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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막의 뜰과 성소의 등불
출 27:9-21
9 너는 성막의 뜰을 만들지니 남쪽을 향하여 뜰 남쪽에 너비가 백 규빗의 세마포 휘장을 쳐서 그 한 쪽을 당하게 할지니
10 그 기둥이 스물이며 그 받침 스물은 놋으로 하고 그 기둥의 갈고리와 가름대는 은으로 할지며
11 그 북쪽에도 너비가 백 규빗의 포장을 치되 그 기둥이 스물이며 그 기둥의 받침 스물은 놋으로 하고 그 기둥의 갈고리와 가름대는 은으로 할지며
12 뜰의 옆 곧 서쪽에 너비 쉰 규빗의 포장을 치되 그 기둥이 열이요 받침이 열이며
13 동쪽을 향하여 뜰 동쪽의 너비도 쉰 규빗이 될지며
14 문 이쪽을 위하여 포장이 열다섯 규빗이며 그 기둥이 셋이요 받침이 셋이요
15 문 저쪽을 위하여도 포장이 열다섯 규빗이며 그 기둥이 셋이요 받침이 셋이며
16 뜰 문을 위하여는 청색 자색 홍색 실과 가늘게 꼰 베 실로 수 놓아 짠 스무 규빗의 휘장이 있게 할지니 그 기둥이 넷이요 받침이 넷이며
17 뜰 주위 모든 기둥의 가름대와 갈고리는 은이요 그 받침은 놋이며
18 뜰의 길이는 백 규빗이요 너비는 쉰 규빗이요 세마포 휘장의 높이는 다섯 규빗이요 그 받침은 놋이며
19 성막에서 쓰는 모든 기구와 그 말뚝과 뜰의 포장 말뚝을 다 놋으로 할지니라
20 너는 또 이스라엘 자손에게 명령하여 감람으로 짠 순수한 기름을 등불을 위하여 네게로 가져오게 하고 끊이지 않게 등불을 켜되
21 아론과 그의 아들들로 회막 안 증거궤 앞 휘장 밖에서 저녁부터 아침까지 항상 여호와 앞에 그 등불을 보살피게 하라 이는 이스라엘 자손이 대대로 지킬 규례이니라
출 27:9-21 / [성막 울] 성막을 빙 둘러 에워싸 뜰을 만들 울을 만들어라. 남쪽 울을 칠 휘장은 가는실로 꼬아 짠 베로 길이 45미터 되게 만들어야 한다. 10) 휘장을 걸칠 기둥은 20개 만들고 그 기둥을 받칠 밑받침도 20개 만들어라. 기둥과 밑받침은 놋쇠로 만들되 기둥에 달 갈고리와 고리는 은으로 만들어라. 11) 또 성막뜰의 북쪽에 칠 울도 길이가 45미터 되는 휘장으로 만들어야 한다. 이쪽도 마찬가지로 기둥 20개와 밑받침 20개를 놋쇠로 만들고 기둥에 달 갈고리와 고리는 은으로 만들어라. 12) 성막 뜰의 뒤편 곧 서쪽에 칠 울은 길이 22.5미터의 휘장으로 만들고 휘장을 걸칠 기둥 10개와 기둥을 받칠 밑받침 10개를 만들어라. 13) 해가 뜨는 쪽인 성전 정면 울의 길이 역시 22.5미터 되게 하여라. 14) 성막 정문의 한쪽에 밑받침 세 개를 놓고 그 위에 기둥 세 개를 세우고 거기에 6.8미터 길이의 휘장을 쳐라. 15) 성막 정문의 또 다른 한쪽에도 밑받침 세 개를 놓고 그 위에 기둥 세 개를 세운 다음 거기에도 마찬가지로 6.8미터 길이의 휘장을 쳐라. 16) 울의 정문에 드리울 막은 자줏빛 털실과 붉은빛 털실과 진홍빛 털실과 가늘게 꼰 베실로 무늬를 놓아 길이가 9미터 되게 짜야 한다. 이 막을 드리울 기둥을 네 개 만들고 밑받침도 네 개 만들어라. 17) 그리고 성막의 울을 빙 둘러 세울 기둥에 붙일 고리와 갈고리는 모두 은으로 만들고 기둥의 밑에 받칠 밑받침은 모두 놋쇠로 만들어라. 18) 성막뜰은 길이가 45미터, 나비는 22.5미터 되게 하고 그 울의 높이는 2.3미터가 되게 하여라. 그리고 그 울은 가는 실로 짠 베로 둘러치고 기둥받침은 놋쇠로 만들어라. 19) 성막에서 사용하는 온갖 기구와 성막을 세울 때 사용하는 모든 말뚝과 성막의 울을 세울 때 사용하는 말뚝은 모두 놋쇠로 만들어라. 20) [등잔 기름] 너는 또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올리브를 찧어서 짜낸 깨끗한 기름을 가져오게 하여라. 그 기름으로 성막 등잔불을 밝혀라. 등불이 꺼져서는 안 된다. 21) 만남의 장막 안 계약궤 앞의 휘장 밖에 그 등잔불을 켜두고 아론과 그 아들들에게 아침부터 저녁까지 여호와 앞에서 그 등불이 꺼지지 않나 늘 보살피라고 일러라. 이것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대대로 영원히 지켜야할 규정이다.
본문은 성막을 에워싸고 있으며 외부와 구별시켜 주는 뜰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또한 성소를 밝힐 등불과 그에 필요한 기름에 대해서도 설명합니다.
성막의 뜰(9-19) 성막은 거룩한 장소이기 때문에 성막을 중심으로 전후좌우를 뜰로 만들었습니다. 범위를 정해 사람이나 짐승의 출입을 제한했습니다. 이를 위해 울타리도 만들었습니다. 이 울타리는 가는 실로 짠 휘장을 60개의 기둥에 걸어 만들었습니다. 이 기둥의 길이는 각기 다섯 규빗(2.25m)이며, 다섯 규빗 간격으로 뜰을 에워쌌습니다. 기둥의 받침은 놋으로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휘장을 기둥에 걸어 고정시키기 위한 갈고리와 휘장을 팽팽하게 유지시켜주는 긴 장대인 가름대는 은으로 만들었습니다. 남쪽과 북쪽 벽은 각각 스무 개의 기둥을 사용하고 서쪽 벽은 열 개를 사용합니다. 동쪽의 경우 출입구가 있어 양쪽에 각각 세 개의 기둥이 사용되어 십오 규빗씩 막습니다. 그리고 중앙에 남은 이십 규빗이 입구가 됩니다. 성막을 들어가는 입구는 성소와 지성소를 구분한 것처럼 여러 가지 색실로 짠 휘장을 설치합니다. 그리고 이것을 위해 네 개의 기둥과 기둥 받침을 만듭니다. 이것은 성막을 출입하는데 수월하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이렇게 뜰을 에워싸고 있는 세마포 휘장의 높이는 다섯 규빗입니다. 이로써 외부로부터 차단되어 하나님을 예배할 수 있게 됩니다. 오늘날 우리의 교회도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지어져 가며 거룩하게 구별되어 하나님을 예배합니다. 광야를 이동하던 이스라엘 백성에게 성막과 그 뜰을 세울 평탄한 지형을 찾기란 쉽지 않았습니다. 200만 명이 넘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머물 곳을 찾는 것조차 쉽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이스라엘은 자기들이 머물 평탄한 대지를 확보하기에 앞서 하나님의 성막 터를 확보하기에 힘썼습니다.
성소의 등불(20-21) 성막에는 출입문 외에는 아무런 창문이 없습니다. 그리고 여러 겹의 휘장으로 씌워진 성막 안은 밤이면 칠흑 같은 어둠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어두운 성소를 밝힐 등불이 필요했습니다. 등불로 내부를 밝혀 제사장이 봉사하기 수월하게 하였습니다. 이 등불은 감람으로 짠 순수한 기름으로 저녁부터 아침까지 밝혔습니다. 등불은 어두워져 죽어버린 것 같은 실내를 밝고 생명이 넘치는 곳으로 만듭니다. 등대는 죄로 인해 어두워진 인간의 마음과 세상을 밝히시기 위해 오신 예수 그리스도와 그분의 빛을 받아 이 땅에서 빛으로 살아가야 하는 우리들을 의미합니다.
적용 : 빛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당신은 빛으로 살아가고 있습니까?
