답청(踏靑)
정희성
풀을 밟아라
들녘엔 매 맞은 풀
맞을수록 시퍼런
봄이 온다
봄이 와도 우리가 이룰 수 없어
봄은 스스로 풀밭을 이루었다
이 나라의 어두운 아희들아
풀알 밟아라
밟으면 밟을수록 푸른
풀을 밟아라
(시집 『답청』, 1974)
[작품해설]
이 시는 역사의 봄을 쟁취하기 위한 준비로서의 자기 단련을 위한 다짐을 보여 주는 작품으로, 폭력과 압제의 1970년대와 대결하던 이 땅의 지성들의 뜨겁고도 냉철한 숨결을 느끼게 해 준다. 제3공화국 시절의 정치적⸱사회적 물리력에 맞서 그 권력에 의해 희생된 민중의 삶에 대한 분노를 절제된 울분으로 노래한 정희성은 이 작품을 표제시로 삼은 첫 시집 『답청(踏靑)』을 통해 우리 시문학사에 뚜렷한 첫발을 내딛게 되었다.
‘답청’이란 음력 삼월 삼짇날에 봄이 돌아온 것을 기뻐하며 들판에 나가 봄풀을 밟고 즐겁게 노는 민속놀이이나, 이 시에서는 그리 밝거나 경쾌한 느낌이 들지 않는다. 그것은 풀을 밟는 사람들이 바로 ‘이 나라의 어두운 아희들’이기 때문인데, 그들은 가난과 고통 속에서 힘겹게 살아가는 이 땅의 민중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물론 이 시에서의 ‘풀’은 아무리 밟아도 다시 일어서는 강인한 생명력의 표상으로 차용됨으로써 민중의 이미지로 변용되어 있다. 언제나 권력의 채찍과 군홧발에 의해 ‘매 맞고’ ‘짓밟히’면서도 오히겨 그것에서 민중의 힘을 획득하거나 그것을 자신들의 철저한 반성의 기회로 삼는 그들이기에 그들은 ‘봄이 왔다고 해서’ 마냥 즐거워할 수만은 없는 것이다. 비록 봄이 되더라도 풀처럼 하나 된 공동체를 이루지 못하거나 스스로의 힘으로 봄을 만들어 내지 못하는 민중들이기에 그들은 즐거워할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4행에서의 ‘봄’이 매 맞고 짓밟히면서 만들어 내야 할 사회적 봄을 지칭한다면, 5.6행에서의 ‘봄’은 자연이 이룬 계절적 봄 또는 우리가 본받아야 할 계절의 봄이라는 의미로, 화자에게 있어 이것은 진정한 의미에서의 봄은 아닌 것이다. 이러한 ‘봄’의 이미지는 ‘들을 빼앗겨 봄조차 빼앗기겠네’라고 노래한 이상화의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나 ‘기다리지 않아도 오고 / 기다림마저 잃었을 때도 오는’ 이성부의 「봄」과 동일한 이미지이다.
‘민초(民草)’라는 단어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풀’은 그 특유의 질긴 생명력과 범속성(凡俗性) 등으로 하여 예로부터 민중의 이미지로 그려져 왔는데, 그 이미지화(化)의 첫 자리에 김수영의 「풀」이 놓여 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그런데 김수영의 「풀」이 ‘바람’에 무수히 부대끼지만 결코 쓰러지지 않는다는 다소 소극적이고 수동적인 이미지에 머물고 있는 데 비해, 정희성은 거기에다 주체적이고 능동적이고 저항적인 이미지를 덧붙임으로써 이 작품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역사 주체의 바람직한 모습을 ‘풀’로 형상화하는 데 성공한다.
이렇듯 ‘풀’의 함의(含意)가 민중성이라면, ‘봄’은 그 민중들이 역사의 주체가 되어 함께 삶을 이루어 가는 미래이자 희망을 함축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시가 씌어진 당시 상황과 결부시킨다면, 그것은 군사 독재의 폭압이 사라지고 진정한 민주화를 이룬 정치적 봄이자 사회작 봄을 의미하면서도 민중들이 꿈꾸는 소망스런 삶 일반의 이미지로 확대되는 이중적 구조를 갖는 것이다.
한편 이 시에서의 ‘매 맞음’ 또는 ‘밟힘’이라는 상황 또한 이중적인 구조를 갖고 있다. ‘발’과 ‘풀’의 이항 대립에서 연상되는 권력의 물리력과 민초의 피동성이라는 고전적인 이해 방식 외에 그것은 우리 스스로가 우리를 ‘때리고 밟는’ 자각과 반성의 다짐의 의미로도 해석할 수 있는 것이다. 특히 마지막 두 행이 보여 주는 상황은 ‘답청’이라는 민속의 의미와 겹쳐져서 우리 스스로 우리를 담금질하고 단련함으로써 더욱 강해져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른 것이라고 하겠다.
[작가소개]
정희성(鄭喜成)
1945년 서울 출생
서울대학교 국문과 및 동 대학원 졸업
1970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시 「변신」이 당선되어 등단
1981년 제1회 감수영문학상 수상
1997년 제2회 시와시학상 수상
1999년 제16회 만해문학상 수상
시집 : 『답청(踏靑)』(1974), 『저문 강에 삽을 씻고』(1978), 『한 그리움이 다른 그리움에게』(1991), 『시를 찾아서』(20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