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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506. 묵상글 ( 부활 제5주간 수요일. - 붙어 있지만 열매는 맺지 않는?.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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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506. 부활 제5주간 수요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2026.05.06 04:12
- 붙어 있지만 열매는 맺지 않는?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않으면 스스로 열매를 맺을 수 없는 것처럼,
너희도 내 안에 머무르지 않으면 열매를 맺지 못한다."
주님께서는 포도나무와 가지의 관계를 비유로 들며
우리가 주님이라는 포도나무에 붙어 있어야 함을,
그래야 말라비틀어지지 않고 열매 맺음을 가르치십니다.
저는 분명 주님 포도나무에 붙어 있는 가지이긴 합니다.
이 글을 읽으시는 여러분도 분명 그러실 겁니다.
문제는 붙어 있지만 열매 맺지 못하는 것입니다.
오늘은 그것에 대해 성찰하고 나눠 보고자 합니다.
첫째로 성당에 나가긴 하지만 교회 생활만 하는 겁니다.
달리 말하면 발바닥 신자일 뿐이고
성당 문을 나오는 순간 신앙생활은 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에게서 사람들은 예수님을 볼 수 없고,
복음의 행복과 기쁨이 무엇인지 알 수 없습니다.
그래서 아무 열매를 맺지 못합니다.
아무도 그를 보고 신앙인이 되지 않습니다.
둘째로 성당에 가긴 하지만 하느님의 말씀이 귓전을 스칠 뿐
그의 마음 안에 머물지 않아 그 사람 안에 생명이 없기에
열매를 맺지 못할 뿐 아니라 그 자신도 생기 없이 살다가
시들시들해지고 마는데 이것은 성체를 영하고도 마찬가지입니다.
셋째로 교회 내에서 일을 많이 하고 사회봉사를 많이 하는 사람도
그 활동이 열매를 맺지 못할 수 있습니다.
프란치스코의 가르침대로라면 기도와 헌신의 정신이 없이
자기 뜻대로 그리고 자기의 힘으로 일을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금세 지쳐서 나가떨어지거나
하느님의 일을 자기 일로 만들어버리거나
그 일마저 되는듯하다가 실패로 돌아갈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당에 매일 나가는 것만으로
주님께 붙어 있다고 착각하지 말 것입니다.
‘단디하라’는 경상도 말을 제가 잘못 알고 있는 것이 아니라면
우리는 근근이 교회 생활하는 것으로 만족하지 말고
신앙생활을 단디하여 주님께 단단히 붙어 있어야 할 것입니다.
나무에 붙어 있지만 열매 맺지 못하는 가지가 나는 아닌지,
나무에 붙어 있지만 나는 삭정이가 아닌지 돌아보는 오늘 우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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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506. 부활 제5주간 수요일. 호명환 가롤로 신부님.
CAC 매일묵상
사랑의 신비주의자(클레르보의 베르나르도)와 그의 글
CAC(Center for Action and Contemplation) 리처드 로어의 매일 묵상 (호명환 번역)
사랑은 하느님 현존의 충만함입니다.
리처드 로어의 매일 묵상
아가서에 나오는 사랑하는 이와 사랑받는 이
사랑의 신비주의자(클레르보의 베르나르도)와 그의 글
2026년 5월 5일 화요일
제임스 핀리는 12세기 신비가이자 수도원 개혁가였던 클레르보의 성 베르나르도의 가르침을 묵상합니다. 성 베르나르도는 「아가서」에 대한 가장 풍성한 주석가 가운데 한 사람입니다:
클레르보의 성 베르나르도(1090–1153)는 시토회 수도원 클레르보의 아빠스였습니다. 그는 「아가서」에 깊이 매료되어, 생애 마지막 20년 동안 무려 86편의 강론을 남겼습니다. 한 구절 한 구절을 따라가며 해설했지요. 베르나르도는 이 책을 성경 전체 가운데 가장 중요한 텍스트로 여겼습니다. 그 이유는 "혼인 관계의 중심인 사랑의 주제"(nuptial theme)—곧 육화한 사랑과의 궁극적 결합—을 담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부분은 제게도 개인적으로 깊은 의미가 있습니다. 저는 토머스 머튼과 함께 시토회 수도원에서 살았는데, 그곳에서 이러한 혼인적 일치와 사랑의 신비에 깊이 젖어들었기 때문입니다.
시토회는 베네딕도회 수도원의 개혁으로 시작되었습니다. 수도자들은 성 베네딕도의 규칙의 핵심, 곧 복음의 중심으로 다시 돌아갈 필요를 느꼈습니다. 성 베네딕도의 규칙 첫머리에서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아들아, 스승의 말씀을 귀 기울여 들으라. 오늘 너희가 그분의 목소리를 듣거든, 너희 마음을 굳게 닫지 말라." 여기서 스승은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마음 깊은 곳에서 우리를 부르시는 예수님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도록 귀 기울여야 합니다.
베르나르도는 「아가서」 강론을 통해, 우리가 하느님께 깊이 순종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깨닫도록 이끌고자 했습니다. 본질적으로 하느님께 순종한다는 것은, 하느님의 무한한 현존을 통해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끊임없이 당신 자신을 내어주시며, 우리 존재 안에 선물로 머무르신다는 사실을 내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사랑은 현존의 충만함입니다. 무한한 사랑은 우리에게 자신을 내어주며, 하느님 없이는 아무것도 아닌 우리의 존재 안에서, 바로 지금 이 순간의 현존이라는 기적과 선물로 다가옵니다. 그것을 보고 받아들이는 것이 곧 하느님께 순종하는 것입니다. 베르나르도는 이 무한한 사랑의 급진성을 다시금 드러내고자 했습니다. 곧, 이 사랑은 우리의 불완전함과 깨어짐 속에서도 끝없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느님의 사랑을 말합니다. 그는 「아가서」를 사용했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사랑에 관한 노래이기 때문입니다. 낭만적이고, 혼인적이며, 신비적이고, 성령 안에서 드러나는 친밀한 사랑을 노래하는 책이기 때문입니다. [1]
클레르보의 성 베르나르도는 「아가서」의 첫 구절들을 이렇게 주석했습니다:
"아, 제발 그이가 내게 입맞춰 주었으면!"(아가 1,1).
누가 말합니까? 신부(新婦)입니다. 그녀는 누구인가요? 하느님을 갈망하는 영혼입니다.
만일 누군가가 종이라면 그는 주인의 얼굴을 두려워합니다. 품팔이라면 그는 주인의 손에서 보수를 기대합니다. 제자라면 그는 스승의 가르침에 귀를 기울입니다. 아들이라면 그는 아버지를 공경합니다. 그러나 입맞춤을 청하는 영혼은 사랑에 빠진 영혼입니다.
자연의 모든 은사 가운데서도 이 사랑의 애정은 가장 높은 자리를 차지합니다. 특히 그것이 그 근원, 곧 하느님께로 서둘러 돌아갈 때 더욱 그러합니다. 말씀과 영혼이 서로를 향해 품는 달콤한 애정을 표현하기에, "신부와 신랑"이라는 말보다 더 달콤한 표현은 없습니다.
우리 공동체 이야기
오늘 저는 삶이 내 통제를 벗어나고 있다는 억압감 속에, 우울로 흘러들어가는 듯한 느낌을 받고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이미 이런 자리에 서 본 적이 있습니다. 그때마다 나를 이끌어 준 것은 하느님께서 길을 열어 주신다는 신뢰심을 가졌습니다. 그분의 은총을 깨닫게 하시며, 결국 나를 반대편으로 건너가게 하셨습니다. 그것은 나를 격려하여, 신뢰하고 순종하도록 이끌어 줍니다. 오늘이 어디로 향할지 알 수는 없지만, 과거의 경험을 통해 길이 열려 있음을 압니다. 그리고 그 길을 이루신 분은 하느님이셨습니다.
