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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사록(海槎錄)》은 동명(東溟) 김세렴(金世濂)이 인조 14년에 일본으로 사신 갔다가 이듬해 돌아올 때까지 나날이 적은 것, 곧 일기이다.
丁丑 / 三月 / 初三日壬寅
인조 | 14 | 1636 | 병자 | 崇禎 | 9 | 44 | 집의, 사인, 사복시 정이 되다. ○ 8월, 日本通信使副使가 되다. |
인조 | 15 | 1637 | 정축 | 崇禎 | 10 | 45 | 귀국하여 復命하다. 〈海槎錄〉을 남기다. ○ 6월, 黃海道 觀察使가 되다. |
晴。朝飯馬巖。張正字應一朴生員榥。自仁同來見。中火于安谷。善山府使孟世衡出待。趙察訪松年。自義城來見。萬死重逢。悲喜交至。行色忙急。不得少時長語。可歎。夜深到尙州。上使已先到。牧使金尙宓及金正郞光爀蔡座首得湖來見。卜人安龍瑞聞余至。來待已二日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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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명집(東溟集) 김세렴(金世濂)생년1593년(선조 26)몰년1646년(인조 24)자도렴(道濂), 도원(道源)호동명(東溟)본관선산(善山)시호문강(文康)
東溟先生集卷之十 一善金世濂道源著 / 海槎錄下 / 三月
인조 | 14 | 1636 | 병자 | 崇禎 | 9 | 44 | 집의, 사인, 사복시 정이 되다. ○ 8월, 日本通信使副使가 되다. |
인조 | 15 | 1637 | 정축 | 崇禎 | 10 | 45 | 귀국하여 復命하다. 〈海槎錄〉을 남기다. ○ 6월, 黃海道 觀察使가 되다. |
初一日庚子晴
曉發。中火昌寧。夕抵玄風。儒品吏民皆會官門以待。郭㠎等數十人聞一行由淸道作路。往待于大丘。日夕始還。儒生金 大鎔 自大丘直向安彥。夜深始到。聞李承旨景憲景曾 兄弟尋大夫人到境內。送朴得信問安。
初二日辛丑晴
曉發行抵茂溪。高靈縣監李 起先 來見。午抵星山。金泉察訪金 湜 以夫馬差使員來待。縣監李 時曼 以上使支應在八莒。儒生金軸等數人來見。從弟許
亦來。日夕發向。夜深到扶桑驛。開寧縣監金 聲振 來待。聞上使自大丘直向八莒。方伯送人相問。得趙察訪松年 書。夜深從弟自星山追至。
初三日壬寅晴
朝飯馬巖。張正字 應一,朴生員 榥 自仁同來見。中火于安谷。善山府使孟 世衡 出待。趙察訪 松年 自義城來見。萬死重逢。悲喜交至。行色忙急。不得少時長語。可歎。夜深到尙州。上使已先到。牧使金 尙宓 及金正郞 光爀,蔡座首得湖來見。卜人安龍瑞聞余至。來待已二日矣。
初四日癸卯陰。夕雨夜大雪。
成參奉 汝櫄 來見。金佐郞宅叔母與尹妹及尹 之重避亂。過城底入拜。到咸昌。申務安 檝,郭熊川 龍伯 來見。龍宮縣監李 槳 以支應來待。中火于幽谷。夜深抵聞慶。田克成自醴泉來見。聞去秋所得兒奔竄中夭折。渡海以後兩兒逝矣。慘慟可言。醴泉郡守李 明翼,咸昌縣監權 涉 以支應來待。
初五日甲辰朝雪午晴
平明發行。中火安保。延豐槐山俱出待。夕抵忠原。縣監申 得淵 以是日喪妻云。
初六日乙巳晴
平明入弔。中火用安。秣馬無極。夜深抵竹山。軍官權瓊自忠原往原州。
初七日丙午晴
平明發行。夕抵陽智。自入圻甸。兵火之慘。不忍見。道路見載屍者相望。縣內人家盡燒。縣監兪 希曾 只率下人一名。作脫粟飯以供使臣。一行人馬。皆自嶺南便行。一日或行一百三四十里。到此皆顚仆不能進。初昏從事官自竹山追至。
初八日丁未晴
平明發行抵龍仁。縣監李 命說 自遠村來見。及到麻戲川。積尸連血數十里。馬不能前。忠淸監司鄭 世規敗軍處。慘慟可言。到新院。人馬不能進。又聞良才無人家。不得已留宿。
初九日戊申晴
