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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단의 구조
출 27:1-8
1 너는 조각목으로 길이가 다섯 규빗, 너비가 다섯 규빗의 제단을 만들되 네모 반듯하게 하며 높이는 삼 규빗으로 하고
2 그 네 모퉁이 위에 뿔을 만들되 그 뿔이 그것에 이어지게 하고 그 제단을 놋으로 싸고
3 재를 담는 통과 부삽과 대야와 고기 갈고리와 불 옮기는 그릇을 만들되 제단의 그릇을 다 놋으로 만들지며
4 제단을 위하여 놋으로 그물을 만들고 그 위 네 모퉁이에 놋 고리 넷을 만들고
5 그물은 제단 주위 가장자리 아래 곧 제단 절반에 오르게 할지며
6 또 그 제단을 위하여 채를 만들되 조각목으로 만들고 놋으로 쌀지며
7 제단 양쪽 고리에 그 채를 꿰어 제단을 메게 할지며
8 제단은 널판으로 속이 비게 만들되 산에서 네게 보인 대로 그들이 만들게 하라
출 27:1-8 / [제단] 또 아카시아나무로 제단을 만들어라. 길이가 2.3미터, 나비도 2.3미터가 되게 하여 네모 반듯하게 만들고 높이는 1.4미터가 되게 하여라. 2) 그리고 제단 윗면 네 귀퉁이에 뿔을 만들어 붙이고 제단에는 놋쇠를 입혀라. 3) 재를 담아내는 통과 부삽과 피 뿌리는 대접과 고기 갈고리와 화로 등 제단에 딸린 기구들은 모두 놋쇠로 만들어라. 4) 놋쇠 철망을 그물 모양으로 엮어 만들고 이 그물 네 귀퉁이에 놋쇠로 만든 고리 네 개를 달아라. 5) 그런 다음 제단 가장자리 밑으로 달아 내려 놋쇠로 만든 이 그물이 제단의 중간까지 닿게 하여라. 6) 또 제단을 옮길 때 쓸 채를 아카시아나무로 만들고 마찬가지로 놋쇠를 입혀라. 7) 그 채를 제단 양 옆구리에 있는 고리에 꿰어 제단을 들어 올릴 수 있게 하여라. 8) 제단은 널빤지로 속이 비게 만들어라. 이렇게 내가 이 산에서 너에게 보여준 모양대로 제단을 만들어라.
성막에 대한 말씀이 끝나고 이제 성막 뜰에서 사용될 물건들에 대해 설명합니다. 먼저 가장 중요한 제단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제단의 크기와 여러 기구들(1-3) 제단은 가로 세로가 약 2.3m인 정사각형으로 높이는 1.4m였습니다. 재료는 조각목으로 만들었으며 놋으로 입혔습니다. 네 모퉁이에는 놋으로 만든 뿔이 붙어 있었습니다. 이 뿔은 희생 제물을 고정시키기 위한 용도로 사용되었습니다. 성경에서 뿔은 힘과 능력, 보호와 구원의 상징입니다(삼상 2:10). 그래서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구원의 뿔로 비유하기도 합니다(눅 1:69). 제단은 번제단이라고도 불립니다. 이곳에서 매일 두 차례씩 아침저녁으로 숫양 한 마리를 제물로 태웠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비교적 불에 강한 놋이 많은 부분에 사용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제단을 청소하는데 사용할 삽, 재 담는 통과 태우는 고기를 뒤집는 갈고리 등을 함께 만들라고 하십니다.
제단 그물과 채(4-8) 제단을 드는 채를 만들었는데 조각목에 놋을 입혀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제단 양쪽에 고리를 만들어 채를 끼워 제단을 들었습니다. 이것은 이동에 수월하도록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번제단의 내부는 빈 상태로 만들었는데 위아래가 뚫렸고 그 가운데 지점에 놋그물이 쳐 있습니다. 바로 이 그물 위에서 제물이 태워졌습니다. 내부를 이렇게 만든 것은 제물이 밖에서 보이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사람들은 번제물이 타는 모습을 볼 수 없었고 단지 타오르는 연기만 볼 수 있었습니다. 이렇게 완전히 태워서 바쳐지는 번제는 하나님께 대한 전적인 헌신을 의미합니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헌신과 희생을 의미하고 이제 우리가 하나님께 드려야할 헌신과 희생을 의미합니다. 제단은 성막의 뜰 중앙에 위치해 있습니다. 성막에 들어와서 성소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우선 제단을 통과해야만 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모든 제물은 이 제단에서 하나님께 드려졌으며 성소에 들어가는 자와 성소에서 봉사하는 자도 먼저 이 제단에서 제사를 드린 후에 성소에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이처럼 제단은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 사이에 중보적인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번제단은 희생 제물들이 인간의 죄와 허물을 대신하여 죽여지고 불태워지는 곳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희생 제물의 향기를 흠향하시고 진노를 거두십니다. 이러한 번제단의 기능은 죄가 없으시나 우리의 모든 죄를 대신하여 희생당하신 예수 그리스도와 그 현장인 십자가 제단을 의미합니다.
적용 : 당신은 희생의 제물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죄가 사해졌다는 것을 믿고 감사하며 예배드리고 있습니까? 당신 또한 희생과 헌신으로 하나님을 섬기고 있습니까?
큰 배를 움직이는 것은 돛대도 아니고, 엔진도 아닙니다. 배 앞쪽에 있는 작은 방향키입니다. 이와 같이 우리의 인생을 좌우하고, 신앙생활을 좌우하는 것은 열심도, 충성도, 형식도 아닙니다. 우리의 입술입니다. 혀는 작은 것이로되 죽고 사는 문제를 결정할 수도 있고, 성공과 실패를 좌우할 수도 있습니다. 혀로 우리는 사람을 죽이기도 하고, 살리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항상 남을 격려하고, 축복하고, 긍정적인 말을 하는 훈련에 몰입해야 합니다.
< 설 교 >
하나님이 만나고 싶어하신다
출 27:1-8 / 이충섭 목사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이 왜 주일마다 교회에 와서 예배를 드려야 할까요?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이 교회에 나와서 예배드리는 것이 무슨 의미일까요? 하나님께서 인간을 만드시고 인간으로 하여금 <하나님을 예배 하라>고 말씀하셨다.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이 제단을 쌓기를 원하신다. 성경에 나타나는 사람들중에는 제단을 잘 쌓은 사람이 있고, 제단을 잘 쌓지 못한 사람이 있다. 제단을 잘 쌓은 사람은 하나님의 사람으로 믿음으로 행복한 삶을 살아갔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성막을 만들다고 하셨다.
하나님께서 왜 성막을 만들라고 하셨을까요?
1. 하나님의 제단을 통해 하나님이 만나기를 원하셨다.(1절)
성막이 하나님을 만나는 장소이다. 예배드리는 공동체이다. 신앙가치가 공유되는 장소이다. 오늘날 교회이다.
하나님께서 오늘 번제단에서 만나기를 원하시는 것은 인간 그 모습그대로 만나자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번제단을 만들라고 하시면서 조각목으로 만들라고 하셨다. 조각목은 가시나무인데 땔감으로 실수도 없는 나무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생활하면서 조각목을 쉽게 구할수 있고 번제단을 쉽게 운반하기 위한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있는 모습 그대로 만나기를 원하신다.
하나님께서는 말도 잘 못하는 모세를 그대로 쓰시고 이스라엘백성을 이끌어가는 지도자로 만드셨다. 예수님은 12제자를 세울 때도 어부, 세리 등 세상에 사는 모습 그대로 부르셨다. 예수님은 일곱 귀신 들렸던 막달라 마리아, 수가성의 여인, 문둥이 시몬, 가난한 마르다와 마리아, 세리 삭개오 등 인간 있는 그 모습 그대로 만나 주셨다. 우리가 가난하다고, 병들었다고, 못 배웠다고, 배경이 나쁘다고 열등의식을 갖지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내 모습 그대로 받으시고 만나 주신다.
세상에서 인정받지 못하고 무시당하고 힘들고 어려운 인생을 살고 가는 사람이지만 소망이 있다. 왜냐하면 조각목을 놋으로 쌌기 때문이다. 조각목이 놋으로 싸여 있다는 말이 무슨 말인가요? 조각목 같은 사람이 예수님의 십자가의 은혜를 받을 수 있나요?
이스라엘백성들이 출애굽하고 난후에 모세를 향하여 원망했다. <어찌하여 우리를 애굽에서 인도해 내어 이 광야에서 죽게 하는가 이 곳에는 먹을 것도 없고 물도 없도다 우리마음에 만나을 싫어하노라> 이 일로 인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뱀에게 물리게 되었다. 이때 모세가 백성들을 위해 기도하였다.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응답하셨다. <불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매달아라 물린 자마다 그것을 보면 살리라> 모세가 <놋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다니 뱀에게 물린 자가 놋뱀을 쳐다본즉 모두 살더라>고 하였다.
뱀에게 물린 자가 놋뱀을 쳐다본즉 모두 살더라고 했다. 이세상의 죄로 물든 죄인들은 예수님을 쳐다본즉 모두가 살아간다는 것이다. 예수님을 바라보면 살길이 열린다. 예수님을 바라보면 불평이 사라진다. 예수님을 바라보면 천국갈 길이 보인다. 버림받은 조각목같은 인간은 예수님의 십자가가 아니면 도저히 구원받을수 없다. 버림받은 조각목같은 인간이라 할지라도 예수님의 피가 있으면 소망이 있는 삶을 산다. 실패만 하던 인간이 잘될수 있는 길이 활짝 열렸다. 새인생을 살게 된다. 새은혜가 임한다. 새능력이 온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인간의 모든 저주와 슬픔을 다 받으시고 용서하신다. 예수님은 우리의 모든 문제를 감싸주고 있다.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내가 당할 고난 고통을 다 당하셨다. 예수님은 나를 살리시려고 십자가를 끝까지 지고 가셨다. 나를 살리려고 우리의 허물을 인하여 찔리시고 우리의 죄악을 인하여 상하시고 우리의 치유를 위하여 채찍을 맞으셨다. 예수님은 십자가상에서 <다 이루었다>(요한복음 19장 30절)고 선언하셨다. 조각목같은 우리들을 사랑하시고 사랑하시고 사랑하셨다. 불같은 시험에도 승리하셨다.
2. 하나님은 성막을 설계하시고 그것을 알려 주셨다.(3절)
하나님이 모세를 통해 성막의 설계와 건축방법을 알려주셨다. 하나님이 지금도 교회를 세우기 위해 지도자를 세우셔서 사람을 가르치신다. 하나님은 부모를 세워 자녀를 가르치고, 선생님을 세워 학생을 가르치듯이 목사를 세워 성도들을 가르치신다. 그러므로 목사와 성도들은 교회공동체를 구성하는 공동 구성원이다. 각각의 재료들이 엮어져서 성전을 세우듯이 각각의 성도들이 모여 하나님의 교회를 이룬다.
하나님께서는 교회를 세워 가신다. 하나님의 임재를 체험한 예배자들이 예수님의 말씀으로 훈련된 제자가 되어 성령님의 능력으로 세상과 지역을 섬기며 승리한다. 승리교회는 예수님이 이끄시는 교회로 꿈과 믿음으로 인물이 배출되는 교회로 설계하고 계신다.
하나님께서는 성막안에서 번제단이 사용되는 기구들이 있다. 재를 담는 통과 부삽과 대야와 고기 갈고리와 불 옮기는 그릇이다. 재를 담는 통은 재를 담아 두었다가 진 밖에 버리는 통이다. 예수님은 우리가 가지고 있는 더러운 것을 담아 가신다. 우리의 죄를 철저히 회개하는 눈물, 아픔, 고통을 다 받아 주신다. 회개하고 예수님을 발견하면 된다.
번제단안에는 부삽은 재를 잘 타게 쓰는 삽이다. 예수님을 만나면 부정적인 생각는 사라진다. 우리는 예수님 안에서 새로워진다. 우리는 부정적인 생각을 버리고 예수님의 생각으로 바뀌어 진다. 우리는 <안된다. 힘들다. 어렵다>는 말보다는 <기적이 일어난다> <성령님이 도와 주신다><할수 있다, 하면 된다, 해보자>고 말을 더 자주 한다. 번제단안에 대야는 제물을 잡아 가죽을 벗기고 내장을 버리고 번제단에 올려 놓기 위하여 고기를 담아 나르는 그릇이다. 우리가 전도해야 영혼의 재물까지 나르는 대야가 되어야 한다.
번제단 안에 고기 갈고리는 대야에 담아온 고기를 찍어서 재단을 넣고 타는 동안 다른곳에 떨어지지 않도록 연결시키는 기구이다. 교회는 하나님과 나, 목사님과 나, 다른 성도들과 나는 잘 연결되어 있어야 한다. 서로 사랑하고 서로 기도해 주고 믿음의 사람으로 연결되어야 한다. 너와 나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너와 나가 서로 연결되어 있는 관계가 있어야 한다. 번제단안에 불옮기는 그릇은 불이 없는 곳에 불을 옮겨 준다. 교회는 기도의 불, 성령의 불, 구원의 불이 임해야 한다.
교회의 불이 있어야 세상 사람들이 불구경온다. 불이 떨어진 곳에 하나님이 용서해 주시는 순간이다. 불이 떨어진 곳에 하나님의 사랑이 체험된 순간이다. 불이 떨어진 곳에 하나님의 능력이 임하는 순간이다. 제단에 불 옮기는 그릇이 필요하다. 내가 교회에 나아와 예배드리는 것이 아무것도 아닌 것이 아니다. 다른 사람에게 은혜받는데 은혜의 불덩이이다. 내가 교회에 나와서 새벽기도를 하는 것은 다른 사람들에게 함께 기도할수 있도록 능력의 불덩이이다. 찬양의 불, 성령의 불, 전도의 불을 붙이는 불덩이가 되어야 한다.
3. 하나님이 명령하고 가르치신 것을 모세와 일꾼들과 백성들이 순종하였다.(8절)
명령하신 것이 은혜이고, 가르치신 것이 은혜이다. 백성들이 순종한 것도 은혜이다. 오늘 우리가 순종하는 것이 은혜이다. 조각목이 되든, 재를 담는 부삽이 되든, 우리는 교회에서 필요한 일꾼이 된다. 그것이 순종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우리를 선택하시고 교회의 일꾼으로 세우셨다. 그래서 우리를 교회를 세워가고 있다.
