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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bs 역사스폐셜 195회 : 최초공개! 정부기록보존소 (2003.5.10.)
방송일: 2003510 조회수 : 15967번 읽음
동영상 : 줄거리:
<역사스페셜 5.10>
제1편 최초공개, 정부기록 보존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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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이틀 <역사스페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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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CR 1. <프롤로그> 역사의 보고, 정부기록보존소
정부기록보존소 문서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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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제> 최초공개, 정부기록 보존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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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C 1. 오프닝 (*서고)
(문서고 사이로 멀리서 저벅저벅 걸어 나와 서서 주변을 둘러보고 가리키며)
이곳은 최초로 공개되는 정부기록보존소 문서고입니다
이곳에 보관돼 있는 문서들은 대한민국 국정운영의 최고 결정의 내용들로
대한민국이 걸어온 순간순간들이 담겨있습니다. 우리 현대사의 결정적인 증거들인
수백만건의 정부기록들이 보관돼 있는 이곳은, 바로 우리 현대사의 보고인 것입니다
(조금 걸어나오다 서서)
누군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역사는 말을 하지 않는다. 그러나 역사속에는 무한한 진리가 내포돼 있기 때문에
지혜의 눈과 용기의 입을 가진 사람들로 하여금 언제나 말하게 한다.
그리고 그들의 음성이 역사를 지켜온 것이다"
(확신있게)
우리는 지금부터 이곳에서, 우리 현대사의 역사적인 순간들을 들여다보는
의미깊은 시간을 시작하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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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CR 2. 6.25 문서들
임명장
(* 이승만 이름 보이면 11)
이승만 대통령이 노트 한 장에 만년필로 흘려 쓴
이 문서는, 3군 총사령관 임명에 관한 것이다
(* 날짜 보이면 27)
1950년 6월30일자로
채병덕 3군 총사령관을 경질하고,
정일권 육군 준장을 육해공 3군 총사령관으로
임명한다는 내용이다.
한국전쟁이 발발한지 불과 5일만이었다
6.25자료 나오고 (현장음) (* 보고)
배경 6.25
(* 자막 나오면)
전쟁이 발발한지 3일만에 서울은 함락됐다
(* 한강 보이면)
퇴각하던 국군은,
한강철교 폭파로 인해 퇴로마저 잃고
상당수가 희생됐다
(* 수원 보이면 18)
수원까지 밀린 국군의 최고 사령관은 채병덕.
육군 총참모장이었던 채병덕은 전쟁이 터지면서 전체 국군을 지휘했지만, 초전부터 일방적으로 밀리고 있었다
수원 비행장 20
6월29일엔 수원 비행장까지
야크기의 폭격을 받았을만큼 전선은 급박하게 돌아갔다. 이날 도쿄에서 날아온 맥아더를 친히 맞았던 이승만 대통령은, 다음날 서른세살의 정일권을 3군 총사령관에 임명했다
문서
정일권 INT '이승만 직접 쓰셔서 백지에 임명함 하고 '만'자 써서 7월1일자로'
6월30일 7
그런데, 정일권의 증언과는 달리
정부기록보존소의 이 문서는 6월30일 날짜다
보통 문서 '만' 7
이승만 대통령은
공식 서류엔 '만'자를 써서 서명을 하곤 했는데,
이승만 6
그것도 다르다
선거위원회 12
또, 정일권의 증언과는 달리
백지가 아닌 선거위원회 용지인데다
급히 쓰여진 흔적이 역력하다
조이현 INT '요즘은 대통령이 고위인사를 임명할 때 관련서류에 서명하고 임명장을 주는 절차가 있지만 당시엔 이승만 대통령이 직접 임명하는 내용을 자필로 써서 임명'
문서 '카피' 14
한국전쟁 초기의 다급했던 상황을 보여주는
이 문서는, 정일권을 임명하기 전
임명의 근거를 적어둔
서류인 셈이다
비밀해제
배경 정전협상 26
전쟁의 긴박한 상황은
정전협상이 한창이던 53년에 서류에도 남아있다
이승만 대통령은 휴전회담을 반대하며
한반도의 통일을 세계의 여론에 호소했지만,
미소간의 정전협상이 마무리 단계에
접어들고 있던 53년 6월.
