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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21일 [사순 제5주간 목요일]
요한 8,51-59
죽음을 맛보지 않는 사람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내 말을 지키는 이는 영원히 죽음을 보지 않을 것이다.”라고 하십니다.
이 말에 유다인들은 예수님보고 마귀 들렸다고 비난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나는 아브라함이 태어나기 전부터 있었다.”라고 하시며 당신은 시공간을 초월하는 분이시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께 돌을 던지려고 합니다. 당신이 “나는 아브라함이 태어나기 전부터
‘있는 나’다.”라고 하시며 하느님의 이름을 당신에게 적용했기 때문입니다.
“있는 나”(I AM)는 하느님께서 모세에게 일러준 당신의 이름입니다.
이는 그리스도의 말씀을 지키면 하느님의 본성이 되어 죽지 않게 된다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말씀을 지킨다’라는 뜻은 무엇일까요? 이웃을 사랑하라는 계명 안에 머문다는 뜻입니다.
이웃을 사랑하면 왜 죽음을 맛보지 않을까요?
우리는 죽음의 개념에 대해 먼저 생각해보아야 합니다.
‘TV레셀’ 유튜브 채널에 이미 전이가 일어나 손을 쓸 수 없는 ‘위암 4기 시한부 판정받은 600억
자산가의 고백’을 보았습니다.
이 사업가는 일만 하다 젊은 나이에 청천벽력과 같은 판정을 받습니다.
아픈 줄도 모르고 살았는데 어느 날 갑자기 쓰러졌고 의사는 항암 안 하면 6개월, 하면 1년 정도 살 수 있다고 말한 것입니다.
배를 열어보았는데 암이 온몸에 전이 되어 있어서 손을 쓸 수 없어 그냥 닫아야 했습니다.
이분에게 제일 안타까웠던 상황은 태중에 임신한 딸의 탄생을 볼 수 없을 수도 있겠다는 절망감이었습니다.
“왜 아픈데 일만 계속하세요?”라는 질문에
“누워만 있으면 뭐 하겠어요?”로 대답합니다. 이분은 사는 마지막 날까지 일하다 죽겠다는
신념으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렇게 약으로 버티며 10년을 매일 열심히 일하며 살고 있습니다.
이분에게 채널 대표가 이렇게 물었습니다.
“아이가 태어나는 것을 못 보고 죽을 수도 있다고 하셨는데, 어쨌건 아이가 태어났을 때 아이를 보았을 때의 기쁨과 시한부 판정을 벗어났을 때의 기쁨 중 하나를 선택하라면 무엇을 택하겠습니까?”
“아이가 태어났을 때가 더 기분 좋죠. 아픈 거 뭐 이런 거를 떠나서 아이가 태어났을 때를 생각하면
지금도 머리카락이 서요.”
이 사람은 죽음이란 것이 삶 안에 들어와 있습니다.
삶이 끝나는 게 죽음이 아니라 삶의 일부입니다. 죽음의 고통이 자녀의 탄생 기쁨보다 작습니다.
그러면 이분은 죽음을 보지 않을 것입니다.
진짜 죽음은 가리옷 유다와 같은 죽음입니다. 죽음을 삶의 일부로 만들지 않고 삶이 끝나는 것으로 여겼기 때문입니다.
죽기 싫어서 발버둥 치는 것은 죽음의 가치를 아직 삶과 연결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일상에서도 작은 죽음을 맞고 있습니다. 이 죽음들이 이웃을 위해 쓰였다면 그 마지막 죽음의 가치도 알 수 있었을 것입니다.
죽음은 한순간의 죽음이 아니라 일상의 작은 죽음의 마지막일 뿐입니다.
『두 개의 산』에 이런 사연이 소개되었습니다. 오스트레일리아 브리즈번에 사는 그레그 선터라는 사람이 쓴 글입니다.
“4년 전에 21년을 부부로 함께 살았던 아내가 뇌종양으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아내가 병 진단을 받고 세상을 떠나기까지 시간은 채 6개월도 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아내의 죽음만큼이나 충격적이었던 사실은, 그 경험을 통해 내가 내면적인 성찰을 하면서 개인적으로 성장했고 또 각성했다는 점입니다.