성경의 기본적인 영적 원리 중에 하나는 심어야 거둔다는 것입니다. 이 말은 심은 대로 거두고 심지 않으면 거두지 못한다는 뜻입니다. 콩 심은데 콩 나고 팥 심은데 팥 납니다. 세상에 공짜는 없습니다. 세상에 거저 되는 일 또한 없습니다. 시편에도 보면 눈물로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그 단을 거둔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썩어질 육체를 위하여 너무 많은 것들을 심고 삽니다. 그러나 썩지 않을 영생을 위하여 심는 일에 너무 인색하다 못해 쪄들어 삽니다. 그러면서도 나는 역시 믿음이 좋아 나는 꽤 괜찮은 사람인 줄 착각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심지도 않고 거두려 하는 사람을 우리는 도적이라 부릅니다.
< 설 교 >
성막의 뜰
출 27:9-19 / 이상호 목사
용인 민속촌이나 제주도 성읍 민속마을에 가보면 집집마다 나즈막한 돌담이나 흙담으로, 혹은 싸리나무로 울타리를 두른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중요한 도시를 위해서는 높은 성을 산이나 들에 쌓아놓은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크든지 작든지 이러한 울타리들은 결국은 그 안과 밖을 구별하고 또 밖으로부터의 공격을 보호하는 차원에서 만들어졌습니다.
주님께서 성막을 짓게 하시면서 울타리도 두르게 하셨습니다. 길이가 50m, 폭이 25m의 직사각형 울타리였고, 울타리에는 남과 북으로 각 20개, 동서로는 10개씩의 기둥을 세우도록 하셨습니다. 60개의 기둥의 재료는 놋이었고, 세마포를 걸기 위한 고리는 은이었고, 세마포는 우리가 아는 것처럼 아주 정결한 천이었습니다.
놋은 십자가를 상징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하여 광야생활을 하는 동안 때로는 그들의 생각과 일치되지 않은 일들이 일어날 때 하나님의 종들과 백성들이 충돌을 하게 되고, 그러한 불순종의 결과로 불뱀에 물려 죽는 하나님의 심판을 당하게 되었을 때 모세는 하나님 앞에 엎드려 눈물로 호소합니다. 이 백성들이 무지해서 이런 일을 당했으니 용서해 달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의 기도를 들으시고 놋으로 뱀을 만들어 높이 장막 위에 세우고 뱀에 물려 죽어가는 사람들이 그것을 볼 때 고침을 받으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뱀에 물려 죽어가던 사람들이 소식을 듣습니다. "누구든지 장막에서 나와 성막 위에 높이 달려진 놋뱀을 보면 고침을 받으리라" (민 21:8-9) 그 말씀을 듣고 순종한 사람들은 치료를 받았으나 무시한 사람들은 죽어갔습니다. 이후, 놋이라고 하는 개념은 하나님께서 치료하시는 은혜의 개념으로, 그리고 그것은 신약에서 죽을 수 밖에 없는 죄인들을 용서하시고 구원하신 십자가로 상징되었습니다. 놋으로 기둥을 세웠다고 하는 것은 바로 십자가로 성전의 기초를 세웠다고 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금과 은으로 고리를 만들었다고 하는 것은 바로 변하지 않는 믿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믿음은 변하지 않아야 합니다. 작년의 내 믿음이 올해 달라졌다면 그것은 믿음 같아 보였을 뿐이지 진정한 믿음은 아니라는 것이지요. 작년에는 금이었는데 올해는 그것이 동으로 바뀌는 법은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 주님은 금, 은 같이 변함이 없는 것을 믿음으로 비유하셨고, 바울 사도는 에베소 교회를 향해서 "너희가 예수 그리스도를 변함없이 사랑하기에 하나님의 축복이 함께 하기를 원한다"고 선포하고 있습니다.
세마포는 성결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성도들에게 있어서 중요한 것은 성결된 삶입니다. 과거에 우리가 성결치 못한 삶을 살았다 할지라도 이제 우리는 성결된 삶으로 주의 성전의 구성원들이 되어야 합니다. 성전의 기둥같은 존재들이 있는가 하면 그 기둥의 고리에 의지해서 성막의 울타리를 이루는 존재들도 필요합니다. 울타리의 높이는 5규빗이 됩니다. 그것은 보통 사람들이 밖에서 안을 쉽게 볼 수 없는 높이였습니다. 성막이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상징한다면 밖에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만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안에 들어와야 만이 진리와 생명의 말씀을 만날 수 있고 구원의 복음을 들을 수 있는 줄로 믿습니다.
여러분들, 때로는 남편들이 아내를 자가용으로 교회까지 태워다가 주고 남편들은 자동차 안에서 담배를 피면서, 혹은 낮잠을 자면서 예배가 끝나기를 기다리는 사람들이 있지요. 교회 밖에서 10년을 그렇게 했더라도 그를 교인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그리스도 안에 들어와야 합니다. 성전 밖에서 아무리 있어도 소용이 없습니다.
울타리가 주는 첫 번째 의미는 '하나님의 보호하심'입니다.
안은 보호받을 수 있지만 밖은 보호받을 수 없습니다. 전쟁이 일어나면 성문을 걸어 잠급니다. 평상시에는 성 밖에 나가서 농사도 짓고 여러 가지 활동을 하지만 적군이 쳐들어온다는 긴급 나팔소리가 들리면 모두가 하던 일을 멈추고 성 안으로 들어와야 하고, 성문은 굳게 잠겨지게 되어 있습니다. 성밖에 있는 사람은 보호받을 수 없습니다. 울타리 안에 들어온다고 하는 것은 주님의 보호 속에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노아의 가족들은 방주 안에 있음으로 인해서 보호를 받았지만 방주 밖에 있던 사람들은 모두 다 죽었습니다. 성전은 오늘날 방주로 비유를 하는데 성막에 있어서의 울타리와 같은 것입니다. 울타리 안으로 들어와야 합니다. 주님의 손길 안으로 들어와야 합니다. 시편 91편을 보면 "내가 네게 말하기를 화가 네게 미치지 못하며 네 재앙이 장막에 미치지 못하게 하리라"고 약속하신 줄로 믿습니다. 주님의 보호를 받는 가정, 주님의 보호를 받는 성도는 그래서 당당합니다.
두 번째 의미는 '소유' 입니다.
울타리는 경계를 말합니다. 양떼들을 보호하기 위해서 울타리를 칠 뿐만 아니라 그 울타리가 주인의 소유임을 나타내기 위해서 산울을 두른다고 했습니다. 주인의 것과 아닌 것의 경계가 울타리라고 하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주님의 것과 주님의 것이 아닌 것의 경계가 무엇입니까? 이사야 43장 1-3절에 보면 "너는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저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 울타리 안에 있어야 주님의 양떼가 되는 것입니다. 울타리를 넘어가면 안전을 보장받을 수 없고, 주인의 양이 될 수 없는 것입니다.
울타리의 세 번째 의미는 '연합됨'입니다.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 주님과 내가, 내가 주님과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울타리 안에 있다고 하는 것은 연결된 삶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60개의 놋기둥들이 성막의 동서남북에 적절하게 배치가 되고 거기에 은고리가 있어서 세마포를 붙들어줌으로서 정사각형 울타리를 연결해 주는 것입니다. 성전 안에는 금 그릇도 있고, 은그릇도 있고, 혹은 나무 그릇도 있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모두가 자기를 깨끗하게 하면 주인의 쓰임에 합당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세마포로, 은 고리로, 놋 기둥으로 모양과 역할은 다르지만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거룩한 성전에 귀하게 쓰임받는다고 하는 것입니다. 연합되어져서 한 몸을 이루어 가는 것이지요.
얼마 전 장애인 올림픽에서 생긴 일입니다. 9명이 예선을 통과해서 결선에 진출했습니다. 출발을 알리는 총성이 울리자 9명의 선수들이 결승점을 향해서 달려가기 시작했습니다. 건강한 사람들이 아니기에 장애인들의 달리는 모습에 관중들이 숨을 죽이고 바라보고 있습니다. 한참을 달리다가 한 선수가 쓰러졌습니다. 그 선수는 다시 일어나서 뛰려고 했지만 또 쓰러졌습니다. 더 이상 일어나서 달릴 수 없다는 것을 느낀 그는 트랙에 엎드려서 울기 시작했습니다. 달리던 8명의 선수들이 하나씩 멈추어 서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모두가 달리던 길을 멈추고 돌아와 쓰러진 1명을 부축해서 세웠습니다. 그리고는 9명 모두가 함께 걸었습니다. 관중들이 숨을 죽이고 그 장면을 지켜보다가 9명이 똑같이 결승점에 도달했을 때 모든 관중들이 기립하여 박수를 치기 시작했습니다. 놀랍게도 그날 박수를 친 시간이 15분이나 되었습니다. 앞서가는 것도 멋있지만 넘어진 선수를 부축하여 함께 가는 것은 더 아름다운 일입니다. 그들은 모두가 승리자가 된 줄로 믿습니다. 연합의 아름다움은 여기에 있습니다. 평안의 공동체가 예수의 이름으로 하나가 되어서 역할은 다르고 사명은 다르지만 놋기둥의 은 고리로 연결되어져서 하나님의 성전을 이루어 나아갈 때 그 공동체가 영광을 돌릴 줄로 믿습니다.
