥미롭습니다. 양들은 게으른 짐승들이기 때문에 일단 풀을 뜯어먹고 배가 부르면 무조건 눕기를 좋아한다는 것이지요. 양들이 배불리 누워 있으면 운동 부족으로 살이 찌고 병에 걸립니다. 그런데 염소는 체질상 누워 있는 양만 보면 가만있질 못하고 뿔로 무조건 찔러댄다는 것입니다. 결국 양들은 염소 때문에 정신을 똑바로 차리고 움직이기 때문에 건강해진다는 이치입니다.
교회 안에도 다 양만 있는 것이 아니고 때로 염소도 있겠지요. 하지만 나중에 알고 보니 그 염소도 다 유익이 될 때가 있습니다. 그 때문에 하나님께로 나아가 더욱 더 하나님께 매달리기 때문이지요. (그렇다고 해서 이제부터 나는 염소가 되어야 하겠다는 분은 없기를 바랍니다. 그래도 염소보다는 양이 좋지요!)
둘째로, 고난을 통해서 바른 길로 갈 수 있기 때문에 유익합니다.
본문 67절은 말씀합니다. “고난당하기 전에는 내가 그릇 행하였더니 이제는 주의 말씀을 지키나이다.” 고난당하기 전에는 교만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이 귀에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마음에 딴 곳에 가 있다 보니 그 말씀대로 살지 않았고 그릇 된 길로 갔습니다. 그런데 이제 내가 잘못 해서 당하는 고난이든 내 잘못과 상관없는 고난이든 간에 고난을 받다보니 깨닫습니다. “아, 내가 교만했구나.” “아, 내가 잘못 살았구나.” “아, 내가 하나님의 뜻과 상관없이 내 멋대로 살아왔구나.” “아, 내가 내 욕심만 이루려고 가족들과 이웃에게 너무 큰 고통을 주었구나.” 깨닫게 됩니다. 그래서 바른 길로 갈 수 있습니다!
에이브람 링컨이 시골길을 걷고 있는데 한 농부가 말을 몰아 쟁기로 밭을 갈고 있었습니다. 농부에게 인사를 하려고 다가갔는데 말 엉덩이에 파리들이 잔뜩 엉겨붙어있었습니다. 링컨은 파리떼가 말을 귀찮게 하는 게 분명했기 때문에 파리를 쫓아버리려고 손을 흔들려고 했습니다. 그 때 농부가 말했습니다. “신사 양반, 그만 두세요! 그 파리들 때문에 이 늙은 말이 그나마 움직이고 있는 거랍니다.” 늙은 말이 게을러서 꿈쩍도 하려고 하지 않는데 파리가 여기저기 자기 몸을 괴롭히니까 할 수 없이 꼬리도 흔들고 하면서 온몸을 움직이게 된다는 말이지요.
여러분, 학창 시절에 우리를 힘들게 했던 영어 선생님, 수학 선생님, 그 때에는 철이 없어서 저런 선생님은 빨리 다른 학교로 전근을 갔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하지만 그 때 우리를 지독하게 공부하도록 만들어주었기 때문에 나중에 보니 정말 말 그대로 은사(恩師)가 아닐 수 없습니다.
제가 고등학교 다닐 때 우리 영어 선생님 중에 고대 불문과를 나오신 심언선 선생님이 계셨는데 얼마나 무서웠는지 모릅니다. 럭비 선수 출신이었기에 체격도 좋으셨고 영어 단어나 숙어를 무조건 외울 것을 강요했습니다. 그 때는 그 선생님이 싫었는데 돌아보니 얼마나 고마운지 모릅니다. 제가 그런대로 영어를 잘 할 수 있게 된 것은 순전히 그런 선생님들 덕분입니다. 이와 반대로 마음이 너무 좋아 이래도 좋고 저래도 좋다고 하셨던 선생님들은 우리에게 큰 도전을 주지 못했습니다.
그렇습니다. 고난이 여러분을 바른 길로 이끕니다. 여러분을 금이나 은처럼 빛나는 보석이 되도록 연단시켜 줍니다. 유행가 가사 중에 “아픈 만큼 성숙하고”라는 말도 있듯이 고난이 우리의 인격을 철들게 하고 성숙하게 만든다는 사실을 잊지 마십시오!
셋째로, 고난은 변장된 축복이기에 유익합니다.
고난당하는 가운데 우리가 끝까지 하나님을 신뢰하고 기다리면 우리의 고난이 변해서 축복이 될 줄로 믿습니다. 우리의 슬픔이 변하여 기쁨이 될 줄로 믿습니다. 우리의 눈물이 변하여 웃음이 될 줄로 믿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한 시도 잊지 말아야 할 진리는 고난은 축복이 잠시 동안 변장된 모습으로 우리에게 찾아 온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본문 71절은 말씀합니다. “고난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말미암아 내가 주의 율례들을 배우게 되었나이다.” 옳습니다. 고난을 당하기 때문에 우리는 주님의 말씀과 법도와 명령에 귀를 기울이게 됩니다. 그리하여 땅의 축복보다 훨씬 더 귀한 하늘의 축복을 알게 됩니다. 그러기에 고난은 하나님이 주실 진정한 축복이 잠시 변장을 하고 나타난 것이라고 믿으십시오!
그렇습니다. 로마서 8: 17-18절은 말씀합니다. “자녀이면 또한 상속자 곧 하나님의 상속자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상속자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할 것이니라 생각하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느니라.”
히브리서 12: 11절의 말씀입니다. “무릇 징계가 당시에는 즐거워 보이지 않고 슬퍼 보이나 후에 그로 말미암아 연단을 받은 자들은 의와 평강의 열매를 맺느니라.”
베드로전서 5: 10절도 말씀합니다. “모든 은혜의 하나님 곧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부르사 자기의 영원한 영광에 들어가게 하신 이가 잠깐 고난을 당한 너희를 친히 온전하게 하시며 굳건하게 하시며 강하게 하시며 터를 견고하게 하시리라.”
모두 다 고난이 유익한 것임을 약속하는 말씀들입니다. 여러분, 이 약속의 말씀들을 믿으십시오!
<고통과 고난 = 하나님의 메가폰>
미국의 옐로우스톤 국립공원의 숲에서 큰불이 일어났습니다. 과학자들이 이 산불로 인하여 얼마나 큰 손실을 입었는가를 조사하기 위해서 산에 올라갔습니다. 그런데 한 과학자가 조사를 하다가 어떤 새 한 마리가 나무 밑에 화석이 되어 있어서 막대기로 그 새를 치웠습니다. 화석처럼 딱딱하게 굳어져 있던 새를 치우자 그 밑에서 작은 새끼 새 세 마리가 죽은 엄마 새의 날개를 헤치고 걸어 나왔습니다. 산불이 일어나자 위기를 직감한 어미 새가 급히 자기 새끼들을 나무 둥치 밑에 데리고 가서 자기 날개를 덮어서 새끼들을 보호했던 것이지요. 이 새는 자기 혼자 충분히 안전한 곳으로 날아가 목숨을 건질 수 있었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자기 새끼들을 살리기 위하여 자신은 죽어가면서도 자기의 새끼들을 살려냈던 것입니다.
