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경희
목기린
현대판 자연인이 될까봐 두렵나요
현실과 상상을 맞바꾸며 살아가는
당신은 철학적인 삶을 진짜로 원하나요
몸속 깊이 여분의 물방울로 살아가도
살갗을 뚫고 나온 저 붉은 가시들은
들끓은 욕망들이고 열망의 표시들이죠
과대망상 손가락질에도 웃고 넘어가요
당신의 가슴 속에 갸릉갸릉 거리는
붉은색 여우 한 마리를 몸에서 꺼내봐요
ㅡ발견 2019 봄호
그녀의 목이 자라난다
눈이었나 바람이었나 잠시 몸이 들뜬다
그녀의 공간으로 칡덩굴이 넘어오면
지금이 퇴화하거나 아니면 죽을 것이다
그늘이 많아질까 내일이 두렵다
왜소한 가지들을 옆으로 더 길게
바람의 흔들림에도 손쉽게 부러진다
포플러 미루나무 끊임없이 달려가고
구름과 빗방울을 어마나 읽었을까
그녀가 잎들을 피운다 가방은 늘 가볍다
식탁 위 접시 하나 꽃들을 피우려고
아랫가지 말리며 햇빛을 좇아간다
그녀의 목이 자라나 구부러지고 있었다
ㅡ발견 2019 봄호
제라늄
뜨거운 여름이면
제라늄 숨 막히는
역한 냄새에 뒷걸음 쳐 나왔다
붉음만 기억하다가 가끔씩 보고픈 꽃
다가서면 사막 같아
나비도 없었지만
저 혼자의 '앨리스' 피었다가 지듯이
세상의 한 부분에서 스쳐 가는 구름일 뿐
ㅡ좋은시조 2018 겨울호
검은색 쇼파
덜 깬 듯 누워있는 검은색 소파 위에
젖은 몸을 눕힌다 엉덩이의 몽상이듯
헛잠에 여러 생각이 중심을 잃고 헤맨다
아직도 서성이는 또 다른 바깥에서
부정의 시간들이 어둠에 휘어진 채
공중에 뿌리 내리고 헛뿌리로 살고 있다
이력서, 컵라면, 깡소주로 이어온 삶들
썩지 않은 꿈에서 썩은 꿈을 꾸려고
소파가 구덩이를 판다 검을수록 차분했다
ㅡ열린시학 2018 겨울호
멜랑콜리 음악을 듣다
백일홍이 한꺼번에 기억 속에 떨어지고
꽃잎이 귀 끝에서 파르르 소름 돋듯
수많은 순간이 몰려와 슬픔이 뜨거웠다
그때의 너와 나는 방향을 몰랐던 거
우울도 향기 나고 어둠도 희었지만
쌉쌀한 어느 골목에서 우리는 떠나왔다
-열린시학 2018 겨울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