마지막으로 울타리의 의미는 '구별됨'입니다.
울타리 안과 밖은 철저하게 구별이 됩니다. 우리 주님께서 마지막 심판자로 오실 때 염소와 양을 구별하시겠다고 하셨습니다. 충성된 청지기와 게으른 청지기를 구별하시겠다고 했습니다. 천국과 지옥으로 구별되는 시간입니다. 울타리 안과 밖은 이렇게 엄청난 구별이 있습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성도로 부르셨지요. 그것은 구별을 말합니다. 장소를 구별하면 성지가 됩니다. 물건을 구별하면 성물이 됩니다. 성전을 건축해 놓고 제일 먼저 드리는 예배가 무엇입니까? 입당 성별예배입니다. 모든 물건들을 예배와 교육과 선교와 봉사를 위해서 구별하여 사용하겠다고 하나님 앞에 서약하는 예배입니다. 그러므로 교회의 모든 물건들은 하나님의 이름의 영광을 위해서만 쓰여져야 하는 것입니다. 인간의 어떤 목적으로도 쓰여져서는 안됩니다.
성가대나 혹은 중창단이 개인적인 목적의 모임에 가서 노래를 불러주고 분위기를 돋구어 주는 어리석은 사람들을 봅니다. 그들은 어떤 개인을 위해서 존재하는 공동체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존재하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회갑 잔치면 그 당사자가 주인공이지만, 회갑예배가 되면 주인공은 하나님이신 줄을 믿습니다. 결혼식이면 주인공은 신랑 신부이지만, 결혼예배하면 그날의 주인공은 신랑 신부가 아니라 그들을 있게 하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자리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혼식을 치룬 사람과 결혼예배를 드린 사람은 다릅니다. 회갑 잔치를 한 사람과 회갑 예배를 드린 사람은 근본적으로 다릅니다. 이것을 잘 모르고 그냥 아무렇게나 하는 사람들이 있어요. 회갑 예배에는 성가대가 가서 찬양할 수 있지만 회갑 잔치에는 성가대가 갈 수 없는 거예요. 하나님께서 사람을 구별하면 성도가 됩니다. 저와 여러분은 그러므로 성도의 반열에서 하나님 앞에 부름 받은 구별된 사람인줄 믿습니다. 구별된 사람은 구별되게 행동해야 합니다. 누가 알아보든지 모르든지 간에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나를 구별하셨다는 것입니다. "내가 너희를 구별하여 나의 거룩한 백성으로 삼았다"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는 주님께서 성막의 뜰을 만들라고 하시고, 그 뜰을 통해서 구별을 원하셨습니다. 주님이 구별을 원하신다면 우리는 그 구별에 합당한 삶을 살아야 할 것입니다. 목사로서의 구별된 삶이 있습니다. 성도로서의 구별된 삶이 있습니다. 때때로 우리는 뉴스를 들을 때마다 구별된 삶을 살지 못해서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는 사이비 교인들을 만납니다. 오늘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하나님의 그 깊은 뜻을 우리의 생활 속에서 표현하는 것입니다. 그분이 우리의 울타리가 되어주셔서 우리의 가정과 우리의 직장을 보호해 주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보호에 확신을 가진 사람은 다윗의 고백처럼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다녀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는 당당함이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는 그분의 소유입니다. 그분의 울타리 안에 있을 때에 그의 양떼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와 하나가 되는 연합의 삶을 삽니다. 그리고 성도는 성도와 연합으로서 하나님의 자녀됨을 증거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울타리를 통해서 주님의 보호하심과 주님께로의 소속감과 연합됨, 그리고 당신의 백성이라고 하는 그 분명한 영적 구별됨이 여러분의 생활 속에서 언제나 표현되시고, 그것이 여러분에게 자부심이 되시고, 여러분을 지탱하는 힘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유일한 구원의 문 예수
출 27:9-19 / 박덕기 목사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신 데는 단 6일을 요하셨지만, 성막의 설계를 모세에게 지시하신 데는 40일이 걸렸으니, 이것 하나만 보더라도 성막에 나타난 계시가 얼마나 중요한가를 우리는 단 번에 알 수 있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성막에 나타난 계시는 모두가 모형이나 상징으로 되어 있기 때문에 말씀을 깊이 연구하지 않으면 우리는 그 의미를 전혀 알 수 없다고 했습니다. 성경이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기록한 것과 같이 성막 또한 예수 그리스도를 빼놓고는 생각할 수 없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어느 학자는 “구약의 성막을 확대해 놓은 것이 신약의 예수요, 신약의 예수의 생애를 축소시킨 것이 성막이다.”고 하였습니다. 오늘은 성막의 문에 계시된 깊은 진리를 상고해 보면서 함께 은혜를 사모하고자 합니다.
1. 오직 하나의 문
성막 사방에는 이스라엘 12지파가 진을 치고 있었습니다. 동쪽에는 유다 지파와 잇사갈 지파와 스불론 지파가 진을 쳤고, 남쪽에는 르우벤 지파와 시므온 지파와 갓 지파가 진을 쳤고, 서쪽에는 에브라임 지파와 므낫세 지파와 베냐민 지파가 진을 쳤고, 북쪽에는 단 지파와 아셀 지파와 납달리 지파가 진을 쳤습니다. 한 쪽에 3지파씩 진을 친 것입니다. 그러므로 한 쪽에 문을 하나씩 내었더라면 성막을 출입하는데 얼마나 편리했겠습니까? 그러나 그렇게 할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계신 곳 성소에 들어가는 데는 오직 한 문으로 밖에 들어갈 수 없었습니다. 이것은 무슨 모형이며 상징일까요? 성막은 넓은 의미에서 하늘의 성소인 천국의 그림자입니다. 그렇다면 거기에 들어가는 문은 하나일 수밖에 없습니다. 따라서 성막으로 들어가는 하나뿐인 문은 장차 나타날 예수 그리스도를 계시한 것임이 분명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유일한 구원의 문이요 유일한 천국의 길이기 때문입니다. 더구나 그 문이 난 곳은 동쪽이요, 거기에는 유다 지파가 지키게 되었다니 더욱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습니다. 동쪽은 태양이 솟아오르는 방향입니다. 말 4:2에는 장차 나타날 그리스도가 ‘의의 태양’으로 예언 되었고, 창 49:10에는 벌써 그 옛날에 유다 지파에서 메시아가 탄생할 것이라고 예언되었음을 볼 때, 우리는 성막의 문이 무엇을 예표 함인지를 분명히 알 수 있는 것입니다. 계 5:5에는 좀더 정확하게 예수님을 가리켜 “유다 지파의 사자 다윗의 뿌리가 이겼느니라.”고 하였습니다.
200만 명이 사용하는 성막의 문이 하나밖에 없다는 사실에 우리는 다시금 놀라움을 금치 못하게 됩니다. 성막의 문을 왜 하나만 내도록 했을까요? 그 이유는 인간은 오직 예수로만 구원을 얻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행 4:12에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고 하였고, 요 14:6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고 했으며, 요 10:7에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는 양의 문이라.”고 하였습니다.
여기 “나는 문이다”는 말씀은 영어로 "I am a door"가 아니라, "I am the door"입니다. 그러니까 하나 밖에 없는 유일한 그 문이라는 뜻입니다. 노아의 방주에도 문은 하나밖에 없었습니다. 그 문을 통하지 않고는 아무도 방주 안으로 들어갈 수 없었습니다. 그 문이야말로 노아 시대에 살고 있었던 모든 사람들의 구원과 멸망을 결정짓는 문이었습니다. 방주에 들어오지는 않았지만 문 밖에서 비교적 선한 생활을 하고 있는 사람들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구원을 받지 못하였습니다. 오직 문을 통해서 방주 안에 들어온 노아의 여덟 식구만이 구원을 받았습니다. 이처럼 성막의 문이나 방주의 문이 하나뿐이었던 것은, 유일한 구원의 문이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아들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떠나서는 절대로 하나님께로 가는 문이 없다는 것을 다시 한 번 명심하시기를 바랍니다.
