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 일찍 피곤함을 무릅쓰고 학원으로 출발했는데, 버스에서 깜빡 잠이 들어서 내려야하는 정류장을 놓쳤다..! 눈 뜨자마자 호다닥 내려서 건너편 정류장으로 뛰어갔다. 다행히도 그렇게 많이 지나치지 않아서 금방 버스를 타고 학원 쪽으로 갔다. 그런데! 벨을 눌렀는데도 기사님께서 버스를 멈추시지 않으셨다..! 그래서 그 다음 정류장에 내리게 되었다.. 내가 일찍 학원에 가는 걸 온세상이 막나? 하하 ... 에잇 그러면 나도 지지 않지. 하면서 코찔찔 흘리면서 학원으로 걸어갔다! 그런데 생각보다 기분이 좋았다. 겨울아침 공기도 상쾌하고 학원 주변 지도도 점점 채워나가는 중인 것 같아서! 액땜했다 치지 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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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꼬꼬무 카피는 연습방식을 조금 다르게 해보았다.
지금까지는 인터뷰 내용 암기와 카피를 먼저 하고 그 위에 인물의 감정과 느낌을 더했다면, 이번엔 그 인물이 본 것, 그 광경, 그 인물의 동영상부터 구체적으로 머릿속으로 그려내서 감정과 느낌을 먼저 느껴보기로 했다. 그래서 가장 처음으로는 그 사건에 대한 사진과 영상을 찾아보았다. 오래된 사건이기에 몇개의 흑백사진과 영상만이 남겨져 있었다. 그래도 최대한 들여다보고 잔해 속에서 시체와 발들을 그려보았다. 그러다보니까 암기는 저절로 되더라! 포크레인이 기찻길의 잔해를 파헤치고, 그 안에서 시체들의 오른발과 왼발이 보이고, 시체들을 덮은 두꺼운 포장과 겨우 발만 찾아내어 작고 판판하게 덮여진 포장까지. 오히려 '외워야지' 가 아니라 그 순간을 보려고 하니까 말이다. 자연스레 눈을 돌리면 되는 일이었다.
기찻길에 놓여진 나를 생각해. 대사를 생각하지 말자. 저절로 찾게 될거야. 이 다짐들을 계속해서 중얼거리며 연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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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업을 시작하자마자 근황을 가볍게 나누고 바로 발표를 했다.
발표를 할 때는 다짐만큼 집중하지 못한 것 같다. 아쉬웠다. 그래도 끝까지 더 보려고 눈을 부릅떴다.
선생님께서는 먼저 좋아진 지점에 대해 말씀해주셨다. 전에는 '무언가를 해야해' '이것도 해야하고 저것도 해야해' 라는 너무 해야될 것들이 많아서 내가 가장 해야하는 것에 집중하지 못했다면, 이제는 다른 것들은 다 밀어두고 조금씩 해야할 것만 보고 쭉 가보고 있는 모습이 보인다고 하셨다. 그리고 시작하는 지점에서의 시간이 오래 걸리고 나와의 싸움을 치열하게 하느라 정작 내가 해야하는 역할-인물은 왕따시켰던 내가, 이제는 많이 줄어들었다고 말씀해주셨다. 역할로서 집중하려고 하는게 보인다고! 다만 여기서 더더 나아져가야 한다고도.
확실히 나도 우선 내려놓으려고 하는 중이다. 문득, 뭔가를 잘하기 위해서는 단순무식해야하는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성장만화의 주인공들은 보면 그들은 단순하다. 하나에 빠지면 하나만 하려고 한다. 슛 연습만 백번천번을 하고, 스파이크 연습만 백번천번을 한다. 다들 이를 보고 무식하다고 손가락질한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비웃으며 지나치던 사람들은 걸음을 멈추고 그들을 본다. 그리고 결국 주인공은 기어코 성공시킨다. 그렇게 하나하나 자신의 무기를 채워나간다. 그걸 보는 우리는 매번 감동을 받는거다. 그에 비해 나는 복잡하다. 어느하나 놓치고 싶어하지 않아한다. 오히려 그래서 역설적으로 다 제대로 잡지 못하는 것 같다는 생각이 이번 연습을 하면서 떠올랐다. 윤수민아. 단순무식해지자. 딱 하나만이라도 제대로 잡아보자. 우선 가장 0순위로 잡아야하는 것은 무엇보다 '그 사람의 마음을 헤아리기'일 것이다.
"드라마보다도 더 드라마 같은 삶을 우리는 살고 있어."
드라마 속 인물이 겪는 사랑의 실패에 대한 슬픔과 내가 겪는 사랑의 실패에 대한 슬픔 중에 무엇이 더 클까, 그건 후자일거야. 라고 학준쌤께서는 말씀하셨다. 결국 삶 속에서 이를 발견해내고 깨달을 때의 차이가 진실되게 연기하는 배우를 만든다고 하셨다. 아마도 봄의 첫 수업서부터 얘기하셨을 이 문장을 이제는 어렴풋이 이해할 수 있을 것만도 같다.