오늘 하나님의 사랑도 이와 같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고난당할 때 하나님은 우리의 고난을 다 아십니다. 어떤 극심한 고통 가운데에서도 끝까지 우리를 지켜주실 것입니다. 그리하여 고난의 재가 변하여 영광의 화관이 되게 해주실 줄로 믿습니다.
C. S. 루이스는 고난이 “하나님의 메가폰”, 즉 확성기라고 했습니다. 고난당하기 전에는 하나님의 음성이 잘 들려오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고난을 당할 때면 하나님의 음성이 크게 들려옵니다. 그래서 가브리엘 마르셀은 “내게 필요한 것은 가난과 병고(病苦)”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 더욱 더 가까이 나가기 위해 때로 고난은 필수적입니다.
오늘 여러분이 어떤 고난을 당하시든지 간에 그 고난이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크게 부르시는 확성기인 것을 믿으십시오! 그 고난이 여러분이 하나님께 나아가는 출발점이 됩니다! 여러분을 바른 길로 이끕니다! 고난이 변하여 축복이 됩니다! 그러므로 여하한 고난도 유익한 것임을 믿으시기를 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아멘.
<합리적이고 계산적이나 믿음이 없는 사람들>
그동안 성서정과의 복음서 본문은 마가복음이었습니다. 오늘부터 몇 주 동안은 요한복음에 집중할 예정입니다. 지난주에 읽었던 마가복음은 오병이어의 기적과 예수께서 물 위로 걸으신 기적만 싹둑 잘라낸 채 이 두 사건 바로 앞에 나오는 말씀과 뒤에 나오는 말씀이었습니다. 그런데 성서정과는 마가복음이 전하는 두 가지 기적이 아닌 요한복음이 전하는 기적을 본문으로 정해놓았습니다. 그 이유는 마가복음의 기록이나 요한복음의 기록이나 다 엇비슷하겠지만, 요한복음의 기록이 훨씬 더 정확하고 의미가 깊기 때문입니다. 먼저 오병이어의 기적을 살펴봅시다. 오병이어의 기적은 너무도 중요하고 너무도 유명한 이야기이기 때문에 사복음서에 모두 수록되어 있습니다. 아마도 사복음서에 모두 등장하는 유일한 기적이 오병이어 기적일 것입니다. 1절과 2절을 보면 예수께서 갈릴리 건너편으로 가실 때 큰 무리가 따라갔습니다. 이 큰 무리가 갈릴리 바다 건너편까지 따라 간 이유는 분명합니다. 예수께서 병자들에게 행하신 표적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에 자주 등장하는 용어가 “표적”(sign)입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나타내는 이사와 기적을 말하지요. 이들이 예수님을 따라나선 것은 믿음 때문이 아니라 표적 때문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제자들과 함께 갈릴리 바다 건너편의 한 산에 올라가 앉으셨습니다. 때마침 이스라엘의 국가명절인 유월절이 가까운 때였습니다. 그러니 사람들이 유난히 북적거리는 시즌입니다. 예수님이 산 아래 큰 무리를 보시고 빌립에게 묻습니다. 4절 후반부를 보세요. “우리가 어디서 떡을 사서 이 사람들을 먹이겠느냐?” 이런 질문을 빌립에게 던지신 이유는 그의 믿음을 시험해보기 위함입니다. 과연 빌립의 믿음의 분량이 어느 정도 되는가를 떠보시기 위하여 일부러 이 질문을 던진 것이지요. 즉각 빌립의 대답이 입에서 술술 나옵니다. 7절을 보세요. “빌립이 대답하되 각 사람으로 조금씩 받게 할지라도 이백 데나리온의 떡이 부족하리이다.” 여기 예수님의 제자 빌립은 놀랄 만큼 합리적이고 현실적인 사람입니다. 여기에 모인 사람들을 얼추 계산해보니 이백 데나리온 어치의 빵을 사서 조금씩 나누어주어도 모자랄 정도라는 것입니다. 노동자 한 사람의 하루 임금이 한 데나리온이니 이백 데나리온은 노동자 한 사람이 한 6개월 정도 일해야지만 벌 수 있는 액수입니다. 빌립은 계산이 빠른 사람입니다. 적어도 계산 하나만큼은 정확하게 해서 합리적인 판단을 내릴 수 있는 사람입니다. 하지만 빌립에게는 믿음이 없습니다. 계산이 정확하고 합리적인 판단을 내릴 수 있지만,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이 없는 사람 빌립, 그 모습이 오늘 우리의 모습인 것 같습니다. 교회에서 무슨 일을 할 때 우리는 제일 먼저 예산부터 따집니다. 얼마의 경비가 드는지를 계산합니다. 그리고 그 예산을 달성하기 위하여 지금 현재 얼마의 재정이 확보되어있고, 나머지 경비는 어떻게 충당할 것인지를 따집니다. 이런 사람들의 주장은 적어도 세상적인 기준으로 볼 때에는 하나의 잘못도 없습니다. 다 옳은 말이지요. 다만 한 가지, 믿음이 없다는 사실이 문제입니다. 지금은 부족해도 하나님이 채워주실 것이라는 믿음이 없기 때문에 큰일을 할 수가 없습니다. 본문 말씀의 빌립이 꼭 그런 사람입니다. 지금 산 아래 있는 사람들은 이백 데나리온 어치의 빵을 사서 조금씩 나눠줘도 모자란다는 것이지요. 빌립은 계산만 할 줄 알았지 예수님이 먹여주실 능력이 있는 분이라는 사실은 믿지 않습니다. 교회에서 어떤 일을 할 때 가장 먼저 고려해야 할 요소는 돈이 아닙니다. 아이디어입니다. 이 생각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인지, 하나님의 나라에 보탬이 되는 일인지, 그것부터 먼저 따져봐야 합니다. 그 다음에 누가 이 일을 할 것인지, 일꾼을 따져봐야 합니다. 그리고 세 번째 가서야 예산을 따져야 합니다. 우리는 지금 돈이 없기 때문에, 또 도저히 우리 능력으로 예산을 확보할 수 없기 때문에 이 일을 할 수 없다고 지레 포기하는 것은 하나님을 믿는 신자의 자세가 아닙니다. 놀랍게도 우리가 가진 생각이 하나님의 뜻에 일치하고, 기꺼이 이 일을 하려는 사람들이 자원해서 나서면, 예산은 저절로 따라옵니다. 다시 말해 돈이 먼저 있어서 사람이나 일이 따라붙는 것이 아니라, 무엇인가 선한 일을 해보려는 생각과 자원하는 일꾼들과 일이 있는 곳에 돈이 따라붙는다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교회 안에 빌립과 같은 사람들이 많을수록 교회는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큰일을 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보리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빌립이 이와 같이 계산적인 태도를 취했을 때 베드로의 동생 안드레가 끼어듭니다. 9절을 보세요. “여기 한 아이가 있어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고 있나이다 그러나 그것이 이 많은 사람에게 얼마나 되겠사옵나이까.” 빌립에 비해 안드레는 훨씬 더 행동이 앞서는 사람입니다. 빌립처럼 앉아서 계산기만 두드리는 사람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될까 해서 궁리를 하고 뭔가 구체적인 행동을 모색하는 사람이지요. 