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소 공포증을 이겨 나온 이야기 / 홍속렬
어릴 적 고향에서 금강산 들어가는 전철이 있었는데 다리 이름이 “한다리” 라는 철교가 있었습니다
동무들은 그 다리를 성큼성큼 걸어 건넜는데 나는 기어건너는 중 반대편에서 철도 보수하는 차가 오다가 멈춰 내가 건널 때까지 기다려 줘 살아났습니다
그렇게 공중에 대한 공포가 심했던 내가 공수부대에 가 공수 교육을 우등으로 잘 받았습니다
월남전에 두 번 파송한 것도 고공에 대한 공포를 이겨 나온 무기는 단연 내가 살아온 삶에서 터득한 죽기를 각오한 삶의 방법이었던 겁니다
지난 2월 28일은 내 음력 생일입니다
태어나고 자란 사회적 배경이 한국전쟁으로 인해 피폐해진 사회와 각 가정의 역사적 배경을 바탕으로인 하여 식솔이 많이 딸린 가정마다 삶이 버거웠던 시절이었습니다
그래 아이들은 소망 받지 못한 처우와 입(食口)이 많으면 많을수록 죽지 못해 사는 삶이 순조로울 수만은 없어 늘 “ 이 원수야 ” 하는 막말을 들으며 자라서인지? 생일이 요즘 아이들처럼 행복한 입장에서 맞는 것이 아닌, 그냥 살아가는 평범한 날과 별반 다름이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는 생일에 대한 집착이나 세상에 태어난 것에 대한 부정적 생각을 갖고있는 사람 중 하나이기 때문에 생일은 별로입니다.
그래서인지 우리 가족 모두가 그런 생각의 소유자입니다
참으로 죽지 못해 사는 삶은 불행 그 자체입니다.
일찍 철이 들어, 나는 결코 평범한 사람은 안 되겠다는 생각을 가졌던 소년 시절, 꿈과 현실은 같을 수가 없었고 좌절과 절망? 그리고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생각이 절망케 했습니다
지게를 지고 금학산에 나무를 하러 다녔습니다
그런데 지게질이나 낮 질 그리고 일하는 덴 소질이 없어 늘 애를 먹었습니다.
어느 날 산에 가 나무 짐을 지고 내려오다가 지게를 진 채 넘어져 앞으로 굴렀습니다. 나는 낮으로 지게를 산산이 쪼개 버리고 서울로 올라가 군대 소년병으로 입대했습니다.
그리고 중학교 축구 실력으로 사단 선수가 되었고 체계적인 지도를 받으니 일취월장으로 발전했습니다.
그래 군대 생활은 축구선수로 성공적인 생활을 하고 나중엔 육군 대표 감독 직까지 오르게 됩니다
두 번의 월남 파병 그리고 특별진급 군대에선 승승장구했습니다.
육군 대표 운동팀들이 각 단위부대에서 관리 하다가 처음은 육군 체육지도 단으로 창단하였다가 다음에 8688 올림픽을 위해 국군 체육부대로 창단이 되는 때 다시 축구지도관으로 축구를 지도했습니다.
그래 시방까지 축구로 평생을 살아오며 이제는 선교사로 생의 마지막을 하나님께 헌신하고 있습니다
두 번째 파병해서 전공을 세우고 특별진급을 해서 어렵게 공수특전단에 전입했습니다.
나보다 고참 중사들이 늘비했습니다.
워낙 자아가 강하고 군대 정신이 충익한 나에겐 고참 중사들이 말 안 들으면 계급으로 압도했습니다
처음 전입해서 공수 교육 안 받았으면 비 공수라 해서 대단한 압박을 받게 됩니다. 그 설움을 잘 이겨 나가 드디어 공수 교육에 임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마침 우리기에 해병대가 함께 교육을 받게 되었는데 타군이 함께 교육받게 되면 군기와 교육이 더욱 강하게 됩니다.
그런데 나의 내면엔 고공에 대한 공포가 내재 되어있음을 간과하지 않으면 안 되었습니다.
월남전에서 두 번의 파병 그리고 훈장에 특별진급까지 용맹한 군인 용사로 스스로 지칭했던 내가 고공에 대한 공포를 극복하지 않으면 내 인생은 없는 것이란 생각으로 공수 교육에 임 했고 단단한 각오는 죽기를 각오하고 교육에 임한 결과 넉넉히 고소 공포증을 이겨 나갈 수 있었습니다.
어떤 일이든 마음먹기에 달렸습니다.
내가 살아온 무기는 죽기까지 힘써 하기입니다.
죽을 각오로 어떤 일에 임하게 되면 초인적 힘이 발휘됩니다
죽을 힘을 발휘하면 못 할 일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