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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 3: 8-13
그들이 날이 서늘할 때에
하나님께서는 긍휼이 크심으로 인간을 찾으셔도 인간의 환경이 최상의 때에 적시에 하나님의 음성을 듣게 하시려고 특별하신 방식으로 임하십니다. 그들이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숨을지라도 적극 찾으십니다. 그들의 죄를 자각케 하시려고 부르십니다.
1. 본문 8절은 “그들이 날이 서늘할 때에 동산에 거니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아담과 그 아내가 여호와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동산 나무 사이에 숨은지라” 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자기들 깐에는 벌거벗은 몸을 가렸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의 음성을 듣자마자 이것이 아무 소용이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여기에서 모세는 인간의 성품 속에 남아 있는 것이 아무 것도 없다는 사실을 이야기합니다. 또한 이것은 오늘날에도 분명한 것 같습니다. 선과 악의 차이는 바울이 가르치고 있듯이(롬2:15), 모든 사람의 마음에 새겨져 있습니다. 그렇지만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그들의 양심을 힐책하실 때까지, 그들은 모두 하찮은 나뭇잎 아래 수치스러운 사악성을 묻어 버립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그들의 무감각을 일깨워 주신 후에야 그들은 양심의 가책을 느끼고 하나님의 음성을 경청하게 되었습니다. 제롬은 이 구절을 “정오가 지난 서늘할 때” 라고 번역하는데, 이것은 히브리어로 ‘하루 중 바람이 불 때’ 라고 되어 있습니다. 헬라인들은 여기에서 ‘바람’이라는 말은 생략하고는 ‘저녁때’ 라고 번역합니다. 그러므로 아담이 정오경에 범죄 했으며 해 질녁에 하나님께서 그를 불러 심판하셨다는 견해가 지배적입니다. 그들은 옷으로 자기 몸을 가리고는 적막과 고요한 가운데 밤을 지샜을 것입니다. 그런데 어둠 때문에 그들의 위선이 아직은 드러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해가 뜰 무렵 완전히 정신이 들자 자신에 대해 돌이켜 보았으리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동틀 무렵에는 공기가 아주 상쾌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때 산들바람과 함께 하나님께서 나타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모세가 그 날의 시간을 저녁이라고 묘사한 것은 적절하지 않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것이 남쪽 지역을 가리킨다고 해석합니다. 실제로(루아크)라는 말은, 히브리인들 사이에서 종종 세계의 다른 지역을 나타내는 것으로 사용됩니다. 어떤 사람들은 여기에 시사되어 있는 것이 가장 무섭지 않은 시간이라고 추측합니다. 아주 밝은 곳에서는 안정감이 더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성경에 선포된 것이 성취되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들은 양심의 가책을 받아 언제나 불안하고 근심에 휩싸여 있다는 것이요, 심지어는 전혀 위험이 없을 때에도 초조해한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바람에 대해서도 부언하는데, 마치 아담이 떨어지는 나뭇잎 소리에 놀라 기겁을 한 것처럼 설명합니다. 그러나 밤의 어둠 아래 감추어졌던 것이 해가 뜨자 환히 드러났다는 해석이 보다 사실적이며 적절합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상쾌한 바람이 불 때 하나님께서 임재 하셨다는 분명한 상징이 있었다는 사실을 확신합니다. 일출이 있을 때마다 바람이 일기는 하지만, 이것이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의 양심을 일깨우기 위해 다가오신다는 특별한 징표를 나타내셨다고 추측하는 것을 반대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사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을 달리는 이해시킬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인간에게 자신을 현현하고자 하실 때에는 인간이 알 수 있는 표식을 이용하여 드러내십니다. 