초대교회에서 제자들이 구제 사업한다고 말씀을 전하는 일과 기도하는 일을 게을리 하여 원망이 많아졌다. 이때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여 칭찬받는 사람 일곱을 책하게 되었다.
하나님께서 우리교회를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고 칭찬받는 사람을 준비하고 계신다.
열두 해를 혈루증 으로 앓아온 한 여자가 있었다. 이 여자는 많은 의사에게 많은 괴로움을 받았다. 가지고 있는 재산도 낭비하였다. 아무 효험이 없었다. 오히려 더 중한 병에 걸렸다. 이 여자가 예수의 소문을 들었다. 예수의 소문을 들었다는 큰 뉴스이다. 예수의 소문을 들으면 살 길이 열린다. 예수의 소문이 동서남북으로 퍼저 나가야 한다. 예수님은 우리 땅에 생명을 주려 오셨다. 예수님은 한명이라도 죄에 빠져 갈 길을 원하지 않는다. 예수님은 한명이라도 예수님을 만나 은혜받기를 원하신다.
하나님의 은혜는 한영혼이라도 더 예수님을 만나는 것이다. 한 사람이라도 더 예수님께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고 칭찬받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예수님을 가진 것은 모든 것을 가진 것이다.>글이 있다. 예수님을 소유한 사람은 아직 예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에게 전도해야 한다.
예수님은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관심을 가지고 있다. 예수님께서 우리와 대화를 나누어 싶어 하시고 우리가 가지고 있는 무거운 짐을 가져 가고 싶어 하신다. 우리는 예수님과 맡기기만 하면 된다. 우리가 십자가 앞으로 나가면 됩니다. 십자가의 은혜가 흐른다는 것은 끝까지 십자가지고 순종하며 가는 것이다. 내 힘으로 갈수 없으니까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는 것이다.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여 칭찬받는 사람으로 만드시겠다는 것이다.
다른 사람들과 갈등하고 관계가 어려워지고 있는 삶속에 예수님의 사랑, 예수님의 능력, 예수님의 마음이 있는 것을 보여 줄 수 있어야 한다. 예수님은 우리가 성령과 지혜로 충만하고 칭찬받는 사람으로 순종하도록 훈련하신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예수님은 있는 모습 그대로 사람을 들어 큰 믿음의 용사로 세우신다. 예수님은 영원히 죽을 밖에 없는 사람을 들어 새 생명의 용사로 세우신다. 예수님은 연약하고 힘이 없는 사람을 들어 강하고 담대함의 용사로 세우신다. 하나님께서는 있는 모습 그대로 사람을 들어 큰 믿음의 사람으로 세워 주신다. 하나님께서 권세와 능력과 사랑을 우리에게 공급하신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안에서 구원하여 주시고 평안을 주시고 건강하게 하신다. 하나님께서 성령의 불로, 말씀의 불로, 기도의 불로 불덩이로 써주신다.
번제단과 기구들
출 27:1-8 / 이상호 목사
성막 문으로 들어서면 제일 먼저 나타나는 곳이 번제단입니다.
1. 번제단의 뜻
번제는 '오라'란 말로 올라간다는 뜻이 있습니다. 단은 '미쯔바하'란 말로서 동물을 학살하다, 죽이다의 뜻입니다. 그러므로 번제단은 '동물을 죽여 올라간다'는 의미입니다.
어느 사람이 긴급한 문제로 왕을 만나고 싶어 궁궐앞에서 들어가려고 애썼지만 관리가 못 들어가게 막았습니다. 이때 어린아이 하나가 "왕을 만나고 싶어요?" 물었습니다. "네가 왕을 만나게 할 수 있니?" 비웃으며 물었습니다. "따라오세요"하며 어린아이가 앞장섰습니다. 알고보니 왕의 아들이었습니다. 아들 때문에 왕을 만나 듯, 번제단의 피 예수 그리스도의 피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계신 지성소는 유일한 문으로 들어가 피로 죄를 닦는 번제단을 통하여 하나하나 가까워지게 됩니다.
2. 번제단의 특징
1) 재료
조각목을 놋으로 싸서 만들게 되어 있습니다. 조각목은 버림받은 인간을 뜻합니다. 조각목은 4-8m의 작은 나무로 재목이 못되지만 금, 은 놋으로 싸서 성막의 재목으로 씁니다. 특히 놋은 십자가의 상징입니다. 버림받은 조각목 같은 인간은 십자가가 아니면 도저히 구원받을 수 없습니다.
미국 사람이 브라질에서 사형당하게 되었습니다. 미국 대사가 간청해도 죽여야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대사는 그 사형수에게 미국 국기를 씌웠습니다. "죽일테면 죽이라"외쳤습니다. 차마 미국 국기를 쏠 수가 없었습니다. 국교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미국 국기로 씌웠기에 살았습니다. 버림받은 인간도 십자가로 싸야 생명을 얻을 수 있습니다. 번제단은 구원의 장소입니다.
2) 크기
가로 세로 각각 2.5m(5규빗), 높이가 1.5m(3규빗)입니다.
성경에서 5는 고통의 숫자입니다. 온갖 병신들이 모이는 솔로몬 행각은 5기둥입니다. 수가성 여인은 남편이 5이 있었습니다. 번제단의 가로도 5규빗 세로도 5규빗입니다. 죄와 이혼식을 거행한다는 것은 고통의 경험입니다. 짐승이 학살되어 타는 것은 고통의 모습니다. 예수의 피는 고통의 절정입니다. 3은 하나님 숫자입니다. 성 삼위일체이기 때문입니다. 인간과 하나님이 인간은 자기 죄 때문에, 하나님은 하나님 사랑하시는 인간 때문에 같이 고통당하는 자리가 바로 번제단입니다. 하나님은 사랑스런 인간 때문에 그의 외아들 예수를 십자가에서 처절할 정도로 잔인하게 죽여야 했습니다. 그렇기에 번제단은 죄사함 받는 자리, 죄 버리는 쓰레기장, 마귀와 이혼하는 자리입니다. 이곳을 통과하지 않고는 결코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3) 모양
4군대 4개의 뿔을 만들었습니다. 이는 '생명의 뿔'을 의미 합니다.
솔로몬에 반역한 아도니야가 도망가 제단뿔을 부여잡고 있었습니다. 반역하는 즉시 사형이었습니다. 이때 병사가 아도니야를 잡으러 왔습니다. 이 모습을 보고 이렇게 보고 하였습니다. "혹이 솔로몬에게 고하여 가로되 아도니야가 솔로몬왕을 두려워하여 지금 제단뿔을 잡고 말하기를 솔로몬왕이 오늘 날 칼로 자기 종을 죽이지 않겠다고 내게 맹새하기를 원한다 하나이다" 왕상 1:5 이 보고를 받은 솔로몬왕은 아도니야를 살려주었습니다. 제단뿔은 생명의 뿔입니다. "여호와는 나의 구원의 뿔이라" (시 18:2)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 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롬 1:16)
4) 의미
4뿔입니다. 한 개로 족하지 않을까요? 그런데 동 서 남 북에 한 개씩 4개의 뿔이 달려 있습니다. 복음은 동서남북으로 다 빠져 나가야 합니다. 북(North), 동(East), 서(West), 남(South)의 첫 글자는 News입니다. 복음만큼 큰 뉴스는 없습니다. 죄로 말미암아 죽을 수밖에 없는 사형수들에게 가장 큰 News는 역시 생명입니다. 예수피가 필요없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어느 곳이나 누구에게나 예수 피는 묻어져야 합니다. 예루살렘도, 온 유다도, 사마리아, 땅 끝까지 죄인은 구원시켜 생명을 주신 예수 News가 퍼져 나가야 합니다.
"찬송하리로다 주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여! 그 백성을 돌아보사 속량하시며 우리를 위하여 구원의 뿔을 그 종 다윗의 집에 일으키셨으니"(눅 1:68~69)
5) 불 : 번제물을 번제단에 올려놓자 하나님께서 불을 내려 주셨습니다.
"불이 여호와 앞에서 나와 단위의 번제물과 기름을 사른지라. 온 백성이 이를 보고 소리지르며 엎드렸더라"(레 9:24)
불이 내린 것은 용서를 의미합니다. 사랑을 말합니다. 응답을 표합니다. 만일 다른 불을 사용하면 하나님께서 진노하셨습니다.
아론의 아들 나답과 아바후가 다른 불로 제사를 지내다가 하나님이 두 명을 죽여 버렸습니다.(레 10:1~2)
동이 서에서 먼것 같이 동쪽의 번제단과서쪽의 속죄소는 멀었습니다. 죄인이 의인되는 순간입니다. 그것이 불이 떨어져 제물을 태우며 하나님이 용서해 주시는 순간입니다. 다른 불은 안 됩니다. 인본주의가 섞여서는 안 됩니다. 순수 복음이어야 합니다. 마귀의 식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순간입니다. 당당히 하나님의 의롭다 하심을 입는 순간입니다.
나폴레옹을 태운 말이 갑자기 이리 뛰고 저리 뛰었습니다. 생명의 위험이 있었습니다. 한 병사가 목숨을 걸고 달려가 그 말을 진정시켰습니다. 나폴레옹은 안도의 한 숨을 내 쉬며 '너는 장교다'라고 선포하였습니다. 그 병사는 장교석에 가서 앉았습니다. 한 대위가 "너는 사병이니 사병석으로 가라"고 꾸짖었습니다. "누가 그러더냐?" 물었습니다. "황제가 그랬습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러자 당황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자녀로 인정해 주셨는데 누가 우리를 송사하겠습니까?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오...누가 능히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을 송사하리요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누가 정죄하리요...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일이나 장래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롬 8:31~39)
죄인 된 인간에게 하나님이 의롭다 여기시는 곳이 번제단이요, 그 증거가 불이었습니다.
3. 번제단의 기구들
번제단에서 번제를 드릴 때 보조기구가 5가지 있습니다.(출 27:3) 하나하나가 다 중요한 그릇입니다. 그리고 다 필요한 그릇입니다.
① 재를 담는 통
재를 담는 통은 청소통입니다. 번제단에서 태운 나무 제물의 재가 광야 바람에 날리는 것은 그리 반가운 것은 못됩니다. 성막 안이 더러워지고 세마포 울타리가 지저분해 지고, 성막 주변에 진치고 있는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건강상 해롭습니다. 그래서 재를 담아 두었다가 진 밖에 버리는 통입니다. 교회안에 못 된 요소를, 가정의 부정적인 요소들을 꼭 안고 있다가 혼자 어디에 갔다 버리는 아름다운 교인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꼭 필요한 일꾼입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예수님의 모습입니다. 온 인류의 죄 속량하시다 남은 재까지 다 모았다가 진 밖에서 피흘리시며 죽으신 그리스도의 모습입니다. 교회의 짐을 혼자 지고 갈 수 있는가요?
② 부삽
번제단에서 탄 모든 것의 재를 긁어내는 도구가 부삽입니다. 교회가 부흥하다 생기는 찌꺼기, 공동생활하다가 생기는 시험 고통 모두 긁어내고 교회 분위기, 속해 있는 곳의 분위기를 아름답게 만들고 있는 성도의 모습입니다. 부삽과 같은 성도가 꼭 교회에는 있어야 합니다. 예수는 부삽이셨습니다. 만나는 심령속에서 병을 긁어내고, 귀신을 긁어내고, 못된 것을 긁어내는 부삽이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를 만난 이들 모두 새로워졌습니다. 당신은 부삽 예수를 닮아 부삽 성도로 바뀌고 있는가요?
③ 대야
제물을 잡아 가죽을 벗기고 내장을 뺀후 번제단에 올려놓기 위하여 고기를 담아 나르는 그릇이 대야입니다. 이는 전도를 의미합니다. 영혼 구원을 하는 성도는 제물을 제단까지 나르는 대야입니다. 예수님만큼 큰 대야가 어디 있습니까? 최선을 다하여 일하는 날마다 좋은 대야입니다.
"온 세상 위하여 나 복음 전하리 주 예수 이름 힘입어 이복음 전하자
먼 곳에 나가서 전하지 못 해 도 나 어느 곳에 있든지 늘 기도힘쓰리
전하고 기도해 매일 증인되리라 세상 모든 사람들 듣고 그 사랑 알도록"
④ 고기 갈고리
고기 갈고리는 대야에 담아 온 고기를 찍어서 제단에 넣고 타는 동안 다른 곳에 떨어지지 않도록 연결시키는 기구입니다. 이는 교회안에서의 사랑의 고리를 의미합니다. 전도 다음 중요한 것은 교회의 공동체에서 떨어지지 않도록 붙들고 있는 갈고리 같은 일꾼이 꼭 필요합니다. 예수는 가장 크고 훌륭한 갈고리입니다. 자기 몸을 십자가에 내어 줌으로써 하나님과 사람사이를 연결시키는 갈고리가 되었습니다.
예화) 전쟁중이었습니다. 전선이 폭탄으로 1m 가량 끊어져 통신이 두절되었고 다 전멸상태에 놓이게 되었습니다. 한 병사가 끊어진 양끝을 각각 손으로 붙잡았습니다. 전기가 몸으로 통하며 새카맣게 몸이 탔습니다. 그 시간동안 전선이 연결되어 SOS를 할 수 있었고 모두가 구출되었습니다. 갈고리 예수를 본받은 갈고리 교인이 꼭 필요합니다.
⑤ 불 옮기는 그릇(화로)
불은 성령의 불을 의미합니다. 교회에는 불씨가 있어야 합니다. 불같이 뜨거운 성도가 있어야 합니다. 불붙이는 이가 필요합니다. 언제나 부흥의 원동력입니다. 예수님이 이땅에 불을 가져오신 화로는 모든 것의 불씨가 되었습니다.
이 같이 번제단에 재를 담는 통과 부삽과 대야와 고기갈고리와 불 옮기는 그릇이 보조적으로 쓰여졌습니다. 이런 것들의 도움으로 모든 죄는 다 소멸 되었습니다.
번제단과 성막의 뜰
출 27:1-2, 9-10 / 피영민 목사
서론
출애굽기 27장은 번제단과 성막 뜰에 대한 내용을 다루고 있습니다. 제사를 드리는 사람이 성막 동편 문으로 입장하면 성막 뜰과 번제단, 물두멍이 보이고, 성소와 지성소가 보입니다. 지성소에는 언약궤가 있고, 성소에는 세 가지 기구가 들어 있다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북쪽에 떡상, 남쪽에 순금등대, 그리고 정면으로 분향단이 있습니다.
