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깨를 털면서
김준태
산그늘 내린 밭귀퉁이에서 할머니와 참깨를 턴다
보아하니 할머니는 슬슬 막대기질을 하지만
어두워지기 전에 집으로 돌아가고 싶은 젊은 나는
한 번을 내리치는 데도 힘을 더한다
世上事(세상사)에는 흔히 맛보기가 어려운 쾌감이
참깨를 털어내는 일엔 희한하게 있는 것 같다
한 번을 내리쳐도 셀 수 없이
솨아솨아 쏟아지는 무수한 흰 알맹이들
도시에서 십 년을 가차이 살아본 나로선
기가 막히게 신나는 일인지라
휘파름을 불어가며 몇 다발이고 연이어 털어낸다
사람도 아무 곳에나 한 번만 기분 좋게 내리치면
참깨처럼 솨아솨아 쏟아지는 것들이
얼마든지 있을 거라고 생각하며 정신없이 털다가
“아가, 모가지까지 털어져선 안 되느리라”
할머니의 가엾어 하는 꾸증을 듣기도 했다.
(시집 『참깨를 털면서』, 1977)
[작품해설]
이 시는 참깨를 털면서 느낀 생활 체험을 바탕으로 인간의 내부에 잠재해 있는 잔인성을 고발하고 있는 작품이다. 일상적이고 평범한 소재에서 얻은 체험을 보편적인 깨달음으로 확대함으로써 인식과 체험을 확장하고 있다는 점에서 고전 수필의 ‘설(說)’ 양식과 상통한다.
어느 날, ‘산그늘 내린 밭귀퉁이에서’ 할머니와 함께 참깨를 털게 된 화자는 어두워지기 전 집으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에 있는 힘껏 내리치며 참깨를 턴다. 이에 비해 할머니는 슬슬 막대리질을 하면서 참깨를 턴다. ‘한 번을 내리치는 데도 힘을 더한’ 까닭에 화자는 ‘셀 수 없이 / 쏟아지는’ 참께를 보면서 쾌감을 느낀다. 이러한 쾌감은 ‘세상사에서 흔히 맛보기 어려운’것이기도 하지만, ‘도시에서 십 년을 가차이 살아 본’ 그가 일찍이 느껴 보지 못한 것이기에 그로서는 ‘기가 막히게 신나는 일이’요, ‘휘파람을 불’만큼 각별한 것이다. 이러한 행동에는 도시적 삶에 대한 울분과 고뇌가 담겨 있으며, 참깨를 터는 행위는 이에 대한 카타리시스적 해소가 될 수 있다.
그리하여 화자는 결국 ‘사람도 아무 곳에나 한번만 기분 좋게 내려치면 / 참깨처럼 솨아솨아 쏟아지는 것들이 / 얼마든지 있을 거라’는 생각에 이르게 된다. 이는 결국 자신의 목적과 쾌락을 위해서는 다른 사람을 이용하거나 그에게 고통을 가할 수도 있다는 것으로, 배금사상에 바탕을 둔 일확천금과 한탕주의가 만연하는 도시적 삶에 방식에 물든 결과이자 세속적 욕망을 의미한다.
한평생 정직하고 순박한 시골 생활만을 해온 할머니의 눈에는 도시 생활에서 얻어 온 화자의 이러한 행동이 위태로워 보인다. 그래서 할머니는 화자에게 ‘모가지까지 털어서는 안’ 된다고 꾸중하며, 상대방에 대한 배려와 연민을 상기시킨다. 참깨를 터는 것이 참깨를 얻기 위한 것인 만큼 참깨의 모가지까지 털 필요가 없으며, 털어서도 안 된다고 할머니는 생각한다. 이러한 할머니의 상각에는 인간의 욕망는 쉬고 빠르고 일순간에 달성되는 것이 아니라, 적절한 방법과 절차에 다라 이루어져야 하며, 거기에는 인내와 시간이 필요하다는 교훈이 담겨 있다. 목적돠 과정을 다함께 중시함으로써 타인에 대한 배려를 잊지 않는 할머니의 삶이 농촌을 배경으로 하는 우리의 전통적인 삶을 상징한다면, 목적만을 중시한 까닭에 타인에 대한 배려가 전혀 없는 화자의 삶은 도시적이고 서구적인 삶을 의미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렇게 본다면, 이 시는 현대인의 마음속에 내재해 있는 잔인성을 고발하고, 인간관계에서 타인, 특히 사회적으로 소외당한 이들에 대한 인간적 배려의 필요성을 깨우쳐 준다고 할 수 있다.
[작가소개]
김준태(金準泰)
1948년 전라남도 해남 출생
조선대학교 독어교육과 및 국문과 대학원 졸업
1969년 『전남일보』, 『전남매일』 신춘문예에서 시 당선으로 등단
1986년 전라남도문학상 수상
1986년 현산문학상 수상
시집 : 『참깨를 털면서』(1977), 『나는 하느님을 보았다』(1977), 『국밥과 희망』(1984), 『불이냐 꽃이냐』(1984), 『넋 통일』(1986), 『아아 광주여, 영원한 청춘의 도시여』(1988), 『칼과흙』(1989), 『꽃이 이제 지상과 하늘을』(1994), 『지평선에 서서』(1999), 『한 손에 붓을 잡고 한 손에 잔을 들고』(20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