平明發行渡漢江。江岸一帶。閭舍蕩盡。自竹山至江上二百里之間。無復人煙。流離者已成鬼色。及入城。南大門鍾樓以下左右行廊。盡成灰燼。闕中侍衛將士不成貌樣。承政院移于內班院。備邊司移于承政院。一行復命。命引見。上問風俗山川。土地軍民。戰船兵器及關白政治。義成能否。竝一一陳達。又問彼國之人有能文者乎。上使對曰。不成文理。詩則尤不好。臣世濂對曰。召長老,璘西堂行文儘好。國中唯道春之文爲最。沿路及江戶。多有來問者。皆以理氣性情等語爲問。不可以蠻人而忽之。上曰。聞彼中素多災異。今亦有之耶。對曰到江戶。有地震之變。但災變影也。人事形也。日本奢侈已極。目古災禍。未有大於奢侈者。此則變之大者。上喟然曰。此言甚是矣。國家之患。必出於奢侈。仍問嶺南新經調兵運餉之擧。蕩敗必甚。民情若何。俱以所見陳達。上曰嶺南素稱忠義之鄕。到今信然矣。全羅道則可駭之事極多。嶺南再度收合。尙不潰散。其人心風俗之忠厚可知。予平日亦不知其至此。退出。領議政昇平在藥房送人。遂與上使從事俱往拜。平城府院君,綾城府院君在扈衛廳送人。又往拜。日夕還乾川家。則老奴春斤在矣。是日島主書契至自東萊。問安于使臣。此前日所無者。承文院撰使臣答書以送。居數日。島主書契又至。以前日留置銀子。非不運送。而使臣旣不欲受。今若強送。亦非誠信。願獻嶺南公貿木三百同。銀子則留用。朝廷以爲其意出於誠信。啓稟從之。留置銀子不過一萬餘兩。而公貿木價當不下一萬六千餘兩。或以爲朝廷辭其半爲得體。大兵之餘。國計盪竭。不得已竝用。令慶尙道運納其木于京中。是行也首尾八箇月。往返一萬四千餘里。日本請使。專出於義成調興之訟。逆順莫測。調興之黨百般伺釁。必欲生梗而後已。人之視此行。不啻入虎口。余又宿疾積年。沈痼之餘。萬無得達之望。獲免顚仆。不至辱國。若其一路供億之侈盛。接遇之恪謹。不足言。關白力排衆議。極其禮敬。上堂傳命。回禮備送。此則非意慮所及。莫非王靈遠暢。廟算得宜之致。豈不幸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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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암집(農巖集) 김창협(金昌協)생년1651년(효종 2)몰년1708년(숙종 34)자중화(仲和)호동음거사(洞陰居士), 한벽주인(寒碧主人), 삼주(三洲), 농암(農巖)본관안동(安東)시호문간(文簡)특기사항송시열(宋時烈), 이단상(李端相), 조성기(趙聖期)의 문인. 노론(老論) 낙론(洛論)의 종장
農巖集卷之二十七 / 墓誌銘 / 慶州府尹金公墓誌銘 幷序
金尙宓 | 1573 | 1652 | 安東 | 仲靜 |
昔先君子棄諸孤也。子昌業涕泣言養曾祖墓。宜得大人銘久矣。而以事行履歷未具也。不克有請。今則已矣。先君子曰。然是吾志也而卒不就。恨也。因顧昌協曰。汝兄尙可繼而爲也。昌協與昌業皆涕泣受敎。則又歷擧平日所聞見。以詔其事行曰云云。履歷曰云云昌協與昌業。又涕泣受敎。退而識之以藏焉。蓋將益求遺事。次第其本未。以卒先君子之志。而文獻竟無徵矣。於是昌業喟然謂昌協曰。是不可以復有待矣。卽不及今有述。日遠而日忘矣。兄其圖之。昌協曰。諾。是固先君子之志也。而又命之矣。其敢無述。遂爲之敍而銘焉。其敍曰。故慶州府尹金公諱尙宓。字仲靜。敦寧府都正贈領議政諱克孝之季子。右議政文忠公諱尙容。左議政文正公諱尙憲之弟也。其上世有諱宣平。自古昌城主。佐麗祖破甄萱。以功封太師亞父。食古昌。古昌後改安東。子孫遂爲安東人。曾祖諱璠。文科。平壤庶尹贈吏曹判書。祖諱生海。信川郡守贈左贊成。都正府君娶左議政東萊鄭公惟吉女。生五男。其二有大名於世。卽文忠文正也。金氏於是益大。而公亦蚤攻藝業。十九。中司馬試。歷仕內外。才猷茂著。劇郡望邑。輒見推轂。又輒以高第受褒賞。遂躋下大夫。晉貳兩曹。自常調取顯官。多所自致。不專以門地取重也。公履歷甚多。其可紀者。在內爲司饔院,典牲署奉事。宗簿寺,廣興倉主簿。掌隷院司評。漢城府庶尹。中樞府經歷。掌樂院僉正。軍器寺副正。掌隷院判決事。戶曹,刑曹參議。敦寧府都正。在外爲扶餘,白川縣監。溫陽,杆城郡守。大丘府使。尙州,羅州,洪州牧使。慶州府尹。最後陞嘉善階。則壽爵也。公爲人剛方明察。於事無苟。可於人無苟恕。自居家以至爲官。一切皆然。以此下皆畏憚。而治顧常有聲。所在多爲立碑。蓋先君子之言如此。其他則未有考也。然公爲溫陽。文正公自訟少日居廣州時事。述志悔篇。以寓勉戒。而稱公前涖兩縣。皆有遺愛在民。民思之不忘。觀此則知公爲政。雖以剛明憚其下。而惠實行於民也。且公於時。旣已經兩邑。稱世良吏。而文正公猶不忘告戒。辭旨深篤。卽公平日涵擩琢磨於伯仲間。以成其德者。固非餘人之可比矣。文正公晩年居石室。公自南邑。月月致饋。凡養老之物皆備。文正公顧語子弟曰。是蓋事我如父也。伯父嘗爲昌協道之如此。此一事也而公之內行。亦可槪見。公生於隆慶癸酉(1573)九月二十六日。以崇禎壬辰 (1652) 七月十二日卒。於是文正公卒未二旬矣。公齒差文正公三歲。旣同享八袠。又同時考終。人皆嗟異。墓于楊州栗北里甲坐之原。夫人靑海李氏。同知中樞府事麟奇女。先公三年沒。同兆異封。有一男三女。男光烒。韓山郡守。女郡守宋致中,校理尹集,參奉李悟。郡守一女。李澤。側出男壽南。女李汴。宋致中一女。進士李汝淨。尹集三男。以宣,以徵,以靖。女校理尹晳。李悟三男。曼著,敏著,夏著。三女。進士申遇相。武科鄭斗祥。察訪韓配夏。壽南一男。盛全郡守。公再娶皆無男。繼室趙氏。取養族孫爲後。卽昌業。銘曰。