그림 14
당시 전선의 대치상황을 한눈에 보여주는
이 작전도는, 정전협상이 발효되면 양측 군인들은
현재 전선에서 2킬로미터 후퇴해야 한다는 내용을 전달하고 있다
군인들 15
그러나 전선에선 휴전이 되기전에
몇몇 중요한 지형을 탈환하고자 하는 전투가 산발적으로 벌어져 긴장감이 더해가고 있었다
그림 16
(* 좀 보다가)
그런데, 정전협상의 내용을 전달한 이 문서가
왜 극비문서일까
군사극비 지령 8
그 답은 이 문건과 함께 하달된
본 문건에 있다
결심 13
'한국군은 전투를 계속하라'며
'대한민국 정부는 정전실시에 대하여 협력하지 아니한다'고 정반대 입장을 못박고 있다.
휴전반대 20
당시 많은 사람들이
영구분단이 될지도 모를 정전협상에 반대했다.
강경한 북진통일론자였던 이승만 대통령은
이러한 사회적 분위기를 십분활용했다
조이현 INT '정전협정과 관련된 작전명령서가 대통령 관련 문서에 섞여 있게된 이유는 당시 가장 큰 쟁점 정전협정, 이승만은 강력한 반대입장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그런 반대입장을 국방부나 육군에게 직접 협조하지 말도록 강력한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해서 대통령이 직접 적어서 밑으로 내려보낸게 아닌가 판단이 된다'
엄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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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C 2. (*전시장)
(전시장의 전시된 작전도 가리키며)
급히 작성된 문서 한 장엔 당시의 다급함이 고스란히 담겨있습니다
우리 민족 최대의 위기였던 한국전쟁이 발발하던 초기였습니다.
다른 어떤 무엇이 이보다 더 선명하게 당시를 설명할 수 있겠습니까?
이렇게 이곳의 문서는 우리 현대사의 결정적인 순간들을 증언하고 있는, 역사의 거울인 것입니다
(조금 걸어나오며)
지나간 역사는 후세에 반면교사가 되곤 합니다
최근 이라크전 파병문제를 놓고 우리사회는 진통을 앓았습니다만,
지난 60년대 월남전 파병을 놓곤 어땠을까요?
(옆에 놓인 문건 들고)
지금 제가 들고있는 이 문건은 60년대 월남파병에 관련된 극비문섭니다
그런데 바로 여기, 맨 뒷장에 손으로 쓴 메모가 눈에 띄는데요
'파병은 불가피하고... 충분한 대가를 받도록 할것'이라고 씌여 있습니다
(정면 보며)
바로 당시 대통령이었던 박정희의 자필메모라고 합니다
이렇게 박정희는, 대통령에게 보고된 안건에 일일이 자신의 의견을 덧붙였다고 합니다
박정희의 메모는 과연 어떻게 반영되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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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CR 3. 박정희의 메모들
박정희 서고 들어가는
"여기가 박정희 서가입니다" (현장음)
서가 17
재임기간 18년.
박정희 대통령 기록물들은, 이곳에 소장된
대통령 기록물 중에서 가장 많다.
때문에 6,70년대 박정희 정권의 정책과
당시의 사회상황을 잘 보여준다
앉아서 보는 10
"이게 메모가 박정희 친필" (현장음)
'경제 각료회의에서' 6
유독 박대통령의 문서에서만
볼수 있는 것이 바로 이 자필메모들이다
보고서 15
월남파병에 관한 건에서도 마찬가지다
박대통령은 실제로 파병을 하기 1년전부터
비서실을 통해 월남파병 문제를 검토하고 있었다
마지막 장 빼는 9
파병시 장단점 등이 자세히 보고된 이 서류의
맨 끝에도 박대통령의 메모가 있다
자막 10
'파병은 불가피하나
1. 의용군 형식을 취하고
2. 충분한 대가를 받도록 할 것'
박정희 육성 14 (육성)
박정희 사진 9 (육성)
박대통령은 이렇게, 보고되는 안건들을
직접 일일이 챙겼다고 한다
배경 '월남파병' 20
결국 65년부터 월남파병이 시작됐다.
그에 앞서 한국정부는 박대통령의 지시대로
미국정부로부터 파병에 대한 대가로
한국경제에 대한 지원을
약속 받았다.
