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을 바꿔야 합니다.
참선을 하는 목적이 어디에 있습니까.
부처님을 부르고 화엄성중을 찾는
이유가 어디에 있습니까.
결국은 아무것도 없는 상태, 진리의
당체로 탁 들어가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모든 것을 놓아 버려야
합니다.
분별을 끊어버리고 삼독심을 제거해야
합니다.
참선을 하던지, 염불을 하던지, 간경을
하던지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어디론가 사라지고 없는 경계,
내가 마멸되고 사라지는 현상.
이 모든 것은 일심(一心)으로 정진했을
때 가능합니다.
따라서 수행을 할 때 어떤 마음으로
하느냐가 중요합니다.
복을 받기위해 기도를 하기도 하고 병을
고치기 위해 기도를 하기도 합니다.
불자들은 기도할 때 가르쳐 준 목표에
따라 기도를 합니다.
물론 기도를 통해 복을 받을 수도 병을
고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기도의 목표는 깨달음
이어야 합니다.
내가 나를 바로 알 수 있게 해 달라.
이렇게 기도해야 합니다.
사실 기도든 예불이든 염불이든 간경
이든 모두 방편입니다.
방법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관세음보살이든 지장보살이든 중요하지
않습니다.
목표가 중요합니다.
깨달음, 내가 누구인지 아는 것을
목표로 해야 합니다.
경전에 회광반조(回光返照)라는
표현이 있습니다.
빛을 돌이켜 자신을 비추는 것을
말합니다.
경전을 읽기는 읽되 자기를 보는 것입니다.
자기를 보는 경전 독송이어야 합니다.
모든 경전은 여시아문(如是我聞)으로
시작됩니다.
내가 이와 같이 들었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이 여시아문을 무엇이 이와 같이 인가.
내가 들었다는데 내가 누구인고.
이렇게 바로 자신에게 묻는 것이
수행입니다.
팔만대장경의 내용을 꿰뚫고 있다고
하더라도 자기를 바라보는 가슴이
없으면 의미가 없습니다.
그 어떤 신출귀몰한 존재가 여러분을
행복하게 하고 열반의 세계로 안내
한다고 생각한다면 잘못입니다.
여러분이 바로 수행의 주체고 운명의
주인이고 행복의 디딤돌입니다.
불교는 자신 이외의 다른 절대자를 믿지
않습니다.
신을 믿지 않습니다.
결국은 내가 주인공입니다.
현재의 과학적인 성과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신의 인간을 지배하지 않습니다.
인간이 우주를 지배하는 시대가 오고
하고 있습니다.
부처님은 천하의 어떤 존재도 그대를
능멸할 존재는 없다고 했습니다.
부처님은 이미 답을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그 답을 따라서 검증만 하면 됩니다.
부처님은 <화엄경>에서 일미진중함
시방(一微塵中含十方)이라 했습니다.
미진 속에서 우주의 실체를 본다고
했습니다.
인체를 해부하지 않아도 조직세포
하나만 떼어 보면 몸의 상태를 알고
병을 진단할 수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주변에 벌어지는 일을 비롯해 이 우주
까지도 나로부터 비롯됐습니다.
옳고 그름, 행복과 불행, 잘 살고 못하는
것, 모든 것의 원인이 나에게 있습니다.
이론적으로 머릿속으로 아는 것이
아니라 이런 진리를 처절한 몸부림과
냉혹한 시련을 통해 온 몸으로 체득해야
합니다.(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