—Don M.
References
[1] James Finley, “A Love Mystic and His Text,” Richard Rohr’s Daily Meditations (CAC Publishing, 2026).
[2] Bernard of Clairvaux, Saint Bernard on the Love of God, trans. Terence L. Connolly (Spiritual Book Associates, 1937), 77–78.
Image credit and inspiration: Kim MacKinnon, untitled (detail), 2018, photo, Canada, Unsplash. Click here to enlarge image. 달을 사랑스럽게 바라보는 것은 영혼이 하느님을 향해 올리는 사랑의 시선과, 그에 응답하시는 하느님의 사랑스러운 시선을 우리에게 상기시켜 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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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영성 묵상글
하느님은 오직 우리 한 사람 한 사람과 사랑을 나누는 것만을 가장 큰 기쁨으로 여기시는 분입니다!~~~
1950년대 초기에 영국의 역사학자 아놀드 토인비(Arnold J. Toynbee)에 의해 처음으로 사용된 포스트-모더니즘(post-modernism)이라는 단어는 현금의 시대 정신을 잘 표현해 주는 말입니다. 우리말로는 "후기-근대주의" 혹은 "초-근대주의"라고도 번역되는데, 그 의미가 모호해서 그냥 영어로 '포스트-모더니즘'이라고 쓰는 경우가 많습니다.
아주 간결하게 설명하자면 이렇습니다. 모더니즘(현대주의)이 파편화된 현실에 통일성과 총체성과 질서를 부여하려고 노력하는 것이었다면, 이 포스트-모더니즘은 현실의 파편성과 비결정성과 불확실성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탈중심과 다양성을 받아들이는 정신이라고 볼 수 있는데, 이는 단순한 사상적 체제나 사조가 아니라 현 시대의 문화적 경향성이라고 봅니다.
여기에는 흑백의 논리와 같은 이분법적인 논리를 거부하며 전체를 아우르려는 긍정적인 경향도 있기는 하지만, 동시에 기존의 가치 체계의 붕괴와 개인주의의 확산, 그리고 절대적 규정과 가치를 받아들이지 않으려는 부정적인 경향도 보입니다.
믿음의 삶의 관점에서 볼 때 우리는 포스트-모더니즘이 지니고 있는 긍정적인 경향을 잘 포용하면서도 동시에 하느님 선과 사랑, 그리고 그 사랑과 선의 하느님 섭리에 절대적인 중심을 두려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왜냐하면 절대적인 것이 부재하는 상황은 다른 모든 것은 물론이고 하느님마저도 상대적인 존재로 전락시킬 크나큰 위험이 있기 때문입니다.
상대주의는 그 자체로 큰 문제를 품고 있습니다. 이 상대주의는 어떤 것도 절대적이지 않다고 주장하면서 모든 것을 재고 분석하고 값어치를 따지는 상거래적 정신 구조로 우리 삶을 몰락시킬 수 있는 위험을 지니고 있는 것입니다. 선이나 사랑과 관련해서도 절대적인 사랑과 선이 없으니까 상대적으로 조금 더 선하고 조금만 더 사랑하면 되는 것이지요. 그러나 여기까지는 그나마 괜찮습니다. 더 큰 문제는 '내'가 더 선하거나 더 사랑할 수 없을 때 우리는 '내' 앞에 있는 다른 존재를 '나'보다 더 나쁜 존재로 만들고자 하는 에고의 심리를 발동시킨다는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당신이 "참 포도나무"요 당신의 아버지 하느님은 포도나무를 보살피는 "농부"라고 말씀하시면서 이 나무에 꼭 붙어 있으라고 당부하십니다.
요즘 우리 사회는 수많은 정보와 주장들로 넘쳐납니다. 그래서 우리가 정신을 차리고 깨어 있으면서 사랑이신 하느님 안에 머무르려는 수양(그리스도와의 인격적 만남)을 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잘못된 물살에 휩쓸려 이리 저리 헤맬 수가 있습니다. 그러면서 어떤 하나의 주장이나 정보에 정신을 쏟고는 그것이 전부인 양 차각한 채 어둠의 나락으로 빠져들 수도 있는 것입니다.
1946년에 그 유명한 누렌베르그 재판에서 마지막으로 처형된 10명의 주요 나치 전범들이 정신이 나갔던 히틀러에게 맹종하며 대학살을 저질렀음에도 한결같이 죽음 전에 자신들의 결백과 나치에 대한 충성을 마지막 말로 남겼습니다. 과연 가능한 일일까요? 자기들은 세상의 정의를 실현한 것이라고 주장한 것입니다.
이들의 모습은 마치 예수님께서 하신 다음의 말씀을 상기시켜 줍니다. "게다가 너희를 죽이는 자마다 하느님께 봉사한다고 생각할 때가 온다."(요한 16,2).
이것이 바로 어둠의 나락으로 빠져든 극단적인 예입니다. 그리고 이런 일은 지금도 우리 가운데서 벌어지고 있지 않습니까?!
엊그제 묵상에서 함께 나누었듯이 오늘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당신 안에 머무르라는 당부를 하십니다. 우리가 삶을 영위해 가며 많은 열매를 맺기 위해서는 예수님이라는 완전한 사랑의 인격을 만나 그 안에 머무르려는 수양이 우리에게는 꼭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또 이런 삶을 사는 것이 하느님께서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창조해 주시면서 우리에게 부여해 주신 사명입니다. 어떤 일을 하든, 어떤 능력이 있든 상관없이 말입니다!
이 머무름은 기도의 양을 늘린다든가, 봉사를 더 열심히 한다든가, 어떤 신심 행위를 더 많이 한다든가, 희생을 더 많이 하는 등의 어떤 행위를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그저 우리에게 "내 머무르고 나도 그 안에 머무르는 사람은 많은 열매를 맺는다." 하고 말씀하시지 무언가를 행해야 당신 안에 머무를 수 있다고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그것은 바로 우리 안에 이미 부여된 그분과 우리가 일치되어 있는 현실을 깊이 의식하고 인식하라는 말씀입니다.
또한 이 말씀 바로 다음에 이어지는 말씀, 즉 "너희는 나 없이 아무 것도 하지 못한다."(요한 15,5)라고 하신 주님의 말씀은 우리에게 희망과 동시에 경고를 주는 아주 강력한 말씀입니다. 성 바오로 사도는 이를 깊이 깨달았던 사람들 중 하나였습니다. 그래서 그는 필리피인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나에게 힘을 주시는 분(그리스도) 안에서 나는 모든 것을 할 수 있습니다."(필리 4,13) 라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이 말씀은 또한 우리에게 주는 경고이기도 합니다. 루카 복음의 "잃었던 아들의 비유"에서 아들은 아버지를 떠나 스스로 살려 했지만 결국 궁핍과 고통 속에서 관계 단절의 깊이를 깨달았습니다. 그는 마침내 "일어나 아버지께 가서 이렇게 말씀드리라. '아버지, 제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습니다."(루카 15,18) 하고 결심합니다.
