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이름이 서위렴인 아버지 윌리엄 얼 쇼 박사는 평양 광성학교에서 교육 선교사로 활동하다 6·25전쟁이 일어나자 미군에 자원입대하여 한국 군대에 군목제도를 도입한 분이다.
그는 군목으로서 죽음의 공포에 떨고 있는 병사들의 영혼을 위로하며 헌신했다. 1954년 목원대의 전신인 감리교 대전신학원이 설립될 때 창립 이사로 참여하여 신학 교수로 재직하며 전쟁 속에서 한국의 교육발전에 기여했다.
부전자전으로 그의 한국 사랑은 아들에게도 이어졌다. 아들 윌리엄 해밀턴 쇼는 그의 아버지가 한국에 들어온 다음 해인 1922년에 평양에서 출생했다.
그는 평양에서 고등학교까지 자랐기 때문에 유창한 한국어 실력을 갖출 수 있었고 많은 한국인 친구들을 사귈 수 있었다. 이후 쇼 대위는 미국으로 건너가 대학을 졸업하고 1943년 미 해군에 입대해 1943년부터 1945년까지 초계 어뢰정의 부장으로 복무하다 전역 후 한국으로 돌아왔다.
한국을 그리워했던 쇼 대위는 조선 해양경비 대사관 학교에서 교관으로 근무하며 생도들에게 영어와 함정 운용술 등을 가르쳤다. 이후 쇼 대위는 철학박사학위 공부를 위해 하버드 대학에 입학했으나 6.25 전쟁이 일어나자 학업을 중단하고 해군에 자원 입대했다.
쇼 대위가 부모님께 보낸 편지에는 “한국에서 태어났으니 한국 사람입니다. 내 조국에서 전쟁이 났는데 어떻게 마음 편하게 공부만 하고 있겠어요. 내 조국에 평화가 온 다음에 공부를 해도 늦지 않아요. 지금 그들을 돕지 않는다면 제 양심이 허락하지 않을 것입니다!”라는 말이 언급되어 있다.
쇼 대위는 맥아더 장군을 최측근에서 보좌하며 인천상륙작전을 성공적으로 완수했다. 이후 서울 탈환작전에 참가하여 김포반도, 행주산성, 신촌 노고산 전투 등에서 승리했으나 1950년 9월 22일 녹번리 전투에서 적의 기습공격을 받아 안타깝게도 만 28세 나이로 전사하였다.
윌리엄 얼 쇼 박사는 아들이 전사한 이후에도 계속 한국에 남아 교수로 활동하며 인재 양성에 힘썼고, 78세의 나이로 별세했다.
한국인보다 한국을 더 사랑한 아버지와 아들, 윌리엄 얼 쇼와 윌리엄 해밀턴 쇼 부자는 서울 마포구 양화진 외국인 묘지 ‘제2묘역 라-6’에 나란히 안장되어 있다. 우리 모두 윌리엄 부자의 한국에 대한 사랑을 가슴 깊이 새겨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