다윗은 바람을 ‘하나님의 사자’ 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바람 날개를 타고 다니시며 또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빨리 날아 다니신다고 언급하고 있습니다(시104:3).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바람을 이용하기도 하시는 분이십니다. 또 어느 때는 자연 질서를 초월하여 다른 피조물도 이용하십니다. 모세는 바람을 언급하면서 하나님의 임재에 대한 놀랍고도 괄목할 만한 상징을 제시합니다. 그리고 그것이 우리의 첫 조상들에게 격렬한 자극을 주었다는 사실을 암시합니다. 이러한 방법, 즉 하나님의 임재를 피해 달아나는 것은 나뭇잎으로 몸을 가리는 것에 비해 조금도 나을 것이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목소리만으로 도망하는 사람들을 돌아오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내가 주의 신을 떠나 어디로 가며 주의 앞에서 어디로 피하리이까 내가 하늘에 올라갈지라도 거기 계시며 음부에 내 자리를 펼지라도 거기 계시니이다”(시138:7)라는 말씀도 있습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우리가 헛된 핑계를 꾸며 대는 일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우리는 어떤 종류의 그늘일지라도 그것이 아주 훌륭한 도피처가 되리라고 공상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아담이 몇 개 안 되는 나뭇잎으로는 온몸을 가릴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서 숲 속으로 도망쳤다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됩니다. 우리도 마찬가지로 유치한 구실을 댈 수 없게 되면 우리의 잘못을 보다 잘 감추고 변호해 줄 수 있는 더 깊숙한 그림자 속으로 들어가기 위해서 새로운 구실을 찾는데 익숙해져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모세가 “아담과 하와가 동산나무 사이에” 라고 말할 때 단수 명사는 실제로 복수를 의미한다고 생각하고 “나무들 사이에” 라고 해석합니다.
2. 본문 9절은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부르시며 그에게 이르시되 네가 어디 있느냐” 입니다.
그들은 이미 하나님의 음성에 의해 양심에 가책을 받았습니다.그러나 그들은 또 다른 목소리가 그들의 마음에 파고 들어가기까지 어리둥절해서 나무 밑에 서 있었습니다. 여기에서 모세는 아담이 여호와 하나님에 의해 부르심을 받았다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그는 전에는 부름을 받지 않았습니까? 그러나 전자는 혼돈된 소리였습니다. 그 목소리를 듣고 아담이 양심의 가책을 받을 만큼 위력적인 것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이제 보다더 가까이 접근하십니다. 그리고 잎이 무성하게 우거진 나무들 밖으로 그를 끌어내어 아무리 싫어하고 거부해도 가운데로 나서게 하십니다. 이와 똑같은 방법으로 우리도 하나님의 목소리에 경종을 받습니다. 하나님의 율법이 우리들의 귀에 들리면 그 즉시 우리는 깨달아야 하는데도, 그것을 듣지 않고 얼른 그늘진 곳으로 피해 달아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좀더 강력히 우리를 부르고 우리는 어쩔 수 없이 앞으로 나와 하나님의 심판대에 서서 책망을 받게 됩니다. 바울은 이것을 율법의 생활, 즉 ‘율법적인 삶’ 이라고 합니다. 이것은 우리의 죄를 정죄함으로써 우리를 파멸시킵니다. 우리가 인생을 즐기면서 살아 있다는 그릇된 생각에 사로잡혀 있는 한 우리의 마음은 강퍅해져 율법의 날카로운 면을 무디게 합니다. 그러므로 율법은 무가치하고 필요 없는 것이 되어 버립니다. 그러나 이것이 우리의 양심을 더 날카롭게 질책하면 그때 우리는 새로운 공포에 휩싸이게 됩니다.
3. 본문 10절은
“가로되 내가 동산에서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내가 벗었으므로 두려워하여 숨었나이다” 입니다.