우리도 삶이 순조로울 때는 주님을 잊고, 모든 것이 '내' 노력과 재능 덕분이라고 착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병이나 죽음, 다양한 종류의 어려움, 관계의 위기와 같은 빈곤과 어둠이 닥칠 때, 우리는 비로소 생명의 힘이신 주님과의 관계가 끊어졌음을 깨닫습니다. 포도나무이신 주님께 연결되지 않으면 가지인 우리의 삶은 그림자 속에 머물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십자가의 성 요한은 이렇게 노래합니다. "오, 하느님께서 '내' 영혼 안에 머무르시며 쉬고 계심을 늘 의식하는 영혼은 얼마나 행복한가!"라고요.
또한 초대 교회 공동체 또한 위기를 맞았을 때 주님의 이름으로 함께 모여 문제를 해결했습니다(사도행전 15,1 이하). 그들은 모든 인간적 문제의 해답과 위로가 주님 안에 있음을 깨달았습니다.
그러니 우리도 언제나 주님과 하나 되어 있음을 깊이 의식하기 위해 깨어 있어야 합니다. 우리 삶의 열매는 우리의 재능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라, 포도나무이신 주님께 굳게 매여 있음에서 비롯된다는 진리를 깊이 새겨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을 만나고자 할 때, 아니 우리를 하나 되시기 위해 이미 우리 내면에 와 계신 그분을 맞아들이고자 할 때 주님께서는 가장 기뻐하실 것입니다. 그분은 오직 우리 한 사람 한 사람과 사랑을 나누는 것만을 가장 큰 기쁨으로 여기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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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506. 부활 제5주간 수요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오늘부터 예수님의 고별담화의 두 번째 부분이라 할 수 있는 15장의 말씀을 듣게 됩니다. 15장은 흔히 말하는 ‘관계의 장’으로 아버지와 예수님, 예수님과 제자들, 예수님과 제자들과 세상과의 관계를 계시해 주십니다.
오늘 <복음>은 “참 포도나무와 가지”에 대한 비유입니다. <구약성경>에서 “포도나무”는 ‘이스라엘 백성’을 지칭합니다. 그런데 여기에 “참”이라는 형용사가 붙어서, 예수님의 진리성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 비유”는 “붙어있다, 머물다, 열매 맺다”라는 동사로 요약될 수 있습니다. 특히 “머물다”라는 단어가 여덟 번이나 반복되고 있습니다. 이 단어는 “정주”를 서원하고 살아가는 우리 수도승들에게는 특별한 의미를 지닙니다.
오늘 <복음>에서 “머물다”의 의미는 우선 “붙어있음”을 뜻합니다. 곧 포도나무에 붙어있어서, 그 나무로부터 수액을 받아먹는 것을 말합니다. 그것은 마치 물고기가 물을 떠나면 죽음이듯이,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있지 않으면 죽는 까닭입니다. 그러니, “머물다”라는 말은 생사를 담보로 맺어지는 유대의 끈을 말합니다. 곧 뗄래야 뗄 수 없는 생명으로 유착된 “상호 불가분의 긴밀한 관계”를 뜻합니다.
그러나 단순히 포도나무에 “붙어있다”는 사실만으로는 결코 “머물러 있다”고 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나뭇가지가 나무에 붙어있다 하더라도, 열매를 맺지 않는 가지는 잘려져 불에 태워져버리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머물다”는 말의 의미는 그분 말씀의 권능이 우리 안에서 열매 맺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것은 가지가 나무에 속해 있을 뿐 결코 스스로 열매를 맺을 수는 없듯, 그분께 승복하여 그분의 사랑을 받아들일 때 맺게 되는 열매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나 없이 아무 것도 하지 못한다.”(요한 15,5)
이처럼, “머물다”는 말의 진정한 의미는 하느님의 현존과 활동에 자신을 내어주는 ‘상호친교’요 ‘상호교제’입니다. 그리고 이를 가능케 하는 것은 이미 우리 안에 계신 삼위 하느님의 내주입니다. 이토록, 우리는 그분의 ‘참 생명’을 공유하고, 그분과 결합하여 한 영이 됩니다. 이를 가리켜, 사도 바오로 말합니다.
“주님과 결합하는 이는 그 분과 한 영이 됩니다.”(1코린 6,17)
이토록,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하느님의 본성에 참여하게 하셨습니다.”(2베드 1,4). 우리 안에 당신이 머무르신다는 이 놀라운 사랑의 신비 앞에, 우리는 경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참으로 놀라운, 헤아릴 수 없는 자비와 신비입니다.
이토록, 우리는 그분이 머무시는 현존의 자리요, 그분이 사랑의 열매를 이루시는 활동의 공간이요, 장소인 것입니다. 실로, 우리 주님께서는 우리보다 앞서, 우리 안에 정주하십니다. 이 얼마나 큰 감사와 감격인가요.
그러니 지금 여기 공동체 안에 머물러있다는 것만으로 이미 행복입니다. 이미 차고 넘치는 자비요 은총입니다. 그러기에, 오늘 우리는 단지 공동체에 정주하는 회원으로 지탱하는 것을 넘어, 사랑의 실현인 열매를 맺어야 할 일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너희도 내 안에 머무르지 않으면 열매를 맺지 못한다.”(요한 15,4)
주님!
당신께서는 무너뜨리지만 열매를 맺어주셨고
부서뜨리지만 새싹을 틔워주셨습니다.
이토록 제 자신이 부서지고서야, 제 자신을 건네주고서야,
당신께 머무르는 법을 배워갑니다.
꽃이 지듯, 제가 무너지는 것을 안타까워하지 않게 하소서.
열매가 떨어지듯, 제가 사라지는 것을 서러워하지 않게 하소서.
주님, 저는 오늘도 떨어져야 머물게 되는 이 신비로운 사랑 앞에
떨어지지 못함이 부끄럽고 죄송스러워 고개를 떨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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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506. 부활 제5주간 수요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동상이몽(同床異夢)’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같은 자리에 있으면서도 서로 다른 꿈을 꾸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 ‘적과의 동침’이라는 말도 있습니다. 겉으로는 함께 있지만, 마음과 방향은 전혀 다른 상태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의 길, 겸손과 희생의 길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여전히 영광과 자리, 명예를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같은 길을 걷고 있지만 서로 다른 꿈을 꾸고 있었습니다. ‘동상이몽’이었습니다. 율법 학자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율법의 정신, 곧 사랑과 생명을 말씀하셨지만, 율법학자들은 규정과 형식에 머물렀습니다.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 있는 것인데, 사람을 안식일의 틀 안에 가두었습니다. 결국 하느님의 이름으로 하느님의 아들을 십자가에 못 박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신앙 안에서 벌어질 수 있는 가장 큰 ‘동상이몽’입니다.
이 모습은 2천 년 전 이야기만이 아닙니다. 오늘 우리의 공동체 안에서도 충분히 일어날 수 있는 일입니다. 특별히 ‘교포 사목’의 현실 속에서는 더욱 그렇습니다. 한국에서 사목하다가 미국으로 오게 되면, 처음에는 모든 것이 낯설고 다르게 느껴집니다. 신앙은 같지만, 표현이 다르고 공동체의 분위기도 다르고, 기대하는 것도 다릅니다. 한국에서는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졌던 것들이 이곳에서는 부담이 되기도 하고, 반대로 이곳의 방식이 한국에서 온 사제에게는 익숙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어떤 분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한국에서는 이렇게 했는데 왜 여기서는 다르게 하십니까?” 또 어떤 분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여기는 미국입니다. 미국 방식으로 해야 합니다.” 두 분의 말씀은 모두 이해가 됩니다. 그러나 그 안에는 서로 다른 기대와 기준이 있습니다. 바로 ‘동상이몽’입니다.