지난 설교를 통해 성소의 떡상과 순금등대를 살펴보았고, 원래 분향단을 살펴볼 차례인데, 그것은 차후에 보기로 하고 오늘은 번제단과 성막 뜰을 중심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하나님이 모세를 통해 성막에 관한 계시를 주실 때, 계시한 그대로 지으라고 하신 이유가 있습니다. 첫째, 이스라엘 백성들은 우상 숭배의 땅 애굽에서 구원을 받은 백성이기에 하나님이 정하신 방식대로 하나님을 예배하며 살도록 하시기 위함이었고, 둘째는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끊임없이 교육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그것도 실물교육입니다.
하나님은 죄를 아주 심각하게 여기는 분이십니다. 죄는 결코 사소하지 않으며, 죄인 된 백성들이 하나님께 함부로 나아갈 수 없는 이유도 바로 이 죄 때문이고, 죄는 반드시 값을 치러야 한다는 것입니다. 죄를 지은 사람이 값을 치르려면 반드시 죽어야 하는데, 그러면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도 남지 않을 것이 분명합니다. 그래서 희생제물을 죽임으로 말미암아 그 피를 보고 죄인의 죄를 용서해 주시는 대속과 속죄의 원리를 끊임없이 교육하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번제단을 살펴보기 전에 두 가지를 고려해야 하는데, 첫째는 왜 순서상 분향단에 대한 내용이 빠져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분향단에 대한 내용은 출애굽기 30장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분향단에 대한 내용과 왜 거기에 기록되어 있는지 출애굽기 30장을 강해할 때 말씀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둘째는 ‘성막’(Tabernacle)이라는 용어와 관련된 것인데, “성막을 언급할 때 성소와 지성소만을 가리키는가? 아니면 성막 뜰을 포함해서 성막 울타리까지의 전체를 가리키는가?”하는 것입니다. 성막의 범위에 관한 것인데, 학자들은 이 문제에 대해 두 가지 용어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엄밀한 의미의 성막’(Tabernacle Proper)입니다. 영단어 ‘Proper’는 원래 ‘적절한’, ‘적당한’이라는 의미의 형용사인데, 이 단어가 명사 뒤에 위치하면 ‘엄밀한’, ‘좁은 의미의’라는 뜻으로 사용됩니다. 그래서 ‘Tabernacle Proper’는 보통 지성소와 성소를 포함한 장막(Tent)만을 가리킬 때 사용합니다. 그리고 둘째는 ‘성막’(Tabernacle)입니다. 이때의 성막은 ‘넓은 의미의 성막’으로, 성막 뜰을 포함한 성막 울타리까지의 전체를 가리킬 때 사용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제사를 드리고자 성막 뜰의 문을 통과하면 제일 먼저 보이는 것이 번제단입니다. 그리고 손을 닦는 물두멍이 보입니다. 그러니까 사람의 관점에서 보면 성막 문, 성막 뜰, 번제단 순서로 나오는 것이 적절해 보이지만 하나님의 관점에서는 번제단이 훨씬 중요하기 때문에 출애굽기 27장에 번제단이 성막 뜰보다 먼저 다뤄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설교의 순서도 성경의 순서를 따르고자 합니다.
Ⅰ. 번제단의 구조와 그 의미
번제단은 성막에 있는 모든 성물 가운데 가장 큰 기물입니다. 다른 모든 성물을 합한 것보다 큽니다. 그래서 번제단은 우선 그 크기만으로도 얼마나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는지 쉽게 짐작할 수 있습니다.
단의 명칭은 출애굽기 30장 28절에 ‘번제단’(Altar of the Burnt Offering)이라고 불렸고, ‘놋단’(Brazen Altar)이라고도 했습니다. ‘번제단’이라고 할 때는 그 단의 목적을 가리키는 표현으로, 희생제물을 불로 태워 하나님께 드리는 단이라는 의미입니다. 그리고 ‘놋단’이라는 것은 단을 만들 때 사용된 재료에서 나온 표현입니다. 한글개역성경에는 그런 구분이 정확하게 되어 있지 않지만 영어성경에는 이 놋단을 ‘Brazen Altar’라고도 하고 ‘Bronze Altar’라고도 합니다. 그러면 왜 이런 표현의 차이가 생긴 것일까요?
‘Brazen’이라는 것은 영어로 ‘Brass’와 같은 의미로, 일반적으로 ‘놋’이라고 번역되는데, 이것은 구리와 아연의 합금입니다. 그런데 모세가 살던 당시에는 구리와 아연을 합금하는 기술이 없었다고 생각한 사람들이 이것은 ‘청동’(Bronze)이라고 판단한 것입니다. ‘Bronze’는 청동이고, 구리와 주석의 합금입니다.
B.C. 1500년부터 1200년까지를 ‘후기 청동기 시대’라고 하는데, 출애굽 연대가 B.C. 1446년경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모세 시대는 청동기 시대였음을 알 수 있고, 학자들은 성경에 기록된 놋이 ‘Brazen’이 아니라 ‘Bronze’였을 것이라고 판단하고 ‘Bronze Altar’라고 번역한 것입니다. 타당한 이유라고 생각을 합니다만, 우리가 금속공학 전공자가 아닌 이상 성경의 번역을 따르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면 번제단 전체를 놋으로 만들었을까요? 그렇지는 않습니다. 번제단 골격은 싯딤나무(아카시아나무)로 만들고 놋으로 외부를 입혔습니다. 그러면 왜 놋을 입혔을까요? 금은 불에 약하고, 놋이 화력을 견딜 수 있는 금속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를 ‘놋단’이라고 부르게 된 것입니다.
번제단이 싯딤나무로 만들어졌다는 것은 그리스도의 인성을 의미하고 놋을 입혔다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대신 심판을 받으셨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놋은 항상 심판을 의미합니다. 그러니까 모든 성물의 재료와 색은 그 의미에 일관성이 있는 것입니다. 번제단은 인성을 가지신 그리스도께서 우리 대신 심판받으셨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줍니다.
번제단은 가로 5규빗, 세로 5규빗의 정사각형으로 만들어졌고, 높이는 3규빗입니다. 당시 이교도들의 제단이 원형이거나 삼각형이었는데 비해 번제단이 정사각형이었다는 사실은 특기할 만 합니다.
성경에서 숫자 ‘5’는 하나님의 은혜를 상징하는 숫자입니다. 예수님이 기적을 행하실 때도 오병이어로 5,000명을 먹이셨고, 모세의 책인 모세 5경도 5권입니다. 또 성막 지붕의 앙장을 5개씩 묶어서 두 개를 금고리로 연결하라고 하셨고, 성막 널판을 연결할 때도 5개의 금고리에 채를 끼워 연결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숫자 ‘5’는 하나님의 은혜를 상징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또 정사각형은 동서남북 어디에나 미친다는 의미이기 때문에 가로 세로 5규빗으로 이뤄진 번제단이 정사각형으로 되어 있다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가 이스라엘 민족뿐만 아니라 동서남북 이방나라에도 범세계적으로 미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단 네 모퉁이에는 뿔을 만들었습니다. 원래 뿔은 놋망에 올려 놓은 제물을 줄로 고정시키기 위한 목적이 있었습니다. 시편 118편 27절에 “줄로 희생을 제단 뿔에 맬지어다”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혹여나 누군가 희생제물에 손을 댈지 모르기 때문에 제물을 줄로 묶어 고정시켜 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레위기 4장 25절과 30절에 보면 제단 뿔은 더 큰 목적이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제사장은 그 속죄 희생의 피를 손가락으로 찍어 번제단 뿔에 바르고 그 피는 번제단 밑에 쏟고.” 제사장이 번제단 뿔에 피를 바를 때에는 손가락으로 찍어서 바르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면 죄가 용서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뿔은 그리스도의 피를 의지하는 자에게 죄를 용서해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상징합니다.
그러면 뿔이 하나님의 은혜라는 것은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사무엘하 22장 3절에 “나의 하나님이시요 나의 피할 바위시요 나의 방패시요 나의 구원의 뿔이시요 나의 높은 망대시요 나의 피난처시요 나의 구원자시라 나를 흉악에서 구원하셨도다”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다윗이 원수를 물리친 후에 고백했던 내용입니다. 다윗은 하나님을 구원의 뿔이라고 노래하였습니다.
누가복음 1장 69절에도 “우리를 위하여 구원의 뿔을 그 종 다윗의 집에 일으키셨으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침례요한의 부친 사가랴가 성령 충만을 입고 예언하기를 예수 그리스도가 구원의 뿔이라고 하였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다른 이름은 구원의 뿔이십니다. 그러니까 뿔은 피를 발라 죄 사함을 받는 구원의 뿔인 것입니다. 구약시대에 과실로 죄를 범한 자는 제단 뿔을 붙들어 피해자의 복수를 피할 수도 있었습니다. 일종의 도피성과 같은 역할도 했던 것입니다.
레위기에 보면 사람들이 짓는 죄의 종류가 기록되어 있는데, 하나님의 법을 알고도 반역하고 배교하는 죄와 고의적으로 혹은 의도치 않은 죄에 대한 내용입니다. 예를 들어 아론의 두 아들이었던 나답과 아비후는 하나님이 내려주신 불이 아닌 다른 불로 분향하였습니다. 이는 모르고 저지른 과실이 아니었습니다. 아론이 분명히 다른 불로 분향하지 말라고 했는데, 두 아들은 진리를 배반하고 배교하였습니다. 이런 사람들의 죄는 용서받을 수 없습니다. 이단자들이 용서받은 경우를 거의 볼 수 없는 것은 바로 이런 이유 때문입니다. 이런 자들을 위한 속죄제는 없습니다. 나답과 아비후를 위한 속죄제는 없었습니다. 그들은 제단에서 나온 불로 심판을 받아 즉사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고의적으로나, 혹은 부지중에 지은 죄들은 속죄제, 속건제, 번제 등의 제사를 통해 용서받을 수 있도록 하셨습니다. 죄를 짓고 싶지 않은데 몰라서 지었다든가 의도적으로 지은 것이 아니라면 모두 용서받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배교의 죄는 용서받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용서받을 수 있는 죄를 지은 사람이 피해자의 복수를 피해 제단 뿔을 붙잡으면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다윗의 아들 솔로몬이 즉위하기 직전 솔로몬의 배 다른 형제였던 학깃의 아들 아도니야라는 형제가 있었습니다. 그는 다윗 시대의 용장 요압과 손을 잡고 스스로 왕을 자처하였습니다. 그러니 솔로몬의 어머니인 밧세바가 노구가 된 다윗 왕을 찾아가 “내 아들 솔로몬을 왕으로 삼으신다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아도니야가 스스로 높여 왕이 되었으니 이 일이 어찌된 것입니까?”라고 묻자 다윗이 정신을 차리고 솔로몬을 기름부어 왕으로 삼았습니다.
이제 아도니야와 요압장군이 반역자가 된 것입니다. 그리고 이 사람들이 제단의 뿔을 붙잡았습니다. 당시에는 솔로몬이 그들을 죽이지 않았으나, 열왕기상 2장에 보면 아도니야가 아버지 다윗의 동녀 수넴여인 아비삭을 아내로 삼고자 했을 때 솔로몬이 그를 처단하였습니다. 아버지의 여인을 아내로 구한 것은 죽어 마땅하다고 판단한 것입니다. 제단 뿔은 은혜의 상징입니다.
번제단에서 희생제물은 어떻게 드리는 것일까요? 먼저 죄 지은 사람이 죄를 용서받기 위해 제물을 가지고 성막 문을 열고 들어옵니다. 이 때 부유한 사람은 소를 가지고 오고, 중산층은 양이나 염소, 빈민들은 비둘기를 가지고 옵니다. 희생제물을 가지고 성막 문에 들어왔다는 것은 이것이 하나님께 드린 바 되었다는 의미를 갖습니다. 그래서 성막 문 안으로 들어왔는데, 생각이 바뀌어서 제물을 도로 가지고 나가겠다고 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어떤 분은 헌금을 드리고 나서 1년 후, 낸 헌금을 돌려달라고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드렸던 헌금을 돌려받으면 그 사람에게 절대 복이 되지 않습니다. 희생제물을 가지고 일단 성막 문에 들어갔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소유가 되는 것입니다. 들락날락 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죄 용서함을 받기 원하는 사람이 자기 손으로 희생제물의 머리에 안수를 합니다. 그러면 자기 죄가 제물에게 전가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제물을 죽입니다. 가죽을 벗기고 각을 뜨고 내장과 기름을 분리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각을 뜨고 각 제사별로 하나님께 드립니다. 번제의 경우, 가죽은 제사장이 가지고 나머지를 통째로 태웁니다. 그리고 속죄제, 속건제는 기름과 내장만 태웁니다. 그 가운데는 제사장이 가슴부위와 뒷다리부위의 고기를 취해 요제와 거제를 드린 후 먹기도 합니다. 화목제의 경우, 경배한 사람이 사람들과 함께 나눠 먹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속죄제나 속건제의 경우, 경배한 사람의 몫은 없습니다. 모두 제사장 몫이 되는 것입니다.
희생제물을 태울 때, 어떤 경우는 다 태우기도 하고 다른 경우에는 기름이나 내장만 태우기도 합니다. 이렇게 제사마다 방법이 조금씩 다르지만 기본적으로 제물을 태우기 위해서는 번제단의 그물을 사용해야 합니다. 그물은 놋으로 만든 망의 형태입니다. 놋망의 네 모퉁이에는 놋망을 움직일 수 있도록 네 개의 놋고리를 만들었고, 여기에 채를 꿰어 번제단을 운반하는데도 사용하였습니다. 이 채 역시 싯딤나무로 만들어 놋을 입힌 것이었습니다.
이 그물은 번제단의 높이 중간지점까지 올라오게 만들라고 하셨습니다. 즉 번제단의 중간지점인 1.5규빗(약 67.5cm)까지 올라오도록 만든 것입니다. 이렇게 함으로써 그물의 윗부분에는 제물을 놓고, 그물의 아랫부분에는 나무를 벌려 놓아 하나님이 내려주신 불로 불을 붙일 수 있도록 한 것입니다. 그렇게 번제물이 타서 하나님께 향이 올라가게 되는 것이 이스라엘의 제사입니다.