2. 동쪽 문
하나님께서는 성막을 지을 때에 반드시 동쪽으로 문을 만들라고 명령하셨습니다. 나중에 솔로몬이 성전을 지을 때에도 동쪽으로 문을 내었습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동쪽으로 문을 내면 어떤 결과가 오는 것일까요? 들어 올 때에는 서쪽을 보고 들어오게 됩니다. 그리고 나갈 때에는 동쪽을 보고 나가게 됩니다. 서쪽의 첫 인상은 해지는 곳, 어두운 곳, 쓸쓸한 곳, 음산한 곳입니다. ♫해는 져서 어두운데 찾아오는 사람 없어 밝은 달만 쳐다보니 외롭기 한이 없네♫ 그러나 동쪽의 첫 인상은 해뜨는 곳입니다. 어둠이 물러가고 광명한 햇살이 비취는 곳입니다. 마귀의 어두운 세력이 떠나고 성령의 역사가 시작되는 밝은 곳입니다. 그래서 기독교는 소망의 종교입니다. 축복의 종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는 모든 보화가 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성막은 죄를 가지고 왔다가 죄를 버리고 가는 곳입니다. 성막은 기도를 가지고 들어왔다가 응답을 가지고 나가는 곳입니다. 성막은 질병을 가지고 왔다가 건강을 가지고 나가는 곳입니다. 성막은 문제를 가지고 왔다가 해결을 가지고 나가는 곳입니다. 그래서 성막은 서쪽을 보고 들어왔다가 동쪽을 보고 나가도록 동을 향하여 문을 내었습니다. 우리 교회가 건축할 새 성전의 문도 이와 같은 성막문의 진리를 따라서 동쪽으로 내도록 이미 설계가 되었다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미국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한 성도가 이사를 하고서 다닐 교회를 찾고 있었습니다. 마침 교통정리를 하고 있는 경찰을 발견하고 그에게 물었습니다. “이 주변에 좋은 교회가 있으면 소개하여 주십시오.” 그러자 교통경찰은 손가락으로 한 교회를 가리키며 “저 교회가 좋은 교회입니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성도가 물었습니다. “그 교회 다니십니까?” “안 다닙니다.” “그런데 어떻게 저 교회가 좋은 교회인지 아십니까?” “예, 내가 이 곳에서 19년째 교통을 정리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일요일에 보면 저 교회 교인들은 예배를 마치고 언제나 웃으면서 나옵니다.”라고 대답했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서쪽으로 들어왔던 교인들이 동쪽으로 나가게 하는 곳이 바로 교회이어야 합니다.
홀메스와 라헤는 스트레스를 수치로 계산한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배우자의 사망을 100으로 계산하였습니다. 그리고 이혼 73, 징역 63, 질병과 부상 53, 은퇴 43, 성문제 39, 직업 전환 36, 상사와 알력 23, 임신 30, 이사 20 등 모든 스트레스를 수치화시켰습니다. 그래서 200이 넘으면 병들기 시작하여 300이 넘으면 미치게 된다고 하였습니다. 예를 들면 임신한 여인이 남편을 잃고 병이 들었는데, 이사를 하여야 한다면 그 여성은 203만한 스트레스를 받는다는 것입니다. 당장에 심한 병을 앓을 수 있는 수치라는 것입니다. 이런 여성이 교회에 올 때는 마치 서쪽으로 들어오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그러나 예배를 드리면서 확신과 소망이 넘치게 됩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믿음을 가지고 스트레스를 줄이고 집으로 돌아가면 마치 서쪽으로 들어와서 동쪽으로 나가게 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3. 4색의 문
성막의 문은 청색, 자색, 홍색, 가는 베실로 짜여 있습니다. 청색은 생명의 색깔입니다. 진정한 하늘색은 청색이고, 하나님은 하늘에 계신 분이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생명의 근원이십니다. 그래서 청색은 생명 되신 그리스도를 의미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오직 하나 밖에 없는 생명과 구원의 문입니다. 자색은 왕권을 의미하는 색깔이기 때문에 왕 되신 그리스도를 의미합니다. 홍색은 피 색깔입니다. 그래서 고난당하신 그리스도를 나타내 줍니다. 백색은 성결을 의미합니다. 가는 베실은 백색인데 이는 성결하여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나타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어떤 분이십니까? 예수님에 대한 사람들의 여론 조사에서는 참으로 다양하게 나타났습니다. “더러는 세례 요한, 더러는 엘리야, 더러는 예레미야나 선지자 중의 하나라 하나이다.” 그러나 이는 예수님을 잘못 본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성막 문으로 대답하면 정확하게 대답할 수 있습니다.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닙니다. 성막 문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분은 만왕의 왕이시지만 우리 죄를 대신 지시기 위하여 이 땅에 오셔서 고난당하시고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신 분이십니다. 이것이 100점짜리 대답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문이니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들어가면 구원을 얻고 들어가며 나오며 꼴을 얻으리라.”
‘광야의 장막’이라는 책의 저자 존 리치는 성막 문의 4가지 색깔을 이렇게 해석하고 있습니다. 청색은 하늘의 고유색인데, 이는 예수님의 신성을 의미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신성은 예수님의 본질인 생명입니다. 홍색은 땅의 고유색깔인데, 이는 예수님의 인성을 의미한다고 했습니다. 따라서 홍색은 예수님의 고난을 말해준다고 했습니다. 자색은 하늘색깔인 청색과 땅의 색깔인 홍색을 섞은 색깔인데, 이는 지상의 영광인 예수님의 왕권을 의미한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백색은 순결을 의미하는데, 이는 무죄 성결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의미한다고 했습니다.
4. 문턱이 없는 문
성막의 문에는 문턱이 없습니다. 그래서 누구나 들어갈 수 있으며 누구나 들어가기가 쉽습니다. 이처럼 예수 믿기란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지금 바로 예수님을 영접하면 됩니다. 계 3:20에 “볼찌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고 했습니다. 누구든지 예수를 믿기만 하면 구원을 받습니다. 사 55:1에 “너희 목마른 자들아 물로 나아오라. 돈 없는 자도 오라. 너희는 와서 사 먹되 돈 없이 값없이 와서 포도주와 젖을 사라”고 하였습니다. 돈 없이 값없이 라고 하셨는데 결국 무료로 먹고 마시고 영생할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대가를 이미 지불하셨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문에는 아무나 들어가지 못하는 곳도 있습니다. 또한 문턱이 높은 문도 많아서 웬만한 사람은 근처에도 갈 수 없는 그런 권세의 문도 있습니다. 열쇠가 있어야만 들어가고, 허락을 받아야만 들어가고, 신분증과 몸수색을 해야 들어가는 문도 얼마든지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문은 아무것이 없어도, 어떠한 죄인이라도, 어떤 문제가 있는 사람도, 아무도 차별 없이 들어갈 수 있는 언제든지 열려 있는 문인 것입니다. 그래서 불효했던 자도, 간음했던 자도, 강도였던 자도 들어갈 수 있는 문입니다. 예수께서는 이 땅에 계실 때 어떤 사람도 차별하지 않으셨습니다. 주님은 세리나 죄인이나 가난하고 병들고 불쌍한 사람들의 친구이셨습니다.
한 마디로 예수님은 세상 어떤 사람에게도 모두 열려 있는 문이었습니다.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기만 하면,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시인하기만 하면 천국으로 들어갈 수 있는 문인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처럼 예수 그리스도의 문은 아무도 구별하지 않습니다. 그 문으로 들어갈 수 없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그 어떤 사람이라 해도 그 문은 언제나 열려 있는 누구에나 차별 없는 문인 것입니다. ♫“내 친구여 거기서 돌아오라. 내 주의 넓은 품으로. 우리 주님 너를 반겨 그 넓은 품에 안아주시리.♫
주님은 문이 되셔서 언제나 우리가 들어오기를 기다리고 계시는 분이십니다. 죄의 길로 나갔던 사람도, 방탕한 길로 나갔던 사람도, 언제나 문을 열어 놓고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계시는 분이십니다. ♫어서 돌아오오. 어서 돌아만 오오. 우리 주는 날마다 기다리신다오. 밤마다 문 열어 놓고 마음 졸이시며 나간 자식 돌아오기만 밤새 기다리신다오. 어서 돌아오오 어서 돌아만 오오. 지은 죄가 아무리 무겁고 크기로 주 어찌 못 담당하고 못 받으시리요. 우리 주의 넓은 가슴은 하늘보다 넓고 넓어. 어서 돌아오오. 어서 돌아만 오오. 채찍 맞아 아파도 주님의 손으로 때리시고 어루만져 위로해 주시는 우리 주의 넓은 품으로 어서 돌아오오 어서♫ 혹시 우리 중에 주님 곁을 떠났던 사람이 있습니까? 범죄한 사람은 없습니까? 아픈 마음으로 용서를 구하는 사람은 없습니까? 마음으로 번민하고 괴로워하는 분은 없습니까? 아무 염려 마시고 이 주님의 문으로 들어오시기 바랍니다.