이런 상황이 계속되면, 공동체는 조금씩 지치게 됩니다. 작은 오해가 쌓이고, 서운함이 생기고, 때로는 말하지 못하는 거리감이 생기기도 합니다. 마치 같은 기차선로 위에서 서로 마주 보고 달리는 두 기차와 같습니다. 방향이 다르면 충돌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동상동몽(同床同夢)’의 공동체가 되어야 합니다. 같은 자리에 있으면서 같은 꿈을 꾸는 공동체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서로를 바라보는 것을 넘어서, 함께 같은 방향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서로를 마주 보면 부족함이 보입니다. 고쳐야 할 것이 보입니다. 그러나 같은 곳을 바라보면 목적이 보이고, 희망이 보입니다. 우리의 시선이 서로에게 머무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 향할 때 우리는 하나가 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길을 몸소 보여 주셨습니다. 하느님의 아들이시지만 사람이 되어 오셨고, 사람의 언어로 말씀하시며, 사람들의 삶 속으로 들어오셨습니다. 상대를 이해하고, 함께하기 위해 낮아지셨습니다. 이것이 ‘동상동몽’의 시작입니다.
초대교회도 같은 길을 걸었습니다. 음식 나눔의 문제로 불평이 생겼을 때, 사도들은 그것을 외면하지 않았습니다. 봉사자 일곱을 세워 역할을 나누었습니다. 각자의 은사에 따라 공동체를 섬기도록 했습니다. 또한 할례의 문제로 큰 논쟁이 있었을 때, 사도들과 원로들은 함께 모여 기도하고 토론하며 식별했습니다. 그리고 이방인들에게 새로운 길을 열어 주었습니다. 전통을 지키면서도, 새로운 상황에 맞는 결정을 내렸습니다. 그렇게 ‘동상이몽’을 ‘동상동몽’으로 바꾸어 갔습니다. 저도 사목을 하면서 한 가지를 늘 마음에 새기려고 합니다. 바로 ‘만남, 경청, 식별’입니다. 먼저 만나야 합니다. 얼굴을 보고 이야기를 나누어야 합니다. 그리고 들어야 합니다. 내 생각을 말하기 전에, 상대의 이야기를 들어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기도 안에서 식별해야 합니다. 이것이 교회가 걸어온 길이고, 예수님께서 보여 주신 길입니다.
아무리 좋은 가전제품도 전원이 들어오지 않으면 작동하지 않습니다. 기능이 아무리 좋아도, 디자인이 아무리 훌륭해도 소용이 없습니다. 전원이 연결되어야 합니다. 우리의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예수님과 연결되어 있지 않으면, 아무리 열심히 해도 열매를 맺기 어렵습니다. 그래서 오늘 예수님께서는 분명하게 말씀하십니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다.”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으면 열매를 맺습니다. 그러나 떨어지면 말라 버립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어디에 붙어 있는가입니다. 우리가 예수님과 함께 있다면, 우리가 있는 곳이 미국이든, 한국이든, 어디든 상관없습니다. 우리는 같은 꿈을 꾸게 됩니다. 그러나 예수님과 떨어지면, 같은 공동체 안에서도 서로 다른 길을 가게 됩니다. 결국 ‘동상이몽’이 됩니다.
우리 공동체가 바라보아야 할 곳은 분명합니다. 바로 포도나무인 예수님입니다. 우리가 그분 안에 머물 때, 우리는 하나가 됩니다. 같은 꿈을 꾸게 됩니다. 우리 교포 공동체가 ‘동상이몽’을 넘어 ‘동상동몽’의 공동체가 되기를 바랍니다. 서로를 바라보는 공동체가 아니라, 예수님을 함께 바라보는 공동체가 되기를 바랍니다. 그때 우리는 많은 열매를 맺게 될 것이고,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는 공동체가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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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506. 부활 제5주간 수요일.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 죄보다는 죽음을! 오늘은 저희 살레시오회에 참으로 특별한 날입니다. 저희 창립자 돈보스코(1815-1888)에 의해 창안된 독특한 청소년 교육 방식인 예방 교육이 얼마나 효과적이고 의미 있는 것인가를 만천하에 선포한 기념비적 인물의 축일입니다. 그는 돈보스코의 애제자로서 그가 제시한 교육 노선에 단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살아갔던 도미니코 사비오(1842-1857) 성인입니다. 오늘 우리는 그를 일컬어 성령의 걸작이요 돈보스코 교육 방법의 결실이라고 표현합니다. 열두살 되던 해 도미니코 사비오는 돈보스코와의 운명적인 만남을 갖습니다. 첫눈에 반한 도미니코 사비오는 돈보스코에게서 착한 목자요 따뜻한 아버지요, 스승이요 친구의 모습을 발견했습니다. 한 마디로 홀딱 반한 것입니다. 돈보스코의 오라토리오에 들어온 도미니코 사비오의 시선이 처음으로 향한 곳은 돈보스코의 사무실 문에 붙어있던 작은 현판이었습니다. 거기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습니다. “Da mihi animas cetera tolle.”(저에게 영혼을 주십시오. 나머지는 다 가져가십시오.) 그 현판을 아무 말없이 한참을 바라보던 도미니코 사비오는 돈보스코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돈보스코, 저는 알았습니다. 이곳을 이익을 창출하는 곳이 아니라 영혼을 구하는 곳이군요. 저도 돈보스코의 소중한 사업에 참여하고 싶습니다.” 그후 도미니코 사비오는 돈보스코의 오라토리오 안에서 돈보스코의 제자였지만, 또래 청소년들을 선으로 인도하는 돈보스코의 둘째 가라면 서러워할 협력자가 되었습니다. 돈보스코는 오라토리오에 살아가던 셀수도 없이 많은 장난 꾸러기들을 하느님께로 안내하는 과정에서 도미니코 사비오를 적극적으로 활용했습니다. 도미니코 사비오의 성모 신심은 참으로 각별했습니다. 친구들과 함께 토리노 시내를 걸어가던 중 한 친구가 도미니코 사비오에게 물었습니다. “사비오, 여기저기 온통 볼거리들이 엄청 많은데, 어찌 너는 그렇게 앞만 보고 걸어가고 있니? 너는 그 눈을 대체 언제 써먹으려고 그러니?” 사비오의 대답이 놀랍습니다. “쓸모없는 곳에 시선을 두지 않는 대신, 내가 천국에 갔을 때, 거룩한 성모님의 모습을 볼 때, 비로소 내 눈을 사용할거야.” 도미니코 사비오의 원죄없이 잉태되신 성모님에 대한 신심이 각별했습니다. 그는 수시로 이렇게 성모님께 아뢰었습니다. “성모님, 저는 항상 당신의 사랑받는 아들이 되기를 원합니다. 그러니 제가 죄를 짓기보다는 차라리 죽게 해주십시오.” 한 마디로 요약하면 이렇습니다. “죄보다는 죽음을!” 도미니코 사비오가 세상을 떠나기 3년 전, 1854년 비오 9세 교황님께서는 원죄없이 잉태되신 동정 마리아 교리를 선포하셨습니다. 그때부터 그는 거듭 고민하고 또 고민했습니다. 어떤 고민? “많은 것을 베풀어주신 성모님께 감사의 마음을 담아 뭔가 꼭 해드리고 싶은데, 시간이 별로 없고...” 고민 끝에 도미니코 사비오는 오라토리오 내 몇몇 마음 맞는 친구들을 모아 작은 모임 하나를 결성했습니다. 모임의 이름은 ‘원죄없이 잉태되신 성모회’였습니다. 회원들은 세세한 규정도 만들면서 자신들을 성모님께 온전히 봉헌하고, 성모님께 매일 사랑과 희생과 봉사라는 꽃다발을 봉헌하기로 결심했습니다. 놀랍지 않습니까? 세례 받은 지 30년, 40년, 50년이 지난 아직도 성모님께 이거 해주세요, 저거 해주세요, 졸라대고 투정 부리는 사람들이 부지기수인데, 그 어린 소년들이 성모님께 청하기보다 그분께 해드릴까 고민했다는 것이 참으로 놀랍니다. 신앙의 깊이는 결코 나이나 연륜에 비례하지 않는다는 것을 도미니코 사비오는 오늘 우리에게뚜렷히 보여주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의 신앙도 도미니코 사비오처럼, 나자렛의 마리아처럼 끊임없이 성장하고 또 성장해나갔으면 좋겠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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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506. 부활 제5주간 수요일.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님.