이것은 낙담하여 겸손해진 사람의 고백 같습니다. 그렇지만 곧이어 그가 아직도 순종하지 않았으며 회개하지도 않았다는 사실이 드러날 것입니다. 그는 하나님의 음성과 자신의 벌거벗은 몸 때문에 두려움에 싸여 있다고 그 원인을 전가시킵니다. 이것은 마치 그가 하나님의 음성을 듣거나 그분의 경고를 받은 적이 없었으며, 심지어는 그분의 말씀 때문에 기분이 상했다고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그의 생각이 극도로 무분별하다는 점은 그가 부끄러움의 원인이 죄 때문이라는 사실을 깨닫지 못한다는 점으로 미루어 분명히 드러납니다. 그러므로 그는 자신이 죄를 고백할 만큼 형벌을 느끼지 못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한편 그는 앞에서 말한 사실, 즉 원죄는 육체의 어느 한 부분에 잠재해 있는 것이 아니라 온몸을 지배하고 있다는 사실을 입증하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원죄가 영혼을 모두 점유한다는 것과 원죄의 통제를 받지 않는 사람은 하나도 없다는 것이 사실이라는 것을 입증하고 있습니다. 아담은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 몸을 가리고는 있습니다. 그렇지만 여전히 하나님의 임재를 무서워하고 있다는 사실이 분명합니다.
4. 본문 11절은
“가라사대 누가 너의 벗었음을 네게 고하였느냐 내가 너더러 먹지 말라 명한 그 나무 실과를 네가 먹었느냐” 입니다.
이 구절은 아담이 잘못으로 인해 형벌을 받는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고 어리석게 말하는 행위를 꾸짖기 위해 간접적으로 책망하는 것을 나타냅니다. 하나님께서는 마치 아담이 단순히 하나님의 음성을 두려워한 것이 아니라 그가 죄인이므로 하나님의 심판을 선포하는 음성이 그에게 그토록 무서움을 주었으며, 그 두려움의 원인은 그가 벌거벗었기 때문이 아니라 그를 타락시킨 사악한 배은망덕 때문이라고 말씀하시는 듯합니다. 분명히 아담은 본성 안에 있는 죄악의 근원을 찾는데서 하나님께 대적하며 돌이킬 수 없는 불경건의 죄를 지은 것입니다. 그는 말로 표현하여 하나님을 비난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비참한 상태를 한탄하고 자신이 그 비참한 상태를 초래한 장본인이라는 사실을 은폐하면서 자신이 져야 할 책임을 사악하게도 하나님께 전가시키려 한 것입니다. “내가 그 나무의 실과를 먹지 않았다면” 이라고 번역한 벌게이트역은 오히려 의문문으로 해석하는 편이 났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마치 어떤 실마리를 찾으려는 것처럼 의문을 제기하시는 것이 아니라, 어리석은 인간의 마음을 보다 날카롭게 힐책할 목적으로 질문하신 것입니다. 인간은 치명적인 질별에 걸려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고질적인 병을 의식하지 못합니다. 다시 말해서 병자가 온몸이 불덩이 같다고 불평하면서도 그것이 열 때문이라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속임수가 전혀 유익한 것이 아니며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아담의 죄 때문에 가장 공정한 심판으로 우리를 속박하신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합니다. “내가 먹지 말라 명한 그 나무의 실과를 네가 먹었느냐” 라는 구절은 하나님께서 아담의 그러한 가면을 제거하기 위해 덧붙이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담이 시시때때로 충고를 받았다는 사실을 암시합니다. 그리고 그가 잘 알고 있으면서도 자진해서 무서운 멸망을 초래했다는 것을 암시하십니다. 죄의 흉측한 성질이 다시 반항과 범죄라는 면에서 드러납니다.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보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은 없습니다. 같은 방식으로 하나님의 명령을 비웃으며 사단과 자기 자신의 정욕에 따르는 것보다 하나님께 용서받지 못할 일은 없습니다.
5. 본문 12절은
“아담이 가로되 하나님이 주셔서 나와 함께 하게 하신 여자 그가 그 나무 실과를 내게 주므로 내가 먹었나이다” 입니다.
