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것을 볼 때
정말로 그것을 알고자 한다면
오랫동안 바라봐야 한다.
초록을 바라보면서
'숲의 봄을 보았다'고 말하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자신이 보고 있는 그것이
되지 않으면 안 된다.
땅 위를 기어가는 검은 줄기와
꽁지깃 같은 양치식물의 잎이 되어야 하고,
그 잎들 사이의 작은 고요 속으로
들어가야 한다.
시간을 충분히 갖고
그 잎들에서 흘러나오는
평화와 만날 수 있어야 한다.
존 모피트
잠깐 보고 판단하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무엇이 충분하지 않은가? 삶에 충분하지 않다.
자세히 보지 않는 삶은 편견과 관념이 지배한다.
알기 위해서는 깊이 들여다봐야 하며, 그때 우리는 더욱 알 수 없게 된다.
그 '알 수 없음'이 모든 존재가 본래 지닌 신비이다.
사랑하는 사람도 깊이 들여다볼수록 더욱 알 수 없다.
우리가 사랑하는 것은 그 신비인지도 모른다.
존 모피트(1897~1989)는 '신비의 백만장자'라 불린 조금은 특별한 시인이다.
생을 마칠 때까지 60년 동안 미국 워싱턴주의 캐슬록에 은둔해 살며 시를 쓰고 숲을 가꿨다.
주위의 많은 학교와 자선단체들이 매해 그의 기부를 받았지만
그가 철저히 익명에 부쳤기 때문에 사후에야 사실이 알려졌다.
이름이 알려지면 기부를 중단했다. 정작 자신은 닭장과 다를 바 없는 판잣집에서 살았다.
자기를 위해서는 거의 아무것도 쓰지 않았다.
모피트는 가난하고 불우한 환경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열차 차장이면서 사탕 장수였는데 그가 두 살 때 열차 사고로 세상을 떠났다.
미모의 어머니는 두 번 재혼했다. 계부 한 명은 알코올중독자로 재산을 탕진하고 폭력을 휘둘렀다.
더러운 옷에 종종 밥도 굶고 신발도 없이 학교에 나타났기 때문에 아이들의 놀림을 받았다.
친척이나 위탁 가정에서 산 적도 여러 번 이었다.
그러나 어려운 시기에 사람들로부터 받은 친절을 결코 잊지 않았다.
교사 중 한 명은 그에게 신발을 선물하기도 했다.
30대 초반부터 모피트는 우편배달부 일을 하면서 돈을 모아,
벌목한 후 버려진 땅을 싼값에 매입하기 시작했다.
식비를 아껴 토지세를 충당하면서도 삼림 매입을 계속했다.
그렇게 극빈 생활을 하며 40녀간 우편배달부 일을 하고, 유기견들을 데려다 키웠다.
일흔 살이 되었을 때 그의 인생이 극적으로 달라졌다.
수십만 평에 이르는 황폐했던 땅에 어느덧 나무들이 울창하게 자란 것이다.
목재 회사에 그 나무들을 팔아 큰 돈을 모을 수 있었다.
그럼에도 절약 정신은 달라지지 않았다.
한번은 토지 관리 업무를 보던 젊은 변호사가 실수로 우표 몇 장을 더 쓰자,
모피트는 매년 그 사실을 상기시켰다.
그러나 도움이 필요한 사람에게는 원조를 망설이지 않았다.
마을에 집 몇 채를 소유한 그는 가난한 사람들에게 세를 주었으며,
다달이 월세를 받으러 다니는 대신 감자, 밀가루, 설탕, 소금 등을 갖다주었다.
결혼도 하지 않았고 자녀도 없었기 때문에 말년에 자신의 토지를 자선단체에 기부했다.
사후 100년 동안은 땅을 팔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그래서 현재도 그 삼림에서 나오는 목재로 매년 지역 학교와 자선단체에
15만 달러의 기부 행위가 이어지고 있다.
삶으로 인해 시가 진정성을 갖는다.
그는 벌목하고 버려진 땅을 자세히 보았다.
그래서 몇십 년 후에 울창해질 나무들을 볼 수 있었다.
가난한 사람들을 그는 그냥 '가난뱅이들'이라고 치부하고 지나치지 않았다.
그들을 자세히 보았고, 그들의 아픔에 공감했다.
자신과 대상을 분리하지 않았고 뱀처럼 구불거리는 검은 줄기들과 일체가 되었으며,
잎사귀들 사이의 '작은 고요'와 자주 접촉했다.
희귀한 바닷조개들을 수집하고, 다양한 독일붓꽃들을 키운 원예가이기도 했다.
많은 시를 남기지는 않았지만 진정한 시인이고 명상가였다.
얼핏 보면 평범한 양치식물이지만, 자세히 보면 그 구불거림과
질서정연함과 생명의 의지가 무한히 신비롭다.
자세히 보는 것은 신이 연출한 무대를 맨 앞자리에서 관람하는 것과 같다.
그렇다.
어떤 것을 볼 때 정말로 그것을 알고자 한다면, 오랫동안 바라봐야 한다.
시로 납치하다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