✝️ 오늘의 복음 말씀 묵상 ✝️
요한 15,1–8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나는 참포도나무요 나의 아버지는 농부이시다.”
그리고 이어
“내 안에 머물러라. 나도 너희 안에 머무르겠다” 하십니다.
이 말씀은
신앙이 단지 의무를 수행하는 일이 아니라
생명의 관계 안에 머무는 일임을 보여 줍니다.
가지는 나무에 붙어 있을 때만 살고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그처럼 인간도
주님께 붙어 있을 때에만
참된 생명과 열매를 얻을 수 있습니다.
나지안조의 성 그레고리오는
그리스도인의 삶을
하느님과 점점 더 깊이 결합되어 가는 여정으로 보았습니다.
하느님은 멀리 계신 분이 아니라
우리 안에 당신 생명을 나누어 주시기를 원하시는 분입니다.
그래서 신앙은
겉으로만 종교적 모양을 갖추는 일이 아니라
내면이 하느님의 생명에 참여하는 일입니다.
예수님께서 “내 안에 머물러라” 하시는 말씀은
바로 이 참여의 신비를 드러냅니다.
예수님께서는 또 말씀하십니다.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이 말씀은 우리를 작아지게 하려는 말이 아니라
생명의 진실을 알려 주는 말씀입니다.
나지안조의 그레고리오는
인간이 스스로 완전해질 수 있다고 여기기보다
하느님의 은총 안에서 비로소 참된 존재가 된다고 보았습니다.
우리는 홀로 빛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라
하느님의 생명에 붙들릴 때
비로소 열매를 맺는 존재입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은 꾸짖음이기보다
은총의 자리로 돌아오라는 초대입니다.
오늘 복음의 핵심은
결국 머무름입니다.
열매는 조급함에서 나오지 않고
머무름에서 나옵니다.
가지는 스스로 열매를 짜내지 않습니다.
줄기에서 오는 생명이
조용히 흘러들 때
열매는 자연스럽게 맺힙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기도도, 사랑도, 인내도, 일치도
억지로 만들어 내는 성과가 아니라
주님 안에 머무를 때 자라나는 열매입니다.
돌봄 주간의 관점에서 보면
오늘 복음은 돌봄의 본질을 아주 깊이 보여 줍니다.
돌봄은 말라 가는 가지를 책망하는 일이 아니라
그 가지가 다시 생명의 줄기에 붙어 있도록 살피는 일입니다.
사람이 지치고 메마를 때
필요한 것은 더 많은 압박이 아니라
다시 연결되는 은총입니다.
주님과의 연결,
이웃과의 연결,
자기 내면과의 정직한 연결이
회복을 시작하게 합니다.
오늘은 수요일, 그리스도인 일치의 날이기도 합니다.
이 복음은 일치의 신비를 아주 분명하게 보여 줍니다.
가지들이 서로 직접 매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한 나무에 함께 붙어 있습니다.
교회의 일치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서로를 억지로 붙드는 것이 아니라
모두가 참포도나무이신 그리스도께 깊이 붙어 있을 때
비로소 일치는 자라납니다.
나지안조의 성 그레고리오도
교회의 일치를 단순한 조직적 통합이 아니라
같은 하느님의 생명 안에 머무는 친교로 보았습니다.
주님과 멀어질수록 서로도 멀어지고,
주님 안에 깊이 머물수록 서로에게도 가까워집니다.
예수님께서는
열매 맺는 가지도 더 많은 열매를 맺게 하시려고
깨끗하게 하신다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은 때때로 아프게 들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가지치기는 버림이 아니라
더 깊은 생명을 위한 돌보심입니다.
우리 삶에서 덜어 내야 할 것들,
집착, 조급함, 자기중심성, 오래된 상처의 반복이 정리될 때
더 맑은 생명이 흐르기 시작합니다.
회복은 때로
무언가를 더하는 일보다
불필요한 것을 덜어 내는 일에서 시작됩니다.
오늘 우리는 조용히 묻습니다.
나는 지금 어디에 붙어 있는가?
성과와 인정, 불안과 비교, 습관과 집착에 붙어 있는가,
아니면 참포도나무이신 주님께 붙어 있는가?
내 삶의 메마름은
혹시 열매가 없어서가 아니라
줄기에서 멀어졌기 때문은 아닌가?
주님은 오늘도
우리에게 더 많은 일보다
더 깊은 머무름을 청하십니다.
주님,
제가 당신을 떠나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을
겸손히 받아들이게 하소서.
메마른 마음을 다시 당신께 붙이게 하시고
조급함보다 머무름을,
성과보다 생명을,
고립보다 일치를 선택하게 하소서.
당신 안에 머무르며
회복의 열매를 맺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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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506. 부활 제5주간 수요일. 굿뉴스게시판-우리 묵상 체험. Mark Choi 님
■ 동상이몽 속의 교통정리
동상이몽 속의 교통정리 / Spiritual Alignment Within Different Dreams
오늘 저는 이런 한 가지 비유가 떠올랐습니다.
‘동상이몽’ 속에서 갈등이 생길 때, 결국 필요한 것은 누가 더 옳으냐를 가리는 일이 아니라, 흐름을 바로잡는 ‘교통정리’가 아닐까 합니다. 방향을 맞추고, 시선을 하나로 모으는 일입니다. 그리고 그 출발점은 의외로 단순합니다. 바로 ‘비움’과 ‘낮아짐’입니다.
내 생각을 조금 내려놓고, 익숙함을 잠시 비워 두며, 상대의 자리에서 바라보려 할 때 비로소 길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그렇게 낮은 자리에서 움직일 때, 서로 다른 꿈도 서서히 같은 방향을 향하게 되지 않을까요?!
“아무 일도 이기심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겸손한 마음으로 서로 남을 자기보다 낫게 여기십시오.” (필리피서 2,3)
이 말씀처럼, 신앙 안에서의 일치는 ‘누가 옳은가’가 아니라 ‘누가 먼저 낮아지는가’에서 시작되는지도 모릅니다.
예전에 한 한인 성당을 방문한 적이 있습니다. 여러 공동체를 직접 찾아가 보고, 또 영상으로도 접해 보았지만, 그곳은 제대 위가 아니라 성당 한가운데에 십자가가 걸려 있었습니다. 처음에는 낯설고 당황스러웠습니다. ‘왜 이렇게 되어 있을까?’ 하는 물음이 자연스럽게 떠올랐습니다.
그런데 더 인상 깊었던 것은, 오랜 시간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누구 하나 그것을 쉽게 바꾸려 하지 않았다는 사실이었습니다.
그 모습은 제 안에 하나의 질문을 남겼습니다.