我金之盛。惟文忠文正公以爲兄。孰與其競。匪其介之。惟曰象之。侃侃其德。穆穆其儀。九邑之政。婁書于史。雖不公卿。厥有名位。文正曾孫。寔奉公祀。蓋先人有命。以爲墓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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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곡집(谿谷集) 장유(張維)생년1587년(선조 20)몰년1638년(인조 16)자지국(持國)호계곡(谿谷), 묵소(默所)본관덕수(德水)봉호신풍부원군(新豐府院君)시호문충(文忠)특기사항윤근수(尹根壽), 김장생(金長生)의 문인. 이정귀(李廷龜), 신흠(申欽), 이식(李植)과 함께 조선 중기 문장(文章) 사대가(四大家)로 불림
계곡선생집 제25권 / 오언 고시(五言古詩) 162수 / 청음의 운을 써서 상령으로 떠나는 김 사군 상복 을 송별한 시 세 수[用淸陰韻 贈別商嶺金使君 尙宓 三首]
인조 | 14 | 1636 | 병자 | 崇禎 | 9 | 50 | 5월, 공조 판서가 되다. ○ 12월, 비국 당상이 되다. ○ 胡亂이 일어나자 南漢山城으로 扈駕하다. 崔鳴吉과 함께 講和論을 주장하다. |
인조 | 15 | 1637 | 정축 | 崇禎 | 10 | 51 | 1월, 예조 판서로서 還都한 뒤, 모친이 江都에서 사망하여 이미 葬禮와 返哭을 마쳤음을 듣고 安山으로 달려가다. ○ 7월, 起復하여 右議政에 제수하였으나 18차례 상소를 올려 사직하다. ○ 12월, 모친의 移葬에 애쓰다가 병이 심해지다. |
백성 위해 열심히 병폐를 없애라고 / 勤民在祛瘼
순(舜) 임금이 지방 장관 훈계하였고 / 虞帝咨州牧
한 나라의 연봉(年俸) 이천 석 태수(太守) / 漢家二千石
그야말로 목민관(牧民官)의 직책을 수행했지 / 實維親民職
김후의 정치 실력 유례가 없어 / 金侯政無儔
왕년에 대구 부사(大丘府使) 재임했을 땐 / 往歲領大丘
도대체 무슨 방법 동원했기에 / 不知操何術
은혜와 위엄을 조화롭게 펼쳤나요 / 自看威惠流
기호의 고장으로 급기야 승진되어 / 陞遷綺皓鄕
일천 기병(騎兵) 이끌고 도성을 나서는데 / 千騎出東方
허리춤엔 치렁치렁 늘어진 인끈 / 腰間綬若若
어질다는 명성 드높이 울려 퍼지누나 / 籍甚賢聲揚
번잡하기로 이름난 무척 큰 고을 / 雄州號繁閙
아직도 꽤 남아 있는 토호(土豪)의 위세 / 豪俗存猶稍
관할 구역 숙정(肅正) 작업 벌일 때에도 / 行當正提封
진위(眞僞)를 조사해 내기 어렵겠지만 / 情僞難覆校
여지없이 파고드는 포정(庖丁)의 칼날처럼 / 游刃破餘地
그대 손에 걸리면 식은 죽 먹기리라 / 在君能事耳
맑은 가을 부임할 채비 모두 다 갖추고서 / 淸秋整熊轓
한강 가에 임하여 이별하는 길 / 別路臨漢水
가족들 모두 멀리 놔둔 채 / 親懿曠莫從
엄한 일정 쫓겨서 바삐 가는 몸 / 嚴程苦倥偬
산 언덕 넘을 제 기러기 울음 듣노라면 / 過嶺聞離鴻
고향 생각 저절로 일어나리라 / 懸知歸思動
나는 마치도 장중울과 같은 신세 / 我如張仲蔚
쑥대 우거진 집 문 꼭 닫고 지내는데 / 蓬蒿深掩扉
웬일인가 오마객이 찾아 오다니 / 何來五馬客
골목 안이 갑자기 훤해지누나 / 門巷歘生輝
이제 장차 먼 길을 떠나게 되었는데 / 自言將遠適
내일 이별한다는 뜻밖의 발언 / 來日是別期
생각하면 옛날에 인척(姻戚)의 관계 맺고 / 念昔託姻好
떨어지지 말자고 약속했기에 / 誓言相追隨