이동원 INT '지금으로치면 수백억달러의 군 현대화 장비를 주기로 약속받아'
'충분한 대가' 14
(* 좀 보다가)
미국이 약속한 경제적 지원은
박대통령이 의도한대로 이뤄졌다
배 운송 20
한국은 월남의 각종사업에 참여했다
당시 월남에 진출한 한국의 한 하역회사의 매출은 연간 725만불로, 당시 국내 총 용역산업 수입의 13%를 차지할 정도였다
기술자들 9
기술자들까지 월남에 진출해
한국은 말 그대로 '월남특수'를 누렸고
70년대 경제성장의 밑거름이 됐다
조이헌 INT '월남파병 문제를 다룬 청와대 비서관 입장에서도 대통령의 의중을 가장 잘 반영한 내용, 그것이 월남파병 문제를 추진하는데 하나의 지침됐을 것, 박정희 대통령의 강력한 방향을 보여주는 의미로 받아들여지고 지시사항이 반영되도록 한국측의 많은 노력이 있었다'
보고서 '비밀해제'
광주대단지 문서들 10
박정희 대통령 기록물중
눈에 띄는 또하나가 있다.
유난히 관련 보고서가 많은 이 문건은,
'주동자 엄단하라' 15
광주 대단지 사건에 관한 것이다
보고서에 쓰여진 박대통령의 메모도
예사롭지 않다
(* 자막 보고)
광주 대단지 사건 10
71년, 경기도 광주에서
주민 5만여명이 열악한 주거환경에 반발해
격렬한 시위를 벌였다
주민 '새벽에 갑자기, 성남 시민 다모였다고 해도 과언 아냐'
신문 14
성난 군중의 시위는
언론들이 '폭동'으로 언급했을만큼 격렬했다.
6시간의 시위로 차량 20여대가 파괴되고
주민과 경찰 100여명이 부상을 입었다
주민 '기자들 두드려 패고, 호적등본 있다고 해도 불질러'
판자촌 17 + 12
한국전쟁 후 몰려든 피난민들과
급격한 산업화로 고향을 떠난 농민들은,
서울 곳곳에 판자촌을 형성했다
근대화를 부르짖으며
불도저식 개발을 밀어부친 박대통령에겐,
여간 고민거리가 아니었다
손정목 INT '서울 상공 헬기타고 다니면서 무허가 건물 보인다 철거해라 시장실에 전화하는 것이 박정희 취미였다. 박정희처럼 무허가 건물에 관심가졌던 분 없다'
철거 15
서울시는 판자촌과 도시빈민 문제를
해결한다는 명목하에, 판자촌 주민들에 대한 강제이주 계획을 세웠다. 69년 5월부터 주민들은 쫒겨나다시피 서울을 떠났다
공장기공 및 통수식 11
그들이 도착한 한곳이 바로 광주였다
서울시는 허허벌판이었던 이곳에 공장을 유치하고 쾌적한 주거환경을 마련하겠다고 약속했다.
신문 17
하지만 서울시가 애초에 제시한 개발계획은
진행이 더디기만 했다
판자촌 22
철거민들은 정부의 약속을 믿으며
천막을 치고 겨울을 보내고 여름을 맞았다
대부분 서울에서 막노동을 하다 이주해온
사람들은, 당장 생계를 해결할 일거리를
구할 수가 없었다.
주민 INT '노동할 수가 없고. 차도 없어 서울가서 벌어먹을 길이 없었다'
신문 '16만 생계막연' 10
(* 좀 보다가)
생존 자체가 위협 당하는 속에서
흉흉한 소문도 돌았다
이해학 목사 INT '빈민들 생존권 해결안돼. 어린아이를 삶아 먹었다는 루머가 사실로 받아들일 정도로 모든 사람들 굶주림에 시달려'
신문 '복덕방 성업' 10
거기다가 투기바람까지 불었다
(* 보고)
복덕방 사진 2
당장 연명할 일이 급한 철거민들은
실사 복덕방들 10
이른바 '딱지'를 팔아 생계를 해결하기 시작했다
'딱지'를 사 이주하는 전매 입주자들과
한몫 잡으려는 투기꾼들이 몰려들었다
신문 '종로땅값 같아' 10
광주의 땅값이 종로에 버금간다는 소문도 돌았다.
