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희 대통령에 대한 평가 박정희 대통령에 대한 평가는 요즘 좌파들이 암살자들이란 영화를 만드는 바람에 요란하다. 좌파는 대구에서 박대통령 동상 철거 소송을 벌여 국민들의 분노를 사고 있다. 내가 대학 다니던 70년대는 어땠던가? 김대중 김영삼 두 정치꾼이 민주화를 외치고 박정희를 독재자로 몰아부치는 바람에 국민 90% 이상이 박대통령을 독재자인줄 알았다. 당시 소위 정치하던 사람들은 박정희 반대 데모하면 애국자고 사상가 였다.
그 박정희는 어떤 인물인가. 데모 앞장서던 고대 철학과에서 논쟁이 터졌다. 도올(檮杌) 김용옥과 淸狂 김창현 사이의 논쟁이다. 하루는 강의실에 갔더니, 용옥이가 애국자인양 얼굴에 냇천자 긋고 침을 튀기며 뜨거운 눈빛으로 급우들에게 일장연설 하고 있었다. 박정희를 독재자로 몰아부치며 '이제 고대가 데모 나설 때 되었다'는 것이다. 그때 내가 강의실에 도착해서 '학생이 공부나 하지, 데모는 무슨 놈의 데모?' 하는 바람에 싸움이 붙었다. 나는 군 제대하고 복학한 과의 좌장격 선배다. 그는 지고는 못사는 후배이다. 그의 호 도올(檮杌)은 중국 신화에 등장하는 전설의 동물로 사흉 중 하나이다. 좌전에 의하면 전욱의 아들이라 한다. 호랑이를 닮은 몸에 사람의 머리를 가지고 있고, 멧돼지의 거만하고 완고한 성격으로 매우 난폭하여 마구 설쳐대며, 싸울 때는 퇴각을 알지 못하고 죽을 때까지 싸운다고 했다. 도올은 생물학과에서 철학과 편입한 촛자였지만, 집안의 형님, 누나, 아버지 세 사람이 박사이고, 용옥이 자신도 어학에 밝았다. 내가 자기 연설에 찬물을 끼얹자 맨체스타 다연발총 같은 설탄을 퍼부었다. 나는 '우리는 학문 중 학문인 철학을 배우는 사람인데, 군중심리에 놀아나면 않된다. 모두 박정희 욕을 하지만, 그건 냉철한 역사의식이 부족한 행동이다' 하고 응수했다. 논쟁이 뜨거워지자, 급우들이 중재에 나서서, '그러면 빈 강의실에 가서, 김선배와 용옥이가 데모를 하느냐 마느냐 타당성을 이야길 하고, 그걸 듣고 다수결 결과에 따라 과론을 정하여 행동통일 합시다'라고 의견을 모았다. 그래 빈 강의실로 가서 의견 발표를 했다. 용옥이는 신문에 자주 나오는 민주화 운동에 포인트를 놓고 '민주화를 위해서 이젠 학생이 교문을 나설 때가 되었다'고 주장했다. 나는 매슬로의 욕구 5단계설을 주장했다. 1단계는 생리적 욕구. 2단계는 안전 욕구, 3단계는 사회적 욕구, 4단계는 존경취득 욕구, 5단계는 자아실현 욕구가 있다. 이 욕구는 피라미드형으로 이뤄져서 생리적 하위욕구가 가장 강하다. 그 가장 강한 생리적 하위 욕구를 충족하기 위한 경제를 살리는 일이 지금 우리 현실에서는 가장 중요한 일이다. '지금 독재를 따지는 일은, 춥고 배고픈 우리에겐 사치에 불과하다'라고 했다. 결과는 찬반 거수투표로 결정했는데 도올의 완패였다. 그러나 용옥이는 내가 도서관 간 사이에 '김형은 우리보다 나이도 많고, 이론 보니 아무래도 그가 중앙정보부 끄나풀 냄새가 난다. 어디서 그런 이론을 배워왔겠느냐?'며 급우들을 꼬득여 시계탑이 있던 서관 한 강의실 점령하고 출입구에 책걸상으로 바리케이트 치고 데모를 시작해버렸다. 그게 고대 데모의 시작이었다. 나중에 하바드대 철학 박사가 된 김용옥은 머리는 좋은 친구다. 그러나 역사 의식과 양심은 부족하다. 