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태조 5년(1396년)을 뜨겁게 달궜던 왜구들의 난동! 이 난동 끝에 태조는 슬그머니 대마도 공략작전을 다시 꺼내들게 되는데….
"그래, 멀티 백날 깨봤자 아무 소용없어. 제일 중요한 건 본진을 깨 버리는 거야. 본진 깨졌는데, 멀티 있어봤자 뭐하겠어? 오케이! 당장 대마도를 공격할 준비를 해!"
이리하여 2차 대마도 원정은 착착 준비되어 가는데….
"저기, 원정군 사령관을 누구로 하실 겁니까? 저번처럼 박위를…"
"야야, 걔 지금 쫓겨난 지가 언젠데…. 마! 반역죄라고 네들이 죽이라고 할 때는 언제고 지금 다시 불러다 쓰자고?"
"아니 그냥 의향을 물었을 뿐인데…. 너무 오버 하시는 거 아님까?"
"마! 말이 그렇잖아! 박위 걔가 쫓겨난 게 언젠데, 지금 와서 뭘 어쩌라고?"
그랬다. 이때쯤 박위는 점쟁이를 잘못 만나(?) 막장인생의 길을 걸어야 했다(김가행과 박중질이 점쟁이 이흥무에게 고려 왕실의 사주단자를 내밀며 이들의 길흉을 물었는데, 이흥무의 대답이 '남평군 왕화의 명운이 제일 귀하고, 그 다음이 영평군 왕거입니다'란 대답을 듣게 된다. 문제는 이 사건이 외부로 알려지면서부터다 박중질은 박위의 친척이었던 것이다. 문제는 이 사건이 이성계와 혁명세력들에 의해 조작된 사건이 아닌가 하는 점이다. 정작 사주단자를 들고 가, 점을 본 김가행과 박중질, 그리고 점을 봐 준 이흥무 등은 국문을 받은 뒤 가까운 고을로 귀양 가는 선에서 마무리 지어졌고, 얼떨결에 끌려간 박위도 비록 감금을 당하긴 했지만 곧 원대복귀하게 된다. 그러나 점보겠다고 나서지도 않았던 왕씨들은 거의 몰살의 수준에 이르게 된다).
"그럼, 지금 상황에서 누굴 내세울 생각이십니까?"
"뭐, 대충 분위기 보면…. 문하우정승(門下右政丞) 김사형(金士衡)이 어떨까?"
"기…김사형 대감이요?"
"왜? 걔 나름 성격 있거든? 걔가 좀처럼 화를 안내서 그렇지, 화내면 제법 무섭거든?"
"그…그게, 지금 화를 내고 안내고의 문제는 아닌 거 같거든요?"
"응?"
"아무래도 풍부한 실전경험에 야전사령관으로의 카리스마, 병력을 통솔할 수 있는… 김사형 대감은 문돌이잖슴까? 평생 펜대나 굴리는 사람을 사령관으로 앉히면…"
"에이, 그 딴 게 어딨어? 시대는 진정한 멀티 플레이어를 원한다니까!"
"그래도, 개국하고 처음으로 원정군을 꾸리는 건데…"
"어허! 시빌리언 컨트롤 몰라? 시대는 문민통제를 원한다구!"
그랬다. 이성계는 개국과 함께 한 가지 특단의 조치를 생각하게 되는데, 바로 군의 통제였다. 여기저기 흩어져 있던 사병(私兵)들을 하나로 묶어 중앙군을 만드는 것에 열을 올렸고(그러다 터져나온 것이 1차 왕자의 난이었다), 군인들의 준동을 막고 싶어 했다. 더 이상 자기와 같이 '행복한 군인'이 출몰하는 것을 용납하기 싫었던 것이다.
이런저런 이유를 들지 않더라도 김사형의 발탁은 나름 수긍이 가는 면이 있었다. 개국공신인데다가, 이성계 정권의 요직을 거친 나름 '정권실세'인 인물…. 더구나 평생 벼슬살이 하면서 단 한 번 도 탄핵을 받지 않았던 인품(그 만큼 적을 만들지 않았다 할 수 있을 것이다)까지! 김사형의 인선에도 나름 합리적인 이유가 있었다.
문하 우정승(門下右政丞) 김사형(金士衡)으로 오도 병마 도통처치사(五道兵馬都統處置使)를 삼고, 예문춘추관(藝文春秋館) 태학사(太學士) 남재(南在)로 도병마사(都兵馬使)를 삼고, 중추원 부사(中樞院副使) 신극공(辛克恭)으로 병마사(兵馬使)를 삼고, 전 도관찰사(都觀察使) 이무(李茂)로 도체찰사(都體察使)를 삼아, 5도(道)의 병선(兵船)을 모아서 일기도(一岐島)와 대마도(對馬島)를 치게 하였다. 길을 떠날 때에, 임금이 남대문 밖까지 나가서 이를 전송하고, 사형에게 부월과 교서(敎書)를 주고 안장 갖춘 말(鞍馬), 모관(毛冠) 갑옷, 궁시(弓矢), 약상자(藥箱子)를 내려 주었으며, 재, 무, 극공에게는 각각 모관, 갑옷, 궁시를 내려 주었다. 교서는 이러하였다.
"예로부터 임금 된 자는 항상 중외(中外)를 어루만져 편안하게 하는 데에 힘써왔다. 불행히도 쥐나 개 같은 좀도둑이 생겼을 때에는 오로지 방백(方伯)에게 책임을 지워서 몰아 쫓고 잡게 하였으며, 그 세력이 성해져서 방백(方伯)이 능히 제어하지 못할 때에야 대신(大臣)에게 명령하여 출정(出征)하게 하는 것이니, 소호(召虎) 606) 가 회이(淮夷)를 정벌한 것과 윤길보(尹吉甫) 607) 가 험윤(??) 608) 을 친 것과 같은 것이 이것이다. 내가 즉위한 이래로 무릇 용병(用兵)의 도리를 한결같이 옛일을 따라서 일찍이 경솔한 거조가 없었던 것은 이들 백성들이 동요될까 염려하였던 것인데, 이제 하찮은 섬 오랑캐가 감히 날뛰어 우리 변방을 침노한 지가 3, 4차에 이르러서, 이미 장수들을 보내어 나가서 방비하게 하고 있으나, 크게 군사를 일으켜서 수륙(水陸)으로 함께 공격하여 일거(一擧)에 섬멸하지 않고는 변경이 편안할 때가 없을 것이다.(하략)
- 태조 5년(1396년) 12월 3일의 기록 中 발췌
태조가 다시 한 번 칼을 뽑아 든 것이다. 과연 이번에도 대마도 정벌에 성공 할 수 있을 것인가? 이야기는 다음회로 이어진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