병들어 누운 채 인사를 끊었어도 / 臥病斷人事
그대와의 정분만은 어길 수 없었어라 / 故意終莫違
서로들 만나서는 얼굴 빛이 환해졌고 / 相逢輒懽然
하루 해가 다 지도록 얘기하곤 했었는데 / 坐語至斜暉
저물어가는 이 나이에 이별이라니 / 歲晚忽分手
가을바람 옷깃에 사무치누나 / 西風吹客衣
머나먼 길 높이 솟은 산을 대하면 / 脩路間嶺嶠
꿈속에도 맘 붙이기 어려울텐데 / 夢魂難因依
정녕 무슨 말을 해 줘야 할까 / 丁寧別時語
좋은 정사 펼치고 빨리 돌아오시라 / 政成早來歸
한 세상 살아가는 우리네 인생 / 人生一世來
구멍 속의 개미가 괴목(槐木)을 의지하듯 / 穴蟻託庭槐
부산하게 모였다가 다시금 흩어지니 / 紛然聚復散
즐거울 게 뭐 있으며 슬퍼할 게 뭐 있으랴 / 何樂亦何哀
속인들 대하면 매번 흥취 깨어져 / 俗物每敗意
나의 심회 열어서 보여 줄 수 없나니 / 好懷無與開
노래 지어 부른들 그 누가 화답하랴 / 有唱孰能酬
알아줄 이 참으로 구하기 어렵도다 / 知音難可求
얼키고 설킨 세상 온갖 일 / 世故紛萬種
까딱 잘못 건드릴까 두려움이 앞서는데 / 觸緖皆可恐
지금 또 그대가 이별을 고하다니 / 今君又告別
나의 시름 더욱더 깊어만 지겠구나 / 令我勞愁夢
먼 산에 드리워진 가을 그림자 / 秋陰結遠岑
아득히 흘러가는 한강 물줄기 / 江漢淼潭潭
헤어지는 이 마당에 무엇을 줄까 / 臨歧欲何贈
길고 짧은 시편 백두음(白頭吟) 한 수 / 頭白短長吟
[주-D001] 상령(商嶺) : 상령은 즉 상산(商山)으로 상주(尙州)의 옛 이름이다.[주-D002] 사군(使君) : 상주 목사로 부임하는 김상복을 말한다. 사군(使君)은 일반적으로 지방행정관을 지칭하는 별칭이다. 한편 김상복은 청음(淸陰) 김상헌(金尙憲)의 친제(親弟)이다.[주-D003] 백성 위해 …… 훈계하였고 : 우순(虞舜)이 12주목(州牧) 22인에게 훈계한 내용이 《서경(書經)》 순전(舜典)에 기재되어 있다.[주-D004] 기호의 고장 : 상주(尙州)를 의미한다. 기호(綺皓)는 상산 사호(商山四皓)의 하나인 기리계(綺里季)를 말하는데, 상주(尙州)의 별칭이 상산(商山)이기 때문에 그렇게 말한 것이다.[주-D005] 포정(庖丁)의 칼날 : 능수능란한 솜씨를 의미한다. 《장자(莊子)》 양생주(養生主)에 “두께가 없는 칼날을 틈이 있는 소의 살 속에 집어넣으면 그 공간이 널찍하여 여유작작하게 칼날을 놀릴 수 있다.[刀刃者無厚 以無厚入有閒 恢恢乎其於遊刃 必有餘地矣]”는 백정의 말이 실려 있다.[주-D006] 나는 …… 신세 : 벼슬하지 않고 집에 거하고 있는 것을 뜻한다. 장중울(張仲蔚)은 후한(後漢) 사람으로 어려서부터 같은 고을의 위경경(魏景卿)과 함께 몸을 숨기고 벼슬하지 않았는데, 박학다식하여 천문(天文)에 정통하고 시부(詩賦)에 능했다 한다. 그런데 늘 빈한하게 사는 그 집에 사람의 키를 넘을 정도로 쑥대가 우거졌으므로 “중울봉호(仲蔚蓬蒿)”라는 《몽구(蒙求)》의 표제가 전해 온다. 《高士傳 中 張仲蔚》[주-D007] 오마객(五馬客) : 태수(太守) 즉 지방 수령을 뜻한다. 본래 태수의 수레에는 네 필의 사마(駟馬) 외에 한 필의 말을 더 붙여 주었다고 한다. 《淸夜錄》[주-D008] 구멍 …… 의지하듯 : 인생이 도시 꿈속의 일이라는 뜻이다. 당(唐) 나라 순우분(淳于棼)이 괴목(槐木)의 남쪽 가지 아래에 누워서 잠이 들었는데, 꿈속에 괴안국(槐安國)에 가서 부귀영화를 누리다가 꿈을 깨어 괴목 아래를 보니 큰 개미굴이 있었더라는 이른바 남가일몽(南柯一夢)의 고사에서 유래한 것이다. 《異聞集》[주-D009] 백두음(白頭吟) : 두터운 교분을 가까이에서 계속 이어 갈 수 없게 된 것을 읊은 시라는 뜻이다. ‘백두음’은 본디 전한(前漢) 사마상여(司馬相如)의 처 탁문군(卓文君)이 지은 오언시로, 상여가 무릉(茂陵) 여인을 집으로 데려오려고 하자, 탁문군이 상여와는 백발이 되도록 정분을 잊지 못할 것을 내용으로 하여 지은 것이다.