그래서 어떤 어린 아이 하나가 싸온 도시락 이야기를 했습니다. 어린 아이 하나가 보리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내서 예수님께 보고합니다. 보리빵은 밀로 만든 빵보다 훨씬 더 값이 쌌기 때문에 가난한 사람들이 주로 먹었습니다. 물고기 역시 손가락 크기만 한, 바싹 말려 절인 정어리입니다. 보리빵이나 절인 정어리는 아주 가난한 사람들이 먹는 음식입니다. 자, 이렇게 안드레는 빌립과 달리 구체적인 대안을 모색해보려고 나름대로 행동하는 사람인데, 그 역시 예수님에 대한 믿음은 부족했습니다. 9절 후반부를 보면 보리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가 이 많은 사람들에게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고 회의적인 모습을 보입니다. 예수님은 이 믿음 없는 두 제자가 보란 듯이 오병이어의 기적을 베푸십니다. 그 날 그 자리에는 잔디가 많았는데 그 잔디 풀 위에 사람들을 앉히셨습니다. 얼마나 사람들이 많았던지 여자와 어린이들을 빼고 남자만 오천 명쯤 되었습니다. 11절을 보면 예수께서 빵과 물고기를 들고 하나님께 감사 기도를 드리신 후 사람들에게 직접 나누어주셨습니다. 공관복음서를 보면 제자들이 빵과 물고기를 사람들에게 분배했습니다. 그런데 여기 요한복음에는 예수님이 직접 나눠주십니다. 오천 명 이상의 사람들 하나하나에게 나눠주시려면 많은 시간이 걸렸을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요한복음의 기록을 잘 믿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역사적으로 불가능하다는 말이지요. 하지만 오병이어의 기적을 믿는 사람이 예수께서 손수 직접 빵과 물고기를 각자에게 나눠주셨다는 사실을 못 믿을 이유가 없습니다. 그 만큼 예수님이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소중하게 여기신다는 사실을 보여주기에 오히려 훨씬 더 아름다운 말씀입니다. 흥미로운 것은 이 도시락을 선뜻 내놓아 오병이어의 기적을 가능케 한 소년에 대한 이야기가 일절 없습니다. 우리 같으면 그 소년의 이름이며, 아버지가 누구고, 고향이 어디이고 세세히 밝혀서 그 선행을 한 소년을 기릴 텐데 성경은 일절 침묵하고 있습니다. 물론 이 소년은 자기의 것을 나눌 줄 아는 참 착하고 순수한 사람입니다. 하지만 오병이어의 기적에서 부각되어야 할 주인공은 사람이 아닙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밝히 드러나야 하고 인간은 감추어져야 한다는 진리를 우리에게 가르쳐줍니다.
<예수님을 억지로 임금 삼으려고 했던 무리들> 이제 오늘 말씀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부분은 사람들의 반응입니다. 보리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고 남자만 오천 명이 먹고서도 그 남은 부스러기가 열두 광주리에 가득 찼습니다. 여기 부스러기는 먹다 버린 음식 조각이 아닙니다. 배가 불러서 더 이상 먹을 수 없는, 원형 그대로의 빵과 물고기입니다. 이 놀라운 기적을 경험한 큰 무리가 어떤 반응을 보였습니까? 14-15절을 보세요. “그 사람들이 예수께서 행하신 이 표적을 보고 말하되 이는 참으로 세상에 오실 그 선지자라 하더라 그러므로 예수께서 그들이 와서 자기를 억지로 붙들어 임금으로 삼으려는 줄 아시고 다시 혼자 산으로 떠나가시니라.” 먼저 예수님을 참 선지자라고 고백합니다. 그 다음에 예수님을 억지로 모셔다가 왕으로 삼으려고 합니다. 선지자라는 고백은 그럴 듯 해보이지만, 예수님을 강제로 임금 삼으려는 태도는 속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짓입니다. “야, 이런 분을 왕으로 삼으면 이제 우리 일하지 않고서도 평생 배불리 먹을 수 있겠구나.” “이런 분을 왕으로 모신다면 평생 양식 걱정 안 해도 되겠구나.” 이 생각 때문에 예수님께 왕관을 씌워드리려고 했던 것이지요! 그러므로 여기에서의 왕은 백성들을 통치하는 그런 측면에서의 왕보다는 신하들을 비롯한 백성들의 안녕과 행복을 책임지는 주로 왕의 의무 측면을 고려한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여기 오병이어의 기적을 경험한 군중들의 모습은 놀랄 만큼 이기적이고 피상적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인격이나 말씀, 그 분의 삶이 좋아서 예수님을 따른 것이 아닙니다! 오병이어의 기적, 보통 사람들이 도무지 흉내 낼 수 없는 이사와 기적에 눈이 멀어서 예수님을 따른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왜 예수님을 따릅니까? 왜 교회에 나왔습니까? 무엇인가 예수님으로부터 얻을게 있기 때문이 아닙니까? 내리교회에 나와서 무엇인가 나에게 좋은 것이 있기 때문이 아닙니까? 마음이 편하다든지, 좋은 친구를 사귈 수 있다든지, 어떤 이유로든 내게 유익이 있기 때문에 예수를 믿었고, 교회에 나온 것은 아닙니까? 마치 오늘 본문에 나오는 무리들이 예수님 때문에 배가 불러지니까 예수님을 칭찬하고, 심지어 억지로 임금 삼으려는 것과 마찬가지로 무엇인가 내게 유익이 있기 때문에 예수님을 믿고 교회에 나온 것은 아닙니까? 그렇다면 무엇인가 표적을 보고서 예수를 믿는 것을 소비중심의 신앙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교회 저 교회를 다니면서 어떤 교회가 나에게 알맞을까, 어떤 교회가 내 필요에 부응할까, 이것저것 계산해서 교회를 선택한다면 우리는 쇼핑을 하러다니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좋은 교회, 마음에 드는 교회를 찾아다니는 것은 소비자가 철두철미 자기 마음에 드는 물건을 찾아 이 백화점 저 백화점에 쇼핑을 다니는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불행하게도 현대 교회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이 바로 이런 소비자신앙에 있습니다. 교회는 내 구미에 맞는 대로, 내 편리와 내 이기심에 따라 마음대로 고르는 물건이 아닙니다, 쇼핑센터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특별한 사명이 있어서 부르심을 받는 곳이 교회입니다. 사명자들이 자원해서 모이는 공동체가 교회이지요. 그러므로 우리는 더 이상 소비자신자가 아닌 생산자신자가 되어야 합니다. 교회는 마치 회비를 내듯이 일정분량의 헌금을 내고 자신이 원하고 필요한 것들을 채우는 쇼핑몰이 아닌, 주님이 원하시는 것을 내가 생산해내고 하나님의 사역에 조금이라도 기여하는 장소가 되어야 합니다. 오늘 봉독한 오병이어의 기적이 가르쳐주는 교훈은 예수님을 따르는 우리, 이 내리교회에 나온 우리는 소비자신자가 아니라 생산자신자가 되어야만 한다는 사실입니다!