주님은 아무도 차별하시지 않습니다. 어떤 사람도, 어떤 죄인도, 아무리 용서받을 수 없는 자라도 용서하시고 받아 주시는 그런 분입니다. 여러분이 진심으로 예수 그리스도 앞으로 나오기만 하면 예수님께서는 문을 활짝 열고 여러분을 영접하시고 위로의 길, 평안의 길, 생명의 길로 인도해 주실 것입니다.
이처럼 예수 그리스도는 언제나 들어갈 수 있는, 누구나 들어갈 수 있는 열려있는 문턱 낮은 문입니다. 그런데 우리 주위에는 이 문으로 고집스럽게 안 들어오려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 문 앞을 지나가고 있습니다. 또 바라보고 사는 사람도 있습니다. 믿지 못하고, 들어가지 못하고 옆에서 구경만 하며 정말 그럴까 의심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우리는 그런 사람들을 위하여 기도하고 그들이 이 문으로 들어올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야 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문은 열려 있습니다. 하지만 열 처녀의 비유에서 말씀하신 것처럼 언제나 열려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 때와 시는 모르지만 반드시 닫힐 때가 있습니다. 그 문이 닫히기 전에 들어오시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이 문에 들어와 구원을 얻고 드나들며 생명의 꼴을 얻어 풍성한 인생, 축복의 인생, 귀하고 값진 인생을 살아나가시는 여러분이 다 되시기를 바랍니다.
이제 말씀을 마치려고 합니다. 오늘은 성막의 문에 대해서 살펴보았습니다. 성막으로 들어가는 문은 동쪽에 오직 하나밖에 없었습니다. 이것은 성막의 문이 유일한 구원의 문이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했기 때문입니다. 공처가에 대한 유머가 있습니다. 공처가인 사장이 남들도 자기처럼 공처가인지를 알아보기 위하여 사원들에게 "마누라가 무섭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다 내 편으로 모이고, 그렇지 않은 사람은 저 쪽으로 모이라"고 하였습니다. 사원 전원이 사장 편으로 몰려왔는데, 신통하게도 한 명만이 저 쪽에 남아 있었습니다. 사장이 "자네는 정말 마누라가 무섭지 않나?"하고 물으니까 그 사원이 이렇게 대답하더라는 것입니다. "오늘 아침 출근할 때 집사람이 말하기를 사람이 많이 모인 데는 절대로 가지 말라고 했습니다요." 공처가의 아내와 비슷한 말씀을 예수님도 하셨습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이가 적음이니라.” 유일한 생명의 문, 구원의 문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모두 저 영광스러운 천국에 다 들어가게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예수)을 밝히라
출애굽기 27:20-21 / 이상호 목사
이스라엘 백성이 출애굽에서 광야를 행진하고 있을 때,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성막을 만들라고 명하셨습니다. 우리들은 이 성막을 이동식 교회라고 생각하시면 되겠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지도자 모세에게 이 성막의 구조와 식양을 하나하나 아주 자세하게 설명을 해 주셨습니다.
그런데 이 성막의 또 다른 말은 ‘회막’이라고도 부릅니다. 왜 회막입니까? 하나님과 하나님의 백성이 만나는 장소, 너무 중요한 장소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백성과 만나는 장소를 직접 설계도면을 만드셔서 말씀하시는 것처럼 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성막을 만들면서 성소에 들어갈 등대에 대해 오늘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등대에 들어갈 기름에 대해서 자세하고 구체적으로 말씀하십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서 우리들도 등대의 역할을 감당하기 위해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밝히 보면서 나아가는 시간이 되길 바랍니다.
첫째, 찧어질 때 기름으로 사용됩니다.
20절 말씀을 다같이 읽도록 하겠습니다.
"너는 또 이스라엘 자손에게 명하여 감람으로 짠 순수한 기름을 등불을 위하여 네게로 가져오게 하고 끊이지 않게 등불을 켜되"
오늘 말씀을 보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등불을 켜기 위한 기름을 가지고 오게 합니다. 그런데 이 기름이 사용되는 곳은 회막의 성소에서 사용되는 것이고,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서 사용되는 것이기 때문에 세상 사람들이 평범하게 사용하는 휘발유나 기름이면 되지 않습니다. 순도 높은 기름이 필요했습니다. 오직 감람나무 열매를 가지고 짜낸 기름이라야 이 회막에서 사용할 수 있는 기름이 되었습니다. 왜냐면 이 올리브는 지방이 60% 함유된 아주 특수한 기름입니다. 그래서 오래 동안 탈수가 있고, 그을음이 생기지 않는 것입니다.
올리브 가운데서도 최상품의 올리브를 먼저 구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깨끗하게 청소를 해서 절구에 넣고 찧습니다. 그러면 기름이 나오는데 그 기름을 다시 정제할 때 색이 없으며 아주 투명합니다. 아주 순도 높은 올리브유를 바로 그렇게 얻었던 것입니다.
올리브가 등대에 사용되기 전에 절구에 들어가서 찧어지고, 부서질 때 그 올리브의 열매는 상처를 입게 되고, 그 몸이 터지게 되면서 아름다운 기름이 나오고 그 기름을 통해서 등대의 빛을 비추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빛이라고 말씀하는데, 예수님이 그냥 빛이 된 것이 아닙니다. 그는 죄악과 탐욕으로 어두워진 세상에 밝은 빛이 되기 위하여 그는 절구에서 빠지고 아주 잘게 부수어 지듯이 그런 일생을 사셨습니다.
그는 땀을 흘리셨습니다.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그리고 그는 피를 흘리셨습니다. 올리브 열매가 절구에서 찧어져 기름을 내듯이 예수님의 일생 동안 눈물과 땀을 흘리시고 십자가 위에서 피를 흘리시면서 죄악과 어두움을 밝힐 순수한 기름을 준비하셨던 것입니다. 기름을 짜는 듯한 모습이 여러 성경에 나옵니다. 몇 군데인가 찾아 보실까요? 누가복음 22:44절 말씀에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힘쓰고 애써 더욱 간절히 기도하시니 땀이 땅에 떨어지는 피방울 같이 되더라."
지금 기름을 짜고 있는 모습을 보십시오. 주님의 흐르는 땀이 마치 땅에 떨어지는 피 방울처럼 변하는, 마치 그 올리브유를 찧어서 기름을 만드는 과정을 눈앞에서 보는 듯합니다. 요한복음 19:34절 말씀입니다.
"그 중 한 군병이 창으로 옆구리를 찌르니 곧 피와 물이 나오더라."
우리 주님의 몸에서 물이 나오고 피가 나왔습니다. 우리도 불을 밝히기 위하여 온 몸과 마음이 올리브처럼 깨어지고 상하시면서 기름을 만드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을 기억하여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상처를 입으신 이유는 무엇입니까? 이사야 53장 5절 말씀입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우리들의 입은 모든 상처를 치유하시기 위해서 이렇게 상처를 입으신 것입니다.
괜찮은 한 사람을 소개하려고 합니다. 그는 여자입니다. 그는 흑인으로 태어났으며 부모가 원치 않는 임신을 해서 낳게 되었습니다. 그는 태어날 때부터와 자란 환경은 너무 가난했으며, 그는 보통 애들보다 훨씬 뚱뚱했습니다.
그는 13살 때부터 가까운 친척으로부터 지속적인 성폭행을 당해야 했으며, 열네 살에는 임신을 하기도 하였으며, 20대 때에는 마약에 빠지기도 하였습니다. 그의 인생은 상처로 가득한 자였고, 그 상처를 가지고 다른 사람들에게 상처를 줄 수 있는 다이너마이트와 같은 여인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여인의 손에는 성경이 들려 있었고, 또 한권의 책 ‘고난을 극복하는 흑인여성들의 강인한 삶을 다룬 소설’을 읽으면서 자신을 이겨낼 의지를 기르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지금은 ‘토크 쇼의 프리마돈나’로 추앙받으며, 배우로서, 영화와 텔레비전 프로그램 제작자로서, 자선가로서, 그리고 사업가로서 우리들 곁에서 실패를 극복한 산증인으로 서있습니다. 미국경제전문지 포브스지에 따르면, 지난 1년간 미국 TV방송 진행자 중에서 최고로 많은 돈을 버는 스타로 그녀를 꼽았습니다. 그는 바로 오프라 윈프리입니다. 그녀는 이렇게 말합니다.
“당신의 상처를 지혜로 바꿔라!”(Turn your wounds into wisdom!)