당시 반정부 인사로 유명하던 김지하 시인은 도올과 다르다. 그는 훗날 박정희 대통령에 대한 과거 자신의 평가를 백팔십도 바꾸고 전향했다. 스므살에 반정부 운동 안하면 병신이고, 40대 후에 그러면 병신이라는 말이 있다. 김지하 씨는 젊은 시절 실수를 인정한 면에서 정직하고 용감한 사람이다. 당시 나는 한국의 데모 사태를 취재나온 미국 모 언론사가 찾는 사람이었다. 박정희 반대 학생은 많은 데, 데모를 반대하는 나 같은 학생은 하늘의 별 따기였다. 그래 도서관까지 찾아왔길래 우리는 과열 데모가 한창 진행 중인 교문 옆 돌벤치에서 위험한 중인환시 속에 인터뷰를 진행했다. 40년 전 일이지만 자랑스럽다. 인터뷰 요지는 이런 것이다. 나는 맑스의 구조이론을 읽은 적 있다. 경제란 하부구조가 결국 정치 문화 등 상부구조를 결정한다. 우선 먹고 살게 된 이후에 민주화는 온다. 나는 독재란 개념을 이렇게 정의했다. 가난이 가장 큰 독재이다. 나라가 가난하면 온 국민이 희생양이 된다. 자식이 취직 못하면 부모에게 죄인이요, 노는 젊은이는 얼굴 펴고 살 수 없다. 부모도 직장 없으면 자식에게 죄인이다. 먹고 살 길 찾지못하면, 부모도 죄인 된다. 독재 독재 하지만, 가난이야말로 국민을 죽이고 살리는 무소불위의 독재이다. 또 정치판 제한된 독재는, 보통의 선량한 국민과 아무 상관 없다. 그건 정치판의 독재지, 선량한 국민에 대한 독재가 아니기 때문이다. 나라가 잘 살면 그때 민주화는 저절로 온다. 회사원이 상사에게 할 말 다하고, 수 틀리면 다른 회사로 당당히 갈 수 있는 건 일자리가 많기 때문이다. 이것이 진정한 민주화 이다. 박정희 대통령은 경제 발전을 방해한 정적들 엄하게 다루었다. 그러나 그건 잘못이 아니다. 국민은 아무도 박통에게 고통 받은 적 없기 때문이다. 오히려 일자리가 많아져 호강을 누렸다. 가난은 호랑이 보다 무서운 것이다. 박통은 그 호랑이를 퇴치한 투사다. 지금 와서 보면, 당시 K대 데모꾼 중에 산청 출신 박계동은 나중에 국회의원 되었다. 동기생 성공회 이제정 신부는 나중에 야당하다가 부총리 자리 챙겼다. 그들은 반정부 운동으로 한 몫 챙겼다. 감방 다녀온 것을 무슨 훈장처럼 자랑했고, 사상가인양 행세했다. 그것이 잘한 일인지 못한 일인지는 역사가 평가한다. 국민들 불만을 부추켜서 일단 표만 얻자는 논리는 인민재판식 좌파 논리다. 말없는 다수 국민이 따로 있다. 표만 많으면 옳다고 쫒아가는 우매한 백성은 문제 있다. 경부고속도로 놓지말라고 길바닥에 드러누운 사람이 누구인가. 나중에 사이비 대통령 한 김대중 이다. 그를 지지한 전라도 사람들 문제 있다. 5.18을 민주화 운동이란 정치적 흥정으로 팔아먹은 김영삼도 대통령 해먹었다. 그를 지지한 경상도 사람도 문제있다. 민주화는 경제가 발전되면 오는 것이다. 떠든다고 오는 게 아니다. 선동에 잘 속는 나라는 우리나라 밖에 없다.
나는 박정희 대통령을 5천년래 이 민족 가난의 역사를 탈피시킨 영웅으로 보았고, 그 덕도 보았다. 신문사에서 기업으로 옮길 때다. 아남 창업주 김향수 옹이 현존하는 사람 중에 누굴 가장 존경하는지 물어보길래, 박정희 대통령이라고 대답했다. 그러자 그 자리에서 대통령께 보낼 편지 초안을 써보라고 했고, 초안을 썼더니 읽어본 후 바로 출근할 수 있느냐고 물었다. 다음 날 홍보역 감투로 출근해서 서두를 '박정희 대통령 옥궤하(玉机下)' 란 존칭으로 시작되는 청와대 보낼 편지를 만들었다.