서울시는 전매 입주자들에게
도랑 옆 5
토지불하 가격을 올리고 가옥취득세를
부과했다
손정목 '서울시는 주택단지 사업, 땅값을 내라, 그런데 전국에서 무허가 건물 몰려와 그 사람들이 돈을 못내겠다 한 것이 광주대단지 사건'
'주동자 엄단에' 11
결국 광주대단지 사건은
70년대 도시빈민들의 절박한 생존권 문제와
도시개발에 따른 투기열풍이 빚어낸 사건이었다
'난동주범 14명 검거' 11
박대통령의 지시대로
관련자들은 엄한 처벌을 받았다
보고서 '주동자 조치' 18
주모급 난동자를 구속 엄벌하도록 하고
불순분자의 개재 가능성을 배제하도록 조치
이해학 INT '사건 마무리하고 누구에겐가 책임을 떠넘기기 위해서 단순가담했던 사람들에게 너무 무자비하게 고문, 소위 북쪽에서 지시한 혐의로 몰아갈려고 했지만 그건 안돼. 단순범인것에 비하면 3년씩 살고 한 것은 많이 산 것'
신문 '주모 15명 영장' 7
도시빈민 문제의 심각성을 제기했던 이 사건은
박대통령을 긴장하게 했다
손정목 INT '46년 10.1 대구폭동이후 처음 일어난 민중폭동. 학생 데모는 있었지만 민중폭동 처음, 박정희 깜짝 놀란 것'
신문
강성천 INT '60년대 산업화 추진 이후에 지속됐던 도시빈민 문제가 집약적으로 표출된 것, 전태일 분신사건이후에 지속적으로 표출됐던 재야 민주화 요구라든가 이런것들에 대해서 박정희 정권이 심각한 위기의식 느낀 것 아닌가 이런 측면에서 주동자를 엄중처벌하라 지시한 것'
비밀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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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C 3. (* 서고)
(박정희 문서 보다가)
우리는 대통령의 메모가 정책결정이나 결과에 반영된 것을 확인했습니다
이렇게 이곳의 문서엔, 국정운영에 깊이 관여했던 최고 정책 결정자들의 고민과 선택의 흔적이 남아있습니다. 그것은 대한민국의 운명과 역사에 관한 명확한 증거이기도 합니다
(멈춰 서서)
그러나 이곳의 문서는 결코 지나간 역사를 증명하는데 그치지 않습니다
때론 오늘날 우리들의 현실에 반영돼 새로운 힘을 발휘하기도 합니다
문서고에 얌전히 보관돼 있는 죽은 문서가 아니라
수십년이 지나서도 힘을 발휘하는 생명력을 갖고 있습니다
최근의 한 사례를 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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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CR 4. 문서 한장의 힘
추미애 사진 10
제주 4.3사건의 진상규명에 관심을 가져온
추미애 의원은, 99년 한 문건을 공개했다
신문 '4.3 재판기록 첫 공개' 8
수형인 명부 11
제주 4.3사건 진상 규명에
획기적인 전기를 마련한 이 문건은,
제주 지방 검찰청에서 작성한 수형인 명부.
넘기는 12
4.3사건과 관련돼 실형을 선고받은
1650명의 명단으로, 신상명세와 죄목과 형량, 선고일자와 복역장소가 기록돼 있다.
사형수 명부 34
사형수 명부 한권엔
36명의 명단이 들어있다
이들의 죄목은 내란죄,
본인들은 무죄를 주장했음에도 불구하고
한달안에 처형됐다.
심지어 하루동안 132명이 처형되기도 했다
사형수들의 대부분은 20대 젊은이들로
열여덟, 열아홉의 소년도 있다
고등군법회의 9
이렇게 무고한 민간인들이
정식 재판절차도 거치지 않고 중형을 살았지만
법적인 근거는 한번도 제시되지 않았다
추미애 INT '그동안 정부는 일관되게 자료 일체 없다 함구, 정부의 기록 발굴은 제주 4,3이 끝나지 않은 진실이 있다 객관적으로 입증할수 있는 물꼬를 터준 계기'
비밀해제
문서고 12
50년동안 어디에서도 찾아지지 않던
4.3관련 정부기록을 찾아낸 곳은
바로 정부기록보존소의
문서고였다
김재순 INT '과거사 공개 준비중, 4.3 진상규명 위한 노력들이 준비되고 있어서 기록물들 발굴에 노력중, 추의원이 확인해왔고 서고 확인결과 수형민 명부 발굴'
수형인 명부
4.3 자료화면 45
(* 항공 5)
비극의 현대사 제주 4.3
(* 군경 보이면 26)
좌익 게릴라를 토벌하기 위한
군과 경찰의 과잉진압이 거듭됐다
47년부터 54년까지 7년동안
적어도 3만명 이상의
제주사람들이 희생됐다
(* 보다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주사람들은 항변조차 하지 못한채
침묵할 수밖에 없었다
(* 항공 13)
수형인 명부의 발굴은
4.3에 관한 논란에 종지부를 찍는 계기가 됐다
그동안 피해자 가족들의 증언만이 떠돌았던
4.3의 진실이, 정부기록을 통해
확인된 것이다.
