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수명의 「개가 나타나는 순간」감상 / 채상우
개가 나타나는 순간/이수명
길에 서서 버스를 기다린다.
버스가 전조등을 뿜으며 다가오기를
모퉁이에서 불쑥 나타나기를 기다린다.
버스는 나를 태워 주고 나를 떨어뜨릴 텐데
멀리서 개 짖는 소리 들린다.
개가 튀어나오기를 기다린다. 이번에는
꼬리까지 전부 드러날 텐데 개가 나타나는 순간
개는 산산조각난다.
여기가 어디든 여기를 떠나
저기로 가는 거야 저기가 어디든
저기를 빠져나가는 거야
매일 가는 마트에 안내 직원이 없다
직원을 기다리고 직원이 물건 찾아주기를 기다리고
직원이 돌아오기를 기다린다.
여기서 기다리세요 했는데
우르르 나타나는 사람들 사이에 끼여 어느덧 밖으로 밀려나고
잠시 후 나는 밖에 놓인다.
밖에 서 있다.
머리카락을 날리며
머리카락이 내 얼굴을 휘감고 돌아다니다가
천천히 놓아 준다.
천천히 네 발로 걷는
개는 산산조각 난다. 여기에서 저기까지 하늘을
빠져나가지 못하는 어둠
발을 잃은 어둠이 고른 숨을 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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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그런 것도 같다. 내가 "길에 서서 버스를 기다"리는 게 아니라, 버스가 내게 기다리라고 한 것 같다. 그래서 나는 버스정류장에서 하염없이 버스를 기다리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마찬가지로 내가 버스를 타고 내리는 게 아니라, 버스가 "나를 태워 주고 나를 떨어뜨"리는 것 같다. 그런 것 같다. 머리카락도 제가 "내 얼굴을 휘감고 돌아다니다가" "천천히 놓아" 주는 것 같고. "여기가 어디든 여기를 떠나/저기로 가는 거야 저기가 어디든/저기를 빠져나가는 거야", 그래서 이 문장들은 차라리 비명이라고 해야 맞겠다 싶다. 그런데 빠져나갈 수 있을까? 그럴 가능성은 전혀 없어 보인다. "개는 산산조각 난다. 여기에서 저기까지 하늘을/빠져나가지 못하는 어둠". 참담하다. 저어기 마침내 나를 기다리게 한 버스가 오고 있다. 그래, 한 번은 타지 말자. 어쩌면 생이 통째로 바뀔지도 모르는 일 아닌가.
채상우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