그에게 많이 있었던 상처를 가지고 그녀는 하나님께 나아가고, 책을 가진 손으로 나아갈 때 그의 삶은 달라지기 시작했습니다. 상처를 입어 인생을 포기하고, 낙담하며 사는 인생이 아니라 상처를 회복하면서 이제는 자신과 같은 사람들을 돕는 상처입은 치유자로서의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살다보면 상처도 많이 주고받고 여러 가지 실수도 저지르게 마련입니다. 이것을 ‘실패’ 라고 부르는 사람도 있지만 윈프리는 말하기를, ‘실패는 하나님이 잠깐만, 너는 지금 잘못된 방식으로 가고 있어’ 라고 말하는 방식의 하나라는 사실을 깨달았다고 하는 것입니다. 실패는 모든 것의 끝이 아니라, 새로운 지혜를 열어주는 기회인 것입니다.
둘째, 상처를 통해 등불을 켜야 합니다.
20절 말씀을 다시 읽도록 하겠습니다.
"너는 또 이스라엘 자손에게 명하여 감람으로 짠 순수한 기름을 등불을 위하여 네게로 가져오게 하고 끊이지 않게 등불을 켜되"
말씀에는 감람으로 짜낸 순결한 기름을 등불을 위하여 가져오면, 이제 두 번째로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그것은 등불을 켜는 것입니다. 등불을 켤 때 이렇게 찧어져서 만들어진 기름은 다시 불에 의해서 태워집니다. 그렇게 될 때 기름은 자신의 몸이 태워지는 것을 경험합니다. 그리고 자신의 모습이 없어지면서 이 등불의 불이 붙고, 이 붙었던 불은 그 순결한 기름의 태워짐을 통해 지속적으로 빛을 발하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서 자신이 죽으셨습니다. 자신의 물과 피와 기름까지 우리를 위해 다 주셨습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산 소망을 주셨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들은 이 예수님의 불을 켜야 합니다. 나의 상처가 있는 곳에 불을 켜서 보아야 합니다. 나의 심령에 죄악을 불을 켜서 보아야 합니다. 나의 가정에 불을 켜서 보아야 합니다.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불을 켜야 합니다. 성막 안에서 등불을 켤 때, 온 성막이 환해지듯이 우리의 마음에 빛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받아들일 때, 우리 마음속에 있는 죄악이 물러갑니다. 미움이 물러갑니다. 그래서 환하게 밝아지는 것입니다. 우리 가정에 예수님의 빛을 받아들일 때, 가정이 환하게 밝아집니다. 우리나라에 주님을 받아들일 때, 나라에 빛이 비추어질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빛이라고 무조건 빛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가짜 빛도 참 많습니다. 오직 순결한 감람나무로 만든 기름이라야 이것이 진짜 빛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그 분만 우리 삶 속에 빛이 된다는 사실입니다.
영국의 종족은 바로 영국의 원주민 앵글로 색슨족입니다. 이 종족은 원래 스칸디나비아 반도의 야만족이었습니다. 옷도 제대로 입지 않고, 싸움만 하는 바다의 해적과 같고, 아주 사나운 야만족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 복음의 빛이 이 앵글로 색슨족에게 들어갈 때, 그들이 빛을 보기 시작했습니다. 신사의 나라로 변했습니다. 그들은 위대한 족속을 이루었습니다. 19세기 빅토리아 왕족 시대에는 해지지 않는 제국을 건설하는 그런 자리까지 나아갔습니다.
독일도 처음에는 주변 나라보다 가난했습니다. 그러나 16세기에 마틴 루터를 통해서 성경을 번역하고 복음의 빛이 그 민중 속으로 들어가게 될 때, 독일 민족은 위대해 지기 시작했습니다. 음악, 과학, 철학, 법학의 세계적인 중심지가 되었습니다. 여러분, 우리의 몸도 빛을 받지 않으면 문제가 생깁니다.
지난 한 주일 동안 빛을 많이 받으셨을 것입니다. 사람이 빛을 받지 않으면 어떤 증상이 생깁니까? 멜라톤이라는 호르몬이 생성이 되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래서 몸이 가라앉고 삶의 의욕이 없고, 짜증만 나고, 죽고 싶은 마음만 생긴다고 합니다. 빛을 받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모릅니다. 빛을 받아야 활력을 얻습니다. 그래서 문을 닫아 놓고 자면 잠이 더 오게 되어 있습니다. 의욕이 점점 떨어지게 되어 있습니다.
정신병원을 가면 예전에는 어두운 곳에 넣어두고, 그래서 더욱 마음을 어둡게 하였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달라졌습니다. 그곳에 가면 가능하면 밝은 빛을 많이 받을 수 있도록 모든 것을 준비하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그렇게 할 때 사람들의 마음이 바뀌어지고 변화되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영혼도 참 빛이 되는 예수 그리스도를 받지 않으면 활력을 얻을 수가 없습니다. 우리의 심령에 그리스도의 빛이 켜지면 기쁨이 넘칩니다. 행복이 넘칩니다.
우리 가정에 예수 그리스도의 등불이 필요합니다. 복음의 등불이 필요합니다. 우리 사회에 예수님의 등불이 필요합니다. 여러분 돈은 절대로 빛이 아닙니다. 가짜 빛입니다. 돈이 오면 빛이 있을 것 같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돈 때문에 어두워지는 것을 우리는 볼 수가 있습니다. 권력이 빛이 될 수 없습니다. 명예도 빛이 아닙니다. 과학도 빛이 아닙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 그분이 우리의 빛이십니다.
독일에 가서 유학을 하던 남녀가 있었습니다. 너무 잘생기고 부족한 것이 없는 남녀였습니다. 둘이 결혼을 했습니다. 학위를 다 마치고 아주 행복한 모습으로 귀국을 했습니다. 한국에서 정착을 하여 좋은 직장을 얻었고, 모든 사람들이 부러워하는 일들을 하였습니다. 그런데 이들의 삶에 기쁨이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매일 부부 싸움을 하다가 마지막에는 "우리 서로 갈라서자." 라는 이혼을 결심하게 되었습니다.
이혼을 하려고 하는데 마침 남편이 유럽으로 6개월 출장을 받았습니다. 남편이 말합니다. "내가 6개월 뒤에 올테니 그때 우리 도장을 찍도록 하자."고 했고, "좋아요. 빨리 할게 뭐 있어."라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남편을 보내고 난 여인의 마음속에 캄캄함이 임했습니다. 절망적입니다. 기쁨이 없습니다.
그는 밤중에 빛나는 십자가를 보았습니다. 그리고 교회를 찾아가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예배에 참석하기 시작했습니다. 이상합니다. 교회 나가서 주님을 영접하고 예배를 드리는데 점점 마음이 밝아집니다. 머리가 밝아지기 시작합니다. 얼굴이 밝아지기 시작합니다. 6개월 뒤에 드디어 남편이 돌아왔습니다. 공항에서 남편을 만났습니다. 남편이 아내를 보자마자 눈이 휘둥그레집니다.
"아니, 당신 그 동안 무슨 일이 있었지? 왜 그렇게 얼굴이 환해졌는가?" 아무 말도 하지 않습니다. 차를 타고 가면서 한 마디 합니다. "여보, 나 교회 다녀요." "교회?" "여보, 우리 같이 교회 갑시다." 그리고 그 다음 주일부터 교회에 다니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그 부부가 어떻게 되었을까요? 도장을 찍었을까요? 찍었다면 이 귀한 설교시간에 이런 얘기를 하지 않았겠지요. 찍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자신과 같은 사람들이 있는지 살펴보고 그런 자들이 있다면 그런 분들을 돕는 사역을 하기 시작하셨습니다. 상처 입은 치유자의 모습입니다. 우리들의 고통의 모습이 우리를 통해서 아름다운 역할로 사용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빛만 들어오면 미움이 사라집니다. 절망이 사라집니다. 눈물이 사라집니다. 인생의 모든 것을 환하게 그 그리스도의 빛이 비추어 주시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등불을 높이 드십시오. 빛을 받으십시오. 그러면 어둠이 물러가게 될 것입니다. 우리 속에 있는 미움이 물러갈 것입니다. 우리 속에 있는 한숨이 물러가게 될 것입니다. 우리 속에 있는 절망과 좌절이 물러가게 될 것입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내 삶의 구석구석에 등불을 켜고 빛을 받으셔서 그리스도의 빛이 우리의 마음과 우리 가정의 삶을 구석구석을 밝히는 귀한 은혜의 계절 되시기를 바랍니다.
셋째, 성막의 불을 지켜야 합니다.
21절 말씀을 읽도록 하겠습니다.
“아론과 그 아들들로 회막 안 증거궤 안 휘장 밖에서 저녁부터 아침까지 항상 여호와 앞에 그 등불을 보살피게 하라 이는 이스라엘 자손의 대대로 영원한 규례이니라.”