제주도 가는 9
이중흥, 명부 보는 18
3살때 헤어져 아버지 얼굴도 기억하지 못하는
이씨는, 가슴에 묻어둔채 입밖으로 말하지 못했던 아버지의 이름을, 수형인 명부에서 찾았다
명부 펴고 '요깁니다 요기, 이학수, 당시 36살'
내용 (오등리) 5
아버지는 동네사람들과 토벌대에 잡혀간 뒤
돌아오지 않았다
이중흥 INT '보니까 저희 아버님이 죄가 없다 했는데 유죄로 쳐서 무기징역 받았다 그래서 이럴수가 있느냐'
내용 (무기) 10
가족들은, 제주에서 행방불명된 아버지가
마포형무소에 있을 줄은 꿈에도 생각 못했다
이중흥 INT '못찾았나 안찾았나? 저는 안찾은 경우. 교도소에 계신줄 몰랐고 연좌제 때문에 숨기고 싶었다'
묘지 가는~ 절하는 20
아버지가 행방불명된지 50년
이씨는 수형인 명부에서 사라진 아버지의 흔적을 찾은 것만으로도 큰 위안을 얻었다
20년전부터 아버지의 생일에
제사를 지내고 있는 이씨. 하지만 이씨는 아직도 아버지의 최후를 모른다
묘비
이중흥 '묘비만? 아무것도 없으니까. 83년.. 할아버지 묘 없냐고 해서'
묘지 9
위령제 9
(* 좀 듣다가)
99년 12월, 제주 4.3 관련 특별법이 제정됐다
고건 꽃들고 6
올 4월엔 처음으로 총리가 위령제에 참석했다.
수형인 명부 11
(* 좀 보다가)
문서의 힘이 낳은 결과다
추미애 INT '문서는 살아있는 미이라, 문서 하나를 꺼낼땐 하나의 생명체와 같아. 사실을 얘기하는 것, 우리가 그것을 어떻게 연구하고 발굴하느냐 노력에 달린 것, 문서는 말해줘 언제나 진실을'
탑 시크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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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C 4. (* 전시장)
앞서 보셨듯이 단 몇장의 기록으로,
우리 현대사에서 잃어버렸던 역사, 숨겨졌던 역사를 되찾았습니다
잘못됐던 역사를 바로 잡을수 있다는 희망과 가능성도 확인했습니다
(걸어나오며)
잠시 이야기를 바꿔볼까요?
(유인촌, 전시실 대통령들 육성 녹음기 앞에서 이승만 박정희 눌러 들어보고)
아주 생생하죠?
역대 대통령들의 목소리입니다
(전두환, 김영삼 들어보고)
이런 대통령 관련 음성 녹음들도 이곳에 소장돼 있는 기록들중 하납니다
뿐만 아니라 이곳엔 국가원수의 하루일과가 고스란히 담겨있는 대통령 의전일지와 함께,
아주 사적인 기록들도 보관돼 있습니다
(김대중 눌러 듣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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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CR 5. 대통령의 사적인 기록들
일지들 27
대통령 의전일지.
청와대 비서실에서 기록한 이 의전일지엔
국가원수의 하루 일과가 고스란히 담겨있다.
언제 누굴 만났고 어딜 갔는지,
꼼꼼히 기록돼 있다
68년 1월20일 보이면 5
때문에 어느 특정한 날,
대통령은 무얼하며 어떻게 보냈지도 알수 있다
1.21사태 6
68년 무장공비가 청와대 문턱까지 침투했던
그 다음날.
'2안건 무장공비' 14
그러나 예상과는 달리
무장공비 침투사건에 대한 보고청취는
이날의 제1 안건이 아니었다
'1안건 수출진흥' 7
이날의 제1 안건은
수출진흥에 관한 확대회의였다
일지철 9
면접인사 기록부 10
74년 박대통령의 의전일지엔
영부인이 저격 당한 그 날의 기록도
상세히 담겨있다
넘기는 6
1003 국립극장 도착' 10
10시23분 저격사건 9
각하 병원 2회방문 6
아내곁을 지킬수 없었던 박대통령은 이날,
틈을 내 두번 병원을 방문했다.