내가 성장한 것의 정말 많은 부분이 아내의 죽음에
따른 결과였다는 깨달음에 나는 죄책감을 느낄 정도였습니다.
파커 파머는 《다시 집으로 가는 길》에서 심장이 찢어지는 것을 두 가지로 상상할 수 있다고
썼습니다.
하나는 심장이 갈기갈기 찢어지는 것을 상상하는 것이고, 또 하나는 심장이 활짝 열리면서 자기 자신과 세상의 고통과 기쁨, 절망과 희망을 더 많이 수용하게 되는 새로운 차원으로 나아가는 것을 상상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심장이 활짝 열리는 이미지는 아내가 죽은 뒤로 지금까지 내 인생의 추동력이 되어 왔습니다.
그것이 내 인생의 목적이 되어 왔습니다.”
그레그 선터라는 사람은 아내의 죽음을 통해 죽음이 나에게 미치는 긍정적인 영향을 믿게
되었습니다.
그러면 이 사람도 의미 있는 죽음을 향해 달려갈 것입니다.
누군가의 마음의 문을 여는. 이 사람에게 죽음은 더는 죽음이 아닙니다. 삶의 일부입니다.
이렇게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받아들인 이들은 자신도 그 십자가의 삶을 따라 살 것이기 때문에
삶과 단절되는 절망적인 죽음을 맛보지 않게 됩니다.
산청 성심원에서 평생을 가난한 이들과 함께해 오신 유의배 신부님의 방에는 이런 글귀가 있다고 합니다.
“살아 있는 동안 가난한 사람을 사랑하는 사람은 죽을 때 두려움이 없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3월21일 [사순 제5주간 목요일]
요한 8,51-59
여러분의 죄가 얼마나 나쁜 죄였든지 상관없습니다. 어떠한 죄도 하느님의 사랑보다 크지 않습니다!
머리에 재를 얹으며 ‘흙에서 났으니 흙으로 돌아가라.’고 외치던 재의 수요일이 엊그제 같은데, 벌써 사순시기는 막바지를 향해 달려가고 있습니다.
어떻게 다들 사순 판공 성사는 보셨나요? 사순시기와 대림시기, 적어도 두 번 고해성사를 보도록 강력히 초대하는 판공성사 문화는 우리 한국 가톨릭교회만이 지닌 특별한 전통입니다.
천주교 박해가 심했던 시절, 사제들은 여기저기 흩어져 숨어지내던 교우들을 연 1~2회 정도 방문하여 고해성사와 성체성사를 집전했습니다.
이런 전통이 정착된 것이 판공 성사입니다.
판공성사 때는 각 교우 앞으로 판공성사표가 배부되는데, 이는 교우들의 성사 생활 실태를 파악하는 기초 자료로 활용됩니다.
어떻게 성사를 강요할 수 있느냐며 불만을 하소연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교회법상 모든 교우들은 적어도 1년에 한 번 고해성사를 보게 되게 되어있는데, 따라서 판공성사만 빼먹지 않아도 고해성사와 관련된 신자로서의 의무를 충족시키는 것이니, 참으로 바람직한 전통이 아닐 수 없습니다.
숙제나 의무로서의 판공성사가 아니라 기쁨과 축제로서의 판공성사가 되었으면 참 좋겠는데...그것이 참으로 여의치 않습니다.
아직도 많은 분들이 마치 끌려가는 어린 양처럼 고해소 앞으로 나아갑니다.
매번 똑같은 죄를 짓고, 고백하고, 이게 대체 무슨 의미가 있는가? 의구심을 품고 있는 분들도 많습니다.
이런 우리에게 고해성사의 참된 의미와 참맛을 알게 해주는 책, 고해성사에 대한 가치와 지평을 넓혀주는 책이 출간되었습니다.
‘고해성사의 일곱 가지 비밀’(비니 플린 저, 전경훈 역, 성바오로)
저자의 고해성사에 대한 은혜롭고 감미로운 체험들과 가르침을 듣고 있노라니, 빨리 고해성사를 봐야겠다는 생각이 간절합니다.
“태양은 누구에게나 햇살을 비추어 빛과 열을 전합니다.
이같이 하느님은 늘 사랑하시고, 누구에게나 빛과 열을 전하십니다.