‘우리는 과연 무엇을 기준으로 바꾸려 하고, 무엇은 그대로 두려 하는가?!’
혹시 불편함을 느끼면서도 말하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혹은 단지 익숙하지 않다는 이유로 쉽게 바꾸려 하는 것은 아닌지 돌아보게 됩니다. 결국 중요한 것은 외적인 형태가 아니라, 그 안에 담긴 의미와 우리가 향하고 있는 방향일 것입니다.
만약 그 공동체가 서로를 설득하려 하기보다, 먼저 경청하고 이해하려 했다면 어땠을까요. 각자의 이유를 나누고, 함께 기도 안에서 식별해 나갔다면, 그 십자가의 위치는 더 이상 ‘이상함’의 대상이 아니라 ‘함께 만들어 가는 여정’이 되었을지도 모릅니다.
결국 신앙 안에서의 ‘교통정리’는 구조를 바꾸는 문제 이전에, 마음의 방향을 맞추는 데서 시작됩니다. 비우고, 낮아지고, 함께 같은 곳을 바라볼 때 ‘동상이몽’은 ‘동상동몽’으로 바뀌어 갑니다.
그렇다면 마지막으로 남는 질문이 있습니다.
과연 누가 먼저 해야 하는가?!
아마도 그 답은 분명합니다. 더 많이 깨달은 사람이 먼저, 더 깊이 보려는 사람이 먼저, 그리고 신앙 안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려는 사람이 먼저 시작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 각자의 자리에서, 무엇을 붙잡고 무엇을 내려놓아야 할지 다시금 한 번더 깊이 생각해 봅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Today, one simple analogy came to mind.
When conflicts arise within “different dreams on the same bed,” what we truly need may not be determining who is right, but rather a kind of “spiritual traffic direction.” It is about aligning our direction and fixing our gaze on the same point. And the beginning of this is surprisingly simple: emptiness and humility.
When we gently lay down our own thoughts, set aside our familiar ways for a moment, and try to see from the place of others, a path begins to emerge. From that lower place, even different dreams may gradually begin to move toward the same direction.
“Do nothing out of selfishness or out of vainglory; rather, humbly regard others as more important than yourselves.” (Philippians 2:3)
As this Scripture reminds us, unity in faith may begin not from proving who is right, but from who is willing to humble themselves first.
Some time ago, I visited a Korean Catholic parish. Having visited many communities and seen various liturgical settings, I was surprised to find that the crucifix was not above the altar, but hanging in the middle of the church. At first, it felt unfamiliar—even unsettling. I found myself wondering, “Why is it arranged this way?”
What struck me even more was that, over a long period of time, no one seemed eager to change it.
That experience led me to a deeper question:
“By what standard do we decide what should be changed, and what should remain?”
Perhaps at times we feel discomfort but remain silent. Or perhaps we are too quick to change something simply because it feels unfamiliar. In the end, what truly matters is not the external form, but the meaning it holds and the direction we are facing together.
If that community had focused less on persuading one another, and more on listening and understanding, what might have been different? If they had shared their reasons and discerned together in prayer, perhaps the position of the crucifix would no longer be seen as “strange,” but as part of a journey they were building together.
Ultimately, “spiritual traffic direction” in faith does not begin with changing structures, but with aligning hearts. When we empty ourselves, humble ourselves, and look toward the same place, “different dreams” can become “the same dream.”
Then one final question remains:
Who should begin?
Perhaps the answer is simple. The one who understands more should begin first. The one who seeks to see more deeply should begin first. The one who desires to grow further in faith should take the first step.
In our own place, may we reflect once more on what we must hold onto, and what we must be willing to let go.
† In the name of the Father, and of the Son, and of the Holy Spirit. Am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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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506. 부활 제5주간 수요일. 송영진 모세 신부님 ------- 10:40 추가.
<“내 안에 머무르지 않으면 열매를 맺지 못한다.”>
“나는 참포도나무요 나의 아버지는 농부이시다. 나에게 붙어 있으면서 열매를 맺지 않는 가지는 아버지께서 다 쳐 내시고, 열매를 맺는 가지는 모두 깨끗이 손질하시어 더 많은 열매를 맺게 하신다.
너희는 내가 너희에게 한 말로 이미 깨끗하게 되었다.
내 안에 머물러라.
나도 너희 안에 머무르겠다.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않으면 스스로
열매를 맺을 수 없는 것처럼, 너희도 내 안에 머무르지 않으면 열매를 맺지 못한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다.
내 안에 머무르고 나도 그 안에 머무르는 사람은 많은 열매를 맺는다.
너희는 나 없이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
내 안에 머무르지 않으면 잘린 가지처럼 밖에 던져져 말라 버린다.
그러면 사람들이 그런 가지들을 모아 불에 던져 태워 버린다.
너희가 내 안에 머무르고 내 말이 너희 안에 머무르면, 너희가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청하여라.
너희에게 그대로 이루어질 것이다.
너희가 많은 열매를 맺고 내 제자가 되면, 그것으로 내 아버지께서 영광스럽게 되실 것이다(요한 15,1-8).”
1) “예수님에게 붙어 있으면서 열매를 맺는 가지”는, “충실하게 신앙생활을 잘하는 신앙인”입니다.
반대로, “예수님에게 붙어 있으면서도 열매를 맺지 않는 가지”는, “신앙인이라고 자처하면서도 아무것도 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예수님 말씀은 산상설교의 다음 말씀에 연결됩니다.
“나에게 ‘주님, 주님!’ 한다고 모두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이라야
들어간다.
그날에 많은 사람이 나에게, ‘주님, 주님! 저희가
주님의 이름으로 예언을 하고, 주님의 이름으로 마귀를 쫓아내고, 주님의 이름으로 많은 기적을 일으키지 않았습니까?’ 하고 말할 것이다.
그때에 나는 그들에게, ‘나는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한다.
내게서 물러들 가라, 불법을 일삼는 자들아!’ 하고 선언할 것이다(마태 7,21-23).”
예수님에게 ‘주님, 주님!’ 하는 사람들은, “나는 예수님을 믿는 신앙인이다.” 라고 자처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이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하는 것은,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지 않았기 때문에’, 즉 믿는다고 말하면서도 믿는 대로 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실천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입니다(야고 2,17).
‘죽은 믿음’은 믿음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그들이 ‘주님의 이름으로’ 예언을 하고, 마귀를 쫓아내고, 많은 기적을 일으킨 것은 다 무엇인가?” 라고 물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불법을 일삼는 자들아!” 라고 그들을 꾸짖으셨음을 먼저 생각해야 합니다.
그들이 ‘주님의 이름으로’ 예언을 하고, 마귀를 쫓아내고, 많은 기적을 일으킨 것은, 주님께서 인정하지 않으시는 일들이고, ‘불법인 일들’, 즉 ‘악한 일들’입니다.
따라서 그들이 한 예언은 ‘거짓 예언’이고, 마귀를 쫓아낸 일은 ‘가짜’이고, 그들이 일으킨 기적은 ‘속임수’입니다.
그들 자신들은 ‘주님의 이름으로’ 그 일들을 했다고 주장하지만, 그들은 ‘주님의 이름’을 모독하는 죄를 지은 자들일 뿐입니다.
그래서 그들이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하는 것은,
신앙인으로서 해야 할 일들을 하나도 하지 않았기
때문이기도 하고, 주님의 이름을 모독했기 때문이기도 하고, 악한 일을 했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2) “안에 머무르다.” 라는 말에 초점을 맞추면,
예수님 말씀은 ‘되찾은 아들의 비유’에 연결됩니다.