19시 영부인 운명 7
박대통령이 병원을 떠난 10분후
영부인은 세상을 떠났다
강성천 INT '주요 면담인사, 주요 보고내용이 수록돼 있어서 문서로써 확인되지 않은 사항들도 보완할수 있는 자료. 잘 분석하면 6,70년대 현대사의 공백 메울수 있는 자료'
최규하 의전일지 11
그러나 현대사의 공백을 메꾸지 못하는
의전일지도 있다
최규하 공항 10 (현장음)
5월16일 의전일지 7
80년 5월13일 쿠웨이트 순방길에 올랐던 최규하 대통령은 16일 22시10분 일정을 당겨 급히 귀국한다
넘기는 - 공백 18
그런데, 신군부가 비상계엄을 전국으로 확대한
5월17일 이후 최대통령의 의전일지는 비어있다. 광주 민주화운동이 발생한 18일은 물론,
21일까지 5일동안 공백상태다.
사임 발표 (현장음) 9
최규하 대통령은 입을 다문채 사임을 했고
이 5일간의 공백은 현대사의 블랙홀로 남아있다
탑 시크릿 6
엘리베이터 열리고 8
이곳에 소장된 사진 자료들중엔
일반에 공개되지 않은 것들도 많다.
앨범 가는 8
그 중 최초로 공개되는 한 앨범.
앨범의 주인은 전두환 대통령이다
바퀴 5
국가원수 추대 휘장~ 14
광주를 무력으로 진압한
전두환 당시 국가보위 상임위원장의
대통령 취임전날 모습들이 담겨있다
(* 보고)
만찬 80.8.26 공군공관 11
(* 보다가)
공군공관에서 있었던 취임 축하연.
윤총장~ 12
윤자중 공군 참모총장의 초대에, 군장성들이
부부동반으로 참석했다
(* 보고)
차림표 7
메뉴까지 챙겨 기록을 남긴 이 앨범은,
전대통령이 퇴임할 때 미처 챙기지 못한 것이다
전두환 7
이 앨범에 담긴 풍경들은 우리에게 문서가
전하지 못하는 또다른 이야길 하고 있다
엄비
필름들 10
육영수 10
(* 사진찍는 7)
남편의 모습을 카메라에 담으며 웃고 있는
영부인의 모습은, 여느집 아낙네와 다르지 않다
여자들과 4
봄 나들이 나온 박대통령 부부의 휴일 풍경이다
사진 넘기는 4
노태우 배드민턴~ 29
이처럼 이곳엔 대통령 관련 사진 자료만
130만건이 보관돼 있다.
이런 사진자료들은
주관이 개입되는 증언보다 더 객관적인 1차자료다.
때론, 형식에 얽매인 공식문서보다
더 많은 이야길 담고 있는
중요한 자료가 된다
(* 보여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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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C 5. (* 김대중 통치사료 정리하는 방에서)
(김대중 통치사료 정리작업하고 있는 방에 들어서고 둘러보다가)
지금 이곳에선, 가장 최근에 도착한 김대중 전 대통령의 통치사료들을
정리하고 분류하는 중입니다
(엠씨, 작업하는 사람들 또는 작업하던 현장으로 들어가고)
(허용되는 몇 개 보고 현장에서 멘트) *
대통령 통치사료는
청와대에서 대통령 재임기간동안 생산된 거의 모든 기록물을 말합니다
대통령의 결재문서는 물론, 보고받은 문건에서 메모나 일정표, 시청각 기록물, 대통령 가족의 공적업무활동과 관련된 모든 기록물들이 포함됩니다
때문에 이같은 대통령의 국정수행에 관한 기록은
공개될수 있는 부분들은 분류 정리되는 대로 공개하고 비공개되는 부분은 정리된 다음 30년이 지나서 세상에 공개됩니다. 그때는 역사의 평가를 받게 될 것입니다
(사람들 작업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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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CR 6. 대통령의 통치사료들
사진철 넘기는 13
지난 2월, 퇴임과 함께
방대한 양의 김대중 대통령 기록물들이
이곳으로 이관됐다
문건들 14
대통령 결재문서는 물론,
보고 받은 서류들과 재임기간 중 접수된
민원자료 8만여건도 포함돼 있다
자필노트 16
(* 보다가)
국정운영에 관한 생각들이
꼼꼼하게 적힌 친필노트를 비롯해
테잎 12
시청각 자료 1만7천여건까지,
총 15만8천여건에 이른다.