<EGO EIMI의 신비> 이제 결론을 맺어야 할 차례입니다. 오병이어의 기적을 체험한 군중이 예수님을 억지로 왕 삼으려고 하자 예수님은 다시 홀로 산으로 물러나셨습니다. 그런 뒤에 바로 나오는 말씀이 예수께서 물 위를 걸으신 사건이지요. 오늘 봉독한 요 6:16-21절 말씀을 보면 날이 저물자 예수님의 제자들이 바다 건너편 가버나움으로 갔습니다. 날이 어두워졌는데도 예수님은 아직 그들이 있는 곳으로 오시지 않습니다. 큰 바람이 불고 물결이 사나워졌습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을 찾아 배를 저어 한 십 여리쯤 갔을 때였습니다. 그 때 예수께서 바다 위를 성큼성큼 걸어오셨습니다. 그 광경을 보고서는 제자들이 놀랐습니다! 사나운 풍랑 때문에 놀란 것이 아닙니다! 물 위를 걸으시는 예수님 신비한 모습을 보고서는 놀랐습니다. 이제 오늘 본문에서 가장 중요한 말씀이 20절 말씀입니다. “이르시되 내니 두려워하지 말라 하신대.” “내니.” “나다.”라는 말씀이지요. 영어로 “I AM.” 헬라어 원어 성경에는 “EGO EIMI.”로 되어 있습니다. 스스로 자존하시는 하나님이라는 말이지요. 예수님은 오병이어의 기적을 체험한 무리들이 고백했던 참 선지자, 아니 왕 그 이상의, 참 하나님이시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물 위를 걸으신 예수님은 참 하나님으로서 제자들 앞에 나타나신 것입니다. “EGO EIMI,” 이 말 속에는 하나님의 현현(顯現)이 드러납니다. 하나님이 스스로를 계시하신다는 뜻이지요. 어두컴컴한 밤에 큰 바람과 성난 물결 위를 홀연히 걸으시는 예수님, 그 예수님은 단지 이사와 기적을 행하시는 분 그 이상의, 참 선지자 그 이상의, 이 세상의 왕 그 이상의, 온 우주만물을 창조하시고 인간의 생사화복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오늘도 우리는 그 하나님이신 예수님께 경배와 찬양을 올려드리기 위해 이 자리에 온 줄로 믿습니다. 요 6: 1-15절의 오병이어의 기적은 예수께서 베푸신 풍성한 은혜를 보여줍니다. 하지만 군중들은 이 은혜를 영광으로 바꾸려고 합니다. 은혜를 은혜로 보지 못한 큰 무리는 그래서 예수님을 억지로 임금 삼아 영광스럽게 만들려고 했던 것이지요. 그 다음에 16-21절의 예수께서 물 위를 걸으신 기적은 “EGO EIMI,” 하나님으로서의 예수님의 자기계시를 드러냅니다. 하지만 이 영광스러운 예수님의 자기계시 사건은 매우 한 밤중에 매우 고독하게 제자들이 두려워하는 가운데 일어났습니다. 수많은 군중들이 우러러 보는 왕좌 위에서 영광을 받으신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당신의 은혜가 군중들이 바라는 세상적인 영광으로 바뀌는 것을 원치 않으셨습니다. 오직 참 하나님의 성품을 드러내심으로써 영광을 받으시려고 했던 것이지요. 은혜와 영광, 이 둘은 모두 예수님께 적용할 수 있는 단어들이지만, 예수님의 은혜를 세상적인 영광으로 바꾸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이제 오늘 봉독한 엡 3: 17-19절 말씀을 다함께 읽으심으로써 제 설교를 마치고자 합니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너희 마음에 계시게 하시옵고 너희가 사랑 가운데서 뿌리가 박히고 터가 굳어져서 능히 모든 성도와 함께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고 그 너비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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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에서 울음바다가 되었던 사연>
며칠 전 인터넷 신문에서 읽은 기사 하나가 눈시울을 붉히게 했습니다. 독일에 파견된 광부들의 이야기였습니다.1960년대에 우리나라는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들 중 하나였습니다. 당시 정부는 독일에서 3천만 달러의 차관을 빌려와 경제 개발을 하려고 했지만 차관을 보증할 담보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보내게 된 것이 광부와 간호사였지요. 이들이 독일에서 번 봉급을 담보로 삼아 차관을 빌리게 된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1963년부터 1977년까지 독일에 건너간 광부가 7,968명, 간호사가 1만 2천명이나 되었다고 합니다.
이들 광부들은 지하 막장 천 미터 이상의 갱도로 내려가서 석탄을 팠습니다. 섭씨 40도가 넘는 찜통더위 속에서 목숨을 걸고 일해야만 했습니다. 아무리 안전모를 쓰고 있다고 하지만 천정에서 돌이 떨어지면 얼굴과 팔, 등에 상처가 납니다. 문제는 상처부위에 석탄 가루가 그대로 박히면서 그 자리가 곪고 아물면서 석탄은 그대로 있었습니다. 이른바 ‘광부 문신’이라는 것이지요. 광부들은 몸에 박힌 석탄 가루를 일일이 파내고 타월로 빡빡 문질렀지만 그 문신을 지울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광부들의 얼굴에는 아직까지도 검은 점들이 검버섯처럼 남아 있다고 합니다.
독일에 파견된 광부들이 악착같이 일해서 고국에 보낸 돈이 그 당시 우리나라 외화 수입의 1/3 정도가 되었다고 합니다. 오늘 우리가 이렇게 잘 살게 된 배경에는 이런 분들의 눈물과 땀이 있었습니다. 낯선 나라에 가서 말도 통하지 않고 인종차별도 있지, 목숨을 걸고 하루 16시간씩 일만 하다 보니 이 분들의 가슴에는 다 시퍼렇게 피멍이 맺혔습니다.
그러던 차에 1964년 12월, 박정희 대통령 내외가 독일을 방문했습니다. 식순에 따라 애국가가 시작되자, 고국에 대한 향수병 때문에 광부들과 간호사들이 흐느껴 울기 시작했습니다. 이내 대통령의 연설이 이어졌습니다. “가난 때문에 이역만리 지하 수천 미터에서 일하는 새까만 여러분 얼굴을 보니, 목이 메어 말이 잘 나오지 않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아직까지 이렇게 못살지만, 후손들에게는 잘사는 나라를 물려줍시다.”
대통령의 연설을 듣던 사람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울음을 터뜨렸고 식장은 이내 울음바다가 되었습니다. 식순이 다 끝난 뒤 박대통령과 육영수 여사는 설움에 목이 멘 광부와 간호사 한 사람 한 사람을 껴안고 함께 울었다고 합니다.
저는 이 기사를 읽으면서 저도 모르게 울었습니다. 왜 눈물을 흘렸을까요? 저 역시 외국에 나가서 오래 살아본 경험이 있고, 이민 생활이 고단하고 외로운 것임을 잘 알기 때문이겠지요. 하지만 그것보다는 가난한 나라의 백성이 남의 나라에 나가서 밑바닥 일을 하면서 이루 말할 수 없는 고생을 할 때, 대통령이 함께 있어주고 함께 울어준 것이 감동이 되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아버지 같은 대통령, 어머니 같은 영부인이 오셔서 위로해주었을 때 눈물바다가 되었던 것이지요. 신문 기사에 의하면 그 때의 감격을 이제 칠순의 노인이 된 광부들과 간호사들이 여태껏 잊지 못한다고 합니다.
