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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의 화약고 NLL 사수작전
1. 대한민국의 화약고 NLL과 제1연평해전
2. 제2연평해전 - 참수리 357, 서해의 꿈으로 잠들다
3. 제2연평해전 - 그날, 그리고 그 후
지난 3회에 걸쳐서 제1연평해전, 제2연평해전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았습니다. 1950년 이래 전쟁이란 참혹한 이름에서 멀어져 있던 오늘날의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많은 사건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한국전쟁 발발 61년째, 많은 주제를 제쳐두고 제가 굳이 연평해전을 택한 이유라면 ‘오늘 이 시간에도 누군가는 총구 앞에 서 있다’는 냉엄한 현실을 말하고 싶어서였죠.
참전용사로부터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보신 적이 있으신지요. 담담한 어조 속에 피비린내 나는 참혹함과, 눈물 흘릴 여유도 없이 사랑하는 이를 떠나보내야만 했던 죄스러움, 전쟁이란 포화 앞에 선 인간의 두려움이 모두 담겨있었죠. 61년이라는 시간이 너무 먼가요? 그렇다면 21세기의 사건은 어떠신지요.
10년이란 결코 짧지 않은 시간동안 누군가의 뇌리와 가슴에는 또렷한 아픔으로, 누군가에게는 기억조차 흐릿한 사건이 되어 버린 현실. 31분간 이어진 포탄의 빗속에서 그들이 느꼈던 감정, 그리고 냉담했던 대한민국의 시선이 가져다 준 상처. 그 이야기에 한발자국 다가가고자 합니다. 참수리 357호정의 부정장이었던 이희완 중위. 자신의 다리를 잃고, 출혈에 정신까지 혼미해져 가는 상황에서도 ‘침착하게 대응하라’라며 끝까지 자리를 지켰던 그가 2011년 오늘, 2002년의 그날을 말합니다.
(제2연평해전 발발과 교전규칙에 대한 이야기는 앞의 포스팅을 참고해 주세요)
해군사관학교에 입학하며 구축함 함장을 꿈꿨고, 그 꿈을 향해 열심히 달려가던 중위 이희완. 어느 새 9년이라는 시간이 흘러 소령이 되었습니다. 강산이 한 번 변할 시간이 흐르는 동안 그의 마음에 2002년 6월 29일은 어떤 모습으로 살고 있을까요. 6월이 그렇게 다가오는 어느 날에 그를 만났습니다.
Q : 군인이라는 길을 걷지 않았으면 아마도 삶의 모습이 달라져 있을 것이다. 꿈이 군인이었는지.
A : 50호 정도가 모여 사는 작은 곳에서 유년기를 보냈다. 그 부락에 육사를 졸업한 분이 계셨는데, 그분이 위풍당당하게 금의환향하는 모습이 굉장히 인상적이었나보다. 초등학교 시절부터 꾸준히 장래희망 란에 ‘국군’을 채워나갔다. 당시엔 국군의 날이 법정 공휴일이어서, 시가행진 하는 모습을 생중계 하는 것을 관심 있게 보곤 했다. ‘국가에 도움이 되는 일을 하자’가 직업관의 중심이었는데 그 일을 하려 보니 공무원 아니면 군인이 가장 적합하다고 생각했다. 난 그 가운데 군인을 택했다.
Q : 고정관념인지 모르겠지만, ‘시골부락 소년‘과 바다가 좀 멀어 보인다(웃음). 육군 사관학교가 아니라 해군 사관학교를 택한 특별한 이유가 있는지.
A : 고등학교에 진학한 뒤 사관학교를 목표로 꾸준히 군에 대한 꿈을 꾸었지만 주변의 만류도 많았다. 그래도 하고 싶은 건 아무도 못 말리는 거다. 그저 사관학교가 가고 싶었던 그때, 해군사관학교 생도들이 학교 홍보를 하러 왔는데 그 모습이 참 멋있었다. 운명이랄까, 그즈음에 콜린 파월(前 미 국무장관, 걸프전 합동참모본부의장 역임)이 해양의 중요성을 언급한 부분을 접하게 됐다. 해군이 내 눈 앞으로 두 번이나 다가온 것이다. 주저 없이 해군을 선택했고, 해군사관학교 역시 나를 택했다.
