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 안에서 빛이라
에베소서 5:8-10 24/08/25 성령강림 후 제 14주
5:8 너희가 전에는 어둠이더니 이제는 주 안에서 빛이라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
5:9 빛의 열매는 모든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에 있느니라
5:10 주를 기쁘시게 할 것이 무엇인가 시험하여 보라
평안의 인사를 드리겠습니다.
하나님의 은총과 평화가 우리 모두에게 그리고 우리 자녀와 이웃들에게 늘 함께 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강릉에 가면 한 번쯤은 꼭 먹여할 음식이 하나 있습니다.
강릉시 초당동에 있는 순두부입니다.
순두부 한 그릇에 밥 말아 먹고 솔밭을 따라 경포호수 쪽으로 걷다보면 기와집 하나를 만날 수 있습니다.
허균(1569-1618)허난설헌 기념관입니다.
‘홍길동전’의 저자 허균과 그의 누나 허난설헌을 기념하는 기념관입니다.
허난설헌
본명은 허초희(1563-1589)입니다.
그가 생을 마감할 때의 나이가 27세였습니다.
하지만 그가 남긴 시는 지금도 우리 가슴에 아주 큰 울림을 줍니다.
그 중에 하나가 허난설헌 동상 앞 작은 비에 새겨진 시
‘아들 무덤 앞에서 우노라’(哭子)입니다.
지난해에는 사랑하는 딸을 여의고
올해에는 하나 남은 아들까지 잃었네.
슬프디 슬픈 광릉의 땅이여
두 무덤 나란히 마주 보고 서 있구나.
사시나무 가지에는 쓸쓸히 바람 불고
솔숲에선 도깨비불 반짝이는데,
지전을 날리며 너의 혼을 부르고
너의 무덤 위에다 술잔을 붓노라
너희들 남매의 가여운 혼은
생전처럼 밤마다 정답게 놀고 있으리라.
비록 뱃속에는 아이가 있다 하지만
어찌, 제대로 자라날 수 있으랴.
하염없이 슬픈 노래를 부르면서
피눈물 울음을 속으로 삼키리라.
우리 조상들은 아버지가 돌아가실 때 천붕天崩이라고 했습니다.
‘하늘이 무너졌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하늘이 무너진 천붕보다 더 불행한 일이 인생에 있습니다.
자식이나 후손을 먼저 앞세워 보내는 참척(慘慽)이 그것입니다.
참혹하고 무자비한 경험을 했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일까요?
사람들은 허난설헌을 이야기 할 때 꼭 이렇게 평가합니다.
비운의 천재
하지만 비운의 천재로 불리는 허난설헌도 바라는 것이 하나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죽은 자식의 영혼, 그 영혼의 행복이었습니다.
너희들 남매의 가여운 혼은
생전처럼 밤마다 정답게 놀고 있으리라.
허난설헌처럼 우리가 가지고 있는 성경에는 자식을 먼저 보낸 엄마를 만날 수 있습니다. 누구입니까?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입니다.
참척(慘慽)을 당한 마리아
과연 그녀는 행복한 사람일까요 불행한 사람일까요?
세상 기준으로 보면, 그녀는 분명 불행한 사람입니다.
자식을 가슴에 묻는 일이 뭐가 행복한 일이겠습니까?
하지만 믿음의 눈으로 보면,
마리아는 불행 속에서도 하나님의 보살핌을 받았던 그 누구보다도 행복한 사람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는
첫째 하나님의 보살핌을 받았고
둘째 하나님의 큰일 곧 우리의 그리스도 예수님을 낳으셨기 때문입니다.
마리아의 찬가라고 불리는 누가복음 1장 46-48절입니다.
(새)눅1:46 그리하여 마리아가 말하였다. "내 영혼이 주님을 찬양하며
1:47 내 마음이 내 구주 하나님을 좋아함은,
1:48 그가 이 여종의 비천함을 보살펴 주셨기 때문입니다.
이제부터는 모든 세대가 나를 행복하다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첫째 48절입니다.
그가(내가 좋아하는 하나님이) 이 여종의 비천함을 보살펴 주셨기 때문입니다.
둘째는 49절입니다.
1:49 힘센 분(엘샤다이/전능하신 하나님)이 나에게 큰 일을 하셨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를 낳게 하셨고
그리고 그분으로부터 온 인류가 죄 사함을 얻어
보살핌을 받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마리아는 고백합니다.
‘이제부터는 모든 세대가 나를 행복하다 할 것이다’
그러니 ‘박복하다, 비천하다, 불행하다.’ 넋 놓고 살아가지 마시고,
비천함 가운데서도 돌보시는 하나님.
불행 속에서도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큰일을 행하시는 하나님.
그 하나님을 더욱 찬양하시고, 좋아하시는, 행복한 그리스도인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세계에서 제일 행복한 사람
그러면 꼭 거론되는 인물들이 있습니다.
누구일까요?
일론 머스크 빌 게이츠 이재용 등등입니다.
왜 이분들의 이름이 거론 될까요?
그것은 행복의 제일 조건이 돈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과연 그럴까?
적어도 하박국 선지자는 여기에 동의하지 않았습니다.
하박국 선지자의 고백입니다.
합3:17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하지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먹을 것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3:18 나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리로다
어떻게 이런 고백이 가능할까요?
하나님 안에서 행복을 누린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하박국은 제대로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런 고백이 가능했던 것입니다.
