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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기의 번 돈과 개 같은 자의 소득은 아무 서원하는 일로든지 네 하나님 여호와의 전에 가져오지 말라 이 둘은 다 네 하나님 여호와께 가증한 것임이니라(신23:18)
동아일보 | 록펠러家, 美자본주의의 축소판 ... 2004-04-10 협박과 매수를 통해 거대 독과점 기업을 구축한 아버지, 정계 거물 딸과의 결혼 그리고 자선사업과 문화사업을 통해 가문의 오명을 씻어내려 한 아들, 2대에 걸쳐 축적된 부와 권력을 바탕으로 대통령을 꿈꾼 손자, ‘가문의 영광’에 염증을 느끼고 뿔뿔이 흩어져 자신의 길을 찾아가는 증손자들…. 미국의 석유왕 록펠러 일가의 4대를 추적한 이 책은 한국 재벌의 현대사가 그대로 오버랩된다. 저자들은 록펠러와 철도왕 밴더빌트, 강철왕 카네기, 금융왕 JP 모건 등 미국판 재벌의 탄생과 성장에 감춰진 협잡과 음모, 매수의 역사를 적나라하게 폭로한다. 창업주인 존 데이비슨 록펠러 1세(1839∼1937)는 비밀 카르텔 형성과 수송업계의 리베이트 제공(‘리베이트’라는 프랑스어가 영어로 대중화된 것은 이때다), 정치권 매수, 경쟁업체 협박 등을 통해 1881년 미국에서 생산되는 석유의 95%를 독점함으로써 정유업을 장악한다. 문어발식 확장, 중소기업 기술 빼앗기, 주가 조작 등 오늘날 일부 한국 재벌에 쏟아지는 비판은 고스란히 그의 장기였다. 심지어 시어도어 루스벨트 대통령이 “그 부를 가지고 얼마나 많은 선행을 하든지 간에 그 부를 쌓으며 저지른 악행을 보상할 수는 없다”고 말할 정도였다. 그러나 록펠러는 여느 졸부와는 근본적으로 달랐다. 비즈니스에서는 냉혹했지만 사생활에서는 근검 절약과 근면 성실의 화신이었다. 그는 평생 일기를 쓰듯 개인 회계장부를 썼고, 독실한 기독교 신자로 ‘수입의 10분의 1 헌금’이란 원칙을 지켰다. 술, 담배, 여자를 멀리하는 금욕적 삶을 살았으며 가족을 최우선시했다. 그의 문제는 자신이 벌어들인 재산보다 주체 못할 만큼 불어나는 재산이 더 많았다는 점이다. 그가 사실상 은퇴한 1897년까지 그의 재산은 2억달러였다. 그러나 1913년에는 그 돈이 10억달러로 불어났다. 자동차산업의 발달로 주가가 급등했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1890년을 기점으로 왕성해진 그의 기부활동은 사실상 돈벼락에 깔려 죽지 않으려는 자구책에 가까웠다. 그의 외아들 록펠러 2세(1874∼1960)는 더 철저한 금욕주의자였다. 그는 대학 2학년 때까지 춤추는 것이 도덕적인지를 심각하게 고민했고, 40대까지 아버지에게서 용돈을 받아썼다. 그의 평생은 예수의 삶을 연상시킬 정도로 오로지 아버지의 위대함을 드러내기 위한 종교적 사명감으로 점철됐다. 그는 아버지를 설득해 자선사업, 의료사업, 교육사업, 문화사업 등에 5억달러를 출연한다. 이는 그가 물려받은 재산과 같은 규모였다. 4명의 손자는 이를 발판으로 미국 정재계를 장악한다. 아시아전문가가 된 형 록펠러 3세(1906∼1978)를 제치고 ‘패밀리’의 적통을 물려받은 차남 넬슨(1908∼1979)은 대통령보좌관, 뉴욕주지사, 부통령을 역임하며 백악관행을 꿈꾼다. 3남 로렌스(94)는 항공업과 원자력 사업에 뛰어들고 초기 환경운동의 중심적 인물이 된다. 4남 윈스롭(1912∼1973)은 아칸소주지사가 되고 막내 데이비드(89)는 체이스맨해튼 은행의 지배자가 된다. 