ⓒ 한국고전번역원 | 이상현 (역) | 19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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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곡선생집 제29권 / 오언율(五言律) 148수 / 상주 목사 김중정을 전송하며[送尙州金使君仲靜]
밝은 시대일수록 순리 중히 여기는 법 / 明時重循吏
벼슬살이 두루 이름난 도회지 거쳤나니 / 宦蹟遍名都
얼마 전에 달성의 인끈 풀어놓고 / 乍解達城印
곧바로 상령의 부절(符節) 나눠 받았도다 / 仍分商嶺符
옛날의 순후한 풍속 지니고 있을 백성들 / 民應舊俗在
장공과 같은 정사는 아직껏 없었어라 / 政似長公無
그대를 보내면서 가장 마음에 걸린다면 / 最是關情處
가을 바람 외로운 기러기 같은 모습 / 秋風雁影孤
[주-D001] 김중정 : 중정은 김상복(金尙宓)의 자(字)이다.[주-D002] 순리(循吏) : 순량(循良)한 관리로 보통 어진 고을 원을 가리킨다.[주-D003] 달성(達城) : 대구(大邱)의 옛 이름이다.[주-D004] 상령(商嶺) : 상주(尙州)의 옛 이름이다.[주-D005] 장공(長公) : 한(漢) 나라 한연수(韓延壽)의 자(字)이다. 회양(淮陽)ㆍ영주(潁州)ㆍ동군(東郡) 등의 태수를 역임하는 동안 예의를 숭상하고 옛날 방식의 교화(敎化)를 펼쳐 천하 제일의 치행(治行)으로 일컬어졌다. 《漢書 卷76》
ⓒ 한국고전번역원 | 이상현 (역) | 19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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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음집(淸陰集) 김상헌(金尙憲)생년1570년(선조 3)몰년1652년(효종 3)자숙도(叔度)호청음(淸陰), 석실산인(石室山人), 서간노인(西磵老人)본관안동(安東)시호문정(文正)특기사항윤근수(尹根壽)의 문인. 신흠(申欽), 이정귀(李廷龜), 홍서봉(洪瑞鳳), 이안눌(李安訥), 장유(張維) 등과 교유
청음집 제1권 / 오언절구(五言絶句) 78수(七十八首) / 여강(驪江)에서 사제(舍弟) 중정(仲靜)이 상산(商山)에 부임하러 가는 것을 전송하다 3수
갈림길서 헤어짐이 못내 아쉬워 / 臨歧惜分手
여강까지 와서 서로 전송하누나 / 相送至驪江
서글퍼라 뱃머리를 돌리는 곳서 / 惆悵回舟處
두 눈에는 도로 눈물 줄줄 흘리네 / 還垂淚一雙
팔월이라 강줄기는 물결 하얗고 / 八月江湖白
외로운 배 새벽빛에 차가웁구나 / 孤舟曉色寒
함께 가다 나뉘어서 나는 기러기 / 分飛一行鴈
남쪽 북쪽 양쪽이 다 스산하구나 / 南北兩辛酸
용추에는 달그림자 외로울 거고 / 龍湫月影孤
석실에는 솔 소리가 목메이리니 / 石室松聲咽
인간 세상 맘 쓰라린 때는 언젠가 / 人間苦心處
머리 허연 영원 서로 이별할 때네 / 白首鴒原別
[주-D001] 중정(仲靜) : 김상헌의 동생인 김상복(金尙宓 : ? ~ 1652)의 자이다. 대구 부사(大邱府使), 상주 목사(尙州牧使), 경주 부윤(慶州府尹) 등을 지냈다.[주-D002] 영원(鴒原) : 형제간의 우애를 말하는데, 흔히 형제의 뜻으로 쓰인다. 《시경》 소아(小雅) 상체(常棣)에 이르기를, “물새가 언덕에 있으니, 형제가 위급함을 서로 구하네.〔脊令在原 兄弟急難〕” 하였다.