<쌈, 마이웨이!> 속 애라가 아버지와 전화하는 장면에서 애라가 겪었을 답답함은 다양할 것이다. 꿈을 향해 달리지만 닿지 않는 목표에 대한 답답함, 나를 안타깝게 여기며 계속 돈을 주려고 하는 아버지에 대한 답답함, 제대로 된 용돈 하나 보내드리지 못하는 나 자신에 대한 답답함 등등. 이렇게도 답답함이라는 감정 하나에도 수많은 종류의 답답함이 있다. 또한, 그 이유를 무엇으로 설정하느냐에 따라 답답함의 질감은 완전히 달라진다.
손을 잘 쓰는 법
선생님께서는 나에게 설명하시고 계시는 중에도 다양한 손짓과 제스쳐를 취하고 계셨다. 아주 자연스럽게. 나도 마찬가지다. 선생님의 질문에 답하고 있던 나의 말을 끊으시며 선생님께서는 "봐봐. 방금 이 '평평한 소리'를 할 때 손바닥을 수평으로 두던 제스쳐를 넌 계산한게 아니라 자연스럽게 한거잖아." 라고 말씀하셨다. 그러나 연기를 할 때는 힘이 들어간다. 내가 발표할 땐 '할머니가 이 대사를 하실 때 손을 이렇게 올리셨지'의 계산이 들어갔고, 그것을 하기 위해 준비하는 그 0.01초의 순간은 관객의 눈에도 분명하게 보인다고 학준쌤께서는 말씀하셨다. 그러나 할머니께서는 이 손짓을 '계산'하시지 않았다. 저절로 움직이신 거였다. 그렇기에 선생님께서는 더 봐야 한다고 하셨다. 눈 앞의 상대를 보며 말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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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번째 발표에서는 그래서 딱 하나만 집중했다. 더 얼마나 자세히 볼 수 있는지.
눈을 감고 기찻길에 서있으려고 노력했다. 할머니께서 하신 제스쳐를 제대로 하지 못하고 놓치더라도 중요한 건 따로 있으니까.
생각하기도 싫은 끔찍한 상황. 유일하게 폭발 속에서 남겨진 남편의 발을 꼭 안고 포장을 덮어야 했던 마음. 세월호 사건에서도 실종자 시신을 찾은 유가족분들께 어떤 사람들은 차라리 안보는게 좋을만큼 상해버린 사랑하는 사람의 몸에 대한 우려를 건넸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 분들은 끝까지 찾으려고, 그래서 두눈 똑똑히 보려고, 조금이라도 더 가득 담으려고 하셨다. 그 마음이 어떤 것일까에 대해 선생님께서는 나에게 물음을 던지셨다.
안그래도 요즘 <언내추럴>이라는 일본 드라마를 너무나도 재밌게 보고 있었다. 법의학 드라마인데, 어떠한 사인으로 죽었는지와 진실을 파헤치는 내용이다. 오늘 수업과 알바를 끝내고 집에 돌아와 저녁을 먹으며 보는 중이었다. 사랑하는 연인의 죽음을 꼭 밝혀달라며 연인의 가족의 반대에도 연인의 시체를 몰래 가져와 부탁하던 한 사람. 그의 부탁에 고민하는 주인공들이 나오는 장면이 있었다. 그때, 확신을 가진 주인공의 대사가 나왔다. "생각해본 적 있어? 영영 답이 나오지 않는 질문을 반복하는 인생이 어떨지. 지금 결론을 내주지 않으면 이 사람이 죽은 이유는 영영 알 수 없게 돼. 지금 안 하면, 지금 조사하지 않으면 영영 답이 나오지 않는 질문을 평생 마주하며 살아가야 하지." 물론 맥락은 조금 다를 수 있지만 뭔가 이어지는 구석이 분명 있을 것만 같다. 사랑하는 사람의 마지막 모습을 봐야지만 하는 이유. 봐야만이 제대로 떠나보낼 수 있으니까. 그게 나를 위한, 그리고 상대를 위한 사랑이자 작별이지 않을까?
다음 시간에 한 번 더 이 장면을 가져오기로 했다. 더 연습해와서 단 1%라도 더 들어가볼 수 있다면 우리는 성공한 것이라는 선생님의 말씀이 감사했다. 다시금 소중하게 주어진 이 기회에, 나는 정말 마지막 공연날이라고 생각하고 준비해가야지. 이와 함께 학준쌤께서는 완벽은 내려놓으라고 하셨다. 완벽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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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리 훈련은 어떻게 하고 있니? 라고 학준쌤께서는 확인하셨다.
