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여린무가 아니다 아니다
손유미
4월에 심어 6월에 거두는 열무는 굵게 살찌지
않아 가느다랗고 가는 열무를 우리는 더
가늘게 다듬네 열무김치를 담그려고 우리
둘러앉아 6월의 열무를 만진다 거의
밤에 밤과 가까운 순정한 어둠 속에
잊지 않고,
4월의 자리를 남겨둔 채
그리고 자리를 채우려 오는 한 사람 그렇게
한 사람 오직 한 사람…… 끝없는
한 사람들
열무 꽃대를 다듬지 않고 툭 무쳤다
노랗고 질긴 꽃대를 버무려 입에 넣었다
손전등을 쥐듯이,
삼키지 않고 계속 씹어내기 위하여
물오른 나무의 사랑
물오른 나무처럼 사랑하려 하네
감쪽같이 살아난 아침에
마른세수 끝에 물끄러미 바라보다
마른 가지의 떠는 두려움으로 그에게 힘을 부여했듯이*
물오르는 나무의 사랑으로 너에게 힘을 실어야겠다고 그러므로
지난 두려움으로 만든 둥지를 머리에 이고
아 나는 다 보여줄 수 있어라
가릴 것 없이
보인 걸 다 줄 수 있어라
아까울 것도 없이
손 쓸 수 없는 외로움에 허둥대던 몸이었으나
달리 썼네
무성한 악수와 꽉 찬 포옹으로
흐드러진다 내 춤사위로…… 그로부터
백 년은 쓴 듯이 허름해질 때까지
초록 물을 머금은 애지중지 작은 세계는 보았을까?
내 머리 꼭대기에서 보여주고 싶었던 그 어깨의 별 볼 일 없음을
초록 물로 씻은 작은 세계는 느꼈을까?
내 사랑을 다해 주고 싶었던 그와 대적할 수도 있을 힘을
기지개를 켜서 몸을 늘렸다
몸에 걸리는 게 하나도 없었다
아침처럼 달리 느껴졌다
(웹진 <같이 가는 기분> 2023 여름호 발표)
* “왜 무서워 해서/그에게 힘을 부여하니” 안미옥, 「누군가의 현관」 변용.
몸을 구하는 사람과 없는 몸
우리집 옆에는 작게 노는 땅이 있는데, 봄이면 이 노는 땅 때문에 사달이 난다.
이 땅은 원래 우리 옆집이었으나 집을 허물며 땅의 일부를 도로로 팔고 남은 것으로, 그 크기와 모양이 애매하여 더 팔리지 않고 놀게 된 것이었다. 아마 우리집이 집을 허물거나 팔 때 같이 팔리기를 기다리다가 시간이 훌쩍 지난 모양이다. 그런 연유로 만물이 소생하는 봄이면 할머니는 이 땅에 온갖 것들을 신나게 심으셨다. 이 땅에는 배추, 상추, 고추, 갓, 파가 잘 맞고, 가끔 아다리가 맞으면 오이, 가지, 방울토마토가 잘 되고, 감자? 고구마? 이런 것은 어림도 없다는 것을 할머니는 직접 땅을 일구며 알아내셨다. 노는 땅인데 진짜 놀리면 쓰레기며 잡초 때문에 지저분해졌을 테니 아주 알맞은 처사였고 큰 문제는 없었다. 그간은 그랬다.
몇 해가 지나는 동안 할머니는 당연하게 노쇠하셨고 특히 요 몇 년 사이엔 눈에 띌 정도로 기운이 없어서 최소한의 생활 반경에서 최소한의 움직임으로만 지내고 계셨다. 그러나 문제는 봄. 봄만 되면 겨우내 응달진 몸을 봄볕에 말리고 싶으신지 그 몸을 어쩌지 못하고 안달 내셨다. 자꾸 지팡이를 짚고 나가 옆집 대문을 슬슬 열어 노는 땅을 보고 계셨다. 그런 할머니 속내야 빤했다. 배추, 상추, 고추의 씨와 모종에 관한 계산을 시작으로 당신 몸을 대신해 땅을 일굴 몸을 구할 궁리까지 나아가는 생각들.
매해 노는 땅이 야기한 할머니의 봄 몸 구하기는 우리 식구들에게 봄의 시작을 알리는 봄 몸살로 자리 잡았다. 그리고 이 봄과 봄 몸과 봄 몸살은 열무 씨를 심을 즈음 시작하여, 열무를 거둬 열무김치를 담그며 그 절정을 맞는다.
그러니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는 봄의 절정에 관한 이야기다.
작년 서툰 칼질로 열무를 뚝 뚝 다듬던 그 밤과 그 이후에 관한 이야기.