그저 국군을 막연히 동경했던 어린이가 청소년기에는 국가봉사라는 직업의 의미를 부여했고, 결국 해군사관학교에서 꿈을 이루며 삶의 목표를 구체화 했다. 해군은 나를 ‘꿈꾸는 자’에서 ‘꿈을 이룬 자’로 거듭나게 만든 곳이다.
Q : 제2연평해전과 관련한 정부 발간 공식보고서가 없다.
A : 제2연평해전이라고 이름이 바뀐 것이 2008년 4월이었다. 그 전까지는 ‘서해교전’이라고 불렀다. 교전이라는 말에는 우발적이라는 의미가 기저에 담겨있다. 비유를 하자면 길을 가다가 두 사람이 부딪힌 것과 크게 다르지 않은 상황이다. 당시에는 ‘교전’이라는 말로 표현을 했고, 또 전술적 측면과 후조치를 보고 우리에게 ‘패했다’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었다. 이런 경우 우리는 그저 과거의 ‘사건’일 뿐, 정부가 공식적으로 보고서를 남기지는 않는다. 역사로 치면 우리는 ‘야사’인 셈이다. 어느 야사가 책에 실리던가. 그렇기에 공식 보고서가 없다.
그리고 우린 결코 그날 지지 않았다. 목숨 걸었다는 것, 그리고 여섯 명의 전우를 떠나보냈다는 것- 우리에게 주어진 환경과 여건에서 최선을 다했다. 시간을 돌릴 수 없고 후회가 들어 하는 말이 아니다. 만약 우리의 상황이 그때와 조금만 달랐다면 결과는 더욱 크게 달랐을 것이다. 모든 걸 다 걸고 싸웠기에 ‘패했다’는 생각은 절대로 하지 않는다.
시간이 아무리 지나도 그날의 기억은 평생 지울 수 없겠죠. 그들의 얼굴을 볼 때마다 가슴 먹먹해지는 그리움과 고통 그리고 미안함. 그도 그렇게 울었습니다. “죄송합니다. 저만 이렇게 살아남아서…” 어느 누구도 원망할 수 없는 돌이킬 수 없는 사실이 20대 청년에게 많은 상처를 남겼네요. 몇 년이 지난 지금도 이 사진 한 장에 그의 힘들었던 나날들이 마음으로 다가옵니다. 이제 그가 더는 울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제2연평해전전적비 제막식, 2003년
Q : 참수리 357호정 예인에 실패하고 결국 가라앉았다.
A : 같은 편대의 참수리가 우리 고속정 좌현에 계류하고 수습을 시작했다. 전사자 시신을 수습하고 부상자를 이송하고, 불이 붙어 연기가 매캐한 고속정에 소화를 했다. 흘수선 밑으로 포가 뚫고 들어와 물이 차올랐고, 아무리 퍼내도 고속정 내부로 유입되는 해수의 양을 감당할 수 없었다. 이내 배가 기울었고 결국 예인을 포기했다.
함정이 복원력을 상실하고 불능상태가 되었을 경우에 대비에 이함(離艦, takeoff from a ship)훈련을 한다. 이함훈련이 훈련으로만 끝날거라 생각했지, 실제로 ‘이함’을 하게 될 거라고는 상상조차 못해봤다. 후송을 위해 다른 배에 옮겨 타고서 갑판에 누워 참수리 357이 천천히 물속으로 사라지는 순간을 내 눈으로 봤다. 어떤 말로도 형언할 수 없는 감정이다. 세상에 그 감정을 표현할 단어가 없는지, 아니면 여전히 내 감정이 정리가 되지 않은 상태인지 알 수 없지만 그 느낌을 언어라는 수단으로 표현하기 힘들다.
전쟁과 포화라는 이름에서 멀어져 평화라는 이름으로 살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손에 닿을 듯 가까운 어느 날에 포화 속에 있던 시간이 있었습니다. “그 순간이 두렵지 않느냐구요? 당연히 두렵죠. 시간이 지나 ‘내가 어떻게 그런 일을 했지’라는 생각도 들었으니까요. 그런데 그 순간에는 그런 두려움이 나를 지배할 찰나도 없었습니다. 나는 지켜야 할 것이 많은 대한민국 해군입니다.” 육군 리더십·상담 세미나에서 제2연평해전 전투소감을 말하고 있는 이희완 소령(진), (인용부호 내 내용은 세미나와 무관) 2009년, 국방일보
Q : 전사자의 영결식에 정부요인이 참여하지 않는 등 정부차원의 추도와 애도가 기대에 못 미쳤다. 또한 빈소를 국가수도병원에 마련함으로써 일반인의 접근이 통제되었고, 시민분향소도 마련되지 않았었다. 당시와 비교해 지금의 심경에 변화가 있는지?