제사장의 일은 아주 힘든 노역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일반적으로는 제물을 가지고 온 사람이 제물의 각을 뜨곤 했지만, 정기 제사는 제사장이 잡았습니다. 조석으로 짐승을 잡고, 제물을 놋망 위에 올리기 위해 135cm나 되는 높이로 고기를 들어야 하고, 또 중간 높이까지 잘 내려놓아야 합니다. 그리고 줄로 제단 뿔에 고기를 묶어 고정시켜야 합니다. 그러니 제사장의 일이 대단히 많은 것입니다. 절대로 쉬운 일이 아닙니다. 제가 올해로 30년째 사역을 해오고 있는데, 12년은 신학교 교수로, 18년은 목회자로 사역을 했습니다. 그런데 교수생활은 남이 보기에 어려워보여도 상당히 쉬운 반면 목사생활은 남들이 보기에 쉬워 보여도 대단히 힘들고 어렵습니다. 고기를 잡고 들고 놓고 뿔에 묶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지 않습니까? 제사장은 육체적으로도 대단히 힘든 일을 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번제단에 필요한 보조도구는 다섯 가지가 있었습니다. 제물을 태운 후 찌꺼기를 모아 담는 ‘통’(Pan)이 있고, 재를 퍼서 통에 담을 때 쓸 ‘부삽’(Shovel)이 있습니다. 그리고 피를 받아서 옮기는데 필요한 ‘대야’(Basin)가 있고, 고기를 옮길 때 필요한 ‘갈고리’(Hook)가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성막 내에서 불을 쓰는 곳이 두 군데가 있는데, 번제단과 성소의 분향단입니다. 그래서 번제단에 있는 불을 분향단으로 옮겨야 하는데, 여기에 필요한 기구가 ‘불똥그릇’(Firepan)입니다. 이 모든 보조기구들은 놋으로 제작되었습니다.
그러면 번제단의 영적인 의미는 무엇일까요? 번제단에 사용되는 제물, 그물, 채, 제단 뿔 모두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키고, 예수 그리스도가 희생제물이 되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택한 백성들의 죄가 사함 받게 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번제단은 구약의 십자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죄를 심판하시는 하나님의 공의와 죄를 용서하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만나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죄를 반드시 심판하시되 죄 지은 사람의 죄는 용서하시고, 대속제물을 향해 심판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번제단의 희생제사가 없이 아무도 하나님이 계신 성소와 지성소로 나아갈 수 없는 것입니다. 번제단은 십자가이고, 예수 그리스도의 피가 내 죄를 대신 속해 주셨다는 믿음 없이는 어느 누구도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는 사실을 그림처럼 보여줍니다. 천국은 착한 사람들이 가는 곳이 아닙니다. 이 세상에 어떤 사람도 천국에 들어갈 만큼 착한 사람은 없습니다. 훌륭한 사람이 가는 곳도 아닙니다. 천국은 죄를 많이 지었을지라도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어 죄 사함 받고 성령 받은 사람이 갈 수 있는 곳입니다. 번제단을 통과한 사람은 지성소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Ⅱ. 성막 뜰의 구조와 그 의미
성막 뜰은 모세 성막과 솔로몬 성전 사이에 차이가 있습니다. 솔로몬 성전에는 두 종류의 뜰이 있습니다. 바깥 뜰(Outer Court)과 안 뜰(Inner Court)입니다. 바깥 뜰은 백성들이 하나님을 경배하고 찬양할 수 있는 곳이었고, 제물을 사고 팔 수도 있는 장소였습니다. 그리고 안 뜰은 제사장이 희생제사를 드리는 곳이었습니다. 그러나 모세 성막에는 이런 구별이 없이 하나의 뜰로 구성되어 있었고, 백성들과 제사장들이 어우러져 함께 희생제사를 드렸습니다.
성막 뜰은 5규빗 높이의 성막 울타리로 둘러쳐져 있었습니다. 세마포장이라고 하는데, 마(Linen)와 같은 재질이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성막 울타리는 북쪽과 남쪽에 기둥이 20개씩있고, 동쪽과 서쪽에 10개씩 도합 50개의 기둥에 흰색의 세마포장으로 둘러쳐져 있었습니다. 길이는 남북이 각각 100규빗(45m)씩이고, 동서는 각각 50규빗(22.5m)씩입니다. 성막의 문은 울타리 동편으로 열린 매우 아름다운 문이고, 제1앙장의 재료와 같습니다. 청색, 자색, 홍색실로 만든 것입니다.
그러면 기둥 60개는 무엇으로 만들었을까요? 많은 성경주석가들이 이 기둥은 놋기둥이라고 해석하지만, 출애굽기 38장 29절에 의하면 하나님께 드린 놋의 중량이 70달란트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놋 70달란트 가지고는 60개의 기둥을 만드는데 턱없이 부족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또 출애굽기 38장 25절에 “조사를 받은 회중의 드린 은은 성소의 세겔대로 일백 달란트와 일천칠백칠십오 세겔이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성막건설에 은이 100달란트가 들었던 것에 비하면 놋은 적게 들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놋은 기둥의 받침을 만드는데 사용되었을 것이고, 기둥 자체는 싯딤나무로 만들어졌을 것임이 더욱 논리적인 해석입니다. 그러니까 받침만 놋으로 만든 것입니다. 기둥에는 성막 울타리 세마포장을 걸 수 있는 ‘은갈고리’(Hook)와 기둥과 기둥 사이를 연결하는 ‘은가름대’(Band)를 만들었고, 기둥과 세마포장을 든든하게 고정시키는 ‘말뚝’(Peg)은 놋으로 만들었습니다.
구약학자인 월터 카이저의 말에 따르면 성막 울타리에는 네 가지 목적이 있었다고 합니다. 첫째는 불법한 자들의 접근을 막고, 둘째는 맹수의 침입으로부터 보호하고, 셋째는 이방인들과 하나님의 백성들을 구별하고, 넷째는 단 한 개의 문을 통해서만 하나님께 나아올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함이라고 했습니다.
성막의 동쪽은 문이 있고, 기둥 10개 가운데 양쪽 끝 6개는 15규빗씩 세마포장으로 울타리를 쳤고, 가운데 4개 기둥에는 아름답고 화려한 성막의 문을 걸어놓았습니다.
결론
성막에 사용된 재료와 색은 모두 동일한 영적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금은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 싯딤나무는 예수 그리스도의 인성, 은은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 놋은 예수 그리스도가 대신 받으신 심판, 흰색은 예수 그리스도의 죄 없으심, 자색은 예수 그리스도의 왕권, 청색은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 홍색은 예수 그리스도의 종 되심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성막의 유일한 문은 요한복음 10장 9절에 “내가 문이니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들어가면 구원을 얻고 또는 들어가며 나오며 꼴을 얻으리라”는 말씀에서 실체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예수 그리스도라는 문을 통과해서 그 분이 나를 위해 몸을 찢으시고 피를 흘리신 사실을 믿으면 그 사람은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고, 하나님과의 교제가 열리게 된다는 복음의 진리를 웅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구약의 복음은 예표이고 신약의 복음은 실체라는 점에서 차이가 있을 뿐이지 내용은 동일합니다. 번제단과 희생제물과 그 피는 복음의 내용을 고스란히 담고 있는 것입니다.
성막의 뜰은 오직 택한 백성인 이스라엘 백성들만 들어갈 수 있는 곳입니다. 성막의 뜰에서 드리는 제사는 이스라엘 백성을 위한 제사입니다. 이것은 온 세상 모든 사람을 위한 제사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택한 백성을 위한 제사입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흘리신 피는 온 세상 모든 사람을 위한 것이라고 말을 합니다. 그리고 이로 말미암아 우리의 모든 죄가 다 사함을 받았다고 주장합니다. 이것이 자유주의 신학의 근간입니다.
저는 아무리 성경을 읽어봐도 아르미니우스주의 신학에서 말하는 일반속죄 내지 보편속죄를 믿을 수가 없습니다. 성경은 그런 교리를 지지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지옥에 가는 이유가 “믿지 않아서”라고 말을 합니다. 그러나 빚을 다 갚았다면 믿음이 있고 없고가 무엇이 중요하겠습니까? 그러니까 이런 식으로 접근하면 믿음이라는 것이 사람의 공로가 되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예수님은 온 세상 모든 사람의 죗값을 다 갚아주신 것이 아니라는 결론에 다다르게 됩니다. 그러니까 이는 비논리적인 주장인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영원 전에 택하신 사람의 죗값을 갚아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칼빈이 주장한 제한적 속죄가 성경적인 교리입니다.
성막 뜰에 들어갈 수 있는 사람은 이스라엘 백성들인데, 그러면 이방인들은 들어가지 못하는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이방인들 중에도 택함을 받은 사람은 들어갈 수 있습니다. 이방인들 중에도 여호와 하나님을 믿고 희생제물의 피가 자기의 죗값을 사한다는 사실을 믿는 사람은 들어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번제단이 동서남북을 향해 정사각형으로 되어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택한 백성은 이스라엘뿐만 아니라 미국, 중국, 인도, 한국사람 중에도 있는 것입니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해주면 그것이 믿어지는 사람들입니다. 왜 믿어질까요? 예수 그리스도가 모두 갚으셨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죽어도 믿을 수 없다고 말합니다. 그런게 어떻게 믿어지냐고 반문합니다. 그리고 죽을 때까지 믿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그 사람의 죗값을 갚은 적이 없기 때문에 믿어지지 않는 것입니다.
번제단은 결국 예수 그리스도께서 유대인, 이방인 할 것 없이 하나님의 택한 백성들의 죗값을 갚고 그들을 구원하신다는 로마서의 대원리를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죄를 심각하게 여기시는 하나님 앞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제사를 믿고 은혜의 문으로 들어가 생명의 떡을 먹고, 향과 같은 기도를 드리며, 순금등대같은 빛을 비추는 인생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 모두 그런 삶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게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놋 제단
출 27:1-8 / 임덕순 목사
9미터나 되는 성막 울타리의 문을 열고 들어가면 그 안에는 무엇이 있을까요? 가장 먼저 나타나는 것이 번 제단입니다. 그리고 뒤에는 물두멍이 있고 그 뒤에 성막 본건물의 문이 위치하고 있습니다. 오늘은 놋으로 만든 번 제단에 대하여 공부하면서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계시를 받고자 합니다.
이 제단은 너비가 5 규빗(2.25m)인 정사각형이고 높이는 3규빗(1m30cm)으로 상당히 큽니다. 8절에 보면 이 단은 산에서 내가 보여준 대로 널판으로 만들되 속이 비게 하고 놋으로 싸고, 채에 꿰어서 어깨에 메고 다니게 하라고 하셨습니다. 이동식 제단입니다. 그래서 그들이 여행하면서 어디를 가든지 이 제단을 메고 다니며 제사를 드렸고, 하나님은 어디서나 그들의 제사를 받으시고 죄를 사해 주셨습니다. 이것은 앞으로 우리를 찾아오실 그리스도의 증표였습니다. 앞으로 움직이는 제단이 너희에게 오셔서 너희 죄를 사하리라는 예고입니다. 예수님은 움직이는 제단이신데, 우리에게도 찾아오셔서 죄를 사해주시고 믿음을 주시고, 믿는 자에게 영생을 주시는 분입니다.
1. 제단의 의미
제단 이란 원어는 “들려지다”는 뜻을 가졌습니다. 제단은 제물을 들어서 올려놓고 하나님께 불살라 드리는 곳이라는 뜻이고, 그 제단위에서 제물을 드릴 때에도 요제나 거제 등은 그 제물을 쳐들어서 흔들었기 때문에 그런 단어를 사용한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 ‘들려지다.’ 라는 단어도 그리스도를 계시하는데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요12:32에 보면, “내가 땅에서 들리면 모든 사람을 내게로 이끌겠노라.”고 하셨습니다. 주님은 당신이 놋으로 만든 번제단에서 높이 들렸던 제물처럼 높이 들려야 한다는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요3:14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민수기(21:8)에 나오는 기록을 보면 이스라엘이 광야 길을 갈 때 날마다 하나님의 은혜의 보호를 받고, 날마다 기적의 음식을 먹었으면서도 감사 하지는 않고 도리어 불평하고 원망만 했습니다. 하나님은 기가 막히고 어이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믿는 자와 불신자를 구분하기 위해서 독사들이 나와서 그들을 물어뜯게 하였습니다. 그들은 온 몸에 독이 퍼져 죽게 되어 살려달라고 아우성 쳤습니다. 모세가 그들을 위해서 기도했더니 하나님은 모세에게 아주 엉뚱한 처방을 해 주셨습니다. “너는 놋쇠로 뱀 모양을 만들어 장대에 높이 매달아라. 그리고 사람들에게 외치기를 뱀 독이 올라서 죽는 사람들은 장대에 높이 들린 놋 뱀을 바라보면 독이 사라지고 산다.”고 전하라 하셨습니다. 모세가 생각해도 이해가 안 가는 처방이었지만 모세는 하나님의 말씀은 언제나 옳고 절대적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에 그대로 순종하였습니다. 그랬더니 그 놋 뱀을 바라본 자는 살았고 이해가 되지 않는다고 바라보지 않은 사람은 다 죽었습니다. 하나님은 똑똑한 사람을 구원하시는 것이 아니라 자기보다 똑똑하고 선하신 하나님을 믿는 사람을 구원하십니다.
주님이 요한복음 3:14에서 하신 말씀은 예수님이 제단위의 제물처럼, 광야의 놋 뱀처럼 높이 들리신다는 것입니다. 후대 사람들이 골고다 언덕에 세워진 십자가에 높이 들리신 그리스도를 바라보아야 살 것을 계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제물은 왜 높이 들려야 했습니까? 제물은 사람과 사람 사이에 주고받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드리는 것입니다. 죄인에게 형벌을 내리시는 하나님이 보셔야 용서가 되었기 때문에, 제물은 하나님께서 바라보시라고 높이 들어야 했습니다. 제단위에 드리는 제물은 흠 없는 양이나 짐승들인데, 그 피는 제단 뿔에 바르고 남은 피는 그 제단아래 붓고 그 제물을 높이 들었습니다. 그렇게 함으로서 그 제물을 드리는 이와 하나님 사이에 화목이 이루어진다고 믿었습니다. 이것은 그리스도가 자신의 피를 십자가아래 다 쏟고, 높은 십자가에 매달려 죽임을 당하심으로 우리의 죄를 대속하시고 하나님과 우리사이의 화목을 이루실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2. 제단의 위치가 주는 계시
이 제단은 성막의 문 바로 앞에 있어서 밖에서 성막으로 들어가려면 꼭 거쳐야만 되는 곳에 위치하고 있었습니다. 이것도 모세가 알아서 배치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일러주신 그대로 배치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위치도 매우 중요한 의미가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예수님은 죄인과 하나님의 사이 중간에 계신분이다. 그분이 우리의 중보가 되신다는 것입니다. 그 어떤 사람이라도 예수를 통하지 않고는 하나님께로 들어갈 수가 없다는 사실을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14:6) 이것은 변경할 수 없는 진리입니다. 다른 길이 없고 다른 구주가 없습니다. 기독교에만 구원이 있고 그래서 불신자는 모두 전도의 대상인 것입니다.