나는 발전하던 70년대 한국 경제를 기록하는 것은 의미있다고 생각하고, 별도 마련해준 골방에서 그분 자서전을 쓰기 시작했다. 그러다 회장 비밀 금고 속 비자금 기록을 보았다. 거기 대통령 포함한 관료들, 은행장, 법조계 인사에게 보낸 비자금 내력 읽어보고 박정희 대통령이 참으로 청렴하다는 사실을 알았다. 당시 항간에선 박통이 그 회사에 투자 지분이 있다는 루머가 있었지만 모두 읽어보니, 말짱 할일 없는 사람들 카더라 통신이었다. 박통은 아남의 방위성금을 면제해주었지만, 단 돈 10원 한장 받은 적 없다. 국가 장래의 초석이 될 반도체사업이라고 호의를 베풀어준 것 뿐이다. 박통은 이렇게 청렴한 사람이다. 한번은 4,19탑 방문하고 오던 길에 수유리에 있던 경호실장 차지철 집에 들렀을 때다. 그 집은 차지철이 원양회사에서 상납받은 집인데, 음식이 엘리베이터로 2층으로 올라오는 걸 보자 대통령이 ‘음, 자네도 이런 식으로?’ 하고 화를 벌컥 냈다. 그 바람에 차지철은 급히 그 집을 원양회사에 도로 반납하고 연희동 옛집으로 이사간 일화가 있다. 나는 김향수 옹 덕택에 박통이 광화문 세종문화회관에서 개최하던 아침 리셥센에 참석했다. 그 자리는 정주영, 이병철, 박용학 같은 재계 총수와 새끼 재벌들만 초청장을 보내는 그야말로 V-VIP 모임이다. 우리 회장은 초청에 년세를 핑계로 간혹 나를 대타로 내보냈다. 때문에 나는 칵테일 잔 들고 돌아댕기다가 맘씨 좋은 정주영 씨와 악수도 했고, 대통령 경호실과 안기부 눈치 보느라고 대통령 근처에 얼씬 못하는 새끼 재벌들과 잡담을 나누기도 했다. 방명록에 대필서명 해놓고 와서 회장께 누가 왔고, 누가 무슨 말을 했는지 보고했다. 밖에서는 대통령의 각료 만남을 주선하기도 했다. 박통 밑에서 오랜 재무장관을 한 김용환 씨는 그가 우리 회장과 청진동 <장원> 요정에서 식사를 할 때, 박통이 경부고속도로 건설 때, 월남 파병 때, 여론과 국민에게 시달리면, 혼자 잠들지 못하고 청와대 뜰을 거닌다고 했다. 시바스리갈 폭탄주 마신다고 말해주었다. 야당은 독재라고 사사껀껀 쌍지팡이 들고 나서지, 철 없는 대학생은 데모로 괴롭히지, 참으로 고독했을 것이다. 간혹 김장관한테 새벽 2시에도 전화가 온다고 했다. 김장관 집은 녹번동에 있었는데, 부인에게 커피 대접 받으며 들은 이야기론, 장관은 12시 이전에 집에 귀가하는 일 없고, 공휴일도 없다고 했다. 박통이나 김장관 모두 Workaholic(일 中毒)이고, 두 분 다 멋진 분이다. 박통이 독일 차관 얻으러 갔을 때 그곳에 있는 파독 광부와 간호원들 만나 눈물 흘린 이야기, 정주영씨와 의기투합해 경부고속도로 뚫은 일, 일본 차관 얻어 포항제철 세운 일, 월남 파병 이야기는 우리가 다 아는 이야기다. 그러나 좌파들은 그때마다 반대해서 힘을 뺏고 국익은 소진됐다. 그 뒤 김대중, 노무현, 문재인 대통령은 누구도 이런 감동적인 이야기 남긴 적 없다.
12,26 이후 나는 향촛대 준비하여 회장님 모시고 신당동 박대통령 빈소를 방문했고, 거기서 사건 조사 책임자인 전두환 장군 만났다. 박통 기일 때마다 회사버스에 전 중역 모시고 국립묘지 참배했고, 아남 바로 옆 어린이 공원에 사무실이 있던 따님 박근혜 씨는 명절마다 위로차 방문하곤 했다. 요즘 세상이 하수상해서 지난 일을 정리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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