그러나 ‘공화당의 케네디’가 됐을지도 모를 넬슨은 오히려 그 진보성 때문에 좌절하고 다른 형제들도 시대 변화에 적응하지 못한 채 역사의 뒤로 밀려난다. 수많은 증손자는 록펠러가의 일원임을 오히려 낙인처럼 껴안고 살아간다. 개중에는 록펠러 4세(제이 록펠러)처럼 상원의원(웨스트버지니아주)으로 활약하는 이도 있지만 식당차 주인으로 살거나 남태평양으로 도피했다가 식인종에 잡아먹히는 이까지 나온다. 이 책은 그저 한 가문의 전기가 아니다. 숭고한 청교도적 가족윤리와 비즈니스 세계의 냉혹한 ‘정글의 법칙’이 공존하고 주체하기 힘들 만큼 쏟아지는 돈의 권능 앞에 쑥스러움(고립주의)과 우쭐함(예외주의)이 복합된 록펠러가의 역사는 바로 미국의 분열된 자화상이기도 하다. 미국적 전통이 어떻게 형성됐는가에 대한 저자들의 이런 정신분석학적이고 계보학적인 접근이야말로 1976년에 씌어진 이 책이 지금도 여전히 숨가쁘게 읽히는 이유다. - 권재현 기자 (2004-04-10) 2. 매일경제신문 | 미국의 간판 ‘록펠러’ 흥망사 ... 2004-04-10 98년 8월 발행된 포브스지는 미국 역사상 최고 부자로 록펠러 1세를 꼽았다. ‘석유왕 록펠러’라고 불리던 존 데이비슨 록펠러 1세…. 전성기 때 석유왕 록펠러의 재산은 미국 전체 부의 1.53%를 차지했다. 그가 경영했던 스탠더드 오일은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에 걸쳐 미국 내 석유 생산ㆍ가공ㆍ판매ㆍ운송을 독점하다시피 했다. 그런데 그것 뿐일까. 세월이 흘러 베트남 전쟁 이후 진보 물결이 사회를 휩쓸었을 때 미국에서 ‘록펠러’라는 이름은 어느새 ‘수치’의 상징이 돼 있었다.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났던 것일까. 록펠러의 등장은 초강대국 미국의 등장과 시대를 함께 했다. 록펠러 가문이 2대와 3대를 거치는 동안 미국은 냉전 전략을 수립했고 제트기를 개발했다. 환경운동이 본격화했고, 현대 추상미술이 꽃을 피우기 시작했다. 그저 시간적 유사성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록펠러는 그야말로 미국의 모든 일에 구체적으로 발을 담그고 있었다. ‘석유왕 록펠러’에게서 시작된 록펠러가의 드라마는 그 자체로 미국 현대사였다. 드라마는 한 가문의 사사로운 역사가 아닌, 한 왕조의 역사였던 것이다. 피터 콜리어ㆍ데이빗 호로위츠가 함께 쓴 ‘록펠러가의 사람들’은 바로 그 왕조 의 역사를 조망하고 있다. 4대 그리고 100여 년에 걸친 융성과 침몰을 다룬다. 그들 부(富)의 역사는 어떤 것일까. 록펠러 1세가 특별히 비범한 인물은 아니었다. 카네기, 모건, 밴더빌트가 그랬듯 록펠러도 무서울 정도의 속도로 발전 했던 미국 경제의 흐름에 편승한 면이 많다. 그러나 경위야 어쨌건 록펠러 1세와 2세는 그야말로 ‘개 같이’ 막대한 돈을 벌어들였다. 그러나 록펠러 3대의 형제들은 선대가 ‘개 같이’ 번 돈을 ‘정승처럼’ 썼다. 3 남 로렌스는 벤처기업을 대기업으로 키워내며 환경운동의 중심에 서기도 했고, 차남 넬슨은 일찌감치 정계로 뛰어들어 뉴욕 주지사와 부통령을 역임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 영화로움의 길목에서 록펠러가의 몰락도 시작된다. 넬슨은 부통령 인증 청문회에서 그때까지 비밀로 해왔던 가문의 재정관계와 비리를 낱낱이 공개했다. 1세와 2세가 평생을 바친 가문의 신화가 개인적 야망 때문에 무너졌다. 