천하에 사람이 수 십 억이 살고 있고, 이전 시대부터 살아온 모든 사람을 다 합하면 수 백 억이 넘겠지만, 그 많은 사람가운데서 죄 때문에 영생과 행복으로부터 영영 멀어진 인간을 영생의 하나님께로 데려다 줄 사람은 단 한명도 없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그 일을 맡기려고 단 한분 예수님을 보내셨습니다. 하나님이시면서 인간의 몸을 입으신 그분이 하나님과 인간 사이를 이어주는 역할을 하셨습니다. 그런 사람을 중보자라고 부릅니다.
중보자는 하나님과 통해야 하고 인간과도 통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근본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하나님과 통하고, 우리의 육체를 입고 우리의 고초를 다 겪으신 분이기에 우리와도 통하는 분입니다. 이분은 우리를 하나님께 인도하기 위해서 우리 죄의 형벌을 당신이 당하시고 희생제물이 되심으로 중보자의 자격을 얻으셨습니다. 그래서 그분만이 우리의 중보자인 것입니다. 하나님이시고, 사람이시며, 죄가 없으시고, 그리고 우리의 죄를 대신하여 죽으신 분이 아니면 그 누구라도 중보자가 될 수 없습니다. 딤전 2:5에 “하나님은 한 분이시오, 또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도 한 분이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라.”고 하셨습니다. 오직 예수 한분 밖에 없다는 선언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이분을 통해야만 용서 받고 하나님 앞에 갈 수 있습니다.
성막 뜰의 문을 들어서면 우선 그 제단이 앞을 딱 가로막고 있었습니다.
제단은 죽지 않은 사람은 가로막고 죽은 사람만 통과시키는 문입니다. 구약 시대에는 제물이 죄인을 대신해서 죽을 수 있었습니다. 나는 죽어 마땅한 죄인인데 짐승이 대신 죽어 주었어요. 저를 용서하시고 받아주세요. 하는 경우에만 통과할 수가 있었습니다. 신약시대에는 예수님이 자기 대신 죽으심을 믿으면 가능합니다. 죽는 것이 무엇입니까? 자기 자존심, 자기 의지, 육신적 논리를 죽이는 것입니다. 그런데 죽지 않은 사람은 이렇게 말합니다. “저기 매단 놋 뱀이 내 몸속에 흐르는 독을 어떻게 제거한단 말인가? 2000년전에 십자가에서 죽은 예수가 오늘 내가 지은 죄를 어떻게 용서한단 말인가? 말도 안돼, 나는 내가 착한 일을 해서 그 공로로 죄를 씻을 거야.” 아직도 이렇게 자기가 살아서 무엇인가를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철저하게 제지하는 것이 십자가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헬라인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유대인들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었지만 구원을 얻는 사람들에게는 구원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신비한 처방이었습니다.
롬9:32에 “기록된바 ‘보라 내가 부딪치는 돌과 거치는 반석을 시온에 두었노니 저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하리라’ 함과 같으니라.”라는 말씀이 있는데, 자기를 죽이고 그리스도를 믿는 자에게는 구원의 반석이 되시지만 자기를 죽이지 않고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자에겐 거치는 돌이 되신다는 말입니다. 그리스도는 믿는 자에게는 구원의 반석이 되지만 믿지 않는 자에게는 부딪치는 돌과 거치는 반석이 된다고 하신 것입니다. 아직도 자기가 대단한 사람인줄 알고 자기의 공로나 선행이나 업적으로 신에게로 가고자 한다면 십자가는 그를 제지하십니다.
여기서 우리의 현실적인 문제 하나를 생각해 봐야 하겠습니다. 우리가 다른 형제들을 위해서 드리는 기도를 중보기도라고 할 수 있을까요? 그래도 될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중보기도란 중보자가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입니다. 중보기도는 중보자만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다른 사람을 위해서 하는 기도를 중보기도 라고 하면 안 됩니다. 우리는 사람과 사람사이의 중매자는 될 수 있겠지만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중보자는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하나님도 아니고 우리가 다른 사람의 죄 값을 치를 수도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요즘 교회마다 ‘중보기도팀’을 만들고 중보기도를 한다고 야단들입니다. 그분들이 성도들을 위하여 중보기도를 한다고 합니다. 기왕이면 남을 위해서 하는 기도를 ‘중보기도’ 라고 하면 체면도 서고, 대단한 일을 하는 것처럼 생각되어 호응이 높을 것은 분명합니다. 흥행을 위해서는 그런 이름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중보자가 될 자격이 없는 사람이 어떻게 중보기도를 한단 말입니까? 성경적으로 옳지 않고 참람한 일을 하면 되겠습니까?
2000년 9월에 모인 85회 총회는 중보기도라는 말을 사용하는 것은 성경적이지 않다고 금지하는 결의를 했습니다. 그런데도 한국교회는 중보자로 봇물이 터지는 시대를 맞았습니다. 신학생들도 분별없이 그 단어에 매달립니다. 왜들 그럴까요? 인간도 자기 속에 있는 잠재력을 일깨우고 계발하면 신이 될 수 있다고 하여 인간의 자존심을 한껏 높이며 신에게 도전하게 하는 뉴에이지사상의 결과라고 생각합니다. 사단이 하와에게도 그렇게 해서 무너뜨렸습니다. 교회가 뉴에이지 사상은 비판하면서도 뉴에이지 사상에서 출발한 ‘중보기도’라는 단어를 다 사용하고 있으니 이는 참 아이러니한 사실입니다.
제단은 하나님께 나아가려는 죄인을 가로막는 곳입니다. 죽어야만 거기를 통과할 수 있습니다. 살아서는 아무도 그 앞을 지나가지 못합니다. 다만 임시적으로 사람 대신에 짐승을 죽이고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그게 제물입니다. 그런데 남을 위해서 자기가 중보기도를 해주겠다는는 생각을 하는 것은 자기를 죽인 것이 아니라 자기가 대단한 존재가 되었다고 하는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자기가 하나님과 마주 앉아서 다른 사람의 문제를 논하겠다는 교만한 생각을 갖는 것이며 이는 참람한 자세입니다.
요14:6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그리스도를 통하는 것은 자신의 죽음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나는 정말 대책 없는 죄인인데, 내가 필경 죽었어야 하는데, 그리스도가 나를 대신하여 죽으셨군요. 하고 그것을 인정하고, 자신을 죽이고 그분 앞에 엎드리는 것, 주님의 죽음을 자기의 죽음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주님을 통하는 것입니다. 제단을 통과하지 않고는 성막으로 갈 수가 없고, 그리스도를 통과하면서 자기를 포기하지 않고는 그 누구라도 하나님께 가지 못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정하신 원칙입니다.
그러므로 남을 돕는 기도를 ‘중보기도’라고 하는 것은 맞지 않는 말이고, 심각히 교만한 발상입니다. 딤전2:1에서 “간구와 기도와 도고와 감사를 하라.”고 도고라는 올바른 이름을 주셨습니다. 저는 평생 나 자신보다 다른 사람, 즉 성도들을 위한 기도를 하면서 사는 사람이지만, 한 번도 내가 중보기도를 한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습니다. 나는 중보자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도고라는 말이 어려워서 못씁니까? 중보라는 말은 쉬운 말입니까? 도고는 별로 대단한 것 같지 않고, 중보는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니까 나도 그 일 좀 해보겠다는 교만한 마음이 사람들을 움직인 결과입니다. 이번 주 기독신문에 신선한 보도가 있었습니다. 부산에 있는 부전교회가 새로워지고 있다는 내용이었는데, 제 눈에 띈 것은 ‘도고기도팀’을 두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여러분들도 서로 돕는 도고의 기도를 많이 하시기 바랍니다.
3. 뿔이 달린 제단
아마 전 세계에 있는 제단 중에서 네 귀에 뿔이 달린 제단은 모세가 만든 제단 밖에 없을 것입니다. 왜 하나님은 제단에 뿔을 달라고 하셨을까요?
제물 된 짐승을 도망치지 못하게 잡아 매기 위해서일까요? 이미 죽여서 각을 뜬 제물을 제단에 바쳤기 때문에 그럴 필요는 없었습니다. 그러면 왜 그랬을까요? 이것 역시 그리스도를 통해서 나타날 일을 계시합니다.
1) 뿔은 능력과 힘을 상징합니다.
짐승의 뿔은 그 짐승의 힘의 상징입니다. 제단의 뿔에는 죽은 제물의 피를 바르게 되어있으며(출29:12), 쫓기는 사람이 성전으로 달려가서 제단 뿔을 잡으면 절대로 죽이지 못하고 살리는 법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솔로몬에게 반역하였던 아도니야가 제단 뿔을 붙잡아서 살았고, 다윗은 “하나님은 나의 구원의 뿔이시라.”고 고백했습니다(시18:2).
죽게 된 사람을 살리는 능력이 제단 뿔에 있다는 것입니다. 무한한 복음의 능력, 천하의 만민을 다 구원할 수 있는 무한대한 능력, 어떠한 인간도 다 변화시킬 수 있는 놀라운 능력이 제단에 있다는 것입니다. 롬1:16에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 아니 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고 하였습니다. 나를 대신해서 제물 되신 그리스도는 만민을 살리는 능력이라는 뜻입니다.
2) 네 뿔은 네 방향을 향하여 있었다.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돌아가셔서 우리의 죄를 사하시고, 부활하셔서 우리를 구원하는 위대한 능력이 되셨다는 이 소식은, 동서남북에 전해야 할 참으로 좋은 뉴스입니다. 뉴스라는 영어는 North, East, West, South의 첫 자를 합한 말입니다. 동서남북 모든 방향에 퍼져야할, 대단히 놀라운 소식이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나를 대신하여 높이 들려 죽으시고 그 공로로 죄인인 나를 살리셨다는 소식이라는 말입니다. 이 소식은 전 세계에 살고 있는 모든 사람을 위한 것이며, 모든 인류에게 똑같이 적용되고 해당되는 이 세상 그 누구라도 살리고, 누구에게도 기쁜 소식이 될 것이라는 예고입니다.
이 복음이야 말로 Good News이며, 이 복음을 전하는 자들의 발이야 말로 가장 아름답고 복된 발입니다. 주님은 이 사실을 온 세상 모든 족속에게 전하고 가르쳐서 제자를 삼으라고 명령하셨고, 우리 교회에 부과된 본질적인 사명입니다. 복음을 전하는 일에 최선을 다하는 신실한 성도가 됩시다.
4. 나무로 짜고 겉은 놋으로 싸라
제단은 2m25cm×2m25cm 이나 되는 대형 단입니다. 거기는 족히 황소 한 마리를 각을 떠서 올려놓을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단의 구조를 보면 좀 특이합니다. 속은 아주 단단한 쉬띰나무로 만들어야 했고, 겉은 놋쇠로 싸서 밀봉하게 하셨습니다. 쉬띰나무는 그리스도가 가지셨던 인성을 상징합니다. 그 나무 제단위에 불을 붙이고 짐승을 태웁니다. 그러면 얼마나 뜨겁겠습니까?
그리스도의 연약한 인성에 하나님의 가혹한 진노가 떨어질 것을 예고합니다. 패션오브크라이스트 라는 영화를 통해서 예수님이 십자가를 질 때 얼마나 큰 고통을 당하셨는지를 우리는 실감 할 수 있었습니다. 주님은 십자가를 지시지 전에 이미 수많은 채찍을 맞았습니다. 물론 당하신 모욕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예수님을 친 채찍은 가죽으로 만든 것이고 살에 맞는 끝에는 금속이나 뼈 조각을 달아놓았기 때문에 채찍을 치고 잡아당기면 살점이 줄줄이 뜯어진다는 것입니다. 평소에도 자주 금식하시고 피곤하게 사역을 하셨기 때문에 쇠약하셨던 주님의 몸은 그야말로 만신창이가 되었습니다. 살이 찢기고 터져서 온 몸은 피범벅이 되었습니다. 그런 모습으로 그 무거운 십자가 나무토막을 짊어지고 골고다 언덕을 채찍 맞으며 올라가셨고, 언덕에 도착하자마자 손과 발에 못을 박아 십자가에 매달았습니다. 우리가 바늘만 찔려도 고통을 참을 수 없고, 문에 손만 치여도 펄쩍펄쩍 뛰는데 예수님이 당하신 고난은 우리가 도무지 짐작할 수도 없을 정도였을 것입니다. 우리를 위해서 그 모진 고난을 작정하고 감당하신 것입니다.
놋쇠는 열전도가 아주 높은 금속입니다. 제단 위에 올려놓은 짐승이 재가 되도록 몇 십분, 몇 시간씩 태우니 제단의 놋쇠는 벌겋게 달아오르고 놋으로 싼 제단 속의 나무는 놋쇠만큼 뜨거워집니다. 그런데 아무리 열이 높아도 제단 속의 나무는 타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놋으로 싸서 밀폐했기 때문에 그 속에 산소가 들어가지 않으니까 놋 판 속의 나무는 열만 한없이 높아지지 불에 타지는 않는답니다.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우리 대신 받으신 고난이 얼마나 엄청난 것이었나를 보여주고, 또한 그런 고통과 사망을 당했음에도 불구하고 그가 아주 소멸되는 것이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다는 것을 예표하고 있습니다. 너무 높은 고열에 벌겋게 달아오르지만 나무는 타지 않도록 놋쇠로 밀봉하라고 하신 것은, 우리를 대신하여 모진 형벌을 다 받으셨고, 죽으시나 영원히 소멸되지 않고 다시 살아나실 그리스도의 부활 사실을 계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성경은 아주 섬세하게 계시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대충 읽으니까 읽으면서도 그리스도를 발견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저는 요즘 출애굽기 설교를 하면서 염려가 하나 생겼습니다. 제 설교를 듣는 분들 중에 “아, 그게 그런 뜻이었구나. 그런 계시가 거기 숨어있었네. 하나님의 말씀은 역시 완벽해, 요즘 나는 말씀의 맛에 빠졌어.” 하는 성도가 나오는 것은 만 번 좋은데, 혹시나 “목사님은 어떻게 그렇게 잘 갖다 붙이시는지, 그게 정말 그런 뜻이었을까? 목사님이 억지로 갖다 붙이시는 것은 아닐까?” 라고 생각 하는 분이 한분이라고 계실까 하는 염려입니다.