<‘임마누엘’, 우리와 함께 계시기 위해 오신 하나님>
내가 힘들고 외로울 때 누군가 내 곁에 함께 있어줄 때, 얼마나 든든하고 큰 힘이 되는 지 모릅니다. 성탄절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기 위해 우리 곁에 오신 날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별명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뜻의 ‘임마누엘’이지요. 하나님은 하나님이 지으신 인간들을 위해서 하나 밖에 없는 독생자를 보내셨습니다. 아드님을 보내실 때 그냥 보내신 것이 아니라 가장 낮고 천한 모습이 되게 하셨습니다.
아니, 우주만물을 창조하시고 인간의 생사화복을 주관하시는 만왕의 왕, 만유의 주 하나님의 외아들이 어떻게 처녀의 태속에 들어갈 만큼 낮아지실 수 있단 말입니까? 마르틴 루터의 표현대로 한다면 가난하고 비루한 시골처녀 마리아, 겨우 나이 열서너 살 먹은 처녀의 자궁 속에 들어갈 만큼 작아지실 수 있단 말입니까? 그것도 태어날 때 왕궁에서 난다든지, 황금 침상이나 요람에 누워야 할 하나님의 아들이 짐승들이 잠자는 축사에 들어가 말이나 소의 먹이통, 구유에 누울 수가 있단 말입니까?
하지만 이것은 순전히 하나님이 가장 낮고 천한 죄인들과 함께 계시기 위하여 치밀한 계획으로 이루어진 일입니다. 하나님이 죄인 되고 비천해진 우리의 처지를 이해하시고 우리와 함께 계시기 위하여 아기 예수님을 일부러 그런 모습으로 보내신 줄로 믿습니다. 그렇습니다. 성탄절은 저 위에 계신 하나님이 우리와 같은 죄인이 되셔서 우리와 함께 계시기 위하여 이 낮은 곳으로 오신 날입니다. 우리의 처지를 십분 헤아려주셔서 스스로 우리와 같이 비천한 죄인이 되신 사건이지요.
그런데 성탄절과 관련해서 어떤 분은 동정녀 탄생을 못 믿겠다는 분이 계십니다. 부활은 믿겠는데 숫처녀가 아이를 낳는 것은 도저히 믿지 못하겠다고 합니다. 생물학적으로 불가능하기 때문이라는 것이지요. 하지만 부활과 동정녀 탄생은 서로 따로 떨어진 사건들이 아닙니다. 동정녀 탄생을 못 믿으면 부활도 못 믿고 우주 창조도 못 믿고 출애굽 기적과 홍해 도하 사건도 못 믿고 오병이어의 기적과 오순절 성령 강림도 못 믿게 될 것입니다. 대저 하나님께는 불가능이 없기 때문이지요(눅 1: 37).
이와 관련된 재미있는 일화가 있습니다. 코미디언 구봉서 장로님이 몇몇 교인들과 함께 마태복음 1장을 공부할 때 일어난 일입니다. 동정녀 마리아가 성령으로 잉태했다는 부분에 걸렸습니다. 성경 공부하는 멤버 중 한 사람이 이 부분을 자꾸 물고 늘어졌습니다. “아니 세상에 믿을게 따로 있지! 어떻게 처녀가 아이를 가졌다는 이렇게 황당한 거짓말을 성경에 써놓고 믿으라고 하나!” 이 사람이 하도 따지는 바람에 진도가 나가지 않았답니다.
바로 그 때 아직 평교인이었던 구봉서 씨가 옆에서 지켜보다가 하도 답답해서 그렇게 따지는 사람에게 한 마디를 했다고 합니다. “야! 지 서방이 믿는다는데 왜 니가 난리야?” 기가 막힌 대답이지요. 마리아와 한 번도 동침한 적이 없는 남편 요셉이 이 사실을 믿었다면 이야기는 끝난 것이지요!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기 위하여 임마누엘로 오셨다는 사실입니다. 슬픔 많은 우리를 위로하시기 위하여, 상처 많은 우리를 쓰다듬어 주시기 위하여, 외롭고 쓸쓸한 우리의 친구가 되어주시기 위하여, 죄 많은 우리를 용서해주시기 위하여, 하나님이 아기 예수님의 모습으로 우리 곁에 오셨습니다.
<‘임마누엘’, ‘함께 있어줌’의 효력>
어떤 목사님이 유신 독재 시절 긴급 조치를 위반해서 서대문에 있는 서울 구치소에 수감되었습니다. 영하 18도까지 내려가는 추운 날씨에 징역살이를 하니 얼마나 힘들었겠습니까? 그런데 얼마쯤 시간이 지나니까 옆방에 연대 의대생들이 긴급조치 위반으로 잡혀왔다는 소식을 들으니 조금 위로가 되더랍니다. 그런데 또 얼마쯤 지나니까 연대 김동길 교수와 김찬국 교수 등이 들어왔다는 소식을 들으니 얼마나 기쁘고 마음이 든든하지 무서운 생각이 싹 가시더라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박형규 목사, 지학순 주교 이런 거물급 민주화 인사들이 속속 들어왔다는 소식을 들으니까 갑자기 감옥 안이 훈훈해지고 마음에 용기와 소망이 생겨서 더욱 더 든든해졌다고 합니다. 이 분의 간증에 따르면 누군가 내가 아는 사람이 나와 함께 같이 감옥에 갇혀있고 함께 고난을 겪는다는 사실이 말할 수 없이 큰 위로와 소망이 되었다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내가 힘들고 외로울 때 누군가 함께 있어준다는 사실이 큰 위로와 소망이 됩니다. 어렸을 때 교실에서 앞쪽으로 불려나와 무릎 꿇고 두 손을 들고 벌을 설 때도 그랬지요. 나 혼자 벌을 설 때에는 얼굴이 화끈거리고 그렇게 창피할 수 없는데, 누군가 나와 같은 처지가 되어서 함께 벌을 설 때 얼마나 위로가 되는 지 모릅니다.
금년 성탄절은 그 어느 때보다도 착 가라앉은 분위기입니다. 천안함 격침사태와 연평도 피폭 사태로 인해 전쟁에 대한 두려움이 생겼습니다. 이와 같은 남북한 긴장 사태로 인해 특히 우리 중구에 있는 영종도와 용유도에는 손님들의 발길이 뚝 끊어졌다고 합니다. 거기다가 걷잡을 수 없이 번져나가는 구제역으로 말미암아 축산업을 하는 분들의 고충은 이만저만이 아닙니다. 평생 일구어 놓은 축산업이 하루아침에 타격을 입고서는 실의와 좌절 속에 빠져 있습니다. 일반 서민들의 살림살이 역시 날이 갈수록 각박해지고 있습니다.
·이러한 때에 우리는 아기 예수님을 바라봐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위로해주시기 위하여 어린 아기의 모습으로 오셨습니다. 슬픔 많고 상처 많고 죄 많고 갖가지 실의와 좌절 속에 빠진 우리를 위로하시기 위하여 하나님의 아들이 오셨습니다. 슬픈 자 우는 자를 위로하시고, 실의와 좌절 속에 빠진 자에게 소망을 주시고, 죄 많은 자를 용서하시고, 넘어진 자 자빠진 자를 일으켜 세워주시려고,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이 오셨습니다.