이후 4대의 록펠러가 사람들은 ‘개도 싫고 정승도 싫다’며 뿔뿔이 흩어져 살았다. 록펠러라는 성을 버리고 숨어 사는 사람이 나타났고, 남태평양에 탐사하러 갔다가 식인종에 잡혀 먹힌 사람도 생겨났다. 저자들은 그들 가문의 여정을 훑으면서 모든 록펠러가 사람들에게 내재해 있던 선ㆍ악의 공존을 본다. 그들의 융성기에는 선이, 그들의 몰락기에는 악이 따로 따로 도사리고 있던 게 아니다. 1ㆍ2ㆍ3ㆍ4대를 막론하고 록펠러가 사람들에게는 인간적이거나 비인간적인 모습이 함께 혼재돼 있던 것이다. 그리고 그들의 삶을 통해 드러나는 것은 바로 미국이란 나라의 이면이기도 하다. 미국이 현대사를 진행시키는 동안 합리ㆍ인권은 언제나 착취ㆍ차별과 부딪치고 뒤섞였다. 저자들은 그나마 록펠러 2세의 행동에서 역사를 지고 가는 인물이 가야 할 행로를 찾아내려는 듯하다. 록펠러가가 몰락으로 접어들고 많은 비난을 받을 때, 그는 변명하지 않았다고 한다. “당시에는 선의로” “시대 상황상 피치 못하게”란 말을 그는 꺼내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저 평생을 두고 반성하는 모습만을 보였다는 것이다. - 이지형 기자 (2004-04-10) 3. 조선일보 | 자본주의 100년史 ‘현대’를 만든 록펠러 4代 ... 2004-04-10 이것은 4대(代)에 걸친 대부호 가문의 이야기이다. 대부호가 아니다. 그들은 그야말로 ‘사상 최대의 부자’였고 하나의 ‘왕조’였다. 아무리 부자들의 세계에 무심한 사람이라도 그들 가문의 이름을 한 번쯤 들어보지 못했을 리는 없다. 록펠러 재단, 록펠러 센터, 록펠러 대학…. 한때 세계 최고의 부자였던 록펠러의 재산은 지금 시세로 계산하면 빌 게이츠의 3배나 된다. 그들이 세계사에 미친 영향력 역시 그 부의 규모만큼이나 컸다. 일찍이 버트란드 러셀은 말했다. “록펠러와 비스마르크는 ‘현대’를 만든 사람들이다. 한 사람은 경제에서, 한 사람은 정치에서 개인의 자유경쟁을 통해 보편적 국가를 달성할 수 있다는 자유주의자의 꿈을 깨뜨렸다. 그리고 독점 체제와 관료제 국가를 이룩했다.” 따라서 이 책은 단순히 석유를 팔아 ‘검은 돈’을 번 재벌의 평전이 아니라 19세기 중반부터 약 100년에 걸친 자본주의 역사의 단면이다. 대재벌의 등장, 노조 탄압과 자선·복지산업, 군산(軍産)복합체, 전쟁과 반전운동, 환경사업에 이르기까지 현대사의 온갖 굴곡들이 곳곳에서 드러난다. 재벌 가문의 어두운 비밀들이 백일하에 드러남은 말할 것도 없다. ‘아버지’ 존 록펠러 1세는 고졸 사무원 출신으로 과감히 정유업에 투자해 떼돈을 번다. 리베이트와 뇌물 등 지극히 고전적인 변칙수법을 동원해 철도를 장악하고 정유 회사들을 하나둘씩 인수, ‘완전 독점’을 현실에서 거의 달성한다. 그러나 만년엔 자선사업가로 변신, 제국의 건설자인 동시에 온갖 영욕(榮辱)을 실현하는 주인공이자 장본인이 된다. ‘아들’ 존 록펠러 2세는 ‘가문의 영광’을 회복하기 위해 나선다. 젊은 시절 주식 투자 실패와 온갖 구설수로 말썽만 피우던 그는 경영 일선에서 일찌감치 물러나 자선사업에 전념한다. 록펠러 센터를 비롯한 각종 기관들을 설립하고 정치·경제·문화계에 방대한 네트워크를 형성한다. 3부는 그의 다섯 아들의 이야기이다. 형 존으로부터 후계자의 자리를 빼앗은 둘째 넬슨은 ‘대권’의 꿈을 꾸지만 이 과정에서 재산을 지나치게 낭비했고, 백악관의 마지막 관문인 청문회에서 가문의 재산 총액 공개에 나서 모두를 경악시킨다. 이제 ‘왕조’는 쇠퇴의 길로 접어든다. 