그러나 성경을 보십시오. 요5:39에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 하거니와 이 성경이 내게 대하여 증거 하는 것이로다.” 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성경은 예수님 당시에 있었던 유일한 성경인 구약을 말합니다. 구약성경의 모든 말씀이 예수님에 대하여 증거 하는 책이라고 주님이 직접 설명해 주셨습니다.
히 1:1-2를 보시면 더욱 분명해집니다. “옛적에 선지자들로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이, 이 모든 날 마지막에 아들로 우리에게 말씀하셨으니, 이 아들을 만유의 후사로 세우시고 또 저로 말미암아 모든 세계를 지으셨느니라.” 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천지의 창조하신 분이고 상속자이신데, 옛날에 족장시대나 선지자 시대에는 마치 퍼즐 조각처럼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들로 말씀하시더니 마지막 날, 즉 때가 되자 그 아들을 직접 보내어 말씀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구약의 모든 내용은 그리스도에 대한 부분 계시입니다. 이것을 구약의 다른 부분과 연결하고 신약의 말씀으로 증명하면 구약의 본 내용이 밝히 드러나는 것입니다. 구약에서 예수님만 찾는 것이 지나친 것이 아니라, 구약을 읽으면서도 거기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발견하지 못하면, 그게 성경을 잘못 읽은 것입니다.
우리가 받은 구원이나 복음은 값싼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구원을 얻기가 쉬우면 쉬울수록, 하나님이 준비하신 부분이 너무나 크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가 오실 것을 얼마나 많이 예고하였으며, 그가 하실 일을 얼마나 자세하게 예언하셨습니까? 그를 준비하시고, 그를 죽으시게 하시고, 그를 다시 살리시고, 그를 당신 우편에 다시 올리시고, 그리고 성령을 보내어 우리에게 믿음을 일으켜 믿는 일까지 도와주십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수고를 알기나 합니까? 그리스도를 믿기만 하면 구원을 얻는다는 이 사실은 결코 값싼 것이 아닙니다. 너무나도 큰 대가를 들여 준비해 주신 일이기에, 우리는 그저 받아들이고 믿어 순종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성경이 명확히 증언하는 구주이십니다. 철저히 믿고 사명감 있는 전도자가 되어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을 체험하며 사는 성도가 되시기 바랍니다.
주인 의식으로 섬기십시오
출 27:1-8 / 박찬길 목사
미국에 TV 저널리즘의 제왕이라고 불리는 '월터 크론카이트'라는 분이 있습니다. 세계적인 언론가이고 CBS 앵커 출신입니다. 이 분에게 어느 기자가 이런 질문을 했습니다. "당신의 성공 비결이 뭡니까?" 이 분이 한 마디로 대답합니다. "방송이 나를 위해 있으니까요" 이 말의 의미를 이해하시겠어요. 이 한 마디 속에 굉장히 중요한 의미가 담겨져 있습니다. 이 분은 자신을 위해서 직장이 있다고 생각하고 살았어요. 40여년 동안 CBS와 인연을 맺으면서 '이 방송국은 나를 위해 있는 것이다' 이런 생각을 하며 일했다는 겁니다. 주인의식을 가졌다는 겁니다.
요즘 우리 사회에 이구동성으로 하는 말이 있습니다. 주인의식이 없다. 주인의식이라는 말은 어떤 일이든 자기가 주인이라는 것을 인식하고, 주인의 마음을 품고 행동하는 것을 말하지요. 안타깝게도 직장에서도 주인의식이 없는 직장인이 많다고 말하고 학교에서도 주인의식이 없는 학생이 많다고 말하고, 심지어 교회에서도 주인의식이 없는 교인이 많다고 말합니다.
주인의식 수준이 어느 정도인지 측정하는 몇 가지 기준이 있어서 소개하려고 합니다. 여러분이 스스로 점검해 보시기 바랍니다. 첫째, 받는 만큼만 일한다. 둘째, 시키지 않으면 안 한다. 셋째, 나 외에 무신경하다. 넷째, 우리의 목표가 무엇인지 모른다. 다섯째, 조직의 성장이나 발전에는 관심이 없다. 두 개 이상 YES가 나오면 경고이고, 3개 이상 YES가 나오면 주인의식과는 거리가 먼 사람입니다.
저는 우리 교인들이 직장생활을 할 때에 주인의식을 갖고 일하면 좋겠습니다. 여러분은 받는 봉급보다 더 많이 일하세요. 아르바이트하는 분들이 계세요? 시간당 버는 것보다 더 많이 일하세요.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에 자존심이 있잖아요. 내가 어떻게 일하느냐에 따라서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기도 하고 가려지기도 합니다. 그러니 어떻게 받은 것만큼 일합니까? 주인의식을 갖고 받는 것보다 더 열심히 일해서 주인을 복 받게 만들어주세요. 요셉 덕분에 보디발의 집이 복을 받고 애굽 나라가 복을 받은 것처럼, 주인의식을 갖고 일하는 여러분 덕분에 직장이 복을 받고 사장이 복을 받을 수 있도록 힘쓰시기 바랍니다.
교회에도 주인의식을 가지고 섬기는 교우들이 많았으면 좋겠습니다. 내가 교회의 주인은 아니지만, 교회의 주인은 하나님이잖아요. 내가 주인의식으로 하나님의 마음을 갖고 신앙 생활하는 것이 너무나 중요합니다. 사실 주인의식을 갖고 교회를 섬기는 교우들이 많을수록 교회는 은혜롭게 성장하는데,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은 주인의식을 갖고 교회를 섬기는 자신에게 엄청난 은혜가 된다는 겁니다. 주인의식을 갖고 교회를 섬기는 사람의 삶이 달라진다는 겁니다. 이 교회가 나를 위하여 있다고 생각하고 내가 맡고 있는 사역을 책임지고 섬기면 그만큼 존재의 영역이 커지게 됩니다.
여러분, 우리는 어느 부분에서 주인의식을 갖고 신앙 생활하면 좋을까요? 우리는 하나님이 모든 사람에게 은사를 주셨다고 고백하는 사람들입니다. 이왕이면 받은 은사 부분에서 주인의식을 갖고 섬기면 더욱 좋지 않겠나 생각합니다.
오늘 본문은 구약시대의 성막 제단에 대한 부분입니다. 성막은 하나님을 만나러 가는 약도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성막을 통하여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께 예배를 드렸습니다. 성막 문으로 들어가면 제일 먼저 만나는 것이 번제단입니다. 번제단은 죄인을 정결하게 하는 곳입니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죄인은 하나님께 나아갈 수가 없습니다. 죄를 씻어야만 나아갈 수 있습니다. 구약 시대에 하나님은 죄인인 인간이 성막에 들어와서 제일 먼저 죄를 씻도록 하셨습니다. 번제단에서 짐승을 죽여서 불에 태워서 하나님께 올려드리면 하나님께서 받으셨습니다.
오늘 성경 3절에 보면 번제단에서 제사를 드릴 때에 다섯 가지의 보조기구가 있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죄를 용서받기 위하여 번제를 드릴 때에 다섯 가지의 기구를 사용하라고 말씀하십니다. 3절에 나오는 하나 하나가 모두 중요하고 필요한 기구들입니다. 이것은 교회의 다섯 일꾼의 모습이라고 말할 수가 있습니다. 우리가 신앙생활 할 때에 다섯 가지 부분에서 주인의식을 갖고 교회를 섬기면 참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오늘 설교는 우리가 평소에 잘 듣지 못하던 내용인데, 성경공부 하듯이 하나씩 살펴보겠습니다. 강의와 같은 설교가 될지 모르지만 우리 모두에게 은혜로운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첫째로 재를 담는 통이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께 나올 때에는 제물이 있어야 합니다. 소나 양이나 염소를 번제로 드려야 했는데, 그 제물을 번제단에서 태웁니다. 제물을 태우고 나면 재가 남게 되지요. 이 재가 쌓이면 담아 두는 통이 재를 담는 통입니다. 재를 담는 통이 없으면 광야 바람에 재가 날려서 성막 안이 더러워지고 지저분해 질 것이 아니겠어요. 백성들에게 건강상으로도 좋지 못하고요. 그래서 하나님은 재를 담아 두는 통을 만들어서 재를 담았다가 진밖에 버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에 의하면 재를 버리는 것은 영광스러운 일이라서 경쟁자가 많았다고 합니다. 이 일은 제사장들이 해야만 했는데, 서로들 먼저 하려고 했다는 겁니다. 나중에 산헤드린에서는 제비를 뽑아서 당번을 정하곤 했답니다. 뽑힌 제사장에게는 번제단에 올라가서 일하는 특권이 주어지게 된 겁니다.
여러분, 재를 담는 통은 요즘 교회에서 무엇을 의미할까요? 어떤 교인을 말할까요? 문제를 담는 교인을 말합니다. 교회에 못된 요소들을 꼭 안고 있다가 혼자서 어디론가 없애버리는 아름다운 교인을 말합니다. 요즘 교회에 재를 담는 통과 같은 교인이 필요합니다. 이와 같은 교인이 없으면 교회가 문제 때문에 정말 문제가 될 거예요. 이 모임에 가도 문제가 돌아다니고 저 모임에 가도 문제가 떠돌아다니겠지요. 그러나 문제를 담는 통과 같은 교인이 있으면 걱정 없습니다. 마음에 담아서 다른 사람에게 퍼지지 않게 하니 문제될 것이 없지요.
교회 성장학에서는 문제가 많은 교회가 건강하게 성장한다고 말합니다. 문제가 많다는 것은 일을 많이 한다는 말이거든요. 왜 일할 때에 문제가 생기기도 하잖아요. 만일 문제가 생기는 것이 두렵다면 일하지 않으면 됩니다. 일하지 않으니 문제도 없을 것이 아니겠어요. 교회가 일하는 교인이 없으면 어떻게 되나요? 죽습니다. 일하지 않는 교회는 퇴보합니다. 이것은 교회의 바람직한 현상이 아닙니다.
요즘 어떤 사람들은 문제없는 교회를 찾으려고 합니다. 여러분이 대답해 보세요. 이 세상에 문제없는 교회가 있을까요? 없을까요? 있다면 천국에 있을 겁니다. 이 세상에 문제없는 교회는 하나도 없습니다. 우리 교회도 문제가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교회는 죄인이 모인 곳이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죄인만 오는 곳이에요. 생각해 보세요. 죄인이 모였으니 문제가 없을까요? 착각이지요. 죄인이 모였으니 문제가 여기저기에 나타납니다. 얼마나 많은 문제가 있는지 모릅니다.
교회는 죄인이 의인으로 거듭나면서 재가 떨어집니다. 특별히 사역하다가 보면 문제가 생기는데 그것이 재입니다. 비록 믿음으로 의인이 되긴 했지만 그렇다고 본질적으로 의인이 된 것은 아니기 때문에 문제가 생길 수 있다는 말입니다. 이 때에 문제를 다른 사람에게 퍼트리지 않고 통에 담는 교인이 필요한 겁니다. 문제가 생길 때마다 덮어주고 기다려주고 이해해주는 마음을 가진 교인이 필요한 겁니다. 이러저러한 문제를 마음의 통에 담아서 밖에 버리는 교인이 필요한 겁니다. 이런 교인이 많을수록 은혜로운 교회가 되는 것이고, 재를 담는 통과 같은 교인이 많을 때에 교회는 건강하게 성장하는 줄로 믿습니다.
둘째로 부삽이 있습니다.
번제단에서 제물이 타면 재가 남는데 이 때에 사용되는 것이 부삽입니다. 부삽은 두 가지의 역할을 하는데, 하나는 재가 석쇠에 붙은 것은 긁어내는 역할을 합니다. 다른 하나는 재를 담아서 통에 넣는 역할을 합니다. 하나님은 부삽을 만들어서 이런 일을 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여러분, 부삽은 어떤 교인을 말할까요? 일하는 교인입니다. 교회가 성장하고 부흥하면서 찌꺼기와 같은 것이 생깁니다. 믿음의 신앙공동체에서 시험을 받기도 하고 어려운 일을 당하기도 합니다. 고통에 직면하기도 하고 상처를 받기도 합니다. 부삽과 같은 교인은 이러한 것들이 생길 때에 상대방이 모르게 긁어내어서 치유하는 교인을 말합니다. 그 사람이 상처받지 않도록 인격적으로 감싸주면서 위로하면서 그 사람의 마음에 굳어진 것을 긁어내는 교인을 말합니다.
사실 부삽과 같은 역할을 하는 교인이 쉽지 않지요. 왜냐하면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거든요. 교회는 두 종류의 교인이 있다고 하잖아요. 문제가 보이는 교인이 있고 문제가 보이지 않는 교인이 있어요. 일할 것이 보이는 교인이 있고 일할 것이 보이지 않는 교인이 있어요. 보이는 교인은 뭐를 보려고 보려고 해서 보이는 것이 아니라 저절로 보이는 거예요. 보이지 않는 교인은 보려고 보려고 해도 보이지 않지요.
차이가 무엇인지 아세요? 교회를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보이고 손님 같은 사람에게는 보이지 않습니다. 교회를 사랑하면 뭐든지 보이게 되어 있어요. 해야 할 일도 보이고, 힘써야 할 일도 보이고, 감당해야 할 일도 보입니다. 현미경을 썼기 때문에 보이는 것이 아니라 저절로 보이는 거예요.
그러나 손님 같은 교인은 대접받으려는 마음이 있기 때문에 할 일이 보이지 않습니다. 보이는 것은 누가 나에게 대접하나 이것만 보이지요. 여러분이 교회 일하는 것을 보시면 아실 겁니다. 열심히 일하는 교인이 있고 일하지 않는 교인이 있잖아요. 손발로 일하는 교인이 있고 입으로만 하는 교인이 있잖아요. 우리 좋은교회 교인들은 교회를 사랑하기 때문에 해야 할 일들이 눈에 들어오기를 바랍니다.