우리가 죄를 지어 하느님과 그분 사랑에서 우리 자신을 갈라놓을 때에도 하느님은 달라지지 않으십니다.
달라지는 것은 바로 우리 자신입니다.
죄란 바로 그 사랑을 거부하는 것입니다.
죄는 나를 동굴 속으로 데려갑니다.
고해성사는 나를 동굴 밖으로 꺼내줍니다.”
“사제는 단지 사죄(赦罪)를 선언하기 위해 고해소에 있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 영적 안내자,
스승, 교육자의 역할을 맡도록 부름받은 것입니다.
풀려나고, 치유되고, 회복되고, 용서받는 것, 이것이야말로 고해소 안에서 우리에게 일어나는 일입니다.”
“네가 고해소에 갈 때면, 내가 그곳에서 너를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명심하여라.
나는 단지 사제에게 감추어져 있을 뿐, 네 영혼 안에서 활동하는 것은 바로 나다.
너는 내 앞에서 죄를 고백하는 것이다.
사제는 가림막일 뿐이다.
내게 쓰임 받는 사제가 어떤 사제인지 따지지 마라.
고해성사 때 내게 하듯 네 영혼을 열어라.
그러면 나는 네 영혼을 내 빛으로 채울 것이다.”(파우스티나 성녀 일기)
“고해소에서 나올 때, 하느님의 현존이 나를 꿰뚫었고, 나는 하느님의 세 위격이 내 안에 머무심을 느꼈다.
아니, 알아차렸다.”(파우스티나 성녀 일기)
“과거에 지은 죄에 대한 기억들이, 심지어 이미 고해성사를 받았음에도 계속 되돌아와 머릿속을 맴돈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자기 죄가 정말로 용서받은 것인지 미심쩍어 합니다.
하느님의 자비를 절대 의심하지 마십시오!
여러분의 죄는 분명히 용서받았을 뿐만이 아니라 없어졌습니다!
여러분의 죄가 얼마나 나쁜 죄였든지 상관없습니다.
어떠한 죄도 하느님의 사랑보다 크지 않습니다.”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사순 제5주간 목요일 강론>
(2024. 3. 21. 목)(요한 8,51-59)
<부활과 영원한 생명>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내 말을 지키는 이는 영원히 죽음을 보지 않을 것이다(요한 8,51).”
“유다인들이 예수님께 말하였다.
‘이제 우리는 당신이 마귀 들렸다는 것을 알았소. 아브라함도 죽고 예언자들도 그러하였는데, 당신은 ′내 말을 지키는 이는 영원히 죽음을 맛보지 않을 것이다.‵ 하고 말하고 있소.
우리 조상 아브라함도 죽었는데 당신이 그분보다
훌륭하다는 말이오? 예언자들도 죽었소.
그런데 당신은 누구로 자처하는 것이오?’(요한 8,52-53)”
우리는 인생을 살아가면서 사랑하는 사람과의 사별 때문에 슬픔과 아픔을 겪고, 자기 자신의 죽음을 두려워하기도 하고, 그러면서 인생은 허무하다는 생각에 사로잡히기도 하고, 인간은 어떤 존재인가를 생각하기도 하고, 인생이란
무엇인가 묻기도 하고, 어떻게든 절망과 허무에서
벗어나려고 애를 쓰기도 합니다.
바로 그 ‘죽음에 대한 공포와 고통’에서 벗어나고 싶은 희망에서 종교가 생겼습니다.
그래서 ‘신앙’은 ‘희망’에서부터 시작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죽음이 끝이 아니기를, 죽음 너머에 영원한 생명을 누리는 새로운 세상이 기다리고 있기를 희망하면서, 그 희망을 이루어 줄 절대자를 찾으면서, 종교와 신앙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사도들은 그 희망을 이루어 주시는 분이 바로
‘죽음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이라고 증언했습니다.
베드로 사도는 이렇게 증언합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느님께서
찬미 받으시기를 빕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크신 자비로 우리를 새로 태어나게 하시어,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나신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로 우리에게 생생한 희망을 주셨고, 또한 썩지 않고 더러워지지 않고 시들지 않는 상속 재산을 얻게 하셨습니다. 이 상속 재산은 여러분을 위하여 하늘에 보존되어 있습니다(1베드 1,3-4).”
