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8 광주에서 23명의 군인이 戰死했다.
제2부 광주사태의 초동 진압
광주 戰死者 23명
「38420, 1980년 5월 24일 광주에서 전사, 「육군하사 이영권의 묘」 「육군상사 정관철의 묘」 「육군상사 박억순의 묘」 「육군중사 최갑규의 묘」 「육군병장 이상수의 묘」 「육군일병 최필양의 묘」 「육군병장 변광열의 묘」. 김용식, 김경손, 권석원. 이관영, 차정환, 김지호, 김인태, 권용문, 손광식, 권성찬, 김명철, 강용래, 이종규, 이병택, 변상진, 최연안, 국립묘지 제29, 30 묘역의 묘비명들에 쓰여진 이름들이다. 이들 23명의 전사일자를 보면 1980년 5월20일에 1명, 21일에 3명, 22일에 3명, 23일에 1명, 24일에 11명, 25일에 1면, 27일에 2명, 28일에 1명이다.
20일의 사망자 육군상사 정관철은 제3여단 16대대 소속으로서 20일밤 10시10분쯤 전남대학교 앞에서 시위대가 몰고 돌진해온 차량에 깔려 죽었다. 공수11여단 이상수 병장등 21일과 22일의 사망자 6명은 3개 공수여 단병력이 광주시내를 철수할 때 무장 시위대의 발포에 걸려 죽은 이들이다. 공수 11여단의 차정환 소령 등 24일과 25일의 사망자 12명은 11공수여단과 광주보병학교 교도대, 제31사단과 광주기갑학교 하사관 생도들 사이에서 벌어졌던 두 차례의 오인사격에 의한 피살자들이다.
20사단 소속 병장 이종규 등 27일과 28일의 사망자 3명은 계엄군이 광주를 탈환하는 과정에서 시민군에 의해 사살된 이들이다. 23명의 사망자들을 그렇게 분류해 보면 광주사태의 진행과정이 하나의 윤곽으로 드러난다. 23명의 소속부대는 공수부대 18명, 31사단 3명, 보병학교 1명, 20사단 1명이다. 이 숫자로도 광주사태의 주역은 무장시위대 와 공수부대였고, 다른 부대는 조역이었음을 알 수 있다. 「국군은 죽어서 말한다」 고 하는데, 외 29, 30묘역에 묻힌 군인들 23명은 이데올로기를 같이하는 휴전선 남쪽의 시민들에 의해, 그리고 피아를 구별하지 못했던 동료군인들에 의해 목숨을 잃었다는 면에서 1980년대 에 한국이 겪었던 내부갈등을 증언하고 있는 것이다.
1988년 5월29일(일요일) 오전 10시, 눈부시게 화창한 늦봄, 화사하고 신선한 공기 속에 잠들어 있는 국립묘지 29묘역의 광주사태 전사자 묘비명 앞에 30대 청년 다섯명이 모였다. 김동철(金東哲.32) 김은철(金殷鐵.30) 경기만(慶箕萬.31) 이명규(李明珪.31) 배동환(裵東煥씨.33). 20사단 출신인 李씨는 5월 27일 새벽에 광주로 진입했다가 시민군과의 교전에서 피격돼 팔에 부상을 입었다. 나머지 네 사람은 공수 11여단 출신들. 金東哲·慶箕萬씨는 5월24일에 보병학교 교도대의 오인사격으로, 金殷鐵· 裵東煥씨는 5월21일에 광주시내에서 철수할 때 시민군의 총격을 받고 가슴과 팔에 중상을 입었던 이들이다. 결혼한지 몇달 안 된다는 金殷鐵. 李明珪씨는 아내를 데리고 나타났다. 이들은 동료들의 묘비들을 둘러보면서 『올해는 더욱 쓸쓸한 것 같다』 고 했다. 이들의 감회를 뒷받침하듯 정오까지 기다려도 더 나타나는 사람이 없고, 해마다 한번씩 열리는 추모회는 다섯 명의 참석자로 그야말로 조촐하게 끝이나고 말았다.
광주사태전사자들을 국가유공자처럼 대하여 추모행사도 규모있게 했던 적도 있었다고 한다. 1980∼82년쯤까지는 특전사나 육군본부측에서도 신경을 써주고 참배객들도 많았다. 그뒤로 차츰 시들해지더니 요 몇 년간은 군에서 화환하나 보내오는 적이 없고 모이는 사람들도 수백 명에서 수십명 수준으로 줄어들더니 올해에는 한 자리 수가 돼버렸다는 것이다. 그 11일 전 5월 18일 광주 망월동 묘지를 참배했었던 수만 인파와 비교 할 때 광주사태에 대한 평가가 달라지는 것을 이 국립묘지가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셈이다. 한때 서로의 가슴을 향해 총을 겨누었던 사람들은 죽은 뒤에도 망월동과 동작동으로 갈려 누워 있고, 산 사람들은 화합을 부르짖으며 그 깊은 골을 메워보려고 애쓰고 있으나 양쪽의 생각은 아직도 상대방의 주파수조차 찾지 못하고 있다. 이날 국립묘지에 나온 진압군측 부상자들은 『요즈음은 우리가 죄인이 된 것 같다』면서 『우리나 광주사람들이나 똑같은 정치의 피해자가 아니겠는가』 라고도 말했다.
