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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웃이 되어주라 (눅57)
찬송 : 나의 안에 거하라
성경 : 눅10:25-37절
어제는 한 교회를 심방했다. 꿈꾸는 교회와의 소통을 위해 월요일 오후를 꿈꾸는 교회들을 심방하고 있다. 심방을 통해 소중한 꿈꾸는 교회의 이야기를 듣는 시간들이다. 그분들의 상황들을 겸손히 들어서 꿈꾸는 교회와 함께 대안을 만들어가기 위해 소중한 자료를 수집하듯 듣는 것이다. 어제도 한 교회 사역자 분이 목회 현장의 고충과 갈등을 겸손히 말씀해 주셔서 얼마나 감사했는지 모른다.
주님, 저희가 잘 듣게 하시고 이런 소중한 이야기들이 잘 반영되어 교회들에 적절한 대안을 만들어 가게하소서. 꿈꾸는 교회와 어떤 이야기도 나누며 실제적인 도움의 자리를 펼 수 있도록 라마나욧 선교회를 인도하소서.
오늘은 독서토론 종강의 날이다. 지난 3개월 귀한 헌신을 해 주신 박찬선 목사님께 진심의 감사를 드린다. 귀한 강의를 위해 소중한 시간과 재능을 헌신하시며 목회자들에게 독서토론을 통한 성도들과의 새로운 만남의 장을 소개해 주시고 귀한 지침을 허락해 주심에 감사드린다. 주님 그 헌신과 수고에 주님의 크신 은혜를 더하소서.
오늘 본문에는 한 율법교사가 질문한 영생의 길에 대한 질문으로 시작해서 이웃이 누구인지에 대한 예수님의 아름다운 비유의 말씀이 기록되어 있다. 이 말씀을 통해 주님은 무엇을 말씀하시고 계신 것일까?
25절
‘어떤 율법교사가 일어나 예수를 시험하여 이르되 선생님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란 질문에 <예수를 시험하여>란 단서가 붙어 있다. 그러니까 이 질문은 본인이 궁금해서 묻는 질문이기도 하지만 사실은 이 분이 진짜인지를 확인하고 싶어 하는 질문이란 말이다.
예수님은 이 질문에 율법 교사임을 아셨는지 율법에 무엇이라 기록되어 있느냐고 반문하시고 계시며 율법교사는 이렇게 대답한다. 27절
‘대답하여 이르되 네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였나이다.’
온 힘과 뜻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자신처럼 사랑하라고 기록되어 있듯이 주님은 이대로 행하면 영생을 얻는다고 대답하신다. 그러자 율법교사는 자신을 드러내기 위해 이웃이 누구인가라고 묻는다. 29절
‘그 사람이 자기를 옳게 보이려고 예수께 여짜오되 그러면 내 이웃이 누구니이까?’
<자기를 옳게 보이려고> 그는 질문한다. <내 이웃이 누구니이까> 이 질문은 그러니까 율법교사는 자신의 이웃을 사랑했다고 자신을 드러내려고 했다는 것이다. 이 사람은 율법교사로서 하나님을 사랑했고, 또 이웃을 사랑했다고 자부하고 있었다는 말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강도만난 한 사람의 이야기를 통해 이웃이 누구인지를 새롭게 조명하며 이웃이 누구냐고 묻는 이 율법교사에게 네가 이웃이 되어주라고 말씀하시고 계신다. 37절
‘이르되 자비를 베푼 자니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 하시니라.’
이웃은 어떤 규정되어 있는 사람이 아니라 도움이 필요한 사람에게 도움을 주는 사람이 이웃이라고 하는 것이다. 이웃은 오늘이란 구체적인 삶의 자리에서 이웃이 되어주는 것임을 말씀해 주시고 계신다.