ⓒ 한국고전번역원 | 정선용 (역) |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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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음집 제8권 / 오언고시(五言古詩) 54수(五十四首) / 사제(舍弟) 중정(仲靜)이 상주(尙州)로 부임하는 것을 전송하다 3수
성상께서 백성 고통 급히 여기어 / 聖主急民瘼
좋은 수령 될 사람을 급히 구했네 / 仄席求良牧
이조에서 전의 공적 따져 보고서 / 銓司究前績
적임자를 뽑아 직임 맡기었다네 / 摘實塞其職
나의 동생 장왕과도 엇비슷한데 / 吾弟張王儔
펼친 정사 진 태구에 비해 낫다네 / 政出陳太丘
아전들은 서리 밟듯 조심을 하고 / 吏負霜雪行
백성들은 봄날 은택 흠뻑 받으리 / 民謠春澤流
상산이야 군자들이 사는 곳이라 / 商山君子鄕
풍속 좋긴 남방에서 으뜸이라네 / 風俗冠南方
아름답고 아름다운 선비들 있어 / 濟濟靑衿士
고담준론 떠들면서 논평 가하리 / 高論多抑揚
사람들 맘 새 제도를 싫어하거니 / 人情厭新鬧
차츰차츰 교화를 펴 나가야 하리 / 敎化宜稍稍
서문표는 항상 가죽 차고 다녔고 / 西門常佩韋
정교는 또 향교 아니 헐어 버렸네 / 鄭僑不毁校
백씨께서 명금하던 곳이거니와 / 伯氏鳴琴地
남은 소리 아직 귀에 쟁쟁하다네 / 遺音猶在耳
산속에는 백련사가 숨겨져 있고 / 山藏白蓮寺
낙동강 물 빙 돌아서 흘러간다네 / 江轉洛東水
한가한 날 손님들과 종들 데리고 / 暇日領賓從
강가에 가 바쁜 마음 잠시 쉬리라 / 登臨豁倥傯
새봄 되어 정사 실적 보고한 뒤엔 / 報政及新春
돌아오고 싶은 마음 선뜻 동하리 / 思歸卽善動
제수하는 글 대궐서 내리어지매 / 除書降𥻘闈
이별의 한 사립문서 일어나누나 / 離恨起荊扉
동방 천기 가운데에 앞 머리 있어 / 東方千騎頭
임금 은총 찬란하게 빛이 났다네 / 恩寵實光輝
어쩔거나 늘그막에 이별하면서 / 奈此遲暮別
육 년 뒤에 만나기를 기약하다니 / 曠以六年期
두 사람을 생각하게 된 뒤로부터 / 自從二人懷
단지 형제 남아 있어 서로 따랐네 / 但有兄弟隨
공명의 길 나아가서 부림 당하여 / 名途被驅使
형제간에 다시금 또 길 어긋났네 / 兄弟復乖違
늙은 나이 살 날 얼마 없어 겁나고 / 頹齡懍無幾
시음하니 황혼 빛이 애석하구나 / 視蔭惜殘暉
왕사 급해 머뭇대고 있을 수 없어 / 王事不可留
눈물 흘려 옷깃만을 흠씬 적시네 / 我淚徒霑衣
공명이야 또한 몸 밖 있는 거려니 / 功名亦身外
골육 간에 길이 서로 의지하리라 / 骨肉永相依
소풍군의 노래 이제 이루어지면 / 歌成小馮君
다음 해엔 귀거래사 일찍 읊으리 / 來歲早賦歸
당시에 나는 석실로 돌아와 있었다.