[趙甲濟 조갑제닷컴 대표] 일부 =펌=
첫댓글 군인 사망자도 많네요.. 전부 국립묘지에 안장되었나 모르겠네요.그런데 과반수 이상이 군인들끼라 총격전이네요 최정예 공수부대란라고 하더만 자기들끼리 쏘고 죽고 했다니 어처구니 없네요
일곱색깔무지개님, 시민군도 똑같이 군복을 입고 있었기 때문에 외관상 식별이 안되었습니다. 바로 그것이 광주 시내에서는 시민군끼리 총격전을 벌여 많은 사망자가 발생한 이유이기도 하였습니다. 군인들 편에서도 당시 교도소 방어 전투가 치열하다 보니 교도소 방어를 위해 증원되려던 병력이 국군과 시민군을 복장으로 식별하지 못한 사고가 발생하였던 것입니다.
시민군이 공수군인 처럼 똑같이 군복을 입었다는 소리는 님에게 처음 듣습니다.
23명중 12명이 같은 계엄 군인에 의해 사망입니다.
일곱색깔무지개 님. 시민군이 총들고 군복 입고 있는 사진 당신도 이미 보았을 겁니다. 더벅머리에 운동화나 구두 신고있는 시민군을요. 그리고 시민군이 장갑차 몰고 행진하고 있는 동영상도 있고 무기고를 습격하여 탈취한 무기들을 도청앞 사진에서도 보셨을 겁니다. 그중 몇 명은 직접 폭탄을 제조하고 있죠.
폭탄을 터뜨렸나요?제 기억으로 광주에서 폭탄이 터뜨린적은 없더군요..
<5월21일 주간에는 아세아 자동차 주식회사에서 탈취한 차량 및 APC를 이용하여 광주시내는 물론 여수·순천·목포·장성·담양 지역 일대에서 무기고에 보관 중인 총기 및 탄약을, 화순 탄광에서는 TNT, 뇌관·도폭선 등을 탈취하여 광주에 반입했다. 시위대는 차량과 APC, 무기를 휴대하고 본격적으로 「폭도化」 되었고, 탈취한 무기를 가지고 살레지오 남자고등학교 운동장에서 사격 연습을 실시했다. 폭도들은 화기 및 폭약류 취급의 부주의, 차량의 전복 등으로 폭약류가 폭발하여 사상자가 발생했다는 첩보가 계엄분소에서 전파되었다.>
http://cafe182.daum.net/_c21_/bbs_read?grpid=rUoh&mgrpid=&fldid=3IBb&page=1&prev_page=0&firstbbsdepth=&lastbbsdepth=zzzzzzzzzzzzzzzzzzzzzzzzzzzzzz&contentval=0003Szzzzzzzzzzzzzzzzzzzzzzzzz&datanum=214
일곱색깔무지개 님. 5.18 관련자들이 주장하는 "맨몸 시위대"로부터 사살된 군과 살인목적 돌진차량으로 인한 사망자도 보이는군요. 당시 시민군 돌진차량이 장갑차인것은 아시는지요?
잘 압니다 총도 없는 바퀴로 달리는 장갑차 입니다.군인 죽음에서 항상 인용하는 사건이 두가지이죠..버스에 깔린 경찰과 장갑차에 깔린 군인
바퀴 달린 신형 장갑차 였습니다. 특전사 출신도, 북파 공작원 HID 도 운전못하는 장갑차 입니다.
그리고 서 있던 사람을 버스로 깔아 죽였다면 살인입니다.
그버스 운전자 얘기는 시야가 안개인지 최루 가스인지 잘 안보여서 사고났다고 증언했더군요.
Dr.OB/GYN 님. 계엄 진압군과 경찰들이 도로에 있을때 혼자 운전하던 님께서는 돌파하실까요, 아니면 버스에서 내려 보다 안전한 곳으로 가실까요. 님께서는 안개이든 최루가스 상태이든 사람들이 앞에 즐비한데 운전하시겠습니까.
Dr.OB/GYN님, 그러면 시민군 테러 차량에 군인들이 깔려죽은 것은 어떻게 설명합니까? 그 테러 차량들 운전자들도 잘 안보여서 사고냈던 것입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