말하기 연습이랄 것도 없이 요 며칠 내내 10분에 한번씩 점검 중이다. 내가 언제 코에 걸고 말을 하는지, 언제 평평한 소리를 내는지. 그러면서 내가 왜 이런 소리를 내게 되었는가 까지 거슬러올라가기 시작했다. 원인부터 찾아야할 것 같아서. 엄마는 곰곰이 생각해보다가 “어렸을 때부터 그랬던 것 같은데?” 라고 답하셨다. 후. 사랑받으며 자라서 그런가? 아니면 사랑을 덜 받아서 더 받으려고 애교스러운 소리를 내려다보니 이런걸까? 아우 끝이 없다. 중요한 건 평평한 소리를 내는 법을 터득하는 것이다. 현재의 소리를 버려야하는게 아니라 이것도 가지고 있되, 다른 소리들도 낼 수 있어야 하니까. 선생님께서도 우리는 배우이기에 꼬기, 펴기, 뒤집기 등등 다 쓸 줄 알아야 한다고 하셨다. 다 해보자. 하나씩 장착해보는거야!
그래서 도장이 좋은 것 같다. 수업을 진행할 때, 발성이 아주 중요하기 때문이다. 아이들의 시끌시끌 속에서 배에 힘을 뽝 주고 목에 최대한 무리가 안가게 큰 소리 내기. 그러고보니 관장님께서는 아주 대극장 배우 마냥 꽉찬 발성을 잘만 내신다. 그래서 한 번 여쭤봤다. 혹시 체대에서 발성 수업을 따로 받는지. 그러자 그런 수업은 없고 자연스럽게 터득하게 된 것이라는 답변이 돌아왔다. 나도 그래보자! 방탄소년단 정국이 노래 연습을 연습실에서 하다하다가도 시간이 부족해서 아예 일상 자체를 노래 연습으로 만들어버렸다 라고 몇년 전에 인터뷰 하던 것이 기억난다. 일상을 연습으로 만드는 것. 거리를 걸을 때, 설거지를 할 때, 샤워를 할 때 언제 어디서든 계속 생각하면서 연습하기. 이제는 정국의 말이 단순히 ‘대단하다’, ‘저래서 성공하는구나’가 아니라 ‘그럴 수 밖에 없었겠구나’의 이해의 마음으로 읽혀진다.
그리고 스타카토가 아니라 "가-" "갸-" 를 길게 내는 방식으로 해보라고 제안해주셨다. 꿈틀거리는 것을 펴기! 쫙쫙 펴버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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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력은 경험치와 노력으로 이뤄진다."
오늘 선생님의 이 문장이 가장 와닿는다. 그리고 원점으로 자꾸만 돌아가는 나를, 이미 넌 전보다 나아가고 있고 네 생각보다 잘하고 있다고 말씀해주셨다. '잘하고 있다' 는 말씀에 기분이 좋으면서도 한편으로는 '아닌데..' 하는 나를 그 순간 발견했다. 벌써 12월이다. 첫수업을 시작한 3월로부터 9달이 지났고, 대학을 졸업한지도 1년이 훌쩍 넘었다. 근데도 아직 '리액팅에서 나는 가장 초짜니까', '난 프로가 아니라 막 학교를 졸업한 학생이니까'라고만 생각한다. 그래서 지금껏 내가 생각했던 '학생'에서 벗어나기로 마음먹었다.
난 '학생'이면서 '학생'이 아니다. 학생이라는 이유로 숨지 말자. 아직 부족하다며 겸손 떨지-회피 하지-말자. 부족함은 학생의 특권이 아니다. 부족함은 내가 엄청난 대배우가 되어도 따라올 것이고, 항상 내 인생과 함께 갈 것이다. 완생이 아니고 미생! 그러니 과정에 집중하자. 결과는 과정의 질에 따라 달라지는거다. 그리고 결과는 따라오는 거다. 과정 뒤에 따라올뿐일 그 결과를 내가 따라가려고 좇아가는 것만큼 멍청한 짓이 어디 있을까. 결국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은 끊임없이 배우는 거다. 수업에서, 작품에게서, 사람에게서, 모든 것에서 배우자. 어쩌면 인생에서는 나를 학생이라고 할 수 있을 수도. 그래서 난 '학생'이면서 '학생'이 아닌 것이다.
그리고 선생님의 칭찬은 기분 좋아지라고 하는 말씀이 아니라 내 스스로를 객관화할 줄 알아야 한다는 말씀임을 그제야 깨달았다. 지금 내가 무엇을 잘하고 무엇이 아쉬운지를 잘 알고 있는 것. 칭찬도 일종의 피드백이라고 받아들이기. 순간의 기분 올리기용으로 쓰지 말고, 내 상태를 체크하는 용도로 사용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