시편 23편에 나타난 다윗의 고백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떻게 죽음의 골짜기에 처한 다윗이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는 불후의 고백을 할 수 있었을까요?
이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 안에서 행복을 누릴 줄 아는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 신앙의 선배들은 불행 속에서도 가난 속에서도 아픔 속에서도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이렇게 노래했던 것입니다.
찬송가 94장 3절입니다.
주 예수보다 더 귀한 것은 없네 이 세상 행복과 바꿀 수 없네
유혹과 핍박이 몰려와도 주 섬기는 내 맘 변치 못해
세상 즐거움 다 버리고 세상 자랑 다 버렸네
주 예수보다 더 귀한 것은 없네 예수 밖에는 없네
두 번째 질문입니다.
우리 주님은 자신을 따르는 제자의 조건으로 두 가지를 제시하셨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첫째 자기를 부인 것
둘째 자기 십자가를 지는 것
마 16:24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막 8:34 무리와 제자들을 불러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눅 9:23 또 무리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자기를 부인하는 인생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는 인생
과연 이러한 인생은 행복일까요 아니면 불행일까요?
비운의 천재 시인 허난설헌과 동일하게 27세에 생을 마감한 청년 시인 윤동주는 자신의 시 ‘십자가’에서 행복한 그리스도인의 모습을 이렇게 적고 있습니다.
쫓아오던 햇빛인데
지금 교회당 꼭대기
십자가에 걸리었습니다.
첨탑(尖塔)이 저렇게도 높은데
어떻게 올라갈 수 있을까요
종소리도 들려오지 않는데
휘파람이나 불며 서성거리다가,
괴로웠던 사나이,
행복한 예수 그리스도에게처럼
십자가가 허락된다면
모가지를 드리우고
꽃처럼 피어나는 피를
어두워 가는 하늘 밑에
조용히 흘리겠습니다.
여기에 보면 청년 윤동주는 예수님을 이렇게 표현합니다.
괴로웠던 사나이,
행복한 예수 그리스도
괴로움과 행복
이것은 동시에 존재할 수 있는 감정이 결코 아닙니다.
형벌로 짊어지어야할 십자가는 분명 불행이고 괴로움입니다.
하지만 그 십자가의 형벌이 누군가에게 치유가 되고 또 누군가에게 구원이 되고 또 누군가에게 영생이 된다면 어떻겠습니까?
청년 윤동주는 바로 그 비교할 수 없는 가치 ‘바라는 것들의 실상’을 본 것입니다.
곧 하나님의 치유와 하나님의 구원과 하나님의 생명을 본 것입니다.
그래서 청년 윤동주는 이렇게 서원했던 것입니다.
괴로웠던 사나이,
행복한 예수 그리스도에게처럼
십자가가 허락된다면
모가지를 드리우고
꽃처럼 피어나는 피를
어두워 가는 하늘 밑에
조용히 흘리겠습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의 종이라고 떠들면서
성도들의 피와 땀과 눈물로 세운 교회를 세습한다는 것은 아주 부끄러운 일입니다.
세 번째 여러분께 묻겠습니다.
여러분은 행복한 그리스도인입니까?
행복한 전도자 바울은 평화와 일치라는 행복의 길에서 점점 멀어져가는 에베소 교인들에게 편지하면서 이렇게 권면합니다.
엡5:8 너희가 전에는 어둠이더니 이제는 주 안에서 빛이라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
여기서 바울이 언급한 ‘어둠’이란?
불행했던 우리의 과거
곧 죄의 종이 되어서 어둠가운데 살았던 불행했던 과거를 말합니다.
이런 것입니다.
엡2:2 그 때에 너희는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조를 따르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
2:3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
그랬던 우리에게 드디어 행복에 길이 열리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엡2:4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2:5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는 은혜로 구원을 받은 것이라)
2:6 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
따라서 오늘 우리가 하나님의 심판을 피한
행복한 그리스도인이라는 증거를 이 땅에 보여 주어야 하는데
그것이 두 가지입니다.(행복의 증거 두 가지)
하나는 ‘주 안에서 빛이다’라는 것을 깨닫는 것입니다.
엡5:8 너희가 전에는 어둠이더니 이제는 주 안에서 빛이라
다시 말해 주 안에서 행복한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비 그 큰 사랑 아래 있는 행복
예수 안에 있는 행복
그 행복이 있는 사람이 바로 ‘나’라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또 하나는 빛의 자녀 곧 행복이 있는 사람처럼 살아가 한다는 것입니다.
엡5:8 너희가 전에는 어둠이더니 이제는 주 안에서 빛이라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
어떻게요?
빛이 있는 사람처럼 행복이 있는 사람처럼 착하게 의롭게 그리고 진실하게 살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5:9 빛의 열매는 모든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에 있느니라
말씀을 마칩니다.
행복을 모르는 사람의 공통점이 있습니다.
남 부러워할 만큼 많은 복을 받고도 그것을 누릴 줄 모르는 사람의 공통점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타인을 향한 배려심이 없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바울은 오늘 본문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첫째 우리는 주님 안에서 빛입니다.
둘째 빛의 자녀답게 행복하게 삽시다.
셋째 모든 착함으로, 모든 의로움으로, 모든 진실함으로 우리의 행복을 실험해 보자는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 말씀의 결론 ‘5:10 주를 기쁘시게 할 것이 무엇인가 시험하여 보라’의 본뜻입니다.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의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