율법교사에게는 사마리아 사람들은 이웃이 아니었다. 그들은 죄인이며, 이방인과 같은 자들로 상종하지 못할 자였다. 그런데 주님은 강도만난 자의 어려움에 동참함으로 그가 이웃이 되었던 것처럼 이웃은 어떤 규정된 관계가 아니라 오늘이란 구체적 시간에 삶을 살아가면서 도움이 필요한 자에게 이웃이 되어주는 것이어야 한다고 말씀하신다.
이웃을 챙기는 사랑은 유대주의, 율법주의에 빠지지만 이웃이 되어주는 사랑은 이런 모든 제한을 철폐하고 새로운 하나님 나라를 형성해 가는 것이다.
오늘 주님은 내게 무엇을 말씀하시려는 것일까?
나는 낯선 환경에, 낯선 사람과 대화를 만들어 가는 일이 매우 서툴다. 사람을 만나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그러기에 친구관계가 넓지 못하다. 대신 한 번 사귀면 자주는 만나지 못해도 내 가슴에 소중하게 남겨두고 평생의 친구로 만난다. 살갑게 말해주지 않아서 서운케 하는 경우가 많아서 탈이지만
이런 내 모습에 주님은 오늘이란 시간 이웃을 챙기는 사람이 아니라 이웃이 되어주는 사람이 되라고 내게 말씀하신다. 오늘이란 주어진 이 하루는 어쩌면 새로운 이웃을 만들어 가는 사명을 받은 날인지 모른다. 그렇다. 이것이다.
오늘이란 시간 가서 이웃이 되어주어야 한다. 사마리아 사람처럼 자비를 베풀며 이웃을 만들어 가라고 하신다. 누가 나를 도와주지 않는가? 이웃의 도움을 기대하는 사람이 아니라 먼저 가서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의 이웃이 되어주라고 하신다.
꿈꾸는 교회를 찾아가 이웃이 되어주는 선교회가 되라고 하신다. 주변의 도움이 필요한 사람의 이웃이 되어주라고 하신다. 규정된 이웃만 찾는 사람이 아니라 늘 누군가의 이웃이 되어주는 사람으로 서라고 하신다.
내게는 참 어려운 명령이다. 낯을 많이 가리는 내 성품으로는 불가능한 말씀이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사마리아 사람으로 유대인을 챙긴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상처가 있고, 습관적 저항이 존재한다. 그러나 사마리아 사람은 유대인에게 받았던 상처와 습관적 저항을 넘어서 순종한 것이다.
오늘 내게도 마찬가지다. 이웃이 되어주어야 할 사람은 나를 힘들게 한 사람일수도 있고, 나와 다른 사람일수도 있다. 아니 전혀 함께할 수 없는 사람일 수도 있다. 그러나 이웃이 되어주는 삶이란 바로 그 모든 것을 넘어서 도움이 필요하다는 한 가지 이유로 그를 위해 나를 드리는 것이다. 때문에 오늘도 나를 부인하고 나의 십자가를 지고 이 길을 걸어가는 하루로 순종하련다.
오늘이란 시간 내게 있는 이웃이 누구냐 묻는 사람이 아니라 누군가의 이웃이 되어주는 사람으로 이 하루를 살아보자. 오늘도 여러 사역의 자리를 만나며 그들의 이웃으로 그들의 고충을 헤아리며 살펴주는 이웃이 되자. 더 나아가 내가 살펴야 할 이웃이 누구인지를 찾고 적극적으로 그들의 이웃이 되어가자.
주님, 감사합니다. 이 종이 지금까지 율법교사의 삶을 살았음을 발견케 하심에 감사드립니다. 제한과 규정을 넘어서 도움이 필요한 자를 찾아 이웃이 되어주는 자가 되게 하소서. 저의 힘으론 이 사명을 감당할 수 없습니다. 이런 저런 핑계를 대어서 피하고 싶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말씀이기에 오늘도 나를 부인하며 순종하기 원합니다. 오늘이란 시간이 이웃이 되어주는 하루가 되게 하소서. 오늘 제가 이웃이 되어주어야 할 사람이 누가 있을까요? 주님 이 사명을 감당케 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