마지막 4부 ‘사촌들’은 가문의 이름을 거부한 이단아들을 통해 왕조의 ‘그늘’을 드러낸다. 편집증·은둔·실종·반항…. 부자 가문에 태어났다는 것이 선택인 동시에 저주였다는 믿기 어려운 역설은 선천적인 돈과 명예가 어떤 부정적인 결과를 낳을 수 있는지 보여준다. 광범위한 인터뷰와 내부 문서들에 힘입은 이 책은 이 ‘사촌들’의 지원을 받아 집필됐다. 미국에서 1976년에 출간된 이 책은 놀랍게도 바로 다음해 우리나라 한 대기업이 설립한 재단에서 문고판으로 발췌번역본이 나온 적이 있다. 뒤늦게 그 완역본이 빛을 본 것이다. - 유석재 기자 (2004-04-10) 4. 경향신문 | ‘탐욕의 가문’ 마천루만 남다 ... 2004-04-10 존 데이비슨 록펠러(1839~1937)는 미국 자본주의를 대표하는 가문 록펠러가를 일으킨 사람이다. 100년 가까이 살면서 지금 가치로 환산하면 빌 게이츠의 3배가 넘는 돈을 벌었다. ‘록펠러가의 사람들’은 이 천문학적 돈을 바탕으로 록펠러란 한 가문이 어떻게 흥성하고 쇠락하는가를 보여준다. 동시에 사회의 중핵에 포함된 소수 동질집단을 통해 미국 근현대사를 조명하고 있다. 다루는 기간은 4대, 1970년대까지이다. 존 데이비슨은 석유산업으로 막대한 부를 쌓았다. 비견되는 인물로는 철강의 카네기, 자동차의 포드 정도이다. 살아 생전 그의 재산에는 ‘더러운 돈’이란 명패가 붙어다녔다. 존 데이비슨은 어려서부터 일기 대신 회계장부를 기록했다. 숫자가 하루하루의 반성이었던 셈이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곡물위탁판매회사에 경리사원으로 입사했다. 주급 4달러. 석유산업의 발흥은 셈과 관리에 능한 그에게 도약의 기회를 제공했다. 석유산업에 투신한 뒤 현장에 밀착해 원가절감 요소를 찾아냈다. 경비를 줄이면서 생산성을 올릴 수 있는 최적지점으로 모든 경영요소를 수렴했다. 그런 방식으로 타사에 비해 경쟁 우위를 확보하기까지는 모범적인 기업가로 불릴 만했다. 그러나 그는 그 경쟁력을 바탕으로 아예 경쟁을 회피하는 전략을 사용했다. 높아진 자체 경쟁력을 바탕으로 당시 물류를 담당하는 핵심수단인 철도를 장악했다. 그리곤 경쟁자들을 압박해 들어갔다. 그 과정에서 모든 ‘더러운’ 수단이 동원됐다. 결국 존 데이비슨은 ‘스탠더드 트러스트’를 탄생시킨다. 미국 석유시장의 대부분을 점유한 독점기업체였다. 1911년 미 연방 대법원이 분할명령을 내리기까지 그는 엄청난 ‘검은 돈’을 모았다. 또한 반트러스트 법인 셔먼법에 의해 ‘스탠더드 트러스트’가 33개 소규모 석유회사로 나뉜 뒤에도 계속 치부할 수 있었다. 가문에 따라붙은 탐욕과 무자비함이란 낙인을 없애기 위해 존 데이비슨은 물론 후대에서 자선사업을 벌였다. 록펠러재단이 중심에 있었다. 자선과 후원은 최근의 게이츠에서도 볼 수 있듯 미국 거부들의 전형적인 특징이다. 또한 우연찮게도 존 데이비슨 록펠러와 빌 게이츠는 창의성이나 개척정신으로 대변되는 기업가정신보다는 시장약탈형 악덕 자본가 정신으로 똘똘 뭉쳐있다는 점에서 매우 닮았다. 3대인 넬슨 올드리치(1908~79)도 록펠러가를 대표하는 인물이다. 뉴욕주 주지사 4선에다 부통령을 역임했다. 공화당 대통령후보 경선에 3번이나 나갈 정도로 백악관을 향한 끝없는 욕망을 불태웠다. 평생 권력욕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실패한 정치가로 기록되고 말았다. 할아버지와 손자 두 사람을 비롯, 나머지 등장인물을 우리에게 친숙한 한국 재벌가 사람들로 바꿔 읽어도 전혀 어색하지 않다. 검지 않은 돈은 없기 때문일까. 