셋째로 대야가 있습니다.
대야 아시지요? 예전에 세수할 때에 사용하던 대야를 생각하시면 됩니다. 하나님께 드릴 제물에 각을 뜬 후에는 제단에 올려놓는데, 고기를 담아서 나르는 그릇이 대야입니다. 대야는 죄지은 사람을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는 교인을 말합니다. 전도하는 교인이지요. 영혼을 구원하는 성도는 제물을 제단까지 나르는 대야와 같은 교인입니다.
교회 성장학자들의 말에 의하면 어느 교회나 10%의 전도 교인이 있는가 하면 10%의 잠든 교인이 있다고 합니다. 사도행전 1장에 나오는 마가의 다락방에 모인 120명은 가룟 유다를 제외한 예수님의 11제자가 부른 사람들입니다. 그 120명 중에서 12명이 순교했습니다. 10%이지요.
여러분, 교회는 대야와 같은 전도하는 교인을 많이 만들어야 합니다. 전도는 어느 특정한 사람만 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10% 이상, 할 수만 있으면 20%, 30% 많으면 많을수록 좋지요. 많은 교인을 대야와 같은 교인으로 만들어야 합니다. 대야가 없는 번제단은 번제단이 아닌 것처럼 대야 교인이 없는 교회는 교회가 아닙니다. 전도하지 않는 교회는 교회가 아니잖아요.
우리가 7월부터 3개월 동안 새생명축제를 하고 있는데, 여러분이 열심히 전도하셔서 대야와 같은 교인이 되기를 바랍니다. 전도는 예수님의 지상대명령이잖아요.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에 어디든지 가서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열심을 다하여 전도하셔서 생명을 살리는 대야와 같은 근사한 교인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넷째로 고기 갈고리가 있습니다.
고기 갈고리는 S자 모양으로 생겼습니다. 고기 갈고리는 대야에 담아온 고기를 번제단에 올려놓는 역할도 하지만, 보다 중요한 기능은 고기가 제단에서 불에 탈 때에 다른 곳으로 떨어지지 않게 연결시키는 역할을 합니다. 교회는 대야와 같은 교인이 많아서 전도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전도한 교인을 빠져나가지 못하도록 양육하는 것도 중요합니다. 전도를 해 왔으면 신앙의 공동체에서 떨어지지 않도록 붙잡고 있어야지요. S고리로 연결시켜야 돼요. 교회는 고기 갈고리와 같이 사랑으로 붙드는 교인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교인들이 착각하는 것이 있어요. 불신자가 교회에 한번 나오면 그 다음부터는 저절로 나올 줄로 알아요. 그런데 사실은 그렇지 알아요. 불신자가 교회에 한번 나왔다고 해서 교회를 이해하고 믿음이 자라는 것은 아닙니다. 여러분이 처음으로 교회에 나왔을 때를 생각해 보세요. 교회에 처음 나온 사람이 예배가 얼마나 불편하겠어요. 찬송이 되겠어요. 기도가 되겠어요. 그렇다고 설교가 귀에 들어오겠어요. 뭐하나 편안한 것이 없어요. 그들은 교회가 처음이기 때문에 모든 것이 서먹서먹하고 어색합니다. 예배당을 들어올 때는 그렇지만 예배 끝나고 나갈 때는 굉장히 어색합니다. 비록 예배드리러 왔지만 빨리 집에 가고 싶은 심정이거든요. 이것을 기존 교인들이 모른다는 겁니다.
불신자는 교회에 처음에 왔을 때에 교인들의 따뜻한 사랑을 원합니다. 그들이 하나님을 경험하지 못했으니까 먼저 믿는 교인들을 통해서 하나님의 사랑을 전달받기 원합니다. 기존 교인들이 따뜻하게 맞아주고 전화도 해 주고, 주중에 만나서 교제도 하면 감동을 받아서 다음 주일에 또 나옵니다. 이렇게 한주 한달 지나면서 찬송의 입술이 열려지게 되고 기도가 들리게 되고 설교가 귀에 들어오는 겁니다. 이런 과정을 거쳐서 은혜를 받고 신앙이 성장하는 겁니다.
누가 그러대요. 이민교회는 힘들게 일하고 교회에 나오는 사람들이 많아서 얼굴이 굳어져 있대요. 웃는 이야기를 해도 웃지도 않고 우는 이야기를 해도 울지도 않는 다는 거예요. 어떤 분은 싸우고 온 사람 같아요. 어떤 때는 보기가 민망할 때가 있어요. 이런 사람들이 교회에 나오면 성도들이 사랑의 마음을 품고 녹이는 겁니다. 고기 갈고리처럼 사랑으로 붙드는 겁니다. 그러면 그 사람에게 하나님의 사랑이 들어가게 되어 있습니다. 이러한 일은 새가족반에서만 하는 것이 아니라 온 교인이 해야 하는데, 우리 좋은교회 모든 교인이 이런 역할을 감당한다면 참으로 좋은교회가 되리라고 생각합니다.
다섯째로 불 옳기는 그릇이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40년간 광야 생활을 할 때에 성막 중심으로 살았습니다. 하나님 중심으로 살았습니다.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라서 이동했습니다. 출애굽기 13장에 있는 말씀처럼 하나님은 낮에는 구름 기둥으로 길을 인도하시고 밤에는 불기둥으로 비춰서 인도하셨습니다. 하나님이 구름기둥과 불기둥으로 인도하실 때마다 백성들은 이동을 해야만 했습니다.
이 때에 성막도 옮기는데 번제단의 불은 꺼야 했지만 불씨는 꺼트리면 안 되었습니다. 레위기 6장에 보면 제단 위의 불은 계속 타고 있어야 하며 꺼뜨려서는 안 된다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성막이 이동할 때마다 불씨는 담아서 날랐어야 했습니다. 이 불을 나르는 그릇을 불 옮기는 그릇이라고 말합니다. 예전에 우리나라의 화로를 연상하시면 됩니다.
불 옳기는 그릇은 불을 옮기는 교인을 말합니다. 교회는 불과 같이 뜨거운 교인이 있어야 하고, 다른 사람을 뜨겁게 해주는 교인이 있어야 합니다. 성경에서 불은 성령을 말하는데, 성령을 받아서 뜨거운 교인이 있어서 불을 붙이는 교인이 있어야 하는 겁니다. 성도가 불이 있으면 불신자가 불구경 하게 됩니다. 성도가 성령의 뜨거운 열정을 가지고 예수 믿고, 그 열정을 가지고 직장에서 일하고, 그 열정을 가지고 가정 생활할 때에 예수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불이 옮겨 붙습니다. 불신자가 불구경하다가 예수 믿게 되는 거예요.
성경을 보면 하나님을 만나는 자리는 언제나 불이 있었다는 겁니다. 돌단이든 성막이든, 성전이든, 교회이든 하나님의 시작은 불이었어요. 창세기 15장에 보면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너의 자손이 하늘의 별처럼 많아질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아브라함이 너무 좋아서 제단을 쌓지요. 이 때에 횃불이 나타납니다.
출애굽기 3장에 보면 모세가 호렙산에서 하나님을 만날 때에 하나님이 불꽃으로 나타나십니다. 레위기 9장 24절에 보면 아론이 제사를 드리고 백성을 위하여 복을 빌 때에 주님 앞에서부터 불이 나왔습니다 그 불이 제단 위의 번제물과 기름기를 불사릅니다. 역대하 7장 1절에 보면 솔로몬이 성전을 봉헌할 때에 기도를 마치자 하늘에서 불이 내려와서 번제물과 제물들을 태웁니다. 초대교회에도 보면 하늘에서 세찬 바람이 부는 듯한 소리가 납니다. 불길이 역사합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불로 역사하셨는데, 이 성령의 뜨거움이 교회의 본질입니다. 그래서 성도는 심령 속에 불을 꺼트리면 안 됩니다. 언제 어디서나 불이 활활 타오르도록 해야 합니다. 그 불을 가지고 심령의 불이 꺼진 사람에게 붙여주어야 합니다. 불을 붙여서 그 사람이 살도록 해야 합니다. 이것이 교회와 성도가 해야 할 일인 줄로 믿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예수 믿는 것은 교회 문지방을 밟고 왔다 갔다 하는 것이 아니지요. 우리의 신앙생활은 예배를 드리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지요. 아쉬울 때마다 기도하는 것이 아니잖아요. 예수 믿는 것은 하나님을 주인으로 삼고, 하나님이 섬기라고 보내주신 교회를 중심으로 헌신하는 것입니다. 번제단에서 제물이 되어 하나님께 드리지는 생활이 온전한 신앙생활입니다. 여러분은 이 제단에서 변두리 신앙으로 신앙 생활하시겠어요? 주인의식을 가지고 중심에 서서 신앙 생활하시겠어요? 지금보다 예수님을 더 잘 믿어야 하지 않겠어요?
교회는 나를 위하여 있다는 주인의식을 가지고 신앙생활하시기 바랍니다. 예배만 드리는 수준에서 이제는 새가족반에도 참여하시는 수준으로 향상되시고, 소그룹 속회에도 참여하는 수준으로 발전하시고, 하나님이 주신 은사에 헌신하는 수준으로 변화하시기를 바랍니다. 물질로도 아낌없이 헌신하는 수준에 이르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이 맡은 부분에서 주인의식을 가지고 주도적으로 이끌고 나가는 수준으로 신앙 생활하시기를 바랍니다. 번제단의 다섯 기구를 통하여 여러분이 영감을 받은 대로 교회의 일꾼이 되어 하나님께 드려지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하나님 아버지, 하나님이 섬기라고 만들어주신 교회에서 신앙 생활하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주인의식을 갖고 열심을 다하여 신앙생활하기를 원합니다. 교회의 중심에 서서 일하는 하나님의 일꾼이 되게 하시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모든 교인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유일한 속죄 제물 예수
출 27:1-8 / 박덕기 목사
성막에 나타난 계시는 모두가 모형이나 상징으로 되어 있는데, 그 모형의 참형상과 실체는 예수 그리스도를 의미한다고 했습니다. 구약 성경이 장차 오실 예수님에 대한 기록인 것처럼, 성막 역시 장차 성막의 실체로 오실 예수님을 예표한 것이라는 것을 말씀드렸고, 지난 시간에는 성막의 문에 담겨진 영적인 깊은 진리를 살펴보았습니다. 성막의 동쪽에 문을 내도록 하신 것은, 예수님께서 성막의 동쪽에 진을 쳤던 유다 지파의 후손으로 오실 것을 의미한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성막으로 들어가는 문이 오직 하나이었던 것은 ‘유일한 구원의 문 되시는 예수님’을 의미한다고 했습니다.
성막의 문은 청색, 자색, 홍색, 가는 베실로 짰는데, 청색은 하늘에 계신 하나님 곧 생명 되신 그리스도를 상징하고, 자색은 왕권을 의미하는 색깔이기 때문에 왕 되신 그리스도를 상징하고, 홍색은 피 색깔로 십자가에서 고난당하신 그리스도를 나타내며, 백색은 성결의 영으로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의미한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성막 문으로 대답하면 정확하게 대답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그분은 만왕의 왕이시지만 우리 죄를 대신하시기 위하여 이 땅에 오셔서 고단당하시고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신 유일한 구원의 문이라고 했습니다. 할렐루야! 오늘은 성막의 번제단에 담겨진 깊은 진리를 살펴보면서 함께 은혜를 사모하고자 합니다.
성막 문으로 들어서면 제일 먼저 나타나는 곳이 번제단 입니다. 성막은 하나님을 만나러 가는 약도라고 했습니다. 성막 문으로 들어가서 지성소에서 하나님을 만나게 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만나려면 성막의 문부터 출발해야 합니다. 성막은 예수님을 의미한다고 했지요? 그렇다면 번제단은 무엇을 상징한 것일까요? 번제단은 곧 예수님의 십자가와 속죄사역을 의미합니다. 그러니까 성막 문에서 예수를 믿은 사람은 번제단에서 죄 문제를 해결해야 합니다. 이제 번제단의 의미를 더욱 구체적으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1. 번제단의 뜻
단은 ‘미쯔하바’라고 합니다. 이는 동물을 ‘학살하다, 죽이다’의 뜻입니다. 번제는 ‘올라’라고 하는데 ‘올라간다’는 뜻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번제단은 ‘동물을 죽여 올라간다.’는 의미입니다. 어느 사람이 긴급한 문제로 왕을 만나고 싶어 궁궐 앞에서 들어가려고 애썼지만 관리가 못 들어가도록 막았습니다. 이때 어린아이 하나가 “왕을 만나고 싶으세요? 제가 만나도록 해드릴까요”라고 물었습니다. 그 사람은 어린아이를 비웃으며 “네가 어떻게 왕을 만나게 할 수 있니?”라고 물었습니다. 그러나 알고 보니 그 어린아이는 왕의 아들이었습니다. 그래서 그 사람은 왕의 아들 덕분에 왕을 만나서 어려운 문제를 해결 받을 수 있었습니다. 아들 때문에 지엄한 왕을 만나볼 수 있었듯이, 번제단의 피 즉 예수 그리스도의 피 때문에 우리는 만왕의 왕이신 하나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계신 지성소는 유일한 문으로 들어가 피로 죄를 닦는 번제단을 통하여 하나님께 가까워지게 됩니다.
2. 번제단의 재료
번제단은 조각목을 놋으로 싸서 만들게 되어 있습니다. 조각목은 아카시아나무의 일종인데 이는 무가치하고 버림받은 인간을 뜻합니다. 그리고 놋은 십자가의 상징입니다. 성경에서 놋은 저주와 승리 두 가지 의미로 사용되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바로 저주와 승리가 같이 복합되어 있는 곳입니다. 먼저 놋이 저주를 상징하는 말씀을 찾아보십시다. 신 28:22-23에 “여호와께서 폐병과 열병과 상한과 학질과 한재와 풍재와 썩은 재앙으로 너를 치시리니 이 재앙들이 너를 따라서 너를 진멸케 할 것이라. 네 머리 위의 하늘은 놋이 되고 네 아래의 땅은 철이 될 것이며”라고 했습니다. 여기 ‘하늘은 놋이 되고’라고 했는데, 이것은 한재 곧 커다란 가뭄 재앙을 의미합니다. 몇 달 또는 몇 년 동안 비 한 방울 내리지 않고 하늘이 놋처럼 되는 가뭄은 얼마나 크나큰 저주입니까?
