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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 3: 6
여자가 그 나무를 본즉
인생의 본질에 있어서 지식이 뒤틀리면 인격 전반이 뒤틀려서 나타납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서 이탈하자 하와와 아담은 그의 전 인격이 뒤틀림으로 나타났습니다. 그들의 지식이 무지로 바뀌자 심령의 부패가 따랐고, 하나님의 뜻 준행에 대한 무능으로 나타났습니다. 6절은 “여자가 그 나무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인지라 여자가 그 실과를 따먹고 자기와 함께 한 남편에게도 주매 그도 먹은지라” 입니다.
1) 정욕의 독으로 감염된 하와의 불결한 시선은 불순한 마음의 전조이며 증거였습니다.
하와는 이전에도 그처럼 신중하게 나무를 볼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때에는 전혀 그것을 먹고 싶은 충동이 일지 않았습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 하와의 신앙이 그 마음을 지켜 주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 신앙이 모든 감각을 장악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렇지만 지금은 마음이 말씀에 대한 신앙과 순종으로부터 멀어졌습니다. 그러므로 하와의 육신은 물론 모든 감각까지 타락하여 영육이 완전히 혼미해졌습니다. 그러므로 하와가 그 나무를 보았을 때 먹음직스럽고 보기에도 좋았다고 판단한 뒤 지혜를 얻기 위해서는 그것이 아주 바람직한 것이라고 믿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된 것은 그녀가 이제 완전히 변절되었다는 증거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전에는 그 나무 옆을 수없이 지나다니면서도 전혀 동요하지 않고 평온한 마음으로 바라볼 수 있었는데 지금은 전혀 그렇지 않은 것입니다. 하와는 멍에를 벗어버리고서 자포자기하여 방황하며 그 몸도 방탕하게 내던져 버립니다. 여기에서 (레하스킬)이라는 말은 두 가지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첫째로, 그 나무는 바라보기에 바람직하였다는 것입니다. 둘째로는, 그 나무의 열매가 분별력을 부여할 수 있는 것으로 보였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둘째의 의미가 시험에 더 잘 어울리기 때문에 적절하다고 생각합니다.
2) “자기와 함께 한 남편에게도 주매” 라는 말씀을 어떤 사람들은 이 구절을 통해 하와가 시험을 받아 사단에게 설득 당했을 때 아담도 거기에 있었다고 추측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전혀 신빙성이 없습니다. 오히려 아담이 하와와 곧 만났을 것입니다. 하와가 그 나무의 실과를 맛보기 전에 아담에게 뱀과 했던 이야기 내용을 말해 주어 자기가 속은 것과 똑같은 허위에 걸려들게 했다는 설명이 그럴듯합니다. 한편 다른 사람들은 불변화사 (임마)를 ‘그녀와 함께’로 보고 부부의 결합을 의미한다고 지적하는데, 이러한 해석은 인정을 받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모세는 아담이 아내의 손으로 건너 받은 과실을 먹었다고 단순히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가 사단의 속임수에 넘어간 것이라기 보다는 하와의 유혹에 사로잡혀 과일을 먹게 되었다는 해석이 일반적으로 지지를 받습니다. 이것을 확증하기 위해 “아담이 꾀임을 보지 아니하고 여자가 꾀임을 보아”(딤전2:14) 라는 바울의 말이 입증되기도 합니다. 그러나 바울이 거기에서 죄의 기원을 여자로부터 비롯된 것이라고 가르치는 것은 단순히 비교적으로 말하는 것뿐입니다. 실제로 아담이 자신에게 부과된 율법을 어긴 것은 자기 아내의 소원에 동조하려는 것만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아내에 의해 돌이킬 수 없는 숙명적인 야망을 이루기 위해서 똑같은 변절자가 되어 공범이 되어 버린 것이었습니다. 바울이 다른 곳에서 설명한 것처럼 죄는 여자 때문이 아니라 아담 자신에 의한 것이었습니다(롬5:12). 따라서 곧이어 ‘보라 아담은 우리 중에 한 사람으로서’라고 책망한 것은 아담도 어리석게 분수를 모르고 지나치게 욕심을 부렸으며 하나님의 거룩한 말씀보다는 마귀의 아첨에 더욱 귀를 기울였다는 사실을 입증하고 있습니다.
3) 그러므로 이제 ‘그들 모두의 죄는 무엇이었는가?’ 라는 의문이 제기될 수 있습니다.