작은아들은 아버지의 집 안에 머무르기를 거부하고 ‘먼 고장’으로 떠났다가(루카 15,13),
회개하고 돌아와서 ‘집 안에서’ 머무르게 됩니다.
큰아들의 경우를 보면, ‘몸’은 계속 아버지의 집 안에 머물러 있었지만, ‘마음’은 떠나 있었고(루카 15,29), 동생이 돌아온 뒤에는 몸도 마음도 모두
‘밖에’ 있습니다(루카 15,28).
쫓겨난 것이 아니라 그 자신이 ‘안으로’ 들어가기를 거부한 것입니다.
<하늘나라로 바꿔서 생각하면, 들어가기를 원하지만 자격을 얻지 못해서 안으로 들어가지 못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들어가기를 거부하고 밖에 남아 있겠다고 고집부리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두 경우가 많이 다르게 보이는데, 사실은 같은 경우입니다.
들어가기를 원한다면 들어갈 수 있도록, 즉 자격을 얻을 수 있도록 ‘능동적으로’ 최선을 다해서 노력해야 합니다.
원하기만 하고 아무것도 안 하는 것은, 사실상 원하는 것이 아닙니다.>
3) 착하고 순하게 살면서, 죄를 짓는 일도 없이, 신앙생활을 잘하는 것으로 보이지만, 아무것도 안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탈렌트의 비유’에 나오는 세 번째 종이 바로 그 경우입니다.
“누구든지 가진 자는 더 받아 넉넉해지고, 가진 것이 없는 자는 가진 것마저 빼앗길 것이다. 그리고 저 쓸모없는 종은 바깥 어둠 속으로 내던져 버려라. 거기에서 그는 울며 이를 갈 것이다(마태 25,29-30).”
세 번째 종과 같은 경우에 해당되는지 아닌지를
남들은 잘 모르고, 본인 자신도 모를 때가 많은데,
예수님께서 ‘탈렌트의 비유’를 통해서 주신 가르침은 분명하고 단호합니다.
“죄를 안 짓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적극적으로, 또 능동적으로 ‘선’과 ‘사랑’을 실천하여라.”
예수님 안에 머무른다는 것은, 예수님께서 주시는 은총을 수동적으로 받기만 하는 생활이 아니라, 예수님과 함께 살고, 예수님의 일을 함께하면서, 즉 선과 사랑을 실천하면서, 은총에 ‘능동적으로’ 응답하는 생활을 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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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506. 부활 제5주간 수요일. 함승수 세례자 요한 신부님 ------- 10:45 추가
요한 15,1-8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다. 내 안에 머무르고 나도 그 안에 머무르는 사람은 많은 열매를 맺는다."
오늘 복음에서 주님은 포도나무와 가지의 비유를 통해 우리가 구원받고 영원한 생명을 누리기 위해서는 크게 세가지 차원의 노력을 경주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첫째, 어떻게해서든 우리 생명의 근원이신 주님, 우리로 하여금 구원이라는 열매를 맺게 하시는 큰 줄기이신 당신께 딱 붙어있으라고 하십니다. 둘째, 그렇게 붙어 있는 수준에 그치지 말고 삶 속에서 당신 말씀과 가르침을 실현하라고, 즉 열매 맺는 가지가 되라고 하십니다. 셋째, 그러기 위해서는 믿음과 사랑, 그리고 순명으로 당신 안에 깊이 머물러 있어야 한다고 하십니다.
우리 천주교 신자분들을 보면 첫째 노력은 참 열심히 하십니다. 주님께, 교회라는 공동체에 딱 붙어있기 위해 노력을 아끼지 않으십니다. 주일미사를 빼먹지 않고 참례하기 위해 노력하십니다. 유명한 신부님들이 쓰신 강론 말씀을 읽으며 열심히 묵상하십니다. 하루에 단 몇 분이라도 꾸준히 기도하기 위해 노력하십니다. 그런데 그 노력이 실천이라는 과정으로 나아가지 못합니다. ‘나’를 넘어 공동체라는 차원까지 확장되지 못합니다. 그래서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는 것 만큼의 열매를 맺지 못하십니다. 나만 큰 문제 없이 잘 살면 국가나 사회 같은 공동체 전체가 겪는 고통과 슬픔에는 무감각합니다. 지척에서 함께 살아가는 이웃 형제가 처한 딱한 사정에 무관심합니다. 나와 가장 가까운 데에서 숨쉬며 함께 살아가는 수많은 예수님들은 소홀히 하면서, 성당에서만, 성경에서만 그분의 그림자를 찾으려 들기에 그렇지요.
그래서 주님은 우리에게 형식적으로만 당신에게 붙어있지 말고, 당신 안에 머무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분께 붙어 있는 건 물리적인 노력만으로 할 수 있지만, 주님 안에 머무르기 위해서는 그분과 나를 관통하는 하나의 공통원리가 필요하지요. 그것은 바로 ‘사랑’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우리에게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정신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하느님을 사랑하되, 그 사랑을 함께 살아가는 이웃에게 구체적인 행동으로 표현하라고 하신 겁니다. 그 사랑이 나와 이웃 사이를 하나로 연결할 뿐만 아니라, 이웃 형제들 안에 계시는 하느님과 나 사이를 하나로 연결해주기 때문입니다. 그럴 때 우리는 비로소 주님 안에 온전히 머무르는 상태가 되는 것이지요.
그러면 어떻게 해야 이토록 중요한 사랑을 제대로 실천할 수 있을까요? 주님은 먼저 내 마음에 자리 잡은 쓸데 없는 것들을 비워내야 한다고 하십니다. 농부가 열매라는 본질을 얻기 위해 쓸데 없이 웃자란 가지들을 쳐내듯이, 우리도 구원이라는 본질에 집중하기 위해 쓸데 없이 웃자란 허영, 자기과시, 교만의 가지들을 쳐내라고 하십니다. 농부가 제대로 된 열매를 맺지 못할 ‘싹수 노란’ 꽃눈들을 다 따내버리는 것처럼, 우리도 어차피 이루어지지 못할 내 탐욕과 고집의 꽃눈들을 다 따내버리라고 하십니다. 그래야 주님께서 우리에게 보내주시는 말씀과 은총의 수액들이 엉뚱한 곳으로 흘러들어가 낭비되지 않고 우리의 구원과 영원한 생명이라는 열매를 맺는데에 온전히 쓰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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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506. 부활 제5주간 수요일. 굿뉴스 게시판-우리 묵상 체험. ------- 12:00 추가.
https://bbs.catholic.or.kr/bbs/bbs_view.asp?num=1&id=2132114&menu=4770
이윤경루카 [achim9202] 260506.10:12
■ 남양성모성지 이상각 신부님 - 내 평화를 너희에게 준다 | 이 평화는 다릅니다.
흔들리는 마음의 깊은 곳에, 주님은 조용히 평화를 놓아주십니다.
“내 평화를 너희에게 준다”
불안한 마음 한가운데,
예수님은 평화를 건네십니다.
제자들은 알고 있었습니다.
무언가가 일어나고 있다는 것을,
곧 스승과 헤어지게 될지도 모른다는 것을.
그래서 그들의 마음은
조용히, 그러나 깊이 흔들리고 있었습니다.
말로 꺼내지 않았지만
그 불안은 이미 그들 안에 있었습니다.
우리의 마음과 다르지 않습니다.
앞이 보이지 않을 때,
무언가 잃어버릴 것 같은 예감이 들 때,
아직 일어나지도 않은 일 때문에
마음이 먼저 무너질 때가 있습니다.