본문의 말씀을 보면 아론과 그 아들들, 특히 제사장들이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그것은 저녁부터 아침까지 항상 여호와 앞에서 그 등불을 보살피는 일입니다. 그래서 한 번 붙은 불이 꺼지지 않도록 잘 보살펴야 함을 말합니다. 또 이렇게 하는 것은 “이스라엘 자손의 대대로 영원한 규례니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일단 불이 붙었으면 대대로 이어질 수 있도록, 영원히 이어질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등불을 보살필 수 있는 사람을 세우라는 것입니다.
이 빛은 나 혼자 만을 위한 빛이 아닙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이 귀한 은혜의 빛, 이것은 나 개인만을 위한 것이 아닙니다. 빛을 받은 사람은 마땅히 빛을 세상에 비추어야 합니다. 이웃에게 그 빛을 전달해 주어야 합니다. 여러분 내 개인과 가정이 그리스도의 빛을 받아들이는 것을 신앙의 출발이라고 한다면 내가 받은 빛을 다른 사람에게 비출 수 있으면 그는 성숙한 그리스도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마태복음 5장 16절에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같이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취게 하여 저희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세상 모든 사람을 향해서 빛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 해야 합니다. 이것은 우리의 사명입니다. 빛을 비추어야 되는 것입니다.
이티 할아버지, 채규철 할아버지에 대해 말하려고 합니다. 그는 1961년에 홍성에 있는 풀무학교에서 교사 활동을 시작하면서 농촌사회복지 운동을 시작하였습니다. 그러다 부족함을 느껴 1965년 덴마크로 2년 동안 농촌교육학을 공부하기 위해 유학을 떠났습니다. 그리고 한국에 돌아온 후 ‘바보 의사’로 유명한 장기려 박사와 함께 의료보험의 일종인 “청십자 의료조합”을 68년에 만들어 정신없이 일을 하고 있을 때였습니다.
그 때가 1968년, 서른 한 살의 젊은 나이에 자신이 타고 있던 차량에 불이 나는 바람에 전신에 화상을 입어 소생이 불가능하다는 가운데서도 27차례의 수술을 하여 살아납니다. 그렇지만 그의 모습은 예전의 모습이 아니었습니다. 사람의 모습은 갖추었지만 귀는 형체를 알아볼 수 없고, 코와 입도 제 모습이 아니었습니다. 한눈은 멀어 다른 짐승의 눈을 그의 눈에 넣었고, 양 손은 녹아내려 갈퀴 같아 보입니다.
사람들은 이런 채규철씨를 보면 세 번 놀랍니다. 너무나 심하게 일그러진 얼굴을 보고 놀라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당하고 쾌활한 행동에 놀라며, 평생을 바쳐 해온 일에 놀랍니다.
그가 다방이나 음식점에 들어서면 주인은 숨가쁘게 달려와 얼른 100원짜리 동전을 쥐어주며 마구 밀어냅니다. 흉측한 모습이 싫고 거지일 수도 있으니 왜 안그러겠습니까? 그렇지만 그는 태연히 동전을 받은 후 자리에 앉습니다. 그는 손님이기 때문입니다. 그는 “보이지 않는 눈으로는 마음을 보고 귀는 안경을 걸칠 수 있을 만큼 남아있으니 얼마나 좋으냐”며 잔뜩 오그라진 손을 사람들에게 내밉니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이러한 외모 때문에 ‘이티 할아버지’라는 별명을 얻게 되었습니다.
그처럼 당당해질 수 있을 때까지 겪은 심적 고통은 이루 다 말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하늘을 원망하고 사람까지도 미워했지만 그래도 아직 뭔가 할 수 있음을 깨닫곤 깊은 수렁 속에서 빠져나왔던 것입니다.
그는 죽기 전까지 꿈꾸는 일을 하였습니다. 민간의료보험의 효시인 청십자의료보험조합운동을 다시 시작하고 간질환자의 재활을 위한 장미회를 만들었으며, 소외된 이웃을 위한 한벗회를 만들어 봉사활동을 했습니다. 그리고 여러분들이 너무 잘 아는 아동교육의 대안학교인 두밀리자연학교를 1986년에 개설했습니다. 숲이 교실이며 운동장이고 냇가의 물고기, 들풀과 밤하늘의 별이 선생인 이 학교에 어린이들이 와서 자연과 하나되는 시간을 갖게 하는 것입니다.
‘ET 할아버지’ 채규철 교장. 외계인 같은 몰골을 보며 아이들이 붙였지만 그 스스로도 ‘이미 타버린 사람’이라며 별명을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처음엔 놀라 도망가다가도 이내 스스럼없이 다가와 자연을 배우고 닮아가는 아이들을 사랑했기 때문입니다. ‘얼짱’ ‘몸짱’이 판치는 세상에서 얼굴을 잊고 내면의 성숙함으로 ‘이슬처럼 티없는’ 봉사와 희생정신을 실천하며 40여년 한 길을 걸은 사람. 그가 아름다운 69세의 인생을 접었습니다. 그는 상처입은 자였지만 이 상처를 통해서 더욱 당당하게 빛을 비취는 것입니다. 그로 인하여 아름다운 등불이 켜지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는 세상의 빛으로 사셔야 합니다. 아론과 그 아들들이 성막의 등불을 늘 보살피듯이 우리들도 복음을 힘써 전해야 합니다. 복음의 등불을 높이 들고 복음을 전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계속 전도를 해야 주님의 빛이 온 세상을 밝하게 됩니다. 주님의 사랑이 필요한 이웃들에게 사랑의 등불을 높이 들고 비출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 세상은 상처 입은 자들이 너무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상처에 그리스도의 빛이 비췰 때 하나님께서 이들의 모든 상처를 치유하십니다. 그 삶에 하나님의 밝은 빛이 더 아름다운 은혜들로 채워주십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참된 빛인 것을 고백합시다. 주님만이 이 세상의 죄악과 절망을 밝힐 빛이십니다. 어둠과 미움이 가득한 우리의 마음속에 예수 그리스도의 등불을 켭시다. 이 시간 우리 속에 미움이 있습니까? 절망이 있습니까? 좌절이 있습니까? 그리스도의 빛을 받아 우리 속에 있는 모든 미움과 죄악과 절망들이 다 물러가게 되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의 사랑의 빛을 밝혀 주는 사순절이 되시기 바랍니다.
꺼져가는 등불
출 27:20-21 / 엄기호 목사
인생에 대하여 이사야는 ‘메뚜기 같은 존재’(사 40:22), ‘구더기 같고, 지렁이 같은 존재’라고 했고(사 41:14). 욥기에서는 인간을 ‘한 번의 호흡에 비유’했으며(욥 7:7), 시편 기자는 ‘그 호흡이 끊어지면 인간은 흙으로 돌아가는 허무한 존재’라고 하였습니다(시 146:4). 이 세상에는 연약한 것들이 많이 있지만 그 중에 심히 연약한 것은 우리 인생들입니다. 모든 인생은 연약하기가 그지없습니다. 한낱 티끌과 같은 존재입니다. 실로 인생은 꺼져가는 등불과 같은 존재라 할 수 있습니다.
성경은 빛에 대해서도 많이 말씀하고 있습니다. 요한일서 1장 5절에는 ‘하나님’을 빛이시라고 말씀하였고, 요한복음 1장 9절에서는 ‘그리스도’를 참 빛이라고 말씀했으며, 마태복음 5장 14절에는 ‘믿는 성도’를 빛이라고 했습니다. 또 마태복음 4장 16절에서는 ‘구원의 복음’을 빛이라, 시편 97편 11절에는 ‘의인을 위하여 빛을 뿌린다’, 잠언 13장 9절에는 ‘의인의 빛은 환하게 빛난다’라고 말씀했습니다.
이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에게는 빛이 필요하고 등불이 필요합니다.
등불의 필요성
제사 진행을 위해 필요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기적적인 도움으로 출애굽을 하여 광야에 거할 때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시내산으로 부르셨습니다. 그곳에서 하나님은 모세를 통하여 성막을 지으라고 명령하셨는데 그 성막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고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런데 이 성막 안에는 창문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세상의 빛이 들어올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기에 성막 안에 등대가 없으면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고, 볼 수도 없었습니다. 등불만이 제사장들이 일할 수 있는 조명이 되었던 것입니다.
밤길을 안내할 때 쓰여졌습니다.
옛날에는 밤에 어떤 일을 하기 위해서, 혹은 밤에 길을 가기 위해서 등불을 켜들고 다녔습니다.