함규진 옮김. - 안치용 기자 (2004-04-10) 5. 한국일보 | 록펠러 왕국, 그 오욕의 100년 내력 ... 2004-04-10 1905년 초 미국 보스턴의 한 교회에서 10만 달러의 기부금을 놓고 한바탕 소란이 벌어졌다. 평소 같으면 기부 사실을 알리고 찬송과 감사 기도가 이어졌을 테지만 이 돈이 존 데이빗슨 록펠러(1839~1937)의 지갑에서 나온 사실이 밝혀졌기 때문이다. 무자비하게 수많은 사람들을 위협하고 재산을 빼앗아 모은 더러운 돈을 당장 돌려보내라는 요구가 빗발쳤다. 철학자 버트란드 러셀이 비스마르크와 함께 현대를 만든 두 사람 중 한 명으로 꼽은 록펠러. 철강왕 카네기와 더불어 초창기 미국 자본주의를 좌지우지 했던 이 거부(巨富)는 그를 유명인으로 만든 바로 그 재산 때문에 벌써 당대에 ‘악마’ 취급을 당했다. 러셀이 그를 중요 인물로 꼽은 것도 “개인의 자유경쟁을 통해 보편적 복지를 달성할 수 있다는 자유주의자의 꿈을 깨뜨렸다”는 좋지 않은 이유 때문이었다. 2대에서 3, 4대로 이어지면서 가문의 오명은 서서히 거두어졌지만 후손은 ‘록펠러 왕국’의 일원이 아닌 평범한 개인으로 돌아가기 위해 힘겨운 싸움을 벌여야 했다. 이 책은 포드, 케네디, 루스벨트 가문을 해부한 책을 써낸 저자들이 1976년에 낸 책을 완역한 것이다. 77년 삼성문화재단 삼성문화문고 가운데 이 책을 번역한 ‘록펠러가’가 있었지만 그것은 록펠러와 록펠러 2세를 중심으로 일부분만 옮긴 것이었고 벌써 절판됐다. 카네기가 그랬던 것처럼 말년에 자선사업가로 변신한 록펠러의 정신을 이어받아 록펠러 2세는 경영 일선에서 일찌감치 물러나 록펠러 센터를 설립하고 정치 경제 문화계에 걸쳐 방대한 인적 네트워크를 형성했다. 저자들은 이때에 이르러 록펠러 가가 단순한 부잣집이 아니라 ‘왕조’나 ‘제국’의 수준에 이르렀다고 평가하고 있다. 록펠러 2세의 다섯 아들인 존 데이빗슨 록펠러 3세, 넬슨, 로런스, 윈스롭, 데이빗은 적지 않은 실패와 좌절을 겪지만 학계, 정계, 재계, 금융계 등에서 일가를 이루었다. 선대에 쌓은 재력과 인적 기반의 덕이었다. 록펠러 4대인 그들의 자녀 21명은 하지만 가문의 이름을 거부했다. 할아버지는 록펠러라는 ‘왕조’를 만들어냈지만 그것은 오히려 록펠러 가와 일반인 사이의 간극만 키웠고 아이러니컬하게도 그로 인해 가문이 분열하기 시작한 것이다. 하지만 그 분열은 영웅적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나도 무력하고 비틀대며 지나치게 평범했다’. 850쪽에 가까운 이 두툼한 책은 이름난 한 가문의 흥망성쇠뿐 아니라 부분적으로 19세기 후반 이후 미국 자본주의의 역사로도 읽을 수 있다. 비교적 공평한 시각에서 록펠러 가문의 4대를 추적한 저자들은 이 가문의 100여 년이 “그리 서사시답지 않다”며 “스탠더드 오일 설립 이후 록펠러 가의 모든 노력은 결국 인간 욕망의 허무함을 보여주고 있는 것 같다”고 평했다. - 김범수 기자 (2004-04-10) 6. 세계일보 | ‘록펠러 제국’ 100년의 흥망성쇠 ... 2004-04-10 록펠러의학연구소, 록펠러재단, 록펠러센터, 록펠러대학…. 무엇인가 ‘좋은 일’ 하는 단체라는 느낌을 주는 이름 ‘록펠러’, 이런 이미지가 그려지기까지는 록펠러 가문의 조직적인 노력이 있었다. 그러나 지금 ‘록펠러’는 과거 속으로 사라져간 ‘석유왕’ 정도로 회상될 뿐이다. 