몇몇 고대 학자의 견해를 들어 보면 그들이 무절제한 식욕에 의해 미혹되었다고 하는데, 이러한 추측은 유치합니다. 마음대로 선택해서 먹을 수 있는 실과가 그처럼 많은데 어떻게 한 가지 특별한 실과에만 집착할 수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이에 대한 아우구스티누스의 견해는 아주 정확합니다. 그는 ‘교만이 모든 죄악의 시초이며 교만에 의해 인류는 파멸되었다’ 라고 말했습니다. 그렇지만 죄에 대한 좀 더 충분한 설명은 모세가 묘사하고 있는 시험으로부터 유추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것은 여자가 처음에 사단의 간계에 의해 불신에 빠졌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멀리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인류를 파멸시킨 죄악의 시초는 하나님의 명령을 어긴 것입니다. 그렇지만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버리고 사단의 거짓에 귀를 기울일 때, 그들은 하나님을 배반하고 떠난 것이었다는 사실을 생각해 봅시다. 여기에서 우리는 하나님이 말씀을 통해 자신을 드러내시며 찬양을 받으신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또한 이러한 이유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이 무시될 때, 하나님께 대한 경외심이 무너지고 만다는 사실도 나타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알아야 할 가장 중요한 교훈은 하나님의 말씀이 소수에 의해서만 존중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경멸하면서도 전혀 형벌을 받지 않고 지내온 사람들이 하나님을 경배하는 사람들 가운데 중요한 위치에 앉아 거만하게 행세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말씀이 아닌 다른 방법으로는 인간에게 자신을 나타내지 않으십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는 동안에는 그분의 위엄이 지속되며 유지됩니다. 또한 그분에 대한 경배도 계속 유지됩니다. 그러므로 불신앙이 배반의 근원입니다. 우리를 하나님과 연합시키는 것은 바로 신앙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야망과 교만이 쇄도하여 처음에는 여자가 하나님을 대적하여 자신을 높이고저 했습니다. 그 다음에는 그녀의 남편이 하나님께 대적하여 자신들을 높이고자 했던 것입니다. 실제로 그들은 하나님과 똑같이 되기 위해서 하나님께로부터 부여받은 영광에 만족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필요 이상의 것을 알려고 함으로써 하나님을 대적하여 자기 자신을 높인 것입니다. 여기에도 가공할만한 배은망덕함이 그 본색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닮도록’ 창조되었습니다. 그렇지만 거기에 ‘동등’이 덧붙여지지 않으면 하찮은 것으로 보이는 듯합니다. 이제 계획적이고 사악한 인간이 아담과 아내 하와의 죄를 가볍게 하려고 온갖 애를 쓰지만 결국에는 헛된 일이며 터무니없는 것이 됩니다. 배교는 결코 가벼운 죄가 아니라 혐오스러운 사악함입니다. 인간은 이러한 죄에 의해 창조주이신 하나님의 권위로부터 벗어났던 것입니다. 심지어 그는 하나님을 거부하고 배척하기까지 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이것은 단순한 배교가 아닌 하나님을 대적하는 지독한 오만불손함과 비난에 연관되었던 것입니다. 사단은 하나님이 거짓투성이이고 시기심이 많으며 악의에 가득 차 있다고 비난합니다. 그리고 우리의 첫 조상도 그처럼 비열하고 가증한 중상에 동의하고 있습니다. 마침내 그들은 하나님의 명령을 멸시하여 자신의 욕정에 탐닉하고 악마의 노예가 되어 버립니다. 만일 어떤 사람이 좀 더 단순한 설명을 원한다면 우리는 불신앙이 야망을 갖도록 길을 열어 놓았으며 이 야망은 반역의 원인이라는 사실이 입증되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결국 인간은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을 떨쳐 버리고 그분의 멍에를 벗어버리려 했습니다. 이 문제에 대해 사도바울은 아담의 불순종에 의해 죄가 세상에 들어왔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명령을 어긴 것보다 더 나쁜 것은 없다는 사실을 생각해야 합니다. 우리는 아담의 잘못을 가볍게 하는 일에 그다지 성공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담을 모든 면에 있어서 자유롭게 창조하셨을 뿐만 아니라 세상을 다스리도록 왕으로 임명하시고서는 그의 순종을 시험하시려고 한 나무의 실과만은 따먹지 말라고 명령하셨습니다. 