“여러분은 이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느님을 믿게 되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그분을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일으키시고 영광을 주시어, 여러분의 믿음과 희망이 하느님을 향하게 해 주셨습니다(1베드 1,21).”
예수님께서 죽음에서 부활하셨기 때문에, 우리는 죽음은 끝이 아니라는 것을 믿게 되었고, 우리도 예수님처럼 부활해서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되기를 희망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 혼자만을 위해서 부활하신 것이 아니라, 죽음이 끝이 아니라는 것을, 또 당신이 바로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실 수 있는 생명의 주님이시라는 것을 알려 주시려고, 또 영원한 생명을 누릴 수 있는 하느님 나라로 우리를 데려가시려고 당신이 먼저 부활하셨다는 것이 우리의 믿음입니다.
신앙인이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의 뒤를 따라가는 것은 바로 그 믿음과 희망 때문입니다.
“내 말을 지키는 이는 영원히 죽음을 보지 않을 것이다.” 라는 예수님 말씀은, 그 믿음과 희망을 보증해 주시는 말씀입니다.
<“내 말을 지키는 이”는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의 가르침대로 살면서 예수님의 뒤를 따라가는 사람입니다.
“영원히 죽음을 보지 않을 것이다.” 라는 말씀은,
지상에서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라는 뜻이 아니라,
하느님 나라에서 영원히 살게 될 것이라는 뜻입니다.
죽음은 영원한 생명으로 건너가는 관문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예수님 말씀에 크게 반발하는데, 그것은 세속 사람들의 일반적인 심정을 나타내는 모습입니다.
인간들이 생로병사의 고통을 겪는 현실은
예수님께서 오신 뒤에도 바뀌지 않았습니다.
여기서 ‘마귀 들렸다.’ 라는 말은, 미쳤다는 뜻입니다.
<헛소리를 하고 있다는 뜻으로 한 말입니다.>
그들은 아브라함도 죽었고 예언자들도 죽었기 때문에 예수님 말씀은 미친 사람의 헛소리라고 말하고 있는데, “유대인들은 에녹과 엘리야 예언자의 일은 잊어버렸는가?” 라고 물을 수 있습니다.
창세기 5장에 ‘에녹’이 죽지 않고 승천한 것이 기록되어 있고(창세 5,24), 열왕기 하권 2장에는 엘리야 예언자의 승천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습니다(2열왕 2,11).
예수님 말씀에 반발한 유대인들은 에녹과 엘리야의 일을 잊어버렸거나, 아니면, 그 일을 잊은 것이 아니라면 ‘영원한 생명’을 안 믿고 있었을 것입니다.
성경을 믿고 있는 신앙인들에게는, 인간은 누구나 한 번은 죽어야 한다는 말은 진실이 아닙니다.
에녹, 엘리야, 성모님의 승천 외에도, 살아 있는 동안에 예수님의 재림을 맞이하는 사람들은
죽음이라는 과정을 거치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주님의 말씀을 근거로 이 말을 합니다.
주님의 재림 때까지 남아 있게 될 우리 산 이들이 죽은 이들보다 앞서지는 않을 것입니다.
명령의 외침과 대천사의 목소리와 하느님의 나팔 소리가 울리면, 주님께서 친히 하늘에서 내려오실 것입니다.
그러면 먼저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이들이 다시 살아나고, 그다음으로, 그때까지 남아 있게 될 우리 산 이들이 그들과 함께 구름 속으로 들려 올라가 공중에서 주님을 맞이할 것입니다. 이렇게 하여 우리는 늘 주님과 함께 있을 것입니다(1테살 4,15-17).”
어떻든 우리에게는, 유대인들의 말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무엇을 믿고, 무엇을 희망하느냐가 중요할 뿐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우리가 현세만을 위하여 그리스도께 희망을 걸고 있다면, 우리는 모든 인간 가운데에서 가장 불쌍한 사람일 것입니다(1코린 15,19).” 라고 말하는데, 만일에 부활과 영원한 생명이 없다면, ‘모든 인간이’ 전부 다 불쌍하고 허무한 존재가 될 것입니다.
(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