몰락한 록펠러 제국의 후손들도 과거의 명성과 오명의 잔영을 멀리한 채 제국의 후예가 아닌 범인으로 자유롭게 살아가고 있다. ‘록펠러가의 사람들’(피터 콜리어·데이비드 호로위츠 지음, 함규진 옮김)은 각종 편법을 동원, 한 세기 전 미국의 석유산업을 독점해 막대한 부를 챙겼던 ‘록펠러 제국’ 4대 100년의 흥망성쇠를 담고 있다. 존 D. 록펠러1세는 석유왕으로 군림해 당시 세인들로부터 ‘더러운 돈’을 긁어모았다는 낙인이 찍힌 록펠러 제국의 건설자다. 질투와 혐오의 대상이 돼버린 ‘록펠러’라는 이름은 가문 대대로 짐을 지운다. 록펠러2세는 이런 오명을 씻기 위해 막대한 재산을 들여 자선사업을 벌인다. 정치·경제·문화계의 인맥을 활용한 그는 선대의 불명예를 회복하며 가문을 ‘왕조’의 반열에 올려 놓는다. 이런 노력의 결실인지 록펠러가는 손자 대부터 졸부가 아닌 미국의 명문가로 부상한다. 록펠러 1세의 손자들은 재력과 인맥을 바탕으로 정계와 재계를 지배해간다. 그러나 부통령에 지명된 넬슨 록펠러의 가산 탕진, 이어진 가문의 재산 총액 공개 파문은 가문의 쇠락을 재촉한다. 그리고 가문의 이름을 거부한 사촌들인 록펠러 4대. 이들은 ‘록펠러’의 굴레 속에서의 개성 상실을 너무도 잘 알았기에 차라리 익명의 인간으로 살아가고, 여기서 저자는 록펠러 왕조가 몰락한 것으로 판정한다. 이렇게 전개된 록펠러가 이야기는 한국 재벌가에 부의 사회적 환원이라는 짐을 지운다. 록펠러1세에게 ‘기부의 고난도 기술’을 전한 게이츠 목사의 이야기를 보자. “정작 문제는 (중략) 막대한 유산들처럼 자손들에게 상속되고 나서 추문을 낳고 사회도덕의 해이를 가져오면 어쩌나 하는 것이다. 록펠러 회장과 그의 아들로선 이 나라와 세계를 위해 문명의 진보에 기여하도록 비영리 재단들을 만드는 것 외에 방법이 없다. 인류애를 위한 사업에는 시간과 장소, 범위의 제약이 없으며, 스스로 영구히 지속되는 힘이 있다.” 이것이 가문은 몰락했지만, 록펠러 하면 자선사업가를 떠올리는 이유다. - 신동주 기자 (2004-04-10) 7. 한겨레 | ‘신천지 신화’ 록펠러가문 4대의 ‘겉과 속’ ... 2004-04-10 광대한 국토와 자원, 그 위에서 펼쳐진 이민자와 그 후예들의 치열한 도전이 어우러져 미국이란 신천지에서 등장한 수많은 드라마의 정점에 ‘록펠러’라는 이름이 존재한다. 밴더빌트와 제이피 모건, 듀폰, 구겐하임, 멜런, 카네기 등 남북전쟁을 전후해 등장해 이후 세계 경제질서를 자신들을 위한 체계로 구축한 여러 재벌들 가운데에서도 록펠러라는 이름은 단연 첫머리에 오른다. 록펠러는 이후 100년 넘게 미국을 지배하는 하나의 축인 ‘록펠러가’를 만들어냈다. 책은 가히 ‘왕조’라는 호칭이 어색하지 않았던 이 신화적 재벌가문의 4대에 걸친 흥망성쇠 이야기다. 1대인 존 데이비슨 록펠러 1세는 ‘더러운 자본가’와 ‘위대한 자선가’라는 두개의 극단적 평가를 들었던 인물이었다. 그는 석유를 발견하진 않았지만 석유를 찾아 부자가 된 사람들의 이권을 빼앗아 부자가 됐다. 그의 무기는 ‘리베이트’와 ‘트러스트’였다. 그는 리베이트로 석유 수송 철도를 지배했고, 기업 담합(트러스트)을 이끌며 미국 전체 석유의 95%를 독점했다. ‘더러운 돈’을 벌었다는 평생의 오명을 떨치기 위해 그는 노년에 집중적이고 치밀한 자선사업으로 이미지를 개선하면서 가문의 토대를 다졌다. 그의 아들 존 데이비슨 록펠러 2세는 각종 구설수로 오점도 남겼지만 아버지가 남긴 재산을 무기로 록펠러 센터 등 많은 기관들을 설립하는 한편 자선사업에 전력투구했다. 그는 미국 전분야에 걸쳐 방대한 인맥을 바탕으로 네트워크를 구축해 록펠러가의 전성기를 일궜다. 록펠러가는 3대째에 접어들며 그 폭이 더욱 넓어진 대신 쇠퇴의 조짐을 보이기 시작했다. 