그는 이러한 조건에 즐거워하지 않았습니다. 이 구절을 곡해한 사람들은 여자가 그 나무의 아름다움에 도취되었으며 남자는 하와의 달콤한 유혹에 넘어가고 말았다고 변명을 늘어놓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권위가 관대할수록 그것을 거절하는 그들의 범죄는 더욱 변명의 여지가 없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죄의 근원과 원인을 더 깊이 관찰하고 살펴보아야 합니다. 그들이 처음부터 하나님의 말씀을 불신하지 않았다면 감히 하나님을 대적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이 그 실과를 탐내도록 유혹할 어떤 것도 없었을 것입니다.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확고히 믿고 자신을 하나님의 통치 하에 맡겼다면 정말 평화로운 생활을 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틀림없이 감정도 지배를 받게 되었을 것입니다. 실제로 하나님께서는 공의로우신 분이십니다. 때문에 그분의 명령에 순종하는 것보다 더 나은 것은 없습니다. 그분에게 사랑을 받는 것이 행복한 삶의 절정을 이루는 것이라는 생각을 온전히 마음속에 간직하고 있는 것이야말로 가장 온당한 일입니다. 그렇지만 그들이 사단의 가증스러운 신성에 자리를 양보한 후에는 마치 얼이 빠진 사람같이 이성과 판단력을 상실해 버렸던 것입니다. 그들은 사단의 노예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사단은 그들을 마음대로 조정하기에 이르렀습니다. 더욱이 우리는 죄란 외관에 의해서가 아니라 내적인 성향에 의해 하나님께 평가된다는 점을 알아야 합니다.
4) 한편 첫 조상의 반역은 온 인류의 멸망을 입증한다고 말하는 것을 이상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그들은 이 때문에 하나님을 대적하여 제멋대로 비난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펠라기우스는 거짓으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척하면서 인간 본성의 타락이 하나님 때문이라고 주장하며 원죄를 감히 부인하려고 했습니다. 이러한 엄청난 오류는 성경의 확고부동한 증거와 인간의 체험에 의해 명백히 배격됩니다. 철학자들은 우리의 본성이 타락되었다는 사실을 모릅니다. 그러나 그들은 다른 분야에 있어서 아주 예리하고 냉철합니다. 확실히 이러한 무감각함은 원죄에 대한 표시가 되는 증거였습니다. 완전히 무감각해지지 않은 사람은 누구나 우리들 중 어느 부분도 온전하지 않다는 것을 느낍니다. 즉 정신이 무분별함에 의해 침체되고 수많은 오류도 전염되었다는 것을 알아차립니다. 마음의 모든 감정이 외고집과 사악함으로 가득 차 있다는 것을 압니다. 야비한 욕정이나 다른 질병이 치명적으로 군림한다는 것을 생각합니다. 모든 감각이 많은 악덕과 함께 폭발한다는 것을 감지하게 됩니다. 그러나 오직 하나님만이 이와 같은 원인에 대한 올바른 심판자이십니다. 그러므로 성경을 통해 그것을 규명해야 할 것입니다. 첫째로 성경에서는 우리가 악하고 비뚤어진 상태에서 태어났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펠라기우스는 죄가 모방에 의해 아담으로부터 비롯되었다고 트집을 잡습니다. 이것은 어리석은 주장입니다. 다윗은 자기 모친의 태중에 있을 때를 아담의 모방자라고 하지 않고 죄 중에 잉태되었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시51:5). 이 문제에 대한 충분한 증거와 원죄에 대한 자세한 정의는 ‘기독교 강요’ 에 있습니다. 여기에서는 단순히 그 원죄가 어느 정도까지 영향을 미치는지를 밝히고자 합니다. 우리의 성품에 어떤 악한 점을 하나님께 전가시키는 것은 정당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그 자체가 죄로서 배척해야 합니다. 러나 바울은 ‘부패는 단순히 한 부분에만 귀속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영혼전체를 장악하고 그 영향을 미친다’(롬3:10)라고 가르칩니다. 따라서 원죄가 단지 욕망과 무절제한 식욕 때문에 비롯된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의 견해는 아주 유치하다고 결론지을 수 있습니다. 원죄는 이성의 좌소는 물론 마음을 모두 사로잡고 있습니다. 그리고 죄를 짓는 것은 정죄를 동반합니다. 또 그것은 바울이 말하는 것처럼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왔나니’(롬5:12) 라는 뜻입니다. 사도 바울은 다른 곳에서 ‘우리는 모두 진노의 자식’ 이라고 선언하기도 했습니다. 