A : 당시에 화가 나고 서운했던 건 당연하다. 다른 일도 아니고, 군인으로서 나라를 지키다 세상을 떠나는데 사람들은 다 자기 인생 살더라. 그러다 시간이 흐르고 나니 ‘나의 고통을 남에게 공감하고 울어 달라 강요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오늘 내 눈에서 슬픔의 눈물이 쏟아져 내려도, 기쁨의 순간을 맞이하는 사람은 저절로 웃게 되어 있다. 그게 삶이다.
많은 사람이 영결식에 참여하지 않았어도 우리의 슬픔을 진심으로 함께한 사람들이 분명히 있다. 진심으로 함께 한 감정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스며들게 되어 있다. 그런 분들이 조금씩 늘어갈 것이고, 또 기억하는 분들이 많아질 것이라 믿고 있다.
Q : 해군2함대사령부에 안보견학을 갔을 때, ‘그날’이라는 영화를 봤다. 故 박동혁 병장의 병상일기에 많은 사람들이 눈시울을 적셨다.
A : 故 박동혁 병장을 중환자실에서 봤다. 우리는 서로 발을 마주한 채로 누워 있었고, 당시 박상병은 의식이 없는 상태였다. 내가 의식을 찾고 눈을 떴을 때 처음 본 그는 수없이 많은 링거에 목숨을 부지하고 있었다. 움직이지도 못하는 내가 해줄 수 있는 것은 그가 빨리 깨어나길 바라는 기도뿐이었다.
시간이 지나 조금씩 회복되고 휠체어를 탈 수 있게 되고서야 박상병의 침대로 다가갈 수 있었다. 손을 잡고 빨리 일어나라고 말을 건네며 기도하는 것 외에는 정말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그가 사경을 헤매는 모습을 바라만 봐야하는 현실이 참 무능하게만 느껴졌다.
Q : 그리고 故 한상국 중사가 키를 붙들고 참수리와 함께 잠든 모습에도 많이 울었었다.
A : NLL부근에서의 참수리 357 인양은 많은 부담을 안고 진행된 작업이었다. 故 한상국 중사와 참수리가 함께 서해에 잠들었고, 당시 고속정을 인양한 것만으로도 다행이라 생각했었다. ‘그날’이라는 영화에서도 그려졌듯이, 만약 그가 키를 놓았더라면 어떤 상황이 펼쳐졌을지 알 수 없다. 그는 마지막까지도 자리를 떠나지 못했다.
참수리를 수색 작업을 할 당시 한상국 하사는 실종상태였고, 중사로의 진급을 이틀 남겨둔 상황이었다. 실종상태에서의 수색은 생존을 염두에 두고 있다는 뜻이다. 그런데도 추서 계급이 중사다. 그가 전사했다는 사실에 대해서만 예우를 했다는 뜻이다. 안타깝게도 그때의 상황이 여전히 이어지고 있다.
Q : 참수리 357호정의 고귀한 여섯 이름이 유도탄고속함으로 부활했다.
A : 참수리 357의 정장이었던 故윤영하 소령을 비롯하여 6명의 이름이 다시 태어나 영해 수호의 임무를 수행하고 있다. 특히 윤영하함은 서해 NLL 수호의 선두에 서 있다. 그가 싸웠던 바로 그 바다에 그의 이름이 부활했으니 그 의미가 더 값지고 크다고 생각한다. 또한 나라를 위해 헌신한 분들의 좋은 본보기이며, 같은 임무를 수행하며 오늘을 지켜가는 분들에겐 자긍심으로 다가올 것으로 믿는다. 부활한 유도탄고속함의 이름이 그들의 고귀한 희생과 투철한 감투정신을 영원히 기억하게 하는 계기가 되었으면 한다.
누구나 이름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 이름은 오로지 한 모습만을 이야기 하지 않습니다. 그의 이름 ‘이희완’에 담긴 그의 많은 이야기가 사람들을 울리고 웃음 짓게 하고, 또 자랑스럽게도 합니다. 시간이 더 지나서 그의 이름을 들었을 땐 눈물보다 기쁨과 웃음과 가슴 벅찬 고마움이 더 크게 다가오길 기도해 봅니다.