동생에게 장남의 권리를 빼앗긴 록펠러 3세는 아시아 문제 전문가이자 록펠러가의 양심을 상징하는 존재가 되었다. 둘째 넬슨 록펠러는 부통령을 지내며 대권을 꿈꿨지만 스캔들에 휩싸여 꿈을 이루지는 못했다. 셋째 로렌스 록펠러는 공격적 투자로 돈을 벌며 부를 이어갔고, 무능하다고 따돌림 당했던 넷째 윈스럽 록펠러는 낙향한 뒤 주지사까지 지냈어도 결국 집안과는 멀어지고 말았다. 마침내 4대째에 접어들면서 록펠러라는 이름은 후손들에게 부담스러운 멍에가 된다. 4대 록펠러들은 거의 대부분 정신과를 찾아갔을 정도로 ‘세습받은 자’로서의 혼란을 경험했다. - 구본준 기자 (2004-04-10) 8. 한국경제신문 | 4대에 걸친 ‘록펠러 왕조’ 화려한날은 이제 가고 ... 2004-04-10 ‘부자는 망해도 3대는 간다’는 속담이 있다. 뒤집어 해석하면 부자도 3대를 넘기기 어렵다는 얘기가 된다. ‘석유왕 록펠러’로부터 4대에 걸친 록펠러 집안의 이야기를 담은 ‘록펠러가의 사람들’(피터 콜리어 외 지음, 함규진 옮김, 씨앗을뿌리는사람)은 사상 최대의 부자였던 록펠러 가문 역시 이런 속담에서 예외가 아님을 보여준다. ‘록펠러 왕조’의 창업자인 존 데이빗슨 록펠러 1세는 19세기 말 급성장하던 미국 경제의 흐름을 타고 일약 백만장자가 됐다. 그는 근면·성실·근검절약이 몸에 밴 사람이었을 뿐만 아니라 돈을 벌기 위해서는 리베이트와 뇌물증여 등 갖은 편법을 동원, 추악한 재벌이라는 오명을 후대에 물려준다. 그의 아들 록펠러 2세는 이런 오명을 씻기 위해 무던히 애를 썼다. 록펠러 재단을 중심으로 세계적인 문화유적 복원, 국립공원 조성, 대규모 자선사업 등을 벌이는 한편 정치 경제 문화계 등에 방대한 인맥을 구축해 록펠러 가문을 가히 ‘왕조’의 수준에 올려 놓았다. 그러나 록펠러 2세의 다섯 아들, 즉 록펠러 3세들에 이르면 돈씀씀이가 헤퍼진다. 3남과 막내는 각각 항공업·원자력산업과 체이스맨해튼은행으로 돈을 벌었으나 가문의 대통을 이은 차남 넬슨은 대통령을 꿈꾸다 막대한 돈만 날린 채 실패했다. 이들 다섯 형제가 낳은 21명의 자녀들, 즉 록펠러 4세들은 ‘가문’에서 벗어나 각자의 길을 간다. 이들 중엔 아직도 재력가, 정치가로 남은 사람이 있지만 ‘왕조’는 해체됐다. 가문의 일원이 아니라 개인으로 존재하기 때문이다. 록펠러 4세들을 일일이 인터뷰하고 록펠러가 문서보관소의 비공개 기록까지 뒤져 엮어낸 이야기들을 통해 록펠러 가문이 살았던 1백년의 미국 역사를 읽을 수도 있다. - 서화동 기자 (2004-04-10) 9. 중앙일보 | 돈과 권력의 캉캉춤 살아있는 미국 현대사 ... 2004-04-10 아롱이 다롱이라더니 정말 그렇다. 부자의 대명사, 그래서 현존 최고라는 빌 게이츠 재산의 세 배(지금 시세로)였다는 록펠러 가문 4대에 걸친 15명의 삶과 취향은 극과 극을 오간다. 『록펠러가의 사람들』에 따르면 록펠러 왕조의 창시자인 존 D 록펠러 1세(1839∼1937)의 경우 ‘돈의 제국’을 일궈낸 주인공. 그러나 리베이트와 뇌물 증여 등으로 악덕 기업인의 전형으로 남아 있다. 반면 “록펠러는 끔찍한 이름”이라며 학질 뗐던 록펠러가의 사촌인 데이비드의 큰 딸 에비(1903∼76)는 달랐다. 마르크시즘과 페미니즘에 빠져들었기 때문이다. 사촌 넬슨의 둘째아들 로드먼(1932∼2000)은 이 가문의 후계자로 지명됐지만, 곧 손을 떼고 신학을 공부했다.『록펠러가의 사람들』들은 이들에 대한 집단 초상화. 물론 연대별 서술인데, 록펠러가의 이미지를 끌어올린 것은 아들인 록펠러 2세다. 