이는 역대 대통령들의 기록물을 모두 합한
12만여건 보다도 더 많은 양이다.
모니터 16
무엇보다 대통령 기록물이
공식적으로 정부기록보존소에 이관된 것은
정부 수립이래 처음이다.
김경남 INT '법적으로 이관 올해 처음.. 공공기관의 기록물 관리에 관한 법령에 따라'
문서들 20
한해 정부에서 생산되는
정부기록물은 800만건에 이른다
그러나 그동안 대통령 기록물들을 포함한
정부기록들은, 제대로 관리되지 못했다
대통령 원본 t.u - 29
과거 권위주의 정부에선
정부기록들을 체계적으로 관리하지 않았고
공개하지 않는 관행이 지속돼왔다.
심지어는 책임을 회피하기 위해
문서를 고의적으로 폐기하거나
사유화하는 일까지 있었다
넘기고 김영삼 도장 34
(* 보다가)
그러나 대통령 기록은
중요한 통치사료로 한 나라가 걸어온 길이다.
개인의 것이 아니라 국가의 재산이다
공공의 재산이며 국민 모두의 것이다
김한욱 INT '국정운영의 투명성과 국민의 알권리 충족시키면서 과거사 규명 정리에 필요. 미래 정책을 입안하고 집행하는데 하나의 표본이 되지 않겠나 판단. 보다 국민을 위해 정책을 입안 집행하고'
문서방식의 변화 30
미래를 위한 과거.
미래는 오늘이 모여서 된 것이며,
오늘은 다시 어제가 모여 된 것이다
이 곳의 문서엔 그런 역사와 세월이 담겨있다
정부수립 초기에 손으로 쓴 문서에서
타자문서, 컴퓨터 문서를 거쳐,
최근의 전자기록까지..
문서양식에도 변화가 많았다
대통령들의 서명 12
그런데 한가지 흥미로운 점이 있다
강성천 INT '대통령 문서보면 관계부처 장관 대통령 비서실장 국무총리 서명있게 되는데 대통령에 비해서 서명 작아. 대통령에 비해 자신을 낮추고자 하는게 반영된 것 아닌가 추정'
서명 비교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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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C 6. (* 서고)
이곳 정부기록보존소를 세운 것은
지난 69년, 이제 30년이 조금 지났습니다
그런데 이곳에 보관된 자료 중엔, 그보다 훨씬 오래된 문서들도 있습니다
(가미가제 특공대 모집 안내책자 펼쳐 보이며 '육군소년 비행병 모집 안내책자 있습니다')
일제말기 조선총독부에서 가미가제 특공대를 모집하기 위해 내걸었던 안내책자입니다
일제가 쫒겨가면서 남겨놓은 총독부 문서속에서 발견된 것입니다
(사상범죄철 보고 '사상범죄자의 명단이 들어있는 것 같습니다')
이런 하나하나의 자료가 우리의 역사를 바로잡기 위한
기초자료가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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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CR 7. 정부기록보존소의 역사
정부기록보존소 32
문서는 역사다
특히 대통령 기록물들을 포함한 정부기록은,
그 나라 역사의 기본이다
정부기록보존소는
1969년 정부의 영구보존대상 문서 등
정부자료를 보존하기 위해 총무처 소속으로 설립됐다. 가장 오래된 문서인 <조선 왕조 실록>을 비롯해 수백만건이 소장돼 있다
문서철 <총독부 경비관계철> 26
3만여권이 넘는
일제시대 문서는 자료적 가치가 높다
1932년 경무과에서 생산한 <경비 관계철>은
조선 총독부와 일본 내무성, 그리고 각 도에서 오고간 문서들로 이루어져 있다.