가을바람 삽상하게 불어서 오자 / 秋風颯然來
하얀 꽃이 청괴에서 토해지누나 / 白華吐靑槐
이미 한 해 저물어서 맘 놀랐는데 / 已驚歲時晩
다시금 또 이별 슬픔 보태는구나 / 更添離別哀
이별 슬픔 그건 역시 무슨 맘인가 / 別哀亦何情
그리운 맘 맺혀져서 열기 어렵네 / 思心結難開
보배 값은 쉽게 치를 수가 있지만 / 至寶價易酬
형제간은 다시 구할 수가 없다네 / 兄弟不可求
세 형제의 머리카락 듬성듬성해 / 三人髮種種
서로 보며 걱정 속에 두려워하네 / 相視若憂恐
수심에다 근심스런 한 치 맘이고 / 搖搖一寸懷
아득하고 아득히 먼 천 리 꿈이네 / 杳杳千里夢
흰 구름에 묻힌 조령 아스라하고 / 白雲迷鳥岑
밝은 달은 용담 연못 내려 비치리 / 明月下龍潭
가는 너를 이곳에서 전송한 뒤엔 / 送君此中去
널 그리며 되레 홀로 시를 읊으리 / 思君還獨吟
[주-D001] 장왕(張王) : 당나라 때의 이름난 시인인 장적(張籍)과 왕건(王建)의 병칭이다.[주-D002] 진 태구(陳太丘) : 후한 때의 어진 관리였던 진식(陳寔)을 가리키는데, 진식이 일찍이 태구(太丘)의 장(長)을 지냈으므로 이렇게 일컫는 것이다. 태구는 하남성(河南省) 영성현(永城縣)에 있는 지명이다. 진식은 그의 두 아들인 진기(陳紀)ㆍ진심(陳諶)과 더불어 세 부자(父子)가 당시에 학덕(學德)이 높기로 모두 유명하였다.[주-D003] 서문표(西門豹)는 …… 다녔고 : 서문표는 전국 시대 위(魏)나라 사람인데, 자신의 성질이 급한 것을 단점으로 여겨 항상 부드러운 가죽을 차고 다니면서 스스로 느긋하게 처신하기를 힘썼다고 한다. 《韓非子 觀行》[주-D004] 정교(鄭僑)는 …… 헐어 버렸네 : 정교는 춘추 시대 때 정(鄭)나라의 대부(大夫)로 있으면서 40여 년간 국정을 장악하였던 공손교(公孫僑)를 가리키는데, 공손교라는 본명보다 자산(子産)이라는 자(字)로 더 알려졌으므로 흔히 정자산(鄭子産)이라고 불리는 사람이다. 일찍이 정나라 사람들이 향교(鄕校)에 모여서 자신에 대해 논평을 하자, 연명(然明)이란 자가 공손교에게 향교를 헐어 버리라고 하였다. 그러자 공손교가 말하기를 “사람들이 향교에 모여 논평을 하면서 좋다고 하는 것은 그대로 따라서 하고 나쁘다고 하는 것은 고치면 된다. 그들의 논평은 나의 스승인데 어찌 향교를 헐겠는가.” 하였다. 《春秋左氏傳 襄公31年》[주-D005] 백씨(伯氏)께서 명금(鳴琴)하던 곳이거니와 : 청음의 형인 김상용(金尙容)이 일찍이 상주 목사(尙州牧使)를 지냈으므로 한 말이다. 명금은 고을 수령의 정사가 간략하고 형옥이 맑아서 다스리지 않아도 잘 다스려지는 것을 말할 때 쓰는 말로, 《여씨춘추(呂氏春秋)》 찰현(察賢)에, “복자천(宓子賤)이 선보(單父)를 다스리매 악기나 뜯고 지내면서 당 아래로 내려가지 않아도 선보가 잘 다스려졌다.”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주-D006] 동방 천기(東方千騎) …… 났다네 : 뛰어난 재주를 가지고 있어 임금의 은총을 흠뻑 받았다는 뜻이다. 고악부(古樂府)에, “동방의 천여 기들 가운데에서, 사위가 맨 꼭대기에 있네.〔東方千餘騎 夫壻居上頭〕” 하였는데, 후대에는 이를 인하여 사위를 가리키는 말로도 쓰이고 재주가 높은 사람을 가리키는 말로도 쓰이는데, 여기서는 후자의 뜻으로 쓰였다.[주-D007] 두 …… 뒤로부터 : 두 사람은 부모님을 뜻하는바 부모님이 모두 돌아가신 뒤로부터라는 뜻이다. 《시경》 소아(小雅) 소완(小宛)에, “날 새도록 잠을 못 이루고서는, 부모 두 분을 생각하노라.〔明發不寐 有懷二人〕” 하였다.[주-D008] 시음(視蔭)하니 …… 애석하구나 : 시음은 해그림자를 보면서 날을 탐한다는 뜻인 시음게일(視蔭愒日)의 준말인데, 하는 일 없이 세월을 보내면서 날짜가 지나가는 것을 애석해하는 것을 의미하기도 하고 죽을 날이 얼마 남지 않은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춘추 시대 진(晉)나라의 경(卿)인 조맹(趙孟)이 황혼 빛을 바라보면서 “해도 하루 밤낮을 계속하지 못하는데, 누가 5년을 기약한다고 하였는가?” 하였다. 그러자 후자(后子)란 사람이 어떤 사람에게 말하기를, “조맹이 곧 죽을 것이다. 백성을 다스리는 사람으로서 하는 일 없이 세월을 보내면서 날을 탐하고 있으니, 오래 살지 못할 것이다.” 하였다. 《春秋左氏傳 昭公1年》[주-D009] 소풍군(小馮君) : 세상의 존경을 받는 형제 중에 동생을 일컫는 말로, 한(漢)나라 때 풍야왕(馮野王)과 풍립(馮立) 형제가 잇달아서 상군 태수(上郡太守)로 있으면서 훌륭한 치적을 이루었으므로 백성들이 그들의 공을 기려 형인 풍야왕을 대풍군(大馮君)이라 하고 동생인 풍립을 소풍군(小馮君)이라 칭하였다. 여기서는 청음의 형인 김상용(金尙容)이 일찍이 상주 목사로 있으면서 치적을 남겼는데, 동생인 김상복(金尙宓) 역시 상주 목사로 가게 되었으므로 끌어다가 쓴 것이다. 《漢書 卷79 馮奉世傳》
