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 노래
이성선
큰 산이 큰 영혼을 기른다
우주 속에
대붕(大鵬)의 날개를 펴고
날아가는 설악산 나무
너는 밤마다 별 속에 떠 있다
산정(山頂)을 바라보며
몸이 바위처럼 부드럽게 열리어
동서로 드리운 구름 가지가
바람을 실었다. 굽이굽이 긴 능선
울음을 실었다
해지는 산 깊은 시간을 어깨에 싣고
춤 없는 춤을 춘느니
말없이 말을 하느니
아, 설악산 나무
나는 너를 본 일이 없다
전신이 거문고로 통곡하는
너의 번뇌를 들은 바 없다
밤에 길을 떠나 우주 어느 분을
만나고 돌아오는지 본 일이 없다
그러나 파문도 없는 밤의 허공에 홀로
결정을 노래하는
너를 보았다
다 타고 스러진 잿빛 하늘을 딛고
거인처럼 서서 우는 너를 보았다.
너는 내 안에 있다.
(시집 『절정의 노래』, 1991)
[어휘풀이]
-대붕 : 하루에 구만 리(里)를 날아간다는, 매우 큰 상상(想像)의 새
[작품해설]
이성선은 1970년 등단 이래 일관성 있게 혼탁한 시속(時俗)에 때 묻지 않은 순수 서정의 자연 세계를 노래한 매우 특이한 시인이다. 그가 즐겨 찾는 시적 대상은 산, 바다, 별, 나무와 같은 자연물이다. 그는 이 자연물에 대한 관조를 통해 얻은 자족적인 깨달음의 세계를 간결하고 명징한 언어로 포착하여 소위 정신주의 시 세계를 형상화한다.
이 시는 번뇌와 고통 뒤에 새롭게 탄생하는 절정의 세계를 노래하는 한편, 그 새로운 세계을 자신의 내부로 끌어들이는 과정을 흥미롭게 제시한다. 연 구분없이 전 25행의 단연시인 이 시는 의미상 세 단락으로 나눌 수 있다. 첫째 단락은 1~13행에서 화자로 대치된 시인은 설악산 어느 한 줄기에서 ‘산정을 바라보며’ 우뚝 서 있는 ‘큰 나무’를 바라본다. 그 나무는 ‘우주 속에 / 대붕의 날개를 펴고 / 날아가’며, ‘밤마다 별 속에 떠 있다’. 시인은 밤마다 그 나무에서 ‘춤 없는 춤’을 보고 ‘말 없는 말’을 전해 듣는다. 그렇다면 나무가 그에게 전해 주는 무언의 몸짓이란 무엇인가? 모두(冒頭)에서 제시한 ‘큰 산이 큰 영혼을 기른다’라는 지극히 평범한 진실을 통하여 시인이 우리에게 말하려는 것은 무엇인가? 또한 설악산이 기르는 ‘큰 나무’는 무엇을 뜻하는가?
둘째 단락은 14~19행에서 시인은 설악산 나무를 본 일도, 들은 적도 없다고 말하고 나서, 나무가 ‘홀로 절정을 노래하는’ 것을 듣고, ‘거인처럼 서서 우는’ 모습을 보았다고 한다. 이렇게 부정에서 긍정으로 전환되는 역설을 통해 셋째 단락에서 마침내 나무가 ‘내 안에 있’음을 깨닫게 된다. 결국 이 단락에서 시인은 ‘없다’라는 종결어미를 세 번에 걸쳐 반복함으로써 ‘있다’라는 역설적 의미를 말하는 것이다. 겉으로는 ‘너를 본 일이 없다’, ‘너의 번뇌를 들은 바 없다’라고 말하지만, 사실 설악산 ‘큰 나무’는 ‘전신이 거문고로 통곡하는’ 깊고 깊은 번뇌와 절망을 거쳐 ‘우주 어느 분’을 만나고 있음을 시인은 알고 있는 것이다. ‘우주 어느 분’이란 바로 깨달음을 뜻하는 것으로, 이 깨달음 뒤에 비로소 절정의 노래가 가능해 지게 된다. 이러한 인식의 전환을 통해 ‘큰 나무’가 부르는 ‘절정의 노래’는 비로소 시인의 것이 된다. 셋째 단락인 20~25행에서 ‘다 타고 스러진 잿빛 하늘’의 희생을 딛고서 절정의 환희를 노래하는 나무가 시인의 내무 속으로 들어오게 됨으로써 결국 그 나무는 시인의 감정이 이입된 사물임이 드러나게 된다. 이렇게 천상과 지상의 두 수평선을 이어 주는 역할을 하는 ‘거인처럼 서서 우는’ 나무가 시인 자신이라는 것은 시인의 정신이 우주의 중심에 위치한다는 의미이다. 시인은 고통스런 통과의례를 거쳐 마침내 우주와 합일되어 우주의 중심에 우뚝서는 자신의 모습을 ‘너는 내 안에 있다’라는 구절을 통해 제시한다. 물론 우주와의 이러한 물아일체의 경지는 때 묻지 않은 자연 세계에서 진정한 깨달음을 찾고자 하는 시인의 구도자적인 자세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작가소개]
이성선(李聖善)
1941년 강원도 고성 출생
고려대학교 농학과 및 고려대학교 교육대학원 졸업
1970년 『문화비평』에 시 「시인의 병풍」 등을 발표하여 등단
1972년 『시문학』에 재추천
1988년 강원도문화상 수상
1990년 제22회 한국시인협회상 수상
1994년 제6회 정지용문학상 수상
1996년 제1회 시와시학상 수상
2001년 사망
시집 : 『시인(詩人)의 병풍(屛風)』(1974), 『하늘문(門)을 두드리며』(1977), 『몸은 지상에 묶여도』(1979), 『밧줄』(1983), 『나의 나무가 너의 나무에게』(1985), 『별이 비치는 지붕』(1987), 『별까지 가면 된다』(1988), 『새벽꽃 향기』(1989), 『향기나는 밤』(1991), 『절정의 노래』(1991),『산시』(1999), 『내 몸에 우주가 손을 얹었다』(20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