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4회 문학과사회 신인문학상 / 구윤재
접시 되살리기 / 구윤재
1
접시 하나를 상상하자 아이들이 뛰어 들어온다 그러므로 이곳은 박물관인가? 뛰어온 아이가 너덧은 돼 보인다 산만하지만 예의 바른 아이들 큰 소리로 인사한다 안녕하세요? 나는 대답 대신 이름이 뭐니? 묻고 저는 승희요 저는 인주요 저는 은재요 저는 은수요 저는 성우요 이름을 다 듣고 나는 한 아이를 지긋이 쳐다보았는데 그건 아이의 이름 내 슬픔을 건드렸기 때문이다 그러나 금방 어떤 아이가 어떤 이름이었는지 까먹는다 여름에 발그레한 볼을 가진 아이들은 구분하기 어려우므로 그러니까 얘들아
너희 조심해야 한다 접시가 깨지지 않게 해야 한다 하는 순간 접시는 깨진다 희 접시 이 방 한가운데 놓인 접시 모든 조명을 한 몸에 받는 접시 우리 박물관의 유일무이한 접시 평평해서 주말 토스트를 올리기 적당하고 딸기잼 블루베리잼 필라델피아 크림치즈의 맛을 아는 접시 그러나 어떠한 용도로도 사용된 적 없는 흰 접시가
산산조각이 난다 이것 봐 내가 조심하랬지! 화를 내면 아이들은 벽과 구분되지 않는 흰 얼굴이 되네? 벽에 딱 붙게 되네? 아이들은 웅성인다 잘 들어보면 죄송하다는 말이다 쭈그려 앉아 깨진 접시 조각을 하나씩 줍는다 안녕 나의 흘러내리는 잼 안녕 나의 가능했던 주말 아침 안녕 나의 유일무이여...... 아이들은 어느새 접시 주변에 모여있다
2.
빗자루가 필요한데 생각하니 창고가 있었다 빗자루를 들고 돌아오니 아이들은 정말 다섯이서 빼곡한 원이구나 위험해. 저리가, 말하면 아이들은 잠깐 깨졌다가 금방 모여든다 어디서 시작되었는지 유리 부스러기는 끝도 없이 나오네 저리 가 말하면 몰려드는 애들에게 그런데 너희
왜 전부 맨발이니?
한참을 이상하다 이상하다 중얼거리는데 한 아이가 저희가 물어드릴게요 말한다 무엇을? 말한 애의 얼굴을 쳐다보는데 저 애의 얼굴은 대장 같네 방금 한 말로 인해 너는 이제 대장 같은 얼굴을 갖게 되엇구나 속으로 생각하면 아이는 먼저 가서 웃고 있다
3.
대장의 구호 아래 아이들이 한 줄로 섰다
대장은 가운데 붉은 깃털이 박힌 유리구슬 두 개를 줄 테니 한 조각의 접시와 맞바꾸자고 했다 이건 작년 여름에 지구 반대편에서 가져온 인어의 눈물이에요 그러자 다른 아이들도
이름이 반쯤 지워진 축구공과
필통 깊숙한 곳에 숨겨둔 쪽지와
좋아하는 에니메이션이 방영되는 저녁 다섯 시를 내게 건네고
접시 조각을 얻은 아이들은 온전한 접시가 되어 박물관을 빠져나갔다 주머니 깊숙한 곳의 먼지를 뒤적이는 아이에게도 접시 한 조각을 주어야 하는데
너는 이름이 뭐니
성우요
성우는 뭘 들려줄 수 있니?
쟤네가 다 말해서 저는 드릴 게 없어요
난처해하면 성우는 어느새 아까보다 창백해진 얼굴로 그럼 저는 저기서 기다릴게요 말하고 성우가 가리킨 곳은 성우의 손끝에서 뻗어 나온 기둥이다 상아색으로 페인트칠된 기둥은 빛이 잘 드는 곳에 있진 않지만 깨끗하고 보송한 느낌을 줘
성우는 종종 기둥에 머리를 기댄 채 나를 훔쳐봤다
4
잊을 만하면 성우의 발밑에서 자꾸 유리 부스러기가 나왔다 여기는 정말 꿈에서 들른 모래사장 같아 나는 맨발의 성우가 다칠까봐 바닥을 쓸고 또 쓰는데 아무리 쓸어도 다 끌어안을 수 없어서
성우를 중앙으로 밀어낼 수밖에 없었다 전시품이 없는 박물관에 서 있는 성우는 날이 갈수록 마르고 평평해지고 성우를 돌려보내려면 하나의 이야기가 꼭 필요했는데
덧붙일 조각이 없었다
진열된 시간이 길어질수록 파리해지는
성우의 두 발을 오래 들여다보고 있으면
빛의 모서리를
쥐고 있는 것만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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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윤재의 시에는 강렬한 이미지나 말을 제시하는 대담함이 있고, 제시한 모티프를 끝까지 밀고 나가는 추진력이 있었다. 그는 시를 쓰는 과정 자체가 허구적 상황의 전개가 되는 현장성 있는 언어를 구사한다. 시의 현장에서 벌어지는 소용돌이는 사변적 상상력과 익숙한 시공간을 뒤섞는다. 그렇게 언어가 움직이는 와중에 아이들이 불쑥 튀어나와 말하거나 움직이고, 다시 언어의 뒤로 숨기도 한다. 그 숨바꼭질 같은 활달함이 읽는 사람을 즐겁게 했다. 경합하는 작품들 가운데 한 작가의 것만을 고르는 일이 쉽지 않았으나, 당선자의 대담하면서도 탄탄한 언어에 결국 설득되었다. 당선자에게는 진심 어린 축하를, 아쉽게 손을 들어주지 못한 응모자들에게는 응원의 인사를 전한다. 이희우(『문학과사회』 편집동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