내용 열어보는 13
(* 좀 보다가)
당시 조선총독부가 지방에서 보고받은
치안관련 문서중에 하나를 보면,
불경사건 범인 이봉창 6
일본 천황을 암살하려고 시도했던
이봉창 의사를 불경사건의 범인으로,
공범 김구 7
김구 선생을 공범으로 보고하고 있다
내용 4
총독부는 이들을 포함해
불경사건 용의자 김구 15
요시찰 인물로 분류한 조선인들의 동향을
계속 주시했다
'민족주의 절대독립' (* 보고)
문서고 8
잘 알려지지 않은 독립 운동가들의 활동과
일제 식민통치를 엿볼수 있는 자료들이다
꺼내서 '수용자 신분장' 28
(* 수용자 신분장 보이면)
일제시대 형무소에 수용돼있던
수용자들의 명단도 있다
형에 관한 기록은 물론,
수감자의 특징을 자세히 기록해놓았는데,
인체 그림 보이면 17
몸에 있는 문신에서 상처까지
자세히 그려놨다
문서고 14
정부기록보존소에 소장된 기록중엔
일본정부로부터 받은 일제 강제 연행자
명부가 있다.
관동군 제4군 직할부대 유수명단 37
노태우 대통령 방일을 계기로 받은
일제 강제 연행부로, 약 48만명이 기록돼 있다.
현재 일본이나 미국에서 진행중인
징용과 관련 소송들의 증거자료로 활용될 수 있는 중요한 자료다
또 유족들에겐 자신의 조상이
언제 사망했는지 어디로 끌려가서 어떻게 노동을 했는지 알려주고 있다
2002년 전산화 작업을 마쳐,
생년월일과 이름만 알면, 정부기록보존소
홈페이지를 통해서도 조회를 할수 있다.
마이크로 필름 보는 16
(* 좀 보다가)
이곳엔
조선총독부 토지조사국에서 작성한
80만매에 달하는 토지 지적원도가 있다
지적도 보이면 8
제주도를 포함해 남북한의 토지를
1200분의 1 크기로 자세히 기록해놓았다
김제군 원도 15
아직까지도 그 이용가치가 높은
문서중의 하나다
노영종 INT '1912년부터 실시된 토지조사사업결과 작성된 것이 지적원도와 토지조사부. 지적원도는 필지번호와 함께 소유주가 정확하게 기재돼 있기 때문에 지금도 후손들이 땅을 찾는데 중요한 자료가 되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열람하고 있다'
열람실 15
이곳에선 종류에 따라
정보기록청구서를 작성하면
일반인들도 문서를 열람할수 있다
정보공개 청구서 작성 7
할아버지, 직원과 대화하는 13 (현장음)
젊은이, 직원과 대화하는 6 (현장음)
마이크로 필름 보는 12
이 열람객은 일제때 징용간 할아버지에 관해
알아보기 위해, 정부기록 보존소를 찾았다
직원과 대화하는 (현장음) 20
(* 보고 있는 10)
전산화가 돼있는 덕분에 그리 어렵지 않게
할아버지의 서류를 찾을수 있었다
서류 10
일본인이 작성한 서류엔 '징용'이란
글자가 또렷이 박혀 있다
장윤호 INT '일단은 아버지와 상의해서.. 손해배상 문제보다 할아버지 유해라도 있으면 찾았으면'
학술연구 11
그 외에도 다양한 분야의 학술연구를 위한
열람도 늘고 있다
송기춘 INT '해방이후 제헌기에 기독교인 5% 남짓인데 그당시 왜 관공서 공휴일에 성탄절이 들어갔을까 의문들 있어, 공문서 열람하고자 왔다'
마이크로 필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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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C 7. (* 서고)
(다시 웃옷입고,
문서들을 보며 걸어나오고)
이 곳을 돌아보니,
'역사란 흘러가버린 시간이 아니라
도리어 미래를 향해 흘러 내려오는 시간'이라는 말이 새삼 의미있게 다가옵니다
그동안 국가의 무관심과 방치, 역사에 증거를 남기지 않기 위한 조직적인 폐기 등으로 인해
우리 역사에서 아주 사라진 문서들이 적지 않습니다
(멈춰서서)
하지만 그나마 다행스럽게 살아남은 이곳의 문서 하나하나는 그대로 곧 하나의 역사입니다
결코 현실과 동떨어진 별개의 것이 아니라 역사의 연장선상에 있으며,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에 영향력을 가집니다. 우리가 이곳의 기록 하나하나를 보는 이유도 바로 그 때문일 것입니다
(걸어오며)
지금 이곳 정부기록보존소엔
역사 재평가를 위한 실증적 자료로 활용될 수많은 기록들이 있습니다. 모두 20세기 한국사를 증언해주는 중요한 기록들입니다. 이 기록들을 실마리로 해서, <역사스페셜>은 이제부터 우리 현대사의 비밀들을 하나하나 풀어갈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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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