그런가 하면 놋은 승리로 상징되기도 하였습니다. 사도 요한은 예수님을 묘사할 때에 “그 눈은 불꽃같고 그 발은 빛난 주석과 같다”고 하였는데, 이는 놋처럼 강하고 능하신 그리스도를 의미합니다. 왕상 4:13에 “바산 아르곱 땅의 성벽과 놋빗장이 있는 큰 성”이라는 구절이 있는데, 여기 놋빗장은 아무도 침범할 수 없는 강한 성을 의미합니다. 이처럼 놋은 강한 것이기에 능력과 승리를 상징하는데 사용되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불뱀에 물려 죽게 되었을 때, 모세는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서 놋뱀을 만들어 장대에 매달았습니다. 그리고 그 놋뱀을 쳐다보는 자는 모두 고침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의심하고 보지 않는 이들은 죽었습니다. 놋뱀이 장대에 매달린 것은 저주요, 그것을 쳐다보고 고침을 받은 것은 승리입니다. 이것이 바로 십자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같이 인자도 들여야 하리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하셨습니다. 이처럼 십자가는 저주와 승리가 복합되어 있는 곳입니다. 그러므로 번제단이 놋으로 되어져 있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능력과 승리를 모형적으로 보여 주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놋제단은 십자가의 모형입니다. 우리는 약하나 십자가를 통하여 죄를 이기고 죽음을 이깁니다. 이처럼 번제단은 능력의 십자가, 승리의 십자가를 계시하는 모형입니다.
버림받은 조각목 같은 인간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아니면 도저히 구원받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한 가지 주목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조각목을 놋으로 싸고 계속 불을 태우면 조각목이 타지 않을까? 하는 문제입니다. 이런 문제를 가지고 영국 소방서 당국에서 실제로 시험을 해보았다고 합니다. 금이 불에 녹는 온도는 섭씨 1069도 이고, 놋이 녹는 온도는 1085도라는 사실이 밝혀졌습니다. 금보다 놋이 불에 강하였습니다. 실제로 조각목을 놋으로 싸서 불속에 넣어보았습니다. 결과는 조금도 타지 않았습니다. 이유는 간단하였습니다. 밀폐된 속에 있는 나무는 타지 않았습니다. 산소가 없기 때문이었습니다. 아무리 뜨거워도 산소가 없으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알아냈습니다. 놋으로 싼 조각목은 결코 타지 않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십자가로 싸여진 사람은 결코 멸망당하지 않습니다. 미국 사람이 브라질에서 사형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미국 대사가 간청해도 죽여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대사는 그 사형수에게 미국 국기를 씌웠습니다. 그리고 “죽일 테면 죽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러자 차마 미국 국기를 쏠 수가 없었습니다. 만일 미국 국기에다 총질을 하면 커다란 외교 문제가 발생하기 때문입니다. 미국 국기로 씌운 그 사형수는 그래서 살게 되었습니다. 죄의 삯은 사망이어서 영원한 사형 언도를 받은 사형수 인생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보혈로 덮어져야 생명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죄인들의 생명싸개가 되는 것입니다.
3. 번제단의 크기
번제단은 가로도 5규빗 세로도 5규빗이었습니다. 성경에서 5는 고통의 숫자입니다. 온갖 병자들이 모였던 베데스다 연못에는 행각이 다섯이었습니다. 수가성 여인은 남편이 다섯이나 있었던 여인이었습니다. 이처럼 성경에서 5는 고통의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죄와 이혼식을 거행한다는 것은 고통스런 경험입니다. 짐승이 학살되어 타는 것은 고통의 모습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흘리신 피는 고통의 절정입니다. 인간과 하나님이 인간은 자기 죄 때문에, 하나님은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인간 때문에, 같이 고통당하는 자리가 바로 번제단 입니다. 하나님은 사랑하는 인간 때문에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서 처절하게 죽도록 하셨습니다. 그렇기에 번제단은 죄 사함 받는 자리, 죄를 버리는 쓰레기장, 마귀와 이혼하는 자리라고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누구든지 이곳을 통과하지 않고는 결코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번제단은 성막의 성물 중에 가장 큰 성물입니다. 죄 사함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다는 것을 알려주는 상징이기도 합니다.
4. 번제단의 특징
번제단은 오늘날 교회의 모습입니다. 신약의 교회는 구약의 번제단과 일치합니다. 이 세상에 그렇게 많은 건물이 있지만, 사람의 죄를 사하고 구원을 주는 곳은 오직 십자가가 있는 교회뿐입니다. 아무리 목욕탕에 들어가서 떼를 열심히 닦아도 죄는 닦을 수 없습니다. 아무리 학교에 가서 열심히 공부를 하여도 죄를 없이할 수는 없습니다. 아무리 병원에서 수술을 잘 한다고 하더라도 죄를 수술하여 낼 수는 없습니다. 이 세상에서 오직 교회만이 인간의 죄를 해결할 수 있는 곳입니다. 그런데 구약에서는 번제단에서 죄 문제를 해결 받았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신약의 교회는 구약의 번제단과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번제단은 4 가지 특징이 있습니다. 번제단의 이 4 가지의 특징이 바로 교회의 4 가지 특징이 되어야 합니다.
1) 피
번제단의 첫 특징은 피 입니다. 번제단 옆에서 잡은 제물의 피는 번제단 사면에 뿌려지게 됩니다. 번제단은 소 한 마리를 잡아 놓으면 꽉 차는 작은 곳입니다. 그런 적은 곳 사면에 피를 계속 뿌렸습니다. 그래서 번제단의 특징은 피입니다. 피가 없는 번제단은 번제단이 아닙니다. 제사가 없는 번제단 제물이 죽지 않는 번제단, 죄인이 오지 않는 번제단은 이미 번제단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교회의 뿌리는 번제단 입니다. 그렇기에 교회의 특징은 피 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피가 무시된 교회는 교회가 아닙니다. 건물이 없어도, 피아노가 낡았어도 예수 그리스도의 피가 있으면 그 곳이 바로 교회가 됩니다.
2) 불
번제단의 두 번째 특징은 불입니다. 하나님을 만나는 자리는 돌단에서 성막으로, 성막에서 성전으로, 성전에서 교회로 바뀌었습니다. 그런데 돌단에는 항상 하나님의 불이 나타났습니다. 아브라함이 돌단을 쌓고 제물을 올려놓았습니다. 그랬더니 횃불이 내려와서 지나갔습니다. 창 15:17에 “해가 져서 어두울 때에 연기 나는 풀무가 보이며 타는 횃불이 쪼갠 고기 사이로 지나나더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모세가 성막을 만들어 놓았을 때에 번제단에 하나님이 불을 주셨습니다. “아론이 백성을 향하여 손을 들어 축복함으로 속죄제와 화목제를 필하고 내려 오니라. 모세와 아론이 회막에 들어갔다가 나와서 백성에게 축복하매 여호와의 영광이 온 백성에게 나타나며 불이 여호와 앞에 나와 단위의 번제물과 기름을 사른지라. 온 백성이 이를 보고 소리지르며 엎드렸더라.”고 했습니다. 솔로몬이 성전을 지어 놓고 첫 예물을 하나님께 드릴 때 하늘에서 불이 내렸습니다. 대하 7:1-2에 “솔로몬이 기도를 마치매 불이 하늘에서 내려와서 그 번제물과 제물을 사르고 여호와의 영광이 그 전에 가득하니 여호와의 영광이 여호와의 전에 가득함으로 제사장이 그 전에 능히 들어가지 못 하고.”라고 하였습니다.
이처럼 신약의 교회가 시작될 때에도 불같은 성령이 임하였습니다. 행 2:1-4에 “오순절 날이 이미 이르매 저희가 다 한 곳에 모였더니 홀연히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저희 앉은 온 집에 가득하며 불의 혀같이 갈라지는 것이 저희에게 보여 각 사람에게 임하여 있더니, 저희가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방언으로 말하기를 시작 하니라.”고 했습니다. 이같이 돌단의 시작은 불이었습니다. 성막의 시작도 불이었습니다. 성전의 시작도 불이었습니다. 교회의 시작도 불이었습니다. 이처럼 성경에 나타난 하나님의 기관의 시작은 불이었습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성령의 불이 뜨겁게 타오르는 곳이어야 합니다. 불꽃이 없는 불은 불이 아닌 것처럼, 성령의 불로 뜨거운 열정이 없는 교회는 교회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번제단에 불을 주셨다는 것은 제물을 받으시고 죄인을 용서하셨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동이 서에서 먼 것같이 동쪽의 번제단과 서쪽의 속죄소는 멀었습니다. 제물이 불에 타는 순간은 죄인이 의인이 되는 순간입니다. 나폴레옹을 태운 말이 갑자기 이리 뛰고 저리 뛰었습니다. 생명이 위태롭게 되었습니다. 한 병사가 목숨을 걸고 달려가 그 말을 진정시켰습니다. 나폴레옹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너는 장교다”라고 선포하였습니다. 그래서 그 병사는 장교석에 가서 앉았습니다. 그런데 이 사실을 미처 알지 못했던 한 대위가 “너는 사병이니 사병석으로 가라.”고 꾸짖었습니다. 그 때 그는 “나는 장교입니다”라고 소리 질렀습니다. 대위는 “누가 그러더냐?”고 물었습니다. 사병은 “나폴레옹 황제가 그랬습니다.”라고 대답하였습니다. 황제가 장교라고 하는데 누가 무어라고 말하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우리를 향하여 의롭다고 선언해 주셨는데 누가 우리를 정죄하겠습니까? 롬 8:32에 “누가 능히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을 송사하리요.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누가 정죄하리요?”라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 한 번 우리를 의롭다 하신 이상 상천하지에 우리를 정죄할 자가 없는 것입니다.
3) 뿔
번제단의 세 번째 특징은 뿔입니다. 번제단의 네 뿔은 두 가지 방면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첫째는 실용적인 면이요 다음은 영적인 면입니다. 먼저 실용적인 면에서 본다면 시 118:27에 “줄로 희생을 제단 뿔에 맬지어다.”라고 하신 말씀과 같이 네 뿔은 희생 동물의 사지를 묶기 위하여 필요했습니다. 다음으로 뿔은 능력과 생명을 상징합니다. 어떤 죄를 지었다 할지라도 번제단의 뿔만 붙들면 생명을 얻었습니다. 솔로몬 왕에게 반역한 아도니야가 도망가서 제단 뿔을 부여잡고 있었습니다. 반역자는 즉시 사형감이었습니다. 이때 병사가 아도니야를 잡으러 왔다가 그 모습을 보고 이렇게 보고하였습니다. “아도니야가 솔로몬 왕을 두려워하여 지금 제단 뿔을 잡고 말하기를 솔로몬 왕이 오늘날 칼로 자기 종을 죽이지 않겠다고 내게 맹세하기를 원한다 하나이다.” 이 보고를 받은 솔로몬 왕은 아도니야를 살려 주었습니다. 이처럼 제단 뿔은 생명의 뿔입니다.
이와 같은 번제단의 뿔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의미합니다. 눅 1:69절에 “우리를 위하여 구원의 뿔을 그 종 다윗의 집에 일으키셨으니”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어떤 죄인이라도 예수 그리스도와 십자가를 붙잡기만 하면 그는 살수 있습니다.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고 했습니다.
번제단에는 네 개의 뿔이 있습니다. 한 개로도 족하지 않을까요? 그런데 동서남북에 한 개씩 네 개의 뿔이 달렸습니다. 복음은 동서남북으로 다 전파되어야 합니다. North(북) East(동) West(서) South(남)의 첫 글자는 News입니다. 복음만큼 큰 뉴스는 없습니다. 죄로 말미암아 죽을 수밖에 없는 사형수들에게 가장 큰 뉴스는 역시 생명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이 필요 없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참으로 그리스도의 속죄의 효력은 혈통과 민족과 신분을 초월하여 누구에게나 다 미치는 것입니다. 여기에 우리가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할 때 모든 사람에게 차별 없이 골고루 전해야 할 이유가 있습니다. 영원한 사형수 인생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야말로 가장 기쁘고 가장 놀라운 뉴스 중의 뉴스인 것입니다.
4) 채
본문 6-7절에 “또 그 단을 위하여 채를 만들되 조각목으로 만들고 놋으로 쌀지며 단 양편 고리에 그 채를 꿰어 단을 메게 할지며”라고 했습니다. 광야에 세워진 성막에 있는 제단은 이동식이었습니다. 그래서 이리저리 들어서 운반할 수 있도록 만들어졌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들고 다니게 되어 있는 채는 둘이었습니다. 한 개로는 충분치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균형을 잡을 수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내용도 두 부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고전 15:3-4절의 “내가 받은 것을 먼저 너희에게 전하였노니, 이는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장사 지낸바 되었다가 성경대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사”라고 하신 말씀처럼, 복음은 두 부분 곧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인 것입니다. 그것은 균형을 유지해 주며 서로 보충적인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죽음이 없는 부활과 구원은 있을 수가 없습니다. 반면에 그리스도의 부활이 없는 죽음은 참으로 헛된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이것이니 곧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해서 죽으시고 부활하여 오늘날도 살아계신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구원을 받고자 하면 이 사실을 믿지 않으면 안 됩니다. 롬 10:9에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얻으리니”라고 했기 때문입니다.
말씀을 마치려고 합니다. 성막의 뜰 안에 있는 첫 번째 성물은 번제단인데 죄인들이 희생 제물을 불태워 바침으로 죄를 용서받는 곳을 가리킵니다. 구약 시대에 번제단에서 피를 흘리고 죽어갔던 무수한 희생 제물들은 두 말할 것도 없이 우리 죄를 대속하기 위하여 십자가에서 죽으셔야 했던 유일한 속죄 제물 하나님의 어린양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한다고 했습니다. 이 번제단은 다른 말로 놋제단이라고도 하는데, 놋은 심판과 저주 그리고 승리를 상징한다고 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야말로 우리 대신 저주를 받으시고, 그래서 죄와 죽음을 이기게 해주신 하나님의 능력이심을 믿습니다. 우리 구원의 뿔이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와 십자가를 단단히 붙잡아서 마귀와 죄와 사망 권세를 이기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되시기를, 인류의 유일한 속죄 제물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