그날은 정말 긴 실랑이 끝에, 특히 할머니와 엄마의 긴 실랑이 끝에 엄마가 또 지면서 미룰 것 없이 갑자기 시작해 버린 열무 난동의 날이었다. 하루 종일 열무김치를 하네 마네 한 덕분에 다 저녁에야 일을 시작할 수 있었다. 식구 중 누구는 땅에서 열무를 툭 툭 뽑거나 뜯고 누구는 마당 수돗가에서 열무를 살살 씻겨서 소금에 재우는 동안, 나는 부엌에서 액젓을 넣어 풀을 쑤고 있었다. 나는 이 봄의 끝은 역시 열무김치구나! 피할 수 없었구나! 받아들이는 동시에 왜 지난봄 열무 씨를 뿌렸을까! 어째서 열무는 눈치도 없이 이렇게 여린 연둣빛으로 잘 자라버린 것인가! 한탄했다. 그저 그해 봄, 유독 우울해하시는 할머니를 위해 심은 작물 중 가장 기대하지 않은 작물이었는데 왜 노란 꽃대가 오르락 말락 하는 열무로 너무 잘 자라버린 것인가. 왜 잘 자라서 저 아까운 것을 그냥 보낼 수 없게, 할머니 몸을 또 안달 나게 만든 것인가……. 그런 생각을 얼마만큼 했을까. 할머니와 엄마와 나는 어느덧 거의 밤에 마당에 둘러앉아 김장의 막바지를 향해 가고 있었다.
나는 서툰 칼질로 뚝 뚝 열무를 다듬고. 할머니는 능숙한 칼솜씨로 뚝 뚜둑 열무를 다듬고. 엄마는? 아마 양념을 만들고 있었겠지. 해는 넘어가고 있었고. 이상하게 우리의 분위기도 어딘가로 넘어가는 듯했다. 다음 장면으로. 땅도 쓰고, 여린 열무도 거두고, 당신 딸과의 실랑이에도 이겨 아까운 열무를 버리지 않고 알맞은 때에 김장도 담그니 그 승리감에 하루 종일 별참견을 다 하시며 활력이 넘쳤던 할머니도 어쩐지 이상하게 쑤욱 꺼져가는 게 보였다. 큰 활력 끝에 큰 피로감으로.
그때 나는 장갑을 벗고 손을 툭 툭 털고 일어나 더 어두워지기 전에 손전등을 찾으러 광방에 갔다. 이상하게 땡땡한 분위기를 전환해볼까 싶어 옛날 노래 조미미의 ‘먼 데서 오신 손님’을 틀어놓고. 이다음으로 이미자나 장윤정 노래를 듣고, 또 엄마가 좋아하는 조항조나 임영웅 노래를 들어야지 생각하며 손전등을 찾아서 오니.
“4월에 심어 6월에 거두는 열무는 굵게 자라지 못해 가느다랗지.”
그러니 열무는 그만 손대도 될 것 같다고 할머니는 말씀하셨다. 먼 곳을 바라보며.
“옛날엔 나도 노래도 알고 춤도 알았는데, 이제는 잘 몰라.”
자식을 잃으며 노래도 춤도 잃어버렸어, 나는 그렇게 됐어. 그러니 노래를 그만 꺼달라고 할머니는 말씀하셨다. 나를 바라보며.
나는 노래를 끄고 손전등을 켜, 엄마가 양념을 버무리기에 편하도록 주위를 밝혔다. 더불어 여기라고. 할머니 멀리 가시지 말고 여기 여린 무를 바라보라고, 밝혔다.
그날의 끝이 어땠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다만 내가 기억하는 것은 봄의 절정 이후에 오는 것들.
마치 바로 겨울인 듯 이불 속으로 웅크려 들어간 몸.
봄의 난동을 힘껏 부리고 맥이 빠져버린 저 몸.
즐거운 일에는 즐거움을 기쁜 일에는 기쁨을 느끼나, 그럼에도 그 즐거움과 기쁨 속에는 노래도 춤도 없다는 저 한 몸.
몸을 잃어버렸기 때문에 노래도 춤도 잃어버렸다는, 저 한 몸.
그리고 나는 감히…… 몸을 잃어버린 사람의 슬픔에 대해 생각한다. 어김없이 봄은 왔고, 슬픔에 대해 생각한다. 슬픔에 소홀하지 않기 위해서, 슬픔에 대해 생각한다. 슬픔의 자리를 깨끗하게 축약하려는 것 같다는 느낌 속에서, 슬픔에 대해 생각한다. 그 슬픔의 자리를 지키기 위해서, 슬픔에 대해 생각한다. 이 봄에 새겨진, 슬픔에 대해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