임마누엘, 그 하나님이 이 낮은 곳으로 오셔서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오늘 여러분이 마음의 빈방을 마련해서 이 임마누엘 예수님을 모셔드린다면 세상에서 비길 데 없는 위로가 있을 것입니다. 세상에서 비길 데 없는 기쁨을 얻게 될 것입니다. 세상에서 비길 데 없는 소망을 찾을 것입니다.
<저 낮은 곳을 향하여 함께 있어주는 성탄절>
어떤 목사님의 설교집에서 읽은 이야기입니다. 여성 신학자 구미정 선생의 간증을 소개한 내용이지요. 그녀의 조카는 엄마 뱃속에서 열 달을 못 채우고 6개월 만에 나왔습니다. 910그램의 미숙아로 태어났습니다. 어른 엄지손가락 굵기의 다리를 팔랑거리며 손바닥만 한 크기로 세상에 나왔습니다. 그런데 이 아기의 엄마, 즉 구미정 선생의 언니는 구제 금융의 한파로 인해 운영하던 어린이집을 닫아야만 했습니다. 아기의 아빠가 운영하던 회사마저 부도가 나서 이 집안은 완전히 벼랑 끝에 몰리게 되었습니다. 아기의 엄마는 뱃속에 있는 아기를 지우려고 몇 번이나 병원 앞을 서성거렸지만 차마 용기를 낼 수 없었습니다.
이렇게 집안 공기가 침울할 때 아이는 열 달을 다 채우지도 못하고 서둘러 세상에 나왔습니다. 이 아기는 미숙아들이 겪을 수 있는 모든 합병증, 즉 유리질막증이나 기관지폐이형성증, 패혈증 등을 다 겪어야만 했습니다. 누가 보더라도 이 아기는 집안에 기쁨이 아니라 저주와도 같았습니다.
하지만 신학자 구미정 씨는 자신의 미숙아 조카에 대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 집안에 찾아온 복 하나를 대라면, 나는 주저 없이 ‘엄지공주’ 솔이를 끌어당긴다. 솔이는 산산 조각날 위기에 처해있던 언니 가정에 치유를 주러왔다. 세상을 원망하며 좌절과 한숨에 빠져 있던 그 가정에 화해를 주러왔다.” 미숙아인 솔이를 깊은 사랑으로 돌보면서 솔이의 부모는 저절로 치유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솔이는 저주나 부담스러운 짐이 아니라 감사와 소망과 은혜와 축복이 되었다는 것이지요.
아기 예수님이 세상에 오실 때도 그랬습니다. 전쟁의 소문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고, 서민들의 살림살이는 곤두박질치고 있었고, 희망이란 찾아볼 수 없는 절망의 밤이었습니다. 이런 가운데 가장 가난하고 보잘 것 없이 태어난 예수님께 누구도 관심을 갖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이 아기 예수님으로부터 한 줄기 소망의 빛이 스며 나왔습니다. 사람들이 위로를 찾았습니다. 진리와 생명을 찾았습니다. 구원과 영생을 얻었습니다. 왜냐하면 그 아기 예수님은 가장 보잘 것 없고 연약한 아기의 모습으로 우리와 함께 계시기로 작정하신 하나님의 무제약적인 사랑의 표시였기 때문입니다.
이번 성탄절은 우리 역시 예수님을 통하여 나타난 하나님의 모습을 닮는 시간이 되었으면 합니다. 하나님이 아기 예수님을 통하여 우는 자 슬픈 자와 함께 계십니다. 우리 역시 눈을 돌려 우는 자 슬픈 자와 함께 합시다. 하나님이 예수님을 통하여 좌절과 낙심에 빠진 자를 위로해주십니다. 우리 역시 주변에 실망한 이들을 보듬어 안아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이 예수님을 통하여 저 낮고 천한 곳으로 내려오셨던 것처럼 우리 역시 마음을 낮추어 저 낮은 곳으로 내려갑시다. 아멘.
<나병환자 10명 예수님을 만나다>
오늘 추수감사주일에 살펴볼 말씀은 누가복음 17: 11-19절입니다.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가시다가 나병환자 10명을 고쳐주신 이야기입니다. 예나 지금이나 나병은 치명적인 질병이지요. 혈액순환이 제대로 되지 않고 통증마저 사라져 온몸이 썩어문드러지는 참으로 무서운 병입니다. 손가락이나 발가락이 떨어져 나가도 감각이 없어져 도무지 아프지가 않습니다. 심지어 코나 귀가 떨어져 나가도 모릅니다. 그래서 의학이 발달되기 이전에 나환자들이 잠자는 방에는 꼭 고양이를 여러 마리 길렀다고 합니다. 잠자는 사이에 쥐가 발가락을 물어가도 모르기 때문에 환자를 보호하기 위해서 그랬던 것이지요.
나병은 무엇보다도 전염성이 강했기 때문에 구약의 율법은 나환자를 부정한 것으로 보았습니다. 사람의 몸만 부정한 것이 아니고 옷과 집도, 나환자가 관계하는 모든 것을 부정하게 보았습니다(레 14: 55). 그래서 지금도 그렇지만 예수님 시대의 나환자들은 동네에서 쫓겨나 산에서 움막을 짓고 살아야만 했습니다. 병에 걸린 것도 서러운데 사회로부터 격리되어 고립된 생활을 한다는 것이 정말 큰 고통이었지요. 나환자는 하나님을 예배할 수 있는 자유를 비롯하여 일체의 공민권을 박탈당한 채 하루하루 비참한 삶을 살아야만 했습니다.
특히 레 13: 45절에 보면 나환자가 동네를 지나갈 때 혹시 사람이라도 만나면 자기 옷을 찢고 머리를 풀며 윗입술을 가린 채 "나는 부정하다, 나는 부정하다!" 하고 크게 고함을 질러서 다른 사람들이 접근하지 못하도록 막아야만 했습니다.
이렇게 비참한 삶을 살아가던 나환자 10사람을 예수님이 만났습니다. 본문 12절에 보면 이들은 율법에 규정한 그대로 성한 사람에게 가까이 갈 수 없었기에 멀찍이 멈추어 서서 소리를 질렀습니다. 아마도 먼저 “나는 부정하다!” 하고 고함을 질렀겠지요. 그래서 건강한 사람이 전염되지 않도록 막았을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들이 원하는 가장 중요한 부탁을 합니다. “예수 선생님이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자기들을 불쌍히 여겨달라는 이 부탁에는 먹을 것이나 입을 것, 돈을 달라는 의미가 가장 컸을 것입니다.
이제 10명의 나환자들이 부르짖는 소리를 들으신 우리 예수님이 어떻게 반응하십니까? 14절을 보세요. “가서 제사장들에게 너희 몸을 보이라!”먹을 것, 입을 것을 달라는 그들의 요구에 예수님은 제사장들에게 찾아가서 몸을 보이라고 대답하십니다. 예수님은 먹을 것, 입을 것보다 훨씬 더 중요한 치유와 회복을 주시는 분입니다. 어떤 사람이 나병에 걸렸거나 나았다는 사실을 진단할 수 있는 권세는 의사가 아닌 제사장에게 있었습니다(레 14: 1-9). 그래서 제사장들에게 가라고 하는 말속에는 나병의 치유뿐만 아니라, 그동안 잃어버린 종교적이고 사회적인 공민권의 회복이 암시되어 있습니다.