오늘날 이 세상은 어두움에 덮여 있습니다. 사회와 경제와 정치가 캄캄함으로 가리워져 있습니다. 인간의 생각과 지식과 과학이 혼돈과 어두움에 지배를 받고 있습니다. 어린아이들로부터 청소년, 어른에 이르기까지 어두움에 휩쓸려 있습니다. 이 세상은 실로 등불이 필요한 시대입니다. 성령의 등불, 하나님의 빛이 없으면 방황하게 되고 헤매게 되고 혼돈과 무질서로 어지럽기 때문입니다.
파숫꾼이 파수를 볼 때에도 등불을 켜놓았습니다.
옛날에는 도시의 성곽마다 높은 망루를 세워놓고 교대하면서 성을 지키는 파숫군이 있었는데 불이 없으면 파수를 제대로 볼 수가 없습니다. 적의 동태를 살피고, 적이 쳐들어오는지, 원수가 어디쯤 왔는지 알 수 있고 또 아군들에게 상황을 전할 때에도 등불이 필요했습니다.
오늘날 우리의 원수 마귀를 성령의 능력으로 대적하고, 우리의 믿음을 방해하는 죄를 물리치기 위해서 성령의 불빛이 우리에게는 필요합니다.이 세상은 빛이 있어야 생명이 살 수 있고, 빛이 있을 때 모든 무질서와 흑암이 사라집니다. 우리의 마음과 영혼에 빛이 없으면 살아갈 수가 없습니다. 빛이 없는 인생은 결국 인격과 삶에 파선을 당하여 좌절과 절망과 낙심 가운데 빠져 들어가고 말 것입니다. 예수님은 온 세상을 밝혀주시는 빛의 등대이시며, “세상의 빛”이십니다(요 9:5). 그 빛을 받은 자만이 이 세상에서 빛을 발할 수 있습니다.
꺼져가는 원인
성경에서 불은 늘 성령을 상징했습니다. 우리는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 뜨거운 열심을 가지고 주님의 일을 감당해야 합니다. 성령의 불이 꺼진 썰렁하고 냉랭한 가슴으로는 일을 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등불이 왜 꺼져갑니까?
기름이 모자라서 꺼져갑니다.
성막 안의 등대에는 항상 기름을 가득 채워야 했습니다. 등에 기름을 채워야 한다는 것은 우리들이 성령으로 충만해야 함을 의미합니다. 등에 항상 기름이 가득 채워져야 하듯이 성도는 항상 성령으로 충만해야 합니다. 사람은 하나님과 함께 있을 때만이 존재가치가 있고, 예수님이 우리 중심에 계실 때문만이 살 수가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성령으로 충만할 때만이 사는 역사, 기적의 역사가 일어날 것을 믿습니다.
심지가 다 타서 꺼져갑니다.
심지가 완전히 타버리면 불똥이 생기면서 불빛은 점점 약해지고 사그라들고 맙니다. 신앙에도 불똥은 금물입니다. 교만의 불똥, 불평불만의 불똥, 혈기의 불똥, 불순종의 불똥은 신앙생활을 훼방하는 방해꾼입니다. 불똥 신앙은 성령충만하지 않은 삶입니다. 불똥 신앙은 나도 괴롭고, 다른 사람도 괴롭힙니다. 다른 사람의 믿음을 방해하는 아주 나쁜 요소입니다.
다윗은 “나의 구원의 하나님이시여 나를 버리지 말고 떠나지 마옵소서”(시 27:9)라고 기도했습니다. 성령께서 나를 떠나기 전에, 성령께서 나를 버리기 전에, 그래서 모든 은사를 잃어버리고, 은혜를 다 태워버리기 전에 말씀으로 충만하고, 항상 기도에 힘쓰고, 열심히 충성, 봉사, 헌신하게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사람들이 졸고 있기 때문에 꺼져갑니다.
구약의 제사장들은 등잔불을 항상 정리해야 했습니다. ‘정금 등대의 위치는 올바르게 놓여 있는지’, ‘불똥 집게와 불똥 그릇은 제대로 정돈되었는지’, ‘심지가 너무 많이 나와 그을음은 나지 않는가?’, ‘심지가 너무 들어가 꺼지려고 하지 않는가?’, ‘기름은 제대로 공급되고 있는지?’ 제사장들은 아침저녁으로 등대를 살펴야 했습니다.
마찬가지로 직분자들은 성도의 형편을 잘 살펴서 영적진단을 바르게 하고 언제나 등불을 밝게 비출 수 있게 해야 합니다. 낙심하여 들어간 심지는 격려로 올려주고 너무 올라간 교만의 심지는 책망으로 내려주고, 불똥이 생긴 심지는 말씀으로 잘 다듬어주고, 졸고 있는 심지는 기도로 깨워주어야 합니다. 이렇게 할 때 등대는 밝고 환한 빛을 발할 수 있습니다.
꺼져가는 모양
어둡습니다.
성막의 등대는 밤은 밤대로, 낮은 낮대로 불이 항상 켜있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성막 안은 밤이고 낮이고 빛 한 점 없이 캄캄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등대만 있고 불이 없는 등대는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교회가 빛을 발하지 못하면 그 교회는 아무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작은 등대가 되어 내 가족에게 그리스도의 빛을 발해야 합니다. 우리 이웃에게, 이 땅에 그리스도의 빛을 발해야 합니다.
악취가 납니다.
성령의 불이 꺼진 신자, 믿다 그만둔 사람, 그처럼 추한 것이 없습니다. 불이 꺼진 신자는 그리스도의 향기가 아닌 사람냄새를 풍기고, 교만냄새를 날리고, 죄의 냄새를 냅니다. 성령의 불이 꺼져 악취를 풍기는 사람은 결국 저주와 멸망을 당하고 맙니다.
열이 식어져갑니다.
성소나 지성소에는 의자가 없기 때문에 앉을 수도 없고, 쉴 수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제사장들은 늘 서서 일해야 했습니다. 서서 진설병을 먹어야 하고, 서서 향을 살라야 하고, 서서 불을 밝혀야 했습니다. 우리는 받은 사명을 위해 서서 열심으로 봉사하고, 서서 열심으로 헌신하고, 서서 열심으로 전도해야 합니다. 그래야 신앙이 식지 않습니다.
끄지 않으시는 하나님
하나님은 우리가 비록 부족하고 연약해도 오래 기다리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의 세계는 인내의 세계이십니다. 하루를 천년같이 천년을 하루같이 길이 참고 기다리시는 하나님은 인내의 하나님이시며, 오래참으심의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오래 참으시는 사랑입니다.
하나님의 도움은 결코 더디지 않고, 결코 늦추지도 않으십니다. 우리가 너무 성급해서 하나님이 도와주실 때까지 기다리지 못했을 뿐입니다. 신앙생활의 모든 부분에 인내가 필요합니다. 기도에도 인내가 필요합니다. 사랑에도 인내가 필요합니다. 전도와, 봉사에도 다 인내가 있어야 합니다. 인내가 없는 승리가 없고, 인내가 없는 복이 없습니다. ‘인내가 없이는 구원을 이룰 수 없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우리와 함께하여 주셨습니다.
인간은 미련하고 둔하여 내일 일을 알지 못합니다. 잠깐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에 불과한 것이 인간입니다. 그런데 이런 쓸모 없는 인간에게 하나님은 사랑의 관심을 가지시고, 크게 여기시고, 마음을 쓰시고, 아침마다 권장하시고 분초마다 시험하고 계십니다. 우리 인생들에게 한없는 자비를 베풀어주셨습니다.
우리의 죄를 따라 심판하지 않으시고, 우리의 죄악을 따라 갚지도 않으십니다. 창조자를 알아보지 못하고, 이성 없는 짐승처럼 사는 존재요, 허무하고 덧없는 존재이지만 하나님은 영광과 존귀로 관을 쓴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 되게 하셨습니다(벧전 2:9). 그리고 그 옛날 불안한 광야 길을 직접 인도하셨던 것처럼 우리들을 인도하고 계십니다. 어두움에 있는 사람들을 생명의 빛으로 인도하고 계십니다.
주님은 꺼져가는 심지처럼 절망과 낙심과 좌절과 어두움에 있는 우리 인생들을 다시 회복시켜 큰 횃불로 만들려고 하십니다.
불티같은 인생을 다시금 고쳐주시려고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러므로 성령으로 충만합시다. 우리 모두 성령으로 충만하여 일어나 빛을 발합시다. 그래서 예루살렘과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나아가는 복음의 증인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성령으로 충만할 때, 기도로 충만하고 말씀이 충만하고 은혜가 충만한 법입니다. 그러면 교회는 성장, 부흥할 것이요, 민족은 부강할 것입니다. 주님 안에서 심지 갈고 불을 돋우어 서울과 경기도를 비추고 이 민족을 생명의 길로 인도합시다.