우리는 그런 순간마다
평화를 찾기 위해 애씁니다.
조금 더 안전해지면 괜찮아질 것 같고,
문제가 해결되면 괜찮아질 것 같고,
상황이 정리되면 마음이 편해질 것 같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끊임없이
‘괜찮아질 조건’을 찾으며 살아갑니다.
하지만 그 조건들은
언제든 흔들릴 수 있는 것들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평화를 원하면서도
쉽게 불안해지고,
쉽게 무너집니다.
이것을 잘 보여주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가우르고팔다스는 친구와 있었던 일을 전해 주며
우리가 느끼는 행복과 평화가 얼마나 쉽게 깨지는지를 이야기합니다.
인도에서 전기 공학을 공부할 때 친한 친구가 몇 명 있었다.
하루는 대학 매점에 가서 우리가 사모사 한 접시를 주문했던 기억이 난다.
네 명이 한 테이블에 앉았다. 우리 대학 매점은 강둑에 위치해 있었다.
수정같이 맑은 물이 흐르는 아름다운 강이었다.
그날은 날씨가 매우 좋았다. 최고의 계절이었고,
아름다운 강물이 흐르고, 손에는 따뜻한 사모사가 들려 있었다.
그리고 우리 친구 중 한 명이 사모사를 한 입 베어 물면서 말했다.
“아, 강은 너무나 아름답고, 날씨도 좋고,
사모사는 내가 살면서 먹어 본 것 중 최고의 맛이야!
겉은 바삭바삭, 그리고 안에 있는 속을 봐!
향신료가 적당해! 방금 만들어서 아주 뜨거워!
와, 정말 기막힌 사모사야!”
그는 사모사를 한두 입 먹었고,
절반은 아직 그의 손에 들려 있었다.
그때 다른 친구 한 명이 뛰어와서 말했다.
“시험 결과가 발표됐어!”
우리 모두 외쳤다.
“뭐라고?”
사모사 반쪽을 손에 들고 있던 친구가 물었다.
“나는 어떻게 됐어?”
그 친구가 말했다.
“너는······ 전 과목에서 낙제했어.”
이제, 사모사 절반은 여전히 그의 손에 있었다.
강물은 똑같았다.
날씨는 정확히 똑같았다.
사모사는 아직 뜨거웠다.
속은 알맞게 양념이 되어 있었다.
겉은 바삭바삭했다.
하지만 그는
그 사모사를 다시는 즐길 수 없었다.
행복과 평화는 사모사에 있었는가?
그렇다면 왜 여전히 즐기지 못하는가?
그의 마음 상태가 바뀌는 즉시
그것에서 얻는 행복과 평화도 바뀌었다.
이 이야기는
우리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줍니다.
우리의 평화는
생각보다 아주 쉽게 무너집니다.
하나의 소식에도,
한마디 말에도,
상황의 변화에도
순식간에 사라집니다.
그래서 우리는 알게 됩니다.
우리가 붙들고 있던 평화는
참된 평화가 아니었다는 것을.
그래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내가 주는 평화는
세상이 주는 평화와 같지 않다.”
세상이 주는 평화는
조건이 맞을 때만 유지됩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주시는 평화는 다릅니다.
그 평화는
십자가를 앞에 두고도
사라지지 않는 평화입니다.
고통이 없어서가 아니라,
아버지께 자신을 맡기고 계시기 때문에
무너지지 않는 평화입니다.
이 평화는
상황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과의 관계에서 오는 평화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순교자들에게서 이 평화를 봅니다.
토마스모어 성인은
왕의 뜻을 거슬렀다는 이유로
모든 것을 잃었습니다.
명예도, 자리도,
그리고 결국 생명까지 내어놓아야 했습니다.
보통 사람이라면
두려움과 분노, 억울함 속에서
마음이 무너졌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는 달랐습니다.
감옥에 있으면서도
신앙 안에서 평화를 지켰고,
가족에게 보내는 편지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믿음을 보여 주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순간까지도
그는 유머를 잃지 않았습니다.
처형대에 오르며
“내 수염은 반역을 저지르지 않았으니
수염만큼은 살려주시오.”
이렇게 말하며
미소를 잃지 않았다고 전해집니다.
어떻게 이것이 가능했겠습니까.
그의 평화는
상황에서 온 것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의 평화는
하느님과의 관계 안에서
이미 뿌리를 내리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모든 것이 무너지는 순간에도
그는 무너지지 않았습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평화입니다.
“내 평화를 너희에게 준다.”
예수님의 평화는
문제가 사라진 상태가 아니라,
문제가 있어도
흔들리지 않는 상태입니다.
고통이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고통 속에서도
무너지지 않는 평화입니다.
그래서 이 평화는
강한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평화가 아니라,
하느님께 자신을 맡기는 사람이
받아들이는 평화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앞에 두고도 평화를 말씀하신 것은
바로 이 때문입니다.
그분은
아버지께 모든 것을 맡기셨고,
그 관계 안에서
평화를 지니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도
같은 길로 초대받습니다.
평화를 만들려고 애쓰는 것이 아니라,
평화를 주시는 분께
자신을 맡기는 길입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도
참된 평화는
우리가 스스로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라,
성령께서 주시는 선물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평화는
문제가 없는 삶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문제 속에서도
하느님께서 함께 계심을 믿는 데서 옵니다.
그러므로 평화를 위해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세상을 먼저 바꾸는 것이 아니라,
우리 마음을 하느님께 여는 것입니다.
결국 우리는
이 질문 앞에 서게 됩니다.
나의 평화는
무엇 위에 서 있는가.
조건 위에 있는가,
아니면
주님과의 관계 위에 있는가.
예수님께서 오늘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내 평화를 너희에게 준다.”
그 평화는
지금 이 순간에도
우리에게 주어지고 있습니다.
그 평화를 받아들이는 사람은
삶이 흔들려도
무너지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 평화는
주님 안에서
지속되는 평화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다시 말씀하십니다.
“너희 마음이 산란해지는 일도,
겁을 내는 일도 없도록 하여라.”
이 말씀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는 약속이 아닙니다.
어떤 일이 일어나더라도
너희는 무너지지 않을 수 있다는
주님의 초대입니다.
평화는
내가 모든 것을 붙들고 있을 때가 아니라,
주님께 내려놓을 때 시작됩니다.
용서할 때,
내어줄 때,
주님께 맡길 때
그 평화가 시작됩니다.
오늘
내 마음이 불안하다면,
상황을 먼저 바꾸려 하기보다
이 말씀 앞에 머물러 보십시오.
“내 평화를 너희에게 준다.”
그 평화는
지금 이 자리에서도
우리에게 주어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기도할 수 있습니다.
“주님,
제 마음에 당신의 평화를 주소서.”
그리고 묵주를 손에 쥐고
천천히 기도해 보십시오.
기도는
상황을 곧바로 바꾸지 않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기도는
우리 마음이 무너지지 않도록
주님 안에 붙들어 줍니다.
마지막으로
성모님께 이 마음을 맡겨 드립니다.
평화의 모후이신 어머니,
흔들리는 우리의 마음을
당신의 아드님께로 이끌어 주십시오.
불안 속에서도
주님을 바라보게 하시고,
십자가 안에서도
무너지지 않는 평화를
살아가게 도와주십시오.
아멘.
위의 글은 이상각 신부님의 블로그 글입니다.
[출처] 내 평화를 너희에게 준다. | 이 평화는 다릅니다. 요한14,27-31|남양성모성지 이상각 신부 블로그https://blog.naver.com/rsony4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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