놀랍게도 10명의 나환자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제사장들에게로 가다가 몸이 깨끗해졌습니다. 이제 참으로 중요한 사실은 이 놀라운 치유가 일어난 다음에 어떤 일이 일어났는가 하는 것입니다. 15절을 다함께 읽겠습니다. “그중의 한 사람이 자기가 나은 것을 보고 큰 소리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돌아와 예수의 발 아래에 엎드리어 감사하니 그는 사마리아 사람이라.”
분명히 10명의 나환자가 고침을 받았습니다. 다 깜짝 놀랐겠지요! 각기 제사장에게 도착하기도 전에 몸이 나은 것이지요. 그런데 9명은 어디론가 가버리고 오직 한 사람이 자신이 병 나은 것을 발견하자마자 큰 소리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면서 예수님께로 되돌아왔습니다. 그러고는 예수님의 발 앞에 넙죽 엎드려 절을 하고서는 감사를 드렸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10명 중에 오직 한 사람이 예수님께 감사를 드렸는데, 바로 이 사람은 사마리아 사람이라고 신원을 밝힙니다.
<감사를 아는 오직 한 사람>
10명의 나환자가 길가는 도중에 병이 나은 것도 놀랍지만 다시 돌아와 예수님께 감사를 표했다는 사실은 더더욱 놀라운 반전이 아닐 수 없습니다. 나병환자 그 자체만 하더라도 불행하기 이를 데 없는 사람이지요. 그런데 나환자인데다가 사마리아인은 이중으로 퇴짜를 받는 불행한 사람들 중에 불행한 사람입니다.
사마리아 사람들은 이스라엘이 남북으로 두 동강이 났을 때 북이스라엘에 살던 이들입니다. 이 북이스라엘이 앗시리아 제국에 의해 멸망당하자 수많은 사람들이 죽거나 끌려갔습니다. 북이스라엘 사람들 중에서 별 쓸모가 없는 하찮은 사람들만이 일부 수도인 사마리아에 남게 되었는데, 문제는 앗시리아의 정복군주가 다섯 개의 외국인들로 하여금 사마리아에 살게 했고 북이스라엘 사람들과 혼인을 하도록 만들었습니다. 순혈주의가 워낙 강한 이스라엘 사람들의 정체성을 완전히 훼손시키기 위해 잡혼정책을 썼던 것이지요.
바로 이때부터 사마리아인들은 민족적이고 종교적인 정체성을 잃게 되었는데, 문제는 남유다에 사는 유대인들이 사마리아인들을 동족취급을 하지 않았다는 사실에 있습니다. 유대인들과 사마리아인들 사이에는 이내 뿌리 깊은 적대감이 생겼고 서로 만나지도 않고, 설사 우연히 만나더라도 개가 고양이 보듯이 인사조차 나누지 않았습니다. 특히 선민의식으로 가득 찬 유대인들이 사마리아인들을 업신여기는 것은 아주 오랜 관습이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나환자인데다가 사마리아인이라는 말은 이중의 수치요, 이중의 왕따였음을 보여줍니다. 그런데 바로 사마리아인 나환자 한 사람이 자기 몸이 나은 것을 발견하자마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면서 예수님께 되돌아왔습니다. 큰 절을 하면서 진심으로 감사했습니다.
병이 나은 사람은 모두 10명이고 그 중에 아홉은 예수님과 똑같은 유대인입니다. 그런데 그 9명은 어디론가 가버렸고 가장 그럴 것 같지 않은 사마리아 나환자 한 사람만 예수님께 되돌아와 감사를 드렸습니다. 예수님이 몹시 서운하셨던 것 같습니다. 우리 17-18절을 다 같이 봅니다.“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열 사람이 다 깨끗함을 받지 아니하였느냐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 이 이방인 외에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러 돌아온 자가 없느냐 하시고.”10명이 고침 받았는데 9명은 어디론가 가버렸고 감사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러 온 사람은 이 이방인(foreigner, outsider) 한 사람 밖에는 없다는 것이지요. 정말 감사해야 할 같은 동족인 정통 유대인은 감사하지 않는데, 유대인과 상종하지 않는 이방인 사마리아인 한 사람이 감사하는 아이러니를 지적하신 것입니다!
<진정으로 성숙한 감사는?>
오늘은 추수감사주일입니다. 사실 농사짓는 분들은 들판에서 오곡백과를 거두어 추수감사제를 드리는 것이 옳겠지만 농사를 안 짓는 분들은 이런저런 감사의 제목을 붙여서 감사하는 주일입니다. 지난 한 해 동안 우리는 정말 하나님과 사람들로부터 너무 귀한 은혜를 받았습니다. 먼저 우리 교회만 보더라도 경제가 참 어려운 가운데 세 동의 건물을 훌륭하게 지어 하나님께 봉헌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이루어진 역사이기에 하나님께 감사해야 할 것입니다.
어떤 시골농부가 도회지에 일을 보러 올라왔습니다. 시장기를 느껴 한 레스토랑에 들어가 음식을 시켜먹게 되었습니다. 늘 그랬던 것처럼 이 농부는 식사하기 전에 머리를 숙여 하나님께 감사의 기도를 올렸습니다. 이렇게 진지하게 기도하는 농부의 모습을 처음 본 손님들 중에 장난기가 있는 사람들이 농부에게 농을 걸었습니다. “당신이 사는 촌동네 사람들은 모두 당신처럼 식사하기 전에 기도를 드립니까?” 농부가 물끄러미 그 도시사람들을 쳐다보면서 대답했습니다. “아닙니다. 다 저처럼 기도하는 것은 아니지요. 우리는 기도하지 않는 사람들을 땅이나 들 잇다 파는 돼지들이라고 부르지요.”
그렇습니다. 감사는 인간만이 할 수 있는 특권입니다. 그렇다면 감사를 모르는 사람은 짐승과 마찬가지라고 하겠지요. 아마 오늘 이 자리에 나오신 여러분도 개인적인 삶이나 가정이나 직장이나 사업을 놓고 볼 때 감사할 제목들이 한두 가지가 아닌 줄로 압니다. 하나님께서 입을 옷과 먹을 음식, 잠잘 집을 주셨습니다. 수많은 위기 가운데 우리를 지켜주셨고 건져주셨습니다. 아프리카나 라틴아메리카, 동남아시아에는 우리보다 훨씬 더 열악한 환경 속에서 하루하루 못 죽어 사는 이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그들과 비교하면 우리는 정말 감사할 제목이 너무나 많습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감사보다 불평이 더 많습니다. 우리야말로 아홉 명의 나환자들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내가 이렇게 잘 먹고 잘 사는 것이 다 하나님의 은혜 덕분이라는 사실을 까마득히 잊고, 그래서 하나님과 이웃에 대한 감사도 모르고 뿔뿔이 제 갈 길을 간 아홉 명의 나환자가 혹 우리의 모습은 아닌지요!