파업 노동자 학살 사건에 연루돼 청문회에서 곤욕을 치렀던 그였지만, 나중에 문화계를 포함한 인적 네트워크와 자선사업을 바탕으로 록펠러가를 진정한 왕조의 반열에 올려놓는다. 돈과 권력은 한묶음. 따라서 정치가 빠질 수 없다. 이 가문 전성기 시절에는 백악관 입성을 목표로 했던 록펠러 3세인 넬슨 얘기가 책의 하이라이트다. 부통령 지명 성공, 총재산 공개와 사회적 경악, 가문 내 갈등, 심장마비로 인한 급사, 가문 쇠퇴의 사이클이 꼭 ‘공식’인 양 보인다. 따라서 록펠러 가문의 흥망성쇠는 19세기 중반 이후 미국 현대사로도 읽힌다. 저자 두 명은 기자 출신. 록펠러는 물론 포드·케네디·루스벨트 등 미국 명문 가문을 다루는 다큐멘터리물 저술이 이들의 전공이다. - 조우석 기자 (2004-04-1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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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우린 저런 글 읽지도 않는데..ㅎㅎ 읽었으면 돈내는넘 욕허지 말고 이재를 좀 배우던강ㅎㅎ 아님 더 많이 내던강~ ㅎㅎ
그것도 아님 찌그러 있던강~~ ㅎㅎ 조중동 욕허면서... 뭐 검색기사 읽고 나자빠졌었나? ㅎㅎ
돈내고 좀 받아보라..구러니 한걸레도 적자에 허덕이지. ㅎㅎ 돈내고 받아보고.. 기부도 좀허고 ㅎㅎ
이번 년말엔 얼마 끊을 란고? ㅎㅎ 몇 푼낸적도 없었는데..빨간 열매 장사들이 공금 돌려 쳐먹었다니깐..ㅎㅎ
또 내고 싶은 마음 사라지나? ㅎㅎ 낸적이나 있고 욕했으면 욕이 달겠는데.. 쩌 ~~~업..투표는했었나?
충청도 미치 ㄴㄴ 돈 한푼도 보시않고 주둥이만 살은 것들이..... 뭐하는 ㄴㄴ인지.. 니 자식들이 불쌍타
저희 둘째놈이 얼마전에 그러더군요...비즈니스 해서 돈을 많이 벌고 싶다고요.
많이 벌어서 전 세계에 있는 불쌍한 사람들 많이 돕고 살겠다고요...
이아이가 초등학생때부터 독거노인들에게 도시락 배달다니던 놈입니다.
다른거 하느라 공부를 좀 못해도 이해해 달라고 하면서...
공부잘하는 친구들을 부하직원으로 써서 돈을 벌겠답니다. ㅎㅎㅎ
헐~ 관세음보살님 모시고 사시네요. 꼭 돈 많이 벌수 있도록 기원하겠습니다. _()_
ㅎㅎㅎ 친구를 부하로 부릴려는 마음...물항라님 아들도 공부 좀 하나요?
울 아들이 말하는 친구는 글로벌한 친구인데 ㅎㅎㅎ. 우리나라, 미국, 캐나다. 중국, 일본,..
물항라님이 상상하시는 동네에서 술먹고 당구치고 노래방가는 그런 친구 아닙니다.
그리고 봉사경력이 낮으면 공부잘해도 채용 안한다니 걱정마세요
물항라님의 아들이 우리아들 부하가 될 일은 걱정 안하셔도 될 듯 합니다.^^
ㅎㅎ 오늘은 ..물사리 똥종이가 바쁘네..이 똥 저똥 닦으랴 ㅎㅎ.. 물사리 서방님도 어떤땐 함께 들어오던데? ㅎㅎ
오늘은 따로 뎅기노? ㅎㅎ
빨간냄비 말고 빨간 열매는 ? 거래 없나? ㅎㅎ
집안에 안팎으로..좀 분답은 모양이네? ㅎㅎ
치마두르고 너무 험하게 살지않는게.. 가족의 건강을 위해선 많은 도움이 될껀데..ㅎㅎ
집안 장독은 잘 보존 되고 있고? ㅎㅎ
자판 에 손가락 걸치고 정신없는 살림살이 해싸면서..서방님께 분풀이허고 나자빠지면서 살면..ㅎㅎ
집안 기운 다 말아 먹는 꼬라지 된다..차라리..불교끊고..설겆이나 열심히 허는 것도 큰 수행인데.ㅎㅎ
어떤 것이 물사리에게 현실적 도움을 줄까?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