Q : 국가를 위해 몸 바친 사람들이 많다. 우리나라의 보훈 환경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궁금하다. 또한 보훈 정책 사업을 책임지고 있는 보훈처에 바라는 점이 있다면?
A : 국가보훈정책은 국가를 위해 공헌하고 희생한 분들과 그들의 유족에 대한 예우과 지원을 통해 그들이 영예로운 생활을 영위해 나갈 수 있도록 돕고, 그를 통해 국민의 애국심을 함양하고 고취시키는 데 목적이 있다고 생각한다. 호국보훈의 달처럼 매년 일정기간을 지정해 특별한 행사를 하고, 그들의 숭고한 정신을 되새기고 알리는 것도 중요하다. 오늘의 평화로운 하루를 살기 위해 많은 분들의 희생이 있었다는 사실을 항상 기억하고 감사하며 사는 것이 궁극적인 보훈의 모습이라고 본다. 정책적으로 향상된 지원책이 있는 것도 중요하겠지만 대한민국 곳곳에 호국영령들에 대한 감사와 예우의 풍토가 널리 퍼지길 바란다.
최근 국가를 위해 희생하신 분들에 대한 예우가 많이 향상된 모습을 볼 수 있어 개인적으로 굉장히 다행스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문제는 이들이 바친 조국사랑과 헌신적인 호국의지를 앞으로 어떻게 계승시키고 발전시키느냐 하는 점이다. 많은 시간이 흘러도 그들의 숭고한 뜻과 희생이 영원토록 우리의 가슴에 남아 국가발전의 원동력이 될 수 있도록 많이 힘써주시길 부탁드린다.
Q : 안보강연을 한다는 소식을 신문을 통해 접했다. 어떤 내용으로 강연을 이끌어 나가는지.
A : 피부로 겪은 제2연평해전이 주된 이야기다. 그리고 안보의 중요성에 대해 이야기를 하는데, 아무래도 그날에 대한 이야기에 청강자들의 몰입도나 관심도가 높다. 9년이라는 시간이 흘렀기에 어느 누군가의 기억에서는 이미 시간의 층 속에 갇힌 사건일수도 있고, 혹은 ‘그런 일이 있었지’라고 한번쯤 뇌리를 스치는 기억이 된 경우가 많다.
1함대사령부에서 강연을 한 적이 있었는데, 질의응답 때 어느 여자분이 운을 떼기도 전에 복받쳐 우시는 걸 봤다. 교육청에서 강연한 후에는 많은 분들이 대한민국 지켜줘서 고맙다며 연신 손을 잡아주시며 많은 격려를 해 주셨다. 우리가 한 일이 헛된 일이 아님을, 그날이 결코 시간 속에 잠든 날이 아님을 깨닫게 된다.
2002년 6월 29일을 기억하고 공감할 수 있는 사람이 조금씩 늘어가고 있다는 반증이라 생각한다.
Q : ‘안보’라는 말이 남의 얘기 같고 요원하다. 개인적으로 생각하는 안보란 무엇인지.
A : 안보는 ‘밥 먹는 거’다. 밥 안 먹고 살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밥이라는 에너지원이 내 신체를 살아 숨 쉬게 하고, 삶을 영위할 수 있게 하는거다. 안보도 마찬가지다. 안보라는 단어만 봤을 때는 소원하게 느껴지겠지만, 주변의 모든 것이 안보와 관계가 있다. 기름값이 천정부지로 오르는 요즘만 봐도 그렇다. 대중교통을 이용하고 절전하는 노력을 한다. 이런 것들이 안보의 생활화인거다.
‘외부의 위협이나 침략으로부터 국가와 국민의 안전을 지키는 일‘을 줄여 이르는 말이 안보다. 그러니 안보 자체가 곧 생활이라는 말로 정리될 수 있다. 그리고 그 생활이 반복되며 궁극적으로 신념화 되어가는 거고. 국민들의 안보의식이 생활화·신념화 되었을 때 감히 어느 누가 대한민국을 흔들어보려 하겠나. 아무도 없다.
Q : 9년이 흐른 지금, 참수리 357 승조원들에게 꼭 해주고 싶은 말이 있다면?
A : 생존한 승조원들에게는 ‘꿋꿋하게 살라’라는 말을 전하고 싶다. 그날의 아픈 기억만큼이나 몸도 많이 상했고, 마음은 더 말할 나위도 없다. 특히 부상을 당해 걸음이 불편하거나 손이 온전치 않아 세상의 시선으로부터 마음의 상처를 더 받게 되는 경우가 있어 안타깝다. 세상 앞에 더 당당하라, 더 꿋꿋하라 말하고 싶다. 열심히 노력하는 사람에게 세상은 등을 돌리지 않으니 말이다.