놀랍게도 우리보다 훨씬 더 비참한 환경 속에 있는 이들이 더 감사합니다. 교통사고를 당해 중환자실에 누워있는 환자가 목숨만 건진 것도 감사하다고 말합니다. 사업에 실패해서 모든 것을 한꺼번에 날린 분이 그래도 건강을 잃지 않고 가족들의 사랑을 잃지 않은 것을 감사하다고 말합니다. 바로 이런 분들이 사마리아인과 같이 감사할 줄 아는 사람들이지요!
진정한 감사는 남들이 볼 때 전혀 감사할 처지가 아닌 가운데 터져 나오는 감사입니다. 바울은 로마 감옥에 갇혀서 죽을 날만 기다리면서 빌립보교회와 골로새교회에 편지를 보내 계속 기뻐하고 감사하라고 격려합니다. 기도가 응답되지 않고 거절될 때 오히려 하나님의 깊은 섭리와 사랑을 깨닫고 감사했습니다. 모든 것이 모자라고 힘들고 희망이라곤 전혀 보이지 않는 칠흑 같은 절망 속에서 감사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진정한 감사, 성숙한 감사는 남들이 볼 때 도저히 감사할 수 없는 상황에서 터져 나오는 감사입니다. 그런 감사야말로 우리 인생의 생사화복을 주님이 다스리신다는 깊은 믿음에서 나오는 감사입니다.
사람들이 KTX와 같은 초고속열차를 탈 때 순방향쪽 좌석에만 먼저 타려고 합니다. 시속 300km로 달리는 열차가 달려가는 앞쪽을 보지 않고 지나간 뒤쪽을 보면 풍경을 보는 것도 그렇고, 특히 멀미가 나는 사람에게는 더 고역입니다. 하지만 역방향으로 앉는다고 해서 아주 나쁜 것은 아닙니다. 나름대로 좋은 점도 많습니다.
무엇보다도 서울에서 부산으로 갈 때에는 역방향이었지만, 반대로 부산에서 서울로 올라 갈 때에는 역방향이 순방향으로 바뀝니다. 그러므로 역방향좌석이 마냥 역방향좌석으로 끝나는 것은 아닙니다! 때가 되면 역방향이 순방향으로 바뀝니다! 그러므로 역경중에도 감사하면 역경이 순경으로 바뀐다는 사실을 믿으십시오! 절망중에도 감사하면 절망이 소망으로 바뀐다는 사실을 믿으십시오!
<나를 구원하는 감사를 동반한 믿음>
이렇게 감사하지 않아도 될 조건 속에 있었던 사마리아인이 와서 감사했을 때 예수께서 내리신 결론은 이렇습니다. 우리 다함께 19절을 읽겠습니다. “그에게 이르시되 일어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하시더라.”
너무나 귀한 말씀이지요. 그런데 여기에서 “구원”이라는 말이 참 중요한데, 희랍어 원어에는 “SOZO”로 되어 있습니다. “SOZO”는 “위험에서 건짐 받아 이전의 안전하고 건강하고 행복한 상태로 회복되는 것”(to rescue from danger and to restore to a former state of safety and well-being)을 의미합니다.
그렇다면 10명이 고침을 받았지만 구원받은 사람은 오직 사마리아인 한 사람입니다! 다른 9명의 유대인 나환자들도 병에서 고침은 받았지만 구원은 받지 못했습니다. 왜요? 믿음과 감사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10명이 다 똑같이 치유를 받았지만 육신뿐만 아니라 영혼까지 구원받은 사람은 사마리아인 혼자입니다!
사마리아인이 영혼과 육신 모두를 구원받을 수 있었던 비결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믿음은 어디까지나 구체적인 감사를 동반한 믿음이었습니다. 믿음은 언제나 감사의 눈을 새롭게 뜨게 해줍니다. 10명의 나환자들은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해서 각기 제사장들에게로 가다가 병이 나았습니다. 하지만 감사의 눈을 뜬 사람은 오직 사마리아인 한 사람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제일 먼저 감사의 눈을 뜨게 됩니다!
오늘 여러분이 예수님을 믿습니까? 그렇다면 제일 먼저 감사의 눈을 떠서 세상을 새롭게 보시기 바랍니다. 탈무드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우리는 사물을 있는 그대로 못 본다. 사물을 보되 우리 자신의 모습대로본다.”(We do not see things as they are. We see things as we are.) 사람은 자기 마음속에 있는 그대로 본다는 말이 있지요. 천사의 눈에는 천사가 보이고 악마의 눈에는 악마가 보이겠지요. 내 마음이 어떻고 내 인격이 어떤가에 따라 세상이 그대로 보이기 마련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사는 세상이 감사가 넘치는 세상이 되게 하기 위해서는 제일 먼저 우리의 눈부터 바꾸어야 합니다. 물론 우리는 우리 힘으로 이 세상을 바꾸기가 참으로 어렵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사물을 바라보는 눈을 바꾸면 신기하게도 세상이 변합니다. 편견이 아닌 공평한 눈으로, 미움이 아닌 사랑의 눈으로, 오해가 아닌 이해의 눈으로, 불평이 아닌 감사의 눈으로 세상을 보면 세상이 달라집니다!
여기 9명의 나환자들은 몸은 고쳤지만 눈을 뜨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자기의 치유가 어디에서 왔는지, 누구 때문에 나병을 고쳤는지 알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사마리아인은 달랐습니다. 눈을 떠서 치유의 근원이 예수님인 것을 깨달았습니다. 예수님 없이는 자기가 고침 받을 수 없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치유의 근원이요, 새로운 생명의 은인이 되신 예수님께로 돌아와 절을 하고 감사를 드렸던 것입니다.
오늘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특별하신 은혜와 사랑을 입고서도 도무지 감사를 드리지 못한다면 우리는 9명의 나환자들과 다를 바 없습니다. 눈이 가려져 있기에 우리가 누리는 세상의 모든 은혜가 나 잘나서 그렇게 된 것으로 착각합니다. 그래서 감사를 모르고 늘 불평과 불만 속에 살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진정으로 하나님을 믿는 자녀가 되기 위해서 가장 중요한 일은 믿음의 눈을 새롭게 떠서 하나님과 이웃에게 감사를 드리는 것입니다.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라는 사도 바울의 고백처럼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임을 볼 수 있는 사람이 감사할 수 있습니다. 오늘 믿음의 눈을 새롭게 떠서 모든 일에 감사할 수 있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이제 저는 마르틴 루터가 했던 말을 인용함으로써 제 설교를 마치고자 합니다. “저는 하나님이 저와 우주만물을 창조하셨음을 믿습니다. 하나님이 제 몸과 제 영혼을, 그리고 제 몸과 영혼이 가질 수 있는 일체의 능력까지도 저에게 주셨고 여태껏 보존도 해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저에게 양식과 의복, 가정과 가족, 날마다 일할 터전과 그날그날 제가 필요한 모든 것을 허락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또한 제가 위험에 처했을 때 보호하시고 모든 악에서 지켜주십니다. 하나님은 도무지 제가 이런 은혜를 받을 자격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이 모든 일을 순전히 아버지 하나님의 선과 자비 때문에 행하십니다. 그러므로 저야말로 하나님께 감사하고, 찬양을 드리고, 섬기고 순종해야 마땅합니다. 이것은 한 치의 오차도 없는 진실입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