아담의 뻔뻔스러운 행위가 이제는 더욱 분명히 드러나고 있습니다. 그가 하나님을 멀리하면 할수록 그만큼 하나님을 모독하는 정도가 심해지기 때문입니다. 전에는 아담이 하나님께 암암리에 간언 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공공연하게 하나님과 대적하는 등 모든 장애물을 돌파한 사람처럼 의기양양해 합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인간이 하나님과 불화가 생길 때, 얼마나 고질적이고 다루기 힘든 존재가 되는지를 느낄 수 있습니다. 이러한 사실은 아담이 반역한 그 순간부터 타락한 본성에 대해 생생하게 묘사되어 있으므로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야고보서에는 “오직 각 사람이 시험을 받는 것은 자기 욕심에 끌려 미혹됨이니”(1:14)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아담도 자신이 모든 것을 알면서도 자진해서 하나님께 대적하여 배반한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그는 “그가 그 나무 실과를 내게 주므로 내가 먹었나이다”라고 말하면서 마치 죄를 느끼지 못하고 있는 것처럼 하와를 자기 대신 죄지은 자로서 내세우고 있습니다. 더욱이 그는 하나님께 그 책임을 돌립니다. 그는 자신을 파멸에 빠뜨린 하와가 하나님께서 주신 여자라고 반박하고 있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로 원죄에 똑같이 물들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똑같은 변명을 늘어놓으며 변명하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이러한 것은 전혀 효력이 없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다른 면에서 자극을 받고 부추김을 받더라도 하나님께 순종하지 못하도록 우리를 유혹하고 있는 불신앙이 우리 가운데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우리에게는 교만한 마음이 있으므로 모든 것을 멸시하게 됩니다.
6. 본문 13절은
“여호와 하나님이 여자에게 이르시되 네가 어찌하여 이렇게 하였느냐 여자가 가로되 뱀이 나를 꾀므로 내가 먹었나이다” 입니다.
1) 하나님께서는 더 이상 남자인 아담과 논쟁하지 않으시는데 또한 그럴 필요도 없습니다.
아담은 자신의 죄를 경감시키기보다는 오히려 더욱 가중시키기 때문입니다. 그 이유로써 첫째는 어리석은 변명만을 늘어놓고 있습니다. 이어서 하나님께 대적하여 비난을 서슴지 않았습니다. 그는 발악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미 정죄 받았습니다.이제는 심판장이신 하나님께서 두 사람의 주장을 차례로 듣고서 선고하시기 위해 여자를 심문하십니다. 고대의 주석가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네가 왜 이런 짓을 했는가?’ 라고 이해합니다. 그러나 히브리어 본문은 더욱 격렬합니다. 이것은 어떤 엄청난 일을 당했을 때 놀라움을 감추지 못하는 사람이 나타내는 표현입니다. 그러므로 이 구절은 ‘어떻게 네가 이런 짓을 했단 말이냐?’ 라고 번역해야 할 것입니다. 이것은 마치 ‘네가 어떻게 왜곡된 마음을 가지고 남편에게 그처럼 말할 수 있었단 말이냐?’ 라고 말씀하신 것과 같습니다.
2) “뱀이 나를 꾀므로” 라는 말씀에서 하와는 지금 하나님께 경고를 받고 그 같은 불길한 사악함에 혼돈 되어 있다는 사실이 분명합니다.
그런데도 하와는 아무 말도 못하는 것이 아니라 남편이 그랬던 것처럼 뱀에게 그 책임을 전가시키고 있습니다. 하와는 뱀에게 모든 책임을 돌리면서 자신은 완전히 무죄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처럼 어리석고 불경건한 책임 회피도 없을 것입니다. 그녀는 ‘나는 뱀을 통해 하나님께서 먹지 말라고 명령하신 것을 받았으므로 죄인은 바로 뱀이다’ 라고 대답했다고 풀이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누가 뱀의 말을 듣도록 강요했는가? 누가 하나님의 말씀보다 오히려 사단의 속임수에 귀를 기울이도록 했단 말인가? 그녀가 하나님께서 완전히 요새화 하여 만드신 출입문을 활짝 열고 배반하지 않았던들 어떻게 그러한 속임수를 인정했겠습니까? 하여튼 원죄의 결과는 도처에 그 모습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원죄는 모두가 위선 속에서 무분별해지도록 획책하며 하나님을 아무 말도 못하는 벙어리로 만들어 버립니다. 그러므로 이처럼 많은 불평이 매일 쏟아져 나오는 것은, 우리가 스스로 무분별해지고 무감각해지기를 택할 때마다 하나님께서 그의 평화를 지켜 주지 않으시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