우리가 열심히 한 만큼 세상도 우리를 알아주는 날이 올 거라 믿는다. 다른 이유로 마음 아픈 오늘을 맞이한 건 아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국가수호’의 임무에 충실했을 뿐이다. 10개가 필요하다면 내 힘으로 8~9개를 만들고, 나머지를 채워가기 위해 세상을 향해 도움의 손을 뻗어야지 무작정 손을 놓고 있을 순 없다. 그러기에 더 꿋꿋하게 살자는 말을 하고 싶고, 전사한 여섯 전우에게는 하늘에서 우리를 늘 지켜봐주시고 힘이 되어 달라 말하고 싶다. 잘해 나가는 모습을 보면 칭찬을, 힘들어 지칠 땐 힘이 나는 격려로 늘 우리와 함께 해주길 바란다.
“제2연평해전이라는 사건이 세간의 관심에서 멀어진다는 생각이 들 때가 가끔씩 있었어요. 그럴 때마다 힘들어 지치기도 하고 모든 걸 손에서 놓고 싶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었죠. 그런데 신기하게도 그런 생각이 들 때마다 우리에게 ‘고맙다 그리고 미안하다’ 말하는 사람들이 나타나요. 뒤로 넘어지려 할 때 날 받치고 쓰러지지 않게 해주죠. 그분들이 얼마나 고마운지요. 그런 분들이 있는데 어떻게 모든 걸 놓겠어요, 더 열심히 해야죠.” 그의 손에 쥐어진 지팡이가 그의 몸을 지지하듯 이제는 우리가, 그리고 대한민국이 그의 마음을 지켜주는 수호자가 될 차례입니다.
Q : 현역으로서 그리고 전역 후에 꼭 하고 싶은 일은?
A : 일단은 현역으로서 임무에 충실한 군생활을 하는 것이 군인으로서의 본분이고 숙명이라 생각한다. 내가 맡은 직책에 맞게 안보의 중요성을 널리 알리고, 더 강한 안보를 위해 노력하는 것이 내게 주어진 과제이다. 아직 현역이다 보니 전역 후에 하고 싶은 일까지 구체적으로 생각한 건 없지만, 요즘 ‘행복’이라는 주제에 자꾸 눈이 간다. 사람 사이에서 행복해지는 것, 그리고 그 행복을 봉사라는 다른 모습으로 함께 나누고 싶다는 목표가 생겼다. 요즘 피아노를 치며 동요를 몇 곡 불러주면 딸아이가 너무 좋아한다. ‘긍정’의 힘을 믿고 사람 사이에서 ‘소통’하다 보면 ‘행복’이란 큰 선물이 내 옆에 와 있으리라 믿는다.
내년이면 제2연평해전 발발 10년이 됩니다. 전쟁이라는 극한의 경험은 평생을 함께하는 지울 수 없는 아픔이며 고통이라고 합니다. 그 고통을 딛고 웃을 수 있기까지 얼마나 많은 시련이 있었을지 감히 상상조차 힘듭니다. 이런 분들이 있었기에 오늘의 우리가 있다는 사실을 결코 잊어선 안되겠죠. 참수리 357호정의 하루, 그리고 그들을 기억하는 사람들이 그리고 그들의 마음을 함께해줄 사람들이 많아지길 기대합니다. 제2연평해전에서 전사한 여섯 용사 故 윤영하 소령, 한상국 중사, 조천형 중사, 서후원 중사, 황도현 중사, 박동혁 병장께 감사의 묵념을 올립니다.
무거운 주제의 이야기임에도 시종일관 밝은 표정과 목소리로 인터뷰에 응해주신 이희완 소령님, 동석하여 사진 촬영에 ‘재능기부’를 해 주신 조용신 대위님께 진심어린 감사의 마음을 보냅니다. 또한 인터뷰가 성사되기까지 아낌없는 지원을 해주신 국가보훈처 대변인실 관계자와 해군본부 공보과, 해군 교육사령부 관계자 분께도 감사의 인사를 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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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진정한 참군인상을 봅니다
국토수호를 위해 희생하신 분들을 보면 가슴이 아픕니다 제1연평해전은 제가 현역이라서 생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