ⓒ 한국고전번역원 | 정선용 (역) |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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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조 | 14 | 1636 | 병자 | 崇禎 | 9 | 44 | 집의, 사인, 사복시 정이 되다. ○ 8월, 日本通信使副使가 되다. |
인조 | 15 | 1637 | 정축 | 崇禎 | 10 | 45 | 귀국하여 復命하다. 〈海槎錄〉을 남기다. ○ 6월, 黃海道 觀察使가 되다. |
1金尙容 | 1561 | 1637 | 安東 | 景擇 | 仙源, 楓溪, 溪翁 | 文忠 |
순자집해(5)解蔽篇 第二十一21-86 故曰 心容에 其擇也無禁하고 必自見하며 其物也襍博이라도
순자집해(5)解蔽篇 第二十一21-86 故曰 心容其擇也 無禁必自見 其物也襍博
2金尙寬 | 1566 | 1621 | 安東 | 仲栗 | 今是齋 |
서경집전(상)書經集傳 卷二 虞書皐陶謨3. 皐陶曰 都라 亦 …
3. 皐陶曰 都라 亦行有九德니 亦言其人의 有德인대 乃言曰載采采니이다 禹曰 何오 皐陶曰 寬而栗며 柔而立며 愿而恭며 亂而敬며 擾而毅며 直而溫며 簡而廉며 剛而塞며 彊而義니 彰厥有常이 吉哉니이다
3金尙謇 | 1567 | 1604 | 安東 | 季直 | 晩沙 |
당송팔대가문초 한유(3)唐大家韓文公文抄 卷13 墓誌銘07. 唐故江西觀察使韋公墓誌銘
旣至에 日言事하고 不阿權臣하니 謇然有直名하다 遂號爲才臣하다
4金尙憲 | 1570 | 1652 | 安東 | 叔度 | 淸陰, 石室山人, 西磵老人 | 文正 |
5金尙宓 | 1573 | 1652 | 安東 | 仲靜 |
상서정의(1)尙書正義(1) 尙書注疏 卷第三舜典 第二二十有八載에 帝乃殂落커시늘
三載를 四海가 遏密八音하니라
傳
遏은 絶이요 密은 靜也라
八音은 金石絲竹匏土革木이니라
四夷絶音三年이면 則華夏可知니 言盛德恩化 所及者遠이니라
○八音은 謂金은 鐘也요 石은 磬也요 絲는 琴瑟也요 竹은 箎笛也요 匏는 笙也요 土는塤也요 革은 鼓也요 木은 柷敔也라
사마법직해 司馬法直解 / 定爵 第三
密靜多內力을 是謂固陳이요
原注
密者는 戰欲密也요 靜者는 兵無譁也요 多內力者는 士氣內有餘也니 此所謂固守其陳이라
맹자집주萬章章句 上4. 咸丘蒙이 問曰 …
4. 咸丘蒙이 問曰 語[에] 云 盛德之士 君不得而臣며 父不得而子ㅣ라 舜이 南面而立어시늘(이어시) 堯ㅣ 帥솔諸侯야 北面而朝之시고(시며) 瞽瞍ㅣ 亦北面而朝之어늘(어) 舜이 見瞽瞍시고 其容[이] 有蹙이라야 孔子[ㅣ] 曰 於斯時也애 天下[ㅣ] 殆哉岌岌乎뎌시니(ㅣ라시다니) 不識[게이다] 此語ㅣ 誠然乎哉잇가 孟子[ㅣ] 曰 否ㅣ라 此非君子之言이라 齊東野人之語也ㅣ라(ㅣ니) 堯[ㅣ] 老而舜[이] 攝也ㅣ러시니 堯典[애] 曰 二十有八載예 放勳이 乃徂落커시늘(거시) 百姓(은) 如喪考妣三年고 四海 遏密八音이라며(이라고) 孔子[ㅣ] 曰 天無二日이오 民無二王이라시니 舜이 旣爲天子矣오 又帥天下諸侯야 以爲堯三年喪이면(시면) 是 二天子矣니라
集註
咸丘蒙은 孟子弟子也라 語者는 古語也라 蹙은 顰蹙不自安也라 岌岌은 不安之貌也니 言人倫乖亂여 天下將危也라 齊東은 齊國之東鄙也라 孟子言 堯但老不治事여 而舜攝天子之事耳요 堯在時에 舜未嘗卽天子位시니 堯何由北面而朝乎아하시고 又引書及孔子之言여 以明之시니라 堯典은 虞書篇名이라 今此文은 乃見於舜典니 蓋古書는 二篇이 或合爲一耳라 言舜攝位二十八年而堯死也라 徂는 升也요 落은 降也니 人死則魂升而魄降이라 故로 古者에 謂死爲徂落이라 遏은 止也요 密은 靜也라 八音은 金石絲竹匏土革木樂器之音也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