이것은 마치 우리를 영원한 저주에 종속시키는 것처럼 보입니다(엡2:3). 우리는 성령의 놀라우신 은사와 이성의 빛, 공의, 정직의 은총을 모두 박탈당하고 온갖 악행에 기울어져 그것을 즐기고 있다는 말입니다. 또한 우리는 정죄 받아 죽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사망의 지배를 받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물려받은 상태입니다. 동시에 하나님께서 아담의 인격을 통해 인류에게 내리신 공정한 형벌이기도 합니다. 여기에서 만일 어떤 사람이 ‘무죄한 자가 다른 사람의 죄에 대한 형벌을 받는다는 것을 부당하다’ 고 반복한다면 우리는 이렇게 대답합니다. 하나님께서 아담의 인격을 통해 우리에게 부여하신 은총이 어떤 것이든지 그것은 하나님이 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담이 사악하게도 타락한 것을 다시 거두어 가시는 것도 마땅하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영혼이 첫 조상으로부터 자손을 통해 계승되어 내려온 것이라는 사실은 일부러 고대 저술가의 말을 빌지 않더라도 분명히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인류는 아담의 후손이므로 타락도 자연적으로 계승된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 결과는 하나님의 약속을 추적해 나가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한 사람을 통해 전 인류의 품성에 가장 훌륭한 재능을 부여하시고 우수한 존재로 만드신 것처럼 다시 그와 똑같은 방법으로 그것을 박탈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지금은 우리가 아담을 통해 타락한 때부터 다른 사람의 범죄에 대한 형벌을 받는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의 죄과에 의해 징벌을 당하는 것입니다.
5) 어떤 사람은 이러한 타락의 ‘시기’나 파멸의 때에 대해 질문을 제기합니다.
사람은 창조된 그 날에 타락했다고 하는 의견이 상당한 지지를 받고 있습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그들이 단지 6시간 동안만 온전한 상태에 있었다’라고 기록합니다. 한편 다른 사람들의 견해를 살펴보면 사단이 안식일까지 시험을 연기했는데 그것은 거룩하고 신성한 날을 모독하기 위해서였다고 추측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빈약하기 짝이 없습니다. 그리고 이와 같은 견해가 주장되기 때문에 경건한 모든 사람이 의문투성이인 추측에 전념하고 있다는 사실이 분명합니다. 우리는 타락한 시기에 대해 적극적으로 주장할 근거가 전혀 없습니다. 그러므로 모든 것은 모세의 설명을 고찰한 다음 판단해야 합니다. 우리는 최초의 두 사람이 하나님께 부여받은 위엄을 오랫동안 간직하지 못했다는 결론을 내릴 뿐입니다. 모세는 그들이 창조되었다고 말하고 나서 다른 것에 대해 전혀 언급하지 않고 곧 그들의 타락을 설명하기 때문입니다. 만일 아담이 자기 아내와 상당한 기간을 함께 지냈다면 자녀를 출산하는 것에도 하나님의 축복이 내려졌을 것입니다. 그러나 모세는 그들이 하나님의 복을 누리기 전에 박탈당했다는 사실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 비참한 자유 의지여, 완전할 때에는 너무 누리지 못한 자유 의지여!’ 라는 아우구스티누스의 외침을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시간의 짧음’에 대해서는 버나드의 조언을 보더라도 알 수 있습니다. 그는 ‘우리는 그처럼 무서운 타락이 낙원에서 발생했다는 것을 보았는데 우리는 이 거름더미와 같은 세상에서 무엇을 할 것인가?’ 라고 했습니다. 동시에 우리는 그들뿐만 아니라 후손에게도 아주 치명적인 이 망상에 빠지게 된 것이 무엇 때문이었는지 명심해야 합니다. ‘너희는 선악 악을 알게 될 것이다’ 라는 사단의 유혹은 그럴듯합니다. 그러나 그 지식이 하나님의 은총보다 더 우선적으로 추구되었으므로 저주받았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자처해서 똑같은 올무에 빠지지 않으려면 온전히 하나님의 뜻에 따르고 그분을 모든 선의 주권자로 인정해야 한다는 사실을 배워야 할 것입니다. 성경에도 우리가 헐벗고 빈곤하다는 것을 도처에서 가르치고 있습니다. 또 아담으로 인해 잃어버린 모든 것을 그리스도 안에서 회복할 수 있다는 사실을 선포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자만심을 버리고 우리 자신을 그리스도